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코스트 마티니클럽 1
테스 게리첸 지음, 박지민 옮김 / 미래지향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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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까지 긴장감으로 꽉 채운 소설!

전 세계, 비밀스러운 전장에서 활약했던 은퇴한 스파이들의 이야기!





  유독 마음을 끄는 단어들이 있다. 내게는 ‘스파이’라는 단어가 그 중 하나다. 일단 표지에 ‘스파이’라는 단어가 보이면 묻고 따지지도 않고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나 할까. 물론 스파이가 활약하는 ‘첩보물’ 하면 냉전시대의 전유물로, 이제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구시대적인 소재로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상 전쟁은 끊긴 적이 없고, 은폐와 조작으로 우리의 눈과 귀를 막는 세력들은 여전히 존재하며, 정보를 선점하기 위한 공작과 견제는 우리 시대에도 변함없는 현실이다. 세상을 안전하게 지키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임무에 사명을 다하는 스파이라는 캐릭터와 그들의 활약에 끌리는 것 역시, 여전히 이 세계가 그들을 필요로 하며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은 아닐까.





은퇴한 스파이들, 그들이 다시 움직이다



  누구나 은퇴한 후의 멋진 삶을 상상하곤 한다. 이를 테면 코사무이의 푸른 해변을 내려다보며 언덕 위의 멋진 빌라에서 맞는 아침을, 새들이 세레나데를 부르는 코스타리카 숲에서 즐기는 느긋하고도 여유로운 일상을. 하지만 전직 CIA 요원인 매기 버드는 지난 16년 동안의 스파이 생활이 이를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캐나다 메인주의 작은 시골 마을 퓨리티에 정착해 조용히 닭을 키우며 사는 여생을 택하기로 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은신하듯 조용히… 그녀는 앞으로도 쭉 이렇게 살 예정이었다.



집 앞에서 시체 한 구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매기는 이것이 비극적으로 끝난 과거의 임무에서 비롯된 일종의 ‘경고’임을 모르지 않았다. 얼마 전, 정보국의 정보 시스템에 침입이 발생했고 ‘시라노 작전’에 동원된 요원들의 이름이 유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이곳은 더 이상 그녀에게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주목을 받는 건 더더욱 원치 않는 일이었다. 결국 독서 클럽을 가장한 ‘마티니 클럽’이 소집되고, 전직 CIA 요원이자 은퇴한 친구들이 하나둘씩 모인다. 은퇴 후 더 이상 쓸 일이 없을 것 같았던 각자의 능력을 다시 발휘할 때가 온 것이다.



“최근 정보국의 정보 시스템에 침입이 발생했어요. 그 무단 침입으로 피해를 본 것은 시라노 작전 관련 파일뿐이었어요.”

“그 작전은 무려 16년 전의 일이에요.”

“그리고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관련 정보는 기밀로 유지되었죠.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들의 이름이 유출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모든 이들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여러분들을 추적하고 있고 도움이 필요한지도 알아보는 중이에요. 이런 곳에 계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 34p


나쁜 기억이란 마치 묘비처럼 영구적인 것이어서 한 마을에서 평생을 살다 보면 비극이 일어났던 장소들을 모두 기억하게 된다. / 44p











    메디컬 스릴러의 여왕이라 불리는 테스 게리첸이 이번에는 은퇴한 스파이들을 소환해냈다. 과거에 참여한 작전이 비극적인 결말과 함께 끝나면서 은퇴의 길로 접어든 지 16년, 작전과 관련된 이들을 노리는 전적들의 움직임이 포착되면서 매기와 그의 친구들이 다시 실력을 발휘해야만 상황에 놓이게 되는 내용의 스릴러 소설이다. 이토록 섹시한 노년의 전직 요원들이라니! 턱밑까지 추격한 전적들로부터 일상의 안전을 지켜내기 위해 똘똘 뭉치는 전직 CIA 요원들의 활약상이 흥미진진하다. 사랑하는 사람마저 의심하고 속여가며, 국가의 안전을 위하여 인간성과 자신의 삶마저도 포기해야 했던 스파이들의 세계를 현실감 있게 녹여낸 점도 인상적이다.




진실은 훨씬 더 복잡하지만 거울의 세계에 살게 되면 진실은 항상 왜곡되기 마련이다. 너무 자주 우리는, 우리의 관점을 곱씹게 하는 양심을 찌르는 사실과 모든 불편한 작은 조각들은 무시하는 반면,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만을 선택한다. 우리는 명확한 것을 열망한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한다. / 127p


우리 모두는 자신이 아닌 무언가인 척하고 있으며, 몇몇은 그것을 더 잘해 내기도 한다. / 158p










  마지막 장까지 긴장감으로 꽉 찬 작품이다. 반전에 반전이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진다. 007시리즈를 비롯해 스파이 첩보물을 좋아하는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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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이 멸종할까 봐 - DNA로 파헤친 꿀벌 실종 사건의 진실 최고의 선생님 1
김영호 지음, 이수현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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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꿀벌들! 지구의 소중한 꿀벌 실종 사건의 원인을 파헤쳐라!

꿀벌에게 닥친 위기는 곧 인간에게 닥칠 위기이기도 하다는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책!






  비상! 비상! 꿀벌이 사라졌다!

  어느 날, 꽃과 벌집 사이를 하루에도 수천 번씩 오가던 꿀벌들이 사라졌다. 그것도 한 마리도 아니고 수백억 마리가 싹 사라진 것이다. 길을 잃는 법이 없던 꿀벌들이 대체 어디로 갔을까? 왜 집을 다시 찾아오지 못하는 것일까?




  수백억 마리의 꿀벌들이 실종되기 시작한 지 벌써 몇 년 째. 겨울이면 자연적으로 15~20퍼센트 감소하는 꿀벌을 제외하고서도 비정상적으로 많은 수의 꿀벌이 사라지고 있는 지금, 『꿀벌이 멸종할까 봐』의 저자인 김영호 곤충학 박사는 “대체 꿀벌이 사라진 게 왜 문제야?”라고 묻는 어린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전 세계 식량의 90퍼센트를 차지하는 100대 농작물 가운데 약 63퍼센트의 식물이 꿀벌의 도움을 받아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에, 꿀벌이 사라지면 식물뿐만 아니라 그것을 먹고 자라는 동물도 사라지고, 결국엔 인간에게도 식량 위기가 닥쳐올 것이라고!












지구에서 꿀벌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이 수상한 사건을 해결해야만 한다!





  김영호 박사는 우리에게 닥친 ‘꿀벌 실종 사건’의 진실을 과학자의 눈으로 다가가는 법을 알려준다. 곤충 DNA 전문가로서 원인의 주요 단서로 사용할 수 있는 DNA 분석을 바탕으로, ‘꿀벌 속에서 발견된 질병 바이러스, 벌집의 불법 침입자인 꿀벌 응애, 살충제, 심각한 위기로 다가온 기후 변화를 대표 원인’으로 분석한다. 어린이 독자들은 이러한 원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핵심 과학 개념을 익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과학자처럼 생각하고, 과학적 근거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다양한 관점에서 답을 찾아나가는 법들을 배울 수 있다. 또 꿀벌이 사라지고 있는 현상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움으로써 꿀벌의 미래가 곧 어린이들의 미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DNA에는 수많은 정보가 담겨 있어. 곤충들이 왜 특정한 행동을 하는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까지 모두 알아낼 수 있단다. 말 못하는 곤충의 마음을 DNA로 들여다볼 수 있는 거지. 이 DNA 세계를 알아 가다 보면 자연의 질서를 존중하는 마음마저 저절로 생겨날 거야. / 6p


그래프를 보면, 2017년부터 2021년까지 5년 동안 ‘날개불구증 바이러스’와 ‘낭충봉아부패병 바이러스’, ‘여왕유충흑색병 바이러스’에 감염된 벌들의 수가 해마다 꾸준히 증가한다는 걸 알 수 있어.

영국와 독일에서는 ‘날개불구능 바이러스’와 ‘이스라엘급성마비증 바이러스’가 특별히 겨울철에 많이 나타난다는 걸 알아냈어. 우리나라 꿀벌들이 실종된 것도 겨울이니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지 않니? 우리가 살펴본 그래프에 나타나듯이 꿀벌 실종 사건이 많이 발생한 2021년에 유난히 상승폭이 크다는 연구 결과까지 고려하면 실종 사건의 범인이 바이러스일 수도 있다는 예측을 하게 되는 구나. / 44p


과학자는 하나의 정해진 답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밝혀진 과학적 근거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창의적으로 새로운 답을 찾는 사람들이야. 한 과학자가 얻은 결과로 그 현상의 모든 것을 말할 수 없기도 하지. 그저 자신이 밝혀낼 수 있는 데까지 열심히 연구하면 그것이 또 다른 과학자의 연구와 연결되어 더 넓은 해석이 가능해진다. / 156p











  꿀벌의 습성을 이해하다보니 꿀벌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지를 느끼게 된다. 작지만 이토록 소중한 존재를 지키는 데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강력한 공감이 필요한 때인 만큼, 많은 어린이 독자들이 이 책을 꼭꼭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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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트 Axt 2024.11.12 - no.57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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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안과 밖, 다양한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






  『Axt』 57호의 키워드는 ‘G.O.A.T’다. Greatest Of All Time. 특정 스포츠 종목 역사상 최고의 선수를 의미하는 단어로 주로 쓰이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특정 영역을 넘어 ‘시간을 초월하여도 유효한, 대체불가능의 존재감을 지닌 이들’에게 우리는 G.O.A.T라 부른다. 내게 있어 고트는 일상을 비트는 감각, 꺾을 수 없는 마음, 외롭지만 그래도 나아가는 용기, 그리하여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드는 전율의 순간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게 있어서 G.O.A.T는 사람이고, ‘임윤찬, 페이커, 신진서, 안세영, 김연아…’ 그 이름들이 쌓아 나아간 대체 불가의 서사다. ‘G.O.A.T라는 단어 앞에서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바로 그 막막한 시간’이었다던 박연빈 에디터의 말처럼, 수없이 아득하고 막막한 시간 속에서도 부단히 걷고 걸어 기어코 앞으로 나아갔기에 빛날 수 있었던 나의 G.O.A.T들. 그들에게 진심으로 경이를 표하며 그들이 주는 영감이 내 삶에도 중요한 조각을 남기리라 믿어본다.



그런 의미에서 묻지 않을 수 없겠다.

당신의 고트(G.O.A.T)는 무엇인가요?




문학을 사이에 두고 그걸 알아보는 사람들이 마주 볼 수 있다거나 둥그렇게 둘러설 수 있는 일, 우리말인데 끼리끼리 우리끼리 암호 같은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때의 절로 고개 끄덕거림 같은 것만으로도, 그러니까 그 ‘공감’이라는 ‘동심’이 고트 아니려나 싶고요. / 16p









  이번 호의 포문을 연 것은 ‘올해의 G.O.A.T.한 순간들’이다. 김민정 시인과 성해나 소설가, 이동환 목사 그리고 정멜멜 사진작가가 각자 생각하는 고트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으로, 고트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만날 수 있어 흥미롭다. 그 중에서도 되려 커다란 허상에 짓눌리기보다는 일상의 소소한 시간들을 어떻게 고트하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던 이동환 목사의 글이 인상 깊다.



  표지에 실린 구본창 작가의 <비누>에 관한 박지수 편집장의 커버스토리도 눈에 띈다. 비누에 대한 정의와 특성 그리고 형태와 용도 등을 배제하고 비누 그 자체의 본질에 집중한 구본창 작가의 사진을 통해, ‘나’를 수식하는 온갖 숫자와 관념들에 얽매이지 않을 때 진정 나의 허물어짐까지도 껴안을 수 있게 된다는 깨달음을 얻어 본다. 젓가락으로 묵을 집어 먹는 듯한 답답한 관계가 지속될 땐, 휴대전화에 ‘옆방 아주머니(엄마)’ ‘옆방 아저씨(아빠)’ ‘옆방 청년’ ‘옆방 학생’으로 변경해보는 것도 은근한 해소법이 된다는 양다솔 작가의 글도 재미있다. 이 외에도 『딸에 대하여』와 『불과 나의 자서전』을 쓴 김혜진 작가의 단편작 외 여러 단편작, 연작, 소설 리뷰도 만나볼 수 있다.




내 연구의 시작은 향기를 차가운 향과 따뜻한 향으로 분류하는 작업이었다. 날카롭고 시퍼렁고 차가운 향기와 둥글고 새빨갛고 따뜻한 향기.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향기를 다른 감각들에 연결시키곤 했다. 특정 향기를 색과 빛으로, 맛으로, 질감으로, 그리고 온도로 표현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낯설다면 지금이라도 눈을 감고 떠올려보자. 붉은빛을 띤 로즈 노트,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머스크 노트, 바람처럼 시원한 라벤더 노트. 우리는 이미 감각의 전이에 익숙해 있지 않은가. / <향기의 온도-CAS N° 112-45-8> 김태형 조향사의 글 중에서 99p


“우리는 계속 따라갈 거야. 계속 쫓아갈 거야. 사진은 사진으로, 영상은 영상으로, 피해자는 가해자로 계속 덮어쓸 거야.” / <덮어쓰기, 박문영> 중에서 170p


긴 세월의 흔적이 남은 이국의 엽서, 누군가의 성격과 습관이 스며든 필체, 지금은 세상을 떠났을 게 틀림없는 수신자와 발신자, 그들 사이에 오고 간 애틋하고 다정한 언어, 그리고 그 언어들 아래 흐르는 뜨거운 마음. 그녀의 내면의 뭔가를 깨운 건 일상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그런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상상력 덕분인지도 몰랐다. 그 엽서들의 주인, 남자의 존재 때문이 아니라. / <빈티지 엽서, 김혜진> 198p


우리가 지금과 같은 삶을 살게 된 건 사소한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에요. 그걸 알아야 해요. / <빈티지 엽서, 김혜진> 205p









  추위가 깊어지는 계절에는 역시 따뜻한 방구석에서 따뜻한 고구마와 손톱이 노래질 때까지 귤을 까먹으며 무엇이든 읽는 게 최고다. 그 중에서도 문학의 안과 밖, 다양한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이런저런 책이 더 읽고 싶어지는 것이 계간지를 읽는 묘미가 아닐까. 올 한 해 쭉 『Axt』와 함께 하면서 ‘읽고 싶은 마음’을 선물 받은 기분이었다. 문학인과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계간지로 오래오래 함께 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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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림을 보며 어른이 되었다 - 오답노트 같았던 삶에 그림이 알려준 것들
이유리 지음 / 수오서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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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서 생의 부조리와 아름다움을 찾고,

일상을 환기시키는 여러 질문들에 다가가는 시간!






  스위스의 화가 프랑수아 바로의 그림 <빵 자르는 사람>을 보는 순간, 덜컥 큰 덩어리 같은 것을 삼킨 기분이 들었다. 그림 속에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는 뜨거운 수프가 놓인 식탁에서 엄마와 딸이 마주하고 앉아 있는데, 턱을 손으로 괸 채 고개를 돌린 딸의 표정이 샐쭉하다. 빵을 자르는 엄마의 평온해 보이는 표정과는 무척 대조적이다. 아니, 엄마는 애써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것일지도…. 이 그림이 이토록 신경 쓰이는 건 나에게도 이러한 순간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집돌이었던 큰 아이가 친구들과 놀러 나간 뒤에는 하루 종일 감감 무소식이고, 이따금 심통이 나서 감정 조절을 어려워하는 걸 보면, 이제는 종알종알 귀엽기만 했던 꼬마와는 작별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사춘기 아이가 (부모의) 무대에서 퇴장하고 나면 지금까지 아이를 비추던 스포트라이트가 부모의 생활을 비추는데, 그 순간 부모가 충족된 삶을 사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나는 그림을 보며 어른이 되었다』의 저자 이유리는 책 《부모로 산다는 것》의 한 구절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아이의 사춘기는 아이와 부모가 서로 정서적으로 독립하는 시기이며 이때 부모의 자리가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인지, 아니면 먼지만 날리는 폐허의 땅인지 진정으로 돌아보게 되는 시기라고 말이다.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전전긍긍하며 아이의 뒷모습만 붙들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내 마음에 친절을 베풀고 내 자리를 단단히 다질 수 있는 수 있는 시기로 삼을 것인가. 나는, 오늘이라는 시간에 내가 읽고 있는 이 모든 책들이 불안하거나 삶의 여러 모순에 부딪쳤을 때 그것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 역시 그러하다.




“경로를 이탈했다는 자동차 내비게이션 안내음이 내 인생에 대한 경고처럼 들리던 순간, 나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찾았다.” / 12p




  『나는 그림을 보며 어른이 되었다』는 그림을 보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굳건한 내면의 힘을 키우고자 했던 이유리 작가의 미술 에세이다. 그녀는 주변이 너무 소란스럽게 느껴지고 복잡한 세상이 버거울 때마다 정적이고 고요한 미술의 세계로 숨어 들었다. 그렇게 옛사람들이 남긴 작품 속에서 ‘이 모든 것은 다 지나갈 거야’라는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위대함’으로 박제된 작품 이면에 가려진 화가의 고독함과 고통, 시련을 들여다봄으로써,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것만 보거나 경험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좌절이나 고통을 기꺼이 감내해나갈 때 마침내 아름다움을 꿰뚫는 깊은 시선이 생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우리 인생에는 절절만이 있는 게 아님을, 화려한 순간과의 이별이 들이닥치는 때가 온다는 것. 하지만 우리는 떨어지는 불꽃처럼, 그것과 아름답게 멀어질 수 있다는 자각.

그 무엇보다 절정을 지나 사라져가는 빛도 불꽃이라는, 휘슬러가 가르쳐준 그 진실이 사무치게 아름다웠다. 마치 우리네 삶처럼 말이다. 청춘의 시절이 소란스레 지나간 후 아프고 적막한 퇴화의 시간이 닥쳐와도, 죽음을 맞기 전까지 우리네 삶은 그 역시 소중한 생명이듯이. / 42p












  뭉크하면 누구나 <절규>를 대표작으로 손꼽지만, 나는 앞으로 <지옥에서의 자화상>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 같다. 화염이 뜨겁게 솟구치는 지옥 같은 곳에서 맨몸으로 꼿꼿이 선 채 화면 밖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까닭이다. 고작 다섯 살에 어머니를 결핵으로 잃고, 이어 의지하던 누나마저 열다섯에 잃은 뭉크는 “나의 모든 작품은 질병에 대한 사색에서 비롯되었다. 두려움과 아픔이 없었다면 나의 삶은 방향키가 없는 배와 같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을 좀먹는 고통 속에서도 그림으로 하여금 슬프고 아팠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구체화하고, 이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감정을 객관화해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뭉크. <지옥에서의 자화상> 속의 눈빛이 증명하듯, 시련을 더 큰 의지와 맞바꿨던 뭉크에게서 ‘우여곡절 끝에 피는 꽃이 가장 아름답다’는 말을 되새기게 된다.





그렇다. 우리의 본성은 악한 구석이 많다. 그리고 엔소르의 삶이 증명하듯 약하고 모순적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안의 본능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단속해야 할 것이다. 처음에는 위선이고 가면일지 몰라도, 말투를 다듬고 행동을 다듬은 세월이 쌓이면 그것이 결국에는 나의 인격이 될 것이기에. / 65p









  아울러 코코슈카의 그림은 우리에게 사랑이 가져다주는 슬픔과 고통을 감내하고 수용하는 법을 알려준다. 제임스 엔소르의 그림에서는 약하고 모순적인 인간의 본성을, 휘슬러의 그림에서는 절정을 지나 사라져가는 빛도 불꽃이라는 진실을 배우게 된다. 뿐만 아니라 앤디 워홀의 삶을 통해서는 자신의 취약성을 오히려 온몸으로 드러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왠지 할아버지도 ‘나’가 사탕을 살 만한 돈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다. 이 그림은 1944년 9월 23일자 잡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표지를 장식해, 독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독자들이 이 그림을 특히 좋아한 이유는 아마도 그림 속 주인 할아버지의 표정에 떠오른 잔잔한 ‘체념’의 정서를 읽어냈기 때문이리라. ‘어쩔 수 없군. 또 하나의 동심을 지켜줘야지 뭐.’

(…) 어차피 때가 되면, 아이는 현실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올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시기를 결정하는 이가 어른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조급해하거나 닦달하지 않을 것. 사탕 가게 할아버지들은 이 점을 잘 알았던 것 같다. / 187p



사랑과 계절의 공통점은 시작과 끝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왠지 이 사랑이 곧 끝날 것 같은 예감이 사로잡힌 코코슈카는 알마에게 애원한다. “제발 나를 사랑한다고 많이 편지해줘. 그림 앞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그 애원 끝에 그린 그림이 바로 <바람의 신부>이다. (…) 독일어로 ‘회오리바람’을 뜻하기도 하는 ‘바람의 신부’는 그림 속 남녀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가고 있다. 사방에 미친 돌풍이 휘몰아치는데도 편안히 잠든 여자와 대조적으로, 남자는 혹여나 푸른 바람이 이 여자를 빼앗아갈까 봐 두 눈을 홉뜬 채 불안해한다. 이 두 사람은 바로 코코슈카 자신과 알마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 216p




  미술에서 생의 부조리와 아름다움을 찾고, 일상을 환기시키는 여러 질문들에 다가갈 수 있어 특별한 에세이다. 미술 작품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이 작은 화폭에 삶의 수많은 투쟁을 담아내는 작가들에게 또 한번 경이를 느낀다. 그들의 생애와 비애가 생생히 담긴 그림 속에서 나의 이야기와 새롭게 써나갈 이야기들을 발견해보시길 바라며 이 책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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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이야기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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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이하고도 수상스러우며 무척이나 기묘한 이야기들!

익숙한 감각과 고정된 관념의 더께를 닦아내고 논리와 이성 너머에 있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마음을 열어 보일 때 우리는 좀 더 다정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여기, 한 교수가 있다.

  그는 학술대회에서 자신의 연구를 발표하기 위해 네덜란드를 방문했다가 우연히 에스컬레이터 끝에서 여자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다. 쓰러지면서 조각상에 머리를 세게 부딪친 탓에 여자의 옷은 금세 피투성이가 되고, 괴로운 듯 가쁜 숨 사이로 피가 섞인 타액이 솟구친다. 교수는 달려가 자신의 재킷을 벗어 부상당한 여자의 머리 아래에 괸 뒤 도와달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구급차를 불러달라는 교수의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군중은 흘낏 쳐다본 뒤 빠르게 스쳐지나갈 뿐이다. 그 사이 여자의 상태는 심각해지고 교수의 새하얀 셔츠마저 피범벅이 되어갈 무렵, 다행히 경찰이 나타난다. 그런데 경찰은 쓰러진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쩐 일인지 수상쩍은 표정으로 교수를 바라본다. 그 순간, 교수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 아, 이들은 나를 범인이라 생각하는 게 틀림없구나, 하고.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없다면 그건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되는 걸까?

  올가 토카르추크의 단편소설집 『기묘한 이야기들』 속에 수록된 「실화(實話)」라는 작품에는, 한순간에 가해자로 의심받아 도망자 신세가 되는 한 외국인 교수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쓰러진 여자를 돕기 위해 벗어준 재킷은 물론, 재킷 속의 여권마저 사라지자 공황상태에 빠진 교수는 그 길로 경찰에게서 도망친 뒤 투숙하고 있던 호텔로 향한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수치심을 안고 내쫓기게 되고, 그만 충격으로 인해 언어를 상실하고야 만다.




  이후 거리의 젊은이들에게 두들겨 맞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낯선 이국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길이 없어 고립된 한 남자의 처절한 비극에 몸서리치게 한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이웃으로부터, 군중으로부터, 사회로부터 한순간에 익명의 타자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는, 끊임없이 나를 ‘증명’해야만 하는 세상의 요구와 압박으로부터 느끼는 두려움이기도 하다.




“지금 당신의 눈에 보이는 사람은 당신이 보고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당신을 보고 있기에 존재한다.” / 「승객」 중에서 11p

 


“과도한 행복감이 다가올 광기를 예고하는 것처럼, 불행의 재빠른 일격 앞에는 우선 안도감이 찾아온다.” / 「심장」 중에서 124p












  올가 토카르추크는 세상과 문학을 하나로 이어주는 ‘연결자’로서 범우주론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의 존재론적 숙명과 실존적 고독, 인간과 동물 혹은 생태 전체에 관한 모럴리티, 이른바 ‘주변부’로 명명되는 소외되고 연약하고 힘없는 존재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함으로써 그녀만의 독특한 문학적 지형도를 완성해나가는 작가다. 전작인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와 『태고의 시간들』이 그러한 것처럼 이번 작품에서도 이러한 주제 의식이 돋보이는 단편작들이 수록되어 있다.





  10편의 단편작은 하나같이 괴이하고 수상하며 기묘하다. 우리는 흔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하고 묘한 느낌’을 기묘하다고 표현하는데, 올가 토카르추크의 작품 속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정상과 비정상이 혼재하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곳곳에 산재해있다. 집안 곳곳에 ‘식초에 절인 신발 끈’이나 ‘토마토소스에 절인 스펀지’ 따위를 담은 병조림을 모아왔던 노년의 어머니(「병조림」),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트란스푸기움에 가서 다른 생물체로 전환하는 시술을 받기로 결정한 레나타(「트란스푸기움」), 양말 한가운데에 세로로 난 솔기에서 시작해 익숙한 것들이 한없이 낯설게 느껴지면서 그 때문에 공황 상태에 빠지는 B(「솔기」), 마치 비현실적인 존재처럼 느껴지는 피부가 온통 녹색인 아이들(「녹색 아이들」)의 이야기들이 그러하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나무 위에서 살며 땅에 구멍을 파고 그 속에서 잠을 잡니다. 달이 뜨는 낮에는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 알몸을 달빛에 노출시켜 피부를 초록색으로 변하게 합니다. 이 빛 덕분에 그들은 많이 먹을 필요가 없고, 숲의 열매나 버섯, 호두 따위로 양분을 섭취합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 땅을 경작하거나 집을 지을 필요가 없으므로 모든 일은 그저 즐기기 위해 수행합니다. 거기에는 통치자나 영주, 농민이나 사제도 없습니다. 어떤 일을 처리해야만 할 대는 나무 주위에 모여 서로에게 조언을 구하고 거기서 결정한 대로 실행합니다.” / 「녹색 아이들」 중에서 41p


 


“지금 우리의 처지가 마치 오래된 모래시계 같지 않나요? 언젠가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모래시계를 오래 사용하다 보면 모래알이 마모되면서 더 빨리 흘러내리게 된대요. 그래서 오래된 모래시계는 점점 빨라지게 마련이죠. 선생님은 이런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우리의 신경망도 모래시계처럼 닳고 닳아 지쳐버린 거예요. 구멍이 숭숭 뚫린 거름망처럼 모든 자극이 신경망을 술술 통과해 버려서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 거죠.” / 「솔기」 중에서 71p


 


“어째서 우리는 인간과 세상 사이의 간극이 다른 존재들 사이의 간극보다 더 중요하고 의미 있다고 쉽게 가정해 버리는 걸까요? 느껴지십니까? 당신과 저 낙엽송 사이의 간극이 낙엽송과 저기 있는 딱따구리 사이의 간극보다 더 심오하고 철학적인 이유가 대체 뭐죠?”

“왜냐하면 나는 인간이니까요.”

(…)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여전히 침팬지이자 고슴도치이고 낙엽송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우리 내면에 가지고 있고, 언제든지 그 본성을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를 그것들과 분리시키는 간극은 결코 넘을 수 없는 게 아닙니다. / 「트란스푸기움」 중에서 147p












   어쩌면 진실은 우리가 정형화된 이미지라고 여겼던 것들이 어긋날 때 느끼게 되는 이 낯설고, 불편하고 당혹스러울 만큼 기묘한 감정들 속에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식의 문이 깨끗이 닦이면 모든 것이 무한히 드러난다.”라는 블레이크의 시 구절처럼, 익숙한 감각과 고정된 관념의 더께를 닦아내고 논리와 이성 너머에 있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마음을 열어 보일 때 우리는 좀 더 다정한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평범한 물질적 속성이나 인과 관계, 확률의 법칙을 초월하여 세상의 더 많은 존재들을 껴안는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를 내가 좋아하는 이유다.




“세상이 인간에게 맞춰 만들어졌다면 왜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압도한다고 느끼는 걸까? 무엇 때문에 자연스러운 일들이 두렵거나 부끄럽게 느껴질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 안에 있는 엄격한 판단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세상은 왜 결핍으로 가득 차 있을까? 음식도 돈도 행복도 왜 항상 부족할까? 잔혹한 행위는 어째서 벌어지는 걸까? 그래야만 할 합리적인 이유가 전혀 없는데.” / 「인간의 축일력」 중에서 2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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