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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정아은 지음 / 천년의상상 / 2020년 5월
평점 :
‘집에서 논다’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주부들이 가장 많이 받는 공격이라고 할 수 있죠. 집에서 논다는 표현이 달갑지만은 않습니다. 절대 놀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밥 하기, 빨래 하기, 청소 하기, 애기 돌보기 등 가사 노동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겁니다. 가사를 댓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에 살면서 어찌 집에서 ‘논다’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여자로 태어난 것이 죄처럼 느껴지는 대한민국 사회. 아이를 양육하면서 자신의 경력이 단절되고, 오롯이 가사와 육아에만 전념해야 하는 상황. 노력은 노력대로 하면서도 인정 받지 못하는 것이 화가 나더라구요.
천년의 상상에서 출간된 책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을 읽고 ‘집에서 논다’라는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이해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 책은 ‘주부’라고 불리는 이들의 삶을 사회, 문화적 배경을 살펴보고, 말의 기원을 더듬어 가는 과정들을 열다섯 권의 책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자 정아은도 헤드헌터, 번역가, 소설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살아왔지만 두 아이를 돌보는 엄마가 되어 “주부의 노동을 폄하하는 사회현상의 저변에 무엇이 있는지를 밝히고 싶었다.”고 합니다. 엄마들이 얼마나 힘든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모르는 이야기들이라 생각됩니다.
이 책 속에는 열다 섯권의 책이 등장합니다. 제가 읽어본 책도 있고 그렇지 않은 책도 있더라구요.
-소스타인 베브런 ‘유한계급론’
-레스릴베네츠 ‘여자에게 일이란 무엇인가’
-라문숙 ‘전업주부입니다만’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게오르크 지멜 ‘돈의 철학’
-카트리네 마르살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 낸시 폴브레 ‘보이지 않는 기술’ 등등이 등장을 합니다.
제목만 봐도 어렵고, 무거운 책들처럼 보이지요. 하지만, 책 속에는 책의 줄거리 요약과 저자의 경험들이 담겨 있어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일단, ‘돈’과 연결된 이야기를 빼놓지 않습니다. 집에서 논다는 것은 돈을 벌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돌봄노동도 하나의 노동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선진국에서는 이러한 돌봄노동에 대한 처우를 잘 해주는데 반해 그렇지 않은 나라들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돌봄노동이 가족들을 위한 사랑과 애정, 나눔과 배려에서 나온 것이기에 그것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본 영화 ‘미스비헤이비어’에도 그러한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 ‘제시’가 여성운동을 하러 가는 날 밤늦게까지 친정엄마가 손녀딸을 돌봐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녀가 그렇게 여성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딸의 이야기 속에서 ‘그렇게 엄마의 삶을 포기하고 살았다면 아이 앙육은 누가 하냐?’라고 말하는 엄마가 있습니다. 앙육과 돌봄, 가사는 분명히 누군가의 몫이고 책임이 되는 것이지요. 애덤 스미스씨가 ‘돈’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저녁은 누가 차려주었냐는 질문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성차별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말이 불시에 공격해왔을 때 침착하게 대응하려면 막연한 분노나 억울한 정서를 넘어서는 뭔가를 장착하고 있어야 한다. 이를 테면 주위 사람의 입에서 발화된 한마디 말에 담긴 역사적, 문화적 함의를 꿰뚫어보는 통찰력, 나라는 사람이 딛고 선 빙산을 볼 줄 아는 지력, 성실히 공부해서 몸에 익힌 논리 같은 것.
-145쪽
책을 보면서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냥 “육아가 힘들어, 회사 가서 일하고 싶어, 돈 벌고 싶어, 육아를 인정해줬으면 좋겠어”라는 주부의 삶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바라보는 논리적인 시각을 볼 수 있었거든요. 힘들다고 징징거리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인정받고 권리로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 사회 변화를 위해서도 필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부가 ‘집에서 논다’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함의를 생각해보지 않았던 저에게 이 책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남성들의 언어 속에 감춰진 가사 노동의 사회, 역사, 경제적 비밀들을 알게되어 한편으로는 불편한 속내를 시원하게 긁어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주부는 집에서 노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가사 노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 이 책과 더불어 영화 ‘미스비헤이비어’도 함께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