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직업 - 독자, 저자, 그리고 편집자의 삶 마음산책 직업 시리즈
이은혜 지음 / 마음산책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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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며칠 동안 개인 SNS에 한 권의 책에 대해 글을 좀 많이 썼습니다.

취합해서 올려봅니다. 여러 날에 걸쳐 쓴 글이다 보니, 글 톤이 왔다갔다합니다. 한줄 요약하면, 책 <읽는 직업> 추천입니다.

 

9월 15일

여름내 기다리던 책이 있다. 한 출판사 편집장의 책인데, 그와는 올봄 몇 차례 메일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그는 여름 안에 글을 마무리 짓고 책을 낼 거라고 했는데, 출간하는 '마음산책' 출판사피셜에 의하면 책은 인쇄 중이고 다음 주 정도면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때로 웬만한 작가들보다 편집자들이 쓰는 글을 더 좋아하기도 하는데, 이 편집장의 글은 특히나 그렇다.

그가 쓴 글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때로는 마음이 동하여 울컥하기도 한다. 자기 글을 쓰는 편집자는 종종 있으나 그가 쓴 글은 유독 설득력이 강하여, 나는 그가 쓴 글 앞에서는 쉽게 순응하고 만다.

출판사에 투고하고 책을 내면서 몇몇 편집자 분들과 인연이 되어 연락을 주고받는다.

편집자도 사람인지라 그 성격이 각각 다른데, 깨발랄한 편집자가 있는가 하면, 매우 진지한 편집자도 있다. 나는 상대방의 성격에 맞춰 같이 진지하게 굴거나, 드립을 친다.

책을 내는 이 편집장은 스스로를 아주 진지한 축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느낄 수 있는 그가 말하는 진지함이란 게 결국 글과 책, 저자와 독자, 출판과 편집에 관련된 것들이다 보니, 나는 또 그 진지함이 너무 좋은 것이다.

글항아리 출판사 이은혜 편집장의 책이 곧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나오려나보다.

제목은 <읽는 직업>인 것 같다.

글쟁이로서, 또 독자로서.
여름내 기다리던 책이다.

 

9월 18일

글항아리 출판사 이은혜 편집장님의 책이 서점에 등록되었다. 주문하면 화요일에 받을 수 있다고. 저는 일단 주문했습니다만.

편집자의 첫 책에 이렇게 쟁쟁한 분들의 추천사가 붙은 걸 보니 아, 역시 이분이 그동안 책을 허투루 만들진 않으셨구나, 많은 작가 분들이나 출판업계에 있는 분들에게 지지를 받고 계시는구나 싶다.

내가 알기로 이은혜 편집장님 페북은 하시고, 인스타는 안 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페북에 들어가 봐도 책이 나온다는 말 한마디 없으시다.

나라면 막 동네방네 소문내고 자랑하고 그럴 텐데, 어떻게 이렇게 침착하실 수가 있는가 싶고.

평소 쓰시는 글을 봐도,
"나는 침착하고 진중한 사람." 느낌이 들긴 하지만.

편집장님은 책이 얼마나 알려질지 긴장된다고 하셨는데, 나는 이 책 되게 잘 될 것 같다.

글이 좋으니까.

 

9월 22일

글항아리 이은혜 편집장님의 책이 도착했다. 퇴근하고 집에 가서 천천히 읽어봐야지.

책을 낸 마음산책에서는 두꺼운 종이를 썼다고 했는데, 실제 그렇다. 단행본 분량으로 결코 많지 않은 분량일 텐데, 책은 꽤 묵직하다.

책의 첫 글이 <저자 앓이>인 점이 맘에 든다. 서울신문 '이은혜의 책 사이로 달리다'라는 코너에 썼던 <저자 앓이, 저자와 헤어지기>라는 글을 수정하여 실었다. 서울신문 원문에 쓰였던 글에서 좋아하는 문장이 있었다.

카피와 보도자료를 써도 편집자는 작가가 아니며, 아무리 책을 읽어도 편집자는 학자가 아니다, 하는 문장 뒤에-
'하지만 유일한 장점을 하나 꼽자면 싹수는 있다는 것이다.'라는 문장이 원문엔 있었는데 책에서는 빠진 듯하다.

칼럼이 책으로 변모하면서, 단어 선택에 대한 고심으로 읽힌다. 나는 사실 편집자가 스스로를 가리켜, 우리는 싹수는 있는 사람들, 하는 얘기가 재밌었는데. ^^
싹수만 있다고 하기엔 이은혜 편집장님의 필력은 대단한 것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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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이은혜 편집장님 페북에 출간 축하 댓글을 달고서, 답글을 받았다.
편집장님이 나에게 쓴 '함께하지 못했지만'이라는 짧은 글에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담겼다.

올봄,
우연히 이은혜 편집장님의 글을 읽었고,
사연이 피어났다가,
인연이 될 뻔하였으나,
겸연이 일어났고, 하마터면
절연으로 마무리될 수도 있었을까 싶지만.

이은혜 편집장님과 나눈 이야기는 즐거웠기에 우리는 또 이런저런 연유로 종종 연락을 주고받는다.

사실 나한테는 좀 고마운 편집자다.
항상 나를 부르실 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셔서, 민망하긴 하지만.
어쨌든 나에게 이 책의 제일 기대되는 독자,라고 불러주셨으니, 잘 읽어봐야지.

나는 좋은 독서가 타입은 아니지만,
글이 좋으니까 잘 읽힐 거라 생각한다.

책의 의도대로 책을 사랑하는 많은 독자, 편집자, 저자들이 읽어보면
좋은 책일 것이다.

 

9월 22일

나는 책에 관한 피드를 올릴 때, 책의 문장을 인용하거나, 소개를 하는 경우는 많지 않고, 책을 보며 떠오른 느낌이나 내 일상을 쓰는 일이 많다.

이유는 여럿 있겠으나, 어쨌든 나는 읽는 사람보다는 쓰는 사람에 가깝기 때문에, 읽은 책을 통해서도 내 이야기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고 그게 조금 더 편하기 때문이다.

서평이나 독후감을 잘 쓰지 못하고 아무 말 대잔치를 자주 벌인다는 말을 포장해보았다.

여름 내 기다렸던 책인 글항아리 이은혜 편집장의 <읽는 직업>을 읽은 뒤에도 마찬가지일 테다.

나는 출판 편집자의 글을 많이 좋아하는 편이고, 왜 그런지를 생각해본 적 있다.
보통은 SNS에 마구 쓰인 맞춤법과 띄어쓰기의 글을 보다가 나름 정제된 편집자의 글이 정갈해서 그런 게 아닐까 결론지었는데, 이은혜 편집장의 글은 유독 좋다.

정치학을 전공했다는 그는 삶에서 마주하는 대부분의 학문분야에 박학다식해 보인다. 정치, 사회, 문화, 과학, 예술, 문학 등. 물론 그의 이 넓은 배경지식은 거미줄처럼 이어 읽게 된다는 책에 기인할 테다.

한마디로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나는 그의 주장이 담긴 많은 문장에 설득당하곤 한다. 이은혜 편집장의 글을 읽으면서 전부터 진중하고 진지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는 실제로 자신을 진지한 축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책을 읽고서야 그 진지함의 원인을 알아냈다.

느낌표. 내가 책을 제대로 읽은 게 맞다면 이은혜 편집장은 책에서 느낌표를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이건 글을 쓰려하는 나에게는 나름 중요한 부분인데,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글쓰기의 모습이기도 하고 책 후반부로 가면서는, 아니 정말 느낌표가 한 번도 안 나오는 건가? 하는 기대감을 갖기에 이르렀다. (한 두 번 나왔을지도 모르겠으나, 내 기억엔 없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느낌표는 자기가 한 농담에 스스로 웃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은혜 편집장님은 한국의 피츠제럴드입니까? 

이은혜 편집장의 글은 보고 있으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심적으로 묘한 안정감을 주는데,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문체나 느낌표의 지양에서 그런 모습이 더 부각되는 거 같다.

그래서 가끔은 감정이 드러나는 이은혜 편집장의 글이 반가울 때도 있다. 글항아리의 팩트첵커 황치영 선생님을 이야기할 때 이은혜 편집장은 조금 마음을 보이는 것 같다.

책은 저자, 편집자, 독자에 관한 세 가지 파트로 나뉘었는데 사실은 모두 책에 관한 글이라고 봐도 되겠다. 물론 나는 저자 파트를 읽으며 마음이 가장 동한다.

내가 이은혜 편집장을 존경하게 된 이유는 투고 원고를 대하는 그의 자세 때문이었다. 기획 출간의 꽃은 투고 원고 아니겠는가,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순전히 투고의 방식으로만 책을 내었으므로 해보는 소리다.

그러니 나는 투고 원고를 소홀히 하는 편집자보다는 출판사의 투고함을 소중히 여기는 편집자들에게 마음이 더 가는 수밖에 없다.

투고 원고를 대하는 이은혜 편집장의 마음은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편집자의 모습이었다. 책에서도 투고 원고에 대한 이런저런 사연이 소개되어 흥미롭다.

 

책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편집자의 책을 편집하는 편집자의 고충이란 어떨까 싶다. 분문 페이지 안쪽 깊숙이 책 제목과 꼭지 제목을 넣은 것이 인상적이다. 문단 들여쓰기도 넓게 가져가서 가독성이 좋아 보인다. 종이는 두꺼워서 가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두장씩 넘기는 것은 아닌지 확인을 해야 했다. 책 예쁘다. 표지의 공간은 '열화당'이라고.

책에 관해선 할 이야기가 많다.
글에 관해서도 할 이야기가 많다.
이은혜 편집장에 대해 할 얘기도 조금은 있다.
몇몇 꼭지에 대해선 따로 글을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이 정도로 쓰고 잠에 들어야지.
내일 또 떠들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어지간하면 같은 책을 두 번 이상 읽지 않지만, <읽는 직업>은 재독을 할 것이다.

몇몇 꼭지를 읽으면서는, 다소간 울컥하기도 했다. 다음엔 그 울컥거림에 대해 쓸 수 있기를.

책은 추천.

느낌표가 없는 글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

 

9월 23일

알라딘에 주문한 몇 권의 책은 금요일에 도착할 예정이다. 그때까지 <읽는 직업>에 대해 조금 더 떠들 수 있을 듯하다.

책을 낸 마음산책 출판사 인스타 계정에 올라오는 <읽는 직업> 게시물보다 내가 올리는 <읽는 직업> 게시물이 더 많다. 마음산책에서는 나를 <읽는 직업> 홍보대사로 임명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살면서 한 번도 뵙지 못한 출판인이라도 호감이 가고 존경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나에게는 마음산책 출판사의 정은숙 대표, 글항아리 출판사의 이은혜 편집장이 그러하다.

 

물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편집자는 내 원고 두 편을 두 권의 책으로 만들어준 편집자 K와 다음 책을 함께할 편집자 S다. 글쟁이는 자기 글을 좋아해 주는 편집자에게 무조건의 마음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읽는 직업>에서는 책 한 권만 함께하고 헤어질 저자와 앞으로도 계속 인연을 이어가고픈 저자에 대해 나온다. 글을 쓰는 누구라도 후자를 바라겠지.

나는 앞서 낸 두 권의 책을 같은 출판사, 같은 편집자와 작업했다. 다음 책을 함께할 S는 미팅 자리에서 "한 출판사에서 연달아 책을 내는 게 좋은 거 같아요. 그러면 독자들은 어? 이 사람에게 뭔가 있나 보다. 글이 괜찮은가 보다 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거든요."라고 말했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겠으나 대략 이런 뉘앙스의 말씀이었다. 근데 나는 왜 같은 출판사에서 연달아 책을 냈는데 관심을 못 받는 겁니까아아!

나 역시 같은 편집자와 계속 함께 작업하길 바란다. 그래서 앞으로 새로운 원고를 쓰게 된다면 편집자 K와 S에게 먼저 보낼 생각인데, 물론 그때 원고가 까인다면 받을 데미지는 무척 크겠지만, 먼 훗날의 일이니 걱정은 밀어 두자. 이런 데미지가 우려되어 네 번째 책은 청탁을 받으면 좋겠다 싶지만, 무명 글쟁이에게 청탁은 요원하다. 쳇.

저자와 편집자의 관계는 무척이나 묘한데, 나는 살면서 누군가에게 폐 끼치는 것을 싫어해서 책을 내준 출판사와 편집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면서도 책이 잘 안 팔리면 너무 미안하여 견딜 수가 없다. 내가 생각하는 아, 이 정도면 폐 끼치는 건 아니구나 하는 마지노선은 중쇄를 찍는 것인데 두 번째로 낸 책은 아직도 1쇄다.
도와주세요.

이은혜 편집장의 생각이 좋았던 까닭은 평소 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지향하는 점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읽는 직업>에서는 부와는 거리가 멀었던 탕누어를 얘기하며 <부의 추월차선> 같은 책이 트렌드로 올라오는 것에 대해 놀라워하기도 하고, <모방하는 편집자들> 꼭지에서는 아예 이런 문장이 나온다.

"어느 날 서점가에 비슷한 책들이 출몰하기 시작한다. 나는 나로 살 것이며, 조금 더 예민해지기로 마음먹었고, 열심히 살지 않을 것이다."

출판에도 트렌드라는 게 있어서 멘토, 힐링, 위로, 여행, 퇴사, 자존감 같은 키워드들의 책이 쏟아진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작가정신 같은 게 있다면 이런 트렌드를 답습하지 않고 오리지날리티를 이루는 것이다. 물론 이런 트렌드 소재의 글을 쓰는 작가 분들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주변에는 퇴사, 여행책을 쓰시는 분들도 계시고 나는 그분들을 존중한다.

다만 나는 그런 것에 큰 관심이 없다. 투고로만 책을 내다보니 항상 출간까지의 텀이 있다. 이 기간 가장 두려운 것은 내가 준비하는 책과 비슷한 소재의 책이 앞서 나오는 것이다. 내 글이 누군가의 아류로 보이는 것이 나는 끔찍하게 싫다.

두 번째 책을 내고, 관련 실용서는 많이 봤지만 이런 에세이는 처음이네요, 하는 평은 그래서 좋았다.

 

세 번째 책과 비슷한 소재의 책이 나오면 참고 삼아 읽는다. 이은혜 편집장의 <읽는 직업>은 내 세 번째 책과 조금은 비슷한 결일지도 모른다.

이은혜 편집장님은 8월 말에서 9월 초까지 원고를 마감하겠다며 나와 비슷한 시기에 책이 나오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바 있는데 생각보다 훨씬 일찍 내셨다.
이은혜 편집장님, 이거 배신인데요.

이은혜 편집장님과 봄날에 메일을 주고받았던 까닭도 이런 연유였으리라.

세 번째 책을 내기 전 이은혜 편집장의 <읽는 직업>을 읽게 되어서 좋다.

이은혜 편집장님은 스스로를 무명의 편집자라며 책이 잘 팔릴지 긴장된다고 하셨는데, 내가 보기엔 순 엄살이고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듯하다.

알라딘에서 <읽는 직업> 판매지수는 7,500을 넘어섰다. 나는 경험해보지 못한 숫자다.
 
9월 24일

이은혜 <읽는 직업>의 '얼마나 손댈 것인가'라는 꼭지에는 작가 레이먼드 카버와 편집자 고든 리시의 일화를 언급하며, 글을 고치는 편집자 이야기가 나온다.

책을 쓴 이은혜 편집장은 글항아리 출판사에 적을 두고 있고, 글항아리는 문학동네의 임프린트로 시작하면서 지금도 몇몇 문학동네의 계열사와 같은 건물에서 근무를 하는 듯하다.

지난 여름 파주출판도시에 들렀던 나는 괜시리 글항아리 출판사가 있는 건물 근처에도 어슬렁거리면서, 아 이곳이 벽돌책에 일가견이 있는 글항아리군 흠흠, 했던 적도 있다.

여하튼 그런 연유로 이은혜 편집장은 가끔 계열사 편집자의 교정지를 엿볼 수 있는 기회도 생긴단다. 어느날은 붉은 펜으로 심하게 얼룩져 원본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타출판사 편집자의 교정지를 보면서 두가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원고가 많이 안 좋구나,
저렇게 많이 고쳐도 되는걸까. 라는.

이 이야기는 책 <읽는 직업>에 나오는 에피소드는 아니고, 이은혜 편집장의 페북에 올라온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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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나는 음악 에세이를 출판사에 투고하고 T편집자를 만났다. 그는 계약을 했으면 좋겠다며 내 원고 두 꼭지를 샘플삼아 편집하여 보내주었는데, 내가 쓴 글과는 많이 달라져있었다.

여러 방식의 종결어미로 문장을 끝냈던 글은 대부분 ~~다. 라는 어미로 수정되어 있었다. 아무리 봐도 내 글 같지가 않았고, 무엇보다 읽는 재미가 없었다.

당시 T편집자는 오랜시간 교육서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다가 독립을 한 상태였는데, 이런 교육서를 만들던 습관이 고스란히 원고 수정에 묻어나는 듯했다. 나는 결국 T 편집자와 계약하지 않았고, T는 독립 1년 만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T의 회사에서 마지막으로 출간된 책은 몇 개월 만에 절판이 되었고, 나는 그때 계약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편집자마다 꼭 고치고 싶은 단어나 표현이 있을 테다. <읽는 직업>을 쓴 이은혜 편집장은 세 번 이상의 중복 단어, 동어반복, 생략한 접속사(예- 때문에)를 보면 고치고 싶다고 썼다.
 
나는 스스로 작가로 부르긴 좀 민망하고 지금도 누군가 나를 작가라고 불러주면 부끄럽다. 그럼에도 내게 쥐똥만큼의 작가정신이란 게 있다면, 그러니까 내가 최소한 작가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독창성을 발휘하고, 원문에 가깝게 책이 나올 만한 필력을 갖춰야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 그때는 작가라는 호칭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스스로를 '천재 작가'라고 칭하는 글쓰기 아카데미의 이상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와서 생긴 기제다.

지난 여름 세 번째 책을 맡은 편집자 S와의 미팅 자리에서 동어반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겹치는 이야기가 있으면 빼자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그러면서 나는 S에게 조심스레 여쭤보았다.

"편집자님, 지금 제 원고를 손 보신다고 가정할 때 빨간펜을 많이 쓰실까요?"

물론, 누구라도 글쟁이를 앞에 대놓고 "네, 끔찍한 원고네요. 아주 피바다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답하는 편집자는 없겠지만.
나는 S의 대답에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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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지키려는 글쟁이와 글을 고치려는 편집자의 싸움은 건강해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필요한 소모전처럼 보일 때도 있다.

나는 대체로 편집자의 의견에 따르는 편이다. 다만 그 수정 내용이 많지 않았으면 하는 욕심은 있다. 편집자가 손댈 게 많이 없는 그런 글을 쓰면, 그때는 스스로 작가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겠다는 생각.

내가 레이먼드 카버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나는 여러모로 싫었을 것 같다.

나는 며칠 전 세 번째 책의 퇴고 원고를 S에게 보냈고, 초조한 마음으로 피드백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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