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당신 것이니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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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자를 대통령으로 뽑아줄 수 있나. 노인들과 20~30대 남성들, 30대 주부들의 몰표. 부동산, 젠더 갈등. 뭐 하나 맞아떨어지는 게 없다. 대통령이 누가 되든 부동산, 부동산, 부동산. 심지어 부동산도 없는 자들이 몰표를 던져 줬다. 프랑스 혁명을 이끈 구체제에서 한국은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극복하지도 못했다. 역사적 맥락을 짚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나는 친일파 청산을 못 한 것에 가장 큰 방점을 둔다. 반민특위의 실패는 정의가 사라지고 기회주의가 판치는 세상을 만들었다. 친일이 반공이 되고 반공이 독재로 가면 바꾸기하면서 아직도 이 나라를 주무르고 있다. 오죽하면 일개 공무원 나부랭이 검사들이 국가 최고 입법기관과 아직은 퇴임 전인 대통령에게 대들고 있다. 좀 더 가진 자, 힘이 센 자에게 붙어살면 대대로 떵떵거리고 산다는 근현대사가 만들어낸 현실이다.

 

코로나 시기 선진국들이 한국을 치켜세우고 사회 전 분야에서 K 열풍이 불면서 진짜 우리만 스스로 모르는 선진국이구나 착각했다.

아니다. 아직 멀었다. 지금의 정치 지형이라면 앞으로의 선거도 암울할 뿐이기 때문이다.

 

바이러스의 진원지마냥 발만 디딘 적 있어도 입국을 금지하던 나라와 수료라니. 악의 축, 불량국가, 테러 지원국을 봉쇄하고 무너뜨리기 위해 이제껏 우리가 기울인 노력들은 다 뭐란 말인가.” (p.237)

 

노인들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이 바로 내 부모의 모습이니까. 그런데, 이해가 혐오로 바뀌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퇴물 정보 요원들은 백악관, ‘사상 최초 평양 정상회담전격 발표.” (p.230)라는 뉴스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 여전히 그들만의 세계, 냉전과 독재 시대에 사는 것이다. 가장 찬란했던 때를 놓치기 싫은 발작이다.

 

설령 역사를 바꿀 뻔했대도 일개 국장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랴. 과거에 대한 존경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이 반역의 시대에.” (p.154)

 

사실, 이 책은 선거 전에 읽었었다. 책 내용 자체는 별로 재미없었다. 여전히 자신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이 설치는 퇴물 요원들의 주접이 다소 허황되고 판타지라 오히려 더디게 읽었다. 그런데 선거 후 가만히 이 책의 내용을 떠올리니, 지극히 현실적인 내용이라 생각되었다. 묻지마 몰표를 던져 준 저들에게는 당신들의 시대가 아닌 시대는 모조리 반역의 시대일 수 있겠구나. 묻고 싶다. 당신들의 시대가 아니면 모조리 반역의 시대냐고. 존경심? 존경심 따위는 이제 없다.

 

일반 패스는 삐, 하고 정상 처리 알림음이 한 번 울리지만 시니어 패스는 삐삐, 두 번 울린다. 선심 쓰듯 무료 패스를 발급하는 이면에는 반정부 성향이 강한 노년층을 감시하려는 속셈이 깔려 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p.51)

 

시니어 패스 같은 디지털 시대의 첨단에 대해서도 반정부 성향이 강한 노년층을 감시하려는 속셈으로 생각할 수 있겠구나. 그래서 카톡의 온갖 대화창과 방에도 저런 내용으로 유포될 수 있겠구나. 저들의 코인을 먹고 사는 유튜브 장사치들도 하루종일 떠들어 댈 수 있겠구나. 싶었다. 생각이 이쯤에 이르고 나니 팔다리에 힘이 빠진다.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과 살고 있나 싶다. 내가 아니면 너는 다르다가 아니라 틀렸다.’라고 당연히 생각하는 자들과 한 하늘을 이고 산다는 것이 별스럽다.

 

책은 별로 재미없었다. 퇴물 요원들의 우상이던 그 분이라는 존재에 대한 접근과 묘사도 와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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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김누리 지음 / 해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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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앞두고 온갖 음모론과 다툼, 갈등과 정보가 쏟아지는 현재다. 대선이라는 큰 선거를 앞두고 반복되어 온 일이라 치부하기엔 정도가 과하다. 포털 사이트 첫 창을 보기가 힘들 정도로 온갖 정보가 넘쳐난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도 전에 새로운 일과 정보가 쏟아진다. 머리가 아프다.

팬더믹 이후 한국은 방역과 예방, 경제력의 회복 등에서 선진국의 위치에 올랐다. 이전까지 늘 부러워하기만 했던 기존의 선진국들이 K모델을 차용하고 도입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적 수준은 여전히 후진국이다..

 

그들의 상대는 언제나 외세에 기대어 기회주의적으로 사적인 이익만을 탐하는 수구 보수들이었습니다. 도덕적 하자가 너무나도 분명한 수구 보수 세력하고만 경쟁해 왔기 때문에 항상 도덕적으로 우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p.105)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에서 소위 진보로 분류되는 지금의 여당에 대한 비판에 힘을 싣는다. 그리고 언론이나 흔히 사람들이 알고 있는 보수진보의 정치 지형이 아니라, “‘수구보수가 손을 잡고 권력을 분점한 수구-보수 과두지배(oligarchy)’(p.172)”라고 정의한다. 100퍼센트 동의하는 바다. 거대 양당이 권력을 주고받았을 뿐, 소수정당은 제대로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해방 이후 친일부역자들을 처단하지 못했고, 이어진 한국전쟁과 군부독재 기간을 통해 한국은 반공 파시즘이 가득한 곳이 되었다. 저자의 지적대로 민주화운동과 학생운동을 통해 정계에 진출한 수많은 86세대는 수십 년을 지배한 거대 수구기득권 세력에 대항하는 것이 최선이자 최대였다. 당연할 수밖에 없는 도덕적 우위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정당성이었다. 이것은 이번 정권 내내 이어진 수구기득권 세력의 뻔뻔한 행태를 통해 정확히 드러났다.

저자는 이것을 “‘광장 민주주의일상 민주주의가 괴리된 현상으로 (p.32)” 지적한다. 함께 어깨를 걸고 거대한 시위와 운동을 하는 것에는 거리낌이 없지만, 이후 꼼꼼하고 면밀하게 감시하고 비판하는 일에는 미흡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대통령을 탄핵하는 엄청난 직접민주주의를 이뤄냈다. 이것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교과서에서 배우던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에 한국 시민사회도 놀랐다. 하지만 이후가 문제였다. 촛불을 들고 대통령을 탄핵했던 사람들이 탄핵한 정치세력을 다시 지지하고, 제대로 처벌받은 정치세력은 전혀 없다. 과거 몇 년을 돌아보며 나도 무척 궁금했다. 도대체 왜 한국 사회는 이렇게 병리 되어 있었을까.

저자는 군사문화의 전면적인 재배와 정치 지형의 기형화를 지적한다. 그리고 교육문제를 지적한다.

 

한국은 사립대학이 기형적으로 많습니다. 한국은 사립대학 비율이 87퍼센트로 세계에서 사립대학의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p.39)

미국조차도 사립대학의 비율이 20퍼센트를 넘지 않습니다.”

 

사학법 개정에 대해 한국 사회의 전 기득권 세력이 들고일어났었다. 이명박 정권 시절에는 뉴라이트라는 이상한 역사교육이 시행되었다. 대학입시 제도는 수시로 바뀌고 일반인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졌다. 강남을 비롯한 교육열이 높은 곳에서는 대학입시를 컨설팅 해주는 사람들이 따로 있기도 하다. 부모의 등골을 휘게 만들었던 대학 등록금은 이제 청년세대의 짐으로 던져졌다. 졸업하고 취업해서도 대학 등록금을 갚아야 하는 실정이다. 출발선부터가 다른 것이다. 이것은 정권이 바뀌어도 똑같았다. 시민들이 정권을 교체해도 매번 똑같은 어려움과 부담을 지게 되니, 더욱 정치에서 멀어진다. 이것은 앞서 말한 수구-보수 과두지배세력이 가장 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당연시한 많은 것이 여기서는 잘못된 것, 부조리한 것,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었으니까요.” (p.16)

 

저자는 책에서 독일과 한국을 비교한다. 독일의 총리가 한국의 대통령을 각별히 존중하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젊은이들이 K팝에 열광해도, 저자가 경험한 수십 년 전의 독일 사회와 지금의 한국 사회 사이의 괴리는 현실이다. 이미 수십 년 전에 독일 대학에서는 조교가 베를린 자유대학의 총장이 되고 (p.40),” 일반 기업 이사회의 절반을 노동자가 차지하도록 법으로 정해놓았다. (p.43)”고 한다. 2021년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우리는 계속 이런 사회·국가에서 살아야만 하나?

결국, 정치의 문제다. 가증스럽고 역겹지만, 정치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청년 고독사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공동체는 흩어졌으며 그것으로 인해 청년층의 보수화가 노골화 되는 지금이다. 더 이상 정치를 홀대해서는 안 된다.

만약, 지금의 정권이 아니라 탄핵당한 정치세력에서 코로나 펜더믹을 맞았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두손 두발 다 놓고 있는 일본의 상황보다 더 심각했을지도 모른다.

당장 선거를 통해 수구-보수 과두지배체제를 무너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수십 년을 하루아침에 되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다. 계속해서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설득하고 함께 어깨를 걸어야 한다.

도대체 한국의 국민은 어디까지 해야 하나요.”라는 커뮤니티 댓글이 기억난다. 탄핵하고 새로운 정치세력에 완전한 힘을 몰아주었지만,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한 한탄이었다. 해당 댓글에 대한 좋아요와 추천이 엄청났었다.

어쩔 수 없다. 독일이 아닌 한국에서 사는 한, 정치를 바꿀 수 있는 건 우리의 몫이다. 어지럽고 혼란한 한국 사회의 균형을 되찾는 것은.

결국, 정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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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21-11-27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양비론은 경계해야하는 회색논리라 생각하고 있어요, 현실을 직시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하지요. 김누리의 기득권 비판은 새로운 이해가 아니에요. 결국 자기탐닉적인 보수에 도움이 되는, 진보가 지향하는 가치만을 퇴색시키고 말지요. 수구세력에 도움이 되는 논리로 귀착되고 말아요. 양비론의 프레임에 갇히기 시작하면 수구에 끌려다니게 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좋은 리뷰 읽고 갑니다.

lmicah 2021-11-30 19:37   좋아요 0 | URL
지금의 정치 혐오 정서와 20대의 수구화를 낳은 것이 양비론의 폐해라는 데 동의합니다. 언론신뢰도 최하위의 기레기들과 기득권이 원하는 바이기도 하지요.
저는 이 책을 통해 김누리의 글을 처음 접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의 정치지형을 보수와 진보가 아닌 ‘수구-보수 과두지배‘로 보는 접근에 동의했습니다. 이 잣대로 보지 않는 이상 지금의 정치 지형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180석이나 되는 의회를 가지고도 뾰족한 개혁을 해내지 못한 여당은 진보가 아니죠. 철저히 기득권일 뿐입니다.
김누리 교수의 다른 책도 읽어 볼 요량입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함께 쓰는 역사 일본군'위안부' 일제침탈사 바로알기 4
박정애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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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을 보고 선뜻 구매하지 못했다. 몇 번을 망설이다 구매했지만 읽기는 더욱더 힘들었다. 얇은 책이지만 어렵고 길게 읽었다.

7~8년 전, 가까운 친구가 대구에 있는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에서 상근 직원으로 일했었다. 도와줄 일이 있다 해서 사무실을 찾아갔다. 사무실 주소를 받아 들고 한참을 헤맸다. 사무실은 사람의 왕래가 잦지 않은 대구 구()시가지 골목 안에 있었다. 낡은 건물 2층에 있는 사무실은 좁았다. 좁은 사무실에는 물품이 가득했는데, 당시 후원을 위해 제작하던 희움팔찌의 구성품이었다. 시민모임의 예상보다 구매와 후원이 많아 나를 제외하고도 일손을 돕는 사람이 몇 있었다. 역사관 건립을 위한 활동이라는 말을 얼핏 들었던 기억이 있다. 2015년 시민모임 사무실 인근에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이 건립되었다.

 

흔히 접할 수 있는 위안부문제에 대한 인식은 문서자료를 더 많이 발굴하여 그 피해를 입증하고 일본의 가해 책임을 촉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공간을 가로질러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외면 또는 은폐하고 싶던 위안부라는 호칭은 문서자료를 통해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p.45)

 

당시만 해도 위안부보다 정신대 할머니라는 호칭이 일반적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위안부로 통용되고 있다. 친구가 시민모임에서 일할 때, 몇 번 모임의 캠페인에 참석했었다. 피켓도 들고 행진도 했다. 친구가 시민모임 일을 그만두고 자연스럽게 관심이 줄어들었다. ‘위안부라는 단어를 책이나 미디어를 통해 수도 없이 보고 들었지만, 이 책을 받아든 순간 제목을 보고 이질감이 들었던 것은 역사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이 현저히 줄어든 탓이다.

 

여전히 당신들이 겪은 일은 피해가 아니었다며 훈계하고 입막음하려는 역사 부정론자들이 있다. 그렇기에 바로 지금, 이들의 이야기는 더욱 확장되어야 한다.” (p.92)

 

얼마 전, TV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서 지난 보수 정권하에 국정원과 일본 우익의 커넥션을 폭로했다. 나라 전체가 들썩여야 할 대단한 사건이었음에도 너무 조용했다. 받아쓴 언론은 없었고, 피를 토하며 비판해야 할 역사학계도 꿀 먹은 벙어리였다. 친구가 일하는 단체라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되고 참여하게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보도하고 교육하고 홍보해야 한다. 하지만 일본의 극우세력이 망언하면 잠깐 보도되거나 위안부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단신으로 전달될 뿐이다.

 

피해자 중심으로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해결하려는 우리들의 노력은 평화와 인권이라는 가치가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들어올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p.4)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의의가 크다. 생존하신 할머니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기록했다. 정확한 역사적 사료와 표현이 중요한 독도 영유권과는 다른 문제다. 전쟁이 끝난 후 위안부문제를 가장 지우고 싶어 한 사람들은 할머니들이셨기 때문에,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숫자 240명은 정확한 수치가 아닐 것이다. 평생을 아픔과 한으로 살아오신 할머니들의 구술을 받는 작업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함께 생활하는 가족과 친지, 이웃들에게도 알려질 터라, 더욱더 그렇다.


본문에 나온 이름은 모두 존칭을 생략하였다. 이 책에 언급된 피해자 및 인권운동가의 삶이 할머니에 갇히기보다는 한 사람의 인생으로 기록되기를 바랐다.” (p.5)

문서에 의존하기보다는 당사자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들으려는 듣는 자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단편적으로 흩어진 조각들을 이야기로 엮을 수 있었다.” (p.46)

 

피해자 중심으로 위안부문제에 접근하는 자세는 책의 곳곳에 드러난다. 무엇보다 할머니로 통칭하는 위안부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피해자 인생의 기록에 초점을 맞춘 접근은 의미 있는 성과다. 단편적인 기억과 엉켜있는 경험을 조합하고 정리하는 일은, 고난도의 뜨개질을 하는 것처럼 수고로움과 인내를 동반해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피해자들은 인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는 것이다. 어제보다 더 나은 일상을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생존해냈다. 살아남아 자신과 동료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인간으로서 자신들이 기억되기를 바랐다.” (p.78) 는 저자의 종합적인 의견은 위안부문제를 더욱 공론화해야 할 이유다. 그들의 생존은 자체로 역사가 되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의 세월을 견디고 끊어질 듯 힘겹게 삶의 끄트머리를 붙잡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명이 24일 별세했다. 이제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 가운데 생존자는 13명이 남게 됐다.매일신문,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1명 별세.”, 925일 기사 중 발췌

 

정부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숫자가 240명이다. 수십 명이, 수백 명이 더 생존해 계실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공식적으로 등록된 피해자가 모두 별세하신다면 대내외적으로 위안부피해자는 생존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제는 이런 책을 위해 구술을 받을 수 없다는 얘기다. 자료가 남아 있는 것과 그 자료를 수정할 수 있는 당사자가 생존해 계신 것은 차원이 다르다. 일본의 극우와 가해자들, 한국의 극우와 부역자들이 그토록 원하는 일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이미 시작된 카운트다운이 가파르다.

 

다음에는 더욱 속 깊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은 다시 오지 않았다. 열흘 뒤인 2001210일 하복향이 세상을 떠났다.” (p.33)

이수산은 어느 때고 망설이기는 했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202032일 작고했다.” (p.70)

박순희는 20128월 작고했다.” (p.72)

 

시간은 피해자들 편이 아니다. 피해자들이 살아온 영겁 같은 세월과는 반대로 남아 있는 시간은 무람없다. 인터뷰 약속을 하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다음번엔 더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않은 채 나눈 작별 인사 뒤 얼마 되지 않아 피해자들은 세상을 떠났다. 안타까운 일이다. 전하고 퍼뜨려야 할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너무 크다. 일개 개인과 가족, 집단의 잘못이라고 치부하며 역사 부정론자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후 김순악은 위안부피해자 생활 대상자로 결정되었다. 그는 더 이상 우울증에 짓눌리지 않았다. 김순악은 대상자 결정통지서를 액자에 넣어 방에 걸어두고 보고 보고 또 봤다고 한다. 그것은 국가가 김순악을 피해자로 인정해준 것이며 삶의 고통이 김순악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p.90)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선생님이 좌절한 제자에게 말한다.

It’s not your fault, It’s not your fault. 완벽을 추구하는 천재 제자가 가진 깊은 상처를 위로한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래 맞아. 네 잘못이 아니야.’

김순악도 평생을 짓누르던 고통을 다소 떨쳐냈다. 국가의 인정배려는 죽어 있던 영혼을 되살린 것이다. ‘결정통지서를 액자에 넣어 방에 걸어두었다는 피해자의 구술이 슬프면서도 당차고 멋있다. 그 종이 한 장이 전 생애를 어루만져 위로할 수는 없지만, 더 이상 숨어 지내며 가해자가 아닌 자신을 괴롭히는 인생을 살지 않게 된 것이다.

연구자들은 연구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시민단체는 활동을 지속하고, 정부는 종합적 지원을 모색하고 일본의 사죄를 받아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한다. 잊지 않고 찾아내야 한다. 노력을 기울여 찾아내고 알아내야 한다. 알아야 전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현재의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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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폼 소설문학 소설선
박영희 지음 / 북인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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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 안방에 큰 액자 몇 개가 걸려 있다.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가족사진이다. 여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액자. 제외한 하나는 소위 임관식 때 찍은 내 독사진이다. 20년 전 앳된 내 모습은 볼 때마다 새롭고 놀랍다. 세월의 야속함을 매번 확인하면서 놀라고 사진 속 내가 육군정복 유니폼을 입고 짓고 있는 근엄한 표정에 더욱 놀란다. 부모님은 내가 직업군인을 되고 동생이 직업 경찰이 된 것에 자랑스러워하셨다. 소위 계급장을 달고 어리바리하고 있을 때, 어머니는 그렇게 자랑을 하셨다고 했다. 그 자랑이 3년밖에 지속 되지 않은 건, 상의 없이 장기복무를 신청하지 않고 전역하겠다는 말씀을 드린 후부터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직업이 3번 바뀌었는데, 2번째와 현재 직장에서만 유니폼을 입고 있다. 2번째 유니폼도 꽤 자랑스러워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차려진 장례식장에 유니폼에 새겨진 글자와 똑같은 글자가 새겨진 장례 물품이 가득 도착했다. 화환도 있었다.

그래도, 00 엄마는 그래도 자식 복은 있어. 두 형제 다 저렇게 좋은 직장에 다니고 결혼도 다 하고, 손주들까지 있고 말이야.”라는 위로가 어머니께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지금 현재 입고 있는 3번째 유니폼은 마뜩잖아하신다. 다행히 동생은 아직 경찰 유니폼을 입고 있어, 내가 줄곧 드리고 있는 실망이 다소나마 상쇄되고 있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서서 손을 흔드는 희진의 푸른 희망에 다 부르지 못한 젊은 날의 팡파레를 힘차게 불어본다.” (p.215)

 

어머니도 내 등을 뒤에서 보시며 이런 생각을 하셨을까? 극구 딸의 진학을 반대하신 외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종종 들었다. 남동생들 다 나온 고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셨다. 어머니가 못다 부른 팡파레를 내가 부르고 있는 걸까. 라는 생각에까지 미치면, 죄송한 마음뿐이다.

 

어떤 경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산뜻한 유니폼을 입고 은행 창구에 앉아 있는 여직원들의 얼굴을 뜯어봐도 눈에 띄는 얼굴도 없었다. 내 딸이지만 쟤들과 비교해도 하나도 꿀릴 게 없어 보였다.” (p.9)

 

내가 아이를 키우고 학부모가 되니, 어머니와 희진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알 듯하다. 유치원에 가고 초등학교에 가면서 자연스레 내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게 된다. 조금 더 두각을 보였으면 싶고, 조금 더 나은 소리를 듣고 싶다. 꿀릴 게 없어 보이는데, 앞서나가지도 못하고 더 안정된 자리를 찾아내지 못하는 나를 보며 희진의 엄마처럼 내 어머니도 안타까워하셨겠지.

 

그럼요, 고안나 주임님. 전 그저 짝퉁 말고 진짜 땡땡이 유니폼만 입으면 되니까 지금껏 보여주신 지랄도 이해하고 앞으로 보여주실 어떤 초특급 지랄발광도 다 이해할 것입니다.” (p.31)

 

미정은 지방이지만 국립대 영문과를 나온 딸의 거듭된 취업 실패를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유망한 조미료 회사 수습직원으로 들어가 만난 고안나 주임의 무자비한 조련과 폭언에 놀라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머지않아 고안나 주임과 같은 정규직 유니폼을 입을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고안나 주임도 기가 빠지게 혼낸 뒤 꼭 덧붙였다. “내 말만 잘 듣고, 하라는 대로하면 유니폼 입을 수 있다.”라고.

 

저 또라이 같은 것 때문에 지금 그만두면 앞으로 난 아무것도 못 할 거야. 살면서 저런 인간 다시 만나지 말라는 법 있어? 아니잖아. 견뎌낼 거야. 이겨내서 꼭 유니폼을 입을 거야. 싸구려 땜질 유니폼이 아닌 회사 로고가 박힌 진짜 유니폼을 입을 거라고.” (p.145)

 

회사 로고가 떡 하니 박힌 진짜 유니폼만 입을 수 있다면 지금의 고난과 역경은 참을 수 있는 것이었다. “주눅 들었던 내 자존심도 성적도 가난도 모두 잊힐 만큼 힘이 셌다.”고 할 만큼 유니폼은 대단한 것이었다. 상승한 신분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유니폼으로 알 수 있고, 조미료가 납품되는 매장에서도 쉽게 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참고 또 참았다. 동네 오빠 성현 만나기 전까지는.

 

제일제당 영업부 대리 김성현.”

김성현 대리라고? 성현 오빠 옆자리에 앉아 오빠의 옆모습을 슬쩍 훔쳐봤다. 예전에는 몰랐던 오빠의 시원하게 뻗은 콧날이 남자답게 느껴졌다.” (p.87)

 

호감을 느끼고 있던 동네 오빠가 하필이면 경쟁사에서 일하고 있다. 안 풀려도 참 안 풀린다. 예전에는 모르던 오빠의 매력이 제일제당이라는 명찰에서 가중되었다. 한참 경쟁사와 미묘한 갈등 중에 있는 터라 입조심 또 입조심 했지만,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흘러가듯 얘기한 정보를 미리 알고 경쟁사에서 더 크게 홍보를 벌인 것이다. 시원하게 뻗은 콧날을 가진 경쟁사 총각과 아는 사이인 것을 알고 나서, 더 혹독하게 미정을 대한 고안나 주임은 바로 미정을 의심한다. 앞뒤 없이 밀고 들어오는 불도저 같은 공격에 미정은 유니폼이고 정규직이고 뭐고, 이성의 끈을 놓는다.

 

미친 건 내가 아니고 너야!”

? 너라고 했어? 이게 간덩이가 아주 처부었구나. 위아래도 안 보이는 게. 너 지금 하는 짓거리 이거 유니폼 안 입겠다는 소리 맞아?”(p.189)

 

미정은 멋진 정규직 유니폼을 입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걷어차 버렸다. 자존감을 바닥까지 곤두박질치게 만드는 압박과 폭언은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고 주임에게 도둑년으로 취급받고 믿었던 동네 오빠에게 배신 아닌 배신을 당하면서 누더기가 된 채 유니폼을 입기는 싫었다.

 

계약직은 유전된다.” (p.8)

 

열심히 살고 최선을 다해 아이를 키워 교육했지만 취직을 못 한다. 하더라도 정규직이 되지 못한 채 유니폼을 벗는다. 30년 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딸에게서 반복된다. 채근하고 달래고 어르는 것도 정도가 있다. 미정은 자신의 지난날을 한참을 돌아보고 난 후 희진의 결정에 동의한다. 베트남으로 간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딸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하기도 한 것이다.

 

나는 내 어머니의 처녀 시절 공장에서 일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당신의 군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단 한 번도 나와 동생에게 군대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던 것과 같은 이유라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상의도 없이 장교 유니폼을 벗었을 때도, 누구나 알만한 큰 회사의 유니폼을 벗었을 때도 어머니는 긴말하지 않으셨다. 내가 천천히 설명해 드릴 때까지 기다리셨다. 그것이 공항 게이트 안으로 향하는 희진을 향한 미정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자식의 뒷모습을 보고 한 번 더 믿어주는 기다림. 가슴이 닳아 없어질 듯 아프지만 내색하지 않고 뒤돌아서 눈물 훔치는 애절함. 미정에게서 내 어머니를 발견하고, 희진에게서 지금의 나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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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에 아줌마 누벨솔레이 1
후카자와 우시오 지음, 김민정 옮김 / 아르띠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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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끝난 도쿄 올림픽에서 인상 깊었던 선수가 있었다. 유도 종목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안창림 선수다. 출전한 전 경기가 연장전까지 가는 혈투였다. 아쉽게 결승 진출은 실패했지만, 마지막 동메달 결정전에서도 연장전까지 경기를 치렀다. 그리고 기사가 쏟아졌다. 재일교포 3”, “귀화 선수. 기사를 보고 알았다. ‘, 안 선수가 재일교포였구나.’

 

마사루가 메달을 딴 선수보다 더 월등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마사루는 한국 국적이어서 일본 국가대표가 될 수 없었다.” (p.205, <국가대표> )

 

안창림 선수는 일본에서도 촉망받는 젊은 유도 선수였다고 한다. 이름을 일본식으로 개명하지 않은 채 선수로 활동했다. 한국으로 넘어오기 직전에는 일본으로의 귀화도 권유받았다고 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안창림 선수는 확고했다.

확고한 안 선수의 신념은 올림픽 후 출연한 TV 프로그램에서 한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조센징’, 한국에서는 쪽바리라 불리기도 했지만 꿈을 위한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의 모습을 통해 재일교포 사회가 좀 더 용기를 얻고 힘을 얻기 원한다는 말도 했다. 멋있었다.

특히, 몇 해 전 일본 내 재일교포 학생들이 재학 중인 조선학교에 일본의 극우 혐한세력이 시위를 벌인 일이 있었다고 했다. 당시 그 학교에 안 선수의 남동생이 있었고, 남동생을 포함한 많은 학생이 공포를 겪고 이후에도 트라우마로 힘들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그리고 이것이 일본으로의 귀화를 거절한 큰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이 상태로는 아무리 열심히 펜싱을 해봤자 다케루가 일본 국가대표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올림픽에도 세계선수권 대회에도 영영 나갈 수 없을지 모른다.” (p.206, <국가대표> )

 

안창림 선수도 실력 자체는 뛰어난 데,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갈 수 있는 시합이 많이 없었다고 했다. 일본 선발전에는 나갈 수 없었다. 초대 조선대학교 교장이었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아무래도 바꿀 수 없다.”라고 했다. 불가피한 선택이었든, 운명적인 선택이었든, 한국에 와서도 쪽바리”, “일본놈같은 비아냥과 조롱을 견디며 당당히 태극마크를 달았다.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의 삶은 비슷한 처지의 경계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면 공감하기 어렵다. 나 또한 그렇다. 일본에서는 조센징”, 한국에서는 쪽바리라는 소리를 듣는 일상이 어떨지 가늠하기 어렵다. 공감도, 가늠도 하기 어렵다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공감뿐이다. 그들의 말을 듣고 이해하려 공감하는 것. 그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책에 등장하는 마사루와 다케루도 절대로 일본 국가대표가 될 수 없는 현실을 알고 있다. 성적을 내고, 올림픽 메달리스트보다 실력이 더 뛰어나지만, 한국 국적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재일교포 운동선수들이 모두 안창림 선수처럼 한국으로 귀화해 한국 국가대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비슷한 경계선 안에서도 차별과 조롱을 딛고 일어서지 못한 채 주저앉는 경계인들이 더 많을 것이다.

 

경계인인 재일교포가 일본 사회에서 겪는 일상은 짐작하기 어렵다. 기껏해야 TV에서 소개되는 정도인데, 이 책 가나에 아줌마는 그들의 삶과 일상을 다층적으로 소개한다. 마치, 옴니버스 영화를 보는 듯했다. 사건이 이어지고 인물들이 등장하며 사건과 인물이 겹치고 섞인다. 책은 쉽고 재미있게 읽히지만 시사하는 바는 많다. 재일교포가 겪는 결혼, 차별, 자녀 양육, 직장 문제 등. 경계선 안의 일들을 상공에 떠 있는 드론으로 조망하듯 관찰하는 맛이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그들의 삶도 우리와 매한가지다.’라는 것이었다.

 

장 여사한테 이케가미에 사는 가나에 아줌마한테 가면 좋은 사람을 소개받을 수 있다고 들었어요. 전국의 재일교포들이 다 여기로 찾아온다고, 그래서 좋은 인연도 많다고요. 금세 짝을 찾아준다고 했거든요.” (p.20)

 

결혼 적령기를 놓친 교포 청년들의 중매를 직업적으로 하는 가나에 아줌마는 재일교포 사회에서는 유명인이다.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교회나 성당 같은 곳에도 가나에 아줌마 같은 중매쟁이들이 있다고 한다. 일단 종교가 같으니 다른 소개팅 자리보다 편하게 만날 수 있단다. 실제로 목격하기도 했다. 시내 큰 커피숍에 그날따라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은 선남선녀들이 많았다. 그리고 여러 테이블 사이를 미끄러지듯 왔다 갔다 하는 노인들이 계셨는데, 그분들이 바로 가나에 아줌마 같은 중매쟁이였던 것이다. 선남선녀가 주섬주섬 소지품을 챙기고 커피숍을 나서더니 문 바깥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여성은 갈 길을 가고, 남성은 다시 커피숍으로 들어와 테이블에 앉았다. 남성의 착석과 거의 동시에 미끄러지듯 중매쟁이할머니가 앉아 한참을 얘기했는데, 잠시 뒤 다른 여성이 남성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고 중매쟁이할머니는 면면에 활짝 웃음을 띈 채 총총 자리를 뜨셨다. 몇 년 전이지만 기괴한 장면이라 기억에 남아 있었다. 가나에 아줌마도 그랬다. 내가 봤던 할머니들과 달랐던 점은 훨씬 성공률이 높아 교포 사회에서 인지도가 꽤 높았다는 점이다.

 

그 아가씨 고향이 혹시 제주도나 전라도는 아니죠?”

아냐, 분명히 경상남도라고 했어.”

, 다행이네요.” (p.25)

 

교포 사회에서, 그것도 교포 1세대 2세대도 아니고 3세대 이후의 결혼 상대자를 찾는 기준이 전라도”, “제주도라니. 일부러 소설의 극적인 연출을 위한 과장이라 생각하고 싶다. 하지만, 실제 교포 사회가 더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라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재일교포, 재미교포를 막론하고 말이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지인이 현지 한인교회를 잠시 다녔었는데 장난이 아니라고 했다. 나쁜 의미로. 한국의 그 어떤 교회들보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라는 것이었다. 교회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최초 정착한 1세대의 가치관과 국가관은 수십 년 전의 것이고, 그것이 2세대·3세대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이다. 심지어 그 아가씨는 제주도나 전라도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다. 아가씨의 부모 혹은 조부모가 태어난 곳이다. 그런데, 경계선 안에서는 더욱더 좁아질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생각도·기준도 말이다. ‘경상남도라서 다행인 것이 누구에게 다행인 것인지 알 수 없다. 아가씨와 총각은 서로 아주 마음에 들고 잘 맞아서 결혼하고 싶은데, 한쪽 부모나 조부모의 고향이 제주나 전라도라면 당장 파투 낼 수 있을까? 그렇지도 않겠지. 누구나 불편해하지만, 누구도 쉽게 바꿀 수 없는 불문율 정도다. 그리고 가나에 아줌마에게는 중요한 선택 기준이 될 것이고.

 

경계인들이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기준에 집착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같은 재일교포 가족들이 사는 가정을 벗어나면 바로 맞닥뜨리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타인일 뿐이다. 오랜 시간 차별받고 조롱당하며 그것을 숙명처럼 등에 지고 살았다. 그런 이들에게 출신과 성분, 지역은 고국과의 연결고리다. ‘나도 모국의 사람들처럼 이런 것을 따진다.’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할배가 온 후로는 매 끼니 식탁에 김치가 오르게 되었다. 재일교포 2세인 부모님이 매끼 김치를 먹어 온 것은 아니었고, 3세인 미오와 고타의 경우에는 김치를 전혀 먹지 않았다. 냄새조차 싫어했다.” (p.292)

불공평해요. 취직할 때도 제약이 많았어요. 사실은 정부 계열 금융기관에 취직하고 싶었는데 저한테는 시험 볼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어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단지 한국인으로 태어났을 뿐, 저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잖아요.” (p.42)

 

교포 2세대는 김치를 흔하게 먹지 않았고, 3세는 전혀 먹지 않았다. 냄새조차 싫어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타인이고 경계인이다. 이곳에도, 저곳에도 속할 수 없는 존재. 단지, 운동선수만 차별받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한국인으로 태어났을 뿐인데, 취직이 안 되고 시험조차 볼 수 없다. “저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잖아요.” 맞다. 아무 잘못도 없다. 하지만 현실이다.

경계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현실.

 

이것은 하루 이틀, ·이년 동안 축적된 것이 아니다. 교포 역사를 거슬러 올라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꾸준히, 쉴 새 없이 축적된 것이다. 당연히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 보루로 쌓아 올린 자신들만의 성을 경계선 바깥의 사람이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 집은 너희 집이랑은 다르잖니? 그 뭐야, 우리는 양반이란다.” (p.160)

 

양반? “우리가 양반이면 “, ”너희는 상놈이라는 말인가? 구한말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성을 쌓아도 너무 높게 쌓았다. 민단과 조총련의 갈등보다 더 심할 것 같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탐탁지 않다. 처음부터 ”‘(우리)’와 달라.”라고 못 받는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음식을 장만하고 준비하고 진행되는 과정 내내 구박에 구박을 더한다. 모국에서도 씁쓸한 관용구가 되어 버린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하면서. 며느리는 잘하고 싶다. 눈에 띄게 자신을 싫어하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헛수고다. 시어머니는 박은 못을 쉽게 빼내지 않으려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손윗동서와는 대놓고 기 싸움을 한다. 예비 며느리 에리카는 당황에 당황을 더한다.

 

네가 일본 사람이란 거 아무렇지도 않아. 이건 내가 아니라 우리 부모님 문제지. 에리카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일본 사람은 우리 집 며느리가 될 수 없어. 우리 집은 양반이라 어쩔 수 없어. 결혼 문제로 앞으로 널 힘들게 할지 몰라.“ (p.169)

 

일본 사람이라서 그렇다. 교포 선남선녀가 만나는 데는 출신과 고향이 중요한 기준이 되기는 하지만, 일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만 40년을 살아온 내가 1도 예상할 수 없었던 부분이다. 힘든 제사가 지나가고 에리카는 혼란스러웠지만 예비 신랑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다. 가나에 아줌마가 소개한 한복집에 시어머니와 함께 한복을 맞추러 간다.

그리고 충격적인 고백을 듣는다.

 

나도 일본 사람이었어.“

내가 일본 사람이었던 건 아들들도 영인이도 몰라. 결혼하고 한국 국적으로 바꿨으니까. 부모님은 나랑 인연을 끊으셨어. 친구들도 다 떨어져 나갔지. 나는 말야, 이 집으로 시집와서, 그래. 말도 못 하게 시집살이를 했다. 재일교포 1세인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으니까. 양반이라기에 그런가 보다 했단다. “(p.195)

 

일본 사람이다. 가 아니라 일본 사람이었다.’ 과거형이다. 결혼하고 귀화한 것이다. 국적을 바꾸고 경계선 안으로 들어 온 것이다. 40년 동안이나 참기름을 온몸으로 뒤집어쓰며 도미코는 도쿠지의 아내이자, 김씨 집안의 며느리, 그리고 한국인이 된 것이다. 시어머니는 완전히 한국 양반의 후손 며느리가 된 것이다. 자식들조차 모르게 했다는 삶은 얼마나 고단했을 것인가. 재일교포 어느 집안, 한국의 어느 양반집 며느리보다 더 참기름을 뒤집어서 쓰고 정성스레 제사를 준비했을 것이다. 법적으로도 완전히 한국 사람이 되었지만, 시집살이 중 서럽고 힘든 일은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을 것이다. 자신과 같은 어려운 길을 가게 될지도 모를 예비 며느리를 보며 40년 전, 자신의 선택에 대한 분노와 후회를 쏟아냈을 수도 있다. 그 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길인지 알고 있으니까. 자신의 힘든 걸음을 되풀이 할 일본 사람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가나에 아줌마와 재일교포 사회의 결혼이라는 주제를 둘러싼 인물들의 자연스러운 중첩과 복선이 이 책을 읽는 재미다. 재일교포 작가만이 담아낼 수 있는 재일교포 사회의 단면과 이면의 모습도 재미있고 의미 있었다.

 

우리와 같은 듯, 다른 경계인의 삶에 대해 궁금해지는 것이 더 많아진다. 어쩔 수 없는 경계의 삶에서, 같은 것보다 다른 것으로 인해 차별과 혐오가 지속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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