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은 미룬지 몇년인지 모르는 치과에 다녀왔다. 집 근처에 세 개의 치과가 있었는데 두 곳은 리뷰가 많고 평이 좋고, 한 곳은 리뷰가 적고 악평이 한개 있었다. 지역상품권이 되는 곳은 리뷰가 적은 쪽 한곳이었다. 일할 때 같았으면 (불가능했지만) 리뷰가 많고 평이 좋은 곳으로 갔겠지만, 여유가 있어서 악평이 한개 있었던 곳으로 갔다. 상태가 심각할 걸로 생각해서 처음에는 검진을 두 곳 정도 받아보고 치료를 할 생각이었다. 가보니 악평을 한 사람의 상황이 이해가 갔는데, 나에게는 나쁘지 않아서 그냥 바로 치료를 시작했다. 치아는 기대에 못 미치게 나빴는데, 결제하고보니 지역상품권 적용이 안되었다. 완벽하게 내가 일하기 전에 살아봤던 방식으로 진행이 돼서 묘한 기분이었다. 


세상을 인식하고 내 안에 적당하게 저장하는 건 내 생각과 마음이 한다. 일을 마치기 전에는 화요일에 근무를 마치고 나면 머리를 잘라야겠다 몇번이나 다짐했다. 막상 집에서 쉬기 시작한 첫 주에는 머리를 자를 필요를 못 느꼈다. 머리가 길던 짧던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 근무를 서던 화요일에 온종일 머리속에 역시 내일 머리를 잘라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수요일은 치과를 가기로 마음먹었고, 무시무시한 치료강도와 시간이 소요될 것 같은 기대감에 당장 잘라내고 싶지만 목요일에 잘라야 할 것 같았다. 


특별히 하고 싶은 머리는 없고 자른다는 생각만 있어서 귀찮은 마음에 마음속으로 취소를 한 것도 있다. 그런데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보다가 박완서 선생님 정말 멋진 분이네, 안 웃는 사진을 보면 그렇지 않은데 대부분 사진에서 웃고 있는 얼굴을 보면 보는 사람까지 마음이 온화하고 평온해지네 싶었다. 그런 표정과 마음들이 머리를 따라 자른다고 가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행히 사진에 찍힌 선생님의 머리는 사진촬영을 위해 따로 한 머리 같지는 않아서 (실은 꾸안꾸일 수 있다) 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미용실에서 이렇게 해주세요 하고 이 사진을 꺼내는게 망설여졌다. 이게 누구에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분이에요. 무슨 책 있어요? ...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은 <그 많던 싱아를~> 한 권 봤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대략적인 내용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이야기가 재미있었던 느낌뿐이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선생님 머리를 따라하려면 솔직히 소설 한 권은 다시 읽어야 할 것 같고, 그래도 나목은 읽고 따라해야 하지 않을까? 한참 걸릴 거다. 역시 김하나 작가 사진을 꺼내기로 했다.


누구인지 말할 기회는 없고, 내 머리 상태로는 그 머리는 할 수 없어서 미용실 선생님이 뭐라고 한대로 한다고 했다. 당분간은 집에만 있어서 자르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염색도 했다. 염색도 하고, 단발도 하고, 히피펌도 하고, 숏컷도 하고 다 해보네요. ㅎㅎ긴 생머리만 빼고요. 긴 생머리도 한번 했어요. 그때 한번 봤어요. 개인적으로는 그 머리가 제일 잘 어울렸어요. 아~ 맞네요. 세상에 기억력이 좋은 선생님이다. 살면서 외부 저장장치가 흩어져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머리는 아직 낯설지만 마음에 든다. 결과물이 이상할 때도 있는데 항상 마음에 든다. 아마 대부분 어떤 시간을 종료시키고 싶을 때가 아니면 머리를 하러 안 가기 때문일거다. 놀랍게도 과거의 기특한 내가 선결제해놓은 금액이 많아서 이번 종료식은 공짜였다. 전혀 몰랐다. 그대로 이사갈 뻔 했다.


엄마가 고등어 조림을 줬다. 8도막이 들어있었다. 나는 내장 쪽이 있는 도막은 안 먹고, 동거인은 먹는다. 이번에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동거인도 원래는 내장쪽 도막을 싫어했다고 한다. 나는 먹어보지도 않고, 생긴게 살만 있는 도막과 다르기 때문에 싫어했다. 그래서 나는 안 먹으니까 엄마는 나에게는 안 주고, 동거인에게는 그 도막을 줬다고 한다. 동거인도 처음에는 그 도막이 싫었는데, 막상 먹어보니 일반 살고기 도막보다 살살 녹는 맛있는 부위였다고 한다. 발라내는 게 좀 귀찮지만. 그래서 행복하게 영원히 살고기 도막은 아빠와 나만 먹고, 살살 녹는 내장쪽 도막은 엄마와 동거인만 먹게 되었다는 이야기. 나에게 그 도막이 끝까지 주어지지 않은 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내가 어릴 때 아침에 믹서에 간 콩물을 먹기 싫어서 이상한 곳에 숨겨두고 유치원에 가버리면 엄마는 가끔 컵을 찾아 헤매다 잊어버렸고, 그 콩물컵은 어딘가에서 썩어서 냄새가 나면 위치가 밝혀지니까. 이상하게 스무살이 되어서부터는 그 따뜻하고 달콤한 콩물이 엄청 먹고 싶었는데, 아마 콩물도 박완서 선생님의 머리같은 거겠지.



<어린이라는 세계> 표지를 보면서 책과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표지를 볼 때마다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게 책을 볼 준비를 해주고, 본 다음에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림 그린 사람 그림 더 보고싶다 인스타같은거 하겠지? 생각했는데 신간 코너에서 결국 만났다. 마음 귀퉁이가 몽글몽글해지고, 한가운데는 포근포근해진다. 오늘의 단어가 3~6컷 정도의 짧은 만화로 3편 정도 실리고, 짧은 글이 붙는다. 처음에는 그림만 쭉 보면서 정화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보다보니 단정하고 소박한 글도 좋았다. 사계절로 네 장으로 나눠지는데 여름으로 시작하는 것도 좋았다. 지금이 한참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라 막 휴가를 시작할 때는 불만이 대단했다. 쨍한 한여름쯤은 쉴 걸로 계획했어서.

지금은 한낮에도 너무 덥지 않아서 역시 이래저래 좋다.



여, 여기부터

행, 행복해진다! 

라니!


나는

여, 여기가 끝이려면

행, 행동을 시작할때야.

주문을 외우고 머리를 잘랐는데?


그리고

휴, 휴~ 그동안 참 고생했다

가, 가장자리에서 조금 쉬자

주문을 외운다.


어쨌거나 머리스타일은 둘다 비슷하다.

나도 9월 말쯤에는 대충 한달의 일기같은 게 남겠지.



작가의 말을 보면서 처음으로 소설가 라는 직업 참 멋지다~ 감탄한다. 이렇게 하고싶은 말을 쏙쏙 뭉쳐서 하나의 요소로 집어넣고, 그걸 또 솜씨좋게 섞어서 재미진 전체를 만들고. 역시 배경이 하와이라서 읽기 편했을까 싶다. 작가가 열심히 숨겨뒀다는게 나에게도 비슷한 값어치의 보물이라서 보는 내내 즐겁고 편안했다. 주말 저녁 밥먹고 tv앞에 앉아 보는 가족드라마. 억지스럽지 않고 내 몸에 딱 맞아서 속시원하고 재밌는.


 (웃음) 그러니 여러분, 앞으로의 이십 년을 버텨내세요.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모퉁이가 찾아오면 과감히 회전하세요. 매일 그리되 관절을 아끼세요. 아, 지금 그 말에 웃는 사람이 있고 심각해지는 사람이 있군요. 벌써 관절이 시큰거리는 사람도 많지요? 관절은 타고나는 부분이 커서 막 써도 평생 쓰는 경우가 있고 아껴 써도 남아나지 않는 경우가 있어 불공평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모든 면에서 닳아 없어지지 마십시오. - XX미술학부 졸업 축사 녹화본(1995)에서, 229p


모퉁인가 아닌가. 꼭 모퉁이인 것 같은데 진짜 맞나. 에이 아닐거야 아니겠지. 좀더 가야 나올거야. 이 정도면 모퉁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십년을 넘어서 막 과감히 회전을 한 것 같다. 타고난 부분이 다름이야 알고는 있었는데 어쨌거나 총량적으로 보면 인생이 참 공평하다는 것을 작년서부터 느낀다. 네, 어쨌거나 남은 십년도 잘 버텨내고 절대로 닳아 없어지게 가만두지 않을거에요. 모든 면에서.



어떻게 이럴수 있어.. 이런 이야기가 있을수 있어.. 완벽한 이야기인데 그래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도 있다.


 로라는 책을 별로 읽지 않았다. 대신 그림을 베끼거나, 여행과 역사에 관한 두껍고 학구적인 책에 있는 흑백 삽화를 색연필로 색칠했다.(바이올런스 선생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생각하며 로라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 271p


가슴이 철렁. 그래도 그래서는 안돼. 지루해서 그림만 보며 넘길 수도 있지만. 색칠까지 해서는 안된다고.. 야수파적 색감은 상관없지만 책에다 해서는 안된다고. 이 책 1권에서 불만인 부분은 딱 두 가지다. 딱 저부분 한가지와.. 오탈자? 개정판은 사정이 좀 나을까.


이야기에 질질 끌려가면서도 세살 차이인 체이스 자매를 중심으로 보게 된다. 동생이 생겼을 때 첫째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많지 않다. 하지만 둘째는 첫째가 먼저 취하고 남은 전략 중에서 골라야 한다. 내가 본격적으로 다루어보기에는 너무 어마어마한 책이다. 본격적으로 읽는 시간을 가진 것에 충분히 감사한다. 다행스럽게도 마거릿 애트우드 선생님의 첫 작품이다. 아직 남은 이야기가 더 많다. 부커상에도 관심이 생긴다.



요즘 다니는 큰도서관에는 페미니즘 책이 6칸이다. 올해 나온 책들도 몇 권 알아봤다. 대부분 살벌해보이는 와중에 (얇아서) 눈에 띄었다. 꼼꼼하게 다시 쓰고, 생각보다 글씨가 많고, 실루엣만 가득한 그림이 책과 잘 어우러진다. 엘라의 발이 커져서 흐뭇했는데, 실루엣 그림들은 한결같이 마르고 긴 목이었다.


"집에서 나와도 된다고 왜 진작 말해 주지 않으셨어요?"

신데렐라가 물었어. 대모 요정이 말했지.

"다른 애들 돕느라 나도 엄청 바빴거든. 그러다가 너희 집이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렸어. 또 나는 사람들을 도와주지만 그러려면 일단 그 사람이 도움을 청해야 돼. 너는 무도회 날 밤 전에는 도와 달라고 한 적이 없잖아."

(도움이 필요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 게 좋다는 건 정말 사실이야.)-36p


정말 사실이다. 스스로에게, 남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하려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인생 총량의 공평함이란 대부분 어떤 각성의 필요조건에 기대고 있다. 


강아지는 사랑이지. 케이크는 직접 근사하게 구워야지!


살살 녹는 고등어뱃살을 먹어보고 감탄하고

여성 작가가 쓴 여성 주인공의 이야기들을 재밌고 편안하게 읽고

끝!을 자꾸 자꾸 기념해서 감사한 며칠.

꺄 아껴보자~~ 신났다가 

날도 짧은데 뭘 얼마나 아껴~~ 그냥 보기로 한 감사한 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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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9-02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링크 님의 한달살이 읽기 팬이 될 것 같습니다!!

link123q34 2021-09-02 19:48   좋아요 0 | URL
이럴수가!! 취지와 맞지 않게 한달을 알차게 써야겠어요ㅋㅋ 감사합니다~~♡
 

화요일은 하루 일을 하고 왔다. 일주일동안 크고 작은 마무리할 일들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마지막 일 때문에 그만둔 곳으로 돌아가야해서 쉬면서도 쉬는 것 같지 않았다. 화요일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야 온전하게 내장들이 이완하는 게 느껴진다. 별 일은 없었지만, 스스로 이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고 이름지었구나 싶은 게 느껴진다. 일했던 10년동안 내내 몸과 마음이 긴장하고 있었는데, 명상과 요가를 해보기 전에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만두기 직전에서야 알았는데 일하는 동안은 심장과 가슴이 딱딱하고 뜨거워지고(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내장과 배는 얼고 뭉쳐진다. 이 똘똘 뭉쳐진 내장을 풀어주는 효과좋은 비법은 작년에 자기계발서 읽기에서 얻었다. 그동안 아무것(실용적이도 효용한것)도 아니라고 무시하고 외면했던 것들이었다. 자기 전에 누워서 딱딱한 내장을 가지고 입으로 '감사합니다~'는 소리를 내면 스르르 내장이 풀렸다. 뭐가 감사한지 상관없었다. 주문은 효과가 있었다. 그래봤자 몇시간 뒤 아침에 눈을 뜨면 일하러 갔다. 그런데 화요일 밤 자려고 누웠는데 내장들이 편안하게 같이 누워있었다. 


뜨거운 가슴이나 뭉친 배는 사실 실생활에 불편함은 없었다. 또 불편함이 없었던 건 마비된 통각이다. 베거나 까진 상처들이 아프지가 않았다. 오히려 실용적이고 편리한 몸이라서 좋아했다. 아프지 않고 피가 나고 밥을 먹다 눈에 보이면 발견됐다. 저녁에 씻다 물에 닿아도 쓰리지 않아 모를 때가 많았다. 내 눈이나 다른 눈에 띄어 시각적으로 인식하면 그제서야 아픔이 느껴졌다. 통각은 개별적이고 지나치게 주관적이지만 없는 것이기도 하고, 실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세상 눅눅하고 습한 책이나 영화를 보는 일도 얼마나 아무 일도 아닌 일이고, 동시에 참 아픈 일이다. 몸이 점점 참을 수 없을때까지는 언제든 경계태세를 하고 좀처럼 풀지 않아서 사소하고 사소하지 않은 몸의 일들은 모두 의식의 수면 아래에 잠겨있었다. 알아차렸다면 몇겹으로 채운 보호구를 효과적으로 풀어헤치려고 노력했을 텐데 그래본 적이 없어서 수면의 높이를 올리고, 또 올리려고 노력했고 그런 일에는 참 열심으로 다양하게 애썼다.


지난주는 예고된 하루 출근 때문에 뭐든 손에 잡히지 않고, 진득하게 뭘 하기 어려웠는데 책의 신은 참 다정하다. 궁여지책 시즌3는 그림책을 읽는다. 두 사람이 공유해준 추천 그림책주머니에서 두권을 골라 한달에 한번 이야기한다. 몽글몽글해지는 참 반가운 아이디어였는데 코로나로 단축 운영을 해서 도서관에 갈 수 없고, 일일이 사보고 고를 수는 없어서 은근 골치덩이였다. 그러니까 바로 그림책을 달릴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었다. 그래도 한달살이 한정으로 뭐든 달리지 마는 시간을 보내보자는 다짐은 매일 아침 하고 있다. 처음으로 큰도서관에 평일 대낮에 가서, 어린이 책 서가에 다녀왔다. 성인 책들도 진열이 신기하게 되어있어 우연을 가장한 책과의 만남을 주선하는게 특징인 큰도서관이다. 어린이서가는 원래 그런건지 여기가 그런건지 알 수 없었는데, 더 작은어린이와 더 큰어린이용 책이 나누어져 있었다. 역시 어린이들의 창의성을 기르려는 목적인지 알 수 없게 책들은 이곳저곳 흩어져 있었다. 어린이서가에서 헤매는 일의 기쁨과 슬픔을 접했다. 안 그래도 흩뿌려져 있는 책들이(실제로는 아마도 질서있게 흩어져있지만, 이용자가 단지 익숙하지 않아 그럴 확률이 높다.) 책등이 얇아 분류기호가 잘 안 보인다.


책의 신은 크게 보면 다정하고, 너무 뜯어보면 혹독하다. 충분히 헤매면서 우연한 즉석만남을 가지면 좋았겠지만, 오래된 선약이 있는 책들만 후딱 챙겨올 생각이었다. 안온한 집에서 표지도 알콜솜으로 한번 닦고, 홍차도 우려서 느긋하게 효과적으로 볼 생각이었다. 에버노트 도서관별 재고 목록의 분류기호 지도에서도 이번에 방문할 곳만을 별표 표시를 해간 나는 (그 도서관 말고 도서관이라는 이데아 자체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타버리고 한 줌의 몸과 마음만 가지고 간 나는) 집에 돌아와서 시간을 보고 황당했다. 그래도 한달간 손목시계는 풀어두었다. 그래도 서둘러서 해야하는 일은 없긴 없다.



두 사람이 나눠준 많은 그림책들 중 아무래도 자기 자신에 대한 책들을 고르게 됐다. 어린거나 그대로 늙은거나 관심사는 비슷할 수밖에 없다. 내가 어렸을 때 그런 책들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요즘 어린이들이 좀 부러웠다. 좋은 책을 골라낸 목록에서 고르니 그렇기도 하겠지만, 책들이 정말 아름답고 풍성하고 재미있었다. 단순하고 천진해지는 시간이었다. 표지그림은 명장면 중 명장면이었는데, 역시 표지에 실렸다. 실은 책 전체가 명장면 모음집이다. 


"이제 비가 멈출 모양이에요. 먹구름이 저기까지 물러갔어요."

"정말 그렇구나."

고기오는 비가 멈춘 게 기쁘면서도 한편 걱정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닭인 걸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거든요.

-51p


고기오는 작은 꼬꼬꼬를 데리고 비를 피하러 동굴에 들어와서 지금 비를 피하고 있기는 하지만, 비가 멈추는 것도 안 멈추는 것도 걱정이다. 내가 닭인지 아닌지 생각해야 하는건지 모르는데 우선 코앞에 닥친 내가 닭인지 아닌지 증명을 어떻게 해내야 할지.




 내가 누군지 나도 모르고 너희들도 모르는데 그래도 나를 좋아해주는 너희들을 떠날 수 있을까? 고기오가 두더지들을 떠나온 사건은 상상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그래도 마음 속으로는 습관적으로 이름표를 붙인다. 고기오는 건강한 몸과 충분한 먹이를 구할 수 있는 능력, 어떤 감지를 할 수 있는 인지력, 혼자라도 괜찮은 심지가 있어서 진짜 자기가 뭔지 헤매고 다닐 수 있는거야. 그래도 어쨌거나 고기오는 용감하고 멋진 게 맞다! 세상 진실한 용기 앞에서 감동받고 부러워한다. 디테일도 훨씬 더 많고, 담긴 메시지도 훨씬 더 많다. 


그냥님의 씩씩한 고오오오~기이이이~오오오오~~ 떠올라 배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문학상을 좇아 읽는 타입이 아닌데, 이 책을 읽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이 상의 전 수상작들도 찾아 보고 싶어졌다. 이이거는 진짜 어린이책 서가에 꽂혀 성인 독자를 소외시킨 명작이다. 글도 그림도 각각 아름답고, 그 조화의 아름다움은 말을 잇지 못한다. 그림책을 보며 이렇게 펑펑 눈물을 흘릴 거라 생각하지 못해서 기습으로 더 당했고, 그만큼 더 좋은 시간이었다. 


크고 큰 외로움과 텅텅 빈 마음과 그래도 하루하루 살아지는 날. 

겨우겨우 지나가는 날들에 또 또 계속되는 이별.

다시 슬금슬금 다르게 차는 마음.


역시 디테일도 훨씬 더 많고, 담긴 메시지도 훨씬 더 많다. 고기오와 다르고 같은 결말도 충격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그냥님 만세~~



기록한 이후부터 알라딘이 정리해준 걸 보면 사노 요코의 책을 가장 많이 봤다. <사는 게 뭐라고>로 첫 발을 떼었을 때부터 진작 보기로 약속해둔 사노 요코의 그림책. <100만 번 산 고양이>를 처음 봤을 때 못생긴 고양이가 너무 충격이었는데. 솔직해서 심술맞아 보이는 고양이와 동화같지 않은 이야기가 점점 중독된다. 역시나 100만번 처럼 어린이들이 보기에는 충격적이고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이야기다. 역시 슬프게도 이야기에는 나오지 않는 표지 그림이 가장 명장면이다.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나는 고양이야.

고양이라고!"

고양이의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숲 속에 울려 퍼졌어요.


숲 속은 조용했어요.

고양이는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여느 때와 똑같은 숲이었어요.

나뭇가지에서 작은 새가 노래하고,

나뭇잎 두세 장이 포르르 떨어졌어요.


발 밑에 고양이 고양이의 모자가 떨어져 있었어요.

파이프도 있었죠.

고양이는 모자를 쓰고, 파이프를 입에 물었어요.

여느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어요.


고양이는 또 한 번 숲을 빙 둘러보았어요.

숲은 여느 때와 똑같았고, 고양이도 여느 때와

똑같았어요.

고양이가 벌떡 일어섰어요.

"그럼, 오늘 저녁엔 오랜만에 고등어를 먹어 볼까?"

고양이는 다시 산책을 나섰답니다.




마지막 장면이 제일 좋다. 나도 숨을 고르고 숲을 둘러보고 떨어진 내 모자를 주워 쓰고 벌떡 일어나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하고 있다. 나는 고양이인가 아닌가 생각하고, 다디단 하루를 보내고, 나는 고양이라고! 역정내면서 아침에 홍차를 마시면서 책을 보고, 점심엔 오랜만에 홍차를 마시면서 책볼까? 차장과 책장 앞에서 콧노래를 하고, 발을 구른다. 공공의 책장 앞에서는 그러지 않는다.



모래알만 한 경험이라도 어떻게든 써서 뱉아내면 스르르 낫고, 약간은 슬그머니 나아졌던 적이 있다. 

보고 쓰면서 아주 작은 게 조금 살이 붙는 기분이 감사한 며칠.

묻어둔 자아를 살살 캐내면서 슬슬 기뻐해서 감사한 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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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9-02 11: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긴긴밤 땡스투 들어온다면, 접니다.
:)

link123q34 2021-09-02 19:46   좋아요 0 | URL
꺄 이럴수가 땡스투란 누르는 것인줄만 알았지 뭐에요 감사합니다♡
 














1장 감정과 법


1 감정에 대한 호소

 영미 법률 전통이 감정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와 이런 태도가 암묵적으로 기반하고 있는 감정 개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감정은 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지배적인 사회규범과도 연관되어 있다. 중요한 이익과 불이익을 가르고, 어떤 혜택과 손해가 중요한지를 가른다. 이 시각에서 세 가지 법이 작동한다. 

①'타당한 도발'에 관한 법 

②정당방위에 관한 법 

③형사범에 대한 양형선고 과정에서 동정심에 대한 호소가 갖는 역할


2 감정과 믿음, 감정과 가치

 감정은 대상이 존재한다. 대상의 존재로 믿음과 평가, 타당성이 발생한다. 믿음은 감정 자체를 구성하는 일부가 된다. 대상에 대한 평가는 대상을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나눈다. 그러니까 특정한 대상에만 중요한 가치를 부여한다. 타당성은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평가할 때 중요하고, 진실성과는 다르다. 진실성은 증거와 신뢰성에 관한 문제다.


3 감정, 평가, 그리고 도덕 교육

 감정은 참인지 거짓인지 믿음을 판단 근거로 한다. 그렇다면 감정의 근거가 되는 믿음을 바꾸면 감정을 바꿀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래서 법과 도덕 교육이 중요해진다.


4 감정과 '이성적인 사람': 과실치사와 정당방위

 감정은 사람들의 평가를 포함한다. 법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유도할 수도 있다. 정당방위로 인한 살인의 경우 완전한 면책 대상이다.(영미법에서) 이것은 타당한 감정을 근거로 한다. 충동적 과실치사의 경우 죄가 경감된다. 이 경우 사람들이 자신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특정한 형태의 피해를 입었을 때 분노할 수 있다는 점을 공적으로 인정해주길 원하고, 그런 감정 자체가 적절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5 감정과 변화하는 사회 규범

 감정에 대한 평가는 시대의 지배적인 사회 규범을 반영하기 때문에 달라진다. 간통과 가정폭력에 대한 시각의 변화도 바뀌고 있다.


6 타당한 공감: 양형 선고 과정에서의 동정심

 양형 선고시 동정심은 과정의 일부이다. 동정심이 타당하고 적절하다는 가정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타당한 동정심은 피고인의 권리가 되고, 동정심을 이끌어낼 수도 있는 증거를 제시할 권리도 생긴다.


7 감정과 정치적 자유주의

 감정을 평가의 기준으로 두게 되면 법 개념이 자유주의적이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사람에 대한 존중을 기본으로 하고, 자연히 일정 정도 '타당한 불일치'가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위에 대한 제한을 쉽게 정당화할 수 있게 된다. 반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행위를 제약하는 것은 정당화하기가 훨씬 어렵다.


8 감정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자신의 아이를 죽인 사람을 살해한 부모의 경우 우리는 분노의 '형태'와 '역할'을 평가하게 된다. 분노와 두려움은 법률적으로 적절한 범주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혐오와 (제한된 범위의)수치심은 담고 있는 인지적 내용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혐오와 수치심은 법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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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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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라고!
사노 요코 글 그림, 이선아 옮김 / 시공주니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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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00만 번 산 고양이
사노 요코 글 그림, 김난주 옮김 / 비룡소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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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긴긴밤-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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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이보다 멋진 선물은 없어
패트릭 맥도넬 글.그림, 신현림 옮김 / 나는별 / 2016년 5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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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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