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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 조력자살 한국인과 동행한 4박5일
신아연 지음 / 책과나무 / 2022년 8월
평점 :
안락사.
언뜻 듣기에도 무거운 이 주제에 대해 읽어보고 서평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죽음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늘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죽음이 가깝게 느껴진 것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그 뒤에는 친한 친구의 부친상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그리고 현재진행형으로는, 받아든 누군가의 신분증에 이따금식 보이는 장기기증 의사 표시 스티커까지. 예전에는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죽음은 어느샌가부터 다가오기 시작했고, 그랬기에 죽음이라는 화제를 더이상 남의 일인것마냥 바라볼수만은 없게 되었다.
그런 내 눈에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의 서평단을 모집한다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죽음이 가까워졌다고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죽음을 '남의 일'로만 치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간 죽음에 대해 생각해왔던 것들은 모두,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 아니라 남겨지게 될 사람들에게만 치중되어 있었다는 것을.
그랬기에 알고 싶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다가올 미래를 기다리고 있을지. 그리고 생각해보고 싶었다. 안락사라는 제도의 필요성에 대하여.
첫째, 당신은 조력사로 생을 마감하려는 사람과 스위스까지 함께 가 줄 수 있는가?
둘째,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처한다면 본인도 조력사를 택하겠는가?
책을 열자마자 나에게 던져진 이 질문들 앞에서 나는 잠시 멈칫할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예/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는 문항이었지만,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선뜻 대답을 내놓을 수 없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명확한 대답은 아니더라도 생각의 방향성은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품으며 책장을 넘기던 나에게 이 책은, 명확하게 좋았던 부분과 언짢았던 부분이 공존했다.
책의 1부는 저자가 조력사를 앞둔 독자의 동행 요청을 받아들인 후 느낀 심경의 변화와, 마침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 담겨있다. 여정에 동행하기로 결심했음에도 여전히 결정을 번복해주길 바라는 동행인들에게 때로는 농담섞인 말로, 때로는 한없는 진심으로 건네는 그분의 말은 내가 이 책을 통해 가장 기대했던 것들을 알게 해주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은 어떠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어떠한 생각을 하며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과정들을 통해, 내 안에 막연하게 남아있던 안락사에 대한 생각에 조금 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들이 감정에 휩쓸리기보다는 잔잔하게 묘사되어 있었기에,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독자들 역시 이 모습들을 보면서 두루뭉술하게나마 안락사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싶다.
서평을 작성하기 전에, 나처럼 이 책에 관심을 가진 분들은 무슨 생각으로, 무엇을 기대하며 이 책을 선택했을지가 궁금해서 서평단 모집글을 한 번 훑어보았다. 확고하게 안락사에 대한 찬/반입장을 가진 분들도 많았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분들은 이 간접체험을 통해 안락사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고 싶은 마음에 서평단에 지원을 하신 것 같았다.
책의 1부까지만이라면 이 책은 그에 부합하는 책이 되었을텐데. 내가 지금까지도 아쉽게 생각하고, 또 언짢음을 느끼게 된 원인은 그 뒤에 이어지는 2부에 있다.
조력사의 여정에 동행한 이후, 저자는 어떠한 계기로 인해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밝히며 저자는 안락사에 대한 확고한 반대 입장을 밝히는데, 그 과정에서 나온 표현들이 나를 자꾸만 불편하게 했다.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에 거두는 이 역시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는 말. 안락사는 자살이며, 자살하면 천국에 갈수 없다는 말들이.
이것이 인본주의와 신본주의의 차이점인지는 모르겠지만, 특별한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사후세계는 그리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에게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 그랬기에 눈앞의 이 사람이 죽는것보다 사는게 더 고통스럽다 말할 정도로 괴로워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도 우리가 존중해주어야 할 의사가 아닐까. 그것이 잘못이다, 아니다를 판단할 자격은, 그 고통의 당사자가 아닌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저자는 제 목숨을 스스로 끊으려 드는 것이 우리를 쓰고 버리는 물질적 존재로 보는것과 마찬가지라고 했지만, 나는 스스로의 생사조차 결정하지 못한채 다가올 운명을 기다릴수밖에 없는 삶이야말로 물질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더더욱 공감할 수가 없었다.
물론 한순간에 생사가 좌지우지되는 만큼 안락사에는 심도깊은 논의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이미 안락사를 허용하는 국가라 할지언정 그것을 모르는 바 아니기 때문에 제한적으로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지 않은가.
안락사는 단순히 하나의 관점에서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종교적인 시각에서 안락사를 나쁜 것으로 재단하려는 저자의 태도는 여전히 이해하기가 힘들다. 죽음을 앞둔 그분의 모습을 보며 다양한 생각을 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이런식으로 끝을 맺게 되는게 과연 그분이 바라던 형태의 기록일까. 여전히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