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창비시선 457
김승희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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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살아오면서 단무지에 대한 이토록 깊은 사유를 만나본 적이 없다. 베이컨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신은 있는가?

 

50여 년 전 태양을 향해 결연하게 맞장 떴던 김승희 시인이 2021년 꽃피는 봄에 친근하고 낮은 가난의 먹통 속 단무지를 껴안고 있다. ‘내장과 자궁을 발라낸 채 앞뒤로 하양 분홍 줄무늬를 띤 베이컨을 받아들이고 있다. 친절과 진실 사이, 본심과 진심 사이, 변심과 박제 사이, 믿을 건 단무지와 베이컨뿐이라고. ?

 

일단, 단무지를 보자. 단무지는 소금과 식초의 쓰라림 속에 진저리를 치며’, ‘낙심과 절망 속에 쓰리다 시리다 아프다 시디시다 짜디 짜다.’ 그러면서 묵언으로 절여진다. 베이컨은 어떤가. ‘뼈를 대패로 깎이며’, ‘모가지가 꺾이고’, ‘내장과 자궁이 발라진 채불에 구워진다. 단무지와 베이컨은 온 몸이 조용한 진심이다. 그러나 세상의 진심은 한낱 고결한 사치이자, 본심의 배신이자 돼지머리처럼 눌러 놓은 꽃이다. 적어도 단무지는 뼛속까지 노랗고, 베이컨은 앞뒤가 똑같은 하양 분홍 줄무늬다. 그래서 시인은 단무지와 베이컨 이후에는 무엇을 더 바라지도 않는다고 못 박는다.

 

1970년대 하늘을 향해 쏘아 올렸던 시인의 <태양 미사>는 이제 어둠과 죽음 속 가난한 단무지와 불행한 베이컨을 향한 진혼곡이 되었다. 진혼이 제대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사랑이다. 이 사랑은 절벽까지 왔다/ 절벽에 닿았다/절벽인데/절벽인데도/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이다. ‘뺨도 때리고 뺨도 맞는세상이 이해되는 마음이다. ‘오직 가난하고 위급할 때 오는것이다. 이 사랑이 없으면 진심과 본심 사이, 본심과 배신 사이에서 하얗게 타들어 간 이 시대 우리들의 죽음은 어디에서도 위로를 받을 수가 없다.

 

시인은 온통 거대한 병동으로 변해버린 이 세계에서 사랑의 진혼곡을 부르고자 한다. 진혼의 다리를 건너는 봄에 빨간 사과의 이름을 부르며.

 

어느 산비탈 아래 이름 모르는 밭에서 아직도 맹렬하게 자라고 있을 이름 모르는 빨간 사과에 이름 모르는 사랑을 걸고 싶다.”

 

이는 김승희 시인 쓴 <태양 미사>2021년 봄 진혼곡 버전이다.

 

 정과리 평론가는 이 시집의 해설에서 시인 김승희는 자신의 시의 유년을 끝내 보존하면서,아니 보존함으로써 완벽하게 환골탈태 하였다.”고 끝맺었다. 탁월하다. 십년 뒤, 이십년 뒤에도 김승희 시인의 새로운 <태양 미사>를 만나면 좋겠다. 나이 들어서도 위대한 시인의 가슴 뛰는 시를 만날 수 있는 행운 하나쯤은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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