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기행 - 깨달음이 있는 여행은 행복하다
정찬주 지음, 유동영.아일선 사진 / 작가정신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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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신자의 마음으로 쓴 기행문이다. 제목대로 불교의 흔적으로 좇아 그곳에서 느낀 불교의 깨달음과 감상을 적은 글이다. 저자는 한 번에 이 나라를 모두 돈 것이 아니다. 이 책에 나오는 다섯 나라는 각각 다른 시기에 돌았고, 불국이란 주제 아래 하나로 묶여 책으로 나왔다. 혹시 이 책에서 일상적인 여행 에세이를 기대했다면 결코 추천할 수 없다. 어떻게 여행지를 가고, 이동하는 방법이나 관광지나 여행지의 풍경과 감상을 풀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란 하나의 목적에 따라 움직인 여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목적을 알고 그것을 더 자세히 알고자 하는 독자라면 아주 유익한 책이 될 수도 있다. 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지만.

 

부탄에서 시작하여 중국 오대산으로 끝나는 여행기다. 비록 불국이란 목적으로 여행을 갔다고 해도 카메라를 통해 바라본 그곳의 풍경은 정말 아름답다. 보통의 여행 에세이에서도 보기 힘든 수준이다. 감탄을 자아낼 만큼 빛과 그림자가 잘 조화를 이루고, 색감이 뛰어나다. 유동영 작가의 노력과 실력이 한껏 드러난 것 같다. 표지의 사진이 책을 봤을 때 나를 강하게 끌어당겼는데 개인적으로 책 속에 실린 사진이 더 강렬하고 멋지다. 원본이 어느 것인지 궁금할 정도다. 멋진 풍경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유적과 유물을 찍은 사진은 글보다 더 강하게 가슴에 와 닿는 경우가 많다. 물론 사진에 대한 설명이 곁들여지면 더 좋다.

 

첫 불국인 부탄 이야기가 너무 강렬해서인지 뒤로 가면서 이야기의 힘이 조금 달린다. 첫눈이 오면 쉬고, 가난하지만 복지가 잘 되어 행복지수가 높은 그 나라의 모습이 우리의 현실과 너무 비교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관광객을 더 많이 받아 수입을 올리기보다 환경을 더 중시하는 나라, 왕이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은 나라인 부탄은 언젠가 한 번 가서 꼭 둘러보고 싶다. 이어서 나온 네팔은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다녀왔다. 얼마 전 예능에 나온 네팔과 비교하면 보여주는 장소와 사람들이 다른데 여행의 목적에 따라 그 시선이 머물고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힌두교와 불교가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지만 부와 계급에 따라 화장하는 수준이 다르다는 사실에는 불국이란 이름이 약간 무색하다. 뭐 한국도 마찬가지니 특별히 트집 잡을 것은 없지만.

 

남인도에서 가장 많이 신경을 쓴 것은 신라의 석탈해와 6촌장이다. 이곳으로 가는 도중에 영국 식민지 시절의 유산인 차밭이 나와 아픈 역사를 떠올려주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신라 역사의 한 자락을 바로 여기 남인도에서 찾고 연결하려는 노력이 문외한의 눈에는 약간 억지처럼 보인다. 물론 한 역사가의 연구와 노력의 결과물을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의 앎이 그곳까지 아직 닿지 않았다는 의미다. 아소카 왕이 등장하는 부분에서는 역사 시간에 배운 이름이 나와 반가웠다. 그러나 그가 실제 인도에서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계속해서 보여줄 때 이 이름이 지닌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했다. 그의 영향력은 한국까지 와 닿았고, 다음 불국인 스리랑카에까지 미친다.

 

스리랑카에서 한국 불교가 산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요즘 시내 곳곳에 불당이 들어서 있지만 아직 절은 산에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절은 여행을 가서 둘러보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서울 시내에 있는 조계사와 봉은사를 생각하면 오해지만 많은 절들이 산에 있다. 대표적인 절들이 어디 있는지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이곳에 와서 저자는 불교가 더 교세를 떨쳐야한다고 말한다. 기독교에 비해 선교활동이 적은 불교를 생각하면 맞는 말이지만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들까지 가세하면 조용한 삶이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우가 생긴다. 아닌가?

 

개인적으로 오대산과 사원의 풍경은 멋지고 친숙하지만 글 내용은 그렇게 깊이 와 닿지 않는다. 앞에서부터 이어져온 불교의 유적과 유물과 신앙이 가슴 한 곳에 계속 쌓이다보니 약간 반감이 생긴 모양이다. 유적과 유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와 좋지만 내가 이 책에서 기대한 것은 이런 내용이 아닌 그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 삶과 과거와 현실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순례와 답사 성격이 짙다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다. 부제인 ‘깨달음이 있는 여행은 행복하다’고 했는데 그 깨달음이 나에게 잘 전달된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그래서 더 깊이 몰입하지 못하고 뒤로 가면서 지루해졌는지 모른다. 저자가 너무 많은 역사와 사실들을 넣어서 설명하려고 한 것이 나에게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다. 아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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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의 분실물센터
브룩 데이비스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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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 소녀 밀리 버드는 어느 날 갑자기 쇼핑센터에 버려진다. 엄마가 기다리라고 했던 그곳에 머문다. 그녀는 하나의 기록장을 가지고 있다. 죽은 것들의 기록장이다. 어린 소녀에게 죽음은 낯설고 신기한 것이다. 기록장에 죽은 것을 하나씩 기록한다. 처음은 집에서 키우던 개였고, 밀리의 아빠는 스물여덟 번째다. 그녀가 쇼핑센터에 버려진 것도 아빠의 죽음 이후다. 엄마가 기다리라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쇼핑센터에 머문다. 며칠 동안이나. 정상적인 아이라면 울고 엄마를 찾아다녀야 하는데 그녀는 기다리라고 한 그곳에 숨고, 쇼핑센터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노인을 만난다. 터치 타이피스트 칼이다.

 

칼은 여든일곱 살이다. 사랑하는 아내 에비를 잃고 슬픔에 빠져 산다. 터치 타이피스트라는 말처럼 그는 말하기 전에 손가락으로 타이핑을 친다. 한 번 말을 순화하는 것이다. 그에게 아내 에비는 삶의 한 축이다. 그녀의 장례식에서 손가락이 다친 것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강한 절망에 빠졌기 때문이다. 삶의 의지가 사라진 그를 보고 며느리는 요양원에 보낸다. 요양원을 벗어난 그는 쇼핑센터에 머문다. 그곳에서 한 소녀를 만난다. 밀리 버드다. 밀리가 온 것은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고 먹을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칼은 노인은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존재를 이보다 더 무섭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애거서 팬서는 밀리의 길 건너편에 산다. 여든두 살이다. 남편이 죽은 후 집안에서만 살고 외출하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하나의 강박증세가 있다. 하루의 일과를 시간 단위로 기록하고, 자신의 노화를 확인하는 것이다. 밀리가 죽은 것들을 기록하는 것이나 칼이 타이핑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녀는 세상과 문을 닫았는데 창밖으로 몰래 보는 것은 멈추지 않는다. 자기 집을 가꿀 생각도 없다. 몇 년을 이렇게 보내다 한 소녀의 등장으로 인해 집밖으로 나온다. 바로 밀리다. 세상으로 나온 그녀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외치고 소리치면서 말하고 사람들과 동화되지 않는다. 이렇게 이 세 명은 밀리를 중심으로 모인다.

 

쇼핑센터에 머물면서 밀리가 쓴 문장이 하나 있다. ‘엄마, 나 여기 있어요.’ 표지에 수없이 반복되는 그 문장이다. 이 문장은 밀리가 엄마를 찾아 떠나는 여행 중에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자신이 여기 있다는 표시이자 엄마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다. 쇼핑센터에서도 밀리는 오랫동안 머물지 못한다. 자신이 저지른 것이 감시카메라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곳에서 만난 칼은 쇼핑센터 사람들이 아동성애자로 오해한다. 그가 데리고 다니는 마네킹은 다른 사람들에게 섹스용품으로 오해받는다. 조용하고 약간 여성적인 칼은 밀리와 함께 여행하면서 자신 속에 억눌려 있던 감정들이 폭발한다. 이것은 애거서도 마찬가지다. 셋이 모여 다니면서 좌중우돌 벌어지는 사건들은 이 감정들이 밖으로 터저 나오면서 생긴 일일 뿐이다.

 

흔히 노인들을 지혜로운 존재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칼이나 애거서는 지혜와는 거리가 멀다. 자신의 배우자에게 기대어 삶을 살았고,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억제했다. 그들을 보면 괴팍하고 낯설어 쉽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 밀리도 어린 아이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아 낯설다. 이 낯섦이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한다. 읽으면서 왜? 라는 의문부호를 달면서 다른 생각에 빠지기 때문이다. 억제된 욕망이 표출되고, 잊고자 했던 감정을 인정하면서 그들은 하나로 뭉친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들이 느낀 상실과 아픔이 가슴 깊이 와 닿지 않는다. 집중하지 못하고 딴 생각을 더 많이 했기 때문이다. 한두 개 중요한 이야기를 놓친 것이 더 심화시켰는지 모른다. 나에게 안타까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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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느 별에서
정호승 지음 / 열림원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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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에 처음 나온 후 몇 번의 개정판을 거친 작품이다. 개정을 하면서 열여덟 편의 산문을 추가했다고 한다. 이런 개정증보판을 최근에 그의 시선집이나 산문집에서 자주 보던 것이라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다. 전에도 쓴 글이지만 최근에 가장 많이 읽은 시인이자 산문집의 작가가 바로 시인 정호승이다. 개인적으로 그에게 열광하는 편이 아닌데 기회가 많이 닿았다. 오래 전에 산 시집 <서울의 예수>를 다시 한 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기억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 물론 언제 읽을지는 나 자신도 모른다. 읽지 않은 책들이 산처럼 쌓여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더욱.

 

최근에 시인들의 산문집이나 여행에세이에 손이 많이 간다. 아마도 김영하의 팟캐스트에서 시인의 감수성과 관찰력에 대한 예찬을 들은 후부터가 아닌가 생각한다. 실제로 읽으면서 몇 번 감탄한 적도 있다. 학창시절 국어선생님의 젊을 때는 에세이집보다 소설과 시집을 더 읽으라고 한 것에 영향을 받은 것과 비슷하다. 나의 귀는 얼마나 얇은가. 덕분에 소설을 더 열심히 읽었고, 잘 모르는 시집도 사서 이해도 못하면서 읽었었다. 지금도 시는 어렵고 힘들다. 가능하면 하루에 한 편은 꼭 읽으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하루 세 편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3분의 1로 줄었는데도 말이다.

 

이 산문집은 괜히 비판적으로 읽게 되었다. 사소한 트집 같은 것을 잡는데 그것은 나의 오독이나 보충설명이 곁들여진 것이 대부분이다. 첫 이야기인 ‘나를 먼저 용서합니다’를 읽으면서 베드로와 가롯 유다의 일화의 해석이 과연 용서의 문제인지, 아니면 용서는 피해자가 할 수 있는 것인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 속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부분이 생략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이렇게 그가 세상을 살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풀어낸 이야기 속에서 나의 뒤틀린 감성과 이성이 약간의 불만이나 트집을 잡는 경우가 있다. 실제 이런 경우는 얼마 되지 않지만 나와 살아온 방식도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다보니 이 몇 개가 부각되어 다가오는 모양이다.

 

이런 차이가 부각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은 그의 생각과 통찰이 더 가슴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조카의 파혼 소식에서 나온 이야기나 십자고상 등이 대표적이다. 나의 이성이 과학과 철학적 분석으로 그의 글을 나누다보니 그의 감수성과 감정의 깊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생긴 간극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사람에 대한 애정과 신과 어머니에 대한 사랑 등은 읽으면서 가슴 한 곳을 따뜻하게 만든다. 정채봉 작가와의 일화는 가슴이 먹먹했지만 부러운 마음도 생겼다. 이런 관계라면 누가 부러워하지 않을까 하고.

 

시인에 대한 두 글이 있는데 하나는 탈북 시인 장진성의 시집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를 리뷰한 글이고, 다른 한 편은 고 박정만 시인 이야기다. 탈북 시인의 시는 너무 직설적이라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삶을 사는 북한의 실상이 드러났다. 초근목피를 먹는 것으로 알고 쌀밥이 뭔지 모르는 아이들이나 쌀밥 먹었다는 것을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있는 현실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정호승 시인의 선배였던 고 박정만 시인이 필화로 고문을 받고 알코올 중독의 폐인이 되었고, 그 여파로 술로 그 고통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는 글에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얼마나 광범히 하게 퍼져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이 분단체제 아래 남북의 같은 민족들은 각각의 독재자들에 의해 엄청난 억압과 고통 아래 신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산문집에서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그리움과 추억과 사랑이다. 옛 추억이 곳곳에서 흘러나오고, 사람과 관계에 대한 그리움이 잔잔하게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사랑은 이 모든 것을 감싼 채 고요하게 다가온다. 비판적으로 읽었던 몇 가지 이야기도 있지만 시인의 삶과 철학이 녹아있는 이 책에서 나의 삶도 같이 되돌아보게 된다. 아직 나의 마음에 시인처럼 모든 것을 담을 그릇도 여유도 없어 이 산문집을 비판적으로 읽었는데 아마 나도 시인의 나이가 되면 이 세상과 사람들을 지금과 다르게 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고맙습니다’는 자주 사용하는데 ‘사랑합니다’는 많이 말하지 않는다. 이 말이 좀더 나올 수 있게 나 자신을 만들고 싶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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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편견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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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부터 2012년 5월까지 경향신문에 연재한 칼럼 중 겹치거나 마음에 흡족하지 못한 글을 가려낸 후 묶은 책이다. 처음에 이 책을 받고 펼쳤을 때만 해도 단숨에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착각이었다. 작가의 소설을 딱 한 편 읽었는데 그때도 상당히 힘겹게 읽은 기억이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랐다. 문장이 나의 호흡과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가 쓴 순우리말이 낯설어 몇몇 단어는 사전 검색을 해야만 했다. 나쁘게 말하면 나의 단어 실력이 부족한 것이고, 좋게 말하면 덕분에 공부하게 되었다는 것 정도랄까.

 

한 편의 칼럼이 원고지 4,5매 분량이라 글을 쓴 작가는 힘들지 모르지만 읽는 독자는 상대적으로 쉽게 읽을 수 있다. 실제 글을 쓰다보면 분량이 적은 글이 더 어려울 때가 많다. 긴 글을 한 번 풀리면 단숨에 쓸 수 있지만 짧은 글은 핵심을 잘 뽑아내고 분량을 조절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글이 제대로 써지지 않을 때는 둘 다 어렵다. 회사 일을 하다 보면 이런 분량 조절이 필수적인 경우가 많다. 한 장의 품의서 안에 핵심만 추려서 넣어야 하는데 내용을 완전히 숙지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노력도 많이 필요하다. 작가의 말을 떠올리면 이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월급쟁이 회사원인 모양이다.

 

4부로 나누어진 글들의 목차를 보면서 아련한 기억과 추억을 떠올랐고, 재밌고 즐겁게 빨리 읽자고 생각했다. 어떤 글은 집중이 잘 되어 빨리 읽었고, 어떤 글은 쉽지 않았다. 작가의 문체는 호흡이 짧지 않다. 이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면 빨리 읽은 것이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냥 지나간다. 작가의 글 중에서도 나온 느리게 읽기가 필수적이다. 다른 환경에서 자란 탓인지 나보다 어린 작가의 글이 더 웃어른처럼 다가온다. 내가 자라면서 시골 할아버지집에 가서도 제대로 겪지 못한 일들이, 옛날 작가들의 글에서 볼 수 있었던 풍경과 삶이 나왔기 때문이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개발 및 발전 속도가 달라서 그런 것일까? 도시에서 자란 탓인지, 나의 기억이 잘못되어 있는 탓인지 모르지만 언젠가 한 번쯤 깊이 공부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작가의 글은 솔직하다. 아니 솔직하다고 느낀다. 나의 기준에서 보면 참 말도 되지 않을 것 같은 보일러 수리비 만 원을 청구하는 것을 보면 그의 곤궁함이 느껴지고, 더 적은 돈으로 살아야 하는 환경을 봤을 때는 예전 옥탑방 친구방이 떠올랐다. 나에게는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었지만 몇 년을 그곳에서 살아야 했던 친구의 힘겨움이 지금에 와서야 가슴 깊이 다가온 것을 보면 내가 편하게 산 것 같다. 학창시절 공부하지 않은 것이야 똑같지만 등록금을 아끼기 위해 전학점 F를 요청하고 받아 환불을 요청하는 에피소드는 황당하면서도 가슴 한 곳이 아렸다. 이렇게 생활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은 가슴에 쉽게 잘 와 닿았다.

 

시간 순으로 나열한 글이 아니라 글 내용만 가지고 그 시대의 풍경이나 사건을 짐작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신문에 연재한 기간과 글을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사건도 적지 않다. 이런 글들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시각은 단편적인 모습 너머로 한 발 더 나가는 경우가 많다. 이때 내가 너무 단순하고 쉽게 그 사건을 본 것이 아닌가 하고 반성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 하루키의 글을 불편해하고 그 이면에 깔린 제국주의를 경계하는 글을 보면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지 궁금하다. 주제 사라마구의 글은 그냥 피상적으로 알던 그의 삶을 더 생각해볼 필요를 느꼈다. 그 외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그를 흔들고 깨우고 나아가게 만들었는지 보면서 나의 삶을 아주 잠깐 돌아보게 되었다.

 

단순히 과거의 추억과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자기 삶을 토로하는데 그쳤지 않고 풍자까지 다루면서 다양한 재미를 느끼게 만든다. 이때는 더 집중해야 한다. 조금만 집중을 흐려도 그 재미를 충분히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상의 고마움을 시간이 흐른 뒤 깨닫게 된다는 기본을 몇 번이나 다룰 때는 나도 뜨끔했다. 얼마나 나의 가족과 친구들을 막대했던 순간이 많았던가. 끝으로 사투리를 다룬 글은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던 일일 것이다. 이것을 둘러싼 양극화는 누구나 한번은 깊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서울아이들이 지방에 가는 친구들에게 시골에 가냐?. 묻는 것에서 이것은 더 분명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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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를 사랑하는 방법
헤일리 태너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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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년이 있다. 소년의 이름은 바츨라프, 그는 후디니처럼 위대한 마술가가 되길 꿈꾼다. 한 소녀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레나, 그녀는 황금빛 비키니를 입고 마술가의 도우미가 되길 바란다. 이 둘은 모두 러시아 이민자 2세대다. 작가는 차분하게 이 소년 소녀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요즘같이 인스턴트 사랑이 넘쳐나는 시대에 운명 같은 사랑을 한다. 그냥 함께 자랐다고 이어지는 사랑이 아닌 떨어져 있어도 매일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누는 그런 사랑을 한다. 비현실적이라 약간의 거부감이 생기지만 그들의 사랑은 보는 내내 아슬아슬하고 영원히 함께 하길 바라게 된다.

 

러시아 이민 세대의 삶을 잘 알지 못한다. 이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삶은 우리의 이민자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바츨라프의 엄마와 아빠가 보여주는 일상에서는 필요한 정도 이상으로 미국 사회에 동화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위성방송으로 러시아 방송을 보는 아빠는 말할 것 없고, 레나가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교정해주는 엄마조차도 자신의 의식과 생활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이 이민자로서의 삶을 벗어던지기에는 너무나도 무력하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코리아타운이나 차이나타운에서 영어를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을 생각하면 더욱 더 그렇다.

 

이민1세대들은 언제나 2세대가 미국인으로 살기를 바란다. 자신들의 영어 실력이 부족하다고 해도 더 열심히 공부하려고 하지 않지만 자식들에게 바라는 것은 다르다. 레나의 예에서 잘 드러난다. 하지만 여기서 세대 간의 갈등이 빚어진다. 미국인으로 자라길 바라면서 러시아인이길 바라는 부모와 미국인으로만 살기를 바라는 자식 간의 갈등 말이다. 이 사이를 더 벌리는 것은 교육이다. 영어다. 살면서 접하게 되는 문화다. 엄마 라시아가 열 살이나 된 아들이 레나와 단 둘이 방에서 뭔가를 하는 것을 걱정하는 모습에서 세대 차이가 혹은 문화 차이가 나타난다. 읽으면서 그녀가 걱정하는 것이 아들일까 아니면 레나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바츨라프와 레나의 만남은 우연이자 운명이다. 레나는 어떤 할머니와 살다가 그녀가 죽으면서 이모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다섯 살이었다. 이모는 술집에서 일하고, 레나를 살갑게도 애정 가득하게 돌보지 않는다. 자신의 삶에 갑자기 불쑥 끼어든 짐으로 생각한다. 레나가 사는 집의 설명을 읽다보면 그것이 잘 드러난다. 그런데 이 소설 마지막에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것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현실의 무거움이 그녀를 바라는 대로 생활하지 못하게 만든 것일까? 하지만 이 때문에 레나는 라시아의 손을 잡고 바츨라프와 함께 놀이공원에 가게 된다. 그리고 키 때문에 놀이기구를 타지 못하게 되면서 마술공연을 보게 된다. 바츨라프 평생의 소원인 마술사 되기가 이때 생겼다.

 

이 소년 소녀의 사랑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가장 흥미로웠던 인물은 엄마 라시아다. 아들과 레나의 관계를 두려워하면서도 레나가 처한 환경을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한다. 매일 밤 레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잠을 재우고, 방을 청소하고, 보살핀다. 그녀가 레나를 아들에게 데리고 왔을 때 바란 것은 레나 이모와 친구처럼 만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레나 이모가 바란 것은 자신이 돌 볼 레나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는 것이었다. 레나에게 일어난 놀라운 사건을 칠 년이란 시간 동안 가슴에 품고 아들에게 알리지 않은 것도 이 둘의 사이를 알고, 아들이 아직 어렸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런 배려와 시간도 이 소년 소녀의 사랑을 막을 수 없었지만.

 

소녀는 탄생부터 그녀가 입양되기 전까지 한 번도 제대로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 라시아의 관심과 보살핌을 제외하면 그녀는 늘 방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영어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늘 불안과 배고픔에 시달렸다. 바츨라프 집에서 뭔가를 훔치는 것도 불안과 결핍에서 비롯한 것이다. 입양되어 간 집에서 사랑을 받았지만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라 늘 불안을 품고 산다. 강박증세가 보인다. 화장실에 앉아 불안과 걱정으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랑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지고 안정적인지 알게 된다. 그녀가 다시 바츨라프를 만나 자신의 부모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사랑을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것을 채워주는 사람이 바로 바츨라프다. 마지막 이야기는 읽으면서 이성과 감성이 끝없이 충돌하게 만들었다. 왜냐고? 읽으면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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