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박스 -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
토니 포터 지음, 김영진 옮김 / 한빛비즈 / 201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중략) 신고 전화가 걸려 온곳은 트레몬트가의 어느 2층 건물이었습니다. 건물 계단에 들어서자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남자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작은 욕설과 협박을 내뱉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상대는 그의 아내였죠 곧 사람인지 물체인징 ㅏㄹ 수 없는 무언가가 벽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끔찍했죠. 경찰관이 문을 드드리며 "경찰입니다. 문을 여십시오!"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집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어찌나 조용했던지 숨 쉬는 소리까지 들릴 것만 같았습니다. 이윽고 남성이 문을 열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경관님 어쩐 일이신지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있던 남성은 경찰관을 맞이한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화를 다스리는 데 문제가 없어보였습니다. 그의 문제는 감정 기복이나 통제력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집안의 독재자로서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주도권이 중요했던 것이죠. 자신의 행위에 대가가 따를 때 만큼은 남성들도 화를 다스릴 수 있는 듯 했습니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취한 와중에 아내를 때리다가도 경찰관이 출동하면 때리는 행동을 멈춥니다 누구는 때려도 괜찮고 누구는 때리면 안되는지 취한 와중에도 구분하는 거죠. 이런 상황 판단 능력은 술의 영향보다 훨씬 강력하게 작용합니다. 아니  이런 판단 능력은 사실 태어날 때부터 갖는 본능에 가깝습니다. 남녀를 구분해서 화를 표출해야한다는 판단 기준을 배우며 자라나는 남자아이들은 자연스레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믿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p188

 

 

모든 폭력의 원인은 어디에서 나올까?

그건 "해도 괜찮다"라는  인식에서 시작된다.

"친구를 때려도 괜찮아. 뭐 장난인데 누구나 하는 짓이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잖아."

"여자를 때리는게 어때서? 여자는 사흘에 한번씩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는 말이 왜 있겠어"

"내 마누라 내가 교육시키겠다는데"

"그러지 말라고 몇번을 얘기해도 듣질 안으니 매가 답이지"

"내가 지 남자친군데 내 말을 안들어? 때려서라도 가르쳐야지"

"내가 사랑하니까  나가서 욕 듣지 말라고 하는 거라고  사랑이 없으면 이러지도 않아요"

"여자들이 설쳐대기 시작하니까 문제지  뭔지도 모르고 지껄이고 설치고 까분다니까"

".그런 여자들 몇몇 어찌 된다고 뭐가 문제겠어? 저러고 다니니 당해도 싸지"

 

자기 아내를 때려서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이 없고

심지어 때려 죽여도 제발 사형시켜달라는 탄원은 있어도 막상 사형이 구형되지도 않는다.

애인을 때려도 그저 사랑싸움이겠거니 하고 말고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덤터기를 쓰거나 귀찮은 일에 휘말릴 수 있다.

동료를 성추행 해도 그저 집행유예가 전부이거나 학교에서 퇴교 조치를 당해도 다른 학교에서 다시 삶을 시작 할 수 있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도 결국은 불륜의 문제가 되고 꼬리치고 나선 여자가 돌을 맞을 뿐이다

그러니 세상에 만연하게 펴진 생각은 그러하다.

해도 괜찮네!!!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남자라면 그럴 수도 있지....

결국 술도 아니고 정신병도 아니고 순간의 욱을 참지 못하는 분노조절 장애도 아니다.

술을 개처럶 마셔도 정신이 혼미해도 욱이 머리끝까지 치밀어도 그들은 자기가 터뜨려야 할 순간과 하지 말아야 할 순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가정폭력 신고가 들어가도 그 순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있으면 괜찮다는 것도 알고

티나지 않게 구타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심지어 먼저 자기가 피해자라고 신고하는 치밀함까지 가지고 있다.

 

남자에들은 그렇게 크는거지

다 싸우면서 의리도 생기는 거고

그 나이엔 친구가 얼마나 중요한데 그 무리에서 빠지는 건 세상에서 버림받는 일이야

여자애들이 자꾸 약올리고 꼭지 돌게 만들잖아

영악한 여자애들이 문제라니까 애를 아주 미치게 만들어 버리니 어리숙한 사내애들이 결국 욱해서 손이 올라가는 거구 결국은 봐봐  폭력을 썼다고 뒤집어 쓰는 건 다 남자애들이라니까

요샌 남자애들 교육 잘 시켜야해 여자 조심해야 한다고...

 

가부장제가 말하는 타고난 남녀의 차이

본능을 참을 수 없는  그리고 수컷들 사이의 위계가 중요한 집단 특성으로 결국 남자란 그럴 수 밖에 없고 그런 남자가 남자다운 남자다. 라고 정의된다.

학교 가면 사람 될까 군대가면 사람될까?

아니 사회화를 통해서 그 남성다움은 더욱 공고화되고 그 무리의 특성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약자가 되고  또 다른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그 피해자가 권력을 갖는 순간 그는 또다른 가해자가 된다. 여성적이라는 것은 남성 사회에서 모욕적인 언어이다.

니가 여자냐? 여자같이 생겨가지고...

그건 수치이고 모욕이라는 것인데 그 의미는 결국 여자란 수치흐럽고 하등하다는 의미의 다른 뜻이다.

남자다움을 규정하는 맨박스는 그 틀이 공고할 수록 남자들은 세상살이는 편하다.

그 규정에 벗어나는 남성들 그래서 자기 욕망과 타고난 성정을 눌러야 하는 남성들을  불편하고 심지어 폭력적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선한 남성들은 그게 당연한 사회적 가치이며 질서라고 생각한다. 여성을 때리지 않고 욕하지 않고 죽이지 않은 자신들은 선량하고 착한 남성일 뿐이다

해도 괜찮은 범위가 너무 넓어서...

 

이런 접근 방식은 여성들이 공격당할 확률을 낮추고 그들이 조금 더 안전하게 느끼도록 도울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한 부분이 있다. 이 방법은 남성이 저지른 폭력에 대처할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한다는 점이다. 대처할 책임을 여성들이 져야 할 뿐만 아니라 안전을 도모한다는 미명하에 여성들의 행동을 제약하고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대응책이다. 남성들의 삶에는 아무런 지장도 주지 않은 채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성 폭력 문제의 대처 패턴이다. 우리는 해결 방법을 고민했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성폭행 가해자가 여성입니까? 남성입니까?" 정답은 당연히 남성이었다. "만약 여학생들을 구내식당에서 기숙사로 기숙사에서 도서관으로 실어나르는 대신 남학생들을 차량으로 이동시키면 어떨까요? 남성이 범죄의 장본인인데 왜 남성이 저지른 폭력 때문에 여성들이 피해를 봐야 하죠?"  (중략)

우리의 의도는 이번 강간 사건을 비롯한 각종 교내 성폭력 문제를 남성들의 문제로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초점은 여성들이 아니라 남성들에게 맞춰졌다. 셔틀 차량으로 이동하게 된 남성들은 더는 피해여성이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왜 그녀가 그 시간에 거기 있었는지 그녀가 강간당했응ㄹ 때 어떻게 행동했는지 꼬치꼬치 묻지 않았다. 대신 남학생들은 물었다. "어떤 놈이 저지른 짓이야?" 그리고 말했다. "나머지 학기 내내 셔틀에 실려 다니기 싫으니 얼른 뭔가 대책을 세워야 겠어"

가정 폭력 혹은 성범죄를 접할 때 우리는 남성에게 유리한 해석응ㄹ 내리곤 한다 기본적으로 남성의 편에 서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솔직해지자 성차별적이고 가부장적인 우리 사회가 남성이 여성에게 가한 행위에 대해서 되려 여성에게 책임을 묻거나 불편함을 감수하도록 강요한 것은 아니었을까?

                                        p135~137

 

 

<playing the game>영상에서  한 여학생이 오랫 동안 짝사랑하던 남학생과 가까워졌다.

또래 파티에서 그 남학생을 만났고 그 남학생도 자기에게 호감을 보이며 이른바 썸을 타기 시작했다 파티에 당연히 술이 있고 음악이 있고 떠뜰썩한 웃음이 있다.

술이 들어가고 여학생은 대범하게 남자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고 함께 술을 마시고 함께 웃고 몸을 터치하고 춤을 추고 키스를 한다. 그 사이사이 계속 술을 마신다.

그리고 남학생을 조용히 속삭인다. "우리 이층으로 올라가자"

여학생은 거부하지 않고 따라가고 빈방에 둘만의 시간을 갖는다

키스를 하고 서로 애무가 짙어지면서 남학생을 섹스를 요구한다.

너도 원하면서 왜그래? 재미없게 굴지마

여학생은 이건 아니다. 아직 섹스까지 원한건 아니다.

함꼐 있고 싶고 둘만 있고 싶지만 그리고 만지고 키스하고 싶지만 섹스는 아직 내키지 않는다.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보지만 남자는 그 몸짓을 no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여학생은 그 방을 뛰처나온다.

이건 명백한 강간이고 폭력이다.

교육욕 영상답게 주인공 여학생의 친구둘이 등장하고 한 명이 어건 명백한 폭력이며 너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위호한다. 다른 한 명은 내가 파티에서 너희들을 봤는데 둘이 너무 찐하게 붙어있더라 그랬다면 너도 원한게 아니었니? 라며 내가 그 남학생을 잘 아는데 그렇게 폭력적으로 할 애가 아니다 좋은 애라고 한다.

남학생도 두명의 친구가 등장한다. 어젯밤의 일을 물어보며 그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며 우와 우와 하는 친구가 있고 그 여학생이 동의했느냐고 먼저 물어보며 동의하지 않은 애위는 폭력이라고 말하는 친구가 나온다.

두 남 녀 학생의 진술을 화면으로 보여주는데 누가 진술하느냐에 따라 그 상황은 미묘하게 다르다. 한 상황에서 누군가는 불편하고 불쾌하지만 제대로 자기 의사를 밝히지 못하고 있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무지하게 즐기는 얼굴이 나온다.

누구나 이건 명백한 강간이라고 생각한다  '

다만 누군가는 기존의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피해자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선한 마음으로 그리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덧붙인다.

이건 명백한 성폭력사건이어서 신고를 하고 가해자가 처벌을 받아야 하는 건 맞지만 피해자도 교육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적어도 그렇게 정신이 없도록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하고 빈 방에 남녀가 둘만 들어가지 말아야 하고 그런 순간에 누군가 친구와 함께 해야하고  적어도 남자를 그렇게 믿어서는 안된다는 교육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나의 십대를 돌아봐도 그렇다.

엄마가 선생님이 여학생은 몸 조심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등등 잔소리를 겸한 교육을 하기도 하지만 미디어에서 책에서 그리고 친구들과의 수다에서 우리는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늘 알고 있다. 술을 많이 마셔도 안되고 밤늦게 다녀도 안되고 짧은 옷을 입고 다녀도 안되고 화장실을 갈때는 꼭 친구와 함꼐 가야 하고 낯선 사람을 조심해야 하고 남자들은 다 늑대니까 아빠 말고는 믿어서는 안되고.... 그걸 모르는 여성이 있을까?

그런데 일이 생기고 안그래도 이미 수없이 자책을 하고 있을 그 여학생에게 다시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선한 의도로 그런 소리를 되풀이 해야할까?

그건 결국 그 모든 문제의 발단은 너! 라는 이차 가해일 뿐인데

가끔 우리는 이차 가해를 피식거리며 심문하는 경찰의 모습이나  노트북 뒤에서 댓글을 다는 일부 악플러들이나 뒤에서 노골적으로 수군거리는 알지 못하는 타인들이라고 생각한다.

너를 너무 걱정해서 조심스러워서 선한 의도로 전하는 말들 역시 하나의 가해라는 걸 알지 못한다.

이미 그들은 알고 있다.

모든 답은 피해자에게 있고 내담자에게 있고 누구보다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배우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옳은 말을 해주고 싶고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고 무언가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다.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 적어도 충고 조언 교육에 있어서는...

 

그냥 가해자에게 <동의> 동영상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동의되지 않은 관계  차마 자기 의사를 말할 수 없는 관계  중간에 바뀔 수 있는 욕망과 의사 모두가 no! 라고

 

 

남성들이 자신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사회적 맥락에서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나는 선한의도를 가진 사람중 하나이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 남성들이 집단적으로 여성들을 부적절하게 대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 "고 고백하는 남성들은 찾기 힘들다 아니 대부분의 남성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 나는 착한 남자고 몇몇 나쁜 남자들이 여자를 때리기도 하는데 전 그런 건 용납하지 않아요."

하지만 자신과 몇몇 나쁜 남성을 구분 지어 생각하다 보면 중요한 사실을 놓치게 된다 우리 사회 남성 대부분이 상대적으로 지배적 위치에 속하며 알게 모르게 남성 중심적 사고와 사회적 분위기를 지속시키는데 기여한다는 점이다 마치 백인이 "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예요 다른 백인들 중에는 흑인을 차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전 아니예요"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사고방식에 안주하기 때문에 정작 사회 구조적 차별에 대한 비판적인 대화를 나눌 기회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와 자신은 별개라는 생각으로 자아 성찰을 거부할 때 주변 백인들이 유색인종을 대하는 방식에 직접적으로 의사표시를 하지 않을 때 지배적 위치를 선점한 백인들은 사회 구조적 인조차별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조차 외면하게 된다. 어떤 기득권층이나 지배적 집단을 보아도 현실의 문제를 남의 문제로만 치부하며 대응을 회피하는 사고방식을 관찰할 수 있다.

 

가끔 남편도 그렇게 남자들이 말한다.

"내가 바람을 피기를 해 도박을 하기를 해 사람을 (여자를) 패기를 해 나만큼 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그럴 때 차마 말을 못하고 속으로 조용히 날린다.

'그런 행동들은 다 범죄거든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다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아니잖아'

남자들은 참 쉽다 범죄만 저지르지 않으면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남자라면 그럴 수 있다는 허용의 범위도 무한정 넓다.

범죄는 당연히 안되는 일이며 법의 테투리에서 다루어질 문제가 아니더라도 사람 사이의 예의라든가 존중의 의미에서 서로 조심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은 잊는다.

여자는 그러면 안되는 일이 손가락 발가락을 동원해도 다 셀 수 없는데 남자는 그래도 괜찮아 뭘... 하는 일이 손가락 발가락을 넘는다.

 

폭력에 대해 이야기 할때 가해자와 피해자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꼭 말을 한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방관자들이 있고 어쩌면 그 방관자들이 그 폭력 해결의 키를 쥐고 있다고 볼수도 있다.

그러자마. 그건 안되는 일이야

라는 말 한마디가 폭력을 줄일 수 있고 누군가 불편하고 불안한 마음을 가라 앉힐 수도 있다.

그냥 내 일이 아니어서 침묵하고 내가 나서서 괜히 일 만들기 싫고 나까지 불똥이 튈까 싫어서 모른 척 하는 그 순간 누군가는 그 행동에 정당성을 인정받고 누군가는 계속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자기탓을 하며 쪼그라들고 있다.

남자들도 그냥 나만 착한 남자가 되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이 상식이라고 믿는 맨박스의 규칙들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일 수 있고 그들에게도 폭력을 수 있다는 걸 한 번은 생각해보면 좋겠다.

 

여성폭력은 명백한 인권침해다. 만약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공격한다면 그 행위는 당연히 인권침해로 다뤄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성 폭력 문제에 관해서만은 남성들에게 책임을 면제해준다. 이때부터 여성폭력은 사회적 문제도 아니고 남성들의 문제도 아닌 '여성문제'가 되고 만다. 가정 폭력 성폭력 및 여성을 표적으로 하는 모든 폭력과 학대 행위가 '여성만의 문제'로 치부되는 순간 문제의 심각성이 훼손된다. 평범하고 선한 남성들은 이 문제에 관심이 없다.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는 억압에 저항하는 여성들에게 특권 단체라든가 소수 단체 , 페미니스트 조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단체들은 과소평가 되기 일쑤다. 사회적 위상이나 영향력 동원 가능한 자원이 한정적이고 중요하지 않은 역할을 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성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으려고 테이트 폭력이나 가정폭력 같은 포괄적이고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사실대로 정확히 명칭을 정하자면 행위의 가해자인 남성을 지목하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남성에 의한 여성 폭력'처럼 말이다.

문제의 핵심은 여성과 그들의 희생이 아니라 남성과 그들의 범죄 행위여야 한다. 여성이 학대 당할 때 남성이 침묵하는 것은 폭력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는다. 평범한 남성의 침묵은 허락을 뜻한다. 침묵은 남성들 간의 이해관계를 둘러싼 공모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의 침묵은 여성을 해치는 폭력적인 행동이  마치 정상적으로 용납되는 행위처럼 비춰지게 만든다.

대다수 남성들의 본심은 폭력적인 남성에게 면죄부를 주고자 함이 아니란 걸 안다. 하지만 우리의 침묵이 결과적으로는 동의의 표현이나 마찬가지임을 깨달아야 한다. 폭력적인 남성들은 착한 남성들이 침묵을 지킬 거라 믿고 있으며 우리가 구시대적인 남성상에 충실하게 행동할 것이라는 전제 하에 행동한다. 폭력적인 남성들은 선한 남성들이 계속해서 여서은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믿음을 공유해주기 바란다. 그래서 그들이 여성에게 무슨 짓을 하든 간섭하지 않게 말이다. 폭력적인 남성들은 선한 남성들이 계속해서 성폭려게 노출된 여성 피해자들을 괴롭히길  원한다. 피해 여성이 왜 거기에 있었으며 알아서 조심하지 않고 왜 그런 치마를 입었는지 캐물으며 여성을 취조하길 원한다.

 

 

 

여성들은 보호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남성이 폭력을 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남성들은해법의 일부분으로 문제 해결에 참여하면 된다.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존중한다면 여성의 안전은 자연히 뒤따라 올 것이고 여성 폭력도 감소할 것이다. 먼 훗날 아예 사라질지도 모른다. 맨 박스가 언제까지 선한 남성들의 핑계가 되어 줄 수는 없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내 아이에게 생기는 일이라면... 하고 감정을 이입해보면 쉽게 답이 보일 때가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드는 양가 감정은 내 아이만은 그렇게 되질 않았으면 하는 뻔한 속샘도 함께 있다.

성적 소수자에 대해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하면서 혹시 내 아이가 그럴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다가도 절대 내 아이만은 그렇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하고

학교 폭력 가정 폭력 성 폭력을 생각하며 내 아이가 당했다면 이렇게 법이 허술하고 사회제도가 부실한게 문제라고 생각하고 울분을 터뜨리라다고 그런 험한 꼴을 내 아이만은 당하지 말았으면 하는 비겁한 마음도 함께 든다.

부모가 되고 보니 세상에 두려울게 없으면서 동시에 세상 모두가 두려워진다.

내 아이가  사는 세상을 위해 일회용품도 쓰지 말아야 하고 폭력이 근절되어야 하고 밤길이 안전해야하기 때문에 내가 나서서 행동해야 하지만

내 아이가 세상을 사는 동안 아무일이 없기를 그냥 눈을 감고 넘어가는 일도 괜찮다고 바주고 싶다는 생각도 함께 한다.

세상을 알 수록 내 속의 모순도 자꾸 더 확장되는 기분이다.

 

성폭력 에방교육을 하시는 분에게 들은 이야기다.

가장 강의가 겉돈다고 느끼는 대상이 40대 이상의 남성  공무원이라고 했다.

뭘 그럴 수도 있지. 여자가 조심해야지  세상이 말세야 라는 곳에서 딸같으니까 그랬지 하는 말을 뒤집어 그 행동을 당신 딸에게도 할 수 있냐고 물으면 금방 침묵한다고 했다.

차마 내 딸에게는 할 수 없는 짓. 내 딸이 당한다는 상상만으로도 치욕스러운 일을

타인에게는 딸같아서 딸처럼 예뻐서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그러나  몇몇의 반응은 불쾌감으로 드러난다. 왜 그런 같잖은 짓에 우리 가족까지 끌어들이느냐고... 결국 그들은 가족과 타인이 구분된다. 해도 되는 대상이 있고 안되는 대상을 자기가 결정하며 불쾌감을 드러낸단다.

그럼에도 그렇게 강의 서두를 시작하면 대부분은 알아듣는다고 하는 말이 생각이 났다.

책의 저자도 남성들에게 그렇게 접근한다.

당신 딸이 그런 일을 당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역지사지의 경우이기도 하지만 한편 꼭 그렇게 생각해야 알 수 있을까 하는 마음도 들고

그렇다면 결국 내 가족을 위해서 라는 이기적인 마음에서밖에 시작할 수 없을까 싶기도 하고

남자란 내 가족을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영웅이 될 수 있다는 말인지.. 퍽이나 헷갈리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남자가 남자의 입장에서 여성 폭력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점에서 읽어볼 만하고 권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 김서령이 남긴 조선 엄마의 레시피
김서령 지음 / 푸른역사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배추적이 무슨 맛이 있니? 그냥 구색맞춰 부쳐놓는거지

 경상도식이라는데 하라면 해야지

 하라고 해놓고 막상 차려놓으면 먹을 사람도 없는데 왜 하나 몰라"

 

제사를 지낸 친구의 푸념에 모두들 한마디씩 거든다

"그래 배추적이  무슨 맛인가 몰라. 이맛도 저맛도 아니고.."

'다 형식이지 자기들 손으로 하는 것도 아니니까 이것 해라 저것해라 하는 거지"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은데 할말이 없다.

아무도 안먹고 형식적이라는 말도  아무 맛도 없는 그냥 형식일 뿐이라는 말도 동의할 수 없었다.

경상도가 고향이고 달마다 기제사가 있던 종가집이었다는게 치떨리게 싷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우리 제사에서 배추적은 그렇게 홀대받을 존재는 아니었다.

가을배추는 가을 배추대로 달고 부드러웠고 여름 배추도 한번 데쳐서 부쳐놓으면  잎 부분은 부으러운 맛에 야금야금 집어 먹고 줄기 부분은 간장맛에 먹어대다 보면 배추 한 통은 금방이었다.

어른들 상에 특히 남자 어른들 상에 올릴 때는 배추나 부추같은 야채적보다  소고기 전 동태전 산적이 주로 올라가도 별로 서운하지 않았다. 적어도 배추적 맛은 몸이 기억하는 맛이었다.

몇개 되지 않은 고기나 생선보다 넉넉한 야채적이라 부치면서 애들엑에 한입 두입 먹이기 야박하지 않았다. 그래서 금방 부쳐낸 뜨거운 배추적을  그냥 간장과 식초만 넣은 양념에 찍어 먹는 그맛은 기가 막혔다. 하긴 금방 부쳐낸 전은 밀가루만 부쳐도 고소하고 맛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옆에 앉아 도와준다고 하면서 한장 두장 얻어먹던 배추적에 익힌 그 맛은

달큰하고 따뜻하고  소소하고 정겨웠다.

맛이 아니라 맛과 함께 떠오르는 분위기 사람들 그리고 그때의 내 마음이었을 것이다.

배추전이 아니고 배추적이라는 명칭도 함께 익숙하다.

 

그러나 깊은 맛은 반대다 먹고 나서 전혀 죄스럽지 않다. 빈접시가 부끄러울 리도 없다. 양념장이 없으면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밍밍한 맛이다.

"얕은 맛"이 혀가 느끼는 맛이라면 "깊은 맛"은 위가 느끼는 맛이다. 어쩌면 깊은과 얕은 이란 수식은 그것을 느끼는 신체부위의 심천 때문에 붙여진 것일 수도 있겠다. 돌연 든 생각에 무릎을 치다 말고 나는 얼른 손을 내린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얕은 맛은 어린아이들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면 깊은 맛은 나이 들어야 제대로 아는 맛이다. 마치 여자들이 아이를 낳고 난 후예야 미역국 맛을 제대로 아는 것처럼! 그렇다면 맛의 심천이란 신체 부위의 심천이 아니라 연륜의 심천일지도 모른다.    16p 

 

 

아침저녁 빈소에 상식상을 지어바치는 시어른 삼년상이 끝나고 여든이 됐을 때 고모는 내게 말하셨다. "야야 살아보니 인생이 참 허쁘다" 살아보니 인생이 참 허쁘다. 라고 토로하신 후 고모는 다시 십 년쯤을 더 사셨다. 그 나머지 십 년은 오롯이 나를 위한 세월이었다. 시어른 밥상을 차리는 대신 철따라 끊임없이 생겨나는 나물을 , 곡식을 양념을 장아찌를 김치를 젓갈을 부각을 정과를 다식을 모조리 내게로 보내고 또 보내셨다. 돌아가신 다음깍지도 냉동실에 굴러다니는 묵나물 덩이가 서른 개도 넘을 만큼. 나는 이걸 녹여 입안에 넣을 수 있을까 입에 넣어 먹지 않으면 그럼 이걸 어쩌나.

냉동실 문 앞에 하염없이 서 있다. 허쁘다는 말은 기쁘다와 슬프다와 고프다와 아프다를 다 녹여 비벼놓은 말이다.. 삶이 "삶은 나물"볻 봇할 리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다 사라져버렸을 리야.

엄마도 할머니 빈소에 상석상을 3년을 지어바쳤다. 효자로 소문난 아버지는 장례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왔고 내 어머니에게 잘하는지 못하는지 쌍심지를 켜고 보던 고모들도 3년 상석상은 잊었을 것이다. 결국 그 몫은 살아 사이가 좋지도 않았고 무시했던 며느리 몫이었다. 그 상석에 무엇을 올리건 그건 엄마 맘이었다. 끼니끼니 뜨신 밥을 올리건 라면 한 그릇 후루룩 끊여 올리던 그건 엄마의 선택이고 몫이었고 그 차려놓은 빈소앞에서 어떤 하소연을 하든 어떤 푸념을 늘어놓고  생전 언행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을 하고 따지고 들거나 그 잘난 아들 욕을 하거나 그건 상석을 올리던 엄마 마음이었을 것이다. 귀한 아들도 엄마를 끔찍히 위하던 딸들 몫이 아니었으니까

아주 오래 시간이 지나 아버지도 돌아가신 후 엄마는 은밀히 말씀 하셨다.

그때 때떄로 라면도 올렸고 그냥 찬밥도 데워서 올렸다고.

그리고 생전엔 둘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 기억도 없는데 그땐 대꾸 없는 시어머니 앞에서 이런 저런 말을 많이 하셨단다. 어짜피 듣기 싶다고 퉁박을 할것도 샐쭉 돌아앉으며 민망하게 만들것도 아닌 존재에게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 뭐든 할 수 있었노라고 말했던 걸 기억한다.

그 3년이 지나고도 여전히 달달히 기제사는 남아있었고  그때마다 챙겨 줘야할 식구들도 줄줄인 건 변함 없어서 엄마집 냉장고는 늘 검은 봉다리에 꽁꽁 쌓인 식재료들이 정체를 밝히지도 않고 꾸역꾸역 쌓여있었다.

 

에티켓이란 엄밀히 말하면 위선이다. 남들과 변별되고자 하는 허위의식일 수 있다. 그러나 안동 양반들의 에티켓은 눈물겨운 수신의 방채기었다고 말해도 가당하리라. 벼슬로 나갈 길은 수백년 동안 원천 봉쇄된 상태였고 아득하고 아슬한 봉우리 가은 퇴계는 바로 이웃에 있는데다 글 읽지 않은 집을 우습게 여기는 풍조는 태중에서부터 절로 내면화 됐다. 삶의 "파이널 고울"은 벼슬도 부도 아니고 군자가 되는 것이었다. 군자란 완성된 인격을 말하고 인격이 완성되는 방법은 쉼 없이 글을 읽는 것뿐이었다. 수신해야 제가하고 제가해야 치국할 수 있었으니 구 수신법이 바로 글 읽기 였다.

"글을 읽는 자가 어찌 음식을 탐해?" 란 이데올로기가 안동엔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이밥을 수북히 펴놓고 아귀아귀 퍼먹어서는 선비일 수 없었다. 그건 거꾸로 밥을 수북이 퍼담을 만한 재력이 없었기에 궁여지책으로 만들어낸 합리화일 수도 있다. 삶의 남루함을 군자라는 추상으로 외면하거나 미봉하려 했다는 심증이 가기도 한다. 111p 

 

고지식하고 뭔가 짠한 이 문단이 낯설지가 않다.

달마다 기제사를 지낸다고 종손집에 와글 와글 모여서 낮동안 일하느라 구겨진  자켓 주름을 펼 새도 없이 나달나달하고 겨뭇거뭇해진 양말 발바닥을 한방향으로 보여주며 절을 하고 또 하는 그 모습은 한편 근엄하면서 웃기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그랬다.

여자들이 종종거리며 차려놓은 제사상앞에서  이렇게 일찍 제사를 지내서야 되겠나? 이게 법도에 맞나 아니냐  소소하게 논쟁하다가 여름엔 역시 수박을 올려야 하는 건지 저렇게 커다란 놈을 상에 떡하니 올리는게 예법에 맞느니 아니니 따지는 것들을 보고 있자면 자기 손으로 차리지 못한 상에 멋적어서 말들만 늘어 놓는거 같기도 하고   뭣도 없이 허세는 여전한거 같기도 하고.. 참 어린 맘에도 뭔가 기묘하게 느꼈던거 같다.

늦어서 입맛도 없다면서도  제사후에 벼벼놓은 밥은 고봉으로 담아도 다 먹었고  제사 음식에서 귀하고 비싼건 기가 막히게 빈접시로 남았고 김치종지 부추전 배추전  생선대가리만 남았다.

채 식사도 못하고 동동거리며 깍아온 과일과 식혜도 마다하지 않고 급하게 다 챙겨 먹고 썰물처럼 다들 빠져 나간 기억이 매달 있었다.

 

겉겉과 속을 일치시키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면 수박에게까지 그렇게 예민하게 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기가 겉과 속이 다르니까 푸른 껍질에 붉은 속을 가진 수박만 봐도 괜히 가슴이 덜컥 하지 않았을까 소설가 김형경에 따르면 컴플렉스란 자신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는데 선비의 수박 기피도 그런 까닭이 아닐까 싶은 의심을 지울 수 없다.

  167p 

 

 

그 성깔 '패랍던(까다롭던)' 아이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쉰 중반을 넘겨버린 지금 아무에게도 그따위 패라움을 내보일 수 없는 지금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아이는 아직 내 안에 자그맣게 웅크리고 살아있다. 울음이 터진 이유는 실은 연변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늘상 헛헛했다. 무언가 그리웠다. 뭔지 모르지만 꼭 이써야 할 것이 내게만 결락된 듯했다. 그게 아버지였을까 연변을 거절하는 엄마를 함께 흉보고 내 편을 들어"까진 연변 하나 먹으면 뭐가 어떻다고 저카노 그제?" 하면서 덜렁 안고 밖으로 나가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건 아마도 남자어른의실팍한 품이었을 것이다.

그럿지만 엄마는 그걸 모르고 있다. 내 울음의 이유가 오직 연변 때문인 줄로만 안다. 그래서 금지된 연변을 들고 와서 저렇게 쩔쩔 맨다. 혼자 타엽점을 찾아내 신주 속에 들어가 있는 할배들한테 먼저 절만 하면 상관없다고 한다. 엄마로선 엄청난 일탈이건만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아버지는 언제 오실까 제삿날이니까 오시긴 꼭 오시겠지! 처음엔 잔울음이다가 거기 놓인 엄마의 버선발을 보자 울음 덩어리는 갑자기 아이의 몸뚱이만하게 커진다. 급기야 덩이진 울음이 아이의 숨을 막아버린다.

그 날 엄마는 연변을 굽다 말고 사당앞에 움푹한 구덩이로 들어와 나를 껴안았다.

"그래 울어라 울어 참지 말고 울어라 울어"

무릅위에 안아 올리고 가슴께를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ㅓㅁ마는 자장가처럼 변명을 한숨처럼 이야기를 들려줬다..... p204 

 

어쩌면 엄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연변이 아니라 아이 마음이 헛헛한 것이 어떤 부재때문이라는 걸. 알지만 안다고 하면 그 허전함을 당신조차 어쩔 수 없을 것 같아 애꿏은 연변탓을 하며 믿지도 않을 이인 이야기를 하며 아이를 달랬을 것이다. 따뜻한 사랑이나 관심이 아니라 요샛말로 츤데레라고 할만한 툭 와서 한마디 해주며 내 편 들어주고 무심하게 한 번 쓱 내 어깨 짐을 함께 나눠 들어줄 그 누군가가 엄마가 더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았을까

더 크게 참지 말고 울어버리고 싶은 건 당신 마음이 아니었을까?

이런 나이에도 가끔  간절할 때가 있다.

그래 괜찮다 괜챃다. 하면서 실컷 울게 등을 쓸어 줄 누군가가 간절해질 때가.

 

 

 

 

 

 

 

 

쑥을 뜯으며 엄마를 생각하다.

 

제비꽃과 민들레 사이에 앉아 쑥을 뜯으면서 엄마 생각을 합니다. 어깨와 머리통에 봄볕이 따끈따끈 내려 앉아요. 엄마뿐 아니라 고모생각 예령이 생각 할머니 생각 한달막씨 생각도 합니다. 봄볕에 나앚아 쑥을 캐던 우리 집안 여자들이요. 다들 나보다 먼저 여길 떠나버렸지만 어디선가 쑥 캐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듯한 여자들이요. 예령이 빼고는 다들 허리 한 번 못 펴고 힘겨운 인생을 살았지만 엄마도 고모도 할머니도 한달막씨도 그리 고통스럽지는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비로소 합니다.

 

이런 봅볓 속에 쑥을 캐는 한나절을 해마다 몇 차례씩 누려왔다는 것만으로 인생은 옹분의 위엄을 휙득하는 것 아닐까요 공기 가득 미만한 볕이 되고 내 머리통을 간질이는 엄마 엄마보다 진화된 삶을 살겠다는 결의가 내겐 이혼이었고 이혼 후 과연 내 일상은 격상했어요. 비로소 아무 곳에도 끄달리지 않을 수 있게 됐어요. 쑥을 캐다 말고 낮잠이 들어도 쑥 속에 잡티가 들어도 개똥이 묻어도................ 온전히 내 책임 내자유.............

 

한 세대 전 우리 집안 여자들의 책임과 자유를 전부 합한 것보다 나는 더 자유롭고 더 강력해졌어요. 난 걷고 싶을 때 걷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춥니다. 하루 한 편의 시 혹은 에세이를 쓰고 이틀에 한 장 그림을 그리면 나는 최소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요, 시장이 확보돤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의 느슨한 생산력으로도 내 한 입에 거미줄 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뜻이지요.

 

난 엄마처럼 자취하는 시동새을 위해 안동읍까지 신작로 30리 길을 장작을 머리에 이고 걸어가지 않아요 고모처럼 조카를 위해 전신거울을 등에 지고 대명동에서 산격동까지 골목길을 질주하지 않아요. 한달막씨처럼 취나물과 고사리를 뜯기 위해(장에 팔아 돈을 벌기 위해서였고 실제로 한달막씨는 꽤 많은 돈을 통장에 모았다고 소문이 났지만 결국 그 돈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갔지요) 하루 열두시간씩 산길을 헤매지 않아요.

 

나도 긴 시간 걷고 질주하고 해매 돌지만 시동생을 위해서도 조카를 위해서도 더군다나 돈을 위해서는 전만 아닙니다. 두 발로 걷는 행위가 나를 우주와 밀착하게 만들고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철학적 경험이 되어 흡족한 들숨날숨의 리듬을 만들어내기 때문이지요. 이건 내가 이제 별로 욕구가 없는 인간. 물질이든 정신이든 바라는 게 많지 않은 인간이 되었다는 증명일지도 모르겠어요 이 상태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는알 수 없지만 어쨌든 봅볕 아래  쑥을 캐려고 엎드린 오늘 내게는 세상이 돈짝 만합니다. 우리 집안 여자들 다 불러 내 잔치라도 벌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남 라고는 남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군요. 아 엄마가 반대하면 안달막 씨는 부르지 않을게요. 근데 아이 낳고 살았던 아버지의 '작은년'을 저쪽 세상의 엄마가 간단히 내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이건 대체 뭐지요? 

 

 

좋은 문장들로 잘 버무려진 싱싱하고 슴슴하면서도 자꾸 끌리는 글을 읽는 맛이 좋다.

유년의 음식이야기와 그 음식들을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그의 어머니 이야기 그리고 그 시절 여자들 이야기를 읽으며  오로지 같은 건 경상도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밖에 없음에도 어딘가 익숙하고 많이 본 풍경들을 떠올린다.

 

촌 집 마루에서 제사 지내는 어른들 등을 바라보던 기억은 늘 코가 시리게 추운 날씨와 함께 더오르고

모두가 음식을 하느라 바쁘고 여기저기 기름 냄새에  적이며 고기가 수북하지만 나는 배가 고프고 어딘가 허기진데 가만 앉아 쉴만한 구석을 찾지 못해 서성이던 마음이 떠오르고

누구나 귀여워하던 종손 동생이 겨우 장닭에 놀라서 앙앙거릴 때 동생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다고 이사람 저사람한테 별로 모나지 않은 지청구를 들으며 혼자 억울하고 분했던 마음

내 집이 아니라 낯설던 시골집

앞동에서 바라보면 양복입은 남자들이십오명  밤에 모여 일제히 거뭇거뭇한 양말을 신은 발을 모으로 절하던 기가 막힌 광경이 베란다로 다 보였다는 말에 알 수 없이 부끄럽고 작아지던 기억

준비하는 사람 , 늦게 와서 차리기만 하는 사람 따로, 절하고 먹기만 하는 사람 따로 치우는 사람 또 따로인  서열문화에 익숙하면서도 반발을 느끼던 순간들

그리고 정말 진저리 치게 지겹고 싫었지만 막상 소박한 명절상 제사상을 봤던 결혼 후 첫 명절이 참 가소로웠던  유치한 기억까지...

음식이야기는

그것이 누구의 이야기건 결국 내 이야기로 이어진다.

 

아는 맛이 무섭다.

아니까 그립고 너무 잘 알아서 속속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고 함께 분하고 함께 아련하다.

이런 문장 이런 글을 왜 이제 알았을까.

더 이상 새로운 글은 못 읽더라도 내가 몰랐던 책들이라도 부지런히 찾아 읽어야 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올해의 미숙 창비만화도서관 2
정원 지음 / 창비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장면 하나하나를 꾹꾹 눌러가며 읽다가 책장을 덮고 읽어내려간 황정은의 추천사에서 툭 하고 터져버렸다

 

사람들이 쉽게 오해하는 것과 달리 가난의 모습은 훌쭉하지 않다. 가난의 주머니는 불룩하다 그 주머니엔 이럴테면 냄새와 흉처와 눈치와 질병과 자책같은 것들이 들어있다. "올해의 미숙"의 장미숙은 그것을 겪고도 좋은 것이 되고자 하는 어른으로 자란다. 나는 이책을 미숙아, 계란말이 뺏기지 말고 너 먹어 누가 빼앗아 먹으면 죽여,,,,,,,,, 이런 심정으로 읽으면서도 내 것이기도 하고 내게 익숙한 타인의 것이기도 한 미숙함들 때문에 서글프고 부끄러웠다....(중략)

 

 

그게 무엇이었을까?

미숙아 제발 제발... 하는 간절함으로 장면을 넘어갔던 거 같다

하나도 내가 선택한 것이 없고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데 그 곳에서 견뎌내는 것도 오롯이 내몫이라는 것이 억울하고 분할 수 있는 상황에서 충분히 그런 표출도 없이 덤덤한 미숙이가 짠했다.

나는 그저 이렇게 이야기 밖에서 짠해지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무기력하고 폭력적인 아버지

사랑받고 싶었는데 계속 밀려나는 경험치만 쌓이면서 삐뚤어지는 언니

그리고 외롭고 외로운 미숙이

미숙이에게 재이는 위험한 유혹이고 위험한 안식처였지만 미숙은 무사히 그 단계도 거쳤다.

그낭 모든 걸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것

미숙은 그것밖에 하지 못했지만 많이 단단해지고 삐뚤어지지 않았고 그 누구도 아닌 미숙 스스로 꽤 괜찮은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어서 알게된 사실이 하나 있다.

어른도 완벽하지 않고 철들지 않았고 모든 것을 알지 못하며 어른이라는 껍데기가 몹시도 버겁다는 사실이다

어떤 어른도 그런 말을 아이들에게 청소년들에게 하지 않는다.

어른이면 뭐든 다 안다고 믿게 만들고 다 하라 수 있다고   뼈겨대고  너희보다 낫다는 것을 우겨대며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른은 개뿔이다.

어른이란 미숙이네 가족처럼 늘 등을 돌리고 뭔가 꽤나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는 척하며 허세를 떨거나 일상과 생계에 지쳐 무기력해져 있거나 내 상처에 빠져서 나보다 더 약한 존재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것들이다,

매년 아이들은 태어나고 자라고 꾸역꾸역 어른이 된다.

그냥 어른같은 어른이 되기도 하지만 간혹 미숙이처럶 제대로 자기가 되고자 하는 어른이 되기도 한다. 그건 잘 가르치고 이끈 기성 어른의 덕이 아니고 어쨌던 견디고 생각하고 내 상처를 내것만으로 생각하지 않은 많은 미숙이들 덕분이다.

이제 더이상 똥을 먹지 않은 진도가 아닌 절미랑 더 이상 미숙아라고 불리지 않은 단단하게 자기가 선택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미숙이의 앞날을 축복한다.

 

 

무어라 말하지 말고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화 <건축학 개론>은 누군가에게는 과거 아련한 추억과 낭만적인 시절을 되새김질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유를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불쾌하고 찝찝함을 남기기도 할 것이다

개봉하고 거의 초반에 딸아이들을 데리고 관람했던 영화는 풋풋한 수지와 어리숙한 이제훈이 만들어 내는 어리숙한 신입생의 분위기에 푹 빠졌다 왜 굳이 나이 먹어서 엄태웅과 한가인이 나왔을까 투덡거리기도 했다.

긴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면 아프고 힘든 기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있지도 않았을 대학시절 낭만을  떠올리고 그땐 그랬었는데 저랬었는데 하는 몽실한 감상에 잠기거나 봐봐... 저러니 대학은 가고 봐야 하지 않겠니? 게다가 이왕 갈거면 좋은 대학을 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저거야.. 하는 속물적인 충고까지 잊지 않았다,

그떄 나는 세상이 보여주는 틀에 아무런 의심도 저항도 없이 그저 낭만적이고 순수한 첫사랑과 그 첫사랑의 배신과 아픔만 보였다,

그러나 듣고 읽고 말하고 바뀌어진 내 눈으로 보는 영화는 참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영화를 첨 봤을 떄도 유연석인 재수없는  명확한 나쁜 놈이었지만

유머와 재미를 담당하는 조정석의 대사들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편견에 가득차서 폭력을 조장하는 발언인지 알게 되고

순수하다고만 생각했던 이제훈 조차 그저 자기 감정과 자기 입장에서만 상대 여성을 바라보며 판단하고 평가하고 비난 한다

그리고 나이 먹어서도 여전히 변한 게 없고 그 상식이라는 것과 관습이라는 것이 단단하게 고착되어서 그저 자기상처만 불쌍하고 아픈 사람이었다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 승민과 서연은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이 과제를 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호감을 가진다. 영화속 승민은 순수하고 어리숙하고 서연은 수줍고 청초하지만 또 한편 도발적이기도 하다. 이것은 승민이 보는 서연의 모습이며 동시에 관객이 보는 서연의 모습이다. 서연의 진짜 모습이 아니고 내가 보고 판단하는 내 위치에서의 서연의 모습이다.

순진한 승민은 자기 어깨에 기대 잠든 서연에게 순간 뽀뽀를 해버리지만 친구 납득이는 그걸 납득할 수 없다. 잠든 여자를 그냥 내벼려두는 것은 범죄라는 대사가 여기서 나온다.

그냥 잠든 여자를 길거리에 내팽개치는게 범죄라는 게 아니라 내 옆에서 무방비로 잠든 여자에게 아무짓도 하지 않는것이 범죄라고 열변을 토한다.

아무런 의사표현을 하지 않았음에도 내 앞에서 쉽게 잠든다는 것은 어떤 여지를 준 것이고 그 기회를 놓쳐버린 승민은 남자답지 못한 찌질한 남자가 된다. 그냥 단순한 입맞춤이 아니라 혀가 드나들고 서로의 몸을 부비는 단계를 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남자에게는 치욕이고 동시에 그렇게 쉽게 내 앞에서 잠든 여자는 어떻게든 해봐도 괜찮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선배 재욱의 여성편력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일단 술을 먹여 술을 먹고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상대를 침대로 넘어뜨려 그러면 게임끝

이 유치하고 폭력적인 대사를 대단한 비법인 양 후배앞에서 늘어놓으며 자랑한다

그들에게 그런 말이나 행동들은 당연한 일이다.

남자라면 원하는 여자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여자는 싫다고하지만 그래도 순순히 따라오는 존재라는 의미도 있고 그런 하룻밤의 동의되지 않은 관계는 그냥 하루의 일탈이고 쾌락이지 전혀 범죄라는 관념이 없다. 너도 하고 나도 하고 우리 선배들도 해 온 일인데 새삼 무슨 범죄냐고 되물을 것이다.

 

우리의 순진하고 순박한 승민은 서연을 좋아하지만 여전히 전전긍긍한다.

이제 제법 공인된 연인사이같기도 하고 아직 그저 그런 친구사이 같기도 하며 확신 할 수 없다.

남자들 사이의 확신이란 몸의 확신이다.

육체적관계로 내 것이라고 도장찍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불안하다.

연인이 물건도 아닐 진대 내것이되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한 그 소유욕은 유치하고 두렵다.

그리고 어느날 밤 술에 취한 서연이 선배 재욱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목격한다.

이미 유명한 바람둥이 선배앞에 술에 취한 서연이 있다.

술먹이고 침대에 눞히면 게임끝!  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어쩌면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절대절명의 순간이다.

그러나 승민은 나서지 못한다.

이제훈이 연기한 승민은 우물쭈물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순신한 청년을 연기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위험한 남자와 함께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은 그저 방관이며 한편으로 동조이기도 하다.

결국 그 찌질한 승민이 하는 일은 두 남녀가 들어간 집 현관앞에서 귀를 세우고 안의 소리를 엿들고 있거나 우리의 납득이게 가서 질질 짜면서 서연을 욕하는 것이다. 쌍년이라고

오로지 그 순간 승민은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불쌍하고 안쓰럽다.

나를 이렇게 초라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든 서연은 당연히 쌍년이며 버려마땅하다.

재욱의 존재는 온데간데없다.

어떤 여자든 넘어뜨릴 수 있다고 믿는 그 선배는 그저 대단한 선배일 뿐이지만

선배에게 넘어간 서연만 나쁜 년이 된다.

그리고 이유를 말하지도 않고 헤어진다.

치사하게 짝이 없다.

아는 척 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따돌리는 것으로 끝내버린다.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정도 되니까 아무말 하지 않고 이렇게 끝내주는 것이다. 너 상대 잘만난줄 알아라.

 

그냘 그 현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냥 아무 일 없었을 수도 있고

무시무시한 트라우마를 남길 범죄가 있었을 수도 있고

한 순간의 찰라의 동의왕 즐거움이 있었을 수도 있다.

어떤 선택이건 그걸 겪고 견뎌야 할 사람은 서연인데 승민은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자기가 무슨 대단한 비극의 주인공이라 믿으며 사랑의 막을 내린다.

 

영화는 누군가에게는 추억이었다.

맞다. 나도 그때 사랑하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여학생이 얼마나 원망스럽던지.. 지금은 어떻게 지낼까 어떻게 지내든 나보다 잘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어쩌면 아직도 나를 기억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러나 나는 철저하게 잊었고 보란듯이 무시할거라는 유치한 다짐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오갈 수도 있다.

그렇게 오간 생각들은 지난 추억이며 낭만이라고 생각되지 그것이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다.

좋아하면 육체적으로 내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내가 경험한 여자가 많을 수록 좋다는 생각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여자에 대해 함부로 떠들어대고 평가하고 욕하는 것

이별의 이유를 직접 말하지 않고 무시하고 정서적으로 아프게 하는 것

알지도 못하면서 욕하고 판단하고 쌍년으로 몰아붙여버리는 것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인은 처음도 서연이고 끝도 서연이다.

술을 마셔서

몸도 가누지 못하게 취해버려서

남자 앞에서 쉽게 잠들어 버려서

혼자 산다는 것을 흘리고 다녀서

모든게 서연의 잘못이고 서연의 문제이고 서연의 행실이 문제였다.

그래서 내 첫사랑은 깨어졌고 얼룩졌고 지나갔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경우에 따라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사회의 민족의 비극으로 확대되기도 한다.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는 그들 개개인의 고통이며 동시에 우리 사회의 비극이고 결코 그 문제의 해결을 개인에게 떠넘기고 모른 척 할 수 없다. 그러나 때로 개인의 문제가 확대 해석되어 이미 폭력을 당하고 살해당한 당사자는 아무런 입장 표명을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의 죽음이 전시되고 더 큰 정의의 문제로 이용되는 경우도 있다. 개인의 비극을 그가 당하는 차별과 무시 억압에서가 아니라 민족의 문제로 보면서 그의 아픔에 내가 동조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내 것 우리의 것이 유린당한 데 대한 분노가 될 수도 있다. 우리 나라 여성은 여성 그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재산이고 소유인데 그걸 타인이 침범했다는 데 대한 분노가 모든 것을 뒤덮을때 그 개인은 이미 없어졌다. 원치않았을 노출과 재해석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생각해 볼 문제였다.

조직에서의 성폭력은 문제 제기자체가 어렵다. 다들 가만 있는데 왜 하필 너는?

예민하고 까칠하고 받아들이질 못하니?
조직을 이렇게 망칠 셈이냐?  혹시 무슨 음모가 있는 건 아니냐? 대의를 망칠 생각이냐

이제 와서 세삼스럼게 그 때 일을 들추는 이유는 무었이냐?

너의 행실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냐?

너도 좋아서 한 행동이 아니냐?

 

가정폭력 아내 폭력은 그저 사소한 개인적인 일이다.

부부간에 강간이 성립할 수 있는가

그럴 지경이라면 진작에 도망치거나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느냐

아이들을 봐서라도 참아야 하는 거 아니었느냐

그렇게 가정을 깨야 겠느냐

그래도 아이들 아버지 아니냐...

가정폭력 데이트 폭력등 친말한 관계에서의 폭력은 문제가 생기기전 예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일어 날지도 모를 불안을 해결하기위해 경찰이나 상담소 어디에 손을 내밀어도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  해줄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직 아무짓도 하지 않은 가장을 잡아 갈 수도 없고 가족을 도피시필 권리도 없다.

그저 기다렸다가 문제가 생기면 잽싸게 연락하고 신고하라는 말밖에 할 수 없을 때 참 이게 뭐하는짓인가 자괴감이 들었었다.

누군가의 사적인 영상을 공유하고 퍼나르고  낄낄거리고 한두마디 보태는 일은 그저 일상의 작은 일탈이고 누구나 하는 일이다. 그것으로 누군가 아프고 힘들고 죽을 수도 잇다는 건 아예 개념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누구나 하는 일이고 이정도가 무슨 범죄냐

그렇다면 애당초 이런 것을 찍지를 말든지

이런 짓을 하는 그 여자의 행실이 문제지 보라고 만든 거 보는게 무슨 대수냐

불볍 촬영을 하고 인터넷에 올리고 유통하는 사람을 철저하게 뒤지고 탈탈 털어서 사대문안에 매달았다가 능지처참을 해버리면 그때는 좀 잠잠해질까?

 

왜 가족은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3인 이상의 가족만이 정상일까

미혼모의 자식이라는 꼬리표보다는 낳진 않아도 멀쩡한 양부모가 키우는게 아이에게 더 낫지 않느냐는 말...

나도 쉽게 생각하고 내뱉았을 말.. 그 말이 누군가에게 절망이고 차별이고 폭력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한다.

 

 

여성폭력은 차별의 한 영역이며 인권침해다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공 국가의 책임 영역으로 확대 돌 수 있는 문제이다.

성별 불평등으로 인한 차별,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이다,

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권력의 문제이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성별이 여자라 하더라도 그 여자가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쉽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자기가 보기에 만만하고 대처능력이 없으며 쉽게 순응하고 저항할 수 없는 상대를 기가 막히게 찾아내며 폭력을 행사한다.

친밀한 관계에서 아는 상태에서 사소한 친절을 통해

결국 성폭력은 남녀 불평등의 문제이며 위계와도 연관되어 있다.

남성들에게 여성이란 약자이다. 약자는 나와 동등한 대상이 아니다.

보호하고  살펴야할 대상이지 나와 입장을 나란히 하고 같은 권리를 가지고 같은 말을 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보호받아야 할 대상은 순종적이고 공손해야한다.

그리고 내가 베푸는 시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면 된다

사회통념이라는 것 상식이라는 것은 나에게 편하고 익숙한 것이다

보호받아 마땅한 열악하고 낮은 존재는 쉽게 다루어지는 존재와 같은 말이다.

원치 않은 보호와 친밀감은 폭력이다.

 

성이란 즐거워야 하고 안전해야한다.

생물학적 보건 위생학적인 성이 아니라 즐거울 수도 있는 것이다.

즐기는 성에서 중요한 것은 그 즐거움이 서로가 즐거워야하고 서로가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나만 즐겁고 나만 안전한 것은 성생활이 아니다.

나의 쾌락과 욕망은 타고난 것이고 유지해야 하는 것이고 풀어주어야 하는 것이며

타인의 괘락은 수치스럽고 더러운  것이고 감추어야 한다면 그것은 성생활이 아니다.

서로의 존중과 동의가 성생활에 필요하다.

 

사회가 원할가게 굴러가기 위해서는 약속이 필요다. 법과 제도 개념의 정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제도를 틀을 만들때 누군가가 소외되거나 누군가 일부의 이익을 위주로 그들만이 주체가 되어 만들옂ㅆ다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모든 제도는 절대적이지 않다 사회는 유기적이며 유연성이 필요하다

 

언어는 시대의 속성을 가진다.

언어가 개념을 규정하고 제한한다.

생각의 방향을 잡고 규정하는 것이 언어이다.

생각은 언어에 종속되기도 한다.

새로운 언어 새로운 개념이 필요할 때가 있다.

 

가부장제란 사적으로는 가족의 가장이 아버지가 된다는 부계혈통을 의미하지만

공적으로는 남성이 지배를 가지고 있는 세상을 규정한다. 남성 중심의 가치관 제도 일반화된 상식들 사회질서를 의미한다. 남성은 남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지배받지 않는다.

다만 다른 기준으로 차별 받을 수 있다. 권력 돈 명예 인종 장애 등이 차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차별받는 남성은 자신의 차별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지 못하도 자기보다 자유로운 여성에게서 찾고 분노한다.

 

신뢰의 함정이란 오래 알고 익숙하여 잘 아는 사람의 말을 더 신뢰하게 된다. 그 존재를 더 잘 안다고 믿는다. 폭력에서 가해자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결과와 피해자의 감정이 중요하다.

그럴 리가 없는 사람. 오래 알아 잘 아는 사람,  뭔가 이유가 있을거라고 생각되는 사람도

내가 아는 그것이 전부는 아닐 수 있다.

 

나도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가해자가 될 수 있다

방관하고 함부로 판단하고 말해버리는  사람도 충분히 가해자의 자격이 있다.

 

sexsuality는 인식의 문제이다. 욕구 쾌락  지향은 인식에서 오는 것이다 본능만이 아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절제가 가능하다.

욕구를 느끼는 것과 직접 행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남성은 욕구를 참을 수 없는 존재이고 여성은 욕구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욕구는 두 다리 사이가 아니라 두 귀 사이에서 조절된다.

 

객관적이고 이성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것

존재하기 힘들다.

어떤 말이나 명제에도 누군가의 생각이 들어가고 어떤 의도된 방향성이 있다,

그걸 인식하든 하지 못하든...

과학적이라는 것도 뒤집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떤 언어나 현상은 항상 그 이면을 뒤집어 보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유리한 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실험의 방향성을 조작할 수도 있고 해석을 달리 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늘 당연하다는 것을 믿고 싶어 한다.

 

 

책속의 100인회 시건이나 정미씨의 아내폭력문제  비디오 사건들...

어쩌면 지금 이순간 사건들과 이리도 겹쳐보일까

세상은 바뀌기도 하지만 계속 제자리를 맴돌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그때와 달리 다른 생각을 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조금은 더 많아졌다고 생각한다.

 

그런 전제가 없는 성은 역시 폭력이다

여성폭력은 언제나 피해여성 개인의 고통보다 그 여성이 속한 집단의 명예와 관련되어 논의되어왔다. 특히 유교 전통과 성의 이중규범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범죄나 인권 침해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에 관한 문제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여성에 대한 푝력을 명예나 도덕과 관련한 문제로 인식하게 되면 여성은 피해 사실에 분노하기 보다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피해여성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명예를 ‘더럽힌‘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자신이 당한 폭력을 거론하는 여성은 공동체 내부의 치부를 폭로한‘배신자‘로 간주된다 성폭력 피해를 문제화하려는 여성이 가장 흔히 듣는 말은 ‘남자 앞길을 망친 여자‘라는 비난이다, 폭력 피해여성들도 자신의 고통이나 피해를 중심으로 생각하기보다 가족이나 직장 조직 학교등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명예를 더 먼저 걱정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으로 피해여성의 고통보다 가해남성의 명예가 더 중요하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 P34

"모든 인간은 폭력 당하지 않을 권리를 포함하여 인간으로서 권리를 가진다"는 인권 개념은 성차별 사회에서는 모순적인 명제가 되어버린다. 인간은 누구나 맞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여성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남성 중심적 담론은 인간으로서 맞지 않을 ‘권리‘보다 여성으로서 참아야 할 ‘도리‘를 더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의는 성역할로 정당화 정상화된다. 여성의 성역할과 인권은 양립할 수 없다. - P35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가부장제의 역사와 같다, 여성 폭력은 수천년간 시대와 지역 계급과 인종을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행해져왔다 그러나 여성이 당하는 폭력이 사회적잉ㄴ 문제로 제기되고 법의 규제를 받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며 서구의 경우에도 불과 30여 년밖에 도지 안핬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폭력은 오랫동안 개인적인 일로 자연스런 일상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가부장제 사회의 성문화의 특징 중 하나는 남성 성기 중심성으로 성폭력 개념 역시 남성 성기 중심적으로 정의된다 그래서 현재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성폭력 개념은 강간등 성적인 폭력에 한정되어 있다 때문에 여성의 입장에서 성폭력 사건을 문제화 할 때 는 성폭력 개념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동반될 수 밖에 없게 된다 ‘강간이냐 화간이냐‘의 논란은 이 문제의 가장 흔한 예이다. 여성의 경험 현행법 규정 여성주의 이론 대중의 통념에서의ㅣ 성폭력 개념이 모두 다르다. - P28

그러므로 인삭자의 사회적 위치와 이를 둘러싼 정치적 조건에 따라 각기 다르게 정의되는 성폭력 개념중에 누구의 경험이 객관적인 성폭력 개념으로 선택되는가와 이러한 선택의 원리에 개입된 권력 관계는 정치적인 문제일 수 밖에 없다. - P28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이건은 대다수의 성폭력 피해자들이 문제를 제기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맞닥뜨리게 되는 질문이다 질문이 제기되는 방식이 ‘정말 성폭력이 없었을까"가 아니라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성을 보여준다. 가해자는 끝까지 부인하는 것만으로 처벌을 피할 수 있지만 피해자는 끄까지 피해사실을 말해도 결코 피해를 인정받을 수도 가해자를 처벌할 수도 없다 성폭력 사건을 공론화 한 피해자와 지원자들이 "왜 가해자 본인이게 확인하지 않고 사건을 공개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대다수의 가해자가 성폭력 가해 사실을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가해자에게 확인"애햐 성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가해자가 인정하는 것만 피해로 인정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가해자외 피해자의 진술이 상반될 때 피해 여성의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권리는 피해자자신에게 있지 않은 것이다. - P70

성폭력 피해를 사건화해서 사회 문제화하는 것과 구체적인 피해자들의 인권 회복과 개인적인 치유는 서로 다른 차원과 방식의 운동과 사유를 필요로 한다. 기해자 중심의 사회에서 피해자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언어와 제현 체계 자치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성폭력 사건의 공론화는 어쩔 수 없이 기존의 담론 체계안에서 수용되는 방식으로 문제화되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는 흔히 사건 발생시점 또는 사건을 문제화한 시점에 정박해 있다고 여겨지고 다루어 지지만 사실 그 여파는 장기적으로 지속되며 삶 속에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 P77

아내 폭력은 숨겨진 범죄라 불릴 만크 폭력 피해가 은폐되기 때문에 폭력 피해자들은 조사와 재판 고자ㅓㅇ에서 그동안 은폐되어왔던 가해자의 폭력 행위를 낱낯이 드러냄으로써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 그러나 폭력 피해자들의 방어는 오히려 사회의 비난을 사게 되고 방어 행위가 아닌 공격 행위였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폭력 피해자들이 아프다고 소리쳐야만 사회는 관심을 갖지만 막상 소리를 지르면 조용히 소리질러야 하는 데 이웃이 알도록 소리질렀다며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이다. 폭력이 아니라 폭력에 대한 저항이 범죄화된다. 여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동정을 호소한느 불쌍하고 의존적인 존재일때만 자신에게 가해진 불법 부당함에 대해 저항하기 보다 스스로 부서져갈 때 가부장제 사회는 비로소 그녀에게 정상 참작의 은혜를 내려준다. - P116

정담 방위가 인권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정상 참작과 선처를 호소하는 것은 동정을 받는 것이다, 끝내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은 사법부의 판결은 애초부터 정당방위할 인권을 가진 적 없는 아내폭력 피해자들의 현신을 증명한다. - P117

모든 언어는 정치적, 무의식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 의미를 발생시키는 것은 맥락이며 가치 중립적으로 보이는 언어는 그 언어를 가치중립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사회적 맥락의 정치적 효과다. 이들 비디오의 내용은 ‘성행위‘지만 그것이 대중에게 보여지는 것은 폭력이다
특정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명명은 명명의주체와 명명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행위이다. - P124

대개 형사사건에서는 가해자 또는 범죄자의 이름이 사건 이름이 된다. 이에 반해 성폭력 사건의 경우 피해자의 이름이 그 사건의 이름이 되어왔던 것은 우리 사회가 ‘누가 왜 성폭력을 행사했는가‘보다 ‘누가 왜 성폭력을 당했는지‘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성폭력 피해를 가시화하고자 하는 여성운동의 노력 역시 이중적 성규범과 성폭력 가해를 정상적 비범죄화하는 사회적 조건에서 자융로울 수 없다.
남성이 인간의 기준이 되고 남성의 경험 인식이 세계를 정의하는 사회에서 남성 관점에서 이루어진 명명은 중립적인 것처럼 보인다. - P125

‘폭력을 행할 수 있따‘는 것은 권력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발생한 후 피해자는 가해자가 행사한 폭력의 의미를 묻고 고통 받는다. ‘그가 왜 그렇게 하였는지‘를 피해자가 끊임없이 의문을 갖는 것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 발생한 일에 대한 해석의 권력이 남성에게 있기 때문이다 폭력은 ‘왜‘라는 동기 이유 원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폭력 그자체가 문제이다. 가해남성이 ‘왜‘를 문제삼은 것은 폭력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도지만 피해자가 ‘왜‘를 묻는 것은 그런 일이‘발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스스로에게 설명하여 이유없는 폭력을 이해햐려는 노력이다.그러나 ‘왜‘라는 질문은 폭력의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치원하는 효과를 낳는다. 폭력 가해자에게 흔히 붙여지는 또라이 미친놈이라는 낙인이나 가해/피해 심리를 설명하는 무수한 연구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의 구조적 문제를 은폐하는데 기여해 왔다, - P156

한국사회에서 성폭력 개념과 성폭력 사건의 객관성은 법의 영역에서나 일상 생활에서나 모두 여성의 입장이 아니라 남성의 경험과 이해에 의해 구성된다. 때문에 남녀 모두에게 여성의 주장은 지나치게 예민하고 과격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남성의 주장은 자연스럽고 객관적인 것으로 수용된다. 5000년이 넘는 성별 권력 관계의 이러한 역사성을 무시한 채 피해ㅕ성의 인권과 가해남성의 권력이 경합하는 상황에서 남성의 특권을 인권의 이름으로 옹호한느 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인권이 어떠한 방식으로 삭제되는지를 보여준다. 뿌난 아니라 성폭력 사건의 진실을 둘러싼 논쟁에서 가해 남성과 가부장제 사회가 실질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성폭력 가해자의 인권이라기 보다는 남성 생물학의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성폭력 의 불가피성이라는데 있다. - P238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9-04-12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그 유명한 [건축학개론]을 보지 않았던 저는 푸른희망 님의 이 글을 통해 비로소 그 내용을 알게 되었네요. 와... 세상 쓰레기같은 남자가 나오는군요. 그런 남자가 비단 영화에서만 나오는 건 아니지만요.

저도 밑줄을 아주 잔뜩 그어가며 읽었던 책인데 제가 읽은 게 구판이라, 개정판으로 새로 사서 다시 한 번 읽어야겠어요. 또 밑줄을 잔뜩 긋게 되겠죠.

잘 읽었습니다, 푸른희망 님.

푸른희망 2019-04-12 17:46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덤덤하다는 것은  힘든 적은 없었다.

세상은 감정을 드러내고 살기엔 너무 빠르고 험한 곳이었다.

감정은 나의 가장 약한 속살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단단하게 무장하고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고 크게 눈이 띄지 않고 살아가기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덤덤하게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머리로 계산하며 살아가는 일이다

쉽게 상처받을 일도 없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없이 딱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그저 바라보고 눈길을 돌리면 그뿐인 정도의 관계망이 가장 편하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운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었다.

운다고 해결될 일은 하나도 없다는 걸 몸으로 먼저 익혔다.

울어서 곶감하나를 얻었던 기억이 없지야 않겠지만 그렇게 얻어 먹은 곶감이 썩 달지만은 않았다. 떨떠름하고 뭔가 개운하지 안은 뒷내가 오래오래 남았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신세지는 일은 편하지 않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혼자 끙끙거리고 해결해버리는 일이 차라리 편했다.

다만 누군가 먼저 내미는 손을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그것이 내게 필요한 것인지 그저 거절이 어려워 아무거나 받아두는 일인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누군가 쉽게 거절하고 아무렇지 않아 하는 일이 작은 충격이었던 기억이 있다.

저렇게 아니라고 말해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구나

 

먼저 요구하지않았지만 먼저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냥 편하고 착하고 만만하기도 한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속으로 얼마나 욕을 잘 하는지 얼마나 미워하는 사람이 많은지 얼마나 싫은 상황을 많이 꼽을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아니 알지만 모른 척 했을 것이고 설마 그럴리가 하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부터 기억을 더듬어 보면 운 기억이 별로 없다.

전혀 울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울고 나서 개운했던 기억은 없다.

늘 찝찝하고 울지 말아야 했다는 기억이 있다.

울음을 참으며 웃으려고 했던 기억이 있고 그냥 꾸역꾸역 참았던 기억이 있다.

혼이 나도 우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고 이런 일로 울고 짜는 일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고

이런일로 우는 거 아니야. 징징거리는 거 아니야 힘들다고 하는 거 아니야 라는 말을 늘 내가 먼저 나에게 했다.

 

그래서였을까

가장 힘든 일이 누군가 병문안을 가는 일이었구 누군가 슬픈일이 있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위로 하는 일이었다. 타인의 슬픔과 아픔을 공감하는 일이 어려웠다.

그 감정을 전혀 이해할 수 없어 어려운게 아니었다.

어쩌면 너무 훅 하고 그 감정이 내 속으로 들어와 내것인 것마냥 자리를 잡아 버려서 당황스러웠다.

이건 내문제가 아니야

이건 내일이 아닌데 이러는 건 너무 오바하는 일이야

도데체 이런 감정이 뭐지? 이런 걸 내 보이면 안될 거 같아

그런 억누름이 먼저 생겼고 늘 감정을 숨겼다.

함께 우는 일 함께 분노하는 일은 어려웠고 내 아픔이나 플슴이나 분노도 누군가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늘 내 아픔은 내 슬픔은 타인의 것보다 작았고 하찮아 보였다.

늘 내가 먼저 내 문제를 뒤로 미루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아픔에는 경중이 없고 선후가 없다.누구의 어떤 아픔이나 슬픔은 똑같은 질량과 무게를 가진다. 자기에게는 자기의 아픔이 자기의 슬픔이 가장 무겁고 깊다.

 

남의 상가집이나 남의 병실에서 울지 않는 것은 큰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상주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내려가는 내내 내가 생각한 것은 슬픔이나 황망함이 아니라 울지 못하면 어쩌하 하는 걱정이었다.

명색이 자식이고 어찌 보면 느닷없는 죽음이었기에 슬프고 아파야 하는 것은 당연하게 내게 그런 감정은 당연하게 있는데 그걸 표현하는 것이 너무 도드라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아니 걱정이 더 깊었다.

늘 울지 않았던 그래서 독하다는 말도 들었던 내가 이번에도 울지 못하면 어쩌나 남들이 어떻게 볼까

울고 있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경험만 있던 내가 처음으로 울지 않은 모습을 남들이 보고 뭐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었다.

걱정은 기우였다.

엄청나게 통곡하지 않아도 눈물은 나왔다.

어쩌면 우리 가족이나 친척들이 성정이 지나치게 감정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들 그만한 선에서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애도하고 충분히 감정을 드러냈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장례를 치뤄봤다면 알 수 있겠지만 3일 장 그 시간은  결코 순수한 애도의 시간은 될 수 없었다.

사람이 죽어서도 여러가지 치뤄내야 할 절차가 있고 형식이 있고 보여지는 관습이 있다. 계약하고 싸인하고 인사하고 주고 받고 다시 주문하고 클레임을 걸고 손님을 받고 인사하고 때로는 과거 추억을 이야기하다가 어울리지 않게 꺄르르 웃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무상가란 어쪄면 슬픔과 고통속에 나름의 희노애락이 모두 뒤섞여 있기도 했다.

터져야 할 울음은 오래 속에서 삭혀지지만 전혀 휘발되지 않았다. 그렇게 곰삭고 진해지며 이걸 밖으로 배출하지 않으면 내가 살기 힘들겠다 싶은 순간이 있었다.

내가 이렇게 그를 사랑했고 존경하고 필요했던가 스스로가 놀랄만큼 누군가의 부재가 주는 무게는 대단했다. 어쩌면 긴 형식적인 절차가 모두 지나고 이제 정말 그 존재가 부재함을 실감하는 순간 애도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혼자 누가 보지 않은 곳에서 엉뚱하게 울음이 터졌고 그의 일을 그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기록하며 보낸 시간이 아마 나에게는 애도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의외로 그에게 많이 의지했고 많은 것을 받았고 많은 부분이 닮았음을 인정할 수 있었고

내가 그렇게 미워하고 혐오했던 부분이 그의 가장 약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그는 자기의 가장 약한 부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렇게 애썼는데 그게 나에게는 힘들고 어려웠고 미움마저 들게 하는 것이었구나 알게 되었다.

늘 화해와 깨달음은 뒤는게 온다.

그게 적절한 순간에 온다면 성인이지 일개 개인일 수는 없을 테니까

 

친한 친구의 병문안도 쉬운 일은 아니니었다.

간단한 시술이 아니고 어쩌면 생과 사를 넘나들지도 모를 병을 앓는 친구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잘 견디라고 밥도 잘 먹고 쉬기도 잘하고 치료도 잘 받고 부디 잘 견디어 예전으로 돌아오길 기다린다는 말이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어떤 말도 입에 발린 말같고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 것 만 같고 그저 타인의 형식적인 말처럼 들릴 것 같았다.막상 병문안 가서 본 모습이 충격적이었지만 아닌 척 모르는 척 괜찮은 척 하며 그래도  좋아보여 다행이야. 넌 잘 해낼거야. 원래 씩씩하고 똑독했으니까 이만큼일거야 라는 말... 그게 얼마나 전해졌을지 알 수 없지만 그 이상은 힘들었다.

 

내 감정은 소금밭에 뒹구는 것처럼 쓰라리고 고통스럽더라도 일상은 평화롭게 지나간다. 배가 고프고 졸립고 피곤하고 해야할 일은 시간시간  이어진다. 무심하게 아무일 도 없다는 듯한 그 풍경이 아프다. 어쩌면 나의 감정이 아니라 나의 감정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는 모든 것들이 더 아프고 고통스럽다.

내가 아프다는 것은 타인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또 누군가가 아프다는 것도 내개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삶이란 그런 거였다. 원래

그래서 괜찮기도 했고 외롭기도 했다.

 

별 거 아닌 문장들에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별 거 아니어서 무심해서 더 북받치는 것 그런게 있다.

                                                                                   

무언가 특별하고 대단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최근에 한다.

아이는 특별하고 무언가 뛰어난 누군가가 되고 싶어했다.

평범하고 무탈한 것이 얼마나 행복인지 아직 알 수 없는 나이다.

다른 누구와 다르지 않고 같다는 것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은 죽음과 다를 바 없다고 아이는 생각한다.

하긴 나도 그랬다. 삶은  길고 나는 영원히 살것처럼 굴었다.

누구와도 차별되지 않는다면  독특할 수 없다면 그냥 살지 않은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냥 이어지고 흐르는 삶

어디를 뒤바꾸어  놓아도 별 이상할 것 없는 모습이 얼마나 귀한지는 나이 먹어야 아는 일이다.

굳이 많이 아프거나 고통스럽지 않더라고 내일과 같은 오늘이 축복이라고 생각될 순간이 온다.                  

아니다. 떠쩌면 특별하고 단 하나밖에 없는 가치라는 것이 얼마나  높고 외롭고 쓸쓸한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누구나 개개인은 스스로 세상에 하나뿐인 귀한 존재이다.

그래서 이롭고 그래서 쓸쓸하다.

그걸 아는 나이가 되면 누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독특하고 하나밖에 없는 내가 다른  누구와 함께 어울리고 도드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입원일이다. 아침 베란다에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 한 대를 몰래 피운다. 맛있다. 풍경은 흐리다. 전철 역으로 사람들이 바쁘게 걸어간다. 세상의 일상은 무사하다. 그 무사함에 팩트들이 들어있다. 팩트는 엄혹한 칼이다. 정확하고 용서가 없다. 이 칼의 무심함에 나는 기록으로 맞선다. 기록은 사랑이다. 사랑은 희망이다. 뭄ㄴ득 파란 버스가 풍경안으로 들어와서 정류장에 선다. 그리고 떠난다. 카프카의 마지막 일기가 맞았따. "모든 것은 오고 가고 또 온다‘ - P60

때아니게 툭툭 마음이 꺽인다.
가을날 마른 나무처럼. - P18

분노와 절망은 거꾸로 잡은 칼날이다.
그것은 나를 상처낼 뿐이다. - P23

삶은 향연이다.
너는 초대받은 손님이다.
귀한 손님답게 우아하게 살아라. - P119

삶은 힘들이다.
몸은 힘으로 살아간다.
정신은 힘으로 사유한다.
마음은 힘으로 노래한다.
생의 기쁨과 희망과 사랑을 - P122

대학병원 카페테라스에서 창경궁 대문을 본다 추녀 마루의 부드러운 곡선, 혼자가 아니라 둘로 층이 나눠어서 더 중후한 힘의 안정성, 하늘을 바라보는 지붕들의 겸손한 낮음-내가 자주 삶의 격조라고 부르기 좋아했떤 어떤 자세 - P128

나는 나를 꼭 안아준다.
괜찮아 괜찮아........... - P145

돌아보면 살아온 일들이 꿈만 같아서 모두가 고맙다. 나는 평생 누군가의 덕분으로 살았지 나 자신의 능력과 수고로 살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 너무 잘 안다 갚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내가 가진 것들이 있다면 그건 모두 내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이다. 이별의 행복 그건 빈손의 행복이 아닌가 - P178

요즈음 별로 불편한 것이 없네요라고 내가 말한다. 그게 문제죠. 라고 의사는 말한다. 암 자체는 불편하게 만들지 안하요. 다만 점점 자라날 뿐이죠. 그러다 종양이 혈관을 막고 장기를 누르게 되면 뭄이 불편해지는 거죠. 몸이 편하다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죠. 오히려 몸이 편할수록 암의 상태를 의심해봐야죠. - P185

우리는 모두 특별한 것들이다
그래서 빛난다.
그래서 가엾다.
그래서 귀하고 귀하다. - P1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