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넬라의 비밀 약방
사라 페너 지음, 이미정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5월
평점 :
오직 여성만을 위한 약방이라는 내용에다가 책이 너무 예쁘게 생겨서 관심이 갔던 소설이었다. 여성들의 입으로 전해져오면서 오직 여성들만 방문하고, 어려운 상황을 벗어날 수 있게끔 도와주는 넬라의 약방. 넬라의 약방에서 취급하는 건 이로운 약 뿐만이 아니었다. 삶을 위협하는 남자 남편, 아들 오빠 등등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을 떠안은 여자들은 넬라의 약방을 찾아온다. 비밀스럽게 찾아온 약방은 바깥쪽엔 위장을 위한 공간이 있고 실제로 약을 만들고 손님을 만나는 건 넬라가 숨겨놓은 아주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넬라는 독약을 오로지 남자에게만 사용하길 원하며 여자에게만 독약을 건네준다. 이러한 사실은 여자들에게 암암리에 퍼져, 넬라가 독약병이라고 표시해 둔 곰 모양이 그려진 유리병을 가지고 나간 여자들은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된다.
한편, 현재의 시점에서는 다른 여성이 한 명 더 등장한다. 그녀의 이름은 캐롤라인. 10년의 결혼생활을 하고 아이를 가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여자였다. 캐롤라인이 남편의 바람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10주년을 기념에 들뜬 마음으로 준비한 런던 여행은 캐롤라인이 혼자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떠난 묘한 여행이 되었다. 캐롤라인은 기분전환을 위해 머드라킹 즉 진흙을 뒤져서 가끔 발견된다는 유물 찾기에 참가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묘한 모양이 그려진 한 유리병을 줍게 되고, 그 일로 캐롤라인의 인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세 명의 여성들이 등장하며 만들어갔던 소설이었다. 남자는 제외하고 오로지 여자에게만 약을 판다라고 할때부터 약간 느낌이 왔지만 잊혀지고 짓밟힌 여자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첫번째 주인공은 역시 약방의 넬라. 넬라는 행복한 미래를 함께 꿈꾼 남자의 손에 유산당하고 뒤늦게 자신이 정부였음을 알게 된 여성이었다. 이후 어머니가 여성들을 위해 운영해왔던 약방의 진로를 바꿔버렸다. 여성의 병을 치유하는 쪽에서 원인도 없애주는 쪽으로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 주인공은 엘리자. 주인마님의 명령으로 넬라의 약방에서 독약을 가져가 주인님에게 독이 든 계란프라이를 먹인 하녀다. 어린아이지만 영특하고, 늙고 기력이 달리는 넬라의 곁에서 천진난만하기도 하고 세상에 무지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세 번째 주인공은 두 주인공과 시간대가 다른 캐롤라인. 캐롤라인은 우연히 줍게 된 유리병의 출처를 알아내가며 남성들을 살해했던 '약제사 살인범'의 행적을 하나씩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언뜻 들으면 복잡해보이지만 재밌게 읽을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복수를 위해 넬라를 찾아오는 여자들의 사연과 신분은 다양하다. 시대를 막론한 배신과 복수 그리고 상처받은 인물들의 이야기는 그리 낯설게만 들리지 않는다. 어느 시대이든 힘없이 상처받는 사람이 있다는 게 씁쓸하긴 했지만 소설의 구성과 이야기만큼은 흥미로웠다. 소설은 세 명의 시점이 번갈아가면서 진행되는데, 약제사의 행적을 찾아가는 캐롤라인 시점에서는 약제사가 가진 비밀을 모두 알 수는 없다. 시간이 200년 가량 지났을 뿐더러 남아있는 단서 또한 한정적이다. 작가는 독자가 답답하지 않도록 넬라와 엘리자 그리고 캐롤라인의 이야기를 교차시켜가며 소설을 진행한다. 때문에 이런 점이 더 소설을 몰입감있게 만들어주었다.
판타지를 좋아하는 독자라 비밀 약방과 독약이라는 소설의 소재를 보고 기대했던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넬라는 마법과 유령을 허황된 것으로 생각하는 쪽이고 넬라를 찾아온 소녀 엘리자는 그 반대의 역할이었다. 자신이 죽인 주인님의 유령이 나타날까 두려워하고 무슨 나쁜 마법에 걸린 것이라 생각하며 이것을 넬라처럼 약을 제조해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엔 넬라의 시선처럼 철없지만 안쓰러운 어린아이로 보기 시작했는데 마지막에 살짝 반전 요소가 있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소설의 결말부 또한 기억에 남았다.
소설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이 갔던 인물은 하녀인 엘리자였다. 12살의 어린 아이인데 막중한 책임감을 질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이 마음아프게 다가왔고, 그럼에도 책임을 지고 행동하는 모습에서는 뭔가 찡하기도 했었다. 넬라와의 대화를 통해 넬라가 점점 엘리자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도 인상깊었다. 처음엔 나도 엘리자처럼 넬라가 자신의 장부에 살인을 의뢰한 여자의 이름과 피해자의 이름 그리고 전달자의 이름까지 모두 적어두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비밀 공간이 들키지 않을거라 자신하고 있어도 그렇지 미약한 불안감마저 없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넬라는 뜻밖의 이유를 내게 들려주었다. 역사에 기록으로 남지 않을 여성들의 이름을 남기고 기억하는 것, 그것이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보면 넬라의 말처럼 여성들의 이름이 역사에 남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다. 넬라가 남긴 기록이 후대로 계속 이어져간다면 무슨 이유로 작성했건 이름만은 확실히 남길 수 있다. 불명예스러운 일이지만 여자들의 이름도 역사에 남고 싶다는 욕심이었을까. 때문인지 넬라의 비밀 약방이 단순히 현재의 상황을 해결하는 걸 넘어 어쩌면 먼 미래까지 본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었다. 현재의 시간에 등장하는 캐롤라인 또한 남편의 반대로 꿈을 접고 내조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간에 '넬라의 비밀약방'은 재밌게 볼 수 있었던 소설이다. 비밀스러웠으나 또 어느순간에는 은밀하고 끈끈한 연대를 보여주었던 여성들의 이야기도 기억에 남았고 생각지 못했던 결말부의 내용까지 포함해 매력적인 이야기로 기억될 것 같다.
이토록 많은 여자들의 이름이 기록된 곳은 이 장부뿐일지도 몰라.
그들이 역사에 기억될 유일한 곳일 거야.
나는 엄마랑 약속을 했단다.
이런 것도 없다면 역사에서 지워져 버릴 여자들의 존재를 보호해 주겠다고 말이야.
이 세상은 우리 여자들에게 친절하지 않아.
여자가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길 만한 곳은 몇 되지 않지. - 166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