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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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란 나라는 멕카시의 소설속에선 흙먼지로 시야가 가려진 사람마저 황량해지는 땅이고, 영화 코코에서는 죽음이 생과 공존하는 땅이며, 뉴스 속에선 마약과 미국 불법 이민으로 공포스럽고 흉흉하다.
사람 사는 모습 다 같다는 버전에 요란스러움과 별남을 더하면 이들의 삶에 닿아질까? 사랑 또한 넘쳐서.
어머니의 장례식 다음날 암으로 죽어가는 빅 엔젤의 마지막 생일 잔치를 위해 일가친척을 붙드는데, 여느 가정처럼 사연이 부딪쳐 남아야 하는 사람들은 속내가 불편하다.


‘ ˝어머니, 제가 어머니를 위해 흘릴 눈물이 없다면 용서하세요. 저도 이제 막판에 이르렀거든요. 이해하실 거라 믿어요.˝ ‘


‘그는 일가친척 안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항상 말이다. 그 영혼은 식물을 심고 아침을 먹는 행위 속에 존재한다고 데이브는 말했다. 이건 싸잡아 다 거짓말이라고 빅 엔젤은 결론을 내렸다.
˝하느님 제기랄.˝ ‘


‘˝일단 해봐.감사는 기도와 같은 거야. 기도란 하면 할수록 쓸모가 있어.˝
˝망고나 파파야를 좋아하니까 그게 감사하다는 것도 되나?˝
˝다 네가 정하는 거라니까,엔젤. 좋아하는 마음이 진심이야? 없으면 안 된단 생각이 드냐?˝
˝물론이지.˝
˝음, 그럼 그것도 감사지. 그리고 생각해봐. 내 기분이 좋아진다면 좀 멍청한 짓을 해도 되는 거 아니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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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튤립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8
알렉상드르 뒤마 지음, 송진석 옮김 / 민음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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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총사와 암굴왕이란 이름으로 어린이 세계 명작동화집에 끼어있던 몬테크리스토백작을 좋아 했었다. 기사, 사랑, 의리, 배신 이런 소재들이 어린 마음에 꽤나 낭만적이었나 보다. 왜 그리 좋아 했는지 다시 한 번 읽어 봐야지 싶었는데 아주 희극적인 배우를 연상시키는 표지에 손에 닿았다.

이름만으론 이렇게 낭만적일 수 없다. 꽃으로 최초의 버블 사건을 만들어냈던 바로 그 검은 튤립이라니, 그 당시의 네델란드는 어땠을까 궁금했다. 스리랑카가 원산지인 튤란이란 꽃이 터키에서 유럽으로 이동하며 튤립이란 이름이 붙여진다. 이 꽃은 바이러스에 의해 수많은 변종이 생기면서 이에 반한 네델란드의 여유 자금이 몰려 화혜가들은 너도나도 튤립재배에 나선다. 이에 맞춰 검은 튤립을 재배하는 자에게 10만 플로린이라는 상금을 하를럼 화훼협회가 내걸자 그 열기는 달아오른다. 주식의 성질은 변함이 없다.


뒤마는 튤립에 얽힌 이야기를 하기 전에 역사적 사건을 끌어와 긴장감을 부여한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방법을 이 입담 좋은 작가는 알고 있다. 도덕적이고 옳바른, 매력적인 이들이 당하는 핍박은 가슴이 아리다.
제방감독관이며 전 시장인 코르넬리우스 드 비트와 총리대신 얀 드 비트가 스타트 하우더 (황제를 대신해서 각 주를 통치하는 총독)제를 영구 칙령을 통해 폐지하지만 시민들은
네델란드의 황금시대가 루이14세에 의해 무너지는 위기상황에서, 방종 없는 자유와 넘침 없는 번영을 사랑한 두 형제를 혐오하며 다시 왕정을 불러 들인다. 왕정이 회복되면 네델란드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그들이 환호한 이는 얄궂게도 얀 드 비트의 제자였던 오렌지 공 윌리엄이다. ㅡ네델란드 축구 대표단의 오렌지색 유니폼의 유래가 이 집안이란다ㅡ역사는 공화정까지는 일단 쉬어가야 한다는 듯 이 ‘과묵한 윌리엄‘의 손에 왕정을 쥐어준다.

이런 역사의 아이러니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서술한다.ㅡ 어떤 역사적 순간에 위대한 행위를 수행할 큰 인물이 신의 손이 미치는 곳에 있는 경우란 극히 드물고, 그런 까닭에 신의 섭리에 따른 조합이 우연처럼 이루어지면 역사는 지체없이 그 선택받은 인물의 이름을 기록하여 후세로 하여금 경애하도록 하는 것이다.ㅡ

이런 순간에 희생양을 선택하기가 얼마나 쉬운 지에 대해서는 ㅡ반면에 악마가 사람의 일에 끼어들어 어떤 존재를 파멸시키고 제국을 전복하려 들 때는, 귀에 다대고 한마디만 속삭이면 즉각적으로 일에 착수하는 불쌍한 존재가 언제든지 악마의 손아래 대기하고 있기 마련이다ㅡ 라고 말한다. 언론이 끼어드는 순간.


군중은 잔인해서 이미 그들 손에 목숨이 끊긴 이들을 굳이 사형대 위에 세우며 환호한다. 돌아보면 잔인함에 치를 떨텐데도 무리 속에선 이렇게 당당하다. ㅡ사람들 가운데는 덜 적대적인 의도를 품은 사람들 또한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들의 흥미를 끄는 것은 언제나 군중을 사로잡으며 그들의 본능적인 오만을 만족시켜 주는 광경, 즉 오랫동안 꼿꼿하게 서 있던 사람이 먼지 속에 나뒹구는 광경을 바라보는 것이다.ㅡ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인간의 못됨이다.


이런 잔혹함을 자신의 이득에 이용하는 자가 악한 것도 아니다. 심지어 이들은 권력을 잡고 죽임을 당한 자를 추모하고 그들의 고결함을 얘기한다. 애석하지만 역사를 위해 그들은 그렇게 소모되어야 했다는 듯이. ㅡ 코르넬리우스가 세례반 위에서 당신에게 맡긴 이름과, 얀이 보여준 우정에 값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애쓰시오. 두 사람의 공덕을 길이 간직하도록 하시오. 이성을 잃은 혼란한 시기에 잘못 판결되고 잘못 단죄된 비트 형제는 위대한 시민이었고, 오늘날 홀란트는 그들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소ㅡ 그들이 도망갈 모든 성문의 열쇠를 감추었던, 시민들이 어떻게 행동하는 지를 지켜보고 역사가 자기 편이라 확신하며 스타트하우더의 자리에 오른 자는 이렇게 사과한다.


자신의 외모처럼 입담좋게 술술 풀어놓은 이야기 속에 음모, 배신, 계략 그리고 사랑까지 줄줄이 엮고 있다. 거기에 강인하고 정의로운 인간상까지.
뒤마의 문체는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단 말에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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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알고 있다 - 꽃가루로 진실을 밝히는 여성 식물학자의 사건 일지
퍼트리샤 윌트셔 지음, 김아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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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생물학이 법의학으로 발전하는 초기 버전이다. 사람의 흔적은 미세 세상에도 무수한 족적을 남기는 모양이다. 지구 둘레의 우주쓰레기 말고도.
사람을 미시적으로 보면 모든 생명이 같은 무게로 다가온다. 아마 그 무게감은 같을 것이다.


‘이곳을 조사하려고 몸을 웅크리면, 당신의 머리카락에는 몸 위로 드리운 잔가지와 잎을 스치면서 떨어진 꽃가루, 포자를 비롯한 미세한 성분이 묻는다. 당신이 풍경 속에 남긴 흔적, 즉 발자국을 비롯해 흘려버린 머리카락과 섬유질 등은 간과되기 쉽다.‘

‘당신의 몸은 단지 짧은 기간 동안 당신의 것이다. 몸을 이루는 원소는 바깥 세상에서 빌린 것일 뿐이며, 결국에는 돌려주어야 한다. 당신이 자기 자신으로 인식하는 실체는 사실 여러 미생물들의 집인 생태계의 집합체다. 당신이 사망해 뇌와 순환계가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동을 멈춘다 해도, 몸 속 세균이나 균류, 심지어 모공 속의 진드기와 위장 안의 기생충(만약 있다면) 한동안 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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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기다릴게
스와티 아바스티 지음, 신선해 옮김 / 작가정신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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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연히 또 엄마의 이야기다. 그렇다닌까, 엄마와 자식은 이렇게 얽힌다닌깐. 하고 혼자 고개를 주억거린다.
속도감 있게 읽히고, 조마조마 하고, 재밌고 끝까지 그럴 듯 하다. 이렇게 쉽게 읽힌 책이 용두사미가 아니라서 다행스러웠다.
잘난 아버지의 폭력 - 벌써 이야기의 반은 채워진 듯. 거기에 덜미를 잡혀 조바심이 조성되고. 영리한 작가는 이것까지 계산했을테지. - 아들들을 보호하기 위한 엄마의 순응? 엄마를 보호하려고 위험을 무릅쓰는 아들들. 이래서는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자칫 스릴러가 될 판이다.

막내의 내레이션은 십대의 투덜거림 같다. 들으라는 듯 듣지 말라는 듯. 아버지 처럼 폭력적이 될까, 좋아하는 사람을 그 폭력에 가두게 될까 두려워 하는 두 아들의 긴장감이 뻐근하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지 못 하는 엄마를 기다리고, 실망하고, 함께 도망치지 못 한 것을 후회하며 지치는 아들들.

엄마가 더 빨리 선택을 해야 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폭력에 주눅 들기 전에.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엄마는 폭력에 지쳐 아이들을 버리고 집을 나와서 아이들을 데려오겠다고 편지를 보냈었다. 그랬다가는 다 죽여버린다는 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아이들을 버린 자신의 삶을 끝내 용서하지 못했다.
이 책 속의 엄만 아들들이 안전하기를 바래서 자신의 삶을 담보로 잡힌다. 떠나지 못 한 엄마의 짊은 아들들의 자책감으로, 여자친구를 사귀는데 불쑥불쑥 끼어드는 걸림돌이 되겠지만 아들들은 자신들의 삶을 시작한다. 언젠가 엄마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들에게 오기를 기대하면서.

엄마와 자식의 얽히는 삶으로만 보면 자신이 삶이 저당 잡힌 엄마쪽이 마음은 편한 모양이다.


‘˝아무 말도 하지마.그냥 듣기만 해.˝
(중략)
도대체 나더러 뭘 들으라는 거야?
일 킬로미터가 가까워지자, 드디어 들리기 시작한다. 일정한 박자로 바닥을 딛는 나의 발소리, 들이마시고 내쉬는 내 숨소리,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 형을 힐끗 쳐다본다. 형의 눈빛은 저 멀리 지평선에 흘린 듯하다. 나도 지평선에 시선을 집중한다. 땅과 맞닿은 하늘이 어둠 속으로 녹아든다.
머릿속을 채웠던 모든 것이 스르르 빠져 나간닺 까맣게 잊고 챙기지 않은 축구화, 하얀 종이에 적힌 통계 숫자들, 에릭과의 싸움, 침착한 교사의 가면을 벗은 미리엄의 얼굴, 나중에 따라 오겠다고 말하면서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은 엄마,
길바닥으로 무너지던 로런......그 모두가 사라진다 ......들리는 것은 발소리, 숨소리, 바람 소리뿐 ...... 보이는 것은 우리가 가로등 아래를 지나쳐 달리는 동안 계속해서 변하는 불빛의 음영뿐 ...... 빛의 웅덩이를 건너 다음 빛의 웅덩이로 ......
빛...... 어둠 ...... 빛 ......어둠 ......
발소리 ...... 숨소리 ...... 바람 소리 ......
마침내 나의 머릿속도 고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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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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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가 노래하는 곳‘ ~그냥 숲속 깊은 곳, 야생동물이 야생동물답게 살고 있는 곳.

2019년 내겐 최고의 책.
분위기로는 ‘앵무새 죽이기‘가 떠오른다.
델리아 오언스는 동물행동학 박사로 아프리카에서 야생동물을 관찰한 논픽션 세 편으로 베스터셀러가 된 작가답게 이 소녀의 주변을 습지 생태로 가득 채웠다. 잘 아는 곳을 보여주듯이.
강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습지를 수채화처럼 보여주는 묘사는 겉돌지 않고 그대로 이야기와 하나가 된다.
등걸 위에 놓인 새 깃털의 작은 나폴거림을 느낄 수 있을 듯 하다. 작은 보트로 헤쳐 나가는 그림자 드리운 나무가지 아래를 머리 숙여 지나치고 , 소리 없이 숨고 머무르는 습지의 물길을 따라가다 보트의 반동을 따라 몸이 툭 튕겨지면 시야 가득 파란 바다를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혹 주인공이 무섭게 자신을 몰아부치던 태풍에 정신없이 휘둘려 흠뻑 젖은 채 간신히 모래톱으로 빠져나와 모래사장에 널부러지기도 한다. 무리가 그리워 휘둘린 그 감정에 가슴이 저렸다.
혹시 베스터셀러 였다는 그 논픽션을 번역한 것이 없을까 인터넷을 뒤져도 보았다. 이런 묘사라면 동물행동학을 참고 읽어낼 수도 있을 것 같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모든 감정과 사고의 시작이자 마지막인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만들었다는 존재. 그래서 그 역활은 엄마 본인이 알아채든 무지하든 막중하고, 그 역할의 결과는 자손에게 남아 의문의 시작이 되고 끝이 되기도 한다. 꽁꽁 맺혀 가슴 속 응어리였다가 풀어지는 순간 스르르 맥없이 풀려버리는 그 한의 원천이기도 하다.
주인공이 습지의 동물을 관찰하기 시작한 것은 엄마의 떠난 이유를 찾기 위해서였다. 여섯 살 꼬마를 포함한 다섯 형제를 방치한 채 떠난 이유. 동물은 더 이상 자신을 지킬 수 없을 때 다음에 더 튼튼한 자손을 얻기 위해 지금의 어린 자식을 버리기도 한단다. 정인이 사건을 보면 인간은 생물의 어미 중 최하위다.
그 많은 날들의 외로움을 이겨내느라 진이 빠져 마음이 더 오그라들어 버린 후 찾아온 막내 오빠가 전해준 엄마의 사연. 끝내 자식을 떠나 온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 불행했던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끔찍했을 엄마의 상황을 흘깃 엿보고서야 풀어 내어지는 그 모질었던 마음은 그 풀어낼 내용의 경중에 상관없이 진행 중인 엄마와 자식이 살아내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일 것이다.

‘소년의 차분함, 그렇게 찬찬히 말하고 움직이는 사람을 카야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너무나 확고하면서도 편안한 행동거지였다. 그냥 근처에만 있었는데, 그렇게 가까이 간 것도 아닌데, 딱딱하게 뭉쳐 있던 카야의 응어리가 한결 느슨해졌다. 엄마와 조디가 떠나고 처음으로 숨 쉴 때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상처 말고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

‘조디는 카야의 부엌에 대롱대롱 매달린 외로운 삶을 보았다. 채소 바구니 속 소량의 양파들, 접시꽂이에서 마르고 있는 접시 하나, 늙은 미망인 처럼 행주로 곱게 싸둔 콘브레드에 고독이 걸려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여리고 상처받기 쉬워진 지금, 타인을 믿기가 예전보다 더 힘들었다. 살아오면서 가장 무너지기 쉬운 자리에 서서 카야는 그녀가 아는 유일한 안전망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녀 자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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