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지종례 - 맛있는 학교생활을 위한 다정한 레시피
이경준 지음 / 푸른향기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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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은 꽃샘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3월 교실 안의 어색함과 긴장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봄부터 네 번의 지필고사와 함께 사계절이 지나며 부쩍 자라나는 아이들이 눈에 보일듯한 1년의 시간을 지나 겨울방학 마지막 종례까지_

한 주를 마치고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 종례시간, 이경준 선생님은 훈계 대신 반 아이들에게 진심을 담은 쪽지를 건넨다. 사실 쪽지보다는 긴 편지에 가깝다. 선생님의 글은 학업에 지친 아이들을 향한 응원이자 한명 한명을 향한 애정이고, 때로는 흐트러진 마음과 무질서를 깨치는 따끔한 한 마디이기도 하다. 학생들이 선생님의 편지를 반기는 것은 비단 짧아진 종례 시간 때문만은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안에 담긴 선생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따뜻함으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쪽지종례》는 이경준 선생님 중학교 3학년 4반, 고등학교 1학년 6반에게 전한 종례 편지를 1년간 모은 책이다. 이렇게나 멋진 진짜 '어른' 담임 선생님을 만났을 학생들이 부러워질 만큼 선생님의 글에는 깊은 위로와 진심어린 응원이 있었다. 선생님의 글은 아이들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무엇을 '공부'하고 '생각'했으면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이고 반복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아마도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민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글에는 지금껏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의미와 명확함이 있었다. 어른인 나도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에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학교 생활이 힘겨운 중학생, 고등학생 아이들에게도, 일상에 치여 생각없이 하루를 보내는 어른들에게도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 책이 무뎌진 나를 깨웠듯, 누군가에게도 단비가 될 것 같다.

 

무엇을, 왜, 공부해야 하는지?               

 

중고등학생 한 명에게 주변의 모든 어른들이 "공부해" 이 세 글자를 얼마나 다양한 말과 표현으로 명령하고 설득하고 회유할지 잠시 상상해 봤다. 사실 왜 공부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그 긴 시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야만 하는지, 공부해서 뭘 할지, 긴 학창시절을 성실히 보내고도 모르는 어른이 더 많지 않을까. 나도 한 때 열심히 했던 공부가 지금 살아가는데 어떤 밑바탕이 되었는지는 아주 막연하게만 느낄 뿐이다.

중간고사를 마친 후 결과에 속상해하는 반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왜 공부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주는 것이었다. 진짜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공부해야 하는지 선생님은 아이들이 깨닫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를 쓰셨다.             

            

모두가 공부를 잘할 수도 없고, 모두가 1등이 될 수도 없어.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생활했는지가 중요해. 점수와 성적에 신경 쓰는 것은 공부가 아니야. 우리 학교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정말 공부를 잘하는 걸까? 진짜 공부는 글에 담긴 이미지를 떠올리며 읽고, 나름의 말로 정리할 수 있을 때 시작되는 일이야. 문제지를 풀면서 정답을 빠르게 고르는 건 '연습'에 불과해. 지금 네가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풀이 연습' 시간이 아니라, 여러 학문에 흠뻑 젖어보는 경험이 됐으면 좋겠어.

p. 31

이제는 사람의 육체노동뿐만 아니라, 이미 단순 지식노동은 컴퓨터가 대신하고 있어. 아마 네가 일하게 될 가까운 미래에는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지금 공부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 복잡한 생각을 정교하게 다루기 위해서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해. 학교에서 익히는 지식은 생각의 도구를 다듬는 일이야.

p.34

선생님은 시험 점수에 일희일비 하기보다는 진짜 알고 생각하는 힘이 길러지는 공부를 하기 바라신다. 12년간의 교육 과정이 대부분 기억나지 않지만 어른이 되어 내게 쏟아지는 정보와 글을 나름 분별하며 받아들이는 바탕은 그 때의 공부였다는 사실은 팩트다. 그 시절의 나 역시도 시험 성적 하나에 웃고 울었다. 이 이야기를 10대의 내가 들었다면 나 역시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 공부의 방향을 튼튼하게 정하고 낮아진 자존감을 끌어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나의 교과목은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라볼 수 있는 각각의 관점이자 다른 시각일 거야. 네가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이 귀찮거나 짜증 나는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세상과 대화를 제대로 나누기 위해 익히는 '다양한 소통수단'이니까.

p. 45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는 너와 나의 일상이자, 고정관념이자, 얼어붙은 마음이지 않을까? 책 대신에 다른 예술을 놓아도 모두 옳은 말이야. 음악, 그림, 조각, 영화, 연극, 뮤지컬, 발레, 사물놀이는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가 된단다. 지금은 부지런히 얼어붙은 고정관념을 깨야 할 시점이다. 호흡을 가다듬고 섬세하게 살펴보자. 어느 부위를 찍으면 쩍! 하고 갈라질까.

p.155

여전히 내가 공부하고 싶은 이유도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명확해졌다. 몇 년 친구 한 명이 전혀 다른 전공 분야인 디자인을 다시 공부하겠노라고 유학을 떠났다. 왜냐고 물었을 때, 그 친구는 세상을 디자인 관점으로 보면 얼마나 멋지고 다를까 기대된다는 말을 했었다. 그 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학문 분야일 수 있다는 뒤늦은 깨달음이 왔었다. 그 말이 얼마나 공부의 본질에 가까운 이야기인지 다시 한번 새길 수 있었다. 다양한 프레임, 소통의 수단을 알고 배워 나가는 과정이 공부 그 자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생각하고 공감하는 힘을 기르자!                

            

나는 네가 시험공부를 할 때 아돌프 아이히만처럼 외우는 때가 있는 것 같아서 겁이 나더라. 교과서에 실린 내용이 언제, 어떤 환경에서 등장하게 된 것인지, 어떻게 적용해서 옳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인지 고민하며 이해하기를 바라. 세상이 나쁜 일을 교묘하게 권할 때, 그것을 뿌리칠 수 있는 힘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

에서 나오거든. 스스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내가 서 있는 자리를 파악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힘이 필요해.

p.54

얼마 전 참여했던 독서 모임에서도 인용됐던 아돌프 아이히만, 무사유의 죄가 얼마나 참담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선생님도 반 아이들에게 세상을 분별해내는 힘을 기를 것을 당부하신다. 시대와 맥락, 위치와 힘을 이해해야 판단할 수 있고,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나 역시도 먹고 산다는 핑계로 내 일과 가정, 관계 모두에서 생각하기를 멈추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본다. 무사유의 죄에 빠지지 말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상하고,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 어른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흔들리는 사람의 마음을 읽고, 함께 흔들리며 큰 울림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어른이다. 흔들리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어른이다.

p.65

방황하는 학생을 향한 걱정과 힘든 일을 겪은 학생을 향한 뜨거운 위로는 선생님의 애정이 얼마나 큰지 반증하고 있었다. 여러 번 감탄했지만 정말 이렇게 좋은 선생님이 아이들 곁에 계시는게 참 다행이고 아이들이 얼마나 건강한 마음을 지니고 자라날까 하는 마음에 괜히 마음이 뿌듯해지기도 했다. 동시에 나도 흔들리는 누군가 옆에 같이 흔들리며 공감해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쓰러지지 않는 든든한 어른일까. 자문하게 되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어른다운 어른. 이미 그런 어른이신 이경준 선생님을 뵌 적은 없지만 존경한다. 나이만 먹었지 여전히 미성숙한 나 자신도 더 크기를 간절히 바라며, 선생님의 말씀처럼 공부하고 마음을 쓰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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