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어떻게 보이세요? -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의 빛을 따라서 아우름 30
엄정순 지음 / 샘터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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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보임





나와 다름을 보는 것이 재미있다고 느낄 때 더 많은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내가 본 것들이 결국 나이기 때문입니다.


시각 장애는 나에게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내 동생이 시각 장애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본다는 말이 익숙하지만 한없이 낯설어지는 순간을 삶에서 종종 마주했다. 그렇기에 《세상이 어떻게 보이세요?》는 마냥 특별한 이야기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는 특별함을 이야기하지만 나에게는 평범한 이야기 일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이 책에 대해 다른 마음을 가지게 된 건 '다르게 보기(Another way of seeing)'을 추진했던 저자의 이력 때문이었다. 저자가 추진했던, 시각장애 학생을 위한 미술 프로그램을 동생이 다녔던 학교에서도 했었기 때문이다. 동생은 다른 부 활동을 했기 때문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동생의 절친한 친구가 그 프로그램에 참여했었다. 동생에게 그 부분을 읽어주자, 가명이지만 누구인지 알 것 같다고 하며 기억력 좋은 동생 답게 그 때 친구들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피식 웃다가 제목을 다시 봤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의 본질의 빛을 따라서'를 읽으며 과연 질문의 본질이 무엇일지 알고 싶어졌다.


"제가 전맹이라서 예전에는 이미지가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자유가 떠올라요."


저자는 청주에서 살았고, 청주에는 장애를 겪는 사람들을 위한 특수 학교가 있는 지역이다. 의사였던 아버지께 은연중 느꼈던 것이 오랜 시간 마음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떤 순간에 미술 대학교수를 하던 저자에게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시작점이 되었다. 사실 쉽지 않은 프로젝트였고, 좀처럼 시도할 생각조차 하기 힘든 도전이었다. 아마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쉽지 않고, 어렵고, 특별한 도전"이라는 생각 말이다. 어렵게 시작했지만, 마음 먹기보다 더 어려운 일들이 저자를 따라다녔다. 시각 장애 학생들을 만나 들었던 질문 수많은 질문들이었다. 쉽게 답을 할 수 없었던 질문들이었다. 그 중에 맨 처음이자 이 책 속 프로젝트를 시작하도록 이끈 질문이 "선생님은 어떻게 보이세요?"였다. 이 질문은 저자의 마음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아마 이와 같은 질문은 그녀에게만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철렁 내려앉는 생각에서 다른 철렁이는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이는 시각 장애를 겪는 친구들에게 조금 특별한 경험을 선물하게 되었고, 그 경험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순간을 주었다.


예술 가운데 미술을 시각장애인이 한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치료의 차원의 미술이 아니라 배움으로, 예술로 느끼는 미술 말이다. 지금은 많이 인식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시각 장애를 겪고 있는 학생들에게 미술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미술보단 공부, 미술보단 안마가 우선시되는 시각 장애 학생들의 교육 현장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조금씩 달라지고 있지만, 처음 시작했을 때 지금은 상상을 할 수도 없었던 그 어려움과 마주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에게 힘든 건 이런 상황만이 아니었다. 코끼리 프로젝트를 추진했을 때 코끼리를 만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동물원과 사육사가 힘들게 한 것은 아니었다. 시각 장애라는 말에 불편함을 느끼며 거리를 두는 사람들과 불쾌감을 표현하는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한마디로 "편견"이 가장 힘들게 했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이, 코끼리를 만지는 프로젝트는 시작했으며, 성공했다. 편견이 힘들게 했지만, 그 편견을 딛을 만큼 힘이 되는 만남들이 있었다. 힘든 상황을 훌훌 털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마음이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이들이 촉각으로 후각으로 청각으로 코끼리와 소통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통은 단지 코끼리와의 소통만은 아니었다. 코끼리를 만진 뒤 이를 자유롭게 표현하며 아이들은 자신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자신이 한 번도 마주한 적 없었던 미술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감각과 말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시각이라는 감각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다른 감각으로 시각을 느낄 수 있도록 소통을 열어 주었다. 그 소통들을 읽으며 잠들었다가 눈을 뜨면 자연스럽게 확인할 수 있어서 익숙했던 감각을 다르게 느껴볼 수 있었다. 마치 "보지 못함으로써 세상을 보는 법"을 말이다. 이처럼 《세상이 어떻게 보이세요?》를 읽다 보면 세상이 더 다채롭게 보인다. 상상이라는 세계가 펼쳐지는 방식과 그 상상이 우리의 세계와 어떻게 부딪치는지 그 모든 걸 볼 수 있다.


시각 장애 아이들과 해나갔던 미술 프로젝트 결과물을 사진으로 바라보며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과연 나는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느끼고 표현하고 살고 있는지. 누군가에겐 간절한 감각일 수 있고, 누군가에겐 한 번이라도 경험하고 싶은 감각일 수 있고, 누군가에겐 알 수 없는 미지의 감각을 느끼는 난 어떻게 세상을 보고 있는지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보고 있지만 보이지 않고, 누군가는 보지 못하지만 누구보다 잘 보고 있을 수도 있다. 문득, 동생과 산책했을 때 기억이 난다. 동생과 산책을 하며 길거리의 풍경을 열심히 설명하며 혼자 걸을 때 보지 못했던 것을 종종 발견하곤 했다. 익숙하다는 이유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말이다. 

나는 시각장애의 세계에 대해 아직도 모르는 게 많지만, 아이들과 작업을 하면서 안 보인다는 것은 단지 결핍이나 무능력만은 아닐 것이란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세상이 어떻게 보이세요?》는 본다는 시각적 감각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 힘이 난 저자가 찾은 빛이라고 생각한다. 시각 장애라는 낯선 세계에서 발견한 빛 말이다. 한편 한편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고, 저자가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에세이지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안경이다. 세상을 다른 프레임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안경 말이다. 《세상이 어떻게 보이세요?》라며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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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의 눈 + 어린 왕자 (문고판) 세트 - 전2권
저우바오쑹 지음, 최지희.김경주 옮김 / 블랙피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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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린 왕자가 내 안에 들어올 때

 

 

 

"마음으로 보아야만 제대로 볼 수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소행성 B 612에서 찾아온 소년이 있다. 1943년 세상에 처음 알려졌지만, 75년이 지난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소년'일, 그의 이름은 '어린 왕자'다.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그리고 때때로 존경을 받는다. 점차 마음으로 보아야만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프랑스의 소설가 생텍쥐페리가 1943년에 발표한 『어린 왕자(Le petit prince)』는 여전히 명작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전 세계적인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 영향력은 전 세계 수많은 출판사의 다양한 판본으로 제작된 걸로 증명할 수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생텍쥐페리의 삽화와 같은 분위기가 녹아진 만화책도 있고, 오리지널 판본도 있고, 다양한 번역자의 손에서 세상에 나왔다. 『어린 왕자(Le petit prince)』는 시공간을  넘어 우리나라에서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마음으로 보아야만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을 비롯한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인간적 가치를 다시금 상기시켜주고, 짧은 이야기에 이별을, 절망을, 사랑을, 희망을 모두 담은 이야기로 유명하다.

한 철학자가  『어린 왕자(Le petit prince)』를 만났다. 그는 왜 자신과 어린 왕자의 만남을 글로 썼을까?


바쁜 일상을 보내는 현대인들은 처음  『어린 왕자(Le petit prince)』가 나왔을 때보다 더 빠르게 더 많이 어린 왕자가 하는 이야기를 잃어가고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해 좀처럼 생각과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던 것들을 잃은 줄도 모르고 우리는 살아간다. 어린 왕자가 소행성을 떠나 마주한 일련의 사건들을 하나하나 마주할 때면, 우린 인생과 닿아있는 지점과도 마주 설 수 있기에 그는 글을 썼다.  『어린 왕자의 눈』의 저자는 어린 왕자 속 가르침은 힘겨운 삶의 고비를 버티거나 넘기거나 혹은 피해 갈 수 있는 것들을 말한다. 한 번뿐인 인생을 살아가며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들이 적힌 책이  『어린 왕자의 눈』이다. 어린 왕자가 만났던 수많은 어른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어린 왕자 내면에 쌓인 것들을 다루고 있는데, 요즘에  『어린 왕자(Le petit prince)』가 다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5000송이의 장미
내가 지금 길들이고픈 장미

 

 

길들여짐. 사랑. 우정. 책임. 관심. 행복. 선택. 신분. 상품화. 소원해짐. 소유. 충성. 죽음...


『어린 왕자(Le petit prince)』 속에 담긴 철학적 질문, 주제임과 동시에 현대 사회의 주요한 철학적 문제이기도 한 것들에 대해 저자는 15개의 짧은 글을 통해 말한다. 많은 주제 중에 내가 마음으로 길들이고 싶은 "장미"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더 나아가 길들여짐은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 태도이다. 이런 삶의 태도는 계산적이지 않고 거짓되지 않으며 왜곡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 전혀 '어른스럽지' 않고, 사물 본연으로 돌아가 사랑과 우정을 주고받으며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이렇게 했을 때에야 비로소 사막에서도 생명을 이어갈 우물을 찾을 수 있다.

 

어린 왕자의 마음이 아니라 왜 "어린 왕자의 눈"이란 제목을 지었을까. 마음이 어린 왕자를 생각했을 때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인데 말이다. 난 이 제목이 참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마음은 개인의 몫이다. 어린 왕자의 마음은 개인이 어떻게 마음을 품느냐에 달린 문제이지, 책이 그 마음을 보여줄 순 없다. 책은 시각을 보여주고 작가가 세상에 내놓은 건 우선 우리의 눈으로 글을 읽고 그다음에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넌지시 알려준다. 특히 바쁘고 마음이 무덤덤해진 현대인에게 마음의 단계보다 눈으로 먼저 시각을 가지는 게 더 필요하다고 저자는 느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생각은 생텍쥐페리에게서 얻었다. 부담 없이 읽어도 된다. 이 책은 잘 안 보이는 마음이 아니라, 우선 우리 눈에 잘 보이는 것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그다음에 천천히 마음을 들여다보면 된다. 그리고 그 정도는 자신에게 가장 잘 맞게 고르면 된다.

 

 

 

 

"기억하세요. 동심을 되찾으라는 것은 당신 몸이나 지능을 어린 시절로 돌려놓으라는 뜻이 아니에요. 마음을 다해 당신이 어린 시절에 간직했던 꿈과 가치를 소중히 여기라는 듯이죠. 꿈과 가치는 나이와는 상관없어요. 당신이 삶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죠."

 

동심이 주는 순수함 그리고 깨끗함은 언제든 파괴될 수 있을 정도로 여리다. "동심을 유지하고 있다"라는 말에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 있고, "동심이 파괴되었다"에는 안타까움과 어쩌면 필연적인 일일지 모른다는 체념이 담겨있는 듯하다. 동심이란 단어를 보는데 왠지 씁쓸함이 스쳤다. 어린 시절 읽었던 책에 동심이란 단어는 없었다. 굳이 동심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동심으로 가득 찬 아이들에게 동심이란 단어는 낯설 뿐이니까. 수많은 동화, 어린이 소설 등에 "얘들아, 동심을 지키렴"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언제 잃었을지 모르는 동심을 잃었다는 걸 이 책과 함께 확인한 느낌이었다. 팩트를 확인했을 때 받는 충격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래서 이상하게 난 동심이란 그 아름다운 마음을 말하는 저자의 이야기에 눈과 마음을 기울였다. 어린 왕자가 삶을 대하는 태도와 현실 속 우리의 거리를 좁혀나가는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에 따라 이 세상은 분명 달라진다. 그 변화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미한 것일지라도."라는 똑 부러진 결론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작은 희망 하나를 가지게 된다.

 

 

 

첫사랑에 서툰 이유는 멋진 사랑을 바라면서도 정작 사랑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에도 학습이 필요하다. 상처받고 넘어지고 좌절하는 것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물론 사람에겐 사랑하지 않을 권리도 있지. 하지만 사랑이 없는 인생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 너랑 영원히 헤어진다면 난 상처받을 거야. 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면 그것을 잘 받아들이는 법도 배워야겠지.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 않았다면 상처를 받을 일도 없을 거야. 상처가 없는 사랑은 최고의 사랑이 아니야. 진짜 사랑이 아닌 거지."

 

맺음말에 저자가 가장 공들인 부분 중 하나라고 말한 부분이다. '사랑' 그중에 '첫사랑'이라는 그 아련하고 미숙했던 그 과정에 대한 부분. 첫사랑에 대한 부분은 참 공감이 많이 갔다. 첫사랑하면 행복하기보다 이불킥하고 싶은 미숙한 부분 한가득인 기억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이젠 기억조차 흐릿한 그때의 감정을 '우리가 첫사랑에 서툰 이유'를 읽으며 그리고 '그럼에도 사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읽으며 상기했다. 좋아했던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이미 시간이 지나 사라졌지만, 내 마음속에 남은 감정이 남긴 숙제를 풀어가는 느낌이었다. 사랑 영역에서 미달 성적을 받았던 내 첫사랑에 대해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며 인정하고, 그다음을 도모해가는 거라 그럴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첫사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사람에겐 먼 이야기 같은 "첫사랑은 사랑이라는 여정의 종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란 말이 조금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힘들다면, 어린 왕자의 방황의 자취를 따라 치유 여정을 떠나보면 어떨까.

사랑하는 대상과 마음을 대해 관계를 만들어가야만 그에 상응하는 책임감이 자연스레 생겨나고, 또 책임이 주는 구속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이렇게 책임이 하나하나 늘어나면서 한 사람의 자아가 형성되고, 우리 삶에 의미를 더하며 우리의 행동을 결정한다.

 

 

 

"어린 왕자와 독자들의 예상과 달리, 장미는 인생 최대의 위기 순간에 어린 왕자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전에 쓰던 고깔마저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장미는 여기에서 전에 없던 독립심을 보여주었다."

 

사랑 뒤에 우린 책임이란 말이 있단 걸 좀처럼 생각하지 못한다. 자유와 책임은 칼과 방패처럼 단짝인 듯 보이는 것과 달리. 저자는 책임감과 사랑이란 감정을 떨어트릴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이란 감정은 관계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책임감이 생기는 것은 필연적이다. 만약 사랑하지만, 책임지고 싶지 않다면 자신이 말하는 사랑이 진짜 사랑인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점은 책임감과 함게 이야기하는 또 다른 감정이 독립심이라는 점이다. 어린 왕자와 장미의 관계에서 어떤 부분에선 책임감을,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 독립심을 말하지만, 그 바탕에는 사랑이 있고 다른 뜻을 말하는 두 단어가 지향하는 바가 같다는 점은 의미심장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 단 하나의 감정만 느끼지 않는다. 여러 감정들과 생각이 여러 개 동시에 일어나는 순간들이 우리의 지금을 이루고 있다. 저자는 사랑과 함께 오는 책임감 그리고 독립심 등 다양한 감정의 실타래를 차근차근 순서대로 풀어낸다.

 

 

 

여기서 말하는 이해란 우리의 생각이 나 신념을 단순히 아는 것에서 더 나아가,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감정이나 가치 등 삶 전반이 어떠한지 헤아리는 것을 의미한다.

 

글의 말미에 저자는 살짝 『어린 왕자(Le petit prince)』가 시공간을 넘어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한다. 처음 난 『어린 왕자(Le petit prince)』를 읽었을 때를 떠올렸다. 필독도서로, 국어 시험 서술형 10점을 더 맞기 위해서 읽었던 어린 왕자와 20대에 우연히 읽은 어린 왕자 두 번의 읽기 사이에 난 달라졌단 걸 느낄 수 있었다. 맨 처음 내 마음이 아닌 눈에 보이는 텍스트만을 들여다보기 급급했지만, 지금은 글이 주는 마음의 파형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난 얼마나 마음을 들여다보는 눈을 밝힐 수 있었던 걸까. 책을 읽으며, 우리의 시력은 좀처럼 더 좋아지기 쉽지 않은데, 마음의 시력은 나빠질 가능성도 있지만, 좋아질 가능성 역시 있다는 게 참 위로가 된다.
다음에 더 깊이 더 넓게 내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 되어 있길 바라며, 2018년 2월에 두 권의 책을 덮었다.

 

 

 

'독서의 기쁨 | 새로운 세상을 만나다' 부분에 다음과 같은 글로 책의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우리가 읽은 책이 알게 모르게 삶 가운데 녹아들어 우리의 내면을 이루고, 가랑비에 옷 젖듯이 삶을 채우며 감정을 풍부하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조용히 우리의 삶을 앞으로 이끌고 나아갈 것이다.
독서의 아름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린 왕자의 눈』과 『어린 왕자(Le petit prince)』를 읽는 동안, 어린 왕자와 장미 그리고 여우의 마음과 생각에 나도 모르는 새 젖어들어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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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 100세 철학자의 대표산문선
김형석 지음 / 김영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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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당신을. 우리를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영원하다는 것은 삶의 의미가 실제로 바뀐다는 뜻이다. 살았다는 뜻이 영원히 남을 수 있을 때 가능해진다."라는 문장에서 나도 모르게 최근 보았던 영화 '코코'가 생각났다. 코코와 미구엘 그리고 그 가족들의 삶 속에서 풍겨져 나오는 사랑, 영원 그리고 우리의 가치들. 이를 철학자 김형석의 방식으로 정리하면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해서》가 아닐까.

 

 

 

'내'가 아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00세 철학자가 우리에게 묻는다.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요?".

 

그리고 입을 단짝 거릴 뿐,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는 나에게 빙긋 미소를 지으며 질문 하나를 더 한다.

 

"혹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나요?"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엮은 책이 아니다. 이 질문과 질문 뒤에 올 또 다른 질문들에 대한 대화다. 철학자 김형석과 독자 간의 대화일 뿐 이 책에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없다. 그런데 답이 정하지 않은 채 이어지는 대화의 가치가, 인생의 정답을 기대하는 나에게 현답을 주었다.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나 또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철학자다. 철학 에세이이지만 삶의 문제를 난해한 철학 이론을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과감한 사회활동을 강권하지도 않는다. 오랫동안 살아온 삶을 가지고 누군가의 삶을 함부로 예단하거나 재단하는 평가를 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경험이 인생의 정답인 양 자기 자랑이 대부분인 훈수도 없다. 자기 자신이 100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글로 적었을 뿐이다. 모든 시간을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생의 마지막을 염두에 둔 채 기록한 것으로 '우리 삶의 이유'라는 거대하고 오래된 질문과 끊임없이 대화하듯 쓴 책이다. 이 대화에는 가식이나 다른 이에게 잘 보이기 위한 꾸밈이 없다.  삶과 죽음 앞에 사랑하는 가족을, 가까이한 벗을 잃었던 상실감에 대한 이야기를 엮은 '상실론'.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삶을 반추하다 깨달은 가치를 엮은 '인생론'. 영원과 사랑이 닿아 있는 초월적 무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인 '종교론'. 이를 비롯한 여러 수필들을 자신의 시각에서 바라본 뒤 그 해석을 더했다. 그래서 난 글을 읽으며, 분명 필요하지만 바쁘거나 어렵다는 핑계로 혹은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생각하지 못했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관계에 대한 고민', '생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대한 것을 찬찬히 되짚어 볼 수 있었다.

 


젊은 사람들 인생에
무엇인가 영원한 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안겨주고 싶었다.

 

인간을 사랑하는 일, 그보다 더 소중하고 성스러운 가치의 삶은 없었기 때문이다.
…(중략)…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길이며, 이웃을 위하는 삶인 것이다. 삶 자체가 하나의 공동체이다.

 

 

철학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근사하지만 나와 어울리지 않는 딱딱하고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랜 시간 공부가 필요한 학문이고, 그러한 철학을 오래 공부한 사람은 같은 단어라도 다른 세계 속에 담긴 양 추론하기 어려운 뜻을 가진 말들이 나열하곤 했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살아있는 세계와는 한참 멀리 떨어져 저 하늘처럼 먼 세상이 철학의 세계 같았고 철학을 공부한 사람은  뜬구름 걷는 거 같았다.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철학이란 단어는 낯선 형이상학적 세계 같을 것이다. 난 처음 김형석 교수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그래도 에세이지만 내가 이해를 할 수 있을까"싶은 고민을 하며, 책을 만지작거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난여름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통해 김형석 교수와 책 속의 대화를 나누며 철학자에 대한 거리감이 줄어든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이번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는 고민보다 기대를 안고 또 다른 대화를 나누고픈  마음으로 읽었다.

 

 

옛날 기억들을 더듬어보면 사랑으로 맺어지는 작은 인연들이 고맙고, 아름다운 열매를 남기면서 사는 것이 인생살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글을 읽다 보면, 마치 문장들이 장신구 세공한 듯, 아름다운 걸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라서 "에이, 어렵네."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낯선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의 영역과 다른 영역에서 글을 썼기 때문이다. 나는 이점이 좋았다. 아름다움이 배어 있는 문장. 마치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민과 사색 속에서 피어난 문장이라 이렇게 아름다운 게 아닐까 싶었다. 우리가 자주 쓰는 줄임말이나 속어, 거친 표현을 쏙 빼고도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질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우리에게 편안한 문체도 아니고, 그림이나 삽화, 작은 이모티콘 하나 없지만 흥미롭게 계속 읽고 싶은 마음을 부르는 오묘함이 있었다. 글을 읽으며 이렇게 아름답고 품격 있는 표현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많은 사람들이 낯섦을 어려움이라 생각하지 않고, 에세이를 다 읽어나갔으면 좋겠다. 그 낯섦이 익숙함이 되는 순간 알 수 없는 잔잔한 고요함이 마음과 생각을 가득 채우는 뜻깊은 시간을 선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듯 다른 감동을 느끼면 참 좋겠다.

 

 

 

 

내가 있다는 것, 이것이 모든 것의 출발이며, 빛의 근원이며, 존재의 바탕이다. 나는 하나의 내던져진 존재일지 모른다. 이유도 조건도 없는 하나의 우연한 산물일지 모른다.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었던 한 우연의 결과일지 모른다.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는 '나'에 대한 이야기이고, '너'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결국 '우리'를 함께 생각하는 책이다. 처음에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사람들과 이별하며 홀로 남은 '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고독에 대하여' 부분은 진정한 고독이 무엇인지에 대한 저자의 깊은 사색의 결과물이다. 외로움과 고독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생각의 정수였다. "외로움은 일시적이었고 더 큰 즐거움을 위한 기다림으로 바꿀 수 있었다."라고 외로움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사귐과 대화가 끊어졌을 때 느끼는 마음 상태를 우리는 고독이라 부른다. 쉽게 말해 고독은 홀로 있는 마음 상태이다."라고 고독을 말한다. 외로움을 느끼기는 쉽지만, 고독을 느끼고 자신이 고독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어서 '예술의 아름다운 고독'이라는 부분에 참 공감이 갔다.

이렇게 본다면 예술의 아름다운 고독은 감상하는 우리의 속 깊이 숨겨져 있던 고독에의 그리움과 마음의 공허감을 채워주기 때문에 받아들이게 되는  고독감일지도 모른다. 내 마음속에는 나도 모르는 높은 미에의 고독감이 가리어져 있었다. 그것을 예술가들이 밝혀주며 전해주었기 때문에 고독에 공감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미에 대한 그리움. 생경한 표현이지만, 예술가들의 마음은 이러하지 않을까. 기쁨과 행복을 표현한 작품보다 작품 어딘가 쓸쓸함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사람들이 더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작품과 마주 섰을 때 세상에 오로지 혼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예술작품이 가진 힘이다. 저자에게 특히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콘체르토가 그랬다. 이곡과 함께 읽는 '고독에 대하여'는 특별했다.
저자는 고독과 나의 감정의 심연에서 시작한 글을 점차 너와 우리로 확장해 나간다. '나'가 소중하다는 것을 말하며, 그 끝에 '우리'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의 소중함을 빼놓지 않는다. 나를 깊이 생각하느라 타인을 돌아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나가 소중하며, 나를 완성하는 것은 '우리'라는 공동체성이라는 이야기는 당연하고 익숙하지만 여전히 좋았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기발견은 자아의식에서 오며 그 자아의식은 문제의식에서 싹튼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사느냐가 어떤 인간이 되느냐이며, 어떤 문제를 해결 지었는가가 어떤 생애를 살았는가와 통한다." 즉, 나를 완성하는 것은 내가 우리 속에 어떤 조화를 이루었는냐에서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인격의 충분한 성장과 우리의 삶의 의미를 역사와 사회 속에 남기는 일이다. 즉, 삶의 의미와 가치를 나에게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와 역사 속에 남길 수 있을 때 참다운 완성이 가능해진다." 저자는 자신의 생각을 책을 통해 실천으로 옮기고 있었다. 누군가와 자신의 철학, 삶의 의미를 나눈다는 것이 가진 가치를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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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이 전부다 - 인생이 만든 광고, 광고로 배운 인생 아우름 29
권덕형 지음 / 샘터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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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 그리고 발견

 

 

대부분의 '발견'이 어려운 이유는 정보가 너무 없어서 거나, 누군가 찾기 어려운 곳에 꽁꽁 숨겨 놓아서가 아닙니다. 쉽게 결론 내려는 마음, 편하고 무난한 방식에 안주하는 습관이 사고를 게으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창조적인 직업 가운데 하나인 광고 기획자, 그들에게 창조란 무엇일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창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저자 권덕형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무에서 유를,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것보다 더 쉽고 공감을 부르는 창조는 삶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창조에서 낯설게 '발견', 새로운  '관점', 신선한 '발상'과 같이 원래 있는 것을 다르게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 책은 정말 많다. 저자 역시 글 속에서, 공감하고 인정받은 광고는 새롭고 신선한 것이 아니라 공감을 많이 이끌어 낼 수 있는 일상의 재발견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발견이 전부"라는 주제는 조금 진부하지 않을까? 설마  책 내용까지 진부한 건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진부한 생각일 거란 습관에 제대로 발견할 마음가짐을 갖추지 못한 건 나였다. 내가 읽어본 적 없는 책이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도록, 생각의 연결점을 툭툭 박아놓은 저자의 글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고, 덕분에 좋은 생각의 자극을 받았다.

 

광고는 '발견의 예술'이라 할 수 있다. 남들도 잘 알고 있는 것, 이미 밝혀진 사실을 전하는 것만으로는 좋은 광고가 될 수 없다.

 

남다른 걸 발견해야 하는 부담이 남다른 광고 기획자들이 바라본 세상은 일상마저도 남다르게 읽고 있었다. 권덕형만의 발견이 녹아진 책이었고, 자신이 발견한 "발견의 소중함"을 공유하고 싶은 그의 마음이 글 곳곳에 담겨 있었다. 《발견이 전부다》는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다. 광고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법, 광고를 만드는 기획자로서 생활을 돌아보는 부분 그리고 좋은 광고를 기획하는 방법을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모두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부분은 역시 1부였다. 세계 곳곳에서 방영되었던 광고들과 우리 인생의 중요한 가치를 연결하여 돌아보는 내용 자체가 매력적이었고, 광고와 삶을 오가는 글쓰기 방식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내 취향에 딱 맞는 내용들이라, 모든 내용이 다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글들을 묶는 제목부터 "인생 광고: 인생의 진리가 광고에 스미다"다.  광고는 우리의 일상 속에 녹아져 있다. 각종 미디어 매체마다 적절한 방식의 광고가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다. 네이버 배너에만 여러 개의 광고가 시선을 끌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에 노출된 광고는 누군가에게 '삶의 철학'을 담은 결과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살고자 하는 저들 틈에서 버텨 내지 못하고, 끈질기게 악착같이 달라붙어 있지 못하고 내려 버린 자들의 빈자리를 분다. 그 빈자리를 살아남은 우리가 대신 메우고 있음을 본다.

 

짧으면 3초 길면 3분 남짓한 시간. 광고가 우리의 삶에 전해지는 시간이다. 이렇게 광고는 파편처럼 우리의 삶의 틈 사이에 들어온다. 하지만 수많은 광고 중에 그 틈에서 삶으로 번져나가는 광고가 있고, 어떤 광고는 그 틈에서 튕겨져 나가는 광고도 있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 글을 통해 말하고 있다. 저자는 그 틈을 파고드는 광고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바로, 인생을, 사람의 생을, 삶을 담은 광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광고는 사람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 집요할 정도로 세밀하게 관찰하는 습관이라고 말한다.

 


불가능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의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말했다,
여자는 권투를 할 수 없다고.
나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나는 해냈다. 나는 링 위에 섰다.
내 아버지 알리의 외침이 들려온다.
싸워라! 내 딸아. 넌 할 수 있어!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누구나 한 번쯤 본 광고다. 2000년대 후반에 나온 광고로 기억한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문구를 가지고 비슷한 듯 다른 광고를 내놓았다. 그중에 저자는 권투선수 알리 부녀관계를  담은 광고를 가지고 온다. 성별 나이 가족이라는 관계를 엮어 이 광고가 세상에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아디다스라는 브랜드의 스포츠 용품일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광고에서 저마다 생각할 거리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대해 저자는 정리했지만, 더 넓게 세대 간으로 확장할 수 있고 성별로 볼 수 있다. 분명한 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만들어준 이 광고는 '인생의 진리'라는 거창한 철학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틈을 파고들 거리가 많은 광고라는 점이다. 광고를 통해 삶을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왠지 난 박웅현씨 광고가 떠올랐다.

 

스토리의 힘은 동화를 듣고 싶은 어린아이를 엄마 품으로 깃들이게 하듯, 겨울날 난로 주위로 사람들을 모으듯 '당기는 힘'이다. 정보를 쏟아붓고 선택을 강요하는 '미는 힘'이 아닌 '당기는 힘'이 바로 제목이 추구해야 할 힘이다.

 

나는 많은 상업광고란, 일상에 불필요한 물건을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단지 상업적 필요성만을 담은 광고는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인 광고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상업성과 철학을 공식 다루듯이 비율을 맞추어 조합하면 좋은 광고일까. 그렇지 않다. 좋은 광고에 공통점은 있지만, 그걸 공식화하기 힘들다는 걸 《발견이 전부다》 맨 마지막 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좋은 광고를 만들 수 있는 팁을 3부에서 설명했다. 하지만 많은 팁을 다 설명하고 난 뒤에 정말 중요한 팁을 말한다.

 

좋은 광고는 공감을 부르는 광고다. 그리고 공감이란 억지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너와 나의 마음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발견은, 마냥 행복하거나 정의롭거나 달콤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프고 못되고 쓴 것들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라면 그것을 긍정하는 것이 소통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광고란 무엇인지를 두고 고민하고, 광고 기획자로서 나를 두고 고민하고, 좋은 광고를 두고 고민한 저자의 생각이 모인 이 책은 광고를 말하지만 다른 걸 발견하게 한다. 광고에 대한 것보다 내 삶을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아주 작은 변화를 말이다. 그것이 살아가는 철학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여유일 수도 있고,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긍정적인 생각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는 위로 혹은 내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마음일 수도 있고... 혹은 정말 광고일 수도 있다. 어떤 것이든, 발견할 수 있는 책이고, 그 발견이 3초 동안 나오고 Skip을 누르는 광고일 수도 있고, 마음을 번지는 특별한 광고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지만 기왕이면 더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걸,  《발견이 전부다》를 통해 광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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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시집 문예 세계 시 선집
헤르만 헤세 지음, 송영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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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시인이었던,
를 만났다.

 

 

어릴 때부터 시인이 되는 것이 헤세의 유일한 염원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길잡이 없는 위험한 길을 홀로 헤쳐 나와서 필경에는 시인이 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시인이라고 하는 것은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뜻만은 아니고 훌륭한 문학 작품을 쓰는 사람이라는 뜻도 포함한다.
그의 어머니의 일기에 따르면, 헤세는 다섯 살 때 벌써 시구 같은 것을 만들어서는, 밤에 잠자리에서 그것을 노래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가 후에 대성한 것은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선천적인 시인이었던 것이다.

 

_송영택 해설 中...

 


헤르만 헤세.

그는 소설가였고 작가이면서 독자라고 생각했다. 그를 시인이라고 생각하는 건, 참 낯설었다. 적어도 그의 시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알쓸신잡 2>에서 우연히 헤르만 헤세의 시 한편을 만났다. 장동선 박사가 낭송한 시로, 제목은 '나는 별이다'였다. 제목부터 낭만이 묻어난 그 시 한 편은 "헤세, 그 친구 시 잘쓰네."라는 탄성을 불러오기 충분했고, 그의 다른 시들을 궁금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헤르만 헤세, 그가 누구인지 몹시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 궁금증은 그의 시와 그림이 엮어진 《헤르만 헤세 시집》으로 눈과 마음이 향하게끔 만들었다.

 

그의 시집을 사서 돌아온 저녁, 나는 생각했다. 왜 그가 시인이라는 걸 알지 못했을까. 혹은 저자 소개에서 그가 시인이라는 점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는 '시인'이고 싶었던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시인으로 알려지기에, 소설가로 널리 알려진 작가였기 때문이 아닐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을 여러 편 쓴 독일의 대표 소설가라는 이미지가 강한 편이다. 또 당대에 작가로서 명성을 어느 정도 얻은 때에 들킨 "데미안 사건"은 소설가로서 그의 이미지를 더 굳게 만든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시를 읽는 문화가 점차 사라져가는 요즘, 그가 좋은 시를 많이 썼더라도 그의 시가 독일에서 우리나라까지 오기까지 많은 장애물이 있었을 것이다. 이는 《헤르만 헤세 시집》 출간과 관련된 에피소드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책을 만드는 곳이며 동시에 책을 파는 곳인 문예출판사에서 《헤르만 헤세 시집》은 위험성이 큰 책이었다. 하지만 시집을 세상에 내놓는 고민을 출판사 내에서 한 것이 아니라, 많은 독자들과 함께 나누자 시를 읽는 게 잊힌 때에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 응원에 힘입어 《헤르만 헤세 시집》이 세상에 나왔다. 조금 더 시인들의 시를 돌아볼 수 있는 문학적 감수성이 우리 사회 곳곳에 번져나가길, 보다 짙은 감성으로 채워지길 바라며 그의 시집을 보고 읽고 느끼고 생각했다.


 

 

 

 

독일어를 할 줄 모르지만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언가 아쉽다. 이건 외국 시를 우리나라 말로 번역했을 때마다 마주하는 문제 가운데 하나다. 우리가 우리나라 시를 외국어로 번역했을 때 그 감성이 충분히 살아나지 못하듯이, 다른 나라의 시도 마찬가지다. 시란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문학 장르다. 그래서 우리나라 시에는 단어와 행, 절 그 텍스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시 안에는 우리나라 문화적 정서는 단어 사이에 젖어있다. 그래서 천천히 우리의 말로 시를 낭송했을 때 마음을 휘몰아치는 여운은 남다르다. 헤르만 헤세의 좋은 시를 본래 모습 그대로 옮겨오고 싶었고 고민에 고민 끝에 문장화했으리라 생각한다. 실제 역자의 고민은 시 한편 한편에 충분히 깃들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럼에도 시라는 장르와 번역이라는 한계가 주는 불가피함은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헤르만 헤세의 시를 한 편 한 편 읽을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여러 편이 눈과 마음에 쌓이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독일 낭만주의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그림 속 장면들이었다. 마치 내가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를 읽고 마음과 머리에 무언가 떠올렸듯이. 여러 시가 내게 쌓이자 프리드리히 그림이 떠올랐다. 헤르만 헤세가 그린 삽화와 전혀 다른 질감과 분위기의 그림이 말이다. 거대한 자연과 초월적인 힘 앞에 한없이 작은 인간을 화폭에 담은 프리드리히처럼, 시의 세계를 세상에 전달하는 시인이고 싶지 않았을까 싶었다. 하지만 헤세는 자신이 거대한 시의 세계 속에 작은 시인일 뿐이었다고, 자신의 바람은 바람일 뿐이며 그저 작은 시인이고픈 마음이 그의 시안에 조금씩 녹아져 있다. 누군가는 시구 중간중간 묻어난 그의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 편 한 편에서 발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를 천천히 생각하고 생각할 때, 그렇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는 작고 작은 독자이자 감상자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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