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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 1
R. F. 쿠앙 지음, 이재경 옮김 / 문학사상 / 2025년 8월
평점 :
재밌게 읽었던 <옐로페이스>의 작가다.
이 책 이전에 <양귀비 전쟁>이 먼저 출간되었다. 이 책은 읽지 않았다.
한 작품을 재밌게 읽은 기억은 다른 소설에도 관심을 가지게 한다.
그리고 이전 소설의 기억들 중 일부가 이번 책을 읽으면서 살아났다.
단순히 제목과 SF소설이란 설정만 놓고 보면 고대를 다룰 것 같다.
하지만 작가는 19세기 초 영국을 무대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바벨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던 그 바벨이 아니다.
옥스퍼드 대학에 있던 왕립번역원이다.
물론 이 바벨은 8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탑 구조물이다.
중국 광동의 한 거리를 영국인이 걷는다.
콜레라에 걸려 죽기 직전의 중국 아이를 은막대와 주문으로 살려낸다.
이 영국인은 리처드 러벌 교수이자 바벨의 교수다.
러벌 교수는 아이의 엄마는 두고, 아이만 데리고 나온다.
아이의 영어 실력을 검사하고, 아이의 체력이 돌아오길 기다린다.
그리고 체력이 회복 소년을 데리고 런던으로 온다.
이때 소년에게 자신의 이름을 지으라고 하는데 로빈 스위프트로 정한다.
런던에서 로빈이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라틴어 등을 공부시킨다.
한 번 소설에 빠져 수업시간에 늦었을 때 러벌은 아이를 마구 때린다.
이 판타지 소설은 기존의 스팀펑크와 다른 방식으로 운영된다.
은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실버워크가 삶과 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실버워크는 은막대에 특정한 글자를 새기고 말하면서 효과가 발생한다.
로빈을 살린 은막대도 의료용이었다.
이런 마법 같은 효과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단어들을 찾는다.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을 넘어 동양의 언어까지 연구한다.
러벌 교수는 중국 만다린어 전공이고, 로빈을 데리고 온 이유도 이 언어를 연구하기 위해서다.
로빈은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아주 열심히 공부한다.
만약 대학에 가지 못하면 영국에서 추방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다.
은산업혁명은 영국을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하게 한다.
우리가 알고 있던 대영제국의 모습은 그대로 두고, 발전 동력을 다른 것으로 했다.
새로운 단어를 발굴하고, 이 단어를 은막대에 새기면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바벨은 이런 작업을 하는 최고의 장소이자 연구원이다.
로빈을 비롯한 네 명의 남녀 청춘들이 바벨의 학생으로 입학한다.
인도인 라미, 아이티 출신의 빅투아르, 영국 해군 제독의 딸 레티 등이 동급생이다.
라미와는 같은 동양인으로 겪은 경험 등으로 첫날부터 친해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레티와 빅투아르도 최고의 친구가 된다.
이들의 열정과 청춘, 학문적 관심 등은 묵직하게 흘러간다.
작가는 한 단어의 어원을 파고들고, 연관어를 설명한다.
이 작업은 실버워크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연구다.
실버워크는 건설, 교통, 상하수도, 가로등, 증기선 등 모든 분야에서 사용한다.
은막대에 무형(無形)을 새기고, 우싱을 외치면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어느 날 로빈이 자신의 도플갱어라고 생각한 외복형을 만나는 순간이 이때다.
너무나도 닮은 얼굴의 이복형은 그리핀 러벌이고, 옥스퍼드 출신이다.
하지만 그는 죽은 것으로 치부되었고, 그를 통해 로빈은 현실을 깨닫는다.
그리핀이 소속된 비밀조직의 이름은 헤르메스 협회이다.
그리핀은 로빈에게 자신의 조직을 도와줄 것을 요청한다.
바벨에서 공부하는 로빈을 비롯한 네 명의 학생은 부족함이 없다.
학비는 공짜, 적지 않은 생활비가 지원된다.
4학년이 되어 실버워크를 배우면 1등석을 타고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번역사가 되어 외교 현장에서 일하거나 바벨에서 연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학교 수업은 결코 쉽지 않고, 성적이 떨어지면 바벨 밖으로 밀려난다.
치열하게 공부하고, 노력하는 이들을 보면 대학을 다룬 소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바벨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피를 뽑아 병에 담아두어야 만한다.
이 보안 조치 때문에 그리핀은 로빈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 도움이 로빈의 불안과 미래에 두려움을 불러온다.
사실과 상상을 뒤섞어 만들어낸 세계.
그 속에 담긴 실체적인 사실들은 제국주의의 본질을 건드린다.
외교 문서나 무역거래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숨기기도 한다.
그리고 새로운 외국 단어를 발굴해 실버워크에 적용해 제국의 위치를 굳건하게 한다.
바벨의 역할은 단순히 번역이나 실버워크 개발이 아닌 식민주의 확대를 위한 것이다.
백인 영국인이 아닌 다른 피부색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받는 교육과 장학금 등에 빠져 식민지 개척의 최전선에 선다.
진짜 역사와 교차하면서 풀어내는 가공의 역사는 어디서 변곡점을 만들까?
저자의 일러두기가 먼저 나온 것은 독자들의 괜한 트집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장치다.
이 글을 읽으면서 <옐로우 페이스> 속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