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이것을 알지 못하면
신광철 지음 / 당신의서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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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쪽. 공자의 은 중심적인 철학이면서 가장 보편성을 가진 사상이다. 공자 사상의 핵심은 한마디로 이다.

 

-> 이 책의 별미다. 이 책은 논어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원문을 직접 맛보는 것은 선사하지 못한다. 하지만 원문을 편집하여 논어를 공부하고자 하는 이에게 편리한 길로 인도한다. 몇 천 동안 이어져 내려온 논어를 편집 번역한 책을 읽기만 한다면 그 뒤에 감추어진 깊은 뜻을 바로 이해할 수 없다. 오랜 시간 읽고 또 읽고 그 뜻을 깊이 되새겨야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은 깊이 되새기는 것을 도와준다. 이해를 앞당겨 주는 좋은 책이라 할 수 있다.

논어의 묘미는 완성된 책으로서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공자에 대해 모아 놓은 것을 읽는 재미에 있다. - P8

시간으로 빚는 것이 인생인데 그 시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논어가 가지고 있다.
동양 속 한국을 이야기하면서 역사의 갈피마다, 사람들의 생각의 갈피마다 논어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논어를 읽어야 한다. - P9

공자의 仁은 중심적인 철학이면서 가장 보편성을 가진 사상이다. 공자 사상의 핵심은 한마디로 仁이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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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논어
주대환 지음 / 나무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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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를 보면 너무나 매력적이다. 원문에 대한 토를 달고 우리말로 번역을 해서 좋은 내용을 이해하지만, 내가 원하는 해설을 기대하는 바가 있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너무나 매력적이란 생각이 앞선다. "효는 가까운 사람과 잘 지내기 위한 훈련이다", "지금 바로 대한민국에 인이 필요하다" 이는 좋은 내용을 이해함과 동시에 나도 저자와 동일하게 느끼는 바이기 때문이다.

연대는 사람에 대한 배려와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지금 우리나라에 너무나 부족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잠시 절망이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보면 동아시아 문화 전통 속에서 인이라는 고욤나무 고목이 있다. 거기에 연대라는 대봉감을 접붙여서 살려낸다면,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될 수 있다. 논어에서 공자님이 제시한 삶의 가치가 바로 仁이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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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논어
주대환 지음 / 나무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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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를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란 지금 여기 세상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사고를 열어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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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중학생 같은 걸 하고 있을까 VivaVivo (비바비보) 14
쿠로노 신이치 지음, 장은선 옮김 / 뜨인돌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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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중2 딸-딸은 학교 밖 아이다. 딸과 얘기를 해보고 싶다. 초등학교만 다녔고, 중학교는 검정고시를 마친 아이에게도 스미레와 같은 마음이 있을까, 정말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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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 역사적 자료에 기초한 초대교회 모습 1세기 기독교 시리즈 1
로버트 뱅크스 지음, 신현기 옮김 / IVP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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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역사적 자료에 기초하여 초대교회의 모습을 저술했습니다.70쪽이 살짝 넘는 분량입니다. 푸블리우스라는 주인공을 만들었고, 이 사람이 어느 가정에 초대받아 가는 상황입니다.

 

오후 3시 자기의 집을 나섰다가 한 밤중이 되어서야 돌아가는 내용입니다.

가정으로 인도되어 인사를 합니다. 손님으로 식사를 합니다. 이야기를 주고받고 여러 광경을 목격합니다. 기도를 하며 짧은 찬양을 하는 모습, 서로를 돌보겠다는 서약, 아이들이 소외되지 않고 자유로이 참여하는 현장을 봅니다.

 

저자는 푸블리우스의 시각을 통해 초대교회의 모임이 당시대 사람들이 볼 때에는 무엇인가 부족한 점이 있을 수 있음을 언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블리우스는 다시 한 번 지난 번 모임에 초대 받는다면, 다시 초대에 응할 것이라고 답합니다. 저자인 로버트 뱅크스는 푸블리우스의 마음을 통해 지금 우리의 교회는 어떤지 들여다보게 합니다.

 

지금 현재, 푸블리우스가 우리의 예배에 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에게 다시 한 번 우리 예배 모임을 청한다면 그는 우리와 함께할 수 있을까요?

 

아래에 공감이 되는 부분을 발췌했습니다. 나름 밑줄긋기라고 해야 할까요? 괄호 안은 쪽수입니다.

 

삶의 질에서 비롯되었다(8).

 

지난 2천 년 동안 우리는 결정적인 무언가를 잃어버렸다(11).

 

초기 그리스도인의 예배와 우리의 예배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단순한 성경 주해나 강해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의사소통 방식에서 예수님이 실천하신 스토리텔링을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13).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글레멘드와 유오디아의 관점에 맞지 않았다. 그들에게 서광이 비친 것은 아굴라와 브리스가가 재등장했을 때였다. 이미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둘은 자기들 집에서 정기 모임을 시작했다(22).

 

집에서 들어오면서 시작된 예배

이제 예배가 시작되는 건가?” 글레멘드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집으로 들어오면서 실제로 예배는 시작되었지.”(29)

 

신분상 앉아야 할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었다. 좋은 자리에 높은 사람을 앉히지 않았다. 그런데 모인 사람 모두가 자리에 개의치 않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볼 수 있게 앉았다(31).

 

공동체 온 것을 환영하며 앞으로도 계속 돌보겠다는 서약을 하는 모습(61).

 

만찬에 초대받아 특이한 경험을 한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아미키우스 루푸스. 푸불리우스는 오후 3시에 집을 나섰다가 한 밤 중에 집으로 돌아갔다. 푸블리우스는 아래와 같은 소감을 남겼다. “내 예상과는 아주 달랐지만, 대체로 그날 저녁이 즐거웠다. 사람들 자체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들이 어떤 예절을 무시할지, 어떤 신조를 고수할지, 광신에 빠져 있지는 않을지 걱정이 많았었다. 그러나 만찬 중은 물론 만찬 후에 이루어지는 그들의 대회에는 이상하게도 그 자체로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모임은 종교적 관점에서는 부적합한 부분이 꽤 많았고, 그들의 어떤 행동은 아주 이색적이어서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초청을 받아들여 다음 주 모임에 갈지는 아직 모르겠다. 뭐라 말하기 힘들다. 확신이 없다. 하지만 어쩐지 응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73)

 

역자 후기

이 책은 얼마 안 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담아야 할 매우 다양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중과 주인, 여자와 남자, 가난한 자와 부자, 아이와 어른과 노인, 가족과 독신, 해방과 자유, 세상과 교회, 직업 소명과 신분, 성만찬과 세례, 논쟁과 조정, 상황과 말씀, 식사와 성찬, 일상과 초월, 공간과 시간, 의외성과 규칙성, 참여와 권위, 본질과 형식, 치료와 치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덩치만 크지 단조롭기 그지없는 오늘날의 어떤 대형교회보다도 열아홉 명으로 이루어진 이 작은 공동체에서 우리가 오랫동안 잃어버린 교회의 본질과 다양하고 풍성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교회를 믿는다. 교회는 나가거나 안 나가는 곳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교회고, 교회는 매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체이다. 푸블리우스와 함께 2천 년 전 로마에서 모였던 원초적 교회의 방문자가 되어 오늘의 교회를 위한 상상력과 확신을 길어 올리기를 바란다.(75)

 

이상 앞 단락의 저의 밑줄긋기는 역자후기까지 발췌할 정도입니다. 책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제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저자가 그려내는 초대교회 예배의 모습을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저에게는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습니다. 예배를 인도할 때의 아쉬움이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며 설교단에 서 있는 목사 뒤에 앉아 회중석을 바라보았습니다. 회중들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그들의 초점이 어디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앉아 있는 자리 위의 스크린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들의 앞에 있는 설교자를 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회중석에 앉아 계신 성도 한 분 한 분을 집중하며 바라봅니다. 그들의 눈은 어디를 보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자리에 앉아 성경책을 읽는 것인지?, 설교자에 집중하며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스크린으로 크게 보이는 화면에 나타난 설교자를 응시하고 있는 것인지? 회중석에서 성도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요? 저의 이런 생각과 감정은 무엇일까? 저도 회중석의 성도들과 똑같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설교와 예배 인도 순서가 없을 때, 성도들과 동일하게 동료 목사가 설교하는 것을 바라보고 듣습니다. 함께 자리에 앉아 집중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긴 장의자. 앞줄과 옆줄에 앉아 있는 모르는 얼굴들. 시종일관 좌우를 바라보지 않고 앉아 있다가 일어나는 성도들. 예배당을 빠져 나가는 순간조차 배웅하는 목회자들의 악수가 부담스러운지 다른 출구로 서둘러 나가는 성도들. 그들은 예배 시간 시종일간 앞을 정확한 방향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부담스러운 좌우앞뒤가 아닌 앞을 바라보았지요. 저도 뒷자리에 앉아 앞에 서 있는 설교자를 바라봅니다. 성도들과 동일한 바라봄으로 살펴보게 되니 저의 시선도 앞자리에 앉아 있는 성도의 뒷머리를 바라보게 되더군요. 그렇습니다. 자칫 시선을 잃어버리면, 초점을 갖지 않으면, 앞에 앉아 계신 성도의 뒷모습만 그의 뒷머리만 바라보게 되더라는 겁니다.

 

저는 고민했습니다. 함께 얼굴을 바라보며 예배를 드릴 수는 없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며 예배하는 교회가 되어야 함을. 서로 바라보고 예배드리는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게 고민하고 생각하다보니 그 시작은 바로 가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가정이 살아나야 했습니다. 가정교회. 가장 이상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초대교회 때의 모습으로만 돌아가면 진정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니기에 역시 해결을 위해서는 가정교회로의 관심 갖게 되었습니다.

 

내가 살고 속한 가정에서 교회가 시작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현재 드리는 예배는 무언가 잘못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 속에서 맴돌 뿐 어떠한 해결안도 제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정교회가 견고하게 시작되고 지역교회로 자라나고 성장하며 건강한 연합교회 될 때, 흩어지고 모이고, 모이고 흩어지게 될 때 어느 정도 교회 본연의 모습을 갖도록 가정교회가 교회의 자생적인 힘을 주지 않겠습니까!

 

푸블리우스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다시 가고 싶은 그런 교회를 꿈꾸며, 시작은 가정에서부터임을 깊이 새겨봅니다.

 

일전에 전화가 왔었습니다. 한두 달 전에 전화가 왔습니다. “평화와 화해를 이루는 교회지요?” “, 맞습니다.”길고 긴 통화가 이어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참 진행된 통화 후에 상대방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군요. 제가 등록을 하는 것은 아니고 한 번 찾아는 가보겠습니다.”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가는 것, 그 이전에 내가 교회라는 것을 진짜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임이 교회라는 것을 확인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교회라는 것을 확인한 후 우리 모두가 서로를 돌보는 가족임을 고백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교회면 좋겠습니다.

 

 

삶의 질에서 비롯되었다 - P8

지난 2천 년 동안 우리는 결정적인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 P11

초기 그리스도인의 예배와 우리의 예배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단순한 성경 주해나 강해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의사소통 방식에서 예수님이 실천하신 스토리텔링을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 P13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글레멘드와 유오디아의 관점에 맞지 않았다. 그들에게 서광이 비친 것은 아굴라와 브리스가가 재등장했을 때였다. 이미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둘은 자기들 집에서 정기 모임을 시작했다 - P22

"이제 예배가 시작되는 건가?" 글레멘드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집으로 들어오면서 실제로 예배는 시작되었지." - P29

신분상 앉아야 할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었다. 좋은 자리에 높은 사람을 앉히지 않았다. 그런데 모인 사람 모두가 자리에 개의치 않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볼 수 있게 앉았다 - P31

공동체 온 것을 환영하며 앞으로도 계속 돌보겠다는 서약을 하는 모습 - P61

만찬에 초대받아 특이한 경험을 한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아미키우스 루푸스. 푸불리우스는 오후 3시에 집을 나섰다가 한 밤 중에 집으로 돌아갔다. 푸블리우스는 아래와 같은 소감을 남겼다. "내 예상과는 아주 달랐지만, 대체로 그날 저녁이 즐거웠다. 사람들 자체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들이 어떤 예절을 무시할지, 어떤 신조를 고수할지, 광신에 빠져 있지는 않을지 걱정이 많았었다. 그러나 만찬 중은 물론 만찬 후에 이루어지는 그들의 대회에는 이상하게도 그 자체로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모임은 종교적 관점에서는 부적합한 부분이 꽤 많았고, 그들의 어떤 행동은 아주 이색적이어서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초청을 받아들여 다음 주 모임에 갈지는 아직 모르겠다. 뭐라 말하기 힘들다. 확신이 없다. 하지만 어쩐지 응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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