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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즐거운 ㅣ 산지니시인선 11
표성배 지음 / 산지니 / 2015년 4월
평점 :
세수를 한다
세수를 한다
세수하고 돌아서면 또 세수하고 싶다
물기를 닦고 거울을 보면 저 자신 없는 얼굴,
씻고 씻어내도 남아 있는 어두운 얼룩들
박박 밀고 뽀득뽀득 문질러도 햇살이 비집고 들어올 틈
하나 없는 얼굴,
무겁고 침침한 커튼 같은 벽을 걷어 내는 일은 세수를 하
는 일
희미한 등불 아래 벽거울 앞에 두고 세수를 하고 또 한다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뜨거운 피가 솟듯 피부가 발개지도
록 빡빡 문지른다
세수하지 않은 얼굴을 누가 볼까 세수를 한다
세수하지 않고는 한 발짝도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듯
세수를 한다
손발을 씻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얼굴을 씻는 일이기에
세벽부터 공을 들인다
저이의 얼굴은 얼마나 자주 세수를 했기에 저리도 반짝
당당할까
반질반질 광채가 날까
신호위반 속도위반 한 번 하지 않았다는 듯 코가 우뚝하다
어머니의 손을 오래오래 지긋이 잡아 주었다는 듯 눈매가
선하다
이런 얼굴들을 볼 때마다 나는 더 주눅이 든다
아이들 어깨가 처지는 이유가 세수하는 일에 있다는 듯
아이들을 다그치느라 입은 쉴 새 없다
씻다가 씻다가 피부가 벗겨지더라도 폭포 아래서 피를 토
하고 득음을 얻듯이
오늘도 나는 세수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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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 가을이다
가을이다 아니
귀뚜리가 우는 것을 보니 가을이다
시집을 살짝 펼치면 파란 하늘이 보이겠지 파란 하늘에
빨랫줄 같은 흰 선을 팽팽하게 당겨두고 비행기 한 대 날아
나오겠지
조는 듯 빨랫줄에 앉아 있던 고추잠자리 떼들 왕창 비행기
를 따라 나와서는 그 얇은 날개를 서로 부딪칠 듯 가을이다
붉게 물드는 단풍잎을 좀 구경하다 심심하면 심심해서
가을이다 가을이니까
시집을 펼쳐놓고 좀 멍하게 앉아 있어도 좋겟지
가을은 좀 느슨해도 괜찮으니까
코스모스 길을 달리는 자전거 한 대 있으면 더 좋겠지
멀리 산 우듬지에는 파란 하늘 흰 구름 몇 걸려 있고, 자전
거 긴 머리카락 바람을 가르며 아! 나도 저 머리카락을 따라
코스모스 길을 달려가겠지 달려가다 달려가다 머리카락 사
이로 해는 지고
어이쿠, 이런!
시집을 펼쳐놓고는 가을이다 가을이라
그만 덮는 것을 잊어버렸지 뭡니까
아직도 그 시집 속에서 비행기가 고추잠자리가 귀뚜리가
오, 곱게 물든 단풍이 그래요
코스모스 길만은 살짝 도로 집어넣어 자전거 긴 머리카락
이 가을이 다 가도록 좔좔 체인 소리 영영 시집을 덮지 못하
겠어요
내가 시집을 덮지 않으면 영영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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