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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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의 신작 《공정하다는 착각》은 "기울어진 사회구조 이면에 도사린 능력주의의 덫"을 분석한 해체한 책이다. 올해 《20 vs 80의 사회》를 읽으며 한 차례 '능력주의'가 민주주의 사회에 어떤 균열을 일으키는가는 근래 우리나라에 있었던 몇몇 사건들과 맞물려 있어 몰입해서 읽었던 바가 있었다. 하지만 《20 vs 80의 사회》을 읽으며 "중상류층의 위선적인 태도와 불공정한 행위를 통렬하게 비판하며 불평등 논의"에서 보다 확장하여 논의를 다룬 책이 궁금했다. 그러던 중 2020년이 가기 전, 그 갈증을 해소할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었다. 


마이클 샌델은 2012년 "정의"란 화두를 세상에 던졌던 것처럼, 2020년에는 능력이 곧 정의의 척도인 시대이지만 능력이 돈과 (사회, 경제, 정치적) 지위가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모순을 품은 능력주의를 화두로 삼았다. "능력이 부족하여, 능력이 없어서 실패하는 것이 오롯이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인가?" "개인의 성취와 성공이 오롯이 개인의 능력과 노력으로만 달성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만연해진 개인의 능력을 우리가 공정하게 측정하여 판단할 수 있는가를 논한다. 


능력주의는 하나의 계급제를 만드는 이데올로기이자 오히려 더 정교한 방식으로 계급 간에 일어나는 차별을 공고화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 노력과 재능으로 "개천에서 용"이 될 수 있다는 신화가 여전하며 오히려 그 믿음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한 모순은 강력해졌다. 마이클 샌델은 정면에서 "아메리칸 드림"은 꿈일 뿐이며, 우리 사회가 공정하다는 믿음을 부정한다. 능력주의는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세습 귀족제'이며, 대학에 졸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이와 그렇지 않은 이의 구조는 능력주의가 초래한 또 다른 피라미드 구조라고 말한다. 


그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능력주의가 만든 환상이 미국의 '트럼프 당선'과 영국의 '브렉시트' 사건까지 함께 설명한다. 빈부격차와 불평등 문제 해결과 부의 재분배를 위해 꼭 필요한 공정한 교육 현장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는 대학을 나온 고학력자가 대학을 나오지 않은 미국의 다수를 다스리는 구조를 지적한다. 학벌을 중요시하는 학벌 위주의 리더십이 반복되며, 부자를 위한 정책과 법 집행이 이어지는 구조는 (중)상류층이 자신이 가진 권력을 토대로 교육제도에 적극 영향력을 미치고 자녀교육에 적극적인 몰두에도 이어진다. 


학벌주의의 이면에 놓인 능력주의가 사회 전반에 팽배한 것을 샌델은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하나의 성취로 보며, 그 성취가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만 달성한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시민적 감수성이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책에서 중요하게 다룬다. 마이클 샌델이 분석 대상으로 삼은 미국이 가진 특수성 중 하나가 '기독교 세계관'이다. 욥기서를 사례로 들어 승자에게 오만을 안겨주고 패자에게 굴욕을 주는 능력주의의 구조가 과연 공정한 정의인지를 이를 통해 반문한 점은 정치철학자인 샌델다운 예시로 흥미로웠다.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분석에서 논의를 그치지 않는다. 적극적인 해결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바탕으로 한 '열심히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 신념이 무너지는 사회를 즉시하며, 타개할 방법을 모색한다. 그는 기본적으로는 ‘운’이 주는 능력 이상의 과실을 인정하고, 겸손한 마인드로 연대하며, 일 자체의 존엄성을 더 가치 있게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하며, 일과 사람의 존엄이 가진 가치가 우선시 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으며 2012년 수능이 끝나고, 《정의란 무엇인가》를 열심히 탐독하던 내가 떠올랐다. 이후 대학 전공 수업에서 다시 만났던 그 책만큼이나 《공정하다는 착각》은 20년대를 대학에서 보낼 학생이 읽으면 좋은 책이 아닐까 싶다. 물론,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내게 《정의란 무엇인가》가 벅찼던 것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는가'라는 질문과 샌델이 정리한 생각을 읽는 과정은 대입 논술이나 면접을 넘어, 대한민국 사회를 살아가는 책임 있는 개인으로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반추하게 할 것이라 믿는다. 


※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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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 :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바다처럼 짰다 띵 시리즈 6
고수리 지음 / 세미콜론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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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가볍지만 마음은 든든해지는.. 우리 엄마 음식이 생각나는 에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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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카의 뇌 - 과학과 과학스러움에 대하여 사이언스 클래식 36
칼 세이건 지음, 홍승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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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좋은 사람처럼 그냥 좋아하는 작가. (작가라는 이름이 적당한지 모르겠지만) 칼 세이건이 나에게 그렇다. 그냥 좋다. 다른 책을 읽어보지 않아 비교가 어렵지만, 《브로카의 뇌》는 그가 써온 에세이를 조금 다듬고 보강하여 엮은 책으로 난이도가 비교적 쉬운 과학책이었다. (물론 조금 더 배경지식이 있다면 이해가 쉬웠을 것이라는 아쉬움과 대학교 1학년 교양 수업 <우주의 이해> 때 배운 내용이 밤하늘의 별빛처럼 잠깐 반짝할 때의 뿌듯함이 동시에 스치는 과.학.책.이라는데 강조를 둔 말이다)

부제처럼 '과학과 과학스러움'의 경계를 가르는 그의 생각이 글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2부 역설가들에서 과학처럼 보이는 과학 아닌 것에 대한 경계심을 아낌없이 드러낸다. 그러다가도 SF소설에 한해 관대한 그의 태도가 왠지 귀여웠다. 물론 귀여운 그의 태도엔 어김없이 명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과학자의 과학적 상상력처럼 사회에 SF소설이 미래를 위한 중요한 생존 수단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소설보다 영화가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란 매체의 중요성까지 높이 평가한 그의 생각이 맞아들어갔음을 확인한다는 점에서도 인상적이었다.

그 외에도 그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지난 과학사에서 끌어온 매력적인 인물에 대한 탐구와 이를 바탕으로 과학이 어떻게 과학다운 길을 걸어왔는가에 대한 애정이 어린 서술은 명료함과 수려함을 겸비한 그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고더드가 누군지 모르기에 글은 썩 재미없었지만, '18장 벚나무를 지나 화성으로'라는 제목이 참 예뻐서 인상적이었다) 비교와 관찰이 빠진, 두루뭉술한 설명이 아닌 앞 혹은 뒤에 이유와 배경이 들어간 그의 글은 탁탁 그의 생각을 확인하며 느끼는 산뜻함이 좋았다.

그는 물리학의 눈부신 성장을 체감하던 시대, 과학자였다. 과학 내 다양한 학문분과 내 성장이 있었지만, 물리학 그중에 천문학처럼 생경하고 낯선 시각적 충격을 대중에게 안겨준 학문분과는 없었을 것이다. 밤하늘로 가늠하던 사람에게 우주란 광대함이 주는 벅참은 지식의 유무를 떠나서 주는 여운이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들어 물리학의 시대에서 생물학(생명공학)이 과학의 위상이 옮겨졌지만 여전히 그의 글은 당당하고 매력적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역시 과학적인 방법으로 사고하고 세상을 관찰하고 받아들이는 일관된 자세에 있다. 거기엔 늘 완전하지 않다는 의심과 그럼에도 이 방법이 우리가 알고 있는 방법 중 최선이란 단단한 믿음이 있다. "과학은 더 복잡하고 미묘하고 우주를 훨씬 풍부하게 드러내 주며 우리에게 경외감을 강하게 불러일으킨다. 또 과학은 참되다는, 특별하고 중요한 미덕 - 이 단어가 어떤 의미가 있든 - 을 가지고 있다"라는 그의 생각이 꽤 섹시했다.

"살면서 가장 흥분되고 만족스러우며 즐거운 시간은 단연코 무지에서 벗어나 이 근본적인 주제들을 알게 되는 시간이다. 의문을 품는 데에서 시작해 이해로 끝나는 시대가 이제 시작되었다."

아, 이런 멋진 서문을 쓰는 작가를 그냥 좋아한다고 말하다니.역시 나의 무지를 걷어낼 필요가 있다. 그의 또 다른 책을 읽으며, 그를 알게 되는 시간이 나에게 또 즐거움을 주지 않을까. 그런데 칼 세이건 책은 출퇴근길에 읽기 너무 크고 무겁다. 한동안은 쉬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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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연필 - 연필이 연필이기를 그칠 때 아무튼 시리즈 34
김지승 지음 / 제철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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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사각. 연필을 난 좋아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친구들은 하나 둘 톡톡 누르면 나오는 샤프를 쓰기 시작했다. 유행처럼 샤프를 쓰기도 했지만, 난 연필이 더 좋았다. 왜 좋았는지 생각해보면, 사각사각 아빠가 연필을 깎아주는 시간이 좋아서였던 것 같다.

일요일 밤이면 한손 가득 연필을 들고 샤워하고 나온 아빠에게 뽀르르 다가가 연필을 깎아달라고 했다. 연필깎이만 3개가 있었지만, 일요일 밤마다 아빠에게 연필을 칼로 깎아달라고 조르는 시간이 난 좋았다. 어지간하면 거절하지 않는 아빠 옆에 붙어서 나는 아무리 해도 안된다고 쫑알쫑알 거리던 그 시간이 행복했다. 더는 아빠에게 연필을 깎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민망스러운 나이가 되어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만큼 난 그때가 좋았다. 지금도 연필을 칼로 잘 깎고 싶어 몇 차례 시도했지만, 여전히 나는 연필을 잘 못 깎는다. (그리고 칼로 능숙하게 연필을 잘 깎는 사람을 보면 굉장히 멋져 보인다)

"연필을 아낀다’를 연필 쓰는 사람의 언어로 번역하면 ‘연필을 즐겁게 자주 쓴다’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몽당연필이 되기까지 이 세상에서의 소멸을 돕는 방식으로의 아낌이다. 연필들은 천천히 사라진다. 그들을 아끼는 사람들의 손에서. "

이 책의 에피소드는 내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저자만의 경험이 단단한 흑연처럼 뭉쳐져 있었다. 그 속으로 닿기 위해 열심히 나무를 깎듯 이야기를 읽었지만, 나는 충분하게 그 이야기에 닿지 못한 것만 같다. 어쩌면 난 2B 정도를 기대하고 읽은 이야기에 4B 정도의 이야기 아니 그 이상의 진하기를 가진 이야기를 만나 그럴지도.

"사람이 잘 부서지는 존재이고, 의아할 만큼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은 ‘안다’고 말하기보다 ‘모를 수가 없다’고 해야 한다. 삶이 환기시키는 건 그런 거다. 우리는 그냥 알기보다 대체로 모를 수가 없는 경험으로 자란다. 상담가가 내려놓은 연필 끝이 뭉툭해져 있었다. 흑연은 잘 부서졌다. 사람이 그런 것처럼 흑연도 강하지 않았다. 나는 다행히 흑연은 아니었지만 공교롭게 사람이었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더 약해질 수 있는 존재가 나이기도 하다는 걸 모를 수가 없어서 모른 척하고 산 것일지도."

이야기 중간중간에 어떤 문장들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를 비롯해 작가의 이야기를 연필과 엮어낸 글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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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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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하지만, 설명하기란 쉽지 않은 것. 내 것이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남의 것은 더더욱 쉽지 않은 것. '마음'이 그렇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렵고, 설사 마음이 통했다고 해도 한순간에 쉽게 틀어져서 마음은 어렵다. 또 그 모든 과정에 마음은 흔적을 남긴다. 좋았던 순간뿐만 아니라 마음이 통하고픈 간절함이나, 어긋나 깨어져 버린 아픔은 유독 시간이 지나도 지울 수 없는 흉으로 깊이 남는다. 모든 이와 관계를 단절한다 해도 자기 자신과 관계를 끊지 않는 이상 이어지는 '마음'은 인간이라면 놓을 수 없는 고민이기에 어렵고 또 어렵다.

나쓰메 소세키 《마음》은 일본 메이지 시대가 끝나가던 20세기 초, 당대 지식인의 관계로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에 힘겨운 '개인'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사람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있는 '나'와 세상과 사람에 대한 모든 기대감을 잃은 '선생님'. 대조적인 두 인물이 자신의 괴로움을 나누며 서로의 마음에 가닿는 점이다. 거리를 두는 선생님께 다가가려던 '나'가 비로소 선생님의 마음을 알게 된 순간, '선생님'이 자신의 마음을 설명할 수 있는 순간이 물리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끝나는 시점이란 점에서는 먹먹한 작품이었다.

어두운 것을 가만히 응시하고 그 안에서 자네에게 참고가 될 만한 것을 붙잡게.

선생님이 나에게 보낸 편지에는 누구에게도 유일하게 신뢰했던 관계를 깨트린 인간이 했던 선택. 그 후 누구에게도 신뢰를 줄 수 없어 누군가에게 남긴 상처. 그 상처가 되돌아오며 무너지는 씁쓸한 인간의 괴로움이 있었다. 자신의 본심을 마주하는 것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일이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숙명이듯, 인간이라면 내 안에 숨겨진 자신만의 고독에 닿아야 하는 순간이 있다. 이를 똑바로 응시할지, 힐끗 보고 돌아설지는 개인의 자유이지만, 나의 본연을 발견하고 마주하는 순간에 개인은 그 이전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다.

"예전에 그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기억이 이번에는 그 사람 머리 위에 발을 올리게 하는 거라네. 나는 미래의 모욕을 받지 않기 위해 지금의 존경을 물리치고 싶은 거지. 난 지금보다 한층 외로울 미래의 나를 견디는 대신에 외로운 지금의 나를 견디고 싶은 거야. 자유와 독립과 자기 자신으로 충만한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 이 외로움을 맛봐야 하는 거겠지."

누군가에게 내 솔직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 내 마음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 점점 어렵다. 선생님에게 다가가려는 '나'의 마음보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선생님'의 마음에 더 끌렸던 이유는 그동안 인간관계에서 남은 상처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마음의 딱지가 만든 벽이 무너지기는커녕 점점 두껍고 단단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믿고 싶지만 한편으론 상처받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때론 미소로 때론 외면으로 내 본심을 숨긴 채 저마다 자신의 외로움을 키워내는 것이 먼저 태어난 선생, 아니 어른이 되는 과정일까. (그래서 '선생님'인걸까?)

나조차 믿을 수 없어 남을 믿을 수 없는 마음. 그런데도 마음을 주고 싶지만 정작 줄 수 없는 공허함. 그 채울 수 없는 아이러니한 마음의 역설이 주는 고독을 끌어안은 인물을 정갈하고 섬세한 이야기로 풀어낸 《마음》. 나쓰메 소세키가 소설을 완성하기까지 자신의 마음에 남겨진 자국을 어떤 마음으로 응시했을지 궁금해진다. 그 지켜봄이 역설적인 마음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소설가로 만들어주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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