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어 그리고 내가 사랑한 거짓말들
케이트 보울러 지음, 이지혜 옮김 / 포이에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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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목을 보고 이 책을 가볍게 몇 장 훑어보고 떠올린 생각은 암 판정을 받은 여성 신학자가 깨닫는 삶의 원리, 죽음에 가까이 서 있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발견한 인생의 가치에 대한 에세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 책은 거창하고 '거룩한' 이야기와는 달랐다. 힘겨운 항암 치료 과정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처절함과 절절함이 그대로 담겼고 자신을 지탱해 온 신학에 대한 시니컬한 풍자와 씁쓸함도 있었다. 진짜 위로와 공감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래서 사람은 무엇으로 그 삶을 지탱해 나가는지에 대한 진실된 고백은 담담하지만 강했다. 지금 갈 길이 막막한 누구에게라도 이 책을 쥐어주고 싶은 마음이다.

  

듀크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로 북미 기독교 역사를 가르친 케이트 보울러는 미국 번영 신학을 깊이 연구하고 그 종교적 배경과 문화 속에 살아온 여성 신학자다. 난임으로 어렵게 아들 잭을 낳고 얼마 안 있어 만 35세의 나이에 결장암 4기 진단을 받게 되고 이후 임상으로 치료를 이어오며 그녀가 지금까지 믿고 의지한 '축복'과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신앙적 근본에 대해 고찰하게 된다. 암 선고에서부터 시작된 챕터는 계절을 따라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어진 항암 치료와 임상 치료 과정, 그리고 그녀가 생각하고 경험한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종교적 통찰력이 부족해 '번영 신학'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지만 이 책에 설명된 것들을 통해 어렴풋이 감을 잡아본다. 마치 하나님이 모든 인생에 예비하신 축복과 복을 왕창 준비하신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삶의 어떤 고난이 와도 더 큰 영광을 위한 일보후퇴일 뿐이라는 무한 긍정에 가까운 종교적 해석. 벌어진 일에 대해 이유를 갖다 붙이기 위해 잘못된 신앙 고백은 없었는지, 죄를 짓지는 않았는지, 신실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는지 샅샅이 조사해 연결고리를 만들고 그에 대한 죄사함을 구하는 것을 삶에 대한 해석이라고 판단 내리는 일이 부자연스럽지 않다고 여겨지는 문화가 이 책에서 풍자된 '번영 신학'의 모습에 가깝게 느껴졌다.

나를 돕는 사람들은 무엇 혹은 누가 내게서 생명을 쥐어짜내고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일까? 그들은 내 삶을 샅샅이 뒤지고 중요한 사건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나의 영성 이력을 철저히 조사했다. 이 사건이었나? 하나님의 빛이 밝혀야 할 어둠이 이것이었나?

치유가 성스러운 권리인 영성 세계에서 질병은 고백하지 않은 죄의 징후이다. ... 고통당하는 신자는 풀어야 할 수수께끼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p.31)

완벽히 확실한 논리 속에 흔해 빠진 잔인함이 있다. ... 이들은 어떤 때는 단서를 찾기 위해, 또 어떤 때는 정답을 찾기 위해, 그리고 언제나 평결을 내리기 위해 항상 내 삶의 값어치를 계산한다. 하지만 나는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다. (p.145)

저자는 그녀의 삶과 연구의 목적이었던 '번영 신학'의 실체에 대해 날카롭게 풍자하고 또 때로는 좌절하며 삶의 이유를 그 곳에서 찾기 보다는 하루하루 그녀를 지탱하는 일상에서 찾기 위해 애쓴다. 죽어가는 삶과 살아있는 일상 사이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내적 갈등은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그 둘 사이에 걸쳐 있는 듯한 자신의 상태에 대한 불안함과 안도감, 두려움 그 감정의 파도가 얼마나 강렬한지 독자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된다.

똑같이 불편한 생각이 계속 떠오른다. '나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전부 인스타그램을 하고 있어.' ... 하지만 이따금 세상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은 나 하나뿐인 듯 느껴진다. (p.84)

내 머리는 닳고 닳은 두 갈래 길 사이에서 여러 가지를 검토하고 있다. 내가 죽는다고 가정하는 일련의 계획과, 동시에 내가 살아남을 것이라 확신하는 또 다른 계획 말이다. 나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다. (p.103-104)

병마의 고통과 완치라는 닿을 수 없어 보이는 결말을 매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케이트 보울러는 자신을 단단하게 세울 것들을 발견하고 고백한다. 그것이 얼마나 진심이고 그녀 삶의 진실인지 느껴져 마음이 저린 기분이 들었다. 신앙에 기대는 것도, 의술의 힘으로 치료하는 것도 아닌 그녀를 살게하는 힘은 그녀의 하루하루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노트북 앞에서 맥없이 울기보다 글을 쓰는 하루하루가 그녀를 살게 했고 남편과 아이, 가족과 친구들의 진심과 정성이 그 삶을 지탱했다.

비벌리는 종말론적 미래에 살고 있었고, 종교철학자는 과거에 살고 있었다. 나는 내가 그 중간인 현재에 살고 있는 줄 알았지만, 현재에 뿌리를 내리고 단단한 땅에 두 발을 딛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내 두 눈은 저 너머에 있는 것, 그다음 마감일, 그다음 장애물, 그다음 계획을 찾아 바삐 움직였다. ... 나는 교만의 죄, 삶 자체에 둔감해지는 죄를 지었다. 나는 지금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고, 그 대신 가능성 있는 것들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p.187)

사람들은 의술이 생명을 지켜준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지만, 저는 글쓰기와 자신들의 이야기를 쓸 수 있게 해준 사람들 덕분에 제가 살아있다고 믿습니다. (p.208)

감히 병마와 싸우는 것이 어떤 삶일지 상상할 수도 없지만 케이트 보울러의 에세이를 통해 조금이나마 치유의 과정과 당사자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타인의 고통에 그간 내가 건넨 한없이 가볍고 상처가 되었을지도 모를 말들을 떠올려보게 된다. 누군가의 간절하고 처절한 삶에 가벼운 돌을 던져선 안되겠다는 뒤늦은 다짐과 누구라도 아픈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그 마음 속의 아픔과 고통이 공감받아 위로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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