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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동전
이서규 지음 / 창해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백 년도 전에 발행된 1달러 은화가 과연 어떤 비밀을 담고 있을까? 단순히 제목만 보면 동전이 특이한 의미를 지녀야 하는데 이 소설 속 은화는 백 년 전에 통용되던 실제 은화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의문이 생긴다. 왜 악마란 단어를 앞에 붙였을까, 하고 말이다. 작가는 한 종합병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통해 현재가 아닌 과거 속으로 들어가고, 그 과거를 현재와 연결시켜 호기심을 불러온다. 왜 악마의 동전이라고 부르고, 누가 죽였으며, 과연 그녀는 악마에 쓰인 것인지 말이다.
첫 장면은 국과수 부검실이다. 주인공 조인철 앞에서 죽은 남자의 부검이 실시된다. 검시관은 인력 부족 등을 이유로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얼마 전 독일 연구소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그는 탐탁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돕는다. 메스가 시체를 가르는 순간 피분수가 솟구친다. 혹시 살아있는 사람은 아닐까 의문이 생긴다. 이 사고는 그를 며칠 전 기억 속으로 빠져들게 하고, 그 시체와 만나게 된 상황을 설명한다. 그를 찾는 방송을 듣고 이동하던 중 한 남자가 벌거벗고 그에게 쓰러지고 곧 죽는다. 바로 그때 그의 곁을 지나가던 한 남자가 피 목욕을 말한다. 섬뜩하고, 괴이하고, 의문투성이 상황이다.
외상이 전혀 없는 환자가 죽었고, 검시 중 피로 목욕할 정도니 사인이 궁금하다. 그런데 바로 그 상황을 예측한 사람이 있다. 대단하다. 그가 바로 이종성 신부다. 이 우연한 스침이 둘을 하나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콤비로 만든다. 이 콤비는 홈즈와 왓슨 같은 관계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사실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조합이다. 그리고 이 신부의 과거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의사 출신에 베트남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그 경력 때문에 피 목욕을 예견한 것이다. 하지만 왠지 이 상황을 복기할수록 어색함이 가시지 않는다. 스쳐지나가면서 본 것으로 다음에 벌어질 일을 예상한 것도 이상하고 그것을 이해한다고 해도 그 반응이 너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치밀함이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역사 속에서 쉽게 생각하지 못한 내용을 소재로 썼다. 육이오와 한국은행을 연결시키다니 아주 기발한 착상이다. 무리하게 억지로 끼워 맞춘 설정이 아니라 그 시대의 분위기와 상황을 충분히 조사하여 쓴 것이다. 현재의 사건들이 과거를 계속 파헤치게 만들고, 하나씩 사실이 드러나면서 범인의 윤곽이 뚜렷해진다. 이런 과거 속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김형오란 인물이다. 혁명의 이름으로 그가 저지른 만행이 밝혀질 때와 동전 때문에 일어나는 알 수 없는 현상들이 겹쳐지면서 악마의 실체가 살짝 보이는 것 같다.
한 남자의 죽음과 한 여자의 알 수 없는 증상에서 시작하여 동전을 둘러싼 비밀이 과거 속으로 빠져드는 과정이 상당히 매끄럽다. 이런 진행은 빠르게 책을 읽게 만든다. 하지만 세부적인 묘사로 들어가면 억지스런 부분들이 보인다. 충분히 중심에서 조인철과 함께 나아가야 할 신부가 뒤로 가면서 비중이 줄어드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고 수진의 증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괴이하고 섬뜩한 상황을 클라이막스에서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은 마지막으로 가면서 아쉬움을 주고, 힘이 조금 빠지게 만든다. 고무적인 것 하나를 꼽는다면 근대 한국의 역사 속에서 소설의 소재로 삼을 것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스릴러나 미스터리 걸작들에 비해 힘이 딸리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