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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기둥 1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5
켄 폴릿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평점 :
대단한 책이다. 대성당 건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과 음모와 사랑이 끊임없이 사람을 끌어당긴다. 왜 지금 이 책을 읽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예전에 다른 출판사에서 이 소설이 출간되었을 때나 헌책방에서 이 책을 보았을 때 충분히 살 수 있었는데 말이다. 물론 그때는 지금처럼 책을 많이 읽을 때도 아니고, 시간도 없었고, 충분한 정보도 부족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누군가가 칭찬을 했다면 얇은 귀를 가진 내가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아쉬움이 강한 것은 바로 이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가 대단하기 때문이다.
1123년 영국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모두 6부로 구성되어 있고, 1174년에 이야기가 끝난다. 무려 50년이 넘는 시간을 다루고 있다. 쪽수로는 거의 1600쪽에 달한다. 하지만 이 분량이 결코 지루하지 않다. 일과 피곤함에 잠시 지칠 때도 있었지만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고, 해결될 때면 멈출 수가 없어 그냥 읽었다. 뒤로 가면서 잠깐 멈추려고 했지만 가속도가 붙은 책읽기는 끝장을 봐야만 했다. 앉은 자리에서 물과 커피를 들이키면서 장대한 이야기의 마지막을 보았고, 이 소설의 다음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출간을 기다린다. 그리고 왜 이 책에 대해 그렇게 많은 호평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대하역사소설로 분류할 수 있을 텐데 분량에 비해 많은 사람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중심이 되는 인물은 잭, 앨리에너, 필립 수도원장, 톰, 윌리엄 등이다. 초반 이야기는 필립 수도원장과 톰과 윌리엄 중심이다. 필립 수도원장은 우연히 방문한 킹스브리지의 수도원장이 되는데 이 과정이 결코 깔끔하지 않다. 이 때문에 다른 문제가 생기고, 이 문제들은 그의 적수들이 최후를 맞이할 때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필립 수사가 보여주는 견고한 도덕심과 관대함은 음모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강한 믿음과 날카로운 상황인식 등으로 역공을 펼쳐 적들을 떨쳐낸다.
석공 톰은 중반까지 필립 수사와 함께 이야기를 끌고 간다. 이 과정에 그가 겪게 되는 고난과 역경은 대단하다. 범법자 때문에 유일한 재산인 돼지를 도둑맞고 가난과 굶주림 때문에 길에서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그 아이마저 키울 자신이 없어 버린다. 물론 금방 아이를 찾으러 가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이는 지나가던 수사의 손에 구해지고, 필립 수사에게 넘겨져 수도원에서 자란다. 그리고 그의 삶에서 또 다른 행복을 준 엘렌을 만난다. 이 만남이 그에게 힘겨운 일도 안겨주었지만 지쳐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던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역할을 한다. 그가 자신의 아들 앨프레드와 엘렌의 아들 잭의 대립을 단순히 아이들 문제로 인식하는 것은 나중에 큰 문제로 발전하게 만든다.
엘렌의 아들이자 첫 장면에서 교수형을 당한 프랑스 인의 아들인 잭은 성장하면서 점점 중심인물로 변한다. 그냥 조금 똑똑한 야생의 소년에서 한 가족의 가장이자 대성당 건설책임자로 점점 성장한다. 이 성장이 결코 평탄하지 않는데 그가 겪게 되는 고난과 어려움과 사랑은 필립 수도원장의 그것과 더불어 잠시도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순수한 마음에서 저지른 잘못이 엄청난 문제를 낳고, 그 후 발생한 문제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진다. 이것은 그의 아버지 교수형에 대한 진실과 함께 끊임없이 의문을 가지고 다음을 예상하고 추리하게 만든다. 엘리에너와의 사랑은 순수, 열정,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엘리에너는 셔링 백작의 딸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악당인 윌리엄을 청혼을 거절한 대가로 모든 것을 잃는 여자다. 물론 단순히 청혼을 거절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반역을 계획했고, 이 정보를 가진 사람들의 야망이 거대했기 때문이다. 역모로 아버지가 잡혀가고, 그녀는 윌리엄에게 강간을 당한다. 이 사건은 그녀로 하여금 집을 떠나 세상 속으로 나가게 만든다. 온실 속 화초 같았던 그녀가 거친 세상 속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과 성공과 사랑은 이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여주인공임을 보여준다. 물론 엘렌도 있지만 그녀의 비중은 톰이나 잭의 보조에 그치고 만다. 시대의 한계를 넘나드는 모습은 재미와 아쉬움을 동시에 준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악당은 윌리엄이다. 그의 사랑이 집착으로 폭력적인 강간으로 변하고, 난폭하고 가혹하고 폭력적인 통치는 선한 인물들 속에 지속적으로 긴장감을 불러온다. 필립 수도원장과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중심인물로서 이야기를 끌고 간다. 폭력적이지만 날카로운 분석력과 이해력은 그의 뒤틀린 성격 때문에 무너질 것 같은 현실에서 그를 여러 번 구해준다. 이 악당의 최후는 읽는 내내 관심의 대상이었고, 그 시대가 지닌 모순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어머니와 웨일런 주교의 도움으로 채우고, 조금도 주저함이 없는 폭력은 그의 적들로 하여금 공포와 무력감에 빠지게 만든다.
중세라는 시대적 배경 탓인지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서로가 엮여 있다. 엘리에너 아버지가 윌리엄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게 된 것이 필립 수사가 전한 소식 때문이다. 엘리에너의 청혼 거절도 하나의 원인이 된다. 이 거절로 석공 톰이 일을 잃고 아내를 떠나보내게 된다. 그의 방랑은 엘렌과 잭을 만나게 한다. 필립 수도원장의 도움으로 톰과 엘리에너가 정착을 하고, 그의 도덕적 순수함과 고집이 이 두 사람의 사랑을 힘들게 만든다. 이렇게 서로 엮인 관계는 밀고 당기고 용서하고 고민하고 맹세하게 만들면서 이야기를 재미나게 만들어간다. 그 시대 사람들의 세부적인 이야기와 현장감은 머릿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그림을 그리게 한다. 사실적인 액션은 긴장감을 불러오고, 열정적인 사랑은 가슴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한다. 폭력과 탐욕과 음모는 분노를 자아내고, 용서와 헌신은 가슴 한 곳을 울리게 만든다. 드라마가 있다니 언젠가 꼭 한 번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