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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취록 - 조선 최고의 예언서를 둘러싼 미스터리
조완선 지음 / 북폴리오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래의 예언에 대해 상당히 궁금해하는 편이다. 연초가 되면 사람들이 자신의 사주팔자를 알아보기 위해 점을 보러다니는 일도 그러하지만, 지구의 종말이니, 제3차대전이니 하는 예언은 늘 어디서나 관심을 모으고 있으니 말이다. 제 3차대전이 한반도에서 비롯된다는 이야기도 있었던 듯 싶은데, 믿음의 여부를 떠나서 이러한 소재들이 많은 관심을 모으는 것은 사실인 듯 하다. 개인적인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이런 예언은 종교적인 색깔이 강하게 드러난다. 지구의 종말이라는 예언 때문에 집단 죽음을 맞이했던 몇 년전의 일들만 해도 그렇지 아니한가. 그것이 사실이 되든 그렇지 않든 어쨌거나 예언에 관한 소재는 상당히 흥미로운 것만은 사실이다. 여기 <외규장각 도서의 비밀>에서 보여준 저자 조완선이 고문서에 대한 애정과 연구를 통해 19세기의 예언이 21세기 현실로 나타나는 상상 그 이상의 이야기가 있다. 바로 <<비취록>>이다.
『비취록』은 태생부터가 남달랐다. 홍경래의 난은 『정감록(鄭鑑錄)』으로 무장한 주도 세력이 조선왕조를 전복하려던 대사건이었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백성을 위한 '이상적인 국가'를 세우겠다는 뚜렷한 정치 목표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손길이 가는 곳마다 조선 민초가 꿈꾸던 세상이 오롯이 펼쳐져 있었다. 당시 조선 민초들에게 홍경래는 열망의 화신이었다. 그들은 화신이 부활하여 또다시 봉기의 주역이 되기를 원했다. 그런 열망을 모아 태어난 게 『비취록』이었다. (본문 7,8p)
대학원생의 석사 논문을 표절한 것이 드러나 조교수 임용, 오직 그 하나에 모든 걸 걸었던 십 년 가까이 공들여 얻은 자리가 위태로워진 명준에게 중절모의 한 사내가 찾아온다. 목울대에서 김빠지는 목소리가 나는 그 남자는 『비취록』이라는 한문으로 된 필사본을 건네며 진위를 가려달라했다. 이 분야에서 몇 되지 않는 전문가였던 명준은 위작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접하는 진품이기에 명준은 볼일을 다 봤다며 돌아가는 중절모를 세워 간신히 10여 쪽밖에 되지 않는 복사본을 얻어냈다. 사나흘 후에 다시 올 것이라던 중절모는 닷새가 지나도록 깜깜무소식이었고 대신 고서에 문제가 생기면 온전치 못할 거라는 해괴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얼마 뒤 중절모는 명준에게 전화를 걸어 이 고서가 심상치 않으며, 고서에 적힌 대로라면 조만간 우리나라에 아주 심각한 일이 벌어질 것 같다며 이틀 후에 찾아오겠다는 기약 없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이틀 후 오재덕 반장이라는 경찰이 명준을 찾아와 중절모의 사내 최용만이 실종되었다며 찾아온다. 하지만 명준은 『비취록』한 권의 고서와 징계 철회를 맞바꿀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이 고서를 찾기로 한다.
한편 유정은 해광의 입적 소식에 강한 의문을 품고 쌍백사로 간다. 이전에 해광이 보낸 몇 통의 편지에는 쌍백사의 기이한 풍경이 적혀 있었고, 입적하기 나흘 전에 도착한 편지에는 숱한 의혹이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암자 안에서 해광의 온기를 더듬어오던 유정은 황글불상 밑에서 해공의 염주 알을 발견하게 되고, 틀림없이 뭔가 곡절이 있음을 깨닫는다.
최용만의 실종 사건을 해결하던 오반장은 그가 살해되었음을 알게 되는데, 유력한 용의자이자 보름째 행방이 묘연했던 안기룡 역시 살해되었음을 밝혀지면서 판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짐작한다. 명준은 『비취록』을 홀로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고 경찰을 끌여들여 책의 행방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오반장은 안기룡의 웃옷 안주머니에 적혀있던 글귀와 사건 현장 주위의 풀밭에서 발견된 승복에 다는 단추를 보고 쌍백사에 가보게 되는데, 때마침 유정에게 해광이 타살된 것이라 알려주었던 경운이 이해할 수 없는 추락사를 하면서 유정은 오반장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유정, 오반장 그리고 명준을 통해 쌍백사의 미스터리와 『비취록』의 비밀이 수면 위로 오르게 된다.
鷄龍百石(계룡백석) 草浦行舟(초포행주) 世事可知(세사가지)
계룡산의 돌이 하얗게 되고, 초포에 배가 다닐 때 세상일을 알 수 있다.
이는 결코 공염불 소리가 아니었다.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이들을 위한 구원의 메시지였다. 이제 곧 개벽의 세상이 올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후천개벽이 열릴 것이다. (본문 202p)
『비취록』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의문의 연쇄살인이 벌어지고 쌍백사에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이야기는 글을 해독하고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과정을 통해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 아들과 함께 가출한 부인으로 인해 쌍백사의 비밀을 꼭 밝혀내고 싶은 오반장, 교수 징계위원회에 회부될 상황에 『비취록』이 꼭 필요한 명준의 캐릭터도 인상 깊었지만 가장 인상깊은 인물은 뭐니뭐니해도 쌍백사의 주지인 형암이다. 예언서에 빠져 내쳐진 파계승이었던 형암은 『비취록』에 기록된 예언을 위해 모든 거사를 준비하고 있다. 사이비 종교처럼 보이는 인물이지만 그가 거사를 준비하는 이유를 안다면 누구도 그를 미워할 수 없으리라.
天下之所可畏者(천하지소가외자) 唯民而已(유민이이)
夫天之立司牧(부천지립사목) 爲養民也(위양민야)
천하에 두려워할 것은 오직 백성뿐이다.
무릇 하늘이 지도자를 세운 것은 백성을 돌보기 위함이다. (본문 276p)
'예로부터 천하에 두려워할 것은 국민이라 했으나, 어떤 지도자가 국민을 두려워한단 말이오. 되레 가진 자들의 탐욕은 늘어만 가고 권력을 쥔 자들은 제 배만 채우려 하고 있지 않소.'
'썩은 물은 걷어내고 곪은 데는 도려내야 하지 않겠소?' (본문 290p)
어느 정도 밑그림이 그려졌다. 그가 꿈꾸고 있는 것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민초가 주인이 되는 세상,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정감록』이나 예언서에 나오는 이상향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본문 291p)
혼탁한 현 사회에 형암이 준비하는 거사는 지금 우리가 꿈꾸는 세상과 다를 바 없으며, 또 현 사회 속에서 세상을 바꾸어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형암은 그에 부합하는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캐릭터에 자꾸만 빠져든다. 물론 『비취록』을 쫓는 인물들이 가진 저마다의 세상은 현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징계위원회의 회부라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라는 목적이 있었다. 허나 역사 속 '홍경래의 난'이나 <<비취록>>에 등장하는 형암의 거사는 제 배만 채우려는 권력자들의 부조리와 탐욕 등으로 혼탁한 세상 속에서 절망에 잠겨있는 민중의 바람, 꿈, 희망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감록>에서, 내가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예언 내용이 아니다. 선조의 지혜와 통찰력, 예지력도 아니다. 이 책 저변에 깔려 있는 백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다. 살가운 문장 속에는 백성을 향한 애정과 관심이 절절하게 묻어나왔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중략) 과연 세계의 예언서 중에, 이처럼 백성의 애정이 가득 담긴 예언서가 어디에 또 있을까. (작가의 말 中)
<<비취록>>은 예언서를 통해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 작품이다. 19세기의 예언를 21세기에 현실로 이루려는 이들의 거사를 통해 우리는 민중의 꿈을 읽어보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비취록』과 같은 예언서로 자신이 처한 현실을 도피하려 하기보다는 민초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위해 국민이 생각을 바꾸고, 행동해야 한다는 작가의 생각(그것이 아닐지라도...)을 조심스레 읽어본다. 세상은 예언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인 우리의 생각과 바람되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