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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
마르얀 사트라피 지음, 박언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19년 6월
평점 :
이스라엘과 이란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시국이라 편한 마음으로 읽지는 못했다. 원래는 얼마 전 다 읽지 못하고 반납한 “아주 짧은 합스부르크사”를 다시 빌리러 갔으나 대출중이었고, 다른 책들도 여럿 대출중이라 “페르세폴리스”까지 순번이 넘어왔다.
책은 350쪽이라는 실제 쪽수에 비해 심히 두껍고 무겁다. Gombrich의 “서양미술사”가 1kg 남짓인데, “페르세폴리스”는 1.4kg를 훌쩍 넘겼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리 된 원인은 두꺼운 내지 덕분이었다. 이렇게 두껍고 빳빳한 종이를 쓰니 쪽수에 넘치는 무게와 두께를 가지게 된 것이다.
책의 외형에 대해서는 마무리하고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비극 그 자체였다. 이란 이슬람 혁명은 그 시작부터 정상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없었다. 이슬람과 사회주의는 공존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란 혁명 역시 기존의 거대 혁명의 뒤를 똑같이 밟았다는 점에서 Pitzpatrick의 말을 다시 빌려올 수밖에 없다.
“…혁명 내부에는 혁명이 끝날 때 자기 자녀를 잡아먹게 만드는 취약한 내적 논리가 분명히 존재하는 듯하다. 러시아혁명과 그 이후의 집단화 과정에서 보듯이 공포가 더 많은 공포를 낳는다는 논리도 존재한다.”
(Pitzpatrick, 아주 짧은 소련사, pp.122-123)
그렇게 이란 혁명은 자신의 자녀라 할 수 있는 여성들, 사회주의자, 공화주의자, 세속주의자들을 끝없이 잡아먹었다. “페르세폴리스”에서는 이러한 비극을 자세히 보여준다.
마르지의 삶은 이란에서도, 오스트리아에서도, 다시 돌아온 이란에서도 비극이었다. 말만 공화국이지 사실상은 신정 독재국가인 이란에서는 당연히 삶이 비극일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유학의 부작용을 보여준다. 어린 나이의 자녀를 해외에 홀로 유학보냈을 때 일어나는 모든 최악의 상황들을 마르지는 모두 경험한다. 한 블로거가 이 책을 ‘육아서’로 읽었다는 데에 공감했다. 마르지가 비이슬람권 출신이었다면, 혹은 가족이 같이 떠났더라면 경험하지 않았을 사고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나마 그의 삶을 지탱해준 것은 가족들이었다. 특히 결혼을 결심했을 때 마르자의 아버지가 레자에게 했던 세 가지 말(이혼권 허용, 유럽 유학, 행복할 때까지만 같이 살 것)은 이 책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이었다. 이런 아버지가 있었기에 마르지가 이 비극의 망망대해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작년 “한국고전문학사 강의1-3(박희병, 2023)”부터 느낀 것은 근본주의(자)를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근본주의(자)들이 항상 불행과 비극의 시작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