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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1.2권 합본) - 우리 소설로의 초대 4 (양장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왜 이 책이 노무현 대통령과 엮어져서 안 받아도 될 오해를 받는지 모르겠다
리뷰를 읽어 보면 꼭 "노무현"이라는 세 글자가 따라 다닌다
대통령의 선전과는 상관없이 2001년 동인 문학상 수상작이기 때문에 책 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에게는 큰 감동이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 해도 나랑 스타일이 안 맞는 책들이 있다
줄거리보다는 작가가 서술하는 태도에서 반감, 혹은 호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 책은 나와 궁합이 좀 안 맞는다
내가 좋아하는 문체는 은희경이나 이만교 같은, 좀 삐딱한 시선의 시니컬한 문장인데 (배수아 스타일은 절대 아니다 겉멋 부리는 시니컬함 같아 안 좋아한다) 이 작가의 소설은 내 취향이 아니다
그렇지만 죽음을 옆에 두고 싸우는 무장의 고뇌와 두려움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이순신이라고 하면 무과 시험 당시 낙마한 후 버드나무로 다리를 싸매고 달렸다는 에피소드나, 그 보다 더 유명한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마지막 유언으로 대표되는 조선 최고의 영웅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적인 숭배 때문에 갑자기 최고의 성웅으로 등장했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든 임진왜란 당시 혁혁한 공훈을 세우고 장렬하게 전사한 훌륭한 위인임이 분명하다
위대한 인물들이 흔히 그렇듯, 이순신 역시 인간적인 면모 보다는 범인들과는 다른 출중한 재능과 성인 같은 삶의 궤적으로 점철되기 일쑤라 그가 걸어 온 진짜 삶의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시도는 참으로 신선하다 할 수 있겠다
비록 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으나, 과장없는 위인전이라 해도 될 것이다
위인전 속의 인물들을 평범한 인간으로 끌어내려 숨은 고뇌와 인간적이 위악성들을 그려내는 시도가 많아졌음 좋겠다
(개인적으로 광해군의 인간적인 고뇌를 그린 책이 나오길 바란다 10년 동안 왕의 자리에 있은 후 20여년을 죄인으로 유배지에서 질긴 목숨을 이어 간 그의 속내를 유려한 필체로 그려 줄 작가가 있다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종종 군인들을 생각했다
명령에 따라 무조건 진격해야 하는 사병들 말고, 그들을 지휘해야 하는 장교들의 고뇌를 생각했다
전쟁이 발발하면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다
무기를 들고 적진으로 돌진하는 군인들은 늘 죽음을 옆에 두고 살 것이다
그 공포와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더욱 잔인해지는 건지도 모른다
특히 자기 휘하의 군사들과 주변 백성들의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지휘관의 고뇌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견딜 수 없는 무거움으로 마음을 짓누를 것이다
"칼의 노래"에는 그러한 인간 이순신의 고뇌와 두려움이 잘 녹아 있다
전쟁 앞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형편없고 하찮은 존재인지!!
한 끼 먹을 식량을 위해 한나절 내내 고민해야 하고, 그것이 해결되지 못하면 허망한 죽음을 맞게 된다
전쟁 중이라 그런지, 아니면 원래 중세 사회가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걸핏하면 죽음으로써 잘못의 댓가를 치룬다
군량미 빼돌리면 사형, 보고서 늦게 보내도 사형, 소집에 응하지 않아도 사형
책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바로 "목을 베었다"이다
언젠가 한글로 번역한 난중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서도 여러 번 접한 문장이다
그래서 성웅 이순신도 부하들을 많이 죽였구나, 좀 충격을 먹기도 했었다
아마 김훈의 책에 나온 예화들은 대부분 난중일기에서 인용한 것이리라
"칼의 노래"에서 주목한 대립 관계는 이순신과 선조다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정작 원균과의 갈등 구조는 보이지 않는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책의 서술 시점이 이순신이 백의 종군 할 때부터라 이미 원균은 전사한 것으로 나온다
(난중일기에는 무과 선배인 원균이 삼도수군 통제사가 된 이순신의 명령을 거부하여 선조에게 장계까지 올릴 정도로 갈등 구조가 심각했음이 자주 등장한다고 한다 김훈이 말미에 그 부분을 짧게 기록한 것을 두고, 이순신과 원균이 서로 불화했다는 식으로 역사를 왜곡한다는 비난을 받은 모양이다)
선조는 임진왜란과 광해군을 기록한 여러 책에서 무능하고 의심많고 형편없는 임금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다
전쟁에서 패해 의주 땅까지 쫒겨간 무력한 왕이면서도, 혁혁한 성과를 거둔 의병장들과 무관들을 의심해 죽음으로 몰아 넣는 어처구니 없는 왕으로 묘사된다
(그의 시호에 "조"자가 붙은 건 참 아이러니컬 할 정도다)
선조가 느꼈을 분노와 비애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오랑캐들에게 아홉 번 절을 해야 한 손자 인조나 망국의 비애를 짊어 진 고종 등보다 더 불행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지독히도 운이 없는 왕임은 틀림없다
왜 하필 자기 치세에 그런 난리가 일어나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하찮기 그지없는 왜놈들에게 쫒겨 그 멀고 먼 의주 땅까지 피난을 떠났어야 하니 참으로 불행한 왕이다
그가 왕으로써 느꼈을 무력함과 분노, 혹은 모멸감이 조금은 공감이 간다
어쩌면 그의 바램대로 전장터가 되버린 조선을 버리고 강을 건너 요동으로 가 버리는 게 역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왜군의 진격 소식에 놀라 왕위를 세자 광해군에게 넘기고 명으로 피신하겠다는 발언을 했다는 것 자체가, 그가 얼마나 무력한 왕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모르긴 해도 태종이나 세종 혹은 영조나 정조처럼 국가를 확실하게 장악한 왕이라면 절대 그런 말은 입 밖에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선조는 선왕들의 무덤을 파헤친 왜장 고시니의 목을 간절히 원한다
고시니의 목을 쳐서 선왕의 위패에 제사를 지내야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한다고 믿은 모양이다
아마도 권위를 세워 줄 상징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고시니를 잡을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했으니, 이순신이 압송당한 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작가의 분석으로는 실제 이순신이 몸을 상할 만큼 고문당하지는 않은 것으로 본다
하긴 진짜 역적으로 여겼다면 죄가 밝혀지기도 전에 문초 과정에서 이미 죽었을 것이다
책에는 이순신이 정치적으로 고립됐다고 나오는데, 그래도 풀려난 후 백의종군이라도 하게 된 걸 보면, 고문받다 죽은 김덕령 보다는 더 나은 처지였던 것 같다
(어렸을 때 "조선왕조 5백년"의 임진왜란 편에서 이순신이 고문 당하는 걸 본 기억이 난다
그 때 배우가 김무생이었는데, 고문 장면은 압슬형이었다
지금도 꼿꼿한 이미지인데, 훨씬 젊었을 그 당시의 김무생 이미지는 청렴결백 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이순신에 딱 어울렸다
무거운 돌이 무릎뼈를 으스러뜨려도 신음 소리를 거의 내지 않으며 지긋이 눈을 감는 모습은 범인들과는 뭔가 다른 성웅의 모습이었다
실제 이순신이 받은 고문의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칼의 노래"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그것을 담담하게 이겨 내려는 인간 이순신의 고뇌가 전면을 흐른다
꼭 이순신이라는 위대한 영웅에게만 국한된 감정은 아닐 것이다
전쟁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모든 군인들이 겪어야 할 고통들일 것이다
이순신이 선조의 시기를 두려워 하여 일부러 마지막 전투에서 자결했다는 말이 있는데, 책에서는 그런 식의 상투적인 내용은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늘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장수가 결국은 총알을 맞고 생명이 아스라져 갈 때 그 사라져 가는 의식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점점 의식이 혼미해져 갈 때, 전투는 계속 중이고 전 생을 걸고 쫒은 적들은 여전히 내 앞을 어지럽히고 있다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그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누구나 자신의 생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다만 전쟁 때는 좀 더 극적으로 보일 뿐이다
여진족과 싸울 때의 진중일기나 임진왜란 중의 난중일기를 꼼꼼하게 남긴 걸 보면 이순신은 전쟁 중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기 삶을 치열하고 꼼꼼하게 산 인물이라 생각된다
문인도 아닌 그가 매일 매일의 기록을 이토록 성실하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성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소설은 다만 이순신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빌렸을 뿐, 죽음을 불사하고 순간순간을 치열하게 살아 간 인간들의 얘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