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케이크의 맛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혜진 지음, 박혜진 그림 / 마음산책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시대다. 삶의 모든 것이 정치인데, 정치 뉴스는 머리가 아프다. 지지율이 30%도 되지 않는 대통령은 마음대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언론이라 일컫는 것들은 입을 닫고 삐에로가 된 지 오래다. 정치가 우리의 모든 일상은 지배하고 있는데, 제대로 알려주거나 날카롭게 비판하거나 뭘 걸고 싸우지 않으니 죽어나는 건 우리들뿐이다.

연일 교권 추락에 대한 뉴스로 가득하다. 교권 추락이 오늘내일 일도 아닌데, 유독 보도가 많이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치원교사 어린이집교사에 의한 폭행 학대, 부모(의붓부모를 포함한) 아동 학대에 대한 뉴스가 쏟아졌다. 제대로 된 사회라면 진작부터 가득했던 이런 일들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 파악과 현실적이고 대담한 입법이나 행정조치가 있어야 했는데, 그저 떠들어댈 뿐이다. 매번 반복되다 보니, 머리가 아프다. 세대 간, 성별 간 갈등은 첨예해진 지 오래고 현실적인 삶으로 내화 되었다. 이젠 늦었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언제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이런 문제들만 생각하면 나의 일과 내 가족의 일, 내 주변의 일은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환상에 빠진다. 나도 그만큼 힘들고 슬프고 우울한데, 쏟아지는 소식들은 입을 다물게 한다.

이럴 때 김혜진의 글을 읽는 건 적잖은 위로가 된다. 그의 이전 작품들도 그랬고 이 작품 또한 그렇다.

 

얼마든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상태. 늘 어떤 결론에 이르러야만 소설이 끝난다고 믿었는데, 어떤 이야기들은 가능성을 품은 채 그대로 둘 수 있다는 것을 이 소설들을 쓰면서 배웠다.” (p.8)

 

결론을 지을 수 있는 일상과 작품이 얼마나 될까. 작가의 솔직함이 묻어난다. 단편을 묶은 것보다 장편을 좋아하지만 이 책 완벽한 케이크의 맛은 모든 작품의 하나의 주제로 관통된다.

일상을 살아가는 나와 너의 모습이다.

 

펜데믹이 극성이던 시기, 작은 재채기에도 모든 신경과 눈길이 쏠렸다. 갑작스런 사례에도 죄인이 되고는 했었다. “국어 쌤 말인데요. 재채기를 자꾸 해서 너무 신경 쓰여요, 원장님.” (p.22, <강사의 자질>)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들이었다.

주인 여자는 노인이 다니는 복지 센터가 몇 주간 문을 닫는 바람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했고,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니니 안심하라고 했고” (p.51, <재택근무>) 현 인류가 동시에 겪은 갑작스러운 변화는 일상을 침범하고 유린했다. 감추고 닫아놓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시스템으로 겨우 막아놓았던 것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펜데믹 시기 이전보다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대화시간이 늘어나거나 행복지수가 올라간 것이 아니라 불화와 다툼, 학대와 방기가 폭증했다. 극우주의자들에게만 겨우 남아있을 거라 기대하던 인종차별이 횡행하고 공동체를 지탱하던 신뢰는 의심과 불안으로 치환되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불분명한 혼란의 시대를 겪었고,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와 함께 있을 때는 아무렇지 않은 척 굴다가 모두가 다 보는 SNS에는 회사 사람들이 싫다, 괴롭다, 미치겠다, 죽고 싶다는 긴 글을 올린 이유가 뭘까.” (p.59, <모르는 일처럼>)

비슷한 일이 있었다. 말수가 없고 내성적인 줄만 알았던 젊은 직원이 누구보다 맹렬하고 난폭한 키보드워리어였다. 또래가 게임으로 엮인 커뮤니티 게시판을 로그아웃하지 않은 채 공용 PC를 켜놔 누군가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가관이었다. 사무실의 거의 모든 상사의 이름이 실명으로 내던져져 가루가 되고 있었다. “인턴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무슨 말을 한 것 같기는 한데 어떤 말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늘 그랬던 것 같다.” (p.57, <모르는 일처럼>) 작품 속 인턴보다는 훨씬 우리가 가깝고, 잘 지내고 있었던 것 같고, 집안 이야기나 가족 이야기도 많이 들어줬었는데. 그래서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많이 가르쳐주세요.”라고 했었는데. 뒤에서는.

여러 명이 한꺼번에 하나를 공격하는 것은 인간의 오랜 습성이다. 협동하고 힘을 합쳐야 사냥을 할 수 있었을 테니까. 인간이 사냥하던 시기가 수만 년 훨씬 이 전일 텐데, 진화가 덜 된 걸까?

 

밀 베이커리 이야기 들으셨죠?” (p.32, <밀 베이커리>)

엄마, 밀 베이커리 아저씨 정말 나쁜 사람이래.” (p.33, <밀 베이커리>)

빵이 이상하던데, 라는 말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만든다. ‘우리 애 담임이 글쎄.’라는 말 한마디로 교사를 그만두어야 한다. 배달 앱의 악성 리뷰로 식당 문을 닫아야 한다. 첨예한 대립은 상처를 후벼판다. 더 아프게 한다.

그저 이해하고 조금만 상대의 처지를 생각할 수는 없을까. 불가능한 일인가?

그제야 희나는 자신이 또다시 내부의 어떤 버튼을 겁 없이 눌러버렸다는 걸 알아챘다. 잠깐 들렀다 오지 뭐. 다 살아 있는 것들인데 말려 죽이면 안 되니까.” (p.119, <극락조>) 희나의 버튼은 오지랖이라 할 수 있다. 굳이 들어주지 않아도 될 일이다. 그래도 감수한다. 수연의 집을 찾아가서 극락조를 살펴야 하는 불편을.

다만 가게가 문을 여는 동안에는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아이와 함께 좋아하는 빵을 사러 그곳에 종종 들를 생각입니다.” (p.41<밀 베이커리>) 주변 엄마들이 모두 종용해도 아이와 함께 좋아하는 빵을 사러 갈 거라는 판단. 그것이 그나마, 이만큼이나 이 사회를 지탱하는 동력이다.

 

사실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아도 뭔 말 하는지 모르겠다. 책 한 권 읽은 리뷰에 뭘 그렇게 의미를 담겠다고.

 

자신이 그런 것처럼 수연 안에도 꺼내지 않았던 수많은 말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그런 말들이란 기다리면 어느새 또 저절로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그 기다림 덕분에 관계가 이렇게 이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였다.” (p.128, <극락조>)

다만, 희나의 오지랖으로 인해 수연의 사려 깊음을 발견한 것처럼 우리들의 일상에도 도둑처럼 찾아오는 소소한 행복의 순간이 가득했으면 싶다. 사는 게 마냥 악다구니에서 발버둥만 치다가 끝나기에는 삶이 너무 길다. 그러면 너무 재미없다. 힘만 들이고 애만 쓰며 살 순 없지 않나.

보고 싶은 작가의 책 보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고, 가족과 함께 웃으며 살고 싶다. 시답잖은 일에도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 사계절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빠, 남자애들이 아빠 무섭대.

바라던 바다. 남자아이들이 너무 거칠었다. 내 눈엔 그랬다. 딸아이와 여자아이들 노는 곳에 계속 얼쩡거리며 방해하고 장난을 걸었다. 보기가 싫었다. 그래서 인상을 있는 대로 쓰고 목소리를 깔고 나무랐다. 2학년인 남자아이 중 몇은 겁을 먹고 또 몇은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았는데, 무서워한다니 다행이다.

아빠, 근데 이제 그러지 마.

? 아빠는 널 지켜 주려고, 좀 더 편안하게 놀라고 그런 건데?

 

어린이가 어른의 반만 하다고 해서 어른의 반만큼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가 아무리 작아도 한 명은 한 명이다. 하지만 어떤 어른들은 그 사실을 깜빡하는 것 같다.” (p.197)

 

최고의 배구 선수 김연경 선수가 하늘을 뚫듯 높이 점프해서 내리꽂는 강스파이크를 뒤통수에 얻어맞은 것 같았다. 부끄러웠다. 나는 단지 내 딸과 딸의 친구들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인가. 고작 2학년밖에 되지 않는 작은 아이들이기에 전혀 내게 위협이 되지 않기에 그렇게 한 것인가. 어린이들의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몸만 큰 어른의 오지랖인가. 돌이켜보면, 그날 내게 혼난 아이들의 부모 중 한 명이 나와 같은 몸만 큰 어른이었다면, 어른 싸움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 책 어린이라는 세게를 읽으며 나는 계속 회개를 하게 된다. 신을 믿지만, 교회는 잘 가지도 않으면서, 성경도 아닌 에세이를 읽고 회개를 하고 있다. 너무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서.

 

말투도 움직임도 조심스러운 어린이였다. 나는 이 어린이와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 꾹 참았다. 어린이가 무서워하는 것도 싫고, 안심하는 것도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침묵이 최선이었다. 나는 어린이의 보폭을 모르니 천천히 걸었고, 어린이도 비슷하나 생각인지 서두르지 않았다.” (p.140)

 

우연히 비를 맞고 있는 아이에게 우산을 씌워 주면서도 어린이를 향한 존중과 배려로 가득하다. 이 책의 저자 김소영은 글쓰기 교실을 운영하는 초기 어린이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책을 읽고 연구했다. 물론, 실제로 만난 아이들에게는 크게 적용되지 않고, 부단히 몸으로 부대끼고 경험하며 노하우를 터득했다. 우산을 함께 쓰고 가는 아이가 자신을 무서워하는 것도 싫고, 안심하는 것도 걱정스럽다.’라는 어린이라는 대상을 향한 무한한 존중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그날, 몸만 큰 남자 어른이라는 이유만으로 2학년 남자 어린이들을 윽박지른 나를 떠올린다. 나였다면, 빗방울도 튀고 우산이 작으니까 어린이에게 묻지도 않고 훌쩍 안아 올렸을 것이다. 어린이도 나와 같은 한 명의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산다. 무조건 보호해야 하고, 이끌어야 하는 약자로 여겼다.

 

그들에게는 싫은 내색을 할 수 없고, 어린이 그리고 어린이와 함께 있는 엄마에게는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약자 혐오다.” (p.211)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나도 어린이를 포함한 어린아이들을 싫어했다. 카페나 식당에서 보채거나 떼를 쓰면, 일부러 보라고 인상을 써댔다.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내게 다가오면 작은 목소리로저리 가. 오지 마.’라고 읊조리기도 했다. 그때는 노키즈존을 환영했다. 아주 잘하고 있는 처사라 여겼다. 그런데, 내 아이를 낳고 보니 노키즈존이 너무 많았다. 좋은 곳, 사람이 많이 모이는 유명한 곳에는 더했다. 가까운 곳에 좋은 카페와 식당을 두고도 노키즈존이라 들어가지 못하기 일쑤였다. 성을 내며 차별이니, 혐오니 해댔었다. 정말 몸만 큰 어른이다. 또 회개를 한다.

차별과 혐오를 하는 쪽은 잘 모른다. 당하는 쪽은 명확히 안다. 단지 불편한 것으로 여기며 자기 위로를 하고 상황을 합리화한다. 그래야만 사회가 만들어 놓은 강철같은 혐오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수를 위한다는 명분은 위험한 도구다. 언제든, 혐오와 차별을 드높게 쌓아 올릴 수 있는 쉬운 방법이니까.

 

쓰면서 알게 된 한 가지는, 어린이라는 세계는 우리를 환대한다는 사실이다.” (p.7)

 

어린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저자의 발견에 움츠러든다. 비록, 아이를 싫어하기는 했지만 내 아이를 낳고 양육하며 누구보다 아이와 어린이를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내 아이에게만이었다. 생각해보니, 부지불식간에 어린이들로부터 받은 환대가 많았다. 유독 내가 아파트 지하 1층 출입문에 들어가기 직전에 엘리베이터가 출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몸만 큰 어른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출입문 센서 밑에서 춤추듯 문을 열어주던 어린이가 있었다. 그날따라 준법정신이 투철했던지, 뒤차가 빵빵 경적을 울려도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를 기다려주었는데, 얼른 반대편으로 건너가서 배꼽 인사를 건네던 어린이도 있었다. 아크로바틱한 자세로 두 명의 어린이가 위험해 보이는 곡예 수준의 그네를 타고 있는 걸 보고 위험하다고 제지하려 다가서니, 아저씨 재밌어 보이죠? 가르쳐 줄까요? 하던 어린이도 있었다. 그랬다. 그들은 나를 환대하고 있었다.

내 눈엔 그저 내 딸아이와 여자아이들에게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한 남자아이들이었는데, 내가 그때 인상을 쓰지 않고 위압적으로 다가서지 않았다면 그 남자 어린 이들은 내게 어떤 말을 건넸을까?

또 회개를 한다. 끝도 없다.

내가 어린이들은 보호하고 교육하는 것인지, 어린이들이 나를 어른으로 만들기 위해 훈련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너무 쉽게 결론이 나서 일부러 더 생각해본다.

 

어른들은 지역의 모든 어린이가 공연을 볼 수 있게 도와야 한다. 보호자가 관심이 없거나 정보를 모르더라도 어린이에게 기회가 주어지도록 공무원과 통반장이 나서야 한다. 지역 어린이들을 챙기는 것은 선생님만의 몫이 아니다. 지역 사회 전체가 어린이를 찾아 나서고, 어린이를 알아보고, 어린이를 챙기면 좋겠다.” (p.243)

 

물론, 지역 사회와 교육기관이 해야 할 몫은 분명하다. 언제까지 출생률만 가지고 암담한 미래를 제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명의 어린이는 지역 사회 전체가 양육하고 책임지는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할 텐데, 개선의 여지는 요원하다. 당장, 물가와 환율, 경제적 위험성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지고 있다. 정치는 언제나처럼 불안하고 힘겹다. 지난 2년간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코로나라는 혼란도 있었다. 목표가 명확하지 않으니 방향설정도 어렵다. 그저 각자도생할 뿐이다. 그래도 우리의 눈과 귀, 팔다리와 마음은 어린이들을 향해야 한다. 그들도 우리와 함께 현재를 살아가는 한 명이어서다. ‘반 명이 아닌 한 명’.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 가정에서의 아동학대와 아동폭력이 급증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얼마 전 뉴스에서는 그 수치가 현저히 떨어졌다는 뉴스도 봤다. 가장 안전하고 편안해야 할 집에서 가장 잔인한 일이 벌어지는 세상이다. 내 집, 내 아이의 일이 아니라고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불행은 반복된다. 아동과 어린이 구호단체나 KBS에서 방영하는 동행이라는 TV 프로그램에 후원이라도 해야 한다. 최소한 그것이 어린이를 한 명으로 존중할 수 있는 방법이다.

 

나는 어린이의 품위를 지켜 주는 품위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어린이 앞에서만 그러면 연기가 들통나기 쉬우니까 평소에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감사를 자주 표현하고, 사려 깊은 말을 하고, 사회 예절을 지키는 사람” (p.45)

나는 어린이들의 존댓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로 했다.” (p.192)

 

우리의 마음가짐도 바뀌어야 하겠다. 먼저, 나부터. ‘어린이의 품위를 지켜 주는 품위 있는 어른이라는 표현이 멋있다. 단지 어린이보다 나이 많고 몸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존댓말을 듣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로 다짐한다. 저자처럼 모든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하기까지는 아직 어렵지만, 이것도 시도해 보려 한다. 내가 건넨 품위가 나의 품위로 돌아올 테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어린이들의 환대를 겨우 기억해 낸 것처럼, 일부러 의식하지 않고 해보려 한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만나는 어린이들, 딸아이 학원과 학교에서 만나는 어린이들, 일요일에 교회에서 만나는 어린이들에게 하나씩 해보려 한다. 학원과 학교, 교회에서 가장 활발(‘별난을 에둘러)하고 장난기(‘말썽꾸러기를 에둘러) 많고, 자유로운(‘어른들 말을 잘 안 듣는을 에둘러) 아이에게


아저씨, 근데, 아저씨는 품위가 있어요.”

라는 말을 들을 때까지.

일단, 회개부터 더 하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헌책방 기담 수집가 헌책방 기담 수집가
윤성근 지음 / 프시케의숲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더 이상 종이책은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고 했다. 20여 년 전의 이야기다. E-BOOK이 탄생함에 따라 더는 돈을 주고 종이책을 사고 번거롭게 들고 다닐 필요가 없게 된다고 했다. E-BOOK으로 인해 출판시장은 붕괴에 버금가는 대대적인 변화가 있을 거라고 했. 20여 년이 지난 지금, E-BOOK은 자취를 감췄다. 사람들은 여전히 종이책을 사고 읽는다. 내 돈을 주고 산 새 책의 빳빳한 표지를 넘겨 새 종이 냄새를 맡으며 책장을 넘기는 감성은 E-BOOK이 대체할 수 없었다. 눈과 가슴으로 활자를 따라가고 손때와 기름을 묻혀 가며 넘기는 내 책은 여전히 살아남았다.


 9살 딸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책이다. TV를 보여달라고 보채지도, 반 아이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휴대전화를 사달라고 떼쓰지도 않는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나 아빠가 매달 사주는 책을 받아들면 세상 가장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책장을 넘긴다.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줬다. 촉감 놀이책부터 시작해 9살인 지금은 역사책도 곧잘 읽는다. 읽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이가 책에 빠져들면 옆에서 나는 내 책을 읽었다. 자연스레 거실은 물론 방 곳곳에도 책이 널브러져 있다. 앉아서도 보고 누워서도 볼 수 있다.

 특별한 교육철학이나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아빠인 내가 책을 좋아하니까 소개해주고 싶고 같이 책을 읽고 싶었을 뿐이다. 책을 통해 인문 소양을 길러 바른 학습관을 정립해 더 나은 인간이 되거나 하는 식의 의미부여도 전혀 없다. 그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아빠가 그런 것처럼.


 이 책헌책방 기담 수집가의 저자와 등장하는 사람들 모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헌책방에서 찾아야 하는 오래되고 특별한 책을 기억한다는 것은 책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유별난 의미부여가 전제되지 않고는 헌책방을 찾아가고 수수료 명목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이는 없다. 책을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공감대를 형성해 버렸다.

 

“L씨는 표지를 넘겨서 아버지가 자신에게 남긴 메모를 보여주었다.”

世上(세상)은 네 것이다. 누구도 너의 人生(인생)奪取(탈취)할 수 없다. 네 삶을 所有(소유)하고 기꺼이 누려라.” (p.155)

 

 오래전 아버지가 자신에게 남긴 짧은 메모를 담은 책을 발견하는 심정은 어떨까? 이미 그때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많은 아들이 되었지만, 여전히 가슴을 뜨겁게 하고 콧날을 시큰거리게 한다.

책 찾는 수수료를 사연으로 받는 건 알고 계시죠?” (p.28)

 오래된 책을 찾는 수고로움과 자신의 사연을 맞바꾸는 기묘한 헌책방은 사연이 많다. 저자의 말대로한 가지만 밝혀두도록 하자. 우리 주변엔 이외로 기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p.11)고 하는데, 정말 그렇다. 앞서 소개한 부자(父子)간의 사연을 포함해 많은 이야기가 책에 담겨 있다. 마치, 내가 헌책방 사장 앞에 마주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처럼 생생하다

 나의 삶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임에도 공감이 가고 의미부여가 되는 건 나 또한 책을 통해 세상을 알게 되었고 내 사연을 실어 보내고 싶었던 책 몇 권쯤은 있기 때문이다.

 

서점을 운영하면서 추억이 깃들어 있는 책을 찾아주고 사례비 대신 그 책에 얽힌 사연을 받는 특별한 일을 시작한 지도 10여 년이 흘렀다.” (p.107)

10여 년이 담긴 기담 수집은 그것 자체로 책이 된다. 애틋하고 안타까우며 때론 답답하고 원망스럽다.

그때 우리가 만났었나요? , 사업 때문에 평소에 워낙 사람을 많이 만나니까요. 제가 수첩에 적어넣지 않은 걸 보니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니었군요. 아무튼, 미안하지만 책이라면 벌써 다 처분했습니다. 장례 치르고 며칠 있다가 고물상에 다 넘겼어요.” (p.151)


 아버지가 평생을 모아온 책이 어떤 자식에게는 짐이 될 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땀과 눈물, 손때와 냄새가 깊게 밴 책들이 그저 처분할 종이 더미가 되는 것이다. 한순간이며 탓할 수 없다. 이것 또한 기담(奇談)이니까.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최소한 상대가 내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고 있고 내 말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안다. 마치 자신의 사연을 담은 가사에 곡을 부탁하러 만난 의뢰의 시간 같기도 하고 상담사 앞에서 허심탄회하게 나를 드러내놓는 상담의 시간 같기도 하다. 책에 소개된 사연보다 더 많은 사연이 가득할 것이다. 혹 어떤 이는 자신의 사연이 공개되는 것을 꺼렸을 것이고, 너무 기묘해 자체 편집한 사연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인지하지 않더라도우리 주변엔 이외로 기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있다.

 

 가만히 돌이켜 보았다. 나에게도 그런 사연이 없는지. 이 책에 실릴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꼭 찾고 싶은 책이 한 권 있다.

한국 현대사의 석학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이다. 일월서각에서 번역한 책을 대학 때 읽고 받은 충격이 생생하다. 고등학교 때까지 배웠던 한국전쟁과 현대사에 대한 미스터리를 풀어줬기 때문이다. 몇 번을 읽었다. 2권이 세트인데 2권은 미출간 되었다. 일월서각 출판사에 문의도 해보았지만 제대로 된 답변을 듣지 못했었다. 역사비평사에서 영문판과 번역판을 모두 출간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내 힘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1946년 가을 봉기 이후 6.25 발발 직후의 상황이 담긴 2권을 꼭 읽고 싶다. 소문으로는 정식 번역판은 없고 해적판이 몇 권 있다고 하는데, 찾는 게 가능하실까 모르겠다. 내 사연이 기담 축에도 끼지 못해 상담조차 할 수 없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서지 면을 보니 1963년 창원사에서 펴낸 초판, 바로 그 책이다! 책을 집어 드는 순간 몸에 전율이 일었다.” (p.17)

1963년 이름도 낯선 창원사의 초판을 찾아내는 지니의 요정님. 제 책도 한 번 찾아봐 주시겠어요?

들려드릴 사연은 없지만 넉넉한 책 구입은 가능합니다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편한 편의점 (벚꽃 에디션) 불편한 편의점 1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거 시원한 수박인데, 직원들 얼른 맛 좀 보이소.”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 여름날이었다. 작은 체구의 할머니께서 관리사무소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할머니 몸집만 한 큰 수박을 내려놓으셨다. 오전에 방문한 세대에서 만났던 어르신이다. 관리소장의 두 손을 맞잡고 두 발자국 정도 떨어진 나를 가리키며 갑자기 칭찬을 쏟아냈다.


“아이고, 저 젊은 냥반이 그래 친절한 기라. 등 다 갈아주고 씽크대 물 똑똑 떨어지는 거 고치주고, 변기 소리 나는 거도 손봐줬다 아이가. 더분데 땀을 흘리가미 애써줘 가 내 고마바가 이리 안 왔나.”

사무실 직원들이 모두 나를 쳐다봤다. 나는 갑자기 모범사원이 되었다.

사실, 어르신 세대에 방문해 크게 해드린 건 없었다. 형광등 안정기 1개 교체, 씽크수전 헤드 재결합, 변기 수압 조절 정도.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정도다.


한 가지 달랐던 것은 계속 물어봤다는 것이다. “어무이요. 더 불편한 거는 없으세요? 올라온 김에 말씀하이소. 있으면 봐 드리고 갈게요.” 자제분과 동거하지 않는 어르신 댁을 방문하면 늘 하던 일이었다.

고작, 말 한마디. 그것으로 나는 졸지에 모범사원이 되었고 할머니는 집안의 불편함을 해결하셨으며 관리실 직원들은 시원한 수박을 실컷 먹을 수 있었다.


“독고씨 할 수 있어요.”라는 염여사의 말 한마디는 독고씨와 편의점을 드나드는 많은 사람의 삶을 바꾸었다. “곧 날 추워질 텐데 밤에도 따뜻한 편의점에 머물고 돈도 벌고 얼마나 좋아요.” (p.50) 오지랖이라 할 수도 있는 말 한마디였다. 염여사의 오지랖은 고스란히 독고씨에게 전해졌다. “사람들을 믿기보다는 개를 믿는 것을” 택한 선숙은 줄곧 편의점 사장인 염여사의 선택(독고씨를 편의점에 취직시킨 것)에 불만을 품었다. 집에 있는 남자 둘처럼 독고라는 남자도 도무지 믿을만한 구석이 없어 보였지만, 그런 독고 씨 앞에서 울며불며 신세 한탄을 한다. “그거에요.”, “뭐가요?”, “들어주면 풀려요.” (p.108) 생면부지의 의뭉스러운 남자 앞에서 속 시원히 마음을 토해내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집의 남자들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품는다.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는 관계의 실타래는 의도치 않은 전개로 향한다.


“성실하게 살아온 마흔넷 인생.” (p.115) 이었지만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설 곳이 없는 경만에게 유일하게 편안한 곳은 편의점 야외테이블이다. 혼자서 소주 한 잔 기울이는 것으로 허기와 외로움을 달랜다. 무람없는 독고 씨의 친절에 잔뜩 경계하지만 “따뜻했다. 소주도, 그 소주가 담긴 컵도. 사내가 경만을 위해 특별히 마련했다는 온기를 주는 물건” (p.125)으로 경만은 이내 녹는다. 여전히 편의점은 편한 곳이었다. “경만은 왕따였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왕따가 아니었다.” (p.125) 라는 깨달음은 억지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다. 곰처럼 커다란 사내가 건네는 옥수수수염차는 그 비주얼의 비대칭성만큼이나 경만에게 어울리지 않는 액체다.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흘러 들어가는 찌릿함이 위안이었지만, 그것이 거짓 위안이었음을 독고 씨의 오지랖으로 알게 된다.


편의점에 들러봤자 옥수수수염차만 건네는 사내를 피하려다 보니 자연히 술과도 멀어졌다.“젠장, 앓느니 죽지. 경만은 술 따위 안 먹고 곧장 귀가하기로 했다. 경만이 열한 시 전에 술 냄새 없이 퇴근하자 낯설어하던 아내와 딸들도 곧 새해 아빠의 금주 다짐을 지지한다며”(p.129) 예상에 없는 응원을 받기도 한다. 돈 문제로 고민하는 부모를 위해 편의점에서 알뜰히 원플러스원 상품을 챙기는 쌍둥이 딸들의 얘기를 독고씨에게 건네 듣고는 눈물을 훔친다. “경만은 코트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사내에게 목례를 한 뒤 지갑을 열어 카드를 집어넣었다. 지갑 속에서 딸들이 원 플러스 원으로 웃고 있었다.” (p.133) 꽁꽁 얼어붙어 도무지 바뀌지 않을 것 같던 것들이 독고씨가 마련해 준 “온기를 주는 물건”으로 인해 녹아버렸다.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편의점의 독고씨가 건네는 옥수수수염차와 그에 곁들인 처방은 적재적소를 파고들었다. 세상 불편하기만 한 편의점을 매개로 사람들의 삶이 변화된 것이다. 그 중심에는 독고씨가 있었고, 그런 독고씨를 만든 것은 의도치 않은 호의와 사소한 친절이었다.

“나를 고용한, 마지막 겨울잠을 편히 잘 수 있게 해준 사장님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기 때문이다.” (p.234)


일방적인 것은 없다. 편의점 사장인 염여사에게도 독고씨가 필요했다. 물론, 노숙자 행색인 독고씨에게 가게를 맡긴 건 용기다. 용기로의 한걸음이 없었다면 독고씨는 여전히 서울역을 배회했을 것이고 겨울을 넘기지 못했을 수도 있으며 편의점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영웅이자 모범사원으로 둔갑시킨 할머니 댁에 들렀을 때도 그랬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은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잘 켜지 않으시기 때문에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나보다 더 안절부절못하셨다. 낡은 선풍기의 무거운 머리를 내 쪽으로 연신 맞추시고 얼음 두어 개 띄운 보리차를 연거푸 가져다주셨다. 그러니 내가 ‘어르신, 더 불편한 건 없으세요? 올라온 김에 봐 드리고 갈게요.’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일방적인 것은 없다. “사람은 그런 게 아니. 사람은…. 연결돼 있어.”(p.245)라는 독고씨의 말이 맞다. 아무리 빵빵하게 켜 놓은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일을 해도 대하는 태도가 에어컨 바람보다 더 차다면, 나도 그(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고울 수 없다. 나를 ‘좋게’ 만드는 존재는 내가 아니라 상대일 수 있다.


오지랖 아니야? 생각이 들 때, 하면 된다. 말하면 된다. 조금 더 간섭하면 조금 더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

무수한 민원으로 지치지만 한걸음 나아가 본다. 최대한 생기발랄하게,

“네~ 감사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순신, 하나가 되어 죽을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김종대 지음 / 가디언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 지 2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문제가 많아 보인다. 공직을 수행하는 자리를 공적인 시스템이 아닌 사적인 관계 여하에 따라 채용한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젊은이들에게는 박탈감, 나와 같은 세대에게는 허탈감을 안겨 주고 있다. 이런 즈음 진정한 공무원이었던 이순신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었다. 나는 이순신은 참다운 공무원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 이순신, 하나가 되어 죽을힘을 다해 싸웠습니다에 소개하는 이순신은 참다운 공무원이다. 사적 욕심과 욕망보다 생애 내내 공적 책임과 사명에 헌신했다. 공직을 수행하는 공무원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사적 욕심보다 공적 사명을 중시한 공무원

이순신은 늦은 나이에 공무에 들어섰다. 조선 중기 4대 사화는 붕당과 정쟁을 낳았고 그것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공직을 수행하는 관료들은 편을 나눠 다투는 것에 혈안이었고, 백성들을 쥐어짜 제 배를 채우기에 바빴다. 당연히 공적인 시스템은 엉망이었고, “분경(음성적 뇌물 상납)을 하지 않은 일개 군관” (p.58)인 이순신이 종4품 무관 벼슬로 임명되는 것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늦은 나이에 벼슬로 임명된 이순신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벼슬길에 오르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이 음성적 뇌물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평소 이순신과 가까웠던 류성룡은 같은 집안 출신인 율곡을 만나보라 조언하지만, 이순신은 그가 인사 책임자인 전상의 자리에 있는 동안은 옳지 못한 일”(p.62)이라며 거절한다.

이런 이순신은 모습은 초임지였던 함경도 산골 갑산에서나 순국하시기 전 통제사의 자리에서나 한결같았다. 책의 저자는 초인이라는 표현으로 공직을 대하는 이순신을 설명한다.


잠깐이지만 4년 정도 공직생활을 한 바 있는 나로서도 이런 이순신의 모습에 초인이라는 표현을 할 수밖에 없다. 초급장교였던 내 눈에 비친 선배 장교들의 모습은 공직을 수행하는 참다운 공무원의 모습과는 달랐다. 책에서 그려낸 전시상황과는 직접 비교하기 힘들지만, 지금은 휴전 상태다. 종전이 아니므로 언제든지 다시 임진년의 위험이 닥칠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은커녕 좀 더 편한 자리, 좀 더 진급에 수월한 보직에 가기 위해 혈안인 그들의 모습은 제복을 입고 있었지만 참다운 공무원은 아니었다.



공적인 임무에 책임과 최선을 다한 공무원


이순신의 공직생활은 한 번도 평탄하지 않았다. 갈래가 나뉘어 아귀다툼을 벌이던 조정은 조선의 멸망을 온몸으로 막아낸 이순신을 유배 보내고 백의종군시켰다. “중신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430일 새벽, 한양을 떠나 명나라를 향해 도망” (p.120)간 임금을 대신해 다 쓰러져가는 조선의 수군을 일으켜 왜군을 격퇴한 이순신을 알아주는 이가 별로 없었다. 외롭고 고된 자리에서도 이순신은 결코 탓을 하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 선조와 조정 대신들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오직 국토를 지키고 백성을 구해야 한다는 충의의 일념뿐” (p.319)이었다고 한다.

4년 가까이 이어진 명나라와 왜국 간의 강화협상 기간에도 이순신은 쉬지 않고 길목이자 거점인 견내량을 지켰다. 하지만 임금은 원균과 조정의 일부 세력의 음해와 음모만을 받아들였다. 도망가기 바빴던 군주가 이겨낼 힘도 이해할 지식도 없으면서 이순신의 거점방어 전략을 비난했다. 이순신의 공직 전반이 그러했다. 아무리 초인적인 공무원이었지만, 그도 사람이다. 그의 고됨과 외로움, 답답함은 난중일기곳곳에 답답하다, 민망하다.”라는 서술어로 표현된다.

하지만 참다운 공무원인 이순신은 포기하거나 좌절하고 있지 않았다. 임금도 조정이 알아주고 지원해주지 않더라도 본인의 임무에 책임과 최선을 다한다.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으니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우면 할 수 있습니다.” (p.324)라는 장계를 올리고, 다시 흩어진 수군을 정비하여 전장에 나갔다. 임진년 태풍같이 쳐들어온 왜군을 보고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난 장수와 고을의 현감이 수두룩했다. 임금조차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갔으니, 그들을 탓할 수 없다. 이순신은 달랐다. 단 한 번도 도망가거나 숨지 않았다. 머뭇거리는 부하 장수들을 독려하기 위해 대장선에 올라 최전방으로 돌진했다. 전투에서는 항상 선봉에 있었다. 전투가 끝나고 나서도 그의 공직은 멈추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바 명나라와 왜국 간의 지루한 강화협상 중에도 전열을 흐트러지지 않게 늘 준비했고, 왜군이 서해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거점을 지키고 있었다.

군주나 조정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는 자신의 공적인 위치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했다. 최선을 다했다.


나의 짧은 공직생활에서 책임과 최선을 다했는지 돌아본다. 소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사단의 작전처에 근무하는 장교였지만 장기복무를 희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치 볼 것 없고,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수많은 상사와 상황들이 핑계로 남았다. 만약, 그 사람이 없었다면, 그 상황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군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지금의 내 나이면 한 대대를 책임지는 대대장을 하고 있을 텐데, 나는 공적인 임무에 책임과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인가.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 또 다른 핑계와 상황을 찾지는 않을까 싶다.



나라와 국민을 사랑한 공무원


이순신은 나라와 국민을 사랑한 공무원이었다. 바다 위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육지로 도망치는 왜군을 따라가 섬멸하지 않았다. “막다른 궁지에 빠진 적들을 너무 몰아세우다가는 도리어 산골에 피난해 있는 우리 백성들에게 해를 입힐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p.173) 라고 했다. 적의 머리를 하나라도 더 베어 전공을 부풀리려 했던 원균 같은 이와는 차원이 다른 공무원이다. 승첩보고서에 대한 조정의 장계에 부하의 표창이 누락되어 있자 따로 공문을 보내어 기어이 입부 이순신을 표창하도록 상신했다.” (p.187) 라고 한다. 저자도 밝히듯 목숨을 건 일이었다. 조정에 자신을 음해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자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부하를 위해 공문을 보낸다. 이것은 그가 부하, 백성, 가족을 포함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지극했음의 방증이다.

난중일기 곳곳에 홀로 계신 노모를 향한 애끓는 마음이 가득하다. 추위에 지쳐 잠든 초병에게 자신의 옷을 덮어준 일화도 있다. 조정의 음해와 음모, 임금의 무능과 편향된 처세에도 굴하지 않았다. 원망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았다.

임금과 조정은 몰랐지만, 백성들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을 지켜준 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았다. 그래서 백의종군 되어 유배지로 향하는 이순신을 향해 술을 올리고 예를 갖추었다.

이순신을 만난 피난민들이 이순신과 헤어지려 할 때, 그들 가운데에는 자신들의 처자에게 우리 사또가 다시 왔다. 이제는 안 죽을 것이다. 천천히 찾아오너라. 나는 먼저 사또를 따라간다.’는 말을 남기고 분연히 따라나서는 장정이 한둘이 아니었다.” (p.323)고 한다. 자신들을 지켜준 이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의 자세다. 이순신이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삶을 내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몰려든 수많은 피난민이 살아갈 수 있도록 섬을 내어주고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 전사한 부하들의 제사는 절대 지나치지 않고 올렸다.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는 참다운 공무원의 모습이다.

 

이순신은 참다운 공무원이었다. 사적 욕심과 출세의 욕망보다 공적 사명을 중시했고, 순국하기 전까지 숱한 음해와 음모로 공격받았지만 맡은 공적 임무에는 늘 책임과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쓰러져가는 나라와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모든 공무원이 이순신과 같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다. 민원인을 대하는 공무원이 무조건 친절해야 한다는 것도 잘못된 기준이다. 다만, 적어도 나랏일을 한다는 공무원이라면, 특히 고위 공무원이라면 어느 정도의 사명감과 국가와 국민을 향한 책임감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적절한 곳에 인재가 등용되고 필요한 정책이 실행되며 억울한 일을 겪는 국민이 줄어들 것이다.


며칠 전 개봉한 <한산>이라는 영화가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순신을 좋아할 것이다. 그의 생애와 그가 남긴 역사를 칭송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기를 희망한다. 비판하고 비난하며 조롱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쉽고 간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잠시 쓴웃음 짓고 나면 발전은 없다. 지금 나의 위치가 어디인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주변보다 나에게 먼저 초점을 맞춰야 한다. 잠시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생각해 본다. 40대 중반인 내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자격증, 일하고 있는 직장에서의 임무와 역할. 가정에서의 모습. 분명히, 더 힘써야 한다. 최선은 아니기 때문이다. 훗날 딸아이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힘써야 한다.

그것이 참다운 공무원이자 진정한 영웅이었던 이순신 장군의 후손인 우리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도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