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떼가 나왔다 - 제1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안보윤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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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한국 문단에 등장한 어린 작가들은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의 소설에 감탄하는 사람은 많다. 독자들도, 평론가도, 심지어는 문단의 원로들도.

어린 작가들의 소설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부분은 과연 무엇일까. 물론 문장이나 구성 면에서 기본기는 다져 놓았다. 그러나 그런 기본기만으로 누군가를 놀라게 하거나 감동시킬 수는 없다.

그들 소설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장 강력한 힘, 매력은 상상력이다. 불온한 듯 하면서도 기발한 상상력! 기존의 관념들을 뒤엎을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풋풋한 상상력들!

그 상상력이 있기에 다소 거친 문장들과 헐거운 듯한 구성이 완성도 있는 소설로 옹골차게 다져질 수 있는 것 같다. 평론가들은, 또 독자들은 그들의 상상력에 반한다. 어디로 튈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정체불명의 상상력들! 그것이 바로 어린 작가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것 같다. 「악어떼가 나왔다」로 10회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한 안보윤도 그런 무기를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은 기존의 소설 공식을 무너뜨리며 제멋대로 흘러간다. 제멋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각기 다른 구멍으로 빠졌던 당구공들이 결국 같은 공간 속에서 하나의 삼각형을 이루며 얌전히 모이듯 제각각 따로 노는 듯한 이야기와 인물들이 후반으로 갈수록 하나의 틀을 만들고, 하나의 색채를 띠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물 속에서 시체가 떠오르듯 별안간 놀라운 반전이 펼쳐진다. 반전과 함께 소설은 신속하게 ‘정리 단계’에 들어간다. 아무렇게나 흩뿌려 놓은 쌀알들이 하나의 괘를 이루고 한 인간의 운명을 담아내듯 장황하게 펼쳐져 있던 사건들이 모두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명쾌한 궤적을 그린다. 그 뚜렷한 궤적은 새로운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하나의 공약수가 되는 것이다. 여러 이야기와 인물들 속에서 최종적으로 묶여지는 하나의 공약수! 그 공약수는 새로운 목소리를 낸다. 아니 새롭다기 보다 더 크고 강렬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 목소리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작가의 목소리이자 주제가 될 것이다. 독자는 흥미진진한 사건들에 흠뻑 취했다가 사건이 정리되는 시점에서 작가의 강렬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처음부터 철저하게 계산된 사건과 스토리를 작가는 가장 눈에 띄는 방법으로 재구성하여 독자들에게 내보인다. 가장 눈에 띄는 방법이란 가장 강력한 흡인력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여기에 작가만의 상상력이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 대단한 상상력의 힘이 흡인력을 최대치로 이끌어 올린다. 작가의 기발하고 다채로운 상상력에 빠져드는 순간 책장은 영화 필름처럼 파르륵, 빠르게 넘겨지고 독자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역동적인 재미와 감동을 느끼게 된다.

이 소설이 특히 마음에 들었던 것은 공포스런 사건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라면 공포소설로 분류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이의 몸에 문신을 놓고, 사람을 죽여 토막내고, 자신의 다리를 잘라내고. 그리고 강의 수면 위로 시체들이 무수히 떠오른다.

어린 여자 작가가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 내고 이렇게 자극적인 방법으로 풀어낼 수 있었는지 놀랍고 반가울 따름이다. 작가의 얼굴만 보고, 또 심사평만 보고, 또 출판사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읽기를 한참동안 미뤘던 소설인데, 이제는 안보윤이라는 이름에 믿음이 간다. 안보윤이라는 이름이 찍힌 책이라면 이제 곧장 손이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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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달려간다
박성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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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첫 장을 펼치는 순간, 우리는 정말로 달려간다. 이상한 나라로... 정말로 지금까지 한국 문학에서 보지 못했던 사차원 같은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모두 소위 '순수소설'로 분류되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마치 장르소설을 읽는 것처럼 재미있다. 아니 웬만한 장르소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대단한 흡인력과 ‘스토리’의 재미와 매력을 느끼게 하는 소설들이다. 

수록된 여덟 편의 소설 가운데 특히 ‘우리는 달려간다’ 연작 2‘긴급피난’과 연작 5‘인타라망’, '실종' 등은 추리소설을 방불케 할 만큼의 치밀한 구성과 복선, 기막힌 반전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근래 한국 소설에서, 아니 한국 소설을 통틀어서 참으로 보기 힘든 멋지고 낯선 소설들이다.

 

박성원의 소설들에는 이미지보다 스토리가 강조된다. 그로인해 우선 읽히는 재미가 대단하다.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사차원의 세계처럼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가 한편의 소설에 꽉 들어차 있다. 시시껄렁한 감상이나 사색, 혹은 어설프게 지껄이는 작가만의 교훈이나 늘어지는 감정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을 정도로 꽉, 차있다. 스토리가!

그렇다고 얕은 주제를 감추기 위해 잡다한 재미로만 치장한 가벼운 소설이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무겁다 못해 무서운 것들이다. 이런 주제로 소설을 써보라고 한다면 아마 웬만한 (실력 없는)작가들은 참으로 지겹고, 답답하고, 지리멸렬한 소설을 쓰고 말 것이다. 한마디로 재미없는 소설을 쓰고 만다. 바윗돌처럼 무거운 주제를 낑낑거리며 겨우 조금 굴려볼 뿐이다. 거대하지만 단조롭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바윗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말고는 그들이 딱히 할 줄 아는 일이 없을 지도 모른다. 바윗돌이니까 그냥 바윗돌 그대로의 모습을 감상해라는 식의, 난감할 정도로 재미없는 소설을 쓸지 모른다.

그러나 박성원은 세상에서 건져 올린 무거운 주제들을 치고 다듬어서 전혀 다른 조각품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작가다. 근간은 바윗돌이지만 그 결과물은 바윗돌과는 전혀 달라 보이는, 그래서 그것의 재료가 사실은 바윗돌이었다는 것마저 잊게 할 정도의 색다른 작품을 만들어 내는 작가다. 바윗돌을 가지고도 자신만의 색다른 세계를 그려낼 줄 아는 작가다.

바로 그런 소설들이 이 소설집에 실린 것이다.

박성원의 소설은 흥미진진하고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들을 정신없이 따라가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에 들어앉아 있는 무거운 주제를 느끼게 되는 그런 소설들이다. 읽을 때는 내내 흥미롭다가 읽고 나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런 소설들인 것이다.

 

소설집에 실린 소설 가운데 특히 연작 소설 '우리는 달려간다'2와 5(긴급피난, 인타라망)가 압권이다. 두 소설은 각각 독립된 이야기와 주제를 가지고 있는 듯 하면서도 기막힌 구조와 스토리로 연결되고 있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치밀한 구성으로 이끌어내는 꽉 찬 이야기들과 놀라운 반전에 감탄을 하고, 극찬을 할 수 밖에 없는 소설들이다.

 

의식불명의 한 사내가 있다. 그가 마침내 정신을 차렸을 때 또 다른 사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는 누구인가, 나를 구해준 사람인가, 헤치려는 사람인가... 그럼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바라보고 있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이며, 또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던 것일까... 나를 바라보는 저 사내가 나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내의 기억이 하나 둘 복원되면서 끔찍한 과거가 되살아나고, 현실은 순식간에 악마의 탈바가지를 뒤집어 쓴 살떨리는 공포에 잠식된다.

 

그물처럼 촘촘히 얽혀진 인과관계 속에서 조금도 자유로울 수가 없는 인간의 비극을... 한 명이 웃으면 다른 한 명은 반드시 피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무시무시한 세상을... 작가는 차갑고 우스꽝스럽고 기이한 문장으로 만든 차갑고 우스꽝스럽고 기이한 이야기 속에 담아내고 있다. 그의 소설은 낯설지만 소설 속에 담긴 세상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박성원이 만든 이상한 나라로 나는 계속 달려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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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박완서 외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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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오늘날을 대표할 수 있는 우리 작가의 좋은 소설은 어떤 것일까..

어떤 소설을 읽어야 좋은 소설 읽었다는 자부를, 아니 보람을 느낄 수 있을까...

최근의 한국 소설을 이끌어 가는 작가들은 과연 누구일까...

어떤 소설이 잘 쓴 소설일까...


참으로 암담한 질문들이 아닐 수 없다. 쉽게 답할 수 없고, 쉽게 답해서는 안 될 질문들이다.

그러나 매년 현대문학에서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라도 하듯 하나의 책을 출간한다.

바로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이다.

답을 제시하려는 시도는 현대문학만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요즘은 이런 식으로 여러 작가의 단편들이 믹서된 묶음 도서들이 판을 치고 있다. 이상문학상 수상 소설집,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 황순원 문학상 수상 소설집, 작가가 선정한 올해의 좋은 소설 등 국내 유수의 출판사에서 앞 다투어 그런 식의 소설집들을 묶어 내고 있다. 상금이라도 몇 천 만 원 내 걸린 문학상이라면 여지없이 그 후보작들을 모두 묶어서 책으로 낸다. 이런 도서들은 모두 국내 최고의 작가들의 최고의 소설들로만 엄선되었다는 타이틀을 달고, 홍보를 한다. 그러나 그런 식의 도서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마치 우리나라 작가들이 쓰는 단편들은 모두 좋은 소설이 되는 것만 같아 어떤 소설이 좋은 소설인지에 대한 의문도 기대감도 사라지게 만든다. 우리나라 작가들이 발표하는 소설 가운데 반은 좋은 소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요즘은 정말 좋은 소설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래서 간혹 정말 좋은 소설이 좋은 소설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이런 식의 묶음 도서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신뢰하는 책이 바로 현대문학에서 출간되는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껏 이런 식의 묶음 도서들을 많이 읽어 본 결과 평균적으로 재미있는 소설들이 가장 많이 수록된 책이 바로 현장비평가... 이기 때문이다.

올해만 해도 이런 식의 도서를 네 권 읽었는데 그 중 2005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에 가장 많은 수의 재미있는 단편들이 실렸다.


2005년 현장비평가... 에는 총 열 명의 작가들이 쓴 열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이중에서 재미있게 읽히는 소설은 다섯 편이다.

나머지 다섯 편 가운데 네 편도 그럭저럭 읽혔으나 한 편은 도통 취향에 안 맞는 소설이라 지루했다.(비평가가 보기에는 그 소설도 잘 된 소설이고, 심지어는 재미있는 소설이라고까지 할 지 모르겠으나 개인적인 평가로는 지루했고, 지루했기에 그다지 잘 된 소설이라는 느낌이 들 지 않았다)


잘 읽힌 순으로 작품들을 나열해 본다면,


김애란 - 달려라, 아비

이기호 -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

김중혁 - 무용지물 박물관 

박완서 - 거저나 마찬가지

정이현 - 그 남자의 리허설

구효서 - 소금가마니

이혜경 - 피아간

윤대녕 - 탱자

조성기 - 작은 인간 

하성란 - 웨하스로 만든 집


여기서 주목할 수밖에 없는 두 편의 소설이 바로 김애란과 이기호의 소설이다. 이번 소설집에서 유난히 눈에 띈 두 작품이다. 두 작가 모두 젊은 작가지만 소설의 색깔은 전혀 다르다. 각기 다른 독특한 색깔을 지닌 젊은 작가들의 출현은 반가운 일이다.


달려라, 아비는 어머니와 둘이서 살아가는 여고생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버지를 상상하는 이야기다. 소박하고 간단한 소설이다. 최근의 젊은 작가의 소설에서 흔히 드러나는 과격하고 모험적이지만 그 힘을 주체하지 못해 휘청거리는 그런 소설이 아니다. 호수처럼 잔잔하지만 깊은 감동을 숨기고 있는 소설이다. 깊은 느낌의 감동이 전해지지만 또 소설은 웃기고 가벼운 터치로 일관한다.

여자가 아기를 배자 슬그머니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사내. 여자는 혼자 아기를 낳고, 아기는 자라면서 아버지를 생각한다.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집을 나가버린 아버지. 그래서 얼굴조차 모르는 아버지를 상상으로 그려본다. 아기는 자라서 소녀가 되고, 소녀의 상상 속에는 늘 아버지가 있다. 상상 속의 아버지는 늘 달리고 있다. 아니 달려야만 한다. 자신과 엄마를 버린 아버지니까 달려야만 한다. 아내와 자식을 버려야 할 만큼 바쁘고 대단한 일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는 집을 나간 것이고, 그렇다면 무조건 달려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그 날까지, 소녀의 눈앞에 나타날 그 날까지, 상상 속의 아버지는 그저 달려야만 한다. 그렇게 소녀는 상상 속에서 늘 아버지를 뛰게 만들며, 그렇게 늘 아버지를 곁에 두고 있었다.

김애란은 ‘아버지의 부재’라는 충분히 심각해 질 수 있는 소재를 대단히 가벼운 어투로 풀어간다. 졸졸졸 냇물이 흘러가듯 경쾌하고 가볍게, 농담을 섞어 가면서... 그러나 그 느낌은 참으로 깊다. 지표의 깊은 곳까지 조용히 스며들 수 있는 물처럼 이 젊은 작가의 시선은 인생의 깊은 곳을 응시할 줄 안다. 그래서 대단히 안정적이며, 따뜻한 소설이 되었다.

김애란이 구사하는 문장은 참으로 읽히는 맛이 좋고, 아련한 여운이 오래 남는다.

달려라, 아비에도 좋은 문장들이 넘쳐난다. 그 중 인상적인 구절을 몇 옮겨 보자면,


  

말을 모르는 몸뚱이가, 세상에 편지처럼 도착한다는 것을 알려준 것은 나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나를 어느 반지하 방에서 혼자 낳았다. 여름날이었고, 사포처럼 반짝이는 햇빛이 빳빳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 본 빛은 딱 창문 크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우리들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 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어머니와 나는 구원도 이해도 아니나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직도 내 머릿속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해왔던 상상이라 잘 지워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결국 용서할 수 없어 상상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버지를 계속 뛰게 만드는 이유가, 아버지가 달리기를 멈추는 순간, 내가 아버지에게 달려가 죽여버리게 될까 봐 그랬던 것은 아닐까. 그러자 갑자기 나는 서러워졌고, 그 서러움이 나를 속이기 전에 빨리 잠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애란과 함께 최근 주목하는 젊은 작가가 바로 이기호다. 이기호의 단편도 지금껏 네 편밖에 읽지 못 했다. 그러나 역시 나를 실망시킨 소설은 없었다. 그는 매우 독특한 상상력의 소유자다. 2005년 문학동네 여름호에 실렸던 ‘수인(囚人)’이라는 단편에서는 콘크리트로 덮여버린 서점 속에서 자신의 책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무명작가의 이야기를 그렸다. 무명작가는 어쩌면 지금은 없어졌을 지도 모르는 자신의 책을 찾기 위해 곡괭이로 콘크리트를 파 나간다. 마치 그것이 작가가 해야 할 일인 듯, 열심히, 무거운 사명감을 띠고 묵묵히... 그리고는 종래 콘크리트 속에 파묻힌 서점 속에 갇혀 버린다.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은 흙을 먹고 사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하지만 그가 흙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983년에 미그기 한 대가 남하했기 때문이다. 미그기가 남하한 일이 남자가 흙을 먹는 일과 무슨 연관이 있냐고...? 소설을 읽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미그기가 남하하고, 북한의 공군 장교 한 명이 귀순을 한 크다면 크고 작다면 별 일 아닐 정도로 작은 헤프닝 하나가 팔랑이는 나비의 날갯짓이 되어 남자에게 어떤 엄청난 폭풍을 불러일으키게 되는지... 남자는 이제 어엿한 흙요리 전문가가 되어 독자들에게 간단히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야채볶음흙의 요리법을 설명하면서 양념처럼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곁들인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그 곁들인 양념 같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 남자를, 그 남자가 먹는 흙을, 깊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김애란, 이기호 두 젊은 작가의 역량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독서의 보람이 충분한 책이었다. 2006년에도 좋은 소설을 가려내는 작업이 활발하고 진지하게 계속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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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게 무덤
권지예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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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권지예의 ‘꽃게무덤’은 아홉 편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90년대 이후에 등단한 국내 작가들이 대부분 그렇듯 권지예도 장편보다 단편에서 더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 작가인 것 같다.

꽃게무덤을 읽기 전에 내가 읽은 권지예의 소설은 단편 ‘뱀장어 스튜’와 장편 ‘아름다운 지옥’이었다. 아름다운 지옥은 내가 좋아하는 성장소설의 형식을 띠었으며 2004년 동인문학상 최종후보까지 올랐던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꽤나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긴 중편이나 경장편 정도로 묶여 질 수 있을 것 같은, 혹은 따로따로 분리시켜 대여섯 편의 단편으로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 같은 내용을 두 권짜리 장편으로 늘인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번듯하게 잘 생긴 아이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어 그 아름다움이 반감되고 있는 듯한 아쉬움이 들었던 것이다.

꽃게무덤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을 읽으면서 과연 권지예는 단편에 능한 작가라는 사실을 새삼 통감할 수 있었다.

 

꽃게무덤이 동인문학상 후보에 올랐다는 뉴스를 봤을 때 나는 이미 이 작품이 동인문학상을 수상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권지예의 단편은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권지예의 단편들은 읽히는 재미는 물론 작가만의 깊고 뚜렷한 세계관을 느낄 수 있다. 특히 권지예 소설에 드러나는 세계관은 흥미롭고 독특하다. 그녀는 상반되는 두 성분의 대비를 통해서 인생을 얘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남자와 여자, 불과 물, 젊음과 늙음, 탄생과 소멸 등. 극과 극에 서 있는 두 성분이 대립과 충돌을 거쳐 하나로 엮어지며 쓸쓸한 조화를 이룬다. 그 과정을 통해 독자는 저절로 인생의 온갖 ‘맛’을 느끼게 된다.

표제작인 ‘꽃게무덤’이 그렇고, 이상 문학상 수상작인 ‘뱀장어 스튜’가 그렇고, 수록작 가운데 가장 재미 있게 읽은 ‘비밀’, 가장 지루하게 읽은 ‘물의 연인’, 가장 충격적으로 읽은 ‘봉인’ 등이 모두 그렇다. 권지예만의 세계관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다. 그 외에 ‘여자의 몸 Before & After’, ‘우렁각시는 어디로 갔나’,’산장카페 설국 1km’ 등에서도 권지예 소설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맛과 향기, 색깔과 주제를 느낄 수 있다. 자전적 소설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참 명쾌하고 시원스런 단편이다. 어쩌면 여기에 실린 소설 가운데 가장 권지예 다운 단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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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가 온다
백가흠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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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흠의 소설은 제법 낯설다.

내용이 낯선 것이 아니라 분위기가 낯설다. 낯설고 무섭다. 무섭고 답답하다. 비릿한 생선을 날로 회쳐 먹는 기분이다. 날고기를 씹는 기분이 좋지는 않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눌려, 혹은 독특한 빛깔과 향기에 이끌려 우물우물 씹다 보니 한 접시를 다 비운 듯한, 그런 느낌이다.

회가 아니라면 마약 같다. 양귀비 잎사귀를 우적우적 씹어 먹고, 중독이 되어 더 많이 더 빠르게 계속 씹어 먹듯, 그렇게 이 책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을 읽어 치웠다. 당연히 포만감이나 개운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쉽게 소화가 안 되는 소설들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긴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분노와 공포의 감정들이 수시로 교차되며 입 안에서 계속 씹혔다.

백가흠은 근래에 출현한 신인 작가 가운데서 보기 드물게 다른 색깔을 지닌 작가다. 다른 색깔이기 보다 짙은 색깔인 것 같다. 고만고만한 작가들 사이에 파묻히지 않고 강렬한 색깔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작가다. 하얀 도화지에 제대로 먹칠을 할 줄 아는, 온전한 것들을 제대로 부수고 제대로 난자할 줄 아는, 뭔가 제대로 힘을 발휘할 줄 아는 작가다. 손에 잡힌 대상에게 치명타를 가할 줄 아는 작가다. 서슴없이 배를 가르고 내장을 파헤쳐 사방에 흩뿌릴 줄 아는 작가다. 아무리 퍼덕퍼덕 날 뛰는 생선들이라도 그의 손을 거치면 꼼짝없이 살이 발리고 뼈가 추려져 접시 위에 놓여진다.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하나의 회감이 될 수밖에 없다.

백가흠은 오랜 시간 갈아온 자신만의 회칼을 능숙하게 휘두르며 사랑 이야기를 제대로 망쳐 놓는다. 아니 제대로 회를 뜨는 것이다.


남자들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들이 사랑을 하는 방식은 하나같이 난폭하고 위악적이며, 퇴행적이고 유아적이다. 그들은 어쩌면 이 세상에 없는 사랑을 갈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폭력을 통해서 그러한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슬픈 판타지다.

백가흠 소설의 남자들이 궁극적으로 갈망하는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과도 같은 한없이 넓고 포용적인 사랑이다. 그들은 순수하고 무한한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다. 사랑을 갈구하기 보다는 기대고 쉴 수 있는 안식처를 갈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식처가 마련되지 않으니 폭력을 자행하는 것이다. 마음먹은 대로 여자가, 혹은 세상이 움직여 주지 않으니 남자는 답답하고 허전하다. 답답하고 허전하다 못해 위협과 공포를 느낀다. 강한 소유욕이 그 대상을 찾지 못 하자 허기로 돌변하고, 난폭함이 드러난다. 남자는 폭력을 휘두르며 허기에서, 공포에서,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렇게 하면 원하는 바를 얻을 줄 안다. 아니 그렇게 해도 결국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임을 남자도 안다. 현실은 위태롭게 어긋나며 예정된 파국으로 치닫는다. 파국을 알면서도 타인에 대한 폭력을,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한 학대를 멈출 수 없다. 갈망하는 꿈은 점점 더 멀어지고 유린당한 현실은 더욱 추악해 질 뿐이다. 그래서 상황은 늘 최악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반들반들하게 갈아 놓은 회칼처럼 날렵한 문장들과 사실감 넘치는 대사들이 강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백가흠의 소설은 취향에 맞지 않는 사람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 잘못 먹으면 죽을 수도 있는,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 복어와도 같은 소설이다. 그러나 천천히 잘 씹어 먹으면 독특하고 강렬한 뒷맛을 오래도록 음미할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반응이 극단으로 갈릴 수 있는 소설이며, 작가다. 독과 맛을 함께 느끼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어쩌면 이 작가에게, 소설에게 중독이 될 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새로운 힘을 지닌 새로운 국내 작가의 출현이 반갑다.

새로운 힘을, 과격할 정도로 새로운 힘을, 느껴보고 싶은 독자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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