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돌의 도시 - 생각이 금지된 구역
마누엘 F. 라모스 지음, 변선희 옮김 / 살림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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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 이야기다.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상당히 복잡하게 꼬여 있다. 그런데 즐겁고 빠르게 읽힌다.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고, 비틀린 유머가 범람하고, 풍자로 가득하다. 한 번 잡으면 단숨에 읽게 된다. 물론 중간에 복잡한 전개로 약간 혼란을 겪었다. 뭔 놈의 정부조직이 ‘선행과 사회보건부’니 ‘나쁜 환경부’니 ‘종교 통제와 성 억제부’란 말인가! 이런 이름과 장관들은 순간적으로 읽는 동안 혼란을 준다. 그리고 주인공으로 둘러싸고 벌어지는 허술한 조사와 발표는 황당함 그 자체다.  

 

 황당하다고 했는데 그것은 작가의 의도가 아닌가 한다.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데 이 시대는 음악도 금지되고, 책은 더 오래 전에 사라졌다. 사람들이 문자를 읽는다는 것은 특권층만 가능하다. 제대로 사고하는 방법을 훈련받지 못했고, 모든 것은 버추얼 비전 등을 통해 경험하고 정보를 얻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즉흥적이고 충동적이면서 감정에 충실하다. 물론 이것은 보통 사람들의 경우고 높은 곳에 계신 분들은 다르다. 그들은 권력 투쟁을 위해 열심히 음모를 꾸미고, 쉽게 해고당하는 것을 겁내고, 자신들의 연금을 올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현실에서 모든 것이 이성적이고 명확하게 펼쳐진다는 것이 무리가 아닐까.  

 

 주인공 카르멜로는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그에게 그날의 사건이 없었다면 평범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날의 사건은 바로 대담하게도 여 대통령의 핸드백을 훔친 도둑을 잡은 것이다. 물론 그가 이 도둑을 잡으려고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 옆에서 달린 그에게 지고 쉽지 않았던 의욕의 결과일 뿐이다. 범죄가 그렇게 많지 않던 그곳에서 영웅으로 대접을 받는다. 그리고 이제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평범한 삶을 벗어나 복잡하고 이상한 모험을 겪게 된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그 속에 드러나는 수많은 풍자와 비틀린 유머 덕분에 즐거움을 느낀다. 여 대통령이 된 것이 그녀의 외모 때문이고, 영웅이 된 그의 아이를 갖고자 정신도 못 차리는 그에게 간호사가 달려들고, 권력자들은 모두 쾌락과 평온함을 얻기 위해 ‘지옥 같은 천국’이란 야릇한 곳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카르멜로가 살인자로 몰려 감옥에 갇혔을 때 그에게 살인 청부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한 편의 코미디 장면처럼 다가온다. 이 모든 것이 현대 사회에 대한 거대한 비판이자 풍자다.  

 

 첫 부분을 읽다가 ‘위기는 기회다’란 동양 속담을 인용하면서 한국을 말한다, 그보다 이어서 개고기와 야구와 월드컵을 이야기하면서 약간의 비난을 가하는데 순간 불편함을 느꼈다. 아마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에게 패한 것을 가슴에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펼쳐지는 황당한 사건들은 나 자신조차 충분히 생각하고 분석할 틈을 주지 않는다. 속도감과 황당한 이야기가 재빠르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매력은 많다. 유머와 풍자가 바탕으로 깔려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황당하고 허술한 듯한 구성이 끝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마지막에 이어지는 에필로그들은 막장 드라마의 한 장면 같다. 중간 이후 펼쳐지는 누가 살인범인가 하는 미스터리는 사실 황당한 전개에 말려 그 힘을 발휘하기보다 하나의 에피소드처럼 흘러간다. 이런 전개와 구성이 작가의 의도에 의해 끝까지 힘을 잃지 않으니 즐거움도 지속된다. 만약 기계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엄밀하게 구성되고 분명한 진지한 이야기를 원한다면 이 소설은 펼쳐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소설들과 반대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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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세계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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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소설이다. 설정 자체가 잔혹함의 극치다.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소설이 아닌가 생각한다. 만약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란 가정조차 싫지만 현재 우리는 은밀하게 즐기고 있다. 그 강도나 방식에서 차이가 날뿐이다. 아니라고? 그럼 우리가 매일 시청하는 뉴스나 정보를 생각해보라. 살인과 온갖 비극적인 일들로 가득하지 않는가? 연쇄살인이나 인종청소라고 말해지는 대학살에 모든 언론과 우리의 관심이 집중되지 않는가? 물론 심한 비약일 수도 있다.  

 

 황산이라는 제목만 생각하면 먼저 중국의 산 이름이 떠오른다. 여행 상품으로 많이 다루어지고 중국에 패키지여행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녀온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산의 산은 뫼산이 아닌 초산 자였다. 왜 이렇게 제목을 지었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책을 보는 내내 궁금하였다. 그 호기심의 결말은 마지막에 나오는데 약간 황당한 마무리라고 해야겠다. 집단수용소와 방송국과 시청자들의 연결고리가 일순간 깨어지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 마무리를 했는지도 궁금하여 지는 지금이다.  

 

 소설 내용은 방송국에서 집단수용소를 지어놓고 2차 대전 당시처럼 카포 역을 할 사람을 선발하고, 수용소에 수감될 사람을 뽑아 텔레비전으로 방송한다는 것이다. 집단수용소에 가두어진 사람들은 부족한 식량과 강제노역으로 여위어가고 카포는 죽을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 여기에 즈데나 카포와 수용소번호 CKZ114로 명명된 파노니크라는 아름다운 포로를 등장시켜 갈등과 광기 속의 사랑과 인간의 감정을 그려내고 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인 파노니크는 아름답다. 우아하다. 시청자도 즈데나 카포도 그녀에게 매혹되어있다. 작가는 대부분의 묘사를 파노니크에 집중하고 있다. 모든 사건이나 전개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녀의 생각이나 행동에 대한 반응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말이 표현된다. 그녀가 보여주는 헌신적인 희생은 같은 조 사람들에겐 초콜릿을 의미하고, 시청자에겐 극 속 영웅으로 나타난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해 올라가는 시청률을 생각하면 방송제작자에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청률 메이커일 것이다.  

 

 

 끔찍한 설정으로 시작하지만 그 전개나 마무리가 그 설정을 넘어서지 못했다. 파노니크와 즈데나의 관계나 파노니크가 속한 조원들의 대화와 갈등이나 집단수용소와 그것을 보는 시청자의 관계를 심층적으로도 다양한 모습으로도 그려내지 못한 것이다. 책의 분량을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르지만 아쉬움을 남긴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기교는 변함없이 재미있지만 그 깊이를 그려내기엔 부족함이 느껴진다. 이런 부분이 혹평과 옹호로 나누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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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잠자는 미녀
아드리앵 고에츠 지음, 조수연 옮김 / 열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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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생각했다. 많지 않은 분량에 역사와 미술과 미스터리가 엮여있다 길래 단숨에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사실 집중해서 읽으면 단숨에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문장도 어렵지 않다. 그런데 쉽지 않다. 한 점의 사라진 그림을 둘러싼 세 사람의 이야기가 그 시대의 미술과 인물들과 엮이면서 다른 분위기와 미스터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미스터리는 기존에 알고 있던 살인이나 음모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전혀 미스터리라고 느낄 수 없을 정도다. 그만큼 이 세 이야기는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잔잔하게 이어진다.  

 

 처음에 표지에 나오는 그림이 제목의 그림인줄 착각했다. 첫 단추부터 문제가 조금 있었다. 첫 번째 이야기꾼인 앵그르가 이 그림을 어떻게 그렸는지 보여준다. 그가 그 그림의 모델에게 어떻게 매혹되고 빠져 들었는지와 그의 예술관이 드러난다. 짧고 분명한 문장으로 이어지는데 수많은 이름과 작품은 사실 몰입을 방해한다. 주석이 달려 금방 찾아볼 수 있지만 이런 작업들이 번거롭다. 알고 있는 이름도 있고, 기억이 헷갈리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그가 그 그림과 그 모델을 사랑했음을 보여주고, 상실의 아픔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  

 

 두 번째 화자는 인상파의 선구자로 꼽히는 카미유 코로다. 역시 작가는 이 화가의 삶을 보여주면서 예술관을 말한다. 하지만 그 삶 속에 가장 강한 인상을 준 작품으로 앵그르의 <나폴리의 잠자는 미녀>를 꼽는다. 풍경화가지만 그가 그 그림에서 받은 충격은 전 생애에 걸쳐 그와 함께 살아갈 정도다. 아니 나이가 들수록 괴롭힌다. 그리고 앵그르가 잃어버린 그림의 다음 행적을 그의 글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려보낸다. 하지만 끝내 그 진실을 밝혀내지는 않는다.  

 

마지막은 가장 짧은 분량이자 화가가 화자가 아니다. 앵그르의 잃어버린 그림의 소유자인 제리코의 친구인 사진작가다. 그 그림은 이제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기 직전이다. 다른 화가에게 영감과 충격을 준 것에 비해 그에겐 별로 강한 인상을 주지 못한 모양이다. 그것보다 재미난 점은 앵그르의 짝사랑이었던 그녀의 숨겨진 사실이다. 이 사실과 카미유가 노년에 만난 여인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궁금하다. 이것은 독자의 상상력으로 채워 넣어야 할 것 같다.  

 

 전체적으로 한 편의 소설보다 미술사에 대한 이야기처럼 읽힌다. 각 화자가 예술론과 그 시대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상당히 겹친다. 1861년과 1866년과 1861년의 회상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다. 미술사로 읽는다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예술의 변혁기에 일어난 변화가 상당히 흥미로울 것이다. 하지만 미스터리로 읽는다면 조금 실망할 수 있다. 그 실체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뚜렷하지 않는 실체 속에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있다. 바로 실제 나폴리의 잠자는 미녀다. 왜 있잖은가? 볼 수 없거나 읽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강한 갈망과 호기심이 환상을 키우는 경우 말이다. 지금 이 소설이 나에게 쉽지 않지만 나중에 다시 읽을 때 어떤 식으로 다가올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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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퇴마사 펠릭스 캐스터 1
마이크 캐리 지음, 김양희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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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캐스터 시리즈의 첫 권이다. 현재 모두 네 권까지 나왔다고 한다.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먼저 생각난 것은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까 하는 것이다. 앞부분에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퇴마사의 이미지가 작용하여 그에게 몰입하는 데 약간 지장이 있었다면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작가가 만들어낸 캐릭터와 이야기가 흡입력을 가지고 사람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다음에 펼쳐질 수많은 이야기들이 벌써 궁금해지게 만든다.  

 

 펠릭스는 퇴마사다. 기존 <퇴마록>이나 일본 소설이나 만화 등에서 가지고 있던 퇴마사를 생각하면 그의 모습은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강한 능력을 가지고 악마나 유령과 싸우기보다 틴 휘슬을 불면서 구속된 유령을 풀어주거나 악마 등을 물리치는 정도다. 그러니 여기서 다른 퇴마사가 보여주는 휘황찬란한 능력이나 대단한 액션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작가는 매력적이고 인간적인 퇴마사를 등장시켜 서서히 감정을 이입시키고, 단순한 퇴마 이야기를 넘어 미스터리로까지 이어지게 만든다.  

 

 펠릭스는 퇴마사였지만 잠정적으로 은퇴한 상태였다. 돈이 부족하여 마술사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런데 아이 생일 파티에서 순간 욱해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한다. 결국 돈도 받지 못하고 쫓겨난다. 집주인 펜에게 줄 돈이 부족하고 우연히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이 전화 한 통으로 그는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게 된다. 처음엔 쉽고 단순한 작업일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드러나는 사실들은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 그의 친구 몸속에 살고 있는 악마가 말한 것처럼 목숨을 걸어야 하는 무시무시한 사건이고 가슴 아픈 사실이 숨겨져 있다.  

 

 소설은 재미난 설정과 등장인물들로 가득하다. 먼저 유령이나 좀비나 늑대인간 등이 일상적으로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다. 더 재미난 부분은 이들의 등장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처음에 공포에 질렸지만 점차 공존하면서 살아가는데 인간이 환경의 동물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작가는 왜 이런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뭐 현재는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 그 이유를 다른 이야기에 말한다고 하니 끝까지 가서 그 이유를 알고 싶다.  

 

 등장인물들 중 눈길이 가는 사람은 역시 집주인 펜과 그녀의 연인인 라피와 좀비로 변한 해커 니키다. 아직 이들이 큰 역할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펠릭스를 중심으로 강한 유대감과 존재감을 드러낸다. 펜은 펠릭스의 짝사랑이자 든든한 우군이고, 라피는 그가 퇴마사를 그만 두게 만들만큼 강한 아쉬움을 남겨준 악마와 결합한 상태지만 다음 이야기에서 큰 역할을 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리고 라피에 공존하는 악마의 예언이 피하고 싶던 퇴마사의 삶 속으로 다시 걸어가게 만들었다. 좀비가 된 니키는 행동과 대사들이 눈길을 끈다. 죽은 그가 좀비로 살아 움직이면서 아직도 경찰이나 다른 존재를 두려워하는데 약간의 유머와 아이러니함을 준다.  

 

 설정과 등장인물들이 강한 인상을 준다면 그 바닥에 깔려 있는 이야기는 가슴 아프다. 이것은 현대 자본주의 문화가 만들어낸 어둠이자 현실이다. 유령이나 좀비 등의 판타지에서 미스터리로 변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강한 집착을 보이거나 아쉬움이나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이런 것들이 유령 등이 한 자리에 묶여 있게 만들고 그곳을 돌아다니게 한다. 만약 그들의 바라는 바를 이룬다면 그곳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 악령이 아니라면 좋은 곳이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퇴마사가 하는 일이다. 물론 몇몇은 이것을 악용하기도 한다. 이것을 보면 유령보다 무서운 것이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의 바탕에는 이런 사실이 깔려 있다.  

 

 어떻게 보면 허황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현재보다 몇 년 전 시간을 배경으로 쓴 소설임을 생각하면 약간은 의아하다. 왜 가까운 미래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설정은 판타지에 현실성을 덧붙여 주는 동시에 판타지임을 생각하게 만든다. 현실이 상상보다 더 참혹하고 비정상적인 오늘날을 생각하면 유령이나 좀비나 늑대인간은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그러니 이들의 공존이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렇다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마저 모두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단지 배경만 그렇다. 펠릭스가 하는 일은 산 자들을 위한 것도 있지만 산 자들에 맞서 죽은 자들을 보호해 주는 역할이다. 그래서인지 판타지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 현실 속 사건보다 더 가슴 아프고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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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티드 맨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1-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1
존 르 카레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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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한 인간이 국가나 조직에 의해 이렇게 다루어져도 되는지 의문이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붙여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나라에서 안보니 테러와의 전쟁이란 목적을 위해 펼치는 이 작전은 역겹고, 가슴 아프고, 분노를 자아낸다.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삶은 정의란 것 때문에 사정없이 휘둘리고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난다. 국가나 단체의 존재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그 기본을 생각하게 된다. 읽는 내내 분노했고, 불편했다. 통쾌함보다 뒤끝이 더 강하게 남는다.  

 

어느 날 터키출신 헤비급 챔피언 뒤를 검은 코트를 걸친 남자가 따라 다닌다. 남들 시선 받는 데 익숙한 그는 미행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삼일 반복되다 보니 그 존재를 깨닫게 된다. 그 존재가 바로 이 소설 중심에 놓인 인물 이사다. 처음 그의 등장과 이야기의 진행을 보면서 테러나 스파이의 활약이 펼쳐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선입견이다. 작가는 이사를 중심에 놓고, 그를 둘러싼 사람들과 조직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그 과정에 개인이나 조직 속의 개인이 어떻게 취급 받고, 이용되고, 잊혀지는지 알려준다.  

 

 소설의 구성은 상당히 복잡하다. 어떻게 보면 간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거장은 예상을 벗어난 이야기 진행과 결말로 이어간다. 처음에 느낀 테러범과의 첩보전 같은 분위기가 이사의 정체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현대사의 비극으로 변한다. 이 변화는 다시 그를 만난 두 인물인 인권변호사인 아나벨과 더러운 돈을 보유하고 있는 은행장인 브뤼의 것이 된다. 이 둘이 이사를 가볍게 둘러싼 인물이라면 독일 정보조직은 이들을 포위하고 감시하면서 분위기를 변화시킨다.   

 

 사실 이 소설의 핵심은 이사가 아니다. 이사의 아버지가 남긴 유산과 그 유산을 둘러싼 이야기들과 테러와의 전쟁이다. 이사의 아버지는 러시아 군부의 대령으로 엄청난 부정축재를 하였고, 이사의 어머니를 강간한 인물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그의 유일한 사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에게 자신이 쌓아올린 부를 넘겨주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사랑보다 그가 저지른 악행이 더 크다. 독실한 이슬람 신자인 이사가 이 이익을 얻는 것을 거부한 것도 당연하다.   

 

 이사와 관련하여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는 이는 아나벨이다. 그녀는 이전에 망명한 이슬람 신도 한 명을 국가 안보란 것 때문에 빼앗긴 경험이 있다. 그녀의 배경을 이용한다면 쉬울 것 같은 데 그녀는 이를 거부한다. 이사의 존재가 부담스럽지만 자신의 과오를 되돌릴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번에 철저하게 준비를 하여 이사가 바라는 바를 이루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녀가 상대하는 것은 개인이 아닌 국가란 거대 조직이다. 더군다나 이사의 심신 상태마저 상당히 불안정하다.   

 

 브뤼의 은행은 러시아 등에서 넘어온 더러운 돈을 보관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계인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말년에 벌인 사업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 시간이 흐른 후 그 계좌를 찾는 사람이 나타났다. 하지만 직접은 아니다. 그 중계자가 아나벨이다. 집안이 콩가루로 변해가고, 자신의 삶도 결코 행복하지 않는 브뤼에게 이 사건은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잊고 있던 행복을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또한 국가란 조직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아나벨과 브뤼가 현실 속에서 개인의 한계와 노력을 보여준다면 바흐만은 조직 속에서 개인의 노력과 한계를 드러낸다. 처음엔 각자 아무 관계가 없다가 뒤로 가면서 연결되어지는 모습이 굉장히 자연스럽다. 이 관계가 한 인물의 아주 낮은 가능성에 눈길을 주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그리고 5퍼센트의 악한 면을 부각시킨 장면에선 인간이란 존재와 조직이 지닌 속성 때문에 분노하게 된다. 왜 세계가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죽고 죽이는 불행한 윤회에 들어가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소설 속에서 우리의 현실과 똑같은 문장이 곳곳에 나온다. 특히 과거사 문제에서 그렇다. 1920년 영국이 아일랜드에, 1953년 영국이 이란에 무슨 일을 했는지 묻는 것과 영국인이 “미래을 봐요!.”를 말하는 문단에선 한국 현대사의 재현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일은 어제의 창조물입니다.”란 문장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들이 원했던 한 인간의 존재에서 비롯한 이야기지만 그 속엔 인간성을 짓밟고 타락시키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상황들이 분노를 자아내고, 가슴 아프고, 결코 남의 이야기만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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