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암 - 나쓰메 소세키 사후 100주년 기념 완역본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보랏빛소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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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작품이 주는 아쉬움 그리고 여운,
나쓰메 소세키 《명암》

 

 

나쓰메 소세키.
일본 문학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도련님》《나는 고양이로소이다》《런던탑》 등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일본 근대 사회를 표현한 그의 작품은 우리나라에 소개되었고, 고전 혹은 명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서가에 반듯이 놓여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에서만 인기 있는 작가인가? 아니다. 그는 2004년까지 일본 천 엔짜리 지폐의 모델이었으며,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작가다. 그가 세상에 내놓은 마지막 작품이 미완이라는 사실은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미완성작,  《명암》은 그가 신문사에 연재했던 연재소설이었다. 연재 중에 위궤양이 심해져 결국 사망하였고 188편을 끝으로 이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그는 이 작품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을까.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는걸.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문득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가 떠올랐다. 그의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미완의 작품으로, 원래 지금 나온 분량만큼의 뒷이야기가 더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못했던 도스토옙스키는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다. 물론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은 지금 나온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하지만, 그 뒷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해지는 게 사실이다. 반면 나쓰메 소세키는 카라마조프가 형제들보다 더 완성도가 아쉬운 작품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도 그의 《명암》을 읽으며 도스토옙스키를 떠올린 건, 마지막 작품이 미완이라는 공통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고상한 정조를 일부러 속된 그릇에 담아 감상적으로 독자를 자극하는 책략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도스토옙스키가 먹혀들어 간 덕분에 많은 모방자가 속출해서 터무니없이 저속해진 일송의 예술적 꼼수에 불과하다는 거야.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99쪽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그의 글에서 언급되었다. 그리고 고작 2주간 벌어지는 일인 '죄와 벌', 4일간 벌어진 일인 '까라마조프가 형제들'처럼 약 2주간 있었던 일이지만, 서사의 양이 장대한 점이 닮아 있다. 무엇보다 그가 만든 인물 속에 도스토옙스키 인물들의 성격과 글쓰기 방법이 닮아 있어 자연스레 떠올랐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는 '작가'라는 권위 있는 주체가 없다. 작가 역시 하나의 인물로 소설 속에 참여하고 있다. 모든 인물이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이에 대해 작가는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그저 이들의 목소리를 글로 옮길 뿐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다성악 소설이라고 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명암》도 다르지 않았다. 각 인물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입장에서 한다. 작가가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자신의 목소리로 한다. 작가는 인물들의 행동에 대해 설명한다. 평가과 완전히 배제되었다고 할 수 없지만, 최대한 주인공 스스로 자신의 생각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작가는 이야기의 세계를 열어두고 있다. 주인공 부부 오노부와 쓰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인물들의 생각이 무엇인지 찾아낼 필요가 없다. 있는 그대로 그의 감정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대신 인물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말하는 때까지가 좀 길거나, 혹은 그 말할 때가 오기 전에 작가가 세상을 떠나서 들을 수 없다는 게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다. 아마 이건 신문에 연재했던 소설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싶다. 신문에 연재하는 소설이기 때문에 지난 문맥에서 주인공의 생각을 유추하게 하기 보다, 주인공의 생각 그 자체를 그의 목소리로 전하는 게 독자들이 더 편하게 느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읽다 보면, 일일드라마 한편 한편을 엮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가장 비슷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NHK의 아침드라마였는데, 15분 분량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형식이 짧은 이야기가 이어진 연재소설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오노부와 쓰다다. 쓰다와 오노부는 결혼한 지 6개월이 지난 부부다. 아직 서로가 낯선 건지, 친해지지 못하는 건지 어색함이 감도는 보통의 신혼부부처럼 보인다.  1900년대 초, 일본 근대 사회에 젊은 부부의 자유로운 생각을 담기 위해  나쓰메 소세키가 주인공으로 삼은 인물이다. 이들 부부 곁에 가족, 직장동료, 친구의 관계가 부부 사이를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한다.


두 사람은 오노부가 쓰다네 집에 책을 빌리러 가서, 쓰다를 보고 첫눈에 반하면서 그 관계가 시작된다. 오노부는 쓰다와 혼인을 하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사랑을 스스로 결정했고, 이를 부모님께 알리고 결혼으로까지 이어진다.

 

오노부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한다고 굳게 믿는다. 물론 그녀의 삶은 결혼과 함께 자신의 남편과 떨어트려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은 1900년대 초 일본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 이해해야 한다. 그런 오노부에게 사촌동생 쓰키코는 묻는다. 자신과 결혼할 남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쓰기코에게 오노부는 말한다.


"쓰기코, 너 알고 있니? 여자의 눈은 자기와 연고가 가장 가까운 사람을 만났을 때 비로소 눈이 잘 트인다는 사실을. 눈이 1초 사이에 10년 이상의 공훈을 세우는 건 그때밖에 없어. 게다가 그런 경우는 누구든 일생에 흔히 만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때에 따라서는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할지도 몰라. 그러니까 내 눈 따위는 맹인이나 다름없어. 적어도 평소에는."


물론 이 대답은, 쓰기코와 오노부 사이에 미묘한 경쟁과 특수한 상황이 얽힌 결과물이었지만. 이 말속에 "오노부의 생각"은 분명히 담겨 있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사랑이 옳다는 걸 만드는 건 자신이라는 답을 함께 얻는다.

 

 

아이러니 한 건, 이 말을 할 때 오노부는 쓰다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어렴풋 그 문제가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을 때라는 점이다. 사실 오노부를 만나기 전에 쓰다는 한 여자를 사랑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혼을 약속했지만,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고 쓰다 곁을 떠났다. 아무 이유도 듣지 못한 채 쓰다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보냈다. 그래서일까, 그 미련을 느끼고 있으며 그 미련은 아내인 '오노부'에게 미안함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아내인 오노부를 사랑하면 되는데, 쓰다 사랑 대신 아버지에게 받은 생활보조금으로 오노부에게 반지를 사준다. 이게 오노부가 결코 원하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처음에 무관심하게 보였던 그는 점점 자기 쪽으로 매혹된 듯 다가왔다. 일단 매혹된 그가 이번에는 차츰 자신에게서 멀어지며 변해가는 것이 아닐까? 그녀의 의심은 거의 기정사실이었다. 그녀는 그 의심을 말끔히 떨어내기 위해 그 사실을 뒤엎지 않을 수 없었다."

 

쓰다와 오노부는 쓰다의 과거 문제에 대해 오노부가 먼저 입을 연다. 이 상황을 더 유지하는 것을 오노부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게, 오노부가 쓰다를 사랑했기 때문이고, 쓰다는 오노부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쓰다가 오노부를 사랑했다면, 처음부터 이 문제가 두 사람 사이의 문제가 되지 않게 정리를 했어야 했다. 혹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면, 오노부가 이 문제에 대해 어렴풋 알게 되었을 때, 혼자 생각하게 만들지 않고 불안하지 않게 했어야 했다. 하지만 쓰다가 한 건 피하는 것 말고 아무것도 없었다. 쓰다는 이 문제에 대해 회피하려고 했으나, 결국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숨기만 안 돼요. 당신이 숨기면 다음 말을 할 수 없게 될 뿐이니까."


물론 이 대화에서 쓰다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이었고, 오노부가 유리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 관계를 만든 것은 쓰다이기에 그가 느낀 감정보다 이런 그를 바라보았을 오노부에게 마음이 갔다. 결국 쓰다가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미련인지 사랑의 잔재인지 알 수 없는 관계를 끝내라며, 오노부는 쓰다에게 전 연인을 만나러 가라고 한다. 그리고 전 연인을 만나면서 이 소설은 미완의 결말을 내린다.

가장 중요한 때에 소설이 끝나버려 아쉽다. 처음에는 아쉬웠고, 왜 결론이 없는 건지 살짝 화가 나기도 했다. 600쪽 가까이 되는 이야기를 읽었지만, 그건 지금을 위한 토대였을 뿐이라. 그다음에 나올 결정적인 이야기가 중요한데, 나오지 않아서. 그런데 이야기가 비워둔 자리에 내가 설 수 있었다. 내가 소설에 참여하고 있었다. 궁금증으로, 오노부를 응원한 독자로.


쓰다가 과거의 연인을 사랑하는지. 그 연인 역시 쓰다를 잊지 못했는지. 사실 나에게 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보다는 쓰다를 그 상황으로 만든 오노부가 어떻게 할지가 궁금했다. 만약 옛 연인과 사랑을 정리하지 못한 채 쓰다가 돌아온다면 오노부는 어떻게 할까. 혹은 미련이 남았다는 걸 확인한 채 돌아온 쓰다를 오노부는 어떻게 대할까. 자신을 굳게 믿고, 자신의 결정이 옳다고 생각하는 오노부가 자신의 상황에서 무엇을 결정할까.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을  《명암》은 주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생각해보라고, 숙제를 남긴 채 나쓰메 소세키는 떠났다.

 

그의 마지막 작품 《명암》을 역자가 높이 평가한 이유는, 결정적인 순간에 끝난 서사 뒤에 자신의 생각을 더할 수 있는 여백 때문이 아닐까. 나쓰메 소세키의 죽음은 그가 결정할 수 없었지만. 그다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하게 이끌어온 이야기의 서사 그리고 모두가 주인공이게끔, 모두가 작가이게끔 만든 그 이야기를 높이 평가했다고 난 생각한다. 나 역시 이를 높이 평가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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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여자들 - Dear 당신, 당신의 동료들
4인용 테이블 지음 / 북바이퍼블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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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삶의 순간들 속에서 건진,
그 쉽지 않았던 삶의 고비와 그 이후에 대하여

 

 


당신은 어떤 인터뷰를 주로 읽나요?
 
난 스마트폰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스타들의 인터뷰 영상을 보고, 신문으로 굴곡진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의 인터뷰를 읽는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다. 당연하다. 인간이라면 '호기심'을 가지고 있고,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니까.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읽는다. 이를 통해 그들의 삶을 조금 알게 되고, 때론 그들의 삶을 이해하기도 한다.

 

《일하는 여자들》은 우리가 주로 보는 인터뷰와 사뭇 다르다. 우선 아주 특별한 사람들은 아니다. 보통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한 다리 혹은 세 다리 정도 건너면 알 수 있을 법한. '자신의 영역에서 나름 흔적을 남기며 일해왔고, 지금도 일하고 있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 배우 전문기자 백은하 / 영화감독 윤가은 / 일러스트레이터 임진아
/ 아티스트 양자주 / 작가 최지은 / GQ 에디터 손기은
 / 공연 연출가 이지나 / 극작가 지이선 / 기자·방송인 이지혜
 / 뉴프레스 공동대표 우해미 / N잡러 홍진아

 

《일하는 여자들》에는 11명의 interviewee의 이야기가 차곡차곡 담겨있다. 언론, 방송, 예술계에 집중하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은데, 이는 인터뷰를 한 4인용 테이블 구성원들이 관심 있는 사람들을 집중 취재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 분야와 근접한 직군에 종사하고 싶기에, 더 관심이 갔다. 여성 롤모델을 찾기 힘든 그곳에서 자신만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들의 삶이 어떤 모습을 내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고민을 하고, 무엇을 꿈꾸는지.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동료에게. 후배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지.

알고 싶었다. 평범하게 '일하는 여자들' 중 11명인 우리들의 이야기가.

 

 

 

나로부터 출발한 이야기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많이 한다.
이게 나 혼자만 하는 생각인지, 상식의 문제인지,

나조차도 편견을 가진 건 아닌지.

 


우리들(여성들)의 목소리를 엮어냈기에, 당연히 '페미니즘'에 대한 책이었다. 하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이론에 대해 설명하거나, 집단적인 실천을 강조하는 책은 아니었다. 일하는 여성들의 '일'상을 다룬 인터뷰집이었다. 이제 막 젠더 감수성이 생겨나기 시작한 우리들이 돌아본 지난날에 대한 이야기였다. 일하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했을 법한 생각과 마주했던 고민을 말한 인터뷰다. 그 과거와 현재를 보며, 앞으로를 어떻게 걸어가면 좋을지 '질문'을 남기는 책이었다.

 

 

 


어느 순간, 살아남은 여자 영화기자가 거의 없으니까 정작 나에게는 롤모델이 없는데
내가 후배들의 롤모델이 되어버리더라.

 

자신의 앞에 누구도 없어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 헤맨 흔적이자, 이젠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어 책임감을 가진 사람의 고백이다. 쉽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과 기회를 잡았고 '나'를 지키며 그녀들은 자신만의 단단한 삶을 일구었다.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단 걸 알기에. 그들이 막 직장에 들어섰을 때 이야기는 짧게 나오지만, 마음에 아프게 다가갔다. '성희롱'과 '자기검열'이 일상이고 이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부재했던 때를 지나와, 아주 조금씩은 나아져가는 지금을 살아가기까지를 너무 담담하게 말해 묘하게 마음속에 잔향을 남겼다.

 

담담함 속에 그녀들은 자신을 이야기한 뒤, 지금 우리에게 하고픈 말을 한다.

 

 

  

롤모델이나 멘토 같은 이름보다는 나는 그냥 나 자신이고 싶다.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게 참 어려운 일이다.
특히 여성이거나 약자이면 더.
나부터가 그렇게 되어야 그런 세상이 빨리 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무엇을 선택할 때, 내가 먼저 했던 고민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려주고 싶다. '
일이든 결혼이든 결정하기 전에는 이런 걸 생각해보면 좋겠다.',
'그 선택으로 인해 내가 잃는 것은 무엇일 수도 있다'하는 부분들.
그걸 공유할 수 있다면 어떠한 시행착오든 줄지 않을까.

 

 

  

강의를 듣고 책을 읽고 공부하기 전에,

누군가의 강압이 아닌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자발성이 중요하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포기하고 막 살까?
아니,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는 일들을 찾을 수 있는 거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각자가 잘 사는 게 중요하다.

 

 

 

'No'를 했다고 찍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당신 인생에서 볼 일없는 잔챙이 그릇이니 아웃시켜도 된다.
진짜 어른은 그렇게 말했을 때 오히려 '너 뭐 있다'하고 지켜보는 경우가 있다.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심하게 툭' 건네기도 하고, '따뜻하게' 들려준다.

 

그 이야기 속에는 '우리'라는 연대감이 녹아져 있다. 그래서 무심함 속에서도 온기가 전해지고 따뜻함 속에 뜨거움이 느껴진다. 남성으로 대표되는 분야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있는 이들의 응원엔 '우리는 함께 한다''라는 연대감이 깃들어 있다. 완전한 글로 이를 느껴보길 추천한다.

 

 

  

그동안 우리가 같은 사회 안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다른 세상에 사는 거나 마찬가지다. 여성들이 어떤 경험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왜 이렇게 얘기하는지 일단 많이 들어주고, 그다음에 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으면 한다고.

 

 

 

무엇보다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일상적인 교류 속에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되새긴다.

 

 


《일하는 여자들》은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다. 페미니즘이 여성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 모두의 이야기이듯. 《일하는 여자들》도 일하는 여자들뿐만 아니라, 그녀들과 함께 일하는 그들에게 함께 전하는 이야기다. 《일하는 여자들》이 느끼고, 느낄 수밖에 없었던 감정들에 대해 함께 공감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그렇다고 동감을 강요하지 않는다. 공감이란 같은 마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이해하는 지점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는 넓이가 넓어지고 폭이 깊어질 때, 세상은 반드시 아름다워지기에. 《일하는 여자들》은 일하는 여자들의 '일'상이라는 부분 이해가 넓어지고 깊어지길 바라는 책이다.

 

 

언젠가 혹은 지금도 어쩌면 앞으로 겪을 일과 고민들을 말한 《일하는 여자들》. 그래서 이 인터뷰집은 다른 인터뷰와 달리 한번 보고 지나칠 수 없다. 누군가의 삶에 대해 답을 내리고, 전달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질문"을 남기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나'가 되고 싶지?"

 

그들의 삶의 조각들이 '나'에게 건넨 질문에 답하며,
나 또한 누군가에게 '답'이 아닌 '질문'을 남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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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 감정 오작동 사회에서 나를 지키는 실천 인문학
오찬호 지음 / 블랙피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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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를 보고,
"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라고 읽었다.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를 읽고 떠오른 단어가 있다. '프로불편러'다. 이 단어에 담긴 뉘앙스와 맥락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보다 더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 '프로불편러(pro+불편+er)'는 사이버 공간에서 '불편하다'는 말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동조를 이끌어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_ 네이버 국어사전 (오픈사전) "

 

처음 오찬오 교수의 책을 읽으면, 내가 프로불편러가 된 기분일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문장 하나하나가 어찌나 불편하던지. 그의 말에 토를 달고 또 달았었다. "꼭 그렇게 생각해야 하나?"라는 토를 말이다. 하지만 이내, 그의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처음 읽고서, 내 생각과 머리를 관통했던 그 울림이 기억난다.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차별적이었는지. 나를 지킨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해치는 줄도 몰랐다는 사실에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이미 책을 통해 그를 만나서일까.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를 읽고서 "아, 우리 사회에 필요한 진짜 프로불편러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가 말하는 불편함을 불만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감정적 호소로 토로하는 불만과 다른 "불편함"을 말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불편함은 "사회적·역사적으로 통용된 옳음의 기준을 준수하고, 당연히 받아들여져야 할 이타성이 공존하는 불편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불편함은 무엇일까.

 

 

Part 1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만

 

 
첫 장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걸 하나로 요약한다면, "염치 잃은 우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층간 소음 앞에 내세운 이기심, 페미니즘 앞에 날선 논리들, 무뎌진 차별에 대한 인식에 대해 그는 조목조목 이야기한다. 염치 잃은 사회의 단면을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에서 설명한다. 단지 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도 않고, 사회의 문제로 뭉뚱그려 설명하지 않는다.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을 법한 불쾌한 상황이 어떻게 차별로 이어졌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그 논리에 담긴 모순에 대해 문제 제기한다.


어떤 행위에 '선'이라는 정당성을 부여하는 순간, 나 혼자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끊임없이 의미 작용을 하며 나아가게 된다. 그것이 실제로 옳든 옳지 않든 말이다. 옳지 않았던 일이 옳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으며 개선된다면 참 좋겠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옳지 않은 일을 옳은 일이라 믿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게 문제다. 그리고 그 문제에 거기에 '무뎌진 차별 감수성'은 부채질하며 이를 부추기고 있다는 점이다.

 

 

차별 감수성이 무뎌진 데, 난 혐오가 만연해진 것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좀비 놀이에 대해 문제 제기에서, 현재 우리가 일상 속에서 혐오 단어가 만연하게 사용되는 점이 떠올랐다. 한때 "(아이유, 쿨) 병, (급식, 진지) 충"이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일상 대화 속에 비난과 비아냥 거리는 단어가 만연해 그 단어의 수준이 점점 더 거칠어졌었다. 난 이 단어들과 그 단어를 사용하는 분위기가 몹시 불편했다. "논리는 결핍되어 있고, 합당한 이유도 없이, 심지어 웃으며 타인을 비난하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설사 그 이유가 있다 해도 동의하고 싶지도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렇게 하면, 난 "진지충"이 되기에.

나만 이런 불편함을 느꼈을까. 저자만 이런 불편함을 느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안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누구나 불편함을 느꼈고,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 분위기'라서. 진지충으로 낙인찍히기 싫어서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부끄러움은 인간만이 느끼는 감정이며, 염치를 잃은 우리에게 염치를 되찾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그리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자신의 아집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말한다.
물론 그 과정은 매우 힘들다.
하지만 그 힘듦은 환희와 함께이기에 마냥 힘든 것만은 아니란 이야기도 저자는 빼놓지 않고 있다.

 

 

Part 2 그게 다 강박인 줄도 모르고

물론 스스로를 헐뜯는 자기혐오의 부정이 있다면 개선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외부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지하여 부당한 것에 대한 '정당한' 감정을 가지는 사람들이 밑도 끝도 없이 긍정부터 하라는 이들의 분위기에 눌려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 건 하나도 괜찮지 않은 사회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그럼, 항상 염치없이 사는 것일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부끄러움을 느낀다. "한국인들에게는 '뜨거운 에너지'가 많다고 한다. 그런데 뜨거워야 할 때는 모른다면 그 에너지가 무슨 소용인가."라는 저자의 말처럼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려야 할 때를 모르고, 엉뚱한 때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한다. 문제는 그 부끄러움이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이다. 내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게, 내가 괜찮기 위한 노력이 우리를 괜찮지 않게 만든다.

'혼자'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시선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혼자'가 우리 사회에서 주목받는 배경을 함께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문제 제기에 공감했다.

"혼자는 중심으로부터 '배제된 홀로'가 아니라 사회적 관습을 잠시라도 거부하는 '적극적 자아'다.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하고 함께하지 못하는 소극적 인물이 아니라 평범을 가장한 일상의 폭력을 연속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단절한다."

맥락의 중요성에 대해 저자는 강조한다. 왜 우리가 부끄러워하는지, 그 부끄러움을 긍정의 논리로 포장하는 것이 왜 위험한지. 누군가 성공을 하고,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맥락, 양성평등이 실현되기 힘든 사회적 맥락, 누군가 혼자서 있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맥락. 그 맥락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맥락은 일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개천에서 용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 앞에 당면한 현실이라는 맥락이다.

 

Part 3 감정 오작동 사회, 나와 너를 성장시키는 법

 

 

Part 2까지 읽고 나면, 이런 의문이 든다.

 

So What?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해결할 수 있는지 저자에게 묻고 싶어진다. 풀 수 없는 고르디아스의 매듭과 같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말이다.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끊는 방법으로 풀은 알렉산더 대왕 같은 답을 오찬오 교수는 이야기한다.

"개인이 먼저 주체로 서야 타인과의 경계를 인식하여 이를 존중할 수 있고, 책임질 한계가 명확해지며, 집단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에게 최선인 전략을 사고할 수 있다"

여기서 개인이 주체로 선다는 건 무엇일까.
가장 먼저 개인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기준,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나만이 할 수 있는, 나만의 정체성"이다. 사회 시류에 휘둘리는 유행 같은 생각이 아니라, 나만의 가치가 담긴 생각 말이다. 내가 나로 존재할 때, 내가 나만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을 때 그때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을 분위기에 따라 하지 않고, 내가 결정하기 위해서 '개인이 주체'로 서는 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용기 내길, 다른 길을 향해 발을 내딛길 저자는 적극 권면하고 있다.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를 구매하면, 책 속에 있는 메시지가 담긴 키링을 받을 수 있어요! '알라딘'에서는 책 표지 그림의 핀버튼과 스티커를 함께 받을 수 있답니다. 개인적으로 핀버튼이 예쁘기도 하고, 호기심을 자아내는 것 같아요. 누가 "이거 뭐야?"라고 물어보면, 해줄 이야기가 정말 많으니까요.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를 보고, '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진짜 프로불편러가 많아진다면. 우리 사회가 진짜 괜찮아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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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비주얼 클래식 Visual Classic
헤르만 헤세 지음, 추혜연 그림, 서유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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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자기 자신,
오로지 자기의 운명만 원할 수 있을 뿐이다.

 


읽을 때마다 다른 감동을 주는 책을 가리켜 "명작"이라고 한다. 그건 아마 유연하게 생각을 연결할 수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생각을 하고 누가 읽던 그 사람의 심연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지닌 걸 '명작'이라고 한다.
데미안은 여러 번 읽었지만 늘 새로웠다.


재미가 없어서, 재미가 있어서, 슬픔에 잠기게 해서, 기쁨을 누리게 해서, 나를 돌아보게 해서, 세계를 바라보게 해서...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데미안은 주었다. 이번에도 데미안은 이전과 다른 감동을 주었다.

 

조금 다른 지점을 생각할 수 있었던 건, 위즈덤하우스 《데미안》만의 독특한 구성도 한 몫했다. 위즈덤하우스 《데미안》은 군더더기 없이 단백하게 데미안을 담아냈다. 작가의 이야기, 번역자의 해석이나 이야기 없이. 데미안만을 그린다. 텍스트로 그리고, 다른 데미안에서 볼 수 없었던 일러스트로 데미안을 담아 낸다. 마치 만화를 보는 듯한 그림은 결정적인 장면에 등장해 이야기의 강하게 잡아준다.
  

 

처음 데미안을 만났을 때.
싱클레어가 방황했을 때.
두 사람이 완전한 하나가 되었을 때.

이야기 서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한 그림은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그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를 예쁘게 보여준다. 사진으로 찍지 않았지만, 소설 맨 마지막 장 그림이 난 가장 마음에 든다.

 


헤르만 헤세의 자화상 같은 소설, 데미안


오랜만에 데미안을 읽었다. 헤르만 헤세의 수려한 문장은 눈과 머릿속을 즐겁게 맴돌았다. 예전엔 그가 하는 이야기가 뜬구름을 잡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낯설었고, 모호한 그의 표현이 내가 살고 있는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불편하게 느꼈고, 그 불편함이 헤세가 전하고픈 이야기를 듣지 못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그의 이야기는 하늘 위에 두둥실 떠 있는 뜬구름 같다. 하지만 그 구름 사이로 지나가는 태양이 함께 보인다. 그래서 구름 가장자리에 눈부시게 빛나는 "silver lining"이 보였다. 난 데미안이 그의 자화상, 내면에 켜켜이 쌓아 놓은 걸 말한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어느 소설보다 빛나는 소설이다. 그 이유는 헤르만 헤세가 자신의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작가의 이야기보다 나에게는 내 이야기가 중요하다. 나 자신의 이야기이며 한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_ 《데미안》 8쪽

 

세상에 헤르만 헤세라는 대작가의 명성을 내려놓고, 자기가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한 소설이 데미안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 데미안은 그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를 사랑하는 독일 문학계는 싱클레어가 헤르만 헤세임을 밝혀냈지만. 그렇다고 그의 도전이 실패한 건 아니다. 그의 도전 결과가 시간을 넘어, 국경을 넘어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알'을 깨려는 도전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진정한 소명은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 단 한 가지뿐이었다.
데미안을 읽지 않았더라도,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은 알 것이다.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동일인물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는 싱클레어 자신의 내적 대화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실제 데미안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동일인물 간의 내적 대화라고 보는 쪽으로 난 읽었다.) "이런 자극들은 언제나 '다른 세계'로부터 왔으며 언제나 두려움과 속박과 양심의 가책을 동반했다. 늘 혁명적이었고 내가 기꺼이 머물고 싶었던 평화를 위협했다."라는 싱클레어의 말처럼 그는 누군가의 영향 하에 있는 '나'에서 독립적인 '나'로 존재하기 위해 분투한다. 그 독립된 자신만의 정체성을 쌓아가는 과정이 바로 데미안 이야기의 핵심 서사다. 정체성을 가진다는 건, 개인이 홀로 서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는 한 세계나 한 공동체가 자신만의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데만 헤르만 헤세는 "정체성"을  세우는 이야기를 했을까. 난 그가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진정한 의미의 홀로서기가 상실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 사실은 지금도 유효한 메시지다.


아름답지만, 지금 여기저기서 성행하는 공동체는 전혀 그렇지 않아. 진정한 공동체는 각 개인이 서로에 대해 알게 됨으로써 새로 형성될 것이고 한동안 세계를 변화시킬 거야. 지금 있는 공동체들은 그저 패거리일 뿐이야. 사람들은 서로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서로에게로 도망치는 거야.
정체성과 홀로서기에 대한 이야기는 서두와 데미안이 끝날 무렵 두 번에 거쳐 분명하게 말한다. 데미안과 싱클레어에게 당면한 '전쟁'이라는 문제 앞에  나눈 대화가 그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지금 존재하는 공동체는 위태로우며, 필연적으로 해체와 와해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각 개인이 서로에 대해 알게 될 때"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공동체가 공허한 이유는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공감대가 상실되었고 그 자리를 채운 건 두려움과 폭력이었다. 헤르만 헤세는 여기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새로 태어나기 위해 내부에서 분열된 영혼은 미쳐 날뛰면서 죽이고 말살하고 스스로도 죽기를 원했다. 거대한 새 한 마리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고 있었다. 그 알은 세계였고, 그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서 부서져야 했다." 그는 죽음과 부재 사이에 태어나는 것에 주목했다. 두려움과 폭력의 분출은 견디기 벅찬 '운명'의 힘이 비틀려 나온 흔적이며, 그 자리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봤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으나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라고 말한 첫 장의 마지막과 이어진다.


그렇다면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동일인물이고 이 소설의 싱클레어의 이야기, 두 사람의 대화 모두 싱클레어 내면에 있었던 거라면.
헤르만 헤세가 말하고 싶었던 건 자기 자신을 해석하는 내적 대화가 아닐까.
그래서 스스로를 해석한 개인들 간 대화가 보편적인 사회를 그는 꿈꾼 게 아닐까.
이를 신인 작가의 목소리로 말하고 싶었던 건, 명성을 가진 작가로 그 대화를 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 개인으로, 막 등단한 작가로, 자기 자신을 깊게 들여다보며 해석한 개인의 자격만으로 '서로'를 꾸려나가고 싶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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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의 일주일
메이브 빈치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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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치키 스타는, 지극히 소박한 곳이지만 자신의 의견으로는 아주 평화로운 치유의 장소라고 말했다. 그녀 자신도 뉴욕에서 일할 때 해마다 그리고 돌아와 휴가를 보냈다고. 걷고 또 걸으며 넓은 바다를 바라보았고, 그러고 나서 미국으로 돌아가면 항상 뭐든 다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손님도 그런 느낌을 받기 바란다고 말했다.

 

마음에 몽글몽글 온기가 사르르 퍼지는 느낌.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온몸을 간질거리는 느낌.

 

《그 겨울의 일주일》을 읽고 난 뒤 내게 남긴 여운이었다. 오랜만에 가슴이 깊숙이 행복해지는 책을 만났다. 이렇게 책을 읽어본 게 얼마 만인지. 좋은 책을 만났다는 강한 확신이 드는 책이었다. "온갖 사연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치유 공간 호텔 스톤하우스, 이곳의 다음 손님은 바로 당신입니다!"라는 타이틀이 과장이 아님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 겨울의 일주일》는 깊이 고민하며 읽어야 하는 책도 아니었고, 휘리릭 읽는 가벼운 책도 아니었다. 문장은 슥슥 쉽게 읽히고, 마음의 온도를 따뜻하게 올리는 소설이었다. 《그 겨울의 일주일》는 티저 북으로 처음 만났다. 3명의 인물 이야기를 읽었을 때는 지금과 같은 감동을 받지 못했다. 다시 차분히 치기, 리거, 올라의 이야기를 읽고 일주일간 스톤하우스에 머문 손님의 이야기를 읽었을 때 지금과 같은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고로, 혹시 티저 북을 읽고 2% 아쉬움을 느낀 분이 있으시다면, 《그 겨울의 일주일》을 완독하길 강력 추천한다. 나 역시 티저 북을 읽었을 때, 감동을 받기 보다 호기심이 생긴 독자 중 한 명이었다.

《그 겨울의 일주일》을 읽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왜 이 소설을 읽고 이토록 행복할까?


《그 겨울의 일주일》의 무엇이 날 이렇게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한 권의 책을 읽고 좋았던 이유를 적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지금 받은 감정에 충실하게 그 이유를 적어보려 한다.


옮긴이는 메이브 빈치의 유작인 《그 겨울의 일주일》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유작이 된 이 소설은, 그래선지 그녀가 지금껏 살면서 경험한 모든 일과 그녀가 만나온 모든 사람과 그 순간순간의 모든 비밀이 압축된 하나의 집약체라 해도 될 듯하다. 그녀의 눈길이 가닿은 자리마다 한 포기 풀이 자라고 한 송이 꽃이 피어날 것처럼 그녀는 모든 만남을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한 장면이나 인물을 스케치하고 디테일을 넣어 만들어낸 풍경이 하나둘 모여 더 큰 풍경, 점점 더 큰 풍경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인간 존재라는 큰 풍겨, 세상살이라는 큰 풍경에서 한 조각 한 조각 떼어내면 그녀가 그래는 장면 하나하나, 인물 하나하나가 커다랗게 부각되어 나타날 것이다."
_ 옮긴이의 말 중에 《그 겨울의 일주일》 464쪽


정연희 선생님은 그림처럼 이 소설을 묘사했다. 원어로, 이를 다시 한국어로 읽어서일까. 참 딱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난 메이브 빈치가 《그 겨울의 일주일》의 인물들을 그린 종이가 셀로판지가 아닐까 싶었다. 나에게 《그 겨울의 일주일》은 사물과 빛을 투과하는 투명한 색비닐지에 메이브 빈치가 그린 그림 같았다.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을 하얀 도화지에 대해 세밀하게 그려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그린 것이 아니라 셀로판지에 네임펜으로 투박한 선으로 그리기도 하고 중요한 부분은 섬세하게 그린 느낌. 그래서 그 그림은 한 장 한 장 살펴보았을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그림과 겹쳐서 볼 때 완성되는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을 주었다.
치키, 리거, 올라 세 사람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위니에서 프리다까지)의 이야기로 옮겨질 때,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각 장의 서두는 인물들이 어떻게 삶을 살아왔는지 이야기한다.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가기도 하고, 정육점에서 고기를 훔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망설이다가, 여행 일정이 어그러져서,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하고... 이유는 달랐고, 삶의 모습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모두 스톤하우스에 있었다. 12명의 '지금' 그리고 앞으로 1주일 정도의 시간은 스톤하우스에서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각 인물은 자신의 셀로판지 속 주인공이었지만, 때론 다른 사람의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배경으로 들어가기도 했고, 결정적인 한 마디를 건네는 조언가가 되기도 했고,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그 겨울의 일주일》의 이야기를 완성하고 있었다.
어떤 한 인물 때문에 좋았던 게 아니었다. 모든 이야기가 모였을 때, 《그 겨울의 일주일》을 다 읽었을 때 그 순간이 참 좋았다. 왜인지 생각해보았다. 그건,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겹쳐져 따뜻한 빛을 비추는 순간에 마음에 온기가 탁 들어와서, 그래서였다. 마치 셀로판지 한 장 한 장에 손전등을 비추었을 때 다른 색 빛을 내지만 모두를 겹쳤을 때 하얀 빛을 내는 것처럼, 모든 이야기가 모였을 때 새하얀 빛이 마음을 비춘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 그 빛이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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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 겨울의 일주일》의 주인공을 굳이 꼽으라고 한다면, '치키'가 아닐까. 모든 인물을 스톤하우스로 모여들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오가는 이야기를 건네고 있으니까 말이다. 치키의 마음이 단단해지는 걸 가장 먼저 읽어서일까. 그녀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 속에 배경으로, 조언해주는 사람으로, 침묵으로... 다양한 관계에서 그녀만의 존재감을 드러낼 때면 괜스레 마음이 놓였다. 마치 오랜 시간 언덕을 지켜온 '스톤하우스'와 그 바다를 보고 치키가 느낀 편안함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은 그런 편안함이 느껴졌다.


"설명해야겠지요. 아버지는 늘 분명하고 정중했으니까 저도 그렇게 할 거예요. 아버지의 꿈에 대해서는 어떤 비난도 하지 않을 거예요. 다만 그 꿈이 제 꿈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려고요." 그의 목소리는 자신감에 넘쳤다.
치키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치키는 많이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상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공감이 주는 위로를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꿈과 자신의 꿈 사이에서. 성공이라고 믿고 싶은 것과 진짜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한 사람 사이에서 고민하던 안데르스에게 그녀는 몇 마디를 해주었다. 그리고 안데르스 스스로 행복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한 뒤, 그의 결정에 끄덕임으로 지지를 표했다.
빙긋 짓는 미소 한 번이,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새삼 작은 행동이 주는 감동의 소중함을 되새겼다.

 

"그 능력을 뭐라고 부르던 간에요. 미래에 대해 뭐든 모호하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세요. 사람들이 별점에서 기대하는 것도 그런 거예요. 그렇게 하면 그 능력도 길이 들어서 해롭지 않게 될 거예요. 제가 지금 보기로는, 그런 환시 때문에 죄의식에 빠져 계신 것 같아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만들려고 해보셔야 해요. 사람들한테 생각이 떠오르는 것처럼, 그것도 그냥 생각이에요. 그뿐이에요."


때로는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 한 사람의 고민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마법을 부리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나에게 정말 태산처럼 커다란 고민이었는데. 그 사람 앞에만 가면, 별거 아닌 작은 게 되는 신기한 경험.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의 크기를 줄여주는 사람. 치키는 프리다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프리다 역시, 리키가 가지고 있는 비밀을 작게 만들어주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그 간단한 마법을 알려주는 책이기도 했다.)


모두 잘 될 것이다.


빈 말이 아니라, 정말 다 읽고 나면 모두가 잘 될 것 같은 이야기였다. 마음이 따뜻해져서 힘을 얻는 느낌이다. (비슷한 소설을 찾아보자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주는 느낌과 비슷하다.)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벌어진 일들이지만.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훌쩍 지난 1월의 혹은 2월의 어느 일주일 동안 읽어도 행복해질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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