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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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명의 시인과 21명의 철학자들이 만났다. 아니 강신주라는 철학자를 통해 짝짓기가 이루어졌다. 저자는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이란 부제에서 알려주듯이 난해한 현대 철학을 역시 난해한 시를 통해 풀어낸다. 한 편의 시와 그 해석을 한 철학자의 철학으로 풀어서 설명할 때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감탄하게 된다. 그것은 그 설명이 쉽고 친절한 것도 있지만 시를 통해 만나게 되는 철학자들의 사유와 세계가 새롭고 신선하면서 낯익은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21명의 시와 시인들 중 낯선 시인도 몇몇 있다. 거기에 비하면 철학자들은 낯선 사람이 더 많다. 워낙 유명한 시인과 철학자들이야 상식처럼 알고 있지만 그의 철학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 그 자체다. 그런데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다양한 철학과 철학자들을 만났다. 그 만남은 나의 사유 세계를 넓혀주고 깊게 만들었다. 읽으면서 감탄을 하기도 하고, 새로운 해석과 깨달음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의 생각과 엇갈린 부분에서 갸우뚱하기도 했다. 이런 다양한 충동과 흡수와 관찰은 관심이 있었지만 어렵고 난해하다는 이유만으로 멀리했던 그 학문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21편의 시와 철학자를 모두 말하는 것은 나의 능력 밖이다. 그 중에서 몇몇만 추려보자. 이들은 시의 주관적이고 낯선 이미지들이나 철학의 이해하기 힘든 추상적 용어를 깨고 나에게 다가온 것들이다. 동시에 갇혀 있던 이미지와 관념들이 산산조각 나고 삶속으로 조용히 파고들었다. 낯설기만 했던 시와 철학이 나에게 조용히 속삭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모든 시와 철학이 그랬다면 정말 좋겠지만 강한 울음으로 다가온 것은 몇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작가의 말처럼 의지의 문제일 수도 있다.

20대에 만났고 즐겼던 두 시인 박노해와 기형도의 글을 통해 추억과 기억을 새롭게 만들면서 문을 가볍게 열었다. 이때만 해도 기억을 더듬고 가볍게 나아간 정도다. 그런데 김남주 시인의 시가 아렌트의 철학과 만나면서 기존의 가치관들이 산산조각 난다. 근면, 정직, 성실, 공정, 충성, 봉사 등의 전통적인 덕목들이 무사유를 거치면 어떤 형태로 발전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나치 시대의 아이히만인데 그가 수행한 유대인 학살이 광기나 악의 때문이 아니라 관료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근면성과 성실성과 그 일이 끼칠 영향이나 그 사람들의 처지를 전혀 반성하지도 성찰하지도 않은 무사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권위니 명령이니 하는 것에 쉽게 굴복하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수많은 행위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지배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이런 가치관을 강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마주침과 관계를 지나 너무나도 인간적인 에로티즘에 살짝 발을 담군 후 유하의 시에서 욕망의 현장을 다시 만난다. 내가 겪고 만나고 경험했던 삶들이 다가온다. 그러다 다시 김수영의 시에서 왜 4.19혁명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되고, 다시 이것은 80년대 6.29선언으로 이어진다. 조그마한 성취가 주는 낭만에 취해 진정한 싸움을 중도에서 멈춘 우리의 현실이 느껴진다. 80년대를 뒤흔든 도종환 시인의 시를 그쳐 인식론으로 다가왔던 김춘수 시인을 만나고, 사놓고 아직도 읽지 못한 최영미와 사르트르의 세계를 살짝 들여다본다. 그 당시 시인의 평가를 시대 속에서 풀어내는 저자의 글에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일상과 비극을 담아낸 최명란 시인의 시에선 부끄러움을 느끼고 동시에 삶의 현실이 다가온다. 누군가에게 엄청난 비극이자 절망이 부외자에겐 한순간의 감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그 처참한 아우슈비츠가 이성과 합리성 때문에 발생했다고 하는 순간 놀라게 된다. 광기나 비정상 때문이 아니라니 말이다. 이 현실은 동일성의 사유에서 비롯하는데 아도르노는 개별적인 것이나 비개념적인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다시 전체주의와 맞닿아 있다. 쉽게 표현하면 어떤 나라에서 전쟁으로 몇 명이 죽었다는 것보다 구체적인 누가 죽었다고 설명할 때 사람들에게 더 쉽고 진심으로 다가간다는 의미다. 
이후에도 한하운을 통해 배제된 자들의 울부짖음을 듣게 되고, 타인에게 이르려는 욕망을 마주하고, 다시금 난해한 이상의 시를 만난다. 황지우를 통해 사랑의 내적구조를 조금은 알게 되고, 호네트와 박찬일의 만남 속에서 다시 상호 인정과 자유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마지막에 만난 두 한국인은 이 책에서 가장 낯선 만남이다. 시인과 철학자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낯설다. 저자의 평가를 듣다보면 언젠가 반드시 공부해야 할 사람임에 틀림없다. 

책의 구성은 사실 간단하다. 한 편의 시를 내세우고, 시인을 말하면서 시를 해석한 후 철학자와의 만남을 주선한다. 그 철학자의 철학을 시를 통해 하나씩 풀어내는데 이 과정을 통해 철학과 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다. 이래서 얻게 되는 이해와 깨달음은 결국 삶으로 이어진다. 철학과 시가 각각 양 극단에 자리한 듯하지만 서로 통하는 점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예상보다 훨씬 쉽게 읽었다. 몇몇 철학에선 나의 삶과 마주침이 부족해 이해도가 떨어지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많은 재미와 즐거움을 준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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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해요 2010-03-23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읽었습니다.^^
 
신 결혼시대
왕하이링 지음, 홍순도 옮김 / 비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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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중국 소설을 자주 읽게 된다. 그 속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한국의 근대와 현대 삶을 본다. 도시에선 현대인의 삶을, 시골에선 근대화 이전의 삶을 말이다. 이것은 중국이 급속하게 현대화가 이루어지면서 두 지역 간의 격차가 심하게 벌어진 탓도 있다.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고 하지만 은연중에 계속되던 전통문화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전통의 가치관과 현대의 가치관이 충돌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작가는 바로 여기에 시선을 두고, 남녀의 사랑과 결혼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세밀하게 관찰한다. 

어릴 때 결혼은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 순수했던 마음이 세상의 시선과 힘겨움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아니 알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단순하게 생각하고, 자신들만 쳐다본 것은 당연하다. 자기들의 사랑만 있으면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가볍게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자신한 것이다. 현실은 다르다. 제일 먼저 문제되는 경제력부터 시작하여 두 집안 문제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물론 그들이 두 집안을 떠나 둘만 살아간다면 가족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가족을 떠나서 생활할 수 없고, 그 가족들에게 묶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도시여자 샤오시와 시골남자 젠궈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부자는 아니지만 지식인 가족인 샤오시의 어머니가 젠궈와의 결혼을 반대한 것은 두 집안의 차이 때문이다. 경제력 문제도 있지만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자란 것을 염려한 때문이다. 사랑에 불탔던 두 연인에게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둘은 결혼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진다. 그것은 바로 서로 다른 두 문화가 충돌하면서부터다. 도시여자 샤오시를 자신들의 문화 속에 넣고 부리고자 했던 시골남자 젠궈의 아버지 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샤오시가 이성을 앞세워 논리의 허울을 지닌 감정을 내세운다면 젠궈는 체면으로 대변되는 감정을 앞세운다. 둘만의 결혼임을 상기시키고, 젠궈의 고향에 가지 않으려는 그녀와 결혼 후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그녀를 데리고 가서 그 동네 사람에게 체면을 세우려는 젠궈가 충돌한다. 결국 그녀가 그곳에 가지만 유산이란 나쁜 결과만 나을 뿐이다. 이후 이 둘 사이에 빈틈이 생긴다. 그러다 다시 임신을 하지만 역시 유산된다. 이 사고와 젠궈 아버지의 무리한 요구는 부부를 싸우고 대립하게 만든다. 작가는 이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그 감정을 솔직하고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 부부가 사랑하지만 현실의 벽에서 괴로워하고 충돌한다면 그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는 인물은 바로 젠궈의 아버지다. 두 아들 중 한 명만 대학에 보냈고, 나머지 한 명이 고생한 것을 기억하는 그가 선택한 것은 대학 간 아들에게 보상을 받는 것이다. 그 보상을 통해 젠궈의 형에게 보상해주려고 한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갈등과 오해와 충돌이 생긴다. 자신들의 경제 능력을 초과하는 요구도 받아들이는 젠궈의 모습에 아내가 화났다. 젠궈는 이성적 판단보다 순순히 예 라고 말하면서 순응하는 길을 선택한다. 이런 반응은 단순히 형 대신 대학에 왔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숨겨져 있다. 그가 뒤에 밝히는 사실은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하였고, 그가 아직도 전통적 가치관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젠궈의 아버지가 샤오시의 어머니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보여주는 무례함은 호가호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 장면은 나중에 젠궈의 형 취직과 관련하여 형의 상사에게 보여주는 비굴한 모습과 묘하게 대조를 이룬다. 후반으로 가면서 아버지가 보여주는 걱정과 근심은 강한 부정을 보여주는데 이 속엔 이기적인 마음이 강하게 깔려있다. 이것은 또한 샤오시의 아버지가 보여주는 이성적인 판단과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그 또한 아들 샤오항이 젠자와 결혼하겠다고 할 때 보여준 반대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아버지임을 드러낸다. 이성과 논리가 자신의 유리함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 샤오시와 젠궈, 대부호의 애인이었던 젠자와 연하남 샤오항, 젠자를 못 잊는 류카이루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가족들의 모습은 결혼이 사랑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두 집안의 문제인 동시에 두 문화의 충돌임을 보여준다. 하나가 오면 다른 하나가 가야 하는 계산적인 모습이 보이는 것도 현실이다. 물론 젠궈의 아버지처럼 터무니없는 것 같은 요구를 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의 근대와 현대가 그대로 표현된 듯한 모습에선 추억이 떠오르고, 결혼이 환상이 아닌 현실임을 돌아보게 된다. 결코 적은 분량이 아닌 이 소설 속에서 결혼과 사랑이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 잘 알려준다. 혹시 주변에 이런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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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의 살림집 - 근대 이후 서민들의 살림집 이야기
노익상 / 청어람미디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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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시간 내어 찾아가서 보는 집은 문화유산이거나 화려한 집들이다. 일반 서민들 입장에서 보면 그런 집에 산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집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극히 소수의 사람들뿐이다. 그럼 대부분의 서민들은 어디에 살았을까? 작가는 이런 자료가 없거나 부족함을 알게 되었고, 긴 시간을 들여 이렇게 가난한 우리 서민들의 살림집을 글과 사진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속에서 만나는 집 중 몇몇은 이름조차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집들이다.

모두 열한 집이 나온다. 그 중에서 분교와 간이역을 제외하면 모두 아홉 곳이다. 외주물집, 외딴집, 독가촌, 차부집, 여인숙, 막살이집, 미관주택, 시민아파트, 문화주택 등이다. 처음에 외주물집을 보고 읽으면서부터 낯설다. 분명히 어린 시절 주변에서 많이 본 집들인데 이렇게 불린다는 것을 안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작가가 긴 세월을 통해 만난 사람들과 그들이 살았고 살아가는 집과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 속에서 작가를 통해 보는 삶은 깊은 감정이입을 배제하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위치에서 본 내용들이다. 그렇다고 그 세부적인 상황이나 현실이 그냥 묻혀버린 것은 아니다.

한국 곳곳을 다니면서 만난 사람들과 집들은 한 장의 사진으로 몇 장의 글로 다시 살아났다. 하지만 그 집들과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과 시대의 요청에 의해 점점 없어지거나 사라졌다. 근대 이후 이런 집들이 왜,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되었는지를 시대 속에서 보게 되면 가슴이 아린다. 단순히 보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대의 요구와 농경문화의 특징 속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는 모습은 낯선 풍경이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놀이와 문화가 생전 처음 듣고 본 것이란 독가촌의 경험을 듣는 순간 어리둥절함과 굳건하게 뿌리내린 상식의 벽이 무너진다. 

정겹고 그리운 풍경으로 이제 변한 분교와 간이역의 다른 역할을 알게 될 때는 시대가 만들어낸 아픔이 느껴지고, 분단 조국의 현실을 깨닫게 된다. 군사독재 속에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미관주택 이야기 속에선 평양의 거짓 건물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도시의 흉물로 변한 시민아파트의 역사는 졸속 행정이 만들어낸 산물임을 다시금 인식하게 되고, 문화주택이 어떻게 개량 한옥과 다른가 하는 의문이 생길 때는 나의 개량한옥에 대한 이유 없는 선호가 살짝 부끄러워진다.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집만 보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을 잊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저런 곳에서 살 수 있지? 하는 의문이 생기지만 실제 그 속에선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반대로 저런 곳에 살면 걱정이 없겠다고 하지만 그들도 고민하고 걱정하면서 사는 사람이다. 현대화 물결 속에서 개인의 생활 보장이 점점 중요해지는 요즘 외주물집의 노출된 환경은 옛날 이웃 사촌간의 관계와는 분명히 다르다. 외딴집의 외로움은 사진 속의 개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작가가 차부집에서 먹은 라면의 추억은 입가에 침이 고이고, 옛날 큰아버지 집을 생각나게 한다. 막살이집은 어릴 때 길 하나를 두고 살던 아이들이 눈가에 아른거리고, 철없던 그 시절이 그리움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든다.

사진이 많은 책이라 단숨에 읽으려고 했다. 실제로 하루 만에 읽었다. 하지만 읽으면서 점점 무거워지는 마음과 되살아나는 추억과 기억들이 나를 즐겁게 만들기보다 괴롭혔다. 한 장의 사진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감탄하다가도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의 사연으로 잊고 있던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이제는 볼 수 없는 풍경과 집들은 그리움을 불러오고, 무표정하거나 환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의 모습에선 추억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집의 변화를 풀어내고, 그 역기능뿐만 아니라 장점도 같이 다루는 작가의 시각에선 한 수 이상 배우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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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잠들지 않는다 - 제4회 대한민국 디지털작가상 수상작
양지현 지음 / 노블마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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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디지털작가상 대상 수상작이다. 사실 이 상에 대해 잘 모른다. 요즘 너무 많은 문학상이 있어 몇 개의 상을 제외하곤 신뢰도가 떨어진다. 그러다 이 작가의 이력을 보면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세계에 매료되었다는 말과 그 흔한 주례사 비평에 빠져들게 되었다. 책을 들고 대충 넘겨보면서 시간을 가늠해 봤다. 얼마 걸릴 것 같지 않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펼쳐들고 읽었다. 역시 엄청나게 빠르게 쪽수가 넘어간다. 많지 않은 분량임을 감안하더라도 간략한 구성과 인물로 이야기들의 곁가지를 잘 쳐내었다. 지금 문득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이 생각나는데 이 작가도 단편을 쓰면 잘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어떨지?

고등학교 동창생들의 산행이 있은 다음 날 현직 수학선생인 박종혁의 두 친구 준석과 인호가 죽는다. 준석은 강도 살인사건으로 추정되고, 인호는 자살로 결론이 난다. 그런데 준석의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 안창모가 현장에서 이질감을 느낀다. 피살자도 낯익다. 그의 고등학교 1년 선배다. 안 형사는 단순 강도 살인사건이 아니라고 직감한다. 그때 듣게 되는 종혁과 인호의 이름은 과거 기억 속으로 그를 데리고 간다. 유난히 친했던 세 명 중 두 명이 같은 날 죽고, 남은 한 명이 자신의 좋지 않은 기억과 엮이면서 그냥 덮일 수 있는 사건을 더 깊이 파헤치고 싶은 욕망으로 변한다.

작가는 이야기의 잔가지를 최대한 없앴다.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의 특징을 그대로 따라했다. 사건 관계자에 집중하고, 그 중심만 건드린다. 사건과 관계없는 인물이나 사실은 최대한 배제하고, 그 속에서 단서와 동기를 제공한다. 그러니 속도감에 밀려 대충 읽지 않으면 작가가 흘려놓은 단서와 동기 찾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 부분은 어떻게 보면 탁월한 구성일 수도 있지만 트릭이나 반전을 생각한다면 안일한 방법일 수도 있다. 

트릭을 풀거나 동기를 찾거나 범인을 잡는 것보다 눈길을 끈 것이 있다. 그것은 안 형사의 수사다. 개인적인 과거 원한관계에서 시작하여 자신의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이 무너지지만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는 그를 보면서 인간적으로 느꼈다. 단서가 하나씩 나오고, 박종혁이 범인이 아님이 분명한 순간에도 결코 의심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조사하고, 실패하고, 추리하고, 조사하는 반복 속에서 그가 진실에 다가간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 있지만 결코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다만 작가가 너무 단순하고 쉽게 이 과정을 처리하여 긴장감이 조금 부족한 것이 흠일 뿐이다.

제목에서 알려주듯이 기억은 이 소설에서 중요한 소재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기억이 서로 엇갈리고, 잊어버린 기억과 결코 잠들지 않는 기억이 충돌한다. 열정을 품고 있지만 십 수 년 동안 고백을 못하고 있는 종혁은 이런 관계 속에서도 가장 중심에 서 있다. 거짓이 드러나고 사실이 밝혀질 때 살짝 흘려 놓았던 단서가 무릎을 치게 해야 하는데 이 부분이 조금 약하다. 너무 쉽게 흘린 탓이다. 물론 앞에서 이상하다고 느낀 부분이 분명하게 해명되는 순간도 있다. 해설자의 설명이 없는 야구 중계 속에서 직구만 던지는 투수 같다고 해야 하나! 길지 않은 텔레비전 미스터리 드라마로 만든다면 딱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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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동전
이서규 지음 / 창해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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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도 전에 발행된 1달러 은화가 과연 어떤 비밀을 담고 있을까? 단순히 제목만 보면 동전이 특이한 의미를 지녀야 하는데 이 소설 속 은화는 백 년 전에 통용되던 실제 은화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의문이 생긴다. 왜 악마란 단어를 앞에 붙였을까, 하고 말이다. 작가는 한 종합병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통해 현재가 아닌 과거 속으로 들어가고, 그 과거를 현재와 연결시켜 호기심을 불러온다. 왜 악마의 동전이라고 부르고, 누가 죽였으며, 과연 그녀는 악마에 쓰인 것인지 말이다.

첫 장면은 국과수 부검실이다. 주인공 조인철 앞에서 죽은 남자의 부검이 실시된다. 검시관은 인력 부족 등을 이유로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얼마 전 독일 연구소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그는 탐탁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돕는다. 메스가 시체를 가르는 순간 피분수가 솟구친다. 혹시 살아있는 사람은 아닐까 의문이 생긴다. 이 사고는 그를 며칠 전 기억 속으로 빠져들게 하고, 그 시체와 만나게 된 상황을 설명한다. 그를 찾는 방송을 듣고 이동하던 중 한 남자가 벌거벗고 그에게 쓰러지고 곧 죽는다. 바로 그때 그의 곁을 지나가던 한 남자가 피 목욕을 말한다. 섬뜩하고, 괴이하고, 의문투성이 상황이다.

외상이 전혀 없는 환자가 죽었고, 검시 중 피로 목욕할 정도니 사인이 궁금하다. 그런데 바로 그 상황을 예측한 사람이 있다. 대단하다. 그가 바로 이종성 신부다. 이 우연한 스침이 둘을 하나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콤비로 만든다. 이 콤비는 홈즈와 왓슨 같은 관계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사실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조합이다. 그리고 이 신부의 과거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의사 출신에 베트남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그 경력 때문에 피 목욕을 예견한 것이다. 하지만 왠지 이 상황을 복기할수록 어색함이 가시지 않는다. 스쳐지나가면서 본 것으로 다음에 벌어질 일을 예상한 것도 이상하고 그것을 이해한다고 해도 그 반응이 너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치밀함이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역사 속에서 쉽게 생각하지 못한 내용을 소재로 썼다. 육이오와 한국은행을 연결시키다니 아주 기발한 착상이다. 무리하게 억지로 끼워 맞춘 설정이 아니라 그 시대의 분위기와 상황을 충분히 조사하여 쓴 것이다. 현재의 사건들이 과거를 계속 파헤치게 만들고, 하나씩 사실이 드러나면서 범인의 윤곽이 뚜렷해진다. 이런 과거 속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김형오란 인물이다. 혁명의 이름으로 그가 저지른 만행이 밝혀질 때와 동전 때문에 일어나는 알 수 없는 현상들이 겹쳐지면서 악마의 실체가 살짝 보이는 것 같다. 

한 남자의 죽음과 한 여자의 알 수 없는 증상에서 시작하여 동전을 둘러싼 비밀이 과거 속으로 빠져드는 과정이 상당히 매끄럽다. 이런 진행은 빠르게 책을 읽게 만든다. 하지만 세부적인 묘사로 들어가면 억지스런 부분들이 보인다. 충분히 중심에서 조인철과 함께 나아가야 할 신부가 뒤로 가면서 비중이 줄어드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고 수진의 증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괴이하고 섬뜩한 상황을 클라이막스에서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은 마지막으로 가면서 아쉬움을 주고, 힘이 조금 빠지게 만든다. 고무적인 것 하나를 꼽는다면 근대 한국의 역사 속에서 소설의 소재로 삼을 것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스릴러나 미스터리 걸작들에 비해 힘이 딸리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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