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간만에 한국소설을 읽었다. 무척 재밌게. 생각 외로 문장이 무척 좋았다. 가슴에 와닿는 문장들. 소설의 주제의식도 좋았다. 모순. 우리의 삶은 얼마나 모순들로 가득찬가? 아름답지만 한 편으로는 얼마나 서글픈가.
장미꽃을 주고받는 식의, 삶의 화려한 포즈는 우리에게는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가난한 삶이란 말하자면 우리들 생활에 절박한 포즈 외엔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 삶이란 뜻이었다. -p28
하루키는 말한다. 문장, 문장이 가장 중요하다고. 그렇다. 아무리 좋은 내용, 좋은 스토리, 좋은 등장인물이 있으면 무엇하랴. 그것을 적확하게 표현하고 심장을 두드리게 할 수 있는 도구가 없다면. 양귀자씨 문장이 좋았다. 좋았던 문장들이 많았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말을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표현으로 길게 하는 사람이다. -p51
아! 너무나 공감갔다. 나 또한 그렇다. 흔히 말을 길게 하면 말을 잘한다고 본인도 주위 사람도 착각하는 거 같다. 나는 반대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말을 뻔한 표현으로 길게 말하고 있는 사람의 말을 듣고 있으면 정말 말을 끊을 수도 없고 딴 생각을 할 수도 없고 힘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 일에 어머니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나의 실수였다. 뽀글래 미장원이란 명칭에 대해 우리 식구는 이미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너무나 오래된 어머니의 단골 미장원이어서 지금은 그냥 하나의 이름일 뿐이었는데...... -p139
웃기면서 슬픈 장면이었다. 가난은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다. 촌스러운 파마, 촌스러운 이름. 예전에 어딘 가에서 본 글인데 가난한 사람이 부자인 척 사람들을 속이다가 그만 음식점에서 탄로 났다고 한다. 음식점에서 주로 서민들이 먹는 음식을 주문해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몹시 궁금했다. 그가 나영규이든 김장우이든 아니면 전혀 다른 사람이든 간에, 이 사람과 결혼하고야 말겠어, 라는 결심은 언제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지금 결혼하여 살고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p165
나 역시 몹시 궁금하다. 어떻게 하면 결혼하고야 말겠어라는 결심이 생기는 것일까? 언제 어떻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p173
습관적으로 '까' 뒤에 ?를 쓰다가 지운다. 저자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게 아니구나.
사랑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자에게는 스스럼없이 누추한 현실을 보일 수 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사랑 앞에서는 그 일이 쉽지 않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자존심이었다. -p220
공감갔다. 잘 보이고 싶은 상대에게는 자신의 단점이나 숨기고 싶은 것들이 있다. 그렇지 않은 상대에게는 스스럼없이 단점, 누추한 현실을 보일 수 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였다. 인간을 보고 배운다는 것은 언제라도 흥미가 있는 일이었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어디 있으랴. -p229
모순적이다. 인생에는 행복 뿐 아니라 불행, 고통도 필요하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일 년쯤 전, 내가 한 말을 수정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p296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작가가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주제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모두 모순 속에서 살아간다. 어리석음과 모순을 안고서 사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하지만 덕분에 우리는 발전할 수 있다. 이 또한 모순이리라.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정신과 육체, 풍요와 빈곤 -p302
위는 <모순>의 창작노트 곳곳에 쓰인 복합어 들이다.
새삼스런 강조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간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 하나의 표제어에 덧붙여지는 반대어는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의 이름에 다름 아닌 것이다.
-p303
스티브 잡스의 말이 떠오른다. 모든 것에는 반대급부가 따른다. 항상 반대 편을 살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