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히 즐거운 산지니시인선 11
표성배 지음 / 산지니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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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고 싶어라

 

 

 

나 노란 나비 날개 같은 비옷 입고 손 흔들고 싶어라

 

 

나 노란 병아리 다리 같은 장화 신고 손 흔들고 싶어라

 

 

나 비옷 속에 노란 풍선 같은 가방 메고 손 흔들고 싶어라

 

 

흔들고 싶어라 눈앞이 노래지도록 흔들고 싶어라

 

 

  나 창문이 노란 버스 맨 뒤 좌석에 앉아 오래오래 손 흔드

시던 어머니, 어머니가 안 보일 때까지 나도 흔들고 싶어라

 

 

그렇게 손 흔들다 보면

 

 

발바닥이 온몸이 은행잎처럼 노랗게 물들 때까지

 

 

서 계셨을 어머니,

 

 

(다만 청소부 아저씨는 좀 쉬세요 가로등도 도로도 달리는 차들도

거리가 온통 노랗게 물들 때까지 오래오래 손 놓고 쉬세요)

 

 

 

어머니, 검은빛 우산 위에 떨어지는 노란색 은행잎처럼 손

흔들다 보면

 

 

 

      은행잎을 다 떨구고도 노랗게 서 있는 은행나무, 은행나

무 위에 까치집, 까치집에 까치도 까치 위에 하늘도 그래, 하

늘에 사시는 하느님도 노랗게 물들 때까지

 

 

 

    나 어머니처럼 종일 서서 손 흔들고 싶어라

 

-42~4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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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6 19: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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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9 18: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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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즐거운 산지니시인선 11
표성배 지음 / 산지니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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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수를 한다

 

 

 

 

 

세수를 한다

 

 

 

세수하고 돌아서면 또 세수하고 싶다

 

 

 

물기를 닦고 거울을 보면 저 자신 없는 얼굴,

 

 

 

 

씻고 씻어내도 남아 있는 어두운 얼룩들

 

 

 

  박박 밀고 뽀득뽀득 문질러도 햇살이 비집고 들어올 틈

하나 없는 얼굴,

 

 

 

  무겁고 침침한 커튼 같은 벽을 걷어 내는 일은 세수를 하

는 일

 

 

 

   희미한 등불 아래 벽거울 앞에 두고 세수를 하고 또 한다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뜨거운 피가 솟듯 피부가 발개지도

록 빡빡 문지른다

 

 

 

  세수하지 않은 얼굴을 누가 볼까 세수를 한다

 

 

 

  세수하지 않고는 한 발짝도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듯

세수를 한다

 

 

 

  손발을 씻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얼굴을 씻는 일이기에

세벽부터 공을 들인다

 

 

 

  저이의 얼굴은 얼마나 자주 세수를 했기에 저리도 반짝

당당할까

 

 

 

  반질반질 광채가 날까

 

 

 

  신호위반 속도위반 한 번 하지 않았다는 듯 코가 우뚝하다

 

 

 

  어머니의 손을 오래오래 지긋이 잡아 주었다는 듯 눈매가

선하다

 

 

 

  이런 얼굴들을 볼 때마다 나는 더 주눅이 든다

 

 

 

  아이들 어깨가 처지는 이유가 세수하는 일에 있다는 듯

 

 

 

  아이들을 다그치느라 입은 쉴 새 없다

 

 

 

  씻다가 씻다가 피부가 벗겨지더라도 폭포 아래서 피를 토

하고 득음을 얻듯이

 

 

 

  오늘도 나는 세수를 한다

 

 

 

-36~38페이지

 

영영 가을이다

 

 

 

가을이다 아니

 

 

귀뚜리가 우는 것을 보니 가을이다

 

 

     시집을 살짝 펼치면 파란 하늘이 보이겠지 파란 하늘에

빨랫줄 같은 흰 선을 팽팽하게 당겨두고 비행기 한 대 날아

나오겠지

 

 

  조는 듯 빨랫줄에 앉아 있던 고추잠자리 떼들 왕창 비행기

를 따라 나와서는 그 얇은 날개를 서로 부딪칠 듯 가을이다

 

 

  붉게 물드는 단풍잎을 좀 구경하다 심심하면 심심해서

 

 

  가을이다 가을이니까

 

 

 

  시집을 펼쳐놓고 좀 멍하게 앉아 있어도 좋겟지

 

 

  가을은 좀 느슨해도 괜찮으니까

 

 

  코스모스 길을 달리는 자전거 한 대 있으면 더 좋겠지

 

 

  멀리 산 우듬지에는 파란 하늘 흰 구름 몇 걸려 있고, 자전

거 긴 머리카락 바람을 가르며 아! 나도 저 머리카락을 따라

 코스모스 길을 달려가겠지 달려가다 달려가다 머리카락 사

이로 해는 지고

 

 

   어이쿠, 이런!

 

 

   시집을 펼쳐놓고는 가을이다 가을이라

 

 

   그만 덮는 것을 잊어버렸지 뭡니까

 

 

  아직도 그 시집 속에서 비행기가 고추잠자리가 귀뚜리가

오, 곱게 물든 단풍이 그래요

 

 

   코스모스 길만은 살짝 도로 집어넣어 자전거 긴 머리카락

이 가을이 다 가도록 좔좔 체인 소리 영영 시집을 덮지 못하

겠어요

 

 

  내가 시집을 덮지 않으면 영영 가을이다

 

 

-39~4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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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즐거운 산지니시인선 11
표성배 지음 / 산지니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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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겠네

 

 

 

 

 

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네

 

 

시(時) 한편 쓰는 심정으로 심어야겠네

 

 

한 쪽으로 약간 기울게 심어야겠네

 

 

햇볕이 한 쪽으로 돌아간다고 심어야겠네

 

 

바람이 한 쪽에서만 분다고 심어야겠네

 

 

가끔 편지가 는개처럼 와 주었으면 하고 심어야겠네

 

 

기다리는 마음도 함께 심어야겠네

 

 

장장 애채가 지붕처럼 우거지면 좋겠네

 

 

그런 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네

 

 

당신이 그 나무 아래 잠시라도 머물러 주기라도 한다면

 

 

참 좋겠네

 

-14~15페이지

 

 

마지막 말 같은

 

 

 

한 나무가 한 나무에게 손을 건네요

 

 

잡을 듯 잡을 듯 손을 건네요

 

 

달빛 아래 그림자처럼 슬쩍 손을 건네요

 

 

길지도 짧지도 않은 괘종소리처럼 손을 건네요

 

 

내리막길엔 속도가 좀 불어 위험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손

을 건네요

 

 

다 내려가기 전에 갱상도 사내들처럼 툭 손을 건네요

 

 

마지막 말 같은 손을 건네요

 

 

사랑해요 손을 건네요

 

 

단 한 번쯤은 일방적으로 바람처럼 손을 건네요

 

 

사랑해요 손을 건네요

 

 

-26~27페이지

 

바위에 살짝 엉덩이를 걸쳐봐

 

 

 

 

산을 오르다 바위에 살짝 엉덩이를 걸쳐봐

 

 

가만히 숨 쉬고 숨 내뱉는 동안 바위의 어깨가 살짝 들썩

이는데

 

 

 

  바위를 감싼 이끼는 나의 이불처럼 포근하여 바위가 내뱉

는 숨소리 따라 내 숨도 자지러지는데

 

 

 

  스르르 잠들 것만 같은데

 

 

   멀리 무뚝뚝하지만 튼실한 어깨를 가진 바위의 아침이 보

이고 바위처럼 단단한 어깨를 가졌던 내 아버지가 보이고

 

 

  따라, 앞산 이마가 가물 잠잠해지는데

 

 

  저만치 새 한 마리 날아가고 한참, 산꿩 울음소리 따라 들

리고 한참, 한참을 그렇게 해 지는 앞산만 바라보는데

 

 

바위에 살짝 엉덩이를 걸쳤을 뿐인데

 

 

-28~29페이지

 

 

 

 

 

 

꽃이 진 벚나무 아래를

 

 

파란 잎들로 뒤덮인 벚나무 아래를

 

 

꽃 피었던 벚나무를 기억하지 못하는 벚나무 아래를

 

 

   잎이 지고 벌거벗은 민둥산처럼 겨울을 나고 다시 꽃이 핀

벚나무 아래를

 

 

  꽃의 그림자만 기억하는 네모난 보도블록 그 틈새를

 

   

  개미들이 줄지어 가는 벚나무 아래를

 

 

  소나기 한 줄기 확 쏟아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바싹 마른

벚나무 아래를

 

 

  시간마저 잊어버린 백발의 부부가 한참 그늘을 쐬고 있는

벚나무 아래를

 

 

  중국집 배달 오토바이가 쌩앵 바람처럼 지나가는 벚나무

아래를

 

 

  그 벚나무 아래를 떠나지 못하는 벚나무의 자손들이 마당

을 쓸고 화단을 가꾸기도 하고 바람이 머물다 간 자리를 깨

끗이 정돈하기도 하고 낮잠을 즐기는 게으른 시간을 깨워보

기도 하는 벚나무 아래를, 벚나무 아래마저 기억하지 못하

는 벚나무 아래에

 

 

  꽃이 피고 꽃이 언제 졌냐는 듯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처럼

 

 

  당신과 한 살림 차리고 싶은 이런 집 어디 있을까요?

 

-32~33페이지

 

좋은 시들이 참 많아요~

많이 올리고 싶었지만 천천히~

행복하게 즐독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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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거기 있다 서정시학 서정시 132
이우걸 지음 / 서정시학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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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거기 있다

- 부곡리

 

 

 

쓰다 둔 수저가 아직도 거기 있다

 

 

 

내 꿈의 일기장이 아직도 거기 있다

 

 

 

어머니 반짇고리가 아직도 거기 있다

 

 

-19페이지

 

토란잎

 

 

 

물방울을 이고 있는 토란잎이 있다

 

 

 

우주를 이고 있는 토란잎이 있다

 

 

 

그곳에 햇살이 내려

 

 

 

아침이 눈부시다

 

 

-20페이지

 

나이테

 

 

 

 

겉으로 태평스런 나무의 속살에도

 

 

 

지나간 시간들이 파편처럼 박혀 있다

 

 

 

공으로 건너갈 길이란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22페이지

 

산이 고맙고

 

 

 

 

   귀 안 막고 들어주는 산이 그저 고맙고, 눈 안 감고 봐

주는 산이 그저 고맙고

 

 

 

  마지막 육신도 거둬

 

 

 품어주는

 

 

 

 산이 고맙고...

 

 

-24페이지

 

그늘

 

 

 

 

세상 모든 그늘이란

 

 

 

그 사물의 어머니인 것

 

 

 

빛이었던 하루의 외롭고 아픈 상처를

 

 

 

안으로 쓰다듬어서

 

 

 

다시 내일을

 

 

 

일군다

 

 

 

-26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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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거기 있다 서정시학 서정시 132
이우걸 지음 / 서정시학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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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아직도 내 사랑의

 

 

 

주거래 은행이다

 

 

 

목마르면 대출받고 정신 들면 갚으려 하고

 

 

 

갚다가

 

 

 

대출받다가

 

 

 

대출받다가

 

 

 

갚다가....

 

 

-33페이지

 

해질 무렵

 

 

 

아침에 꽃이 피었다

 

 

맑은 이슬이 맺히었다

 

 

맺혀 있는 이슬 사이로 검은 바람이 지나갔다

 

 

 

 

이윽고 꽃잎 하나의

 

 

세상이 지고 있었다

 

 

-38페이지

 

 

모닝커피

 

 

 

   돌아보면 바람 많고 눈, 비 오는 세상 속에서, 살피고

또 살펴도 가파른 오늘을,

 

 

 

  곰곰이 헤아려보려 온기 도는 너는 든다

 

 

-45페이지

 

계단

 

 

 

 

지금 내 앞에

 

 

 

계단이 놓여 있다

 

 

 

전부터 있었다 해도 처음 마주친 것

 

 

 

수없이 헤쳐가야 할

 

 

 

생애의

 

 

 

십자로 같은,

 

 

-49페이지

 

엽서

 

 

 

 

수국이다, 문득 돋아난 그 사람 목소리는

 

 

화엄사 언저리로 한 채 민가의 밤이 오듯

 

 

꽃잎을 열고 깊어도

 

 

파적破寂할 수 없는 하늘

 

 

-54페이지

 

희망

 

 

 

길이 가파른 곳엔

 

 

 

반드시 샘물이 있다

 

 

상처가 깊을수록 깊어지는 사랑이 있듯

 

 

어둠을 뚫고 빛나는 저 별빛의 일획으로

 

 

-6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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