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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평점 :
딱 내 또래 직장인들이
충분히 공감할만한, 현시대의 단면들을 보여주는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깊은 내면을 다루거나 거창한 배경을 삼아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라 나와 가까이에서 일어나고 있을 법한 내용들이어서 어쩌면 가볍게
술술 읽고 넘길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오히려 내 삶과 가까이 맞닿아 있는 이야기들이라 더 깊이 공감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화가나기도 한다.
단편은 내용이 너무
쉽게 잊혀져서 간단히 줄거리 적기.
<잘 살겠습니다>
세상물정 모르는
빛나 언니. 냉철한 세상에 대해서 알려주고 싶었는데 그마저도 눈치 없이 감동받아버리는 빛나 언니. 빛나 언니는 잘 살 수 있을까. 부디 잘 살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기계처럼 돌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해타산을 따지는 것은 어느새 필수 같다. 그런데 정해진 공식대로 사는 것이 가장 최선, 그것에서 벗어나면 낙오자로 여기는 이 세계가 가끔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내가 하나의 인격체보다는 부속품이 된 것 같아서.
<일의 기쁨과 슬픔>
사장의 갑질로 인해
포인트로 급여를 받게 된 거북이알. “회사에서 울어본 적 있어요?”. 억울하고
슬펐지만, 결국 그 포인트로 물건을 사 중고마켓에서 현금으로 교환하는 것으로 그녀는 나름의 타개점을
찾는다. 책의 표지에 그려진, 길을 건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무 의미 없이 세로로 놓여져 있는 육교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그냥 아무 일 없이 평탄한 길을 걸으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쓸모없어보이는 육교를 올라서서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기분전환을 하기도 하고, 숨을 헉헉대기도 하고, 그렇게 다시 내려와서 아무일 없었단 듯 다시 길을 걷는다.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생활과 윗사람들의 갑질에 진절머리가 나면서도 이 모든게 그렇게 쓸모 없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작고 소중한 월급에 감사하기도 하고, 동료들과의 소소한 수다에 깔깔 웃기도 하고, 내 일에 보람을 느끼는 순간들도 있다.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내맘대로 재단하여 말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 직장인으로서의 삶은 소소하지만 가끔 오르락 내리락 하고, 비틀대지만 그래도 똑바로 걷고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다 잘 되겠지. 미래의 행복만이 진짜 행복이 아니겠지.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지유씨를 짝사랑하는 지훈씨의 이야기. 지훈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적혀있어 이인간은 뭔가, 싶다가 슬슬 그의 정체를 알게 된다. 쓰레기 새끼였구나. 결국은 자기의 시선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해놓고선 그것이 실제가 아니라고 깨달았을 때 할 수 있는 건 분노밖에 없는 사람. 과연 소설속에서만 있는 사람일까.
<다소 낮음>
타이밍을 잡지 못한 장우의 이야기. 나름 본인의 가치를 지켜내고 싶었지만, 그가 마음 끌리는대로 행복을 찾아 살고 싶었으나, 효율적이고 가성비 높은 것을 선호하는 시대에서 현실은 녹록치 않다.
<도움의 손길>
인생의 대부분을 피고용자로 살아와서, 고용자로서 자기보다 나이많은 아주머니에게 지시하는 것이 익숙지 않다. 그리고 아주머니의 또 똑같은 그소리. 애는 언제 낳을 거냐. 유독 이 편을 읽으면서 젋은 여성이 얼마나 얕잡아 보이는지 새삼 다시 느꼈다. 기혼여성뿐 아니라 미혼여성에게 그 시선은 한층 심해진다.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번째 출근길>
결국 소수점까지 따져가며 금액과 숫자를 계산해야 적당히 굴러갈 수 있는 세상.
<새벽의 방문자들>
새벽마다 성매매를 하러 오피스텔을 찾는 남성들. 바퀴벌레 마냥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곳곳에 숨어있겠지. 성매매 남성들의 사진을 뽑으며 '대상화'하는, 미러링하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탐페레 공항>
마지막 즈음 노인이 사진이 구겨지지 않게 시리얼 박스를 붙여 넣은 것 같다고 묘사하는 장면에서 왈칵 눈물을 쏟을 뻔 했다. 어쩌면 이토록 삭막한 현실 속에서도 그래도 웃으며 살아갈 수 있는 건 누군가의 온정 가득한 눈빛과 마음 덕분일텐데. 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 사람이 누구든지 내 따뜻함을 줄 수 있는 사람일지. 처음 노인이 다가오는 장면에서도 소설인데도 괜시리 해코지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무서운 세상이라며 항상 웅크리고 경계하며 지내고 있는데, 그렇게 만든 현실이 안타까우면서도 그만큼 사람간의 온기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