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 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
기시모토 미오·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김현영·문순실 옮김 / 역사비평사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생각보다 재밌는 책이다

일단 인쇄가 칼라로 돼 있고, 총천연색 사진들도 많이 실렸다

보기가 편하다

책값 18000원이 아깝지 않은, 소장용 가치가 있는 책이다

그런데 북디자인은 별로라 처음에는 선뜻 손이 안 갔다

안의 내용처럼 화사하고 세련되게 꾸몄으면 좀 더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까, 아쉽다

 

두 명의 일본 저자들에 의해 명, 청 시대와 조선 시대가 서술됐는데 사실 아쉬운 부분도 있다

그 동안 조선이나 중국을 각각 서술한 것만 읽어 와서, 두 나라의 관계를 제 3자의 눈을 통해 유기적으로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두 나라의 역사를 한 책에 엮었을 뿐 별다른 상관성은 보이지 않는다

각각의 전문가에 의해 쓰여질 게 아니라, 두 나라의 관계를 연구한 한 사람이 저술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각각의 내용들은 만족스럽다

전문가적이지도 않고, 아주 대중적이지도 않은, 적당한 수준의 이야기를 쉽게 풀어 쓰고 싶었다는 저자들의 바램이 딱 들어 맞는 서술이라 하겠다

(이 수준 맞추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전문가들의 어려운 학술서나 대중 취향의 야사 위주의 책 몇 권을 읽어 보면 금방 알게 된다)

 

중국 쪽 역사는 잘 모르는 부분이기 때문에, 또 저자의 서술 방식 때문에 쉽게 읽히지가 않았다

흥미도 좀 떨어졌다

그렇지만 조선사를 기술한 부분은 잘 아는 분야일 뿐더러, 접근 방식이 이채로워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조선사를 기술한 미야지마 히로시의 스타일이 더 마음에 든다

그는 16세기 양반 사회의 형성을 독특하게 "미암일기"를 통해 서술한다

미암일기는 유희춘이 죽기 11년 전부터 임종 직전까지 쓴 방대한 분량의 일기다

이 일기는 전라도 강진에서 태어난 보잘 것 없는 가문의 유희춘이 과거 합격을 통해 어떻게 명문으로 성장할 수 있는가를 자세히 보여 준다

저자는 16세기만 해도 시골 벽지의 양반도 과거에만 합격하면 얼마든지 명문 거족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사실 양반이라는 것 자체가 유럽이나 일본과는 달리 세습적인 신분은 아니었다고 한다

과거에 합격을 해서 관료가 되야만 유지되는 가변적인 신분이었다는 것이다

 

17세기로 가면서 관직은 한정되어 있고, 점점 서울에 거주하는 소수 가문에서 과거 합격자들이 나오면서 지방 양반들은 소외되어 갔다

그들에게 반대 급부를 주어야 하는데, 향안에 양반이라고 올림으로써 그 지방 내에서 일정한 권리를 행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권리는 군역의 면제이고, 토지 확보나 (주로 간척지 개간) 작은 송사 등에서 양반으로서의 특권을 부여했다

놀라운 건 그 지역을 벗어나면 양반으로 인정받기 힘들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자신이 양반이라고 올라 있는 향안이 있는 지역에서만 양반으로서의 권리와 특권이 인정됐다

중앙 관료로의 진출이 막힌 대신, 지방 유지로서의 삶을 보장받은 셈이다

(이 논리는 국사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중국과 비교했을 때 놀라운 사실은, 조선의 양반들이 과거에만 집중했던 반면 중국은 사대부라 할지라도 상업 등 여러 다른 직업에 종사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게 제일 궁금한 점이다

과연 중국에도 조선의 양반과 같은 확고한 신분이 있었는가?

명, 청 시대에는 과거 합격자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비록 사대부라 할지라도 몇 대에 걸쳐 합격을 못하면 일반 서민과 다름없이 살았다고 한다

조선 역시 후대로 갈수록 양반이 잔반으로 전락하는 경우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과거 합격 유무와 상관없이 토지를 소유하고 국가로부터 특권을 인정받았다

어쩌면 유방이나 주원장 같은 농민 출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도 그 같은 유동적인 신분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조선에서는 농민이 나라를 세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중국과 조선의 조공 관계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조선 외에도 조공을 바치는 나라는 많았는데, 의외로 중국은 이민족의 공격으로부터 끊임없이 시다림을 받았다

원이나 청과 같은 이민족 나라가 들어서는 것처럼, 중국이 강할 때는 조공을 바치고 약할 때는 침략을 받는 식으로 끊임없는 알력 다툼을 벌인다

그런데 조선은 중국의 가치를 완전히 내제화시켜 신하의 나라로써 예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단순히 외교 관계 정도가 아니라, 명나라를 완전히 주인의 나라로 인식했다는 느낌이 든다

하긴 인조 반정이 명나라를 저버리고 오랑캐를 따른다는 명분으로 일어난 것이니, 당시 조선인에게 명이 어떤 존재였는지 알 만 하다

명이 망한 후로는 소중화라 자부하면서 진정한 중화 사상은 조선에 있다고 믿었던 사대부들의 의식 구조를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식민지처럼 느껴지는데, 당시의 눈으로 보면 명을 같은 한자 문화권 내의 "우리"라고 보지 않았나 싶다

민족은 다르지만 같은 문자와 정신을 공유하는 한 문화권으로 인식한 느낌이다

말하자면 이민족의 지배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나라가 쇠퇴하자 공민왕은 즉각 반원 정책을 취한다

이것은 원의 간섭을 이민족의 지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 명이 망할 때 조선은 끝까지 망해 가는 명을 섬기고, 그 때문에 두 차례의 전쟁까지 치룬다

명에 대한 사대는 외교 관계였을 뿐, 조선은 독립국이라고 역사책에서 기술하지만, 뭔가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명과 조선의 관계를 좀 더 근본적인 관점으로 접근해 보면 좋겠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실학에 대한 정의다

보통 실학이라면 주자학에 대항해 실사구시를 표명하는 혁신적인 학문이라고 소개된다

적어도 국사 시간에 배운 바로는 실학이란 수명이 다한 주자학 대신 새로운 정신을 담은 학문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정말 실학이 근대 정신을 담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계속되고 있다

실학 역시 주자학을 기초로 하여 부패한 정치 관료에 대한 비판을 통해 기강을 바로 세우자는 정도일 뿐이지, 사민평등이나 자본주의 같은 근대적인 개념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학을 통해 자본주의의 맹아를 찾는 행위는 타당성이 없어 보인다고 한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보면 이 말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중국에 가서 조선의 자랑을 얘기해 보라 하자 박지원은 조선 여인은 남편이 죽은 후에도 개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들었다

중국 관리가 놀래며 설마 일반 백성들도 다 그런 것은 아니지 않냐고 했더니, 백성 전체에게 강요할 수는 없으나 사대부들은 반드시 지키고, 삼종지도의 예가 아래까지 미쳐 거의 대부분이 자발적으로

지킨다고 답한다

부분적인 예에 불과하나, 실학자의 대표적인 박지원이 여전히 열녀를 조선의 자랑으로 내세우는 걸 보면 아무래도 실학과 근대 정신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인다

 

명나라 후기에 일어난 양명학이나 청 중기에 생긴 고증학 등도 마찬가지다

주자학에 대항하는 새롭고 혁신적인 이념을 담고 있다고 생각되나, 실상은 잘못 운용되고 있는 주자학을 바로 잡자는 운동으로, 진정한 주자학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게 본질적인 내용이라 한다

서구 사회의 근대 정신의 태동과는 본질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동아시아 삼국은 쇄국 정책을 유지했다고 본다

자본주의의 맹아라는 말은 좀 더 신중하게 사용되어야 할 것 같다

또 굳이 자본주의의 맹아를 찾을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서구 사회와 동양 사회는 다른 길을 걸어 왔고 사회를 움직이는 틀도 달랐는데 서구의 발전양식에 맞춰 동양 사회를 평한다는 건 좀 억지스럽다

저자들도 주장하는 바지만, 동아시아의 역사는 좀 더 특수한 틀을 가지고 평가해야 할 것 같다

 

일본인이 서술한 역사서지만, 객관적이고 무척 자세하다

(한가지 에피소드를 들자면, 저자는 광해군 일기가 왜 두 권인지 이유를 모른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 까닭은 한명기가 저술한 "광해군"을 보면 자세히 나와 있다 아무래도 외국인 학자이기 때문에 세부적인 면에서는 약한 것 같다)

어쩌면 외국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 역사가 좀 더 객관적이고 냉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일제 시대의 식민 사학관도 문제지만, 거기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사학관도 진정한 역사 평가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밖에서 바라보는 우리 역사가 많이 번역됐음 좋겠다

안에 삽입된 풍부한 그림과 사진 만으로도 소장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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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1 - 개정판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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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공감이 가지 않는 소설이다

한 번은 읽고나서 비판을 하던가 해야 하는데, 중간에 덮고 말았다

나랑은 안 맞는 책이다,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양귀자의 "모순"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양귀자라면 이상 문학상도 수상하고, 나름대로 인정받은 (즉 실력있는)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모순"이라는 책이 전형적인 통속 소설에 불과해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훌륭한 작가라고 해서 그가 쓴 모든 책들이 다 훌륭할 수는 없겠지

그렇지만 최소한 어느 정도 수준은 되야 하는 거 아닐까?

이문열이 쓴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라는 소설이 있다

그는 후기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하지만, 유난히 더 아픈 손가락이 있기 마련이라며, 이 책은 자기 기준에 못미친다는 걸 솔직히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문열이라는 작가가 주는 무게감에는 충분히 합당한 괜찮은 소설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런데 이 책,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은 아무래도 그 일정 기준에 모자란 느낌이다

작가의 다른 책은 안 읽어 봐서 모르겠는데, 어쨌든 이 책은 문장력이 떨어진다

19쇄까지 펴냈다고 하는데, 실망스럽다

 

첫부분은 마음에 와 닿았다

모든 인간 관계가 사실은 권력에 기초한다는 얘기로 시작한다

나는 작가가 미셸 푸코의 글을 읽고 쓴 거라고 확신한다

주인공 인혜는 중고교 시절부터 세진을 무척 좋아한다

그녀가 가지고 있지 않은 부러운 특성들을 세진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진의 마음에 들고 싶어 공부를 열심히 할 정도였다

그런데 세진은 인혜에게 별 관심이 없다

둘이 자취를 하며 함께 살 만큼 친밀한 관계임에도 세진은 인혜에게 어떤 의존성도 갖지 않는다

나중에야 인혜는 세진이 자신에게 부러워 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사실 세진은 인혜를 대단히 부러워 했다 결손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행복한 인혜의 가정을 부러워 하고, 인혜에게 의존하게 될까 봐 먼저 인혜에 대한 감정을 거둔다 세진은 말하자면, 컴플렉스를 가진 여자다)

 

소녀 시절에는 특히 동성 친구에게 빠지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랬다

내가 갖지 못한, 부러워 할만한 특성들을 가진 주위의 친구에게 빠져든다

단순히 돈이나 지위 같은 것과는 다르다

인격적 특성에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흔히 남성적 매력을 풍기는 선머슴 같은 여자애는 뭇 여학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곤 한다

 

나이가 들면서 이성에게 마음을 뺏기고 나면, 여고 시절 반했던 동성 친구의 매력은 사그러 들게 마련이다

이제 좀 더 성숙한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다

인혜는 남자를 만나면서 세진에 대해 느끼던 부러움이나, 기타 권력 관계를 형성하던 것들이 사실은 별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세진을 잊는다

 

여기까지가 내가 마음에 든 내용이다

모든 인간 관계는 권력에 기초한다는 미셸 푸코의 말에 나는 상당히 동의하는 편인데, 소설에서는 어린 시절 성장기의 삽화들을 통해 잘 그려냈다

그런데 이 다음부터는 도무지 공감이 안 간다

남편의 성불능 때문에 이혼한 인혜는 너무나 손쉽게 남자들을 만난다

인혜라는 여자의 캐릭터가 매력적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소설이기 때문인지, 이혼녀가 사랑을 쟁취하는 과정이 너무나 쉽고 간단하다

남자를 유혹한다

남자가 넘어 온다

같이 식사를 하고 모텔로 들어간다

이게 그녀의 사랑 공식이다

이혼녀가 남자 유혹하는 게 정말 이렇게 쉬울까?

 

세진이 어린 시절 상처 때문에 불안증을 앓고 있는 부분도 공감이 가지 않는다

책 광고에서는 정신 분석을 통한 30대 여성의 자아 발견이라는 식으로 이 부분을 강조하던데, 나는 도무지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지 않는다

사변적이고 말 그대로 소설적일 뿐이다

정신 병원에서 상담도 받고 법사에게 내림굿도 받는데 그 과정들이 너무나 통속적이고 뻔하게 읽힌다

법사가 세진의 몸에서 귀신을 쫒아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정말 이런 의식을 통해 고통받던 사람이 편해진다면 그것의 진짜 정체는 무엇일까, 생각해 봤다

칼 세이건의 논리를 믿는 나로서는, 점성술 등을 포함해 이런 의식의 진실됨을 믿을 수가 없는데 그렇다면 이건 플라시보 효과일까?

무의식을 괴롭히던 존재를 쫒아 버렸다고 환자를 안심시킴으로써 불안증을 가라앉히는 것일까?

 

결국 책을 덮고 말았다

줄거리도 별로 궁금하지 않다

특별한 결말이 없을 게 뻔하니까

통속 소설과 문학 소설을 구분짓는 기준은 문장력에 있다고 생각한다

소재나 주제들은 사실 다 통속적이다

책의 수준을 결정짓는 건 작가의 역량을 드러내는 문장력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은 그 점에서 실망스럽다

양귀자의 "모순"을 읽었을 때와 똑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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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 2012-01-02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이 여자의 사변적인 소설이 그렇게 좋기만 하던데..... 마린님은 별 두개 밖에 안되나 보네요. 책을 선택하는 기준도 사랑을 선택하는 기준 만큼이나 제 각각이군요.

그 밖에 앞에있는 책들에 대한 별 점은 대부분 찬성!
 
인간의 얼굴, 그림으로 읽기 명화 속 이야기 2
홍진경 지음 / 예담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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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즘 그림, 특히 르네상스 시대 그림에 대한 책을 많이 읽다 보니 내용이 자주 겹친다

새롭지가 않고 다 아는 얘기인 경우가 많아 아무래도 책의 흥미가 떨어지는 편이다

그래서 좀 쉬었다 읽으려고 했는데 책 표지의 아름다운 여인이 또 나를 유혹했다

 

흔히 알려진 그림은 아니었는데, 관객을 바라보는 자태가 무척 매혹적이고 우아하다

알고 보니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이었다

체칠리아 갈레라니라는 이탈리아 여인인데, 당시 밀라노 군주였던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연인이었다고 한다

저자의 걱정처럼 모나리자가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레오나르도의 다른 그림들은 덜 알려진 편이다

그녀의 우아하고 새침한 자태를 보면, 모나 리자와는 또다른 기품있는 아름다움이 전해져 온다

놀랍게도 이 여인의 나이는 겨우 16세라고 한다

당시 유럽의 평균 수명은 40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16세면 성인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루도비코가 그녀를 유혹한 건 겨우 14세 때!!)

 

또 다른 매혹적인 여인은 다비드가 그린 쥘리에트 레카미에 부인이 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살았던 여자인데 워낙 예쁘고 부유해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여자는 몹시도 경박해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해 결국 다비드는 화가 난 나머지 그녀의 그림을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쥘리에트에게 보냈다는 편지를 보면 "화가도 숙녀만큼이나 참을성이 없답니다, 부인" 이라는 문구가 있다

그녀의 초상은 마치 그리스 시대 여신처럼 하늘하늘한 긴 원피스를 입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에로틱한 느낌을 준다

다비드라면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으로 유명한데, 아름다운 여자의 초상도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 외에도 렘브란트나 루벤스의 아내들이 등장한다

수공업자에 불과하던 화가들의 지위가 상승하면서 유명세를 얻은 두 화가들은 많은 돈과 높은 지위를 얻었다

그들은 아내와 자신의 초상을 그리면서 귀족처럼 설정했다

루벤스라면 카메라 루시다를 이용하지 않은 화가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초상은 숨이 막힐 정도로 사실적이고 아름답다

 

또 다른 매력적인 그림으로는 클림트가 그림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를 들 수 있겠다

흔히 "유딧과 홀로페르네스" 모델로 알려졌는데, 그녀의 초상화를 보면 대단히 관능적이다

클림트의 그림은 황금빛에 어울어져 신비롭고 뇌쇄적인 느낌이 든다

아델레는 오스트리아 은행가의 아내인데 남편과는 17세 차이가 났다고 한다

 

홀바인이 그린 에라스무스 초상도 인상적이었다

에라스무스라면 세계사 시간에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를 이끈 사람이라고 외웠던 기억이 난다

그 때만 해도 그저 역사책 속의 유명한 인물에 불과했는데, 막상 그의 초상화를 보니 살아 있는 인물로 다가 온다

대단히 기품있고 교양있으며 점잖은 학자의 모습이다

에라스무스는 카톨릭 교단의 부패를 비판하고 성경에 기초한 신학적 해석을 강조한 사제로써 당대에 높은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종교 개혁을 한 루터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는데, 요즘 말로 하면 루터는 기독교 근본주의자 수준이었다

우상 파괴를 주장하며 성상과 그림들을 불태우는 루터가 점잖은 학자였던 에라스무스 눈에는 당연히 위험하게 비쳤을 것이다

어떤 대의를 위해서든 폭력은 폭력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젊은 루터의 초상은 고집스럽고 편협하게 비친다

화가의 의도였는지 모르겠으나, 에라스무스의 여유로움과 비교된다

 

홀바인이 그린 또 다른 초상으로 토마스 모어가 있다

에라스무스의 소개로 영국으로 간 홀바인은 유명세를 얻어 당시 법관이었던 토머스 모어를 그렸다

역사책에만 보던 인물을 실제 그림으로 접하니까 느낌이 사뭇 다르다

토머스 모어 역시 "유토피아"를 지은 인물로만 암기했는데, 그의 초상을 보니 새로운 인물로 다가온다

코가 높고 턱이 뾰족하며 눈이 부리부리 한 게 (너무 전형적인 설명이다!!) 윤곽선이 뚜렷하다

헨리 8세의 이혼을 반대하다 처형당했다는 게 실감날 정도로 무척 강직했을 인상이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그림책이다

좀 더 깊이 있는 해설을 원한다면 다른 책을 권한다

미술사를 전공한 사람인데도 내용이 다소 가벼운 느낌이 든다

일부러 쉽게 쓴 걸까?

뒷편에는 로마 시대 황제들의 초상과 역사적 배경이 나와 로마 역사 이해에 도움을 준다

그렇지만 조각들은 그다지 감동적이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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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중국
이익희 외 지음 / 일빛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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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슬람 문명"을 읽을 때도 느낀 거지만, 인류 역사에 획을 그은 대문명들을 한 권의 책으로 다 보여 주겠다는 생각 자체가 욕심인지도 모른다

저자들 역시 거대한 중국 문명과 사회를 한 권에 몰아 넣느라 고생 좀 했을 것 같다

도대체 어떤 걸 넣고, 어떤 걸 빼야 할지, 다 중요한데 아마 감잡기 힘들었을 것이다

앞으로는 한 분야만 다룬 책을 읽어야겠다

너무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다 보니 수박 겉핥기 식의 서술을 피하기 힘든 것 같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중국에 대한 개념 잡기에는 좋은 책이다

 

이 책의 장점을 들자면 중국 공산당 성립 배경과 현대 중국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서술이다

그 동안 중국 하면, 막연히 역사책에서 배운 내용이 다였는데, 현대 중국이 어떤 발전 과정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는지 현대의 역사를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장쩌민에 이르는 중국 공산당의 정권 교체와 개혁 개방에 대한 자세한 서술이 마음에 든다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의 기초 이념을 세운 사람으로, 문화혁명의 과오가 있긴 하지만 전 중국 인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인물이라고 한다

그래서 개혁 개방 이후 소득 격차가 커지면서 도태된 중국 인민들은 가난했지만 평등했던 마오쩌둥 시절을 그리워 하고 텐안문에 걸린 마오의 사진 아래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흔히 관찰된다고 한다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 하는 이유가 그 때의 독재나 권위주의로 돌아가고 싶은 게 아니라, 현재의 상황이 워낙 나쁘기 때문에 도피처로써 그리워 하는 것처럼, 마오쩌둥 숭배도 마찬가지라고 진단한다

 

덩샤오핑은 시장 경제를 섞은 중국식 사회주의를 지향한다

현재 중국의 경제는 더 이상 사회주의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한다

사회주의의 핵심은 공유제와 국영 기업 등인데, 이미 중국의 상당수가 사유 재산을 소유하고 있고, 많은 공기업들이 민간화 됐다고 한다

계획 경제를 한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바뀌지 않듯, 시장이 생성된다고 해서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로 변하지 않는다는 게 덩샤오핑의 경제 철학이다

중국의 개방은 예상과는 다르게 훨씬 이전부터 진행됐다

마오쩌둥이 죽고 덩샤오핑이 집권한 78년부터 중국은 개혁, 개방 노선을 걸었다고 한다

다만 정치는 여전히 공산당의 1당 독재와 사상의 자유를 탄압하기 때문에 89년에 텐안문 사태 등을 맞기도 했다

 

중국의 소수 민족 지원 정책은 다소 독특하다

대부분 인구의 1% 민만의 소수 민족들은 다수 민족에게 흡수, 통합되도록 하는데 중국은 다민족 국가를 표방하는 만큼, 그들의 권리와 문화를 지키도록 장려한다

현재 중국의 소수 민족은 다수인 한족에 비해 약 1% 정도라고 한다

하긴 워낙 중국 인구가 많으니가 1%라고 해도 1억이 넘는다

구 소비에트 연방과는 달리 사회주의가 무너지더라도 소수 민족이 독립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한족이 워낙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티벳족을 제외하고는 독립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중국의 가능성에 대해 많은 점수를 주고 있다

2020년이면 미국을 따라 잡을 것이라는 성급한 판단도 나오고 있다

중국을 주목하는 이유는 넓은 땅덩어리와 풍부한 인적 자원 때문일 것이다

이미 중국은 개방 정책 후 세계 경제 7위의 대국이 되었다

과연 시간이 지나면 중국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것인가?

이렇게 가능성이 풍부한 중국이 현대 이후 왜 후진국으로 남아 있었던 것일까?

사회주의 체제 때문이었을까?

중국이 자본주의를 택했다면 오늘날 중국의 위상은 전혀 달랐을까?

왜 중국이 지금까지 잠든 거인으로 있었는가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을 듣고 싶다

 

중국이 갈수록 동북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키울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미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일본과는 경쟁 관계가 될 것이고, 그 사이에 낀 우리 나라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현재 중국은 한류 열풍이 거세지만, 경제 개발을 먼저 이룩한 나라에 대한 동경 때문이지, 결코 한국 자체를 지도적인 국가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중국이 경제 개발을 진행하면 다시 중화 사상에 입각해 한국은 언제든지 한 수 아래의 피지배 국가로 생각할 수 있는 일이라고 저자들은 경고한다

중국이 현재의 기대치만큼 성장을 하게 되면 동북 아시아의 새로운 맹주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고 한다

고구려처럼 독립적인 위치를 지킬 것인지, 신라나 조선처럼 중국적 가치를 내제화 시킬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중국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중국 문장가들 중 제일 감동적인 사람은 소식이었다

소식이라면 아버지와 동생까지 모두 당송 8대 문장가에 든 사람인데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여 평생 귀양지를 떠돌다 죽은 불행한 천재라고 한다

그의 시 중 다음과 같은 부분이 소개되었는데 무척 인상깊다

 

"천지간에 사물은 스스로 주인인 바, 내가 갖고 싶어도 털끝 하나 소유할 수 없지요

하지만 강가를 스치는 맑은 바람, 산 너머 휘영청 밝은 달, 내가 귀로 들어 소리가 되며, 내가 눈으로 보아 형체를 이룹니다

그러니 누구든 갖고 싶은면 막을 것 없고, 아무리 써도 고갈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물주의 보물이라서, 저와 당신이 함께 즐기는 이치인 것입니다"

 

천지간의 사물은 내가 인지함으로써 비로서 형체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달려 있다는 그의 멋진 인생관이 돋보이는 시다

한시를 감상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 깊은 뜻과 참맛을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북조 시대의 목란 이야기도 재밌다

디즈니 만화 "뮬란"으로 각색된 이야기인데, 정말 통쾌하다

아버지가 전쟁터에 징집됐는데, 대신 나갈 아들이 없어 목란은 남장을 하고 군대에 간다

10년의 전쟁 동안 목란은 큰 공을 세우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본래의 옷으로 갈아 입고 베틀 위에 앉자 함께 복무하던 군인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깜짝 놀랬다는 이야기다

여자가 직접 전쟁터에 나가 10년씩이나 용감하게 싸웠다는 이야기는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북조 시대가 아니면 나오기 힘든 얘기라고 한다

 

반면 한나라 시대에는 "목란의 노래"에 대비되는 아주 전형적인 이야기가 전해 온다

하급 관리 초중경은 유란지를 아내로 맞아 행복하게 사는데 시어머니가 질투를 해 아내를 친정으로 쫒아내고 만다

효를 중요시 하던 초중경은 어머니의 말씀을 거역하지 못하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아내를 보낸다

그러나 유란지의 친정에서는 그녀를 태수에게 시집보내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초중경이 찾아 와 신분이 높아지니 자기를 잊었느냐고 한탄한다

유란지는 오직 나에게는 당신 뿐이라면서 신혼 첫날 밤 자결을 한다

초중경 역시 따라서 목을 멘다

두 가문에 의해 청춘 남녀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는 전형적인 서사시 "공작동남비"의 내용이다

"목란의 노래"에 나온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목란과 아주 대비되는 이야기다

 

거대한 중국 문명과 사회를 한 권으로 정의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시도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가볍게 맛을 봤으니, 중국이란 어떤 나라인가, 또는 어떤 문명인가에 대해 보다 깊은 공부를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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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이브에게는 배꼽이 있었을까
마틴 가드너 지음, 강윤재 옮김 / 바다출판사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상당히 어렵게 읽은 책이다

사이비 과학이 왜 틀린가를 과학적으로 논증한 책이기 때문에 술술 읽히지가 않았다

양자 역학에 관한 부분은 특히 어려웠다

양자 역학에 대한 개념이 부족해서 사이비 이론도 이해가 안 가는데, 왜 틀렸는가를 과학적으로 논증한 내용은 더더욱 어려웠다

그렇지만 나머지 부분은 대체적으로 수긍이 가고, UFO에 관한 내용은 황당무계해서 재밌기까지 했다

적어도 칼 세이건의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보다는 쉽다

(오래 전에 절판된 책이라 구하느라 꽤 애를 먹었는데, 막상 헌책방까지 뒤져 손에 넣고 보니 내용이 너무 어려워 읽다 만 기억이 있는 사연있는 책이다)

 

마틴 가드너라는 작가 자체가 칼 세이건처럼 과학자는 아닌 듯 싶다

그의 약력은 다만 과학 에세이스트 혹은 퍼즐 전문가 정도로만 나왔다

사실 그 점 때문에 또 하나의 말장난에 휩싸이는 건 아닌지 걱정을 했는데, 책의 수준은 그런 걱정이 기우임을 보여 준다

다만 본인의 논증 보다는 다른 과학자들의 반론을 많이 인용했다

확실히 미국 사람들은 출처 밝히기에 열심이다

 

이 책에서 제일 인상깊었던 부분은 패러다임의 틀이었다

그는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에 관한 글이 사이비 과학에 종종 잘못 인용된다고 지적하는데, 그 글은 수능 문제집에서 본 기억이 난다

언어 영역 지문에 인용됐는데, 그 때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처음 알았을 뿐더러,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들이 (이를테면 뉴턴의 만유 인력 법칙 같은) 패러다임이 변하면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패러다임이란 사물을 보는 틀이자 관점이기 때문에 패러다임이 변하면 당연히 진리도 바뀐다고 했다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는 것도 대표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다

지난 세대에는 진리라고 믿었던 창조론이나 천동설 같은 이론도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폐기되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들도 다음 세대가 되면 전혀 엉터리가 될 수 있다는 게 그 글의 요지였다

 

그러나 저자는 바로 이 포스트모더니즘주의가 과학과 사이비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하는데 이용된다고 한탄한다

과학적 진실들은 1과 0 사이에 나열되어 있으나 우리가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들은 (이를테면 지동설과 진화론 등) 0.999999999의 가능성을 가진, 말하자면 1에 거의 근접한 것들이기 때문에 사실로 받아 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 평론가들이 흔히 이용하는 과학의 오류나 거짓, 숨겨진 이야기 따위는 사실과 분리되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성경이다

저자는 왜 성경을 과학으로 증명해 내려는가 의아해 한다

신의 말씀을 인간의 과학으로 풀어내려는 시도 자체가 사실은 신성 모독이 아니냐는 것이다

즉, 성경은 신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일 뿐이지, 자연 법칙이나 과학적 사실들을 논증한 책이 아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은 경전이 마치 과학책이라도 되는 양, 그 안에서 과학적 사실들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여기서 바로 이 책의 제목, "아담과 이브는 배꼽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이 나온다

아담과 이브가 신에 의해 지어진 최초의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들은 부모의 탯줄을 의미하는 배꼽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아담과 이브를 그린 모든 그림들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처럼) 배꼽을 당연시 한다

창조론도 마찬가지다

이미 로마 카톨릭은 진화론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잃어 버린 고리들을 예로 들어 진화론이 허구라고 공격한다

그렇다면 화석의 존재는 무엇이고, 수많은 지질학적 증거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들은 진화론을 부정하는 대신, 그것을 대체할만한 어떤 논리적 증거나 과학적인 이론도 내 놓지 못한다

다만 모든 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식이다

 

성경에 대한 사이비 과학의 정점은 종말론일 것이다

부끄럽게도 1992년 다미 선교회 사건이 그 예로 기록되어 있다

나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때 중학생이었는데 92년 10월에 종말이 올 거라는 광고를 보고 (그들은 뉴욕 타임즈에까지 광고를 실었다고 한다) 혹시 그 예언이 맞으면 어쩌나, 두려워 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했지만, 정작 이장림 목사는 신자들에게 거둔 돈을 다음해가 만기인 채권에 투자했다고 한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사건들이 지금도 미국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사실 신앙을 공고히 하는 지파일수록 다니엘서와 요한 계시록을 분석하여 종말론을 내세운다

다미 선교회처럼 특정 날짜를 명시해 신자들의 재산을 갈취하지는 않을지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세상의 마지막이고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며 666이라는 짐승의 숫자가 새겨진 바코드를 이마에 받고 여기서 살아 남은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한 후 천년 왕국에서 살게 될 거라는 일련의 이야기들은 너무나 익숙하다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이 최후의 심판이 우리 세대에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최후의 심판은 기독교의 기본 교리 중 하나다

그러나 성경에 흩어진 지엽적인 사실들을 교묘하게 짜 맞추어 바로 지금이 그 시기라고 주장하는 자칭 예언자들은 사이비라고 규정할 수 밖에 없다

 

UFO에 관한 믿음도 종말론 만큼이나 널리 퍼져 있다

제일 웃긴 건 정부가 이 사실을 알면서도 발표를 안 한다는 것이다

음모론이 판을 치는 미국에서 UFO에 관한 은폐설도 한 몫을 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의 존 맥이라는 정신과 교수는 외계인에게 납치된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다는 책을 썼다

에모리 대학의 브라운 교수는 원격 투시를 통해 외계인 세력이 멕시코에 거주한다는 책을 썼다

도대체 이런 정신병자들이 대학의 교수로 멀쩡하게 강의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다만 대학 당국은 그들이 종신 교수이고, 학문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입장을 취하긴 하지만 그들이 대단한 골치거리임은 분명하다고 한다

브라운의 외계인 이주설을 들으면 영락없는 정신 분열증 환자다

과대 망상의 표본이다

대기 오염으로 화성이 황폐화 되자 다른 은하인의 도움을 받아 지구로 건너 온 화성인은 현재 멕시코 산 속에서 거주하고 있다는 식이다

 

(정신과 인턴을 할 때 환자를 면담했는데, 그녀는 본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교시를 받고 있다고 했다 너무나 멀쩡하게 생기고 너무나 분명하게 얘기를 해서 처음에는 약간 어리둥절 했다 식사는 잘 하냐고 의례적인 질문을 했더니, 화를 내면서 나의 하나님이 밥을 굶으라고 할 만큼 나쁜 분이 아니라고 했다 안 죽을 만큼 잘 먹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얘기나 브라운의 얘기는 질적으로 다를 게 없는데 왜 한 사람은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있고, 한 사람은 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그 얘기책으로 돈방석에 앉았는지 정말 의아하다)

 

설마 브라운 같은 사람이 책을 팔기 위해, 혹은 이름을 얻기 위해 일부러 황당무계한 얘기를 지어낸 건 아닐 것이다

그런 얘기가 받아들여질 만큼 UFO에 관한 사이비 과학이 우리 시대에 널리 퍼진 것이다

식인 풍습이 일반적이라는 믿음도 저자는 사이비 과학으로 보고 있다

특수한 경우를 (이를테면 적의 시신을 먹음으로써 공포감을 조성하거나 전쟁 같은 극한 상황) 제외하고 일상적으로 사람을 잡아 먹는 풍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런 믿음이 퍼진 것은 선교사들이 전해 들은 이야기를 확인없이 책에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인류학자들이 조사해 본 결과 식인 풍습이 일상적인 곳은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반론이 쿠루병인데 광우병이 인간에게 발생한 것으로 파푸아 뉴기니의 원주민들이 죽은 이의 뇌를 먹는 풍습 때문에 걸린다고 알려졌다

이것을 밝힌 영국의 의사는 노벨상을 탔다

당연히 그는 식인 풍습을 지지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이 많다고 한다

저자는 아직 결론이 난 문제가 아니라고 한 발짝 비켜 선다

 

내 입장에서 제일 흥미로웠던 부분은 역시 대체의학이다

소변을 마시는 게 좋다거나 발이 몸의 모든 곳을 관장한다는 식의 믿음은 서양에도 널리 퍼진 모양이다

사내아이의 소변을 받아 마시면 정력에 좋다거나, (채만식의 태평천하에서 읽었다) 더러운 물을 마시느니 차라리 자신의 소변을 마시는 게 낫다는 식의 (홍신자의 수필집에 보면 인도를 여행하는데 물이 너무 더러워 깨끗한 자신의 소변을 마셨다고 한다) 이야기는 웃고 넘어 가더라도, (과학자들은 바다 위에서 표류할 때 조차도 소변을 마시는 건 득보다는 해가 많다고 일축한다) 반사학에 대해서는 쉽게 넘어가기가 어렵다

반사학이라고 이름 붙인 사이비 과학은 우리 식으로 보면 수지침이나 발마사지, 경락, 경혈 이런 식으로 풀이될 수 있을 듯 싶다

사실 나 역시 한의학에 대해 별 신뢰를 못하는데 요즘 신경과에서 IMS나 TPI, 테이핑 요법 등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걸 보면 침에 대한 생각도 바뀌어야 하지 않나 싶었다

흔히 발바닥은 몸의 모든 기와 혈이 모여 있어 장이 안 좋으면 어느 부위를 누르라는 식의 믿음이 꽤 통용되어 왔다

저자는 발의 특정 부위를 누르면 특정 장기에 영향을 끼쳐 치료 효과가 있다는 식의 믿음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의학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저자의 이 주장은 받아 들이기가 좀 애매하다

그는 대부분의 대체의학들을 아무 실험도 거치지 않은 채, 그저 그럴 것이다는 식의 직관에 의존해 잘못된 믿음을 설파한다고 비판하는데, 적어도 과학적인 절차를 통한 검증이 필요함은 분명한 듯 싶다

 

점성술이나 UFO, 대체 의학 등은 사이비는커녕 다양한 과학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패러다임이 변하면 어떤 것들은 진리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직관에 의해 이럴 것이다, 하는 식의 주장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어떤 주장이나 논리든지 과학적 방식에 따라 철저하게 검증한 후에서야 비로소 진리인지 아닌지 판명이 될 것이다

막연히 과학은 오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게 전부는 아니다는 식의 문학적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정신 의학계가 프로이드를 상상력 풍부한 과학 문예가 정도로 밖에 평가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과학적 실험 보다는 지나치게 직관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건 좀 놀라운 일이다 나는 정신과 시간에 프로이드를 제일 첫장에서 배웠다 그의 이론이 이미 낡은 이론으로 변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꿈이 무의식의 욕망을 표출한다는 프로이드의 해석은, 뇌파 분석과 여러 실험들을 통해 별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예컨데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려면 꿈을 해석할 게 아니라, 약물 치료를 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그의 이론들은 여러 실험을 통해 하나씩 격파되고 있다

20세기 최고의 지식 혁명이라고 평가받는 프로이드조차 냉정한 심판을 받는데, 사이비 과학들이 아무 근거나 논증 과정도 없이 막연히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을 거다는 식으로 검증되지 않은 지식을 팔아 먹는 건 잘못된 일이다

더불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과학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기울여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에 대해 정확히 알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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