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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완벽한 하루
채민 글.그림 / 창비 / 2010년 1월
평점 :
시를 자주 읽지는 않는다. 한때 시집을 몇 권 열심히 읽은 적이 있지만 함축적인 글들과 그 이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힘들었다. 어쩌면 학교 교육을 통해 시를 접했기에 해석과 상징에 너무 집착했는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시는 나에게 어려운 것이 되었다. 그렇지만 어느 날 문득 한 권의 시집에서 나도 모르게 감탄하는 시구를 발견하고, 다시 시로 돌아온다. 삶의 깊이와 폭이 넓어지면서 공감하는 부분이 늘어난 덕분이다. 그러다 시를 바탕으로 그린 만화가 있다는 소개 글을 보았다. 옳거니. 무릎을 친다. 좋아하는 만화와 어려운 시의 만남이라면 시에 대한 이해를 높여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빠르지 않은 서른이란 나이에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 어떤 일에도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그녀가 이 작업에 빠진 것이다. 그녀의 작업 방식은 이야기를 만들어놓고 그 이야기에 어울리는 시를 찾고, 다시 그 시에서 소스를 얻어 구슬을 꿰듯 완성한 것이다. 그래서 만화를 보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읽고, 시구를 음미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앞에 나오는 시를 다시 몇 번이고 읽게 된다. 작가가 해석한 시와 내가 이해하는 시의 접점을 찾기 위해서다. 이렇게 접점을 찾으면 고개를 끄덕이지만 찾지 못하면 다시 시를 읽게 된다. 내가 놓친 부분이나 제대로 읽지 않은 부분이 있나 하고 말이다.
모두 다섯 파트, 아홉 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한 파트에 두 이야기가 담겨 있고, 그 이야기 속 인물들은 짧은 순간 만나거나 대화를 나눈다. 첫 파트에서 이 부분을 보았을 때 혹시 연작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다음 파트에서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 한 파트 속에 둘을 묶은 것이다. 그런데 각 파트 속 인물들이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어둡고 힘겹고 지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우리 주변에서 늘 만나고 이야기하고 그냥 스쳐지나간 사람들이다. 작가가 낮은 곳에서 세심하게 관찰하고 느낀 부분들이 그들을 통해 하나의 그림 이야기로 나타난다.
아홉 편의 시 중 내가 읽었던 것은 거의 없다. 이전에 좋아했던 시인 한 명과 너무 유명해서 읽었던 시인 두셋을 제외하면 대부분 낯설다. 최근에 그 이름을 알고 읽어야지 생각한 시인도 몇 보인다. 하지만 이런 것보다 그들의 시를 통해, 만화가의 눈과 마음을 통해 본 삶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건조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고, 그리워하고, 잘못된 삶을 살고, 가볍게 잊은 듯하고,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민하고,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마지막 순간 미련을 품지만 이미 늦었다.
아홉 이야기는 금방 넘어간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그들의 삶은 오랫동안 남는다. 그녀와 그 속에서 나의 삶 한 자락을 발견하고, 비루한 나를 돌아본다.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삶의 무거움 속에서도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 그 위대한 힘에 놀란다. 정작 자살을 결심한 사람의 미련이 좋아하던 커피 한 잔이란 소박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한다. 이 만화의 매력은 바로 느끼고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시를 몰라도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작가가 보여주는 이야기 속에서 내가 뭔가를 느끼면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다시 시를 펼쳐들고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