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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잔인해지는가 - 타인을 대상화하는 인간
존 M. 렉터 지음, 양미래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5월
평점 :
연초부터 정말 의미있는 좋은 책을 읽었다.
별 4개 주는 강추하는 책.
400 페이지의 두께감이 꽤 있는 책이고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얘기들이 많이 나와 한번에 읽기가 다소 힘들었다.
그렇지만 읽을수록 저자의 논지 전개에 빠져들고 번역도 매끄러워 정말 많이 공감하면서 읽었다.
우리는 왜 잔인해지는가?
우리 안의 폭력성, 특히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나 이른바 인종청소라는 끔찍한 범죄, 오랜 역사를 가진 노예제 같은 비인간적 제도 등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런 끔찍한 폭력성과 잔인함을 우리 사회에서 제거할 수 있을까?
과연 없앨 수는 있는 것일까?
오래 전에 읽은 <빈곤의 종말>이라는 책이 생각난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옛 말도 있지만, 미국 교수인 제프리 삭스는 선진국이 지금보다 더 많은 원조를 하면 전 세계의 극빈층은 충분히 사라질 수 있다는 말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요즘처럼 곡물의 생산성이 극도로 높아진 시대라면, 또 고밀도 에너지, 이를테면 원자력 등을 이용한다면 유니세프 광고에 나오는 가엾은 아이들은 절대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생겼다.
한국은 이미 절대 빈곤이 아닌 상대적 빈곤 (그래서 더더욱 서로를 미워하고 있지만) 상태라 어쩌면 영원히 가난은 존재하겠지만, 그 책의 저자가 말하는 "절대 빈곤"은 충분히 효율적인 원조와 정책을 통해 없어질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기분좋은 얘기인가.
이 책의 논지도 크게 보면 그렇다.
인간은 오랜 역사를 통해 플라톤의 동굴에서 벽면만 보다가 조금씩 빛이 들어오는 입구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한다.
과거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고 도덕적으로 진보했다는 것이다.
노예제가 없어진 것만 봐도 확실히 그렇다.
저자는 인간의 폭력성의 기원에 대해 인간을 대상화하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설명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안 보고 사물로 대상화 시키는 것이다.
이 대상화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가장 약한 단계인 일상적 무관심.
사실 주변에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만 대부분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모른 척 지나간다.
두 번째 단계는 유도체화.
사실 이 단어가 직관적으로 와 닿지가 않았다.
간단히 말해 내 맘대로 조정하고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끔찍한 비인간화.
이 단계에서는 이미 인간 취급을 안 하고 심지어는 박멸해야 하는 해충으로 간주해서 이른바 인종청소라는 끔찍한 범죄가 집단적으로 일어난다.
노예제도도 인간이 아닌 사고 파는 물건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은 무엇인가?
당연히 1단계는 타인에 대한 일상적인 관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불우이웃돕기가 이런 경우일 것이다.
2단계는 타인이나 타민족이 나와 우리 집단에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상호의존성을 깨닫는 것이다.
당연히 타문화도 관대하게 수용하고 전쟁이 아닌 교류와 무역 등을 통해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올림픽 같은 지구촌 축제도 이런 경우에 해당될 것 같다.
가장 높은 3단계는 합일의식을 갖는 것이다.
저자는 이 합일의식에 이르는 방법으로 종교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알타미라 동굴에 들소를 그리고 죽은 동료를 매장하는 등의 행위는 예술적이면서도 종교적이다.
이런 종교적 속성이 넓게 보면 자기를 초월해 타인과 하나가 되는 합일의식의 발로라는 것이다.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초월감, 혹은 자아가 사라지고 나와 타인이 경계가 없어지는 충만감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과의 합일, 곧 구원, 혹은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은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플라톤의 동굴에서 빛을 찾아 입구로 나가기 위해 깨달음의 스펙트럼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말로 우리는 좀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혹은 우리 사회는 과거보다 더 인간적이고 높은 수준의 정신적 각성을 가진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어쩐지 희망이 보이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