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욕을 한다. 장난이라고 하면서 친구에게 폭력을 쓴다. 불법 영상을 본다. 협박한다.

아이들의 행동은 나쁜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를 야단치고 처벌한다.

벌써부터 이렇게 나쁜 행동을 하면 나중에 뭐가 되려고 그러니?

나중에? 뭐 지금 당신과 다르지 않은 어른이 되겠지

아이들 대상으로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할 때 취해야할 행동은 늘 어정쩡했다.

어른 나쁜 짓거리가 있으니 조심하거라? 혹은 이렇게 나쁜 일을 하면 절대 안된다?

훈계하고 타이르고 겁박하는 것 말고 없다. 부끄럽게도 말이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 오랫동안 폭력예방교육을 하셨던 선생님의 말씀이 가슴을 쳤다.

그분은 아이들에게 어떤 짓이건 니들이 하는 일은 잘못된 일이고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단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욕도 결국은 어른들이 쓰던거지.

불법 동영상도 어른들이 만들고 아무나 보라고 유통시켰지

범죄도 어른들이 하던거야

말로만 하지말라고 하면 뭐하지 저희들은 나쁜 거 알면서 혹은 모른 척 하면서 다 하고 있는데. 애들한테만 하지마라 잔소리하고 훈계하고 처벌하는거 문제가 있는거 아니냐

우린 그런 어른들이 책임없이 만든 것 행동하는 것 말하는 거 아무 생각없이 따라하지 말자

자존심상하잖니?

저희들은 하면서 아이들한테는 하지말라고 하는거 너무 우습지 않니

우린 진작 안한다~ 이런 마음이면 어떨까?

뭐 더 근사하게 말했지만 난 이렇게밖에 요약을 못하지만 그 말이 가슴을 쳤다.

행동의 잘못을 탓하는 게 아니라 잘못된 점들을 알려주는 것 그것이 모든 폭력을 막는 길이라는 요지였다.

 

요즘 아이들이 무서운 건 무서움을 모르고 있는 어른들의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자기 흠은 보지도 못하면서 어른들은 쉽게 말한다.

요즘 애들은 우리때랑 달라. 얼마나 까졌는지. 얼마나 무서운지.

그런데 그 무서운 아이를 키우고 훈육하고 자라게 만든건 어른이다.

물론 아무리 좋은 걸 보여주고 들려주고 말해줘도 삐뚤게 자라는 아이들도 있다. 세상은 언제나 다양하니까.

아이들은 어른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

나를 바라보고 말하는 훈계 잔소리 꼰대같은 언어들이 나에게 스며들어 내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무심코 하는 행동들 남들은 모르겠지 하면서 내뱉는 말들 몸짓들 그리고 부끄러움 없는 모든 것들을 습득할 뿐이다. 그게 더 쉽고 자연스러우니까.

 

책에서 가장 좋은 건 서문이었다.

아이는 어른이 없을 때 자란다는 말.

아이는 어쩌면 어른이 없어야 더 잘 자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아이들은 지루해서 온몸을 뒤트는 그 순간 자란다고 했다. 숙제가 있고 학원이 있고 시간이 모자라 정신없이 지식을 넣고 교양을 넣고 체력을 키우는 동안 자라는 것이 아니라 아무 할 일도 없고 아무런 것도 배우지 않아서 지루하고 지루해서 온몸이 뒤틀리는 그 순간 아이들은 쑥쑥 자란다고 했다. 그 순간이 통제하고 간섭하는 어른이 없는 그 순간이다.

꽤 괜찮은 어른이 아이들을 위해 쓴 책이다. 정말 희귀한...

좋은 아이들이 사고 없이 아픔 없이 잘 자라만 준다면 분명 좋은 어른이 된다.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까 어떻게 가르칠까 고민할 시간에 내가 얼마나 좋은 어른이 될까 얼마나 괜찮은 사람이 될까를 고민하고 행동하는게 더 좋은 교육이고 양육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는 중이니까.

 

.... 책에서 배운 것들......

  

있으나 보이지 않는 존재. 있지만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존재는 귀신이 된다.

사랑이 없는 장소는 흉가나 다름이 없다.

관심이 없는 곳도 폐가와 다르지 않다.

집에서 학교에서 나를 찾지 못하고 귀신처럼 살아가는 아이들이 있다. 아니 어른도 있다.

무심했던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을 때 너무 낯설다.

저 사람이 여기 있었던가? 왜 내가 몰랐을까? 정말 있었던 게 맞을까?

내 무심함은 생각하지 않고 그를 귀신보듯 한다. 그리고 놀라고 악몽이라 여긴다.

 

조용하고 소심하고 여린 목소리를 가진 주인공들이 있다.

말도 못하거나 아예 말을 하지 않거나 하는 아이들

저항을 표현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가지고 있는 볼륨도 저마다 다르다.

묻지 않는 어른들 앞에서 아이들은 입을 잃어버린다.

 

어른이 제 문제에 빠져 정신없는 동안 아이는 너무 일찍 철이 든다.

가끔 그렇게 서둘러 철이 든게 억울해서 아이는 침묵하고 귀를 닫고 입을 닫는다. 그리고 독립을 꿈꾼다. 혼잣말을 한다.

그러면 어른은 의젓하다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변신이야기는 가능성의 이야기다. 내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이야기

그건 뒤집어 말하면 내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당연하다

논리적으로 마땅해서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권위의 강요에 못이겨 부당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폭력은 대개 강자가 약자에게 행하곤 하지만 그 반대도 가능하다. 어떤 논리나 호소로도 상대의 편견 신념을 깨뜨릴 수 없다면 큰 절망이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문제들은 논리로 해결되지만 마음은 상상력을 발휘해야 이해할 수 있다.

추론의 과정이 누가 그랬지?”에서 왜 그랬지?” 그리고 반드시” “모두그래야 했을까를 생각해야한다.

 

착하다 와 못됐다는 딱 잘라 구분할 수 없다.

 

우리를 서럽고 힘들게 하는 건 삶의 복잡다단한 굴곡일 때도 있지만 과자부스러기 한 조각일 때도 있다. 긴 이야기를 전부 들어야만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 한 장면 때문에 그 사람 전체를 이해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수 있고 그것이 꼭 착각이라는 법은 없다.

 

사람들의 생활속에 슬픔의 자리를 가 차지한지 꽤 되었다. 슬픔이 내면을 향하는 감정이라면 하는 화는 밖으로 표출되는 감정이다.

슬픈 감정=약한 사람. 슬픔은 권하고 싶지 않다.

슬픔은 화가 지니지 못한 힘을 가지고 있다.

자기 안으로 깊숙이 슬퍼 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두를 위한 성평등 공부 - 성평등 교육에 관한 여덟 가지 질문
이나영 외 지음 / 프로젝트P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폭력예방교육 참고 도서로 구입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전달하는 건 정말 다른 일이다.

머리로 알고 있는 걸 내 언어로 풀어서 전달하는 건 쉽지 않다. 내 머리속도 정리안한지 한 참이라 어디에 뭐가 들어있고 어떻게 이어지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단 쉽게 정리된 책이 필요하다.

이제 이런 수준의 책은 제법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읽어도 읽어도 늘 새로운 건

내가 어쩌면 단기 기억상실증이 있는게 아닐까 싶다.

늘 새로우니 좋은 점도 있지만... 이렇게 계속 같은 자리만 맴돌면 어지러워서 어쩌나...

 

성평등에 대해 혹은 여성폭력에 대해 알고 싶다면 입문용으로도 좋고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자신을 믿을 수 없을 때도 좋다.

혹은 내가 아는 걸 쉽게 전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면 더욱 좋다.

아이랑 함께 읽어야지 라고 핑계대며 구입하면 더 실속있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결같다는 것이 그래서 좋았다라고 할 때도 있고 그래서 힘들다라고 할 때가 있다.

한결같은 그 사람 그 대상의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그는 그대로 한결같이 그 사람일 뿐인데 그 존재일 뿐인데 내 마음이 바뀌는 것이다. 한결같아서 좋았던 그가 아직도 여전하다는 게 갸우뚱하게 만들고 힘들게 만들고 싫어질 수도 있게 한다.

결국 내 마음이다.

다른 독자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처음 읽은 정희진의 책의 첫인상은 쨍하다였다

한겨울 깊이 묻어놓은 김장독에서 꺼내어 처음 들이킨 동치미의 국물과 처음 베어물은 동치미 무의 맛같은 거였다. 알싸하고 차갑게 목을 넘어가는 그 맛. 매운데 달콤한 복잡한 그 맛이 어딘가 슴슴하면서도 자꾸 먹고 싶고 기억나는 그 맛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가정폭력이라는 현실을 알게 했고 여성폭력이라는 것을 마주하게 했다.

물론 이전에 교육을 받으며 알고 있었지만 복잡한 그것들을 하나로 일목요연하게 사실적으로 직면하게 했던 저자였다. 계속 찾아 읽으면서 젠더폭력과 여성문제등을 알게 되고 정리하게 된 나름 선생익도 했다. 그 이외에 다른 저자들의 글로 읽기가 확장되었고 교육이나 특강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저자들은 직접 강의를 듣는 기회를 가졌지만 이상하게 그렇게 많다는 정희진의 강의는 한 번도 인연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글들이 아직도 읽을게 남아서 아쉽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렇게 찾아다닌 교육들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지금 내가 다시 일을 하게 되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두권으로 새로운 책이 나왔다는 말에 당장 구입했다. 읽었다.

나는 독서는 저자에서 시작되지만 독자에서 마무리된다고 믿는 사람이다.

저자가 하고 싶은 말 전해야 한다고 믿는 말들을 글로 ㅆ고 출판하지만 결국 독자에게 닿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 말과 글들이 독자에게 전해지고 독자가 그것을 흡수하고 소화하고 제 것으로 만들었을 때 비로소 독서는 완성된다고 믿는다.

저자의 의도와 목적이 무엇이든 각각의 독자는 자기의 위치와 입장 그리고 그 순간 책을 선택할 때의 마음과 목적이 독서를 완성한다. 물론 저자의 의도와 독자의 목적이 완벽하게 합일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미묘하게 어긋나지만 그래도 의미는 전달되는 경우가 많을것이고 때로는 전혀 엉뚱한 곳이 꽂혀서 닿을 때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아 야를 전하고 싶었지만 독자는 책에서 오요를 받아들였을 수도 있고 저자는 이부분을 정말 핵심이라 생각해서 오랫동안 공들여 생각하고 연구해서 기록했지만 독자는 저자가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은 저부분 저문장에 꽂혀 인생의 책으로 올려놓기도 한다. 그렇다면 독자의 오독이라 잘못된 걸ᄁᆞ? 그건 아니다. 그냥 독서는 그렇다. 저자의 마음이 독자에게 닿지만 떠날 때의 그 마음과 의도가 고스란히 제대로 닿지 않는다. 사람은 저마다의 입장이 있고 위치가 있고 마음이 있으므로

수능이나 시험을 위한 독서나 문해라면 저자의 의도를 완벽하게 알아차리고 정확한 의미를 찾아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중요한 건 독자의 마음이고 생각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처음 정희진처럼 읽기를 읽었을 때( 이번 도서와 비슷한 독서에 관한 기록들이라)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다가 이내 포기했다. 일단 내가 찾아 읽기엔 너무 묵직하고 깊은 책들이었고 대부분 절판되기도 했고 그리고 밑줄을 모든 페이지에 다 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좋았다고 썼을 것이다. 어디가 왜 좋았는지도 썼겠지만 결국은 좋았다고

그리고 이번 독서에서 나는 조금 갸우뚱했다. 한결같아서 ...

여전히 깊고 어려워 내가 접하기 힘든 책이고 절판된 책들이었지만 그것때문은 아니다.

왜 이렇게 읽었을까? 왜 이렇게 생각이 튀어버릴ᄁᆞ? 하는 부분들에 갸우뚱하면서 여전하 공부하고 생각하고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 저자의 모습에 한결같아서 좋다가 한결같아서 괜히 뚱하다가 그랬다. 그도 어쩌면 원 책의 저자의 생각에 자기 생각과 입장을 얹은 독서를 해가고 있었고 나 역시 그의 책을 읽으며 내 입장과 생각을 얹을 뿐이다. 어쩌면 그도 한결같고 나도 한결같이 내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뿐이다. 그렇게 독서를 했구나

좋다 별로다... 라는 판단보다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건 나랑 다르구나. 이런 문장은 내가 생각했지만 표현하지 못했던 거였는데... 그렇게 편안하게 읽었다

저자가 변하거나 한결같거나 그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나이의 앞자리가 바뀐것처럼 부지불식간에 내가 변하고 있고 조금씩 꼰대는 아니더라도 곤대가 되고 있어서일지도 .. 모를 일이다.

이 시리즈가 5권이 나온다고 하는데... 앞으로 더 사볼지는 조금 두고 볼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미가 급한 탓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뭐든 결정해야한다는 꼰대기질이 있어서일 수도 있다.

아이에게 늘 이렇게 묻는다.

"이거라 저거 중에 뭐할거야?"

"이렇게 할거야? 아니면 저렇게 할거야?"

그래놓고 아이가 내켜하지 않으며 몸을 배배 꼬면 또 한 번 더 질문이 들어간다/

"엄마는 물어봤다. 니가 선택해야지."

아이는 마저못해 선택한다. " 이거 (혹은 저거)"

"니가 결정한거야.'

분명 아이에게 결정권을 줬고 최후의 선택은 아이가 한 거지만  아이는 뭔가 마뜩치 않고 속은 기분이고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든다. 이건 아닌거 같은데

그리고 나중에 이런 질문에 부딪친다

"니가 선택한거잖아. 내가 분명히 물어봤지? 니가 정하라고"

그리고 모든 책임은 아이에게... 어른인 나는 아이에게 결정권을 줬고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느낄 수 있도록 교육하고 이끈 참된 어른이 될까?

 

동의를 했느냐 아니냐는 문제는 간단치 않다.

세상에 모든 질문에서 세상의 모든 결정앞에서 백프로 나의 의견과 나의 입장과 나의 감정과 나의 이성으로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은 얼마나 될까?

반백인 나도 나의 지난 인생을 돌이켜보면 나의 결정이 정말 나의 결정이었을까 싶은 순간들 투성인것을....

사회적인 인식에 밀려서 이런게 정상이라는 사회적인 잣대에 밀려서

그래도 지식인인데 싶어서 내 본능과 상관없는 선택도 있고

남의 눈을 의식해서 어쩔 수 없이 골랐던 적도 있고

좋은 게 좋은 거지.. 다들 괜찮다는게 괜찮은 거 아니겠어? 라는 마음으로 한 결정도 있고

눈을 부라라진 않아도 무언의 압박과 내일 점심 도시락 반찬 걱정으로 내 용돈 삭감의 공포로 한 결정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데 이 정도는 괜찮은 거 아닐까? 내가 너무 까탈스럽고 이기적인 건 아닐까 하는 갈팡질팡하는 마음에  이런게 사랑이라는 압박에 내린 결정들 등등등

전날은 호쾌하게 내린 결정에 대해 다음날 마음을 바꾸는 것이 옳지 않다는 알 수 없는 자기 검열에 걸린 적도 있고 ....

동의는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삶의 순간순간 내가 결정해야하고 상대와 의견을 맞춰야 하는 일에서 모든 것이 나의 졀정권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점심 메뉴마저 그냥 남들 먹는대로 하는 마음으로 결정하는 게 많은데

여러가지 권력문제가 걸리고 사회적 입장 문제나 통념들이 뒤섞이면 내가 내 결정을 믿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동의는 중요한 문제다.

성적동의 역시 그렇다.

강간신화가 아직도 존재하고 그래서 강간문화라는 것이 그냥 장난처럼 암묵적인 풍조처럼 아직도 존재하는 지금  이다. 내가 강간을 당했음을 내가 입증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내가 전혀 동의하지 않았음을 보이는 증거로 들이밀지 않으면 쉽지 않은게 아직도 현실이다.

 

성적 동의는 나와 상대방의 신체적 자율권을 존중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마땅히 보여야 하는 신중함과 배려를 바탕으로 상대방을 대하고 내가 그런 것처럼 성 관계를 맺을 의사가 상대방에게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나의 신체 자율권을 행사하고 싶다면 당연히 타인의 신체적 자율권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모든 관계가 그렇지만 성관계 역시 상호 교류이기 때문이다.

 

섹스는 온몸으로 겪는 일이다. 동의 협상이란 이 가능성의 공간을 탐색하는 것이다. 나의 상대방이 각각 성적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것들 중에서 공통괸 부분을 찾아야 한다. 때로는 공통된 부분이 없을 수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고 서로의 성적관심사를 공유할 수 없을 수도 있다. 나를 좋아하지만 지금 당장 내가 하려는 것을 상대는 하기 싫을 수도 있다. 동의는 그렇다. 내가 상대와 함께 즐길 수 있는가?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을 맞춰가는 과정이다. 섹스든 다른 관계든 타인과 맺는 사이에서 한 쪽 일방만 즐거우면 그건 즐거움이 아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혹은 서로 호감을 가진 사람이 함꼐 즐겁고 함께 좋은 경험을 나눠야 한다. 그렇다면 동의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나의 즐거움만큼 상대의 즐거움도 존중하는 마음 그것이 동의의 시작이다.

 

경계는 내가 괜찮은 것과 괜찮지 않은 것들 사이에 놓인 선이다. 성적 상황 뿐 아니라 여타 사회적인 상황, 타인과의 일상적인 관계에도 관련이 있다. 실명을 공개하고 싶지 않은 마음. 소규모 그룹은 편하지만 불특정 다수의 모임은 불편한 마음 어떤 음식을 싫어하는 것 포옹보다는 악수가 더 좋은 것 개인이 자기 삶에 설정해놓은 사적인 경계들이다.

사실 내 경계를 아는 일은 무척 까다롭고 어렵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사실 그건 어려운 일이다. 남들이 좋아하는 것이라 나도 좋아하는 줄 알았고 마땅히 해온 것들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고 불쾌하지만 그걸 내색하면 예민하고 이상하게 보일까 말하지 못하는 것 그런 부분이 누구나 있지 않을까? 남이 어떻게 볼까 내가 이상한가? 문제가 있나 하는 마음에 내 경계를 타인에게 관습에 맞추는 일들....

경계를 알아간다는 건 시간이 걸리는 묹이지만 그건 알아야 한다. 혼자 정할 때도 있지만 자신의 경계에 대해 타인과 이야기해야만 개인의 자율권 행사와 사회적 규약 존중 사이의 갈등을 조정할 수 있고 서로의 경계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공간이 생긴다.

무례해 보일까봐 밀어붙이고 경계로 들어오는 것들을 허용한다면 ... 나의 불편함이 너의 무례함이 아니라 나의 까탈스러움이라고 하는 것들도 있다. 결과가 두려워서 그냥 용납하는 경우

그건 나의 신체적 자율권을 포기하는 일이고 상대의 신체적 자율권을 무시하는 일이다.

 

우리가 아는 섹스는 섹슈얼리티는 참 단순하다.

서로 좋아하고 손을 잡고 안고 스킨쉽을 나누고 키스하고 그리고 성기결합으로 이어지는 직선적인 과정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 사이에 다른 무엇이 끼어들 틈이 없고 단지 모든 단계는 성기결합을 (이성애자 남녀사이의)위한 전제조건일 뿐이다. 그렇게 이해되는 섹스에서 동의가 끼어들 곳은 단 하나 성기를 결합하느냐 마느냐 그것 뿐이다. 이런 이성애적인 담론과 함께 남자는 동물이고 흥분을 하면 참을 수가 없는 존재라는 남성성욕담론은 남성의 강간을 이해하고 어쩔 수 없다고 관대해질 핑계가 된다. 그렇다면 여성은? 남성보다 성관계에 소극적이고 안정적인 애정관계에서만 끌리는 요조숙녀라는 틀은 모든 섹스의 결정은 여자가 가진 것처럼 보여진다. 흥분앞에 제정신이 아닌 남성을 잘 구슬러서 안정적인 애정으로 관계를 해야하는 의무와 책임은 여성에게 있다고 본다. 그러니 그런 관계 이외의 모든 섹스는 음탕한 여자라는 낙인으로 이어진다.

흔히 비유되는 성녀와 탕녀의  두가지 뿐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자유연애가 등장하고 남성과 다르지 않은 성적 결정권을 가지는 적극적이고 현대적인 여성이라는 담론에서 모든 관계에서의 책임은 신여성인 그녀들에게 돌린다. 소극적이면 구태의연한 것이고  적극적이라면 신여성이라고 치켜세우면서도 뒤돌아서서는 성녀와 탕녀의 담론을 들이댄다

 

성적 결정권이라는 것 이것이 자율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관계에는 권력이 존재하고 권력은 다각적이고 다차원적이다. 명백히 자율적인 개인의 선택이란 쉽게 가려지지 않는다.

 

이 책은 성적 동의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결국 동의란 성적인 문제 이외의 부분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하는 문제다. 우리의 일상 전반에 침실 바깥의 상호관계에 진정한 동의 문화는 필요하다. 동의는 친구, 가족 동료 모르는 사람과의 소통에서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동의를 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어리고 도움이 필요하고 아직 세상의 결정을 내리기엔 미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먼저 살고 많이 알고 많이 경험한 나읙 결정이 절대적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게 옳다고 얄량한 나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리곤 주관대로 쥐어준 선택을 들먹이며 책임으로 옭가묶었다.

동의를 경험하지 못했고 동의를 배우지 못했다면 아이는 자라서 또다시 누군가에게 동의를 앗아갈 것이다. 그렇게 자랐으므로..

내가 편안한 경계에 대해서도 알지 못할 것이고 누군가 내 영역을 침입해도 예의라거나 사회 문화라는 이름으로 용납하고 참고 견딜 것이고 폭력으로 이어지더라도 그런 상황까지 몰고간 나의 탓으로 모든것을 돌릴 수도 있다. 그리고는 어디선가 폭발하고 누군가에게 그렇게 폭력을 가할 지도...

 

가장 기본이지만  늘 잊고 사는 것

편하고 쉽고 당연한 것이라고 믿고 그냥 밀어붙이는 관계는 위험하다.

간혹 느끼지만 당연한것이 가장 위험한 것이다.

동의에 대해 오래 생각해본다.

 

책은 처음에 많은 기대를 갖게 했다. 쉬운 말로 동의를 설명하고 쉽게 풀어가서 좋았는데

사실 그게 전부라 아쉽기도 하다.

다만 동의란 무엇보다 중요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걸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음은 확실하게 보여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혐오, 교실에 들어오다 - 학교 안 혐오 현상의 실태와 대책
이혜정 외 지음 / 살림터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학교는 지금 어떤 시민을 길러내는가?

학교는 모든 구성원에게 안전한 학습의 공간인가?

학교는 한 사람의 학생도 차별없이 안전하게 교육받을 수 있도록 누구도 포기하지 않는가?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권리와 창구가 존재하는가?

 

학교의 지배적 패러다임은 여전히 학업성취 대학입시 교육의 성과와 능력주의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소수자의 문제는 여전히 소주의 문제이며 주요 핵심이 아닌 논외거리일 뿐이다.

 

 

학급에서는 학업성취나 온라인 게임에서의 능력 좋은 성취를 얻지 못하는 것 모두가 혐오의 대상이 된다, 무엇인가를 잘 못하는 것이 혐오의 잉가 되는 학급 문화는 일의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 여기는 문화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무능력이 곧 혐오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기가 많은 남학생은 성적과 상관없이 학급내 상호작용에서 우위를 점한다. 학교의 공식적인 질서와 학생들간의 비공식적인 질서가 서로 복잡하게 얽히면서 누군가는 어떤 특성 때문에 혐오의 대상이 되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되지 않기도 한다. 따라서 혐오의 대상이 누구인가 보는 것은 그 집단의 특성이 아니라 학교와 학급의 질서에 주목하는 논의로 연결되어야 한다.

 

학생들사이의 엄마혐오의 의미를 담은 다양한 욕설이 만들어지고 유포되는 것은 그것이 인신공격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혐오의 표현을 담은 욕설이 얼마나 나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몰라서 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나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학교내의 혐오가 친한 사이에서 장난이라는 명분 하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보니 학생들은 강도가 세고 공격적인 혐오표현을 듣고도 문제제기를 하기 쉽지 않다. 장난스러운 분위기로 모두가 웃고 넘기는 상황에서 정색하는 것은 쉽지 않다. 더욱 심각한 것은 혐오표현이 친구들과의 대화에 끼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엄연히 혐오 표현의 한 방식임이도 불구하고 '장난'이라며 가볍게 치부되고 혐오 현상에 대한 문제제기가 또 다른 놀림거리가 되는 문화는 학생들 자신이 혐오 현상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스스로 살필 수 있는 기회를 구조적으로 차단하고 이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학생들은 자신이 들은 혐오 표현을 그냥 마음에 담아두거나 자신이 못 생긴 것을 인정하기도 한다. 심지어 자신이 혐오를 당하는 상황에서도 같이 도오하여 웃기도 한다. 이러한 문화는 학생들이 혐오를 당하거나 혐오상황을 목격하고도 이를 회피 무시 동조하는 것과 무관하지않으며 학교안 혐오 현상이 계속해서 유지 재생산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혐오상황에 정식으로 문제제기를 한다면 오히려 더 힘든 일이 생길까봐 두려워 하는 마음이 혐오 상황을 무시 또는 회피하게 만든다.

 

학업성취 중심의 학교문화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쉽지 않고 능력이 부족하고 노력하지 않는 존재에 대해 혐오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학생들이 이런 혐오현상을 반복하여 경험하게 되면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지양하고 다수의 학생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행동과 말을 선택하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상이라는 것은 원래 그러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인정하고 유포하는 임의적인 것이다.

 

학생들은 의도적으로 차별적 사고를 한 뒤 혐오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약자를 마음껏 혐오하는 사고를 가지게 된다.

 

 

학교안이 혐오는 약자를 향한다는 것은 맞지만 그 약자라는 존재가 다양하다. 그것이 성별일 수도 있고 학업능력의 차이일 수도 있고 다문화, 다양한 형태의 가족, 신체적조건 경제적인 조건등등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고 교묘해지는 혐오가 있고 폭력이 존재한다. 같은 성별 내에서의 미묘한 심리적인 갈등과 왕따도 혐오라고 할 수 있을까

넓게 본다면 학교내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폭력들이 혐오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 다만 그 폭력들의 형태를  규정하는 것이 쉽지 않고 혐오라는 것이 또래 문화처럼 놀이처럼 이어진다는데 참 어렵다.

 

한 학교를 정해서 학생들을 관찰하고 면담해서 연구결과를 내놓았지만 사실 여기 등장하는 '너른중학교'정도면 참 양호한 환경이다. 그리고 남녀사이의 혐오상황을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모든 학생들 환경이 비슷하고 학업성취가 높은 지역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이 세상의 모든 학교가 너른 중학교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연구 대상이 된 학생들을 선생님들에 의해 선발되었다면 그리고 외향적으로 스스로를 잘 드러내는 아이들 위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면 학교 전체에 분포된 혐오나 폭력이 모두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많은 한계가 있지만 학교내 혐오에 대해 한번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있는 계기는 된다

 

결국 서로가 연대하고 지지하며 견뎌내고 혐오를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혐오 감수성이 높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

무엇보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가르치는 교육이 아니라 어쩌면 학교의 한 축을 이루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 감수성 향상이 더 우선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든 환경에서 성장한다.

어른들의 훈육을 듣고 어른들이 만든 사회통념을 익히고 만들어 놓은 창을 통해 세상을 본다.

다른 창을 만들고 다양한 상황을 공감하고 존중하는 사회. 어쩌면 학생들을 향한 교육이나 처벌보다는 어른들이 변해야 하는 것이 더 우선이다.

 

많이 부족하지만 생각할 거리는 많은 책이다.

왠지 어떤 결론을 내려놓고 과정을 몰아간듯한 느낌도 들지만 한번 생각해볼 거리도 많다.

이렇게 학교내의 혐오에 대해 연구할 수 있게 학교를 공개했다는 것도 참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