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언니 - 언니들 앞에서라면 나는 마냥 철부지가 되어도 괜찮다 아무튼 시리즈 32
원도 지음 / 제철소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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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경찰학교에서 만난 언니들 학창시절 선망했던 언니 시험준비를 하던 학원가에서 만난 언니 그리고 피를 나눈 친언니 등등 여러 언니들을 이야기한다.

그 언니들에게 받았던 공감과 위로를 이야기한다.

가자미처럼 바닥에 납작 엎드려 내가 가장 바닥을 기어다니는 존재일 뿐이라는 바닥을 치는 자존감으로 살아갈 때 언니들은 또다른 세상을 보여주었다.

서울이 얼마나 넓은지 그래서 가 볼 곳이 얼마나 많은지 계획없는 여행이 얼마나 알찰 수 있는지 누군가에게 기대어 울어도 나중에 하나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등등 언니들을 통해 배운다. 언니들이 마냥 부럽고 샘나지만 든든하고 힘이 된다. 때로는 부끄러워 버리고 싶던 언니도 내게 힘이 되기도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언니의 삶의 어느 순간 탁하고 모두 받아들여지는 순간의 기적도 체험한다. 그리고 엄마의 언니 내게는 든든하고 어렵고 싫은 엄마지만 언니 앞에서 마냥 어린애가 되는 엄마와 그 엄마를 다독이는 늙고 기운빠진 그러나 여전히 독기가 남아 오히려 마음 든든한 늙은 언니 이모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신도 동생들에게 좋은 언니가 되어야 한다고 조바심을 낸다.

저자가 아직 좋은 언니가 되지는 못했다지만 그가 경험한 언니와 다른 결의 좋은 언니가 될 것이다. 사랑받은 사람은 사랑을 베풀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직업전선에서 만난 얼굴을 알지 못하는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안타까운 많은 언니들을 이야기한다. 이제는 어디서든 행복하기를 편안하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는 언니들을 이야기하며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언니 노릇한다는 게 얼마나 많은 제약이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자로 산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으로 이어지며 저자가 말한 언니들과의 관계는 여성들의 든든한 연대를 말하려는 것이다.

그 연대가 확대되어 괜찮은 오빠 괜찮은 동기들로 확장되기를

언니들과의 언니들의 연대가 작고 사소한 균열로 깨지지 않기를

 

저자의 문장은 투박하지만 진심이 있다. 그래서 늘 책장을 놓을 수 없었다.

읽고 나면 세련된 문장도 아니고 비문도 많이 보이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저자는 하고 싶은 말이 있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확실한 사람이다.

다음 책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더 세련되지 않아도 지금의 진심은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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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이 어눌한 사람이다. 표현도 서툴다. 자식인 네게는 더더욱 그랬다. 내 자식이어서 일 게다.

내 부모는 간섭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게 싫었다. 한 번도 내가 원했던 길로 가 본 적이 없다. 나는 절에서 수행을 하고 싶었다. 할 수 없이 대학을 갔다. 어쩌다 보니 운동권에 있었다. 원했던 바는 아니었다.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던 탓이다. 괴로운 일이 많이 있었다. 세월에 씻어버렸다. 그래도 남은 것은 받아들였다. 너를 키울 때 한 가지만은 지키려고 했다. 무엇이 됐건 일절 간섭하지 않겠다고. 어려운 일이었다. 자식에 대한 집착이란 부모에게 천형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토록 내 부모를 싫어했음에도 말이다. 그래도 노력했다. 그게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이었다.

우리 사이에는 은혜도 빚도 없다. 혹여 지게를 진 일이 너에게 짐이 된다면 버려라. 나는 인간에 대해 실망을 많이 한 사람이다. 지게를 진 건 내 두 손과 두 발로 누구에게도 신세 지지도 도움 받지도 않고 어떤 인간관계도 없이 홀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지 너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부자가 먹고 살았다면 부차적인 일이지 내게 감사할 일도 아니다. 혹여 그런 애비가 부끄러웠다면 이 종이는 버려라. 네겐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나는 말이 어눌하고 표현이 서툰 사람이다.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하지 않겠다. 나는 사랑에도 서툰 사람이다.

이것은 유언장이다. 대학을 졸업하면 너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너는 너의 인생을 살아라. 너에게 부모라는 굴레는 여기까지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 죽은 것이다. 내 죽음을 맞는다면 유해는 화장해서 동해에 뿌려라. 딱 한 번 동해바다를 본 적이 있다. 마음에 들었다. 장례를 치르지 마라. 삶은 충분했다.

이 글을 네가 읽는 날이 올지 모르겠다.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겠지.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다. 혹여 읽은 후면 불태워 버려라. 이 역시 굴레다.

이 부분을 첨 읽었을 땐 이 아버지가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이런 무거운 시간을 견딘 사람이었구나 하는 마음 그래서 자식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이 참 아프게 다가왔다.

죄책감 책임감이라는게 참 아름다운 말이지만 그 말의 무게에 휘청이는 누군가에게는 무섭고 어려운 의미 그것을 자식에게 주지않겠다는 아비가 보였다.

아 부모가 이럴 수도 있구나.

자식에게 뭐든 주고 싶은 마음에 욕심을 부리고 내 용량이상을 퍼붓는 것, 그리고 그걸 사랑이라고 말하며 자식의 머리에 새겨넣으려는 사람이 부지기순데 이렇게 모든 걸 놓아버릴 수도 있구나 했었다.

그런데.....

다시 읽으니  "웃기고 있네"라는 마음이 불쑥 쏟구친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 아비는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과 죄책감이 너무 커서 자기는 자식의 어깨에 무게를 얹지 않겠노라고 깃털처럼 가볍게 사라질거라고 결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하나 가볍자고 하면 모두가 가벼워지는 걸까?

내가 너를 가볍게 할 터이니 너는 아무런 부담도 갖지 말아라 하면 자식이 네~ 하고 모든 무게를 내려놓고 훌훌 자유로워지는 걸까?

자식은 아니 아이는 어른의 눈치를 본다.

사랑과 돌봄을 베푸는 것은 어른이지만 아이는 그걸 당연하게 받아먹지만은 않는다.

아이의 생존본능은 지금 이 사랑과 돌봄이 지속적일 것인지 언제든 단절될 수 있는 것인지 나의 생존이 어떻게 될 것인지 매우 민감하다.

지속가능하다고 믿는 순간 아이는 아이가 되어 살아가지만 지속불가능할수도 있다는 불안이 한방울이라도 퍼지는 순간 아이는 시간을 당겨 성장한다. 욕구를 줄이고 눈치를 보고 자기가 어떻게 해야 생존가능한지를 본능적으로 안다. 일찍 철이 들거나 주눅이 들거나 자포자기하거나

결국 저 애비의 아들은 일찍 철이 들었다.

남들이 보기엔 손안대고 코푼것처럼 쉽게 자식잘 키웠다고 하겠지만 아들은 분노로 가득찼고 욍로웠고 그리고 언제든 집을 떠나고 싶어했고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했다.

뒤늦게 아비의 역사를 알고 아비의 삶을 알게 되어도 그냥 이해하는 것 이상이 될 수는 없다.

아 저런 삶을 살았구나. 고단했겠구나

그리고 끝.

아무리 그의 고단하고 힘든 삶을 알고 그의 의도가 선했음을 알아도 이미 생채기가 깊어진 마음은 돌이킬 수 없다. 허탈하고 어디에다 누구에게 따지고 물어내라고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아비는 참 쿨하고 자유롭고 아들을 위해 한 행동들이 아들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가끔 그런 일들이 있다.

너를 위해서 이렇게 할 것이다. 내가 겪어보니 그건 못할 짓이고 너무 상처가 되더라

그러니 나는 절대 이런 일로 너에게 상처를 주지 않겠다. 너는 자유롭게 너가 원하는대로 살게 해주겠다.

반대로 나는 너무 외로웠고 누군가 의지할 곳이 없었다. 누구든 단 한사람 나를 지지하고 나를 도와주었더라면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뭐든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너를 절대 혼자 두지 않겠다. 언제나 니곁에 있겠다.

깊어진 결심은 타인에게 종종 상처가 된다.

결심이 나를 향해야지 타인을 향하는 순간 그것도 여리고 순한 아이를 향하는 순간, 그와 나를 별개라고 여기지 않고 한몸이라고 여기는 순간 상처는 시작되고 멀어질 일만 남았다.

 

책이 아주 좋지는 않았지만 흥미로웠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갸우뚱할때도 있고 이게 현실인가 싶다가도 환타지 같았다. 그럼에도 저 한 대목 아비의 편지는 꽤 오래 남는다.

책이 때로 한 단락만 내게 올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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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 (양장)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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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게 산다는 건 적어도 내가 나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속이는 건 내가 가장 잘 안다.

내 감정을 아닌 척 하는 것,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런 척 하는 것 자꾸 척척 하다보면 내가 누구인지 내가 헷갈린다. 내가 원래 감정이 없었던 거 같고 내가 원래 다정한 사람이라는 착가에 빠지고 내가 쿨하고 꽤나 멋진 사람이라고 믿는다. 믿음의 뒷면은 썩어가고 있다.

내가 나를 알지 못하는 것 내가 나를 속이고 내가 나답게 살지 못하는게 나를 점점 갉아먹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그렇게 사는 사람이 더 많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 , 닮고 싶은 누군가에게 억지로 내 몸을 끼워 맞추거나

내가 그렇게 되지 않으면 내가 죽을 거 같아서 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못견딜 걸 알아서 그냥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믿고 최면을 걸고 산다.

 

유원은  화재의 불길 속에서 언니가 젖은 이불에 둘둘말아 아파트 베란다 아래로 던져 살아남은 아이다.

우연히도 그 곳에 있던 아저씨가 아이를 받아서 자기 정강이뼈가 으스러져 다시는 바로 걷지 못할 상황임을 느끼면서 받아낸 아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이불 아이가 유원이다.

그래서 모두에게 주목받고 모두에게 위로를 받고 모두에게 격려를 받으며 한마디씩 받은 덕담을 몸속에 차곡차곡 쌓아놓는다.

 언니 몫까지 잘 살아야지

 새로 태어난 인생인데

 정말 운이 좋은 아이야

 두 사람의 희생으로 얻은 목숨인데 너는 그렇게 살면 안되지

 

그렇게 모두의 주목을 받고 모두의 축복을 받는다는 일은 저주다.

오로라공주가 왜 백년동안 잠만 잤겠는가. 모두의 축복을 욕심내던 부모때문이다. 모두의 축복을 욕심내다보니 단 한명을 배제시켰고 그 한명의 저주가 결국 ... (뭔 말이 하고 싶을까?)

나는 잘 살아야 하고 누구보다 씩씩해야하고 모두의 관심은 당연하고 나의 일상은 그들이 원할 때 언제든 공개되어야 하며 나는 언니 몫까지 살아야 하고 나를 통해 언니를 바라보고 언니를 찾는 타자들을 이해해야 한다. 나는 그런 존재이므로

 

유원은 아마 18년을 그렇게 살았다.

고마우면서 동시에 지독하게 미운 언니 미운 아저씨가 매년 잊지않고 그 사건을 상기시키고 나를 통과해도 견뎌야 한다. 그들 때문에 내가 지금 살아있으므로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감사하고 고마워하고 밝게 지낸다.

친구가 없지만 그렇다고 왕따도 아니다. 쉽게 다가가기 힘들 뿐이다. 사귀는 법을 모른다.

왜냐하면 유원은 유원이 아니니까

그는 예정이기도 하고 아저씨이기도 하고 모둑 기억하고 상상하는 살아남은 이불아기일뿐이니까

 

그러나 이야기는 당연히 유원이 자기를 찾아낸다.

내 감정에 솔직해지고 내가 더 멋지고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금 이런 꼬라지가 나라고 인정하고 미워하고 싫어하고 감당하기 어렵다는 마음을 그대로 내보인다. 당연하다. 18세는 모든 걸 할 수 있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이이기도 하니까

 

가끔 좋은 사람이 되라고 충고한다.

다 괜찮다고 상처를 받아들이고 나쁜 마음은 이제 잊고 새 살을 살라고 한다.

그런데 잊어야할 나쁜 마음이 내겐 정말 생명줄같은 것이고 그들이 바라는 새로운 삶 좋은 마음이라는게 나를 아프게 찌르는 가시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일단 나는 생명줄을 잡고 가시를 제거해야한다.

나는 그가 감사하지만 이면에 밉다

나에게 이러쿵저러쿵 자판으로 말을 덧붙이는 사람들이 싫다. 그 무책임함이라니 구역질나게 역겹다.

그런마음 괜찮다.

 

누군가가 너무 미워서 죽이고 싶다는 말을 한 아이가 있었다.

그 누군가는 그 아이의 가족이었다.

너무 미워서 그가 나에게 가했던 폭력들이 너무 아파서 나중에 어른이 되면 반드시 꼭 그를 죽이고 말거라고 매일 생각한다고 했다. 어떻게 죽일까 그런 망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고 했다.

그런 생각에 내가 지금 해야할 숙제를 못하기도 하고 시험을 망치기도 하고 잠을 제대로 못자서 정신이 몽롱해진다고도한다. 그런 마음을 먹는 내가 너무 이상한 괴물같다고도 하는데 그 마음을 버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 아이가 정말 정신이상이었을까?

자기도 그게 잘못이라는 걸 안다. 사람을 죽이는 게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상상처럼 킬러를 사서 쥐도새도 모르게 죽이는 건 더 힘들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런 상상을 하지 않으면 못견디는 그마음도  나는 안다.

 

모두가 그 아이를 걱정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상상이라도 마음껏 해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피범벅이 되도록  패륜이라 할만큼 악하고 독하게 극단까지 가다보면 그러면 내 마음이 편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정답이 아닐 수 있다. 절대 그런 마음을 극단으로 몰아갈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는 조언들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런데 무심하게 다정하게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런마음이 드는 거 당연해요. 나라도 그럴거 같아요  정말 무심하지만 사실 진심이 가득담긴 이 위험한 말이 그에게 힘이 되기도 했을까?

다른 날 아이가 많이 밝아져 있었다.

물론 그 사이 상담을 받고 약물치료도 받고 잠도 잘 자게 되어서 그럴 수도 있다.

좋은 전문가의 손길덕분일 것이다. 아마 거의 대부분은

그런데 가끔 생각한다.

내가 무심하지만 정말 공감해서 (나도 그럴 때가 있었으니까) 던진 그럴 수도 있지 죽이고 싶은 마음이 당연하지.. 했던 그 말이 도움이 되기도 하지 않았을까? 00000001%정도는??

 

유원을 보면 그 아이가 생각난다.

상황이 다르고 감정이 다르지만 그냥 그렇다.

내 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  그게 참 좋은 방법이고 유일한 방법인데

게다가 모두가 아는 방법인데 그걸 직접 행하는 건 참 어렵다.

나도 그렇다.

 

이 책은 미워하고 싶은 사람을 마음껏 미워할 수 없는 너무 착한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그 미운 상대가 짠해보여서 나자신에 너무 화가 난다고 했던 누군가에게 읽으라고 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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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 1
이수정 외 지음 / 민음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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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인 사랑이야기

속이 시원해지는 반전 드라마들

그냥 편안하게 이야기가 들려주는대로 따라가 보면 고개가 끄덕끄덕 그래 그런거야

남자가 더 좋아해야 편한거야

저렇게 돌아다니면 얼마나 위험할까

저런 사람들이 없는 곳이 안전할텐데 요샌 왜 저런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지

우리 주위에 위험한 건 뭐가 없나?

내가 저기 살지 않아 다행이야

저렇게 날 확 당기는 놈이 있었으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텐데???

뭐 그런 혼자 모래집을 지었다 허물었다 하면서 이야기만 따라가면서 그냥 그렇게 산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다른 위치에 섰다.

내가 원해서이기도 할 때도 있고 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서 내가 선 위치가 바뀐다.

그러면 내가 아무 생각없이 팝콘을 씹으며 낄낄거리며 나름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정의감을 느끼고 낭만적인 사랑과 공감을 느꼈던 그 장면들이 불쑥 불편하다.

내가 변한걸까? 내가 뾰족뾰족한 가시를 곤두세운걸까

아.. 위치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몰리니까 사람이 이렇게 피폐해지는구나.

역시 사람이란 ... 하며 나를 탓해야 할까

 

낭만적인 사랑은 누구의 시선에서 낭만적일까

자기가 주는 우산을 받지 않는다고 공중전화를 마구 후려치는 행동이 터프하고 강한 사랑일까

내가 오로지 내가 너를 나의 옛연인의 환생이라고 믿는다는 이유로 멋대로 애정표현을 해대고

히어로를 돋보이기 위한 여러가지 난관들을 위해 여자를 잔인하게 강간하고 살해한다.

그걸 아무렇지 않게 보여주고

그리고 누군가 해결하면 끝이다.

과정은 필요없고 그 과정에서 상처입은 사람 누군가 힘들었을 타인들 소외받고 보이지 않은 취급을 받은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나의 히어로만 보이면 되고 만들어진 상황에 얼마나 몰입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영화를 문학을 사회단면들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건 중요하다.

세상에는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만큼 많은 시선들이 있고 보여지는 풍경이 있다.

나는 몰라도 상관없고 불편하지 않는 무언가 그래서 내게는 없는 것이 되는 무언가가

타인에게는 너무나 절실한 문제이고 삶의 걸림돌이다.

누군가 참으면 되는 평화 따위는  누군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자기 자리에서 노동을 하고 견뎌내기때문에 지속되는 사회는  불편해야 한다.

공주가 단 한톨의 콩 때문에 백겹 매트위에서 불편을 느낀 것처럼

어쩌면 나랑 상관없고 이번생에 나와 절대 스치지 않을 상황들과 사람들이 여전히 나와 같은 하늘아래 숨쉬고 있음을 예민하게 느껴야 한다.

 

어떤 남자가 말했다.

"뉴스에 나오는 끔찍한 사건들은 너무 끔찍하고 이상하니까 나오는거야. 그건 일상이 아니야 어쩌다 생기는 일이지. 세상은 뉴스보다 안전하다니까."

누군가에게 세상은 안전한 곳이다.

내가 다니는 길에 cc티비가 있고 안전하게 관리되고 청결하고 아무나 쉽게 들어올 수 없다. 나는 서울을 동쪽끝에서 서쪽끝까지 관통하는데 아무하고도 마주치지 않고 만나지 않고도 가능하다.

내 공간 내 자동차 내 집에서 나는 마스크 없이 안전하게 이동하고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세상은 뉴스보다 안전하다.

뉴스는 그냥 기이한 일이라 놀라서 떠들어대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그건 일상이고 매번 코너를 돌때마다 긴장하는 일이기도 하다.

 

폭력에 대해 범죄에 대해 누군가는 그냥 소비하는 유흥거리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삶을 내놓고 살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있다.

 

내가 본 영화들

그냥 팝콘을 씹으며 웃다가 감동하고 놀라서 눈을 가리던 그 이야기들

그것 역시 우리 이야기다.

그리고 다르게 보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한다.

 

이수정교수의 말들이 참 직선적이고 담백하다. 에두르지 않는 그 화법과 그럼에도 빈틈을 늘 놓치지 않고 골려대는 이다혜 기자의 유머도 좋다.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지점을 보는 언니들이 이렇게 많이 동참해서 함께 연대하는 것. 그건 참 든든한 일이다.

 

시즌 2가 시작했다는데 ... 비밀보장말고도 늘 듣고 싶은 게 늘어난다는 건 좋은 징조다.

 

ps.

책 말미에 나온 강간 의제연령문제나 궁박한 처지에 놓인 청소년들 가출팸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단순하게 무서운 십대가 아니라 그 아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몰렸는지 그리고 그 아이들이 그렇게 성매매를 하고 성인을 협박하고 폭력을 쓰는 그 상황을 어른의 시선으로 보고 어른이 고민하고 반성해야할 지점이라는 말들...참 좋았다.  이런 말을 하는 어른들이 많아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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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환대 장희원

 

우리는 누구나 환대할 수 있다. 우리는 차별주의자가 아니다.

누구든 품어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경계가 있다.

어떤 도덕적인 선을 넘는 것.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용납할 수 없는 어떤 선이 아닌 것들은 환대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선한 사람이므로 악이 아니라면 품어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법을 어기지 않았고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아들을 생각하면 단 하나 걸리는 부분이 있다. 한창 호기심이 많을 청소년 무렵 그 또래가 봐선 안되는 영상물을 보는 아들을 훈계한 적이 있다. 분명 훈계다. 나는 아들에게 놀랐고 실망했고 그리고 아들이 절대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마음으로 아들을 때렸다.

그리고 다행히 아들은 한 번도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내게 들키지 않았던 것만이 아니라 아예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믿는다. 아들이니까.

그리고 그 아들을 만나러 지금 나는 호주로 간다.

낯선 땅 낯선 언어가 있는 곳. 그 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 다르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남편이 아들을 심하게 때렸다는 걸 안다. 이유는 제대로 모른다. 아니 아는 게 두렵다.

그냥 그 나이 청소년들이 흔히 가지는 호기심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누구나 하는 걸 아들도 했고 조금 선을 넘는 영상을 봤고 그걸 남편이 또 봤고 남편이 놀라서 아이를 다그치고 때린 것.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 이후 아이는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조금 철이 들었고 말이 줄었고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을 뿐이다. 그건 남자 아이들이 누구나 하는 행동들일뿐 아들의 별난 모습은 아니다.

아들이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간다고 했을 때 사실 말리고 싶었다.

굳이 그렇게 고생해서 외국에서 경험을 쌓아야 하나 싶은 엄마의 오지랖이었다.

그래도 요즘 젊은이들은 다들 그렇게 경험하고 온다기에 말리지 않았다. 형편이 안되는 것도 아니고 아들이 뭔가 하다못해 영어라도 늘어서 오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아들은 그 과정이 끝나고 다시 그곳에서 대학을 다니겠다고 한다. 대단한 대학도 아닌 지역대학에서 공부하겠다는 아들을 말릴 수 없었다. 이제 나이도 먹었고 자기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때가 아닌가

서운했지만 조금 일찍 독립시킨걸로 생각하기로 한다.

가끔 연락도 오고 화면으로나마 얼굴을 보여주니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어쩌면 함께 지지고 볶고 살다가 서로 갈등이 생기고 다투는 것보다 멀리서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 아들을 보러간다.

아들의 옷가지. 아들이 좋아했던 것들 어쩌면 그리워할지 모르는 먹거리들 등등을 챙겼다.

남편은 뭘 그렇게 가지고 가냐고 했지만 그는 모른다.

당신은 몰라. 아무것도 몰라

남자들은 모른다. 내가 아는 아들이 전부는 아닌데 내가 아는 것만 전부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는 것 내가 들은 것 그리고 내가 상상하는 것 그 범위를 넘어가면 남자들은 당황한다. 그리고 자기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하고 분노하거나 좌절하거나 어깨를 늘어뜨린다.

단순한 사람들

남편은 정말 아들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아들을 알까?

짐으로 부치라는 남편의 말을 기어이 어기고 꾸역꾸역 들고 기내에 올라 수화물칸에 넣었다.

그래도 아들 물건인데 아무 짐짝처럼 취급되는 건 싫었다. 이건 아들이 아니지만 아들 물건이니까 아들처럼... 우습긴 하지만 그러고 싶었다.

그 짐을 경유지 싱가포르에서 잊어버렸다. 그리고 잃어버렸다.

부랴부랴 말도 통하지 않은 곳에서 손짓발짓으로 물건을 찾으러 갔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일까 우리 행색이 꾀죄죄해서였을까

지들끼리 웃고 뭐라고 하는 말들이 영 고깝게 들린다. . 그래봤자 일개 작은 아시아국가주제에

물건을 찾았다. 어딘가 모르게 낡았고 조금 초라해져보였지만 내 물건이 맞다.

조금 달라보여도 내 아들을 몰라보진 않은 것처럼 내가 그렇게 정성껏 챙겼던 내 상자가 맞다.

이제 놓치지 않을거다.

호주는 햇살이 강하다. 두 눈을 제대로 뜨고 있을 수 없을 만큼 쨍하다.

아들이 나왔다. 조금 말랐나? 조금 거칠어졌나? 환하게 웃으며 우릴 맞이한다.

그리고 택시를 불렀는지 뚱뚱하고 늙은 흑인이 모는 차로 우리를 안내한다.

아들과 운전사는 뭐라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기다리면서 알게 되었나? 내 아들이 저리 붙임성이 좋았던가?

아들 표정이 밝아보인다. 여기서 잘 지내는 모양이다. 다행이다 한편으로 섭섭하다.

 

한참을 들어가 아들이 사는 곳에 도착한다. 그곳은 내가 상상했던 곳과 다르다.

낡았고 잡초가 무성하고 그리고 외따로 떨어져 있다. 저쪽엔 분명 동네를 이루고 상가가 있을 것이 분명한 내가 상상한 호주의 주택가가 보이는데 이곳은...

남편을 보니 나와 다르지 않을 모양이다. 당황했지만 티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흑인 운전사는 짐만 내리는 게 아니다. 열쇠로 문을 연다. ? 이게 뭐지?

이 사람이 아들의 룸메이트라고 했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아들은 했다고 한다. 공항에서 만나 정신이 없어서 잊어버렸나? 아니다. 내가 아들 말을 잊을 리 없다. 우리를 보고 환하게 웃던 얼굴 긴 비행은 괜찮았느냐는 말. 다행이 날씨가 좋다는 말 다 기억하는데 차에 가서 짐은 내가 실을게요 했던 거. 조금 더우시죠 했던 거 다 기억하는데 이분이 함께 사는 사람이라는 그 중요한 말을 내가 잊을 리가 없다. 아들이 낯설다.

흑인은 다정하다. 말이 통하지 않아 어색하지만 우리에게 친절하려고 그게 가식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게 느껴진다.

나는 아들이 또래 친구들과 사는 줄 알았다. 젊은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는 곳이라 우리가 가면 어색해질테니 다른 숙소를 잡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 많이 다르다.

그리고 이곳에는 둘 이외에 한국인 젊은 여자아이가 함께 있다.

이건 무슨 조화일까?

굉장히 낯설고 불편하다. 어찌된 건지 물어보고 싶은데 애써 괜찮은 척 한다.

나는 예의 있고 상식 있고 다름을 받아들일 줄 아는 괜찮은 엄마이고 싶다.

남편도 그러리라. 쿨하고 편견 없는 사람의 역할을 처음 하는 것마냥 어색하다. 그런데 웃고 있다. 묻지 않고 있다. 궁금한 게 목까지 차올랐는데 우리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니 당연히 아들은 아무것도 대답할 이유가 없다.

말이 짧아 흑인 룸메이트에게 물을 수도 없다. 그냥 마주치면 웃을 뿐이다. 최대한 근육을 당겨서.

나는 여자아이가 걸린다.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 이렇게 남녀가 함께 살아도 되나?

짧은 바지아래 드러난 문신이 있는 다리 자꾸 걸린다.

아들에게 친밀하게 스킨쉽을 하는 것도 걸린다. 아들은 냉정하게 대한다.

내가 있어서? 아니면 여자 아이의 일방적인? 모르겠다. 이유가 뭐든 걸린다.

그래도 여자아이가 툭툭 말을 내뱉아서 상황을 짐작한다.

오빠가 여기 처음 왔을 때 많이 힘들어 했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저 정도 된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런 일?

우리는 지금 잘 지낸다.

무슨 말일까

이들은 무슨 관계이며 이런 무리를 뭐라고 해야하나.

식사를 하면서 남편은 이제 허세를 떤다. 직업에 대해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고 얼마나 화목한 가족이었는지 아들과 얼마나 친밀했는지를 떠든다. 그만하면 좋겠다.

다들 분위기를 맞춰주는데 불편하다.

그들의 환대가 불편하다.

이건 아니다. 우리가 이들에게 지금 이해받고 있는 중이다.

그들이 우리를 이해하고 괜찮다고 하고 계속 하라고 하고 모든 걸 들어주겠다고 한다.

이건 아닌데...

길 건너 불빛을 본다. 남편도 본다. 저쪽에 가고 싶다.

여기가 아닌 저기. 저기에 가야 편안할 거 같다.

음식이 물컹한 식감이 그리고 어떤 상상이 나를 괴성을 지르게 했다.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다.

택시를 부르고 기다리고 우리는 숙소로 간다.

택시가 출발하는 순간 우리는 안도한다. 말하지 않았지만 서로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한국에서 가져온 기어이 내 손으로 끌고 온 그 박스를 뜯지도 않고 아들에게 주지도 못하고 내 손에 가지고 택시를 탔다.

그들은 저쪽에서 우리를 바라본다.

배웅한다. 걱정하며 환하게 웃으며 다정하게 친밀하게 우리에게 언제든 오라는 배려와함께

지금 내가 남편이 저쪽이 아닌 이쪽이라는 것이 가장 불편하다.

 

환대는. 배려는 내가 할 때 가장 편하다.

그걸 받는 입장이라는 건 불편하다. 그건 엿 같은 감정이다.

니들이 뭔데 나를 환대하고 배려하지?

뒤틀린 생각들 불편한 감정들 그리고 나는 환멸을 느낀다. 나에게 그리고 남편에게도

 

마땅히 내 것이어야 하는 우월한 입장을 타인에게 인터셉터 당했다는 느낌

감히 나를.... 이라는 마음

누구나 환대할 수 있다.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그건 누구의 소유도 아니니까.

나는 내가 보이는 것을 본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본다.

그리고 기억은 이기적이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 내가 받아들이고 싶은 방식으로 박제된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건 그럴 수 있다고

내 아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그렇게 기억된다.

 

어쩌면 내가 괜찮은 사람일 수 있는 건 내가 쳐놓은 울타리안에서만이다.

내가 용납할 수 있는 그 범위 내가 상처받지 않을 그 범위에서 나는 좋은 사람이 된다.

당연하다. 상처받은 적 없고 누구에게나 괜찮은 사람일 수 있는 그곳에서 내가 나쁜 사람이 된다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그 울타리 안의 세상이 전부라고 믿고 있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울타리밖에 있는 존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멸시와 경멸 무시를 모른 척했다.

그런 감정을 가지는 건 나쁜 거니까 그 감정을 숨기기 위해 울타리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굴었다. 보이지 않았다. 있지 않았다. 누구도. 아무도

그 밖에 내 아들이 있다는 건 용납할 수 없어서 머리채를 집고서라도 멱살을 끌어서라도 울타리 안으로 집어넣어야 했다. 그리고 넣었다고 믿었다.

마땅히 내 것이어야할 배려와 환대가 저쪽으로 넘어가고 마땅히 무시와 멸시와 경멸의 대상이어야 할 그 울타리바깥이 누군가에게는 울타리 안이었고 나는 경계선 밖에 서서 그들의 환대와 배려를 받고 있는 이 상황은 낯선 경험이다. 불쾌하고 불편하고 불안하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척 한다. 내가 내색하는 순간 이 관계는 그대로 굳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상황을 정해버리면 안되므로

내가 모른 척 하고 있는 한 상황은 절대 뒤집히지 않는다. 나는 굳게 믿는다.

나는 늘 환대하는 주체이지 대상이 아니다.

내가 베풀어야한다고 이 개돼지들아...

 

 

 

 

 

 

 

 

 

 

 

 

 

 

 

 

다른 세계에서도 이현석

 

둘째를 가졌을 때 나의 첫 감정은 실망이었다. 이게 아닌데.

환영하지 않았음은 물론 미....

나는 엄마가 될 사람이 아니었음을 한명의 아이를 키우면서 알았다.

아이는 너무 이쁘고 사랑스럽고 손이 많이 가지 않은 순한 아이였지만 나는 아이에게 집중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 마음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나는 아닌 척 괜찮은 척을 무척 잘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남들이 다 하는 결혼을 했고 남들이 다 하는 출산을 해서 아이 엄마가 되는 경험을 했고 부모와 아이로 이루어진 정상적인? 가족을 만들었으니 이제 다 된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둘째가 생겼다. 이건 아닌데

혼자 오래 고민했다. 그냥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지워야 할까

그때도 지금처럼 중절은 불법이었지만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내가 산전검사를 갔을 때 누군가는 감기약 때문에 아이를 유산하고 누워있었다.모르고 감기약을 오래 먹어서요. 어쩔 수 없었어요. 내 기억에 그 말을 한 여자는 말간 얼굴로 편안해보였다. 안심하는 얼굴처럼 보였다. 아니 그렇게 기억되었다.

둘을 키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 제법 아이가 자라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이 늘었고 어딘가 교육기관에 보낼 수 있을 것 같고 나도 뭔가를 할 수 있을 것같은 이 순간 덜컥 둘째라니...

혼자 오만 고민을 했지만 용기없고 실천력이 없는 이유로 그냥 남들에게 알려졌고 축하를 받으며 임신기간을 보내고 출산을 했다. 그리고 정신없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랑 너무 닮아서 너무 힘든, 아이를 보면서 어쩌면 이 아이가 그때 내 마음을 모두 꽤뚫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할 때가 있다. 그때 나를 미워했지? 나를 없애고 싶었지? 어디 한번 너도 당해봐. 나는 너를 괴롭히기 위해 마음껏 삐뚤어질테니까... 아이가 힘들게 했던 건 사실이지만 삐뚤어진 건 아니다. 그럼 기억을 못하는...

중절을 고민하는 여성중에는 미혼이나 미성년보다는 오히려 기혼의 아이가 있는 여성의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더 많이 한다.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에만 중절을 허락한다는 개뼈다귀같은 사고가 아니라 아이를 가져본 경험이 있고 키워보았고 그리고 그럴 환경이 됨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고 싶어하지 않은 여성들이 더 많다. 여전히 아들과 딸의 문제일 수도 있고 계획되지 않은 임신일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 직장문제로 더 이상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은 수도 있다.

성폭행을 당했거나 미성년부모가 되거나 미혼모가 되는 일보다 오히려 사람들이 정상 가정이라는 곳에서도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충분히 망설여지는 일이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사실 쉽지 않다.

돌아보면 다 어려운 일이며 동시에 별거 아닌 일이 되기도 하겠지만 일단 그 과정에서는 너무 힘들다. 아이는 어느 지점 성장까지 타인의 도움을 요구한다.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을 요구한다. 아이가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포유동물은 혼자 자립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점점 사람에게 요구하는 조건들이 까다롭고 목록이 늘어간다.

 

아이를 지워야 할 피치못할 상황들이 있다. 그 기준은 누가 정할까?

태아도 생명이라 차마 없앨 수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신파만 용납하는 세상. 그래서 중절을 선택하는 과정이 얼마나 괴롭고 죄책감이 느껴지고 힘든 일인지 알고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노라고 이렇게 절절하게 타인에게 이해를 시켜야 나라에서 허락하는 상황이 조금은 코메디다.

내 몸에 대한 나의 결정권이라는 것을 떠나서 어떤 이유든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중요하다. 내 몸이고 내가 져야하는 그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국가가 개입을 한다?

그래서 이 글이 많이 와 닿았다.

꼭 이유가 있어야 할까

낳아야 한다는데 이유가 없다면 중절을 한다는 것도 큰 이유가 없다.

아니 저마다 이유가 있다. 다만 그 개인적이고 은밀할 수 있고 사적인 부분에 일일이 검열을?

소설은 그 지점을 이야기한다.

선택할 수 있는 출산이라면 선택할 수 있는 중절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고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 아이를 만드는 과정의 쾌락은 다 즐겨놓고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이기심이 아닐까 하는 스스로 하는 자아비판같은 거 이제 없으면 좋겠다.

누구나 쉽게 중절을 결정하지 않는다. (어떤 집단이든 완벽한 이기심을 가진 극 소수는 늘 있다.)

아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부분 쉽지 않은 결정을 한다. 오래 고민한다.

이래도 되나 싶게 자기를 돌아보고 두려워하고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결정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개인적이지만 절절한 이유로

소설에서 주인공과 주인공의 엄마는 동생의 결혼과 출산이 못마땅하다. 아직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 성공할 수 있는 기회 앞에서 출산이라는 것이 얼마나 걸림돌이 될 수 있는지 경험을 통해 알고 있고 주변사람들을 봐서 안다. 그래서 말린다. 이유가 충분하다 그들에게도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도 이유가 충분하다.

두 충돌에서 결국 자신이 결정할 뿐이다.

어떤 신념을 주장하기 위해 그 신념이 꼭 순수하고 완전무결해야할까

약간의 개인적인 마음 이기적인 생각같은 것이 들어가서는 안되는 걸까

무균질의 신념만 통과가 가능한 걸까?

나는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아이가 없었더라면... 아이가 하나였더라면

그 상상속에서 나는 지금 보다 덜 비루하고 더 자유롭지만 그것도 장담할 수 없다.

내가 아이를 대신해서 간절하게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자유였을까? 능력이었을까? 돈이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엄마라는 옷이 맞지 않구나 하는 마음이 들 때면 동시에 나는 내가 무능하다고 말하면서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하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올라온다. 솔직하게 돌직구처럼.

자격없는 엄마. 이기적인 엄마. 그럼에도 인정받고 싶은 엄마는 이 이야기 앞에서 많이 서성이면서 응원한다.

한번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런생활 김봉곤

 

그의 단편집 여름 스피드를 읽다가 덮었다. 아직 나에게는 많이 버거운 주제인걸로 하고 포기했다. 그냥 내가 깜냥이 되지 않는다는 속편한 이유를 대면서 나는 편견을 한겹 그대로 두었다.

그래도 많이 읽고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나 하나쯤 모른 척 해도... 하는 마음과 함께

그리고 소설집 속의 이 이야기를 읽는다.

어쩌자고 이 작가는 이렇게 대책 없이 솔직한 걸까? 이렇게 모든 걸 모두가 다 알도록 써도 되나? 이게 소설이 되나? 이런 개인적인 일을 꼭 읽어야 하나?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개인사가 훅하고 들어오면 어쩌란 말인가?

꼭 이런 tmi까지 알아야 할까?

그럼에도 책을 놓지 않는다. 이왕 시작한 거 끝이나 봐야겠다. 얼마나 찌질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솔직할 수 있는지 어디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뭐 혼자 비장하게 읽기를 계속한다.

읽다보니 자꾸 빠져든다. 매력있다는 건 아니지만 끝이 궁금해진다. 그래서 어쩌자는 걸까?

별 이야기도 없이 제멋대로 왔다갔다하는 마음들. 팔랑거리는 감정들 미워해야하는데 자꾸 놓기 싫은 이율배반들이 너무 적나라하다.

누군들 그런 경험이 없을까

내가 왜 이럴까 싶으면서도 계속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들

이제 끝이다. 하고 단칼에 베어내야 함에도 흐지부지 미적미적 이러다 다시 저절로 봉합되기만을 바라는 마음 그리고 은근슬쩍 눈 감아버리는 것들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걸 뻔히 알면서도 내 상처를 더 키우고 싶지 않아서 그냥 그의 상처는 눈감아버리는 일들 주로 가족에게 향하는 그 마음들

타인의 상처는 그가 비록 가족이거나 부모이거나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나를 아프게 하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견딜 수 있게 되는 이기적이면서 애처러운 그 마음이 자꾸 불쑥 올라온다.

그냥 그런 생활이다.

뭐 대단한 제목이나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닌

혼자 정리했다가 찌질했다가 욱 했다가 그리고 잠잠하게 정리하면서 뭐 별거 있겠어 그러니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나는 아직도 같은 성을 사랑한다는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럴 수도 있지. 세상은 다양하니까. 잘 모르지만 모르면 물어보면 되고 물어보는 방식이 예의바른게 맞는 거고.. 모르는 건 죄가 아니니까. 다만 상대에게 상처주는 방식은 하지 말아야지. 하는 정도.. 그 이상 알지 못하지만 그냥 이렇게 다르지만 열심히 나랑 다르지 않게 살고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보면서 조금 나의 울타리를 넓히고 있다. 그 울타리가 아직은 견고할지라도 조금 넓어지고 낮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다시 여름 스피드를 들어볼까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은 다른 것들이 더 끌려서 조금만 더 보류.

 

 

 

 

음복 강화길

 

이제는 좀 발랄하고 앙큼해져도 괜찮지 않나?

모른다는 것. 그게 가장 센 공격이 되고 방어가 되는 것. 뭐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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