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이덴슬리벨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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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접하는 서간체 소설이다. 어렸을 적에 읽었던  [키다리 아저씨] 생각이 났다. 한 고아 소녀가 자신을 후원해 주는 아저씨에게 계속 편지를 써서 자신의 생활을 알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남자가 바로 그 아저씨였다는 뻔한(?) 이야기였지만.. 나만의 키다리 아저씨를 좀 더 크면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만들었었다.  

좀 더 큰 다음에,  영어 공부한답시고 원서로 그 책을 다시 읽었을 때는 내용 자체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그렇게 솔직하면서도 재미있게 표현할 수 있는 글솜씨가 더 부러웠었다.  

이 책 역시도 다양한 인물들이 서로간에 많은 편지를 주고 받는 형식이다. 건지섬이라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섬에 사는 인물들.. (건지 감자 껍질 파이 북클럽이라는 독서 클럽 회원들)과 신문에 전쟁에 관련된 가공의 인물을 소재로 한 컬럼을 게재하고 있는 줄리엣이라는 여성 작가 사이에 주고 받은 편지들.. 또 줄리엣이 자신의 지인들에게 전해주는 건지섬 주민의 이야기들로 이 책이 구성되어 있다.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몇 년 전에 본 영화 [제인 오스틴 북클럽]이 떠올랐다. 케이블에서 몇 번이나 봤는데.. 웃긴 건 한 번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은 없고 이상하게 항상 중간 부분부터 보게 되어서.. 누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지만, 그래도 영화의 느낌은 참 좋았던 작품이었다.  

그 영화에서 왜 처음에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을 읽고 함께 이야기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암튼 다양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책을 읽고 감정을 공유하면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타인을 보다 더 넓게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또 몇 몇은 진정한 사랑을 느끼고 하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나도 영화처럼 저런 독서클럽이 있다면 가입할텐데.. 하나의 책을 읽고 한 달에 한번 만나 똑같이 읽은 한 권의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거지. 같은 책을 어떻게 다르게 읽었는지도 살펴보고, 또 공감하는 부분에서는 같이 이야기하면서 동질감도 느끼고 자신이 책에서 느끼는 바, 생각하는 바를 말로 표현하면서 스스로 마음 속으로 정리도 하고.. 암튼, 영화라서 그런 것이겠지만, 거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은 그 독서 모임을 통해 자신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조금씩 더 나은 사람, 더 행복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부러웠던 점은 사람끼리의  따뜻한 교류였다. 전화도 이메일도 보편화되지 않은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 간에 편지를 주고 받으며, 또 같은 책, 혹은 다른 책을 읽으며 공감을 나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귀중한 친구고 이웃인 사람들의 모임. 그리고 그 사람들끼리 주고 받는 편지! 

 줄리엣이라는 작가에게 어느 날 건지섬에서 날라온 한 통의 편지.. 건지섬에 사는 시골 청년 도시 애덤스는 우연히 자신의 손에 들어온 찰스 램의 책의 원소유자에게 그 책의 저자 찰스 램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면서, 저자의 다른 책들을 구해 볼 수 있게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내고 줄리엣과 도시 애덤스, 그리고 그가 속해 있는 건지섬의 독서 클럽인 [감자 껍질 파이 클럽] 회원들과의 편지 교류가 시작된다.    

건지섬은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있는 영국령의 작은 섬인데, 2차 대전 당시에 독일군이 주둔했었다고 한다. 거기서 아주 우연한 기회에 독서 모임이 시작되고 처음에는 그저 눈속임에 불과했지만,  점차 사람들은 모여서 책을 읽고 그 책 속에서 현실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엘리자베스라는 용기있고 지혜로운 한 여성이 있었다. 독서클럽을 이끌었고, 독일군에 점령되기 전에 자식을 안전한 본토로 떠나보내려는 친구를 대신해 그 아들을 격려하고 배웅하고, 적군의 점령지에서 자식을 낳는 친구를 격려하고, 독일군 장교였지만, 마음이 따뜻한 독일군 장교를 사랑해서 남의 손가락질에 굴하지 않고, 그 사람과 사랑을 이루고, 그의 딸의 낳고, 건지섬에 끌려와 노동을 강요당하다 탈출한 어린 소년을 보호하다가 발각되어 수용소에 끌려가서도 희망을 이야기하던 여성!   

마침 이야기 거리를 찾던 줄리엣은 건지섬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교류하면서.. 점점 건지섬 사람들과 동화되어 간다. 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고, 엘리자베스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고, 그녀의 딸을 자신의 딸처럼 키우고 싶어하면서.. 맨 처음 자신을 건지섬으로 인도했던 편지의 주인공 도시 애덤스를 서서히 사랑하게 되는 모습이 참 예뻤다.  

물론 전쟁으로 상처받은 사람들.. 그리고 그 상처를 용기있게 극복해 낸 사람들의 이야기라 단지 가볍지만은 않지만, 줄리엣과 도시 애덤스의 이야기는 상큼한 로맨틱 코메디 같다.   

서간체 소설만이 가질 수 있는 상큼한 매력이 담뿍 담겨있어서.. 책을 읽다보니.. 나도 오래전부터 쓰지 않던 편지를 막 쓰고 싶어졌다. 그런데.. 하도 오랫동안 편지를 안 쓰다 보니 마땅하게 보낼 사람도 없어서 괜히 종이만 만지막거리다가.. 결국 용인에 있는 동생에게 이 책 이야기를  써서 편지를 보냈다. 뜬금 없는 내 편지에 당황했을 동생의 반응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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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수레바퀴 - 죽음을 통해 삶을 배우고자 하는 이에게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지음, 강대은 옮김 / 황금부엉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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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호스피스라는 말을 보편적으로 사용한다. 말기 암환자 같은 살아날 가망이 없는 환자들에게 불필요한 의료 행위를 자제하고 보다 인간답게 존중받으면서 죽어갈 수 있도록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 의료진뿐만 아니라,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그런 환자들을 돌보며 고통받지 않고 생의 남은 날들을 값지게 보내도록 도와주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호스피스 운동의 대모라고 할 수 있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남긴 자서전을 보면 처음부터 호스피스란 개념이 환영 받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녀는 죽어가는 환자를 이용해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려는 여자라는 비난에 맞서.. 죽어가는 사람과 그를 바라보아야만 하는 사람, 그리고 그들을 진료하는 의료진의 아픔과 상실과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 최초의 여자였다.


평생에 걸쳐 수 많은 죽어가는 환자들을 면담하고, 그들과 그 가족을 위한 워크샵을 개최하고, 필연적으로 죽음에 맞닥뜨려야 하는 의료진들과 종교인들을 위한 세미나를 열며.. 그녀가 결국 꿈꾼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참되게 살 수 있는 인간의 권리가 아니었을까?


엘리자베스는 죽음이란 마치 벌레가 고치를 벗고 나비가 되듯, 육신이라는 허물을 벗어버리고 자유로운 나비가 되어 본래 자신이 태어난 생명의 근원(그것을 하느님이라고 하건, 신이라고 하건, 부처라고 하건 뭐라 부르건 간에.. 모든 생명과 존재의 바탕)과 하나 되는 기쁜 일이라고 여겼다.


그녀의 삶 자체.. 인간에 대한 예의와 연민을 지니고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기꺼이 자신의 손을 내밀 줄 알았던 그녀 자체가 참 대단하게 여겨졌다. 신이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준 만큼, 최선의 선택을 통해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엘리자베스는 그래서 남보다 어려운 길을 걸어가면서도 스스로에게 당당했다.



책에 나오는 몇 몇 구절을 베껴 놓았다. 진짜 삶의 귀감이 되는 구절들이다.


"누구나 삶 속에서 고난을 경험한다. 쓰라린 경험을 하면 할수록 거기에서 더 배우고 성장한다."


진정으로 인간을 치유하는 것은 오직 조건 없는 사랑뿐이다.


사후의 삶의 입구에서 누구나 똑같은 질문에 직면한다. "얼마나 봉사를 해왔는가? 돕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그 때까지 기다린다면 대는 이미 늦는다.


삶의 유일한 목적은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과제는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같은 근원에서 왔고 같은 근원으로 돌아간다.


우리 모두는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매워야 한다.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고난과 모든 악몽. 신이 내린 벌처럼 보이는 모든 시련은 실제로는 신의 선물이다. 그것들은 성장의 기회이며, 성장이야말로 삶의 유일한 목적이다.


먼저 자신을 치유하지 않고는 세상을 치유할 수 없다. 준비가 되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적 체험을 할 수 있다.

오늘은 어제 한 일에, 내일은 오늘 하는 일에 좌우된다.

오늘 하루 자신을 사랑했는가?

곷을 공경하고 꽃에게 감사했는가? 새를 사랑했는가? 산을 올려다보며 외경심을 느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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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플랜 모중석 스릴러 클럽 19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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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심 시간을 이용해 직장 근처의 도서관을 갔다. 서점이나 도서관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런 곳에 가면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책을 고르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다. 내가 가진 시간은 한정 되어 있는데.. 제목만 봐도 재미 있을 것 같은 책, 혹은 읽으면 도움이 될 책, 전혀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분야에 대한 정보를 주는 책 등등 너무 많은 책들이 있어서 이책 저책 꺼내서 뒤적거리다보면 시간만 가고 마지막에 가서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아무 책이나 빌려오고 난 뒤에 후회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올 때는 나도 모르게 일단 제목이 익숙한 책을 고르게 된다.   

이 책을 내가 읽게 된 이유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같이 일하던 직장 동료가 나에게 이 책을 사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심플 플랜! 단순한 계획? 

책의 뒷편에 간단한 스토리 라인이  소개되어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거금을 발견하고 그 거금을 셋이 나누기로 했는데.. 이 단순한 계획이 마구 어그러진다는 얘기겠지. 대강을 알고 시작한다는 점에서는 예고편을 보고 영화를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니, 책을 읽는 내내 영화를 보는 것처럼 한 장면 한 장면이 그려졌다.   

옛말에 견물생심이라고 했다.  운명을 뒤바꿀 만큼의 거금 440만 달러를 발견한 순간부터 어쩌면 그들의 운명은 그렇게 흘러가도록 되어 있었다라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 걸까? 아무리 아닌 척해도,  눈 앞에 먹기 좋도록 차려진 돈다발을 보는 순간부터 주인공은 이미 돈의 포로였다. 혹시 들킬 지 모른다는 두려움 외에는 그가 진정으로 마음에 꺼려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책을 읽으면서 내내 인간이기에 그럴 수도 있다라면서 주인공의 입장을 변호해 보긴 하지만,(처음부터 돈을 위해 누군가를 죽일 생각은 하지도 않았지만, 상황이 꼬이면서 한 두명을 죽이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겉잡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을 살인해서라도 자신의 죄를 감추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그의 처지가 이해는 되지만..) 사실 그에게는 멈출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결국 욕심이 그를 결국 바닥까지 끌어 내린 것이다.  

그런데 난 또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애초에 그에게는 자신의 아내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진정한 사랑이나 관계를 맺고 있지 못했다. 사회에 적응하는 데 실패해 그럭저럭 하루 하루를 버텨내듯 살아가고 있는 그의 형에 대해서도 약간의 죄책감(형을 외면하고 실패하며 살아가는 그의 인생을 그냥 방조했다는 식의....)을 갖고 있을 뿐, 친밀감이나 애정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형에 대한 어떤 의무감 내지는 의당 그러해야 한다는 감정 때문에 형과 가끔 만날 뿐이지, 진정으로 형의 인생이나 형의 감정에 대해 이해하려고 해 본 적이 없는 듯 보인다. 단지, 자신의 아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외에,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 보인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아내는 믿을 수 있지만, 형이나 형의 친구는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사용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고는 해도.. (우리들이 간절히 원하는 눈 먼 돈은 존재하지 않는거나 마찬가지다.) 그들이 서로 믿을 수 있는 사이였다면.. 좀 다른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겉으로 드러난 그들의 삶은 전과 다름없이 흘러가지만, 그들은 그 삶을 유지하기 위해 너무 많은 살인과 거짓을 저질렀고, 그들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작은 잘못을 감추려다가 점점 더 큰 악덕에 물들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나약하고 두려움 많은 인간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그런데 그들과 같은 입장에 내가 처했더라면 나는 "더이상은 안돼. 이제 그만! 난 나의 죄값을 치러야해..!" 이렇게 단호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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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노먼 베쑨 역사 인물 찾기 1
테드 알렌 지음, 천희상 옮김 / 실천문학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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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지인 중에 자신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이 책을 꼽은 사람이 있었다.  그때 나는 이 책이 소설인 줄 알았었다. 한참 뒤에야 그가 실존인물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아큐 정전을 쓴 노신과 노먼 베쑨이라는 의사가 동일인인 것처럼 헷갈렸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자, '노먼 베쑨이 누구길래?'하는 해묵은 호기심이 밀려왔다.  그날 퇴근길 버스 안에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책의 앞부분에서 백구은(白救恩:사람을 살리는 은혜로운 백인 의사 (?), 베쑨을 중국식으로 표기한 것 같은데, 그 한자가 많은 것을 말해 주었다)은 죽어가고 있었고 그 소식에 수없이 많은 중국인들이 자신의 부모의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슬퍼하고 있었다. 대장정이라고 일컬어 지는 모택동 휘하의 중국인들이 게릴라전을 벌이는 와중에 벌어진 일인 것 같았는데, 암튼 책 앞머리에서부터 내가 알지 못하는 인물 노먼 베쑨은 수많은 사람의 염려와 걱정 속에 죽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얼마나 대단한 삶을 살았길래 한 사람의 죽음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아파하는가?'란 논리적인 판단 이전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베쑨이 죽어간다는 게 괜히 슬퍼졌다. 

베쑨은 캐나다 출신의 흉부 외과 의사였다. 그의 어린시절이나 젊은 시절은 보통 사람과 별다르지 않았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존경할 만한 부모 밑에서 잘 자라나 스스로 학비를 벌어가면서 의학 공부를 마쳤고, 유럽을 경험했고, 그곳에서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캐나다로 돌아와 병원을 개업했다. 단지, 그에게 좀 특이한 점이라면, 그가 보통의 다른 의사들보다 병든 환자를 불쌍하게 여기는 측은지심이 좀 더 많았고, 환자를 단지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가난한 동네에서 개업한 그는 초기에 치료했더라면 쉽게 치유될 수 있었던 환자가 돈 때문에 치료받지 못하고 결국 중태에 빠져서야 병원을 찾는 것을 보고 크게 상심한다. 진료 행위마저 돈벌이 수단이 되어버린 의료 체계 하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진료하는 것뿐이었고, 지나치게 자신의 몸을 혹사하던 베쑨은 결핵에 걸리게 된다. 항생제가 개발되기 이전 세상에서 결핵은 말 그대로 불치병이었다. 요양소에서 인생을 정리하며 살던 그에게  결핵에 걸린 폐를 절단하면 결핵 환자도 다시 건강해 질 수 있다는 이야기에 그는 다시 새 희망에 부푼다.  

폐절단술로 결핵의 병마에서 벗어난 베쑨은 그 때부터 결핵 치료를 위해 폐절단술을 배우기 위해 헌신한다. 그러나 아무리 결핵치료방법이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점점 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결핵에 걸리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보지도 못한 채, 죽어가는 현실은 그에게  세상의 가장 큰 질병이야 말로 가난이라는 자각을 일깨우고 결국 그는 부의 불평등으로 병들어 가는 사회 구조를 치료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 스페인 내전이 발생한다. 프랑코라는 인물이 스페인의 공화정에 반대해서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것에 대항해 여러 나라의 지성인들이 반파시스트 연대로 직접 스페인 내전에 뛰어 들었다고 들었다. (그것을 배경으로 쓰여진 유명한 소설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고 한다.) 베쑨도 반파시즘이라는 사명감으로, 스페인 내전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파시스트와 싸우다 부상당하는 병사들을 살리기 위해 야전 수혈단을 조직한다. 최전방에서 적의 총탄에 부상당해 제대로 치료 받지도 못하고 과다 출혈로 죽어가는 병사들을 바로 그 현장에서 살리는 일에 자신을 헌신한다.  

스페인에서 그가 운영하는 야전의료진에 의해 예전 같으면 전사했을 많은 병사들의 목숨은 구해 내었지만, 상황은 점점 어렵게 꼬여갔다. 히틀러와 무쏠리니의 지원을 받는 프랑코파에 비해, 아무 지원도 없이 싸우면 공화정부파는 점점 수세에 몰려갔고 국제 사회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캐나다로 돌아온 베쑨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파시스트에 저항해 싸우는 스페인 사람들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에 저항해 일어나고 있는 중국인들의 열악한 상황을 듣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그는 야전 병원을 차려 놓고 일본군과 게릴라 전투를 벌이고 있는 모택동 휘하의 장병들을 치료한다. 수십시간 잠 한번 자지 않고 서서 수많은 수술을 집도하고, 동시에 중국인들이 보고 배울 수 있는 의학 교본을 집필하고,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더 높은 경지로 이끌도록 독려한다. 코앞에 일본군이 몰려와도 자신이 살려야 할 환자가 있으면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이 세운 병원이 일본군에 점령 되면 더 깊은 산속 동굴에 병원을 차리고 환자들 돌보았고,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제대로 된 약도, 의료 장비도 없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모든 난관을 극복해가면서 수많은 병사들을 살려내었고, 또 주변 사람을 자신처럼 진짜 환자를 살리는 의사가 되도록 감화시켜 나갔다.  

오죽하면 불리한 전황 속에서 곧 죽을 일본과의 전투에 임하면서도 어린 병사들은 "우리에게는 백구은이 있다!"고 외치고 힘을 내었을까?  

환자를 살리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진짜 의사! 환자의 아픈 마 음까지 다독일 수 있는 따뜻한 의사, 환자를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이나, 제국주의자의 착취에 대해 불같이 분노하던 의사, 공산주의를 신봉했던 의사.. 그래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존중받고 대우받는 세상을 꿈꾸었던 이상주의자, 환자를 진료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피까지도 뽑았던 의사,  환자를 잘못 처치해 다리를 절단하게 만든 서툰 의사에게 불같이 분노했다가도, 그가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렵게 고학하고 곁눈질로 보고 배워서 사람을 살리는 의사의 길에 들어선 초보 의사인 것을 알고 눈물로 참회하며 그의 의지와 노력을 격려하던 의사..  

수술 도중에 생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할 약이 없어서 결국 그는 패혈증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에 수많은 중국인이 통곡했고, 나 역시도 흐르는 눈물을 한참동안 멈출 수가 없었다. 왜 그 선배가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준 한 권의 책으로 이 책을 지목했는지 비로소 이해가 갔다.

벌써 한 십여년 전에 티비 드라마에서 [허준]을 방영했었다. 거기서 허준의 스승으로 나오는 유의태가 한 말 가운데 [비인부전:非人不傳-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않는다]과 [의원은 환자를 궁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라는 말이 있었다. 자신의 아들인 유도치가 내의원 의원으로 출세하고자 하는 욕망에 불타는 것을 보고 아들이 아니라, 제자 허준에게 모든 의술과 심지어 자신의 몸까지 해부해보도록 내 놓는 장면을 보고 참 많이 감동 받았었다. 환자를 궁휼이 여기는 마음이 의사된 자가 가장 먼저 가져야 할 마음이라는 것이다.  

노먼 베쑨의 이야기를 일으면서 환자를 궁휼히 여기는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환자를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기는 대부분의 요즈음 의료진들... 나부터도 약을 타러 오는 환자의 고통에 대해 궁휼히 여기는 마음 보다는 그저 직업으로 환자를 대하곤 하는데... 참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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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신현승 옮김 / 시공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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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집회가 열렸던 게 벌써 2년이 넘었다. 그때, 우리 국민들은 36개월 이상의, 광우병 위험물질이 들어 있을 수도 있는 소내장의 수입까지를 포함한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 결과에 반발해서 하나 둘 씩 서울 광장에 촛불을 들고 나왔었다. 그 과정에서 현 정권과 국민들은 정면으로 충돌했었고 그 뒤4대강 문제, 세종시 문제, 천안함 사태 등등 숱한 문제들에 있어서 대립과 소통 부재가 계속 되고 있다.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점에서 이 책의 제목을 본 것이..  광우병 때문에 국민들의 불안감이 극심해져 있을 때라, 광우병에 대한 책이나, 쇠고기를 먹는것과 관련된 책들이 많이 나오던 시절이라, 이 책 역시도 출판사가 이번 기회에 한 몫 보자는 식으로 펴낸 책이라고 생각해서 아예 읽지 않았었다.

그런데 책의 저자가 제레미 리프킨이란다!! [소유의 종말]과 [엔트로피]를 쓴 사람이다. 앞으로의 사회는 누가 무엇을 소유하는가보다 누가 무엇에 접속할 권한을 가졌는가가 더 중요해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유의 종말]은 현대 사회에 대한 꽤 예리한 통찰을 담고 있고 있었다. 또 엔트로피란 책을 통해서.. 과학 발전에 따라 더 효율적인 에너지를 사용해 온 것이 아니라, 더이상 손쉽게 에너지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수고와 노력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에너지원을 찾게 됨을 설명한 내용에서는 내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 내용이라 꽤 흥미로웠었다.  이 책에서는 어떤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하고 있을까? 순전히 저자에 대한 믿음 때문에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의 앞부분에서 부터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아주 명확하게 드러난다. 육식, 특히 쇠고기를 대량으로 소비하는 사회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소득이 증가한 사람들은 너도 나도 쇠고기 소비를 즐긴다. 그 수요에 맞추기 위해(? 어쩌면 이 말은 거짓인지도 모르겠다. 이윤 추구를 위한 대량 생산과 수요 유발이 더 먼저일 수도 있으니까) 대량으로 축산 단지를 운영하고, 공장에서 제품을 찍어내듯 정육 가공 공장에서 포장을 한다. 그 과정에서 예전에는 인간이 먹을 곡물을 생산하던 곳에서 이제는 소를 위한 사료작물을 재배한다. 세계 인구 중 10억 이상이 굶주리고 있는 이 지구에서, 오히려 인간들이 식용으로 키우는 소들은 배부르게 먹는 (?) 아이러니가 생겨나게 된다. 가난한 농민들이 자신의 땅에서 쫓겨 나고,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의 열대 우림은 나날이 더 훼손된다.  

소들이 먹는 풀들로 가득찬 목초지는 몇 년 지나지 않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황무지나 사막처럼 바뀌어 버린다. 소들이 땅을 밟아 대어서 땅이 지나치게 다져지기 때문에 미생물이 살기 힘들어지고 생물 다양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환경 변화에 취약해져서 비바람에도 흙이 쉽게 쓸려가버린다.  갈수록 지구촌 곳곳이 사막화되어 가는 것이 소의 대량 방목과 무관하지 않다는 얘기다.  

그 뿐만이 아니다. 지방이 많은 맛 좋은 쇠고기를 선호하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대부분의 소는 제 몸하나 보다 더 작은 비좁은 축사에서 비인간적인(? 소한테 인간적이란 말은 좀 어폐가 있을까?) 방식으로 곡물과 온갖 잡다한 쓰레기(다른 동물의 폐기물, 시멘트, 등등)를 먹이고, 항생제와 성장 호르몬을 마구 투여하며 살충제를 대량 살포해 가면서 키운다. 도축되는 과정은 더 끔찍하다. 전체 물량의 약 3%만이 검사 대상이고 나머지 소들은 질병 유무와 상관없이 마구 도축되어 쪼개지고 부위별로 소포장 상태로 만들어져 나온다.  그 과정에서 오염물질이나 간이나 조직에 농양 같은 것들도 마구 한데 섞여 버린다. 마치 자동차의 조립 라인처럼 비숙련 저임금의 이민 노동자들이 소를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에 맞춰 소를 해체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오는 폐기물은 다시 소의 사료로 가공되고, 해체된 소는 부위별로 그럴듯하게 소포장되어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한때 인간의 가장 소중한 재산이자 친구였던 소가 생명체가 아니라, 이윤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자본주의의 상품이 되어 버렸다. 그 결과 지구 곳곳이 환경 재난에 신음하고 있고, 가난한 제 3세계의 농민들은 자신의 터전에서 쫓겨나고 그 반대로 부유한 나라의 국민들은 각종 성인병으로 고통받는다.  또한 쇠고기를 소비할 여력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차별, 또 대량으로 쇠를 양육하기 위해 저질러 졌던 버팔로 대학살과 인디언들에 대한 억압.. 등등 수없이 많은 문제를 양산하는 것이 바로 쇠고기 소비와 연관이 있다.  

쇠고기를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근절되지 않는다면 이 모든 문제들은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쇠고기를 소비하는 것에 대해 차가운 범죄(절도나 강간, 살인처럼 당장 눈앞에서 저질러지는 것은 아니지만, 암묵적으로는 지구 환경을 파괴하고, 지구촌의 배고픈 사람들에게서 먹을 것을 빼앗고, 살아있는 소로부터 생명체의 존엄을 말살하고, 그 과정에서 인간을 소외시키는 종합 범죄행위)라고 성토한다.

저자는 우리 사회의 경제, 환경, 역사, 사회의 다양한 측면에서 쇠고기 소비가 우리에게 가져온 문제점들을 낱낱히 파헤치면서 우리에게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쇠고기를 먹고 싶은가?'라고!!  

책을 다 읽고 나서 마음이 참 무겁다.. 저자의 준열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쇠고기가 제일 맛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비싸서 자주 먹지는 못하지만, 우리 땅에서 키운 한우는 괜찮지 않을까?, 어쩌다 한 번 정도는 먹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생각이 자꾸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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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13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