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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천 가족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4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일영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눈이 왔다. 9년만에 최악의 폭설이란다. 꼼짝 없이 달님공주와 단둘이 집에 갇혔다. 헬스위크라고 표현한 대로, 요 3주는 죽는 줄 알았다. 달님공주는 눈에 갇혀 있었던 요 근간 완벽하게 변신했다.
만 4세, 최연소 오덕후 히키코모리로! (...)
남들은 눈썰매를 탄다, 눈싸움을 한다, 눈사람을 만든다 하면서 25센티짜리 슈퍼울트라급 폭설을 맞아 밖에서 하루 종일 장난에 여념이 없는데, 우리 공주는 고고하게 안방 TV를 점령하고 앉아 절대 엉덩이를 떼는 법이 없다. 엄마표 플라스틱 대야 썰매를 들이대 봐도 "난 절대 그런 이상한 썰매에 내 엉덩이를 얹을 수 없어!" 하고 꿋꿋히 버틴다. 죽겠다.
그러던 달님공주가 이번에 학원을 가게 되었다. 눈속에 엄마가 죽어라고 발품 팔아 물색해 낸 미술학원이다. 일주일에 5번, 8만 5천원이란다. 차도 보내 준단다. 앗싸 가오리 절로 춤이 나온다. 드디어 겨울 시즌 달님공주의 일과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열심히 일한 그대, 즐겨라! 이럴 땐 엄마도 좀 쉬어 줘야 한다. 이럴 땐 골치 아픈 책 읽으면 손해다. 감정과 감정이 뒤섞이고 치고박는 드라마틱한 소설은 절대 금물. 뿌듯한 기분을 유지하면서 기분 좋게 으하하하 웃을 수 있는 책이 좋다.
그래서 이번 책은 아주 즐겁게 읽었다. "우리 몸속엔 주체할 수 없는 바보의 피가 흐릅니다!" 덜 떨어진 너구리 가족 이야기다. 우리는 둔갑하는 동물 하면 여우가 익숙한데 일본에는 너구리가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미신이 있단다. 일본 만화나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신통력을 가진 너구리'가 소재다.
감상 포인트 1. 나사가 하나씩 빠졌지만 그래도 더없이 사랑스러운 4형제
이 소설의 주된 포인트이자 이야기의 얼개를 만들어가는 이들은 단연 이들 미덥잖은 4형제다.
장남의 위엄과 아버지의 대업을 이어받고자 하는 야망을 갖췄지만 정작 급할 때면 정신줄을 놓는 첫째. 의욕도 없고 기개도 없고 '사는 게 그냥 귀찮아' 우물안 개구리로 둔갑한 후 아예 너구리로 돌아오는 법마저 까먹은 대책 없는 둘째. 늙은 텐구 아카다마 선생과 아름다운 벤텐에게 휘둘리기 일쑤인 셋째와, 너무 어려 둔갑도 제대로 못하고 하릴없이 공돌이로 사는 넷째.
이들이 한데 어울려 만들어가는 '한심한' 이야기는 더없이 친근하고 사랑스럽다.
감상 포인트 2. 노년의 청춘, 벤텐을 향한 대책 없는 일편단심 아카다마 선생의 러브스토리
화려한 도회적 이미지의 여자 텐구 벤텐은 이 이야기에서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에게 죽자고 목을 매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빨 빠진 호랑이' 아카다마 선생이다. 왕년엔 누구나 그랬듯이 깃발 좀 날리고 살았던 위대한 텐구 아카다마 선생은 자신의 제자이자 정부이기도 했던 벤텐의 간계에 빠져 가진 것 다 내주고 집도 절도 잃은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벤텐에 대한 그의 사랑은 식을 줄을 모른다. 주착 없는 연애편지 공세에, 한번만 만나 달라고 애걸을 하지만 얌체에다 못돼 빠진 벤텐이 그의 마음을 알아 줄지는 미지수다.
감상 포인트 3. 그래서 그집 아버지를 냄비요리로 만든 주범은 누구야?
너구리와 텐구들이 어울려 지지고 볶는 사건들을 읽으면서 웃고 즐기던 독자는 슬슬 궁금증이 일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눔의 아버지는 대체 왜 그렇게 된 건데? 냄비 속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의연했다는' 위대한 니세에몬 소이치로의 죽음은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면서 사건 해결의 실마리이기도 하다. 소이치로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모든 사람의 증언이 맞물리면서 사건은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는다.
감상 포인트 4. 이쪽도 만만찮은 바보다! 시모가모 가족의 라이벌 에비스가와 형제
하는 일마다 훼방을 놓는 얄미운 에비스가와 형제의 현란한 바보짓을 보는 것도 나름 관전 포인트다. 사자성어를 좋아한다는 얼빠진 형제 금각과 은각이 사건마다 부르짖는 고사성어는 장면장면마다 폭소를 유발케 한다. 권토중래와 오월동주라는 사자성어로 크게 웃어 보고 싶다면 이들이 벌이고 다니는 소동을 놓치기 말길.
감상 포인트 4. 모든 것을 감싸안는 엄마 너구리의 따스한 사랑
낙천가 엄마 너구리는 이 소설에서 가장 행복한 인물인 듯싶다. 비가 오고 천둥이 치면 오금이 저려 둔갑도 풀리고 마는 겁쟁이 너구리지만, 이 엄마가 사람들 눈에 띄어 화를 당할까봐 네 명의 아들들은 천둥과 비가 오는 날이면 만사 젖히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뛰어온다. 화가 나면 아들에게도 나가 죽으라며 발길로 뻥뻥 걷어차는 터프한 엄마지만, 아버지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고 우물에 틀어박혀 버린 아들에게 분노하는 대신 다정하게 감싸안는 엄마이기도 하다. 이 엄마가 없었다면 과연 이 허무맹랑한 너구리 가족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었을까?
모리미 토시히코라는 작가는 나에게는 매우 생소한 작가다. 띠지를 보니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가 이 사람 작품이라는데, 이걸 읽고 나니 그 책도 한번 읽어 보고 싶은 기분이 든다. 너구리 가족 이야기는 이게 1부고, 3부작 목표에 2부는 잡지에 연재중이란다. 다음 권도 부디 정발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