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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를 사랑하는 방법
헤일리 태너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5년 6월
평점 :
한 소년이 있다. 소년의 이름은 바츨라프, 그는 후디니처럼 위대한 마술가가 되길 꿈꾼다. 한 소녀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레나, 그녀는 황금빛 비키니를 입고 마술가의 도우미가 되길 바란다. 이 둘은 모두 러시아 이민자 2세대다. 작가는 차분하게 이 소년 소녀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요즘같이 인스턴트 사랑이 넘쳐나는 시대에 운명 같은 사랑을 한다. 그냥 함께 자랐다고 이어지는 사랑이 아닌 떨어져 있어도 매일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누는 그런 사랑을 한다. 비현실적이라 약간의 거부감이 생기지만 그들의 사랑은 보는 내내 아슬아슬하고 영원히 함께 하길 바라게 된다.
러시아 이민 세대의 삶을 잘 알지 못한다. 이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삶은 우리의 이민자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바츨라프의 엄마와 아빠가 보여주는 일상에서는 필요한 정도 이상으로 미국 사회에 동화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위성방송으로 러시아 방송을 보는 아빠는 말할 것 없고, 레나가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교정해주는 엄마조차도 자신의 의식과 생활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이 이민자로서의 삶을 벗어던지기에는 너무나도 무력하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코리아타운이나 차이나타운에서 영어를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을 생각하면 더욱 더 그렇다.
이민1세대들은 언제나 2세대가 미국인으로 살기를 바란다. 자신들의 영어 실력이 부족하다고 해도 더 열심히 공부하려고 하지 않지만 자식들에게 바라는 것은 다르다. 레나의 예에서 잘 드러난다. 하지만 여기서 세대 간의 갈등이 빚어진다. 미국인으로 자라길 바라면서 러시아인이길 바라는 부모와 미국인으로만 살기를 바라는 자식 간의 갈등 말이다. 이 사이를 더 벌리는 것은 교육이다. 영어다. 살면서 접하게 되는 문화다. 엄마 라시아가 열 살이나 된 아들이 레나와 단 둘이 방에서 뭔가를 하는 것을 걱정하는 모습에서 세대 차이가 혹은 문화 차이가 나타난다. 읽으면서 그녀가 걱정하는 것이 아들일까 아니면 레나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바츨라프와 레나의 만남은 우연이자 운명이다. 레나는 어떤 할머니와 살다가 그녀가 죽으면서 이모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다섯 살이었다. 이모는 술집에서 일하고, 레나를 살갑게도 애정 가득하게 돌보지 않는다. 자신의 삶에 갑자기 불쑥 끼어든 짐으로 생각한다. 레나가 사는 집의 설명을 읽다보면 그것이 잘 드러난다. 그런데 이 소설 마지막에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것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현실의 무거움이 그녀를 바라는 대로 생활하지 못하게 만든 것일까? 하지만 이 때문에 레나는 라시아의 손을 잡고 바츨라프와 함께 놀이공원에 가게 된다. 그리고 키 때문에 놀이기구를 타지 못하게 되면서 마술공연을 보게 된다. 바츨라프 평생의 소원인 마술사 되기가 이때 생겼다.
이 소년 소녀의 사랑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가장 흥미로웠던 인물은 엄마 라시아다. 아들과 레나의 관계를 두려워하면서도 레나가 처한 환경을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한다. 매일 밤 레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잠을 재우고, 방을 청소하고, 보살핀다. 그녀가 레나를 아들에게 데리고 왔을 때 바란 것은 레나 이모와 친구처럼 만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레나 이모가 바란 것은 자신이 돌 볼 레나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는 것이었다. 레나에게 일어난 놀라운 사건을 칠 년이란 시간 동안 가슴에 품고 아들에게 알리지 않은 것도 이 둘의 사이를 알고, 아들이 아직 어렸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런 배려와 시간도 이 소년 소녀의 사랑을 막을 수 없었지만.
소녀는 탄생부터 그녀가 입양되기 전까지 한 번도 제대로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 라시아의 관심과 보살핌을 제외하면 그녀는 늘 방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영어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늘 불안과 배고픔에 시달렸다. 바츨라프 집에서 뭔가를 훔치는 것도 불안과 결핍에서 비롯한 것이다. 입양되어 간 집에서 사랑을 받았지만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라 늘 불안을 품고 산다. 강박증세가 보인다. 화장실에 앉아 불안과 걱정으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랑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지고 안정적인지 알게 된다. 그녀가 다시 바츨라프를 만나 자신의 부모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사랑을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것을 채워주는 사람이 바로 바츨라프다. 마지막 이야기는 읽으면서 이성과 감성이 끝없이 충돌하게 만들었다. 왜냐고? 읽으면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