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진 3. 화폐 - 세상 모든 것의 기원 오리진 시리즈 3
윤태호 지음, 홍기빈 교양 글, 조승연 교양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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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화폐의 기원 화폐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지만.. 결국 속물인 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있어~ 라는 고상한 말을 돈에 깔려서 정신을 못차리는 경험을 한 후에 우아하게 뱉고 싶을 뿐이고.. 왜 윤태호의 인물들은 다들 열심히 애쓰는데 마음이 짠할까? 학습용으로만 읽으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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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하는 마음이란...

글을 읽고 쓴느 사람들 마음속에 한 조각씩은 품고 있는 한때는 꿈꾸었고 이제는 꿈이 아니어서 업으로 쓰거나 업으로 읽거나 그냥 읽고 끄적이는 사람들의 마음

그런거 아닐까

책에는 그림책 작가 ,동화 작가 소설가 시인 희곡작가 편집자 기자 평론가 에세이스트 등등이 등장한다.문학을하는 사람들

작가이거나 작가가 아니더라고 작가를 꿈구었거나 작가와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 그래서 문학이 취미 이상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을 모았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문학을 한다는게 돈이 될까? 그까짓 돈이 되지 않은 문학을 왜 그렇게 애타게 담고 있고 놓질 못하고 그 주변을 맴돌고 있을까

그럼에도 문학을 하는 사람들 돈이 되지 않아도 돈이 되지 않는 걸 뻔히 알아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 절절한 마음들을  듣는다

단도직입으로 들어가 왜 문학을 하나요? 왜 그만두지 못하나요 그 마음은 무엇인가요?를 묻는 무례한 질문이 아니라 주변을 빙빙 돌아가며 길게 길게 돌아서 그 중심으로 들어간다

제각각 생각하는 문학이 다르고 느낌의 결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그 주변에서 아직도 두근두근거리며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누군가의 글은 좋은 정보를 주기도 하고

누군가의 글을 그 마음 결이 너무 잘 이해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글은 죽비처럼 사무치기도 하고

미안하지만 누군가의 글은 그냥 좋은 글이네 하고 말기도 했다.

 

그리고 문학하는 마음에서 비록 ~하는 은 아니지만 늘 그 마음을 가지고 있는 독자가 있다

좋아하는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새로운 저자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하고 잔뜩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마음도 겪으면서도 돈이 되지도 않고 취미 이상 될 수도 없으면서  기다리고 읽고 또 여기저기 리뷰를 남기며 흔적을 쌓아가는 독자가 있다.

아래 인용한 김민정 시인의 글이 그래서 편집자의 마음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독자의 마음이기도 하다 기다리고 들어주고 또 들어주고 글쓴이의 마음까지 헤아려보려는 그 마음이 독자의 마음이다.

 

사족처럼 붙이자면  글 내용과 관계없이 이 서문의 문장들에 마음이 간 것은

이말은 독자의 마음이고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줘야 하는 상담자의 마음이고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마음이지 싶어서.. 내용과 별개를 이 문장이 확 박힌다.

끝없이 들어주고  행여 잘못 들을까 쉬쉬하며 헤아리며 듣는 마음

그래서 이파리같은 귀만 가져서 내 말은 어디 로뱉아야 하나 지칠 때도 있는 마음

 

이런 느닷없는 위로를 받기 위해

독자들은 문학을 읽고 기다리지 싶다

"너는 귀를 온몸에 달고 있는 사람. 네게는 이파리같은 수밚은 귀가 달려있어. 들어주는 사람. 감춰주는 사람. 안아주는 사람. 끝끝내 후회를 지워주는 사람.너는 그들을 그들 자체로 가장 그들 답게있게 있게 해주는 사람. 그들 목소리를 가장 가까이서 듣고 혹시나 티가 섞일까 싶어 조바심내며 불안해하며 가장 정직한 방법으로 뱉어주는 사람.그래서 너는 가장 가난한사람. 이름을 지우는 존재라는 거 . 네 몸에여름 나무 이파리같은 귀들이 쫑긋 제 몸을 세우고 잘못듣고 잘 못 들을까봐 서로 쉬쉬하며 들어주는사람. 그래 그거.들어주는 사람... 들어서 주는 사람.

 

                             서문  저자에게 김민정 시인이 해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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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하는 마음 일하는 마음 2
김필균 지음 / 제철소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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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하는 마음. 쓰는 사람들.그 마음이 어딘가 누구에게 닿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이야기.그 마음은 독자가 읽으며 품는 마음으로 완성된다. 완성될것이다. 그들도 확신할 수없어 서성이고 망설이고 마뜩찮아한다. 읽으머 좋기도하지만 갸우뚱했을 순간도 굳이 미안해하지않아도... 곱씹을 부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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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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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한 균열'

 

작품들으르 읽으며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이미지는 작은 실금들이 이어진 균열이었다.

 

<길들여 지지  않은 딷>의 루마와 아버지

<지옥-천국>의 엄마의 Ekef ghr은 엄마와 흐라납 삼촌 그리고 데보라

<머물지 않은 땅>의 매건과 아밋 부부

<그저 좋은 사람>의 수드하와 라훌 남매

<아무도 모르는 일>에서의 폴과 생과 파룩 그리고 그들의 내면에서

<헤마와 코쉭>에서의 두 사람 그리고 두 사람과 그들의 가족에서

그들은 조금씩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그동안 믿어왔던  익숙한 내 면에서 균열을 느낀다.

알이 깨어져야 그 속에서 나올 수 있다

알 속이 마냥 따뜻하고 안락해서 그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균열은 무언가를 깨는 것인 동시에 다시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신호이다.

분열된 세포들이 성장을 이룬다.

부모의 손을 놓는 순간의 불안고 공포를 이겨내야만 내 세상을 만들수 있고

내 아이는 성장할 수 있다

균열은 그런 것이다.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는 동시에 모든 것이 시작할 수 밖에 없는 토양이 된다.

 

 

아버지는 나이를 먹고 은퇴를 했고 이제 더이상 돌봐야 할 가족이 없다. 동시에 자신을 돌봐야 할 가족도 없다. 그건 자유롭고 동시에 고독하다.

그리고 이전 가족에 둘러 쌓여 있을 일도 없지만 내가 무엇을 하든 눈치 볼 필요도 없고 잔소리를 들을 이유도 없다.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그렇게 분리되어 이제 어쩌면 행복하다.

루마는 여느 자녀처럼 부모에게 반항하고 거부하는 성장기를 지났고 이제 그 부모의 나이가 되어 부모의 입장에서 그리고 부모 부양이 의무인 민족적인 정서에서 많이 갈등한다.

아버지를 모셔야 하는게 아닐까. 저렇게 홀로 두어도 될까?

아버지  생각이 맞다.

이제 루마가 아버지가 필요하다. 어른에게도 어느 순간 나를 끌어주고 기댈 수 있는 다른 어른이 필요할 때가 있다. 지금 루마가 그렇다. 너의 선택이 옳다고 말해주고 옆에서 거들어주고 조금 대신 해줄 수도 있는 사람이 어쩌면 아이들보다 어른이 더 필요하다.

균열을 가지고 분리되었으나 아직 분리되지 못한 루마가 오히려 더 불안하다.

아버지는 이제 충분히 혼자서 하나로 완성되었다.

 

낯선 땅에서 아무도 없는 상황

그 곳에서 자기와 같은 고향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는 것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고 나의 습관을 잘 알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것도 일종의 연애감정이 아닐까.나에게 의지하는 프라납이 어쩌면 엄마에게는 존재의 의미를 되찾아주는 사람이고 희망이고 사랑이다.

책임은 있지만 애정이 없는 아버지보다 옆에서 칭얼거리며 말을 들어주고 눈을 맞추어주고 함께 시간을 시시껄렁하게 보내는 사람이 더 소중하다.

엄마의 마음이 그렇게 프라납에게 기울어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할 수 밖에 없다는 걸 어린 딸이 이해하긴 힘들다. 촌스럽고 부끄럽고 남에게 내어보이고 싶지 않은 엄마의 투박하고 낯선 x통제는 벗어나고 싶은 게 당연하다. 삼촌의 연인 데보라에게 더 끌리는 게 당연하다.

엄마와의 인연은 그렇게 끊어버리고 싶고 데보라와는 무엇이든 연결되고 싶은 마음

엄마에 대햔 배신은 아닌데 엄마는 늘 그 자리에 있을테니 하는 마음도 있을테고

나는 엄마와 다른 사람이고 싶다는 딸에게 데보라는 참 매력적일 것이다.

그리고 엄마는 데보라의 등장으로 프라납도 잃고 딸도 잃게 생겼다.

균열은 그렇게 내 모든 것을 가져가버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삶은 지속된다.

어느 가을 석양앞에 바바리 코트를 걸치고 오래오래 서 있던 엄마의 마음은 그 지속되는 삶이 지긋지긋하면서 동시에 다행이지 않았을까

그런 모순된 마음이 드는 때도 있는 법이니까

 

장녀들은 다 그럴까

부모에게 순종하고 동시에 동생들에게 책임을 느끼는 존재일까

나는 장녀가 아니어서 첫째가 아니어서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언제나 옳은 행동만 선택하는 언니가 가끔은 답답하기도 했다. 저러지 않아도 되는데... 저러지 않아도 엄마나 아빠가 기절하진 않는데...

동시에 미움도 가지고 있었다. 늘 자기가 옳은 역할을 해버려서 나는 자연스럽게 나쁜 동생이 되어버리게 만드는 일이 왕왕 있었다. 그렇게 착한 언니인데 그렇게 책임감있는 누나인데 왜 그 누나를 언니를 속상하게 만드냐고 누군가에게 야단을 맞을 때 난 늘 억울했었다.

누가 그렇게 착하게 굴라고 한 적도 없고 우리 때문에 걱정하고 전전긍긍하라고 한 적도 없고

엄마대신이라고 한 적도 없는데 왜 혼자 안달하고 혼자 애태우면서 나만 나쁜 사람을 만들까?

다 자기 만족일 뿐인데 나는 하나도 고맙지 않은데 왜 저러고 살까?

그 마음을 나이 먹어 이해가 되지만 반갑지 않은 건 여전하다.

착하기만 한 사람. 뭔가 책임을 느끼고 하려는 사람들이 고맙지만 동시에 참 버겁다.

수르하의 마음도 알지만 어쩐면 라훌의 마음을 더 알거 같다.

물론 수드라 때문에 라훌이 알콜 중독이 된 것도 아니고 대학을 그만 둔것도 아니다.

그건 라훌의 선택이고 그의 책임이다.

조금 이기적으로 말하자면 수드라보다는 차라리 부모의 어정쩡한 자존심과 자식에 대한 두려움이 더컸을 것이다. 자꾸 수드하가 자기랑 몰래 술을 마셨던 그 순간을 후회할때 그때를 되돌리고 싶어할때 그건 아니라고 그런 마음이 라훌을 더 외롭게 하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잘 하고 싶어 애쓰는 순간 관게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국적이 조금안 방만한 생의 연애를 지켜보는 폴은 어떤 마음일까?

폴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금이 가는게 아니라 그읜  내부에서 균열을 느낀다.

생을 알게 되고 룸메이트로 지내면서 그의 연애에 조금씩 개입하고 관심을 가지면서 그의 속에서 조금씩 균열이 일어난다. 이전의 폴이라면 전혀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고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낀다.

 

헤마와 코왹의 이야기는 어쩌면 참 상투적이고 어딘가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거 같지만 그래서 통속적으로 마음을 흔든다.

어릴 적 첫사랑. 두근 거리는 감정 숭상하는 마음

멋진 타인에게 끌리면서 내 가족이 구질구질하고 촌스럽게 느껴지는 마음

붏편하고 속상하면서 동시에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

사춘기 소녀의 복잡한 심경을 이야기하고  이어

어머니를 잃고 제대로 애도의 기간을 보내지 못하고 그대로 눌러 놓은 채 나이 먹은 소년의 이야기. 아버지와는 멀어지고 그 아버지의 재혼이 낯설고 싫지만 그걸 싫어한다고 표현하기엔 이제 성장했고 아버지가 이해되어버리는 묘한 감정들

소년의 애도는 그리고 죽음에 대한 집착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아니라 이젠 스스로 풀어내야 할 숙제가 된다.

그리고 다시 만난 두 사람 , 짧은 시간 불같은 연애 그리고 각자 제자리로

그러나 이전과는 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

 

딴 이야기지만 어릴적 전학을 5번을 했다.

익숙할만하면 떠나야 했던 경험들이 어쩌면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는 쪽이 내가 보호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일찍 알게 해줬다. 그냥 친절하고 상냥할 수 있는 무심함 그게 나와 타인의 관계였다.

시시콜콜 집안 일을 나누고 비밀을 나누며 단짝을 만드는 일은 영 서툴렀다.

내가 누군가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도 어색하고 누군가가 내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도 불편했다.쿨하다고 스스로 믿었지만 그건 쿨 한것이 아니라 상처받지 않겠다는 비겁함이고 나를 지키려는 방어였다. 늘 좋은 사람이었고 언제나 감정의 기복없이 이성적이고 잔잔한 사람이지만 참 알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누구랑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그냥 배경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계속 내가 어디론가 이동하고 어디서든 타인이어야 한다는 게 외롭고 슬펐지만 그걸 누구에게 말 할 수 없었다. 남들이 보기엔 늘 잘 적응하고 아무일도 없는 그래서 조금은 무심해져도 괜찮은 아이였으니까

 

아이를 키우며 왠만해선 전학이나 이사는 하지 말아야지 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새로운 곳에서 이미 형성된 관계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걸 지켜보면서 어쩌면 아이가 힘들었을 것보다 내가 더 힘들어서 혼자 끙끙댔던 거 같다.

길게 이어진 아이의 친구문제와 왕따문제를 겪으며 그게 아닐 지 모르는데 나는 나의 이사결정을 원망했고 모든게 거기서 비롯되었다고 혼자 전전긍긍했다.

다행히 요즘 아이들은 굳이 뿌리를 이식한 경험이 없이도 조금씩 혼자가 익숙하고 개인적인 경향이 강해서인지 우리 아이들도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걸 배워가는 중이다.

이게 좋은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줌파 라히리의 작품은 문화와 터전을 바꾼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그 낯선 곳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노력하는 사람들 그렇게 미세하게 균열되는 관계를 그린다. 가족끼리 형제끼리 부부끼리 그리고 내 속의 나에게 미세하게 실금들이 생기고 그 실금들이 서로 만나 더 길어지고 깊어지며 흔들리고 갈라지지만 결국을 그렇게 계속 삶을 이어가는 이야기들이다.

내 감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이 오고

남이 나같지 않다는 외로움을 느끼며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나도 그 균열을 받아들이고 기다리기도 하지만 상처를 입는다.

관계란 유기적이어서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지속적으로 영원히 이어지는 관계는 매말라서 박제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건 관계가 아니다.

만남이 있고 헤어짐이 있고 언젠가 누구든 잊혀지고 잊고 그렇게 산다.

관계의 균열이 불행만은 아니다.

균열과 절망 그리고 세상의 끝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균열을 통해 성장하고 더 단단해진다.

 

 

예전 영화 <말아톤>을 보고 누군가가 말했다.

이 영화는 내가 내 아이의 손을 언제 놓아야 하는가 에 대한 영화라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비단 내 아이만이 아니다.내가 누군가의 손을 잡았던 순간이 있고 그 순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 동시에 그 잡았던 손을 놓아야 하는 순간도 있다.

계속 손을 잡고 있다면 든든하고 불안하지 않겠지만 한 손이 잡힌 상태 혹은 누군가를 잡은 상태로는 무엇도 제대로 할 수 없다. 살아가는데는 자유로운 두 손이 필요하다.

그리고 땀에 끈적이는 손이 불쾌할 수도 있고 서로 잡은 손을 언제 놓아야 할지 서로 타이밍을 만주지 못해 눈치만 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잡은 손은 언젠가 놓아야 한다.

초원이가 걱정하는 엄마의 손을 놓고 혼자 달리는 순간

엄마가 결승점에서 혼자 달려올 초원이를 믿고 기다리는 순간

이런 균열이 관계를 더 단단히 만들고 우리를 성장하게 한다.

 

그리고 이 소설집은 꽤 좋은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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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9-07-22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초등학교 때 전학을 한 다섯 번은 한 것 같습니다..ㅎㅎ

푸른희망 2019-07-23 07:02   좋아요 0 | URL
님도 옮겨심기가 많았었군요~~
 
한 글자 사전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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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를 누군가 내개 묻는다면 격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모든 걸 가진 자에게서보다 거의 가진 게 없는 자에게서 더 잘 목격할 수 있는 가치이고 모든 걸 가진 자가 이미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유일한 가치이고 거의 가진 게 없는 자가 유일하게 잃기 싫은 마지막 가치이기때문이다.  

 

아버지가 없는 밥상에서 더불어 없어졌던 메뉴 

 

금을 밟지 말라는 뜻에서 선을 넘지 말라는 뜻에서 설정된다. 금은 타인을 통제하기 위해서 선을 나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서.

 

시각이라는 감각에만 의존해 우리가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은 시각의 즐거움도 시각의 도움도 외면한 채 살아간다. 보이는 것만 잘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들에 여전히 무지한 채로.

 

 

타인에게 요구하며 가혹한 것.

스스로에게 요구하면 치열한 것

 

 

얼굴에 많이 칠하면 원하는 내 얼굴과 가까워지고 가슴에 많이 쌓이면 원하던 나 자신과 멀어진다.  

 

 

송곳니가 없는 초식동물이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적을 향해 내세우는 것.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이다. 물어뜯는 것은 잡아먹으려는 공격에 가깝고 들이받는 것은 잡아먹히지 않으려는 방어에 가깝다.  

 

 

빛이 없으면 색도 존재하지 않는다. 색은 사물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사물에 반사되는 빛의 파장이다. 가시광선만을 색으로 인식한다. 물체가 흡수한 색이 아니라 반사한 색을 인식한다. 그러니 색을 쓰는 여자는 없다. 색을 밝히는 남자의 시선에만 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쪼개어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심고 물을 주어 키워가며 알아내는 것.

 

 

 

아프지 않아도 먹는다. 낫기 위해 먹는 게 아니라 나아지기 위해 먹는다. 음식 대신 이걸 먹기도 한다. 운동 대신 이걸 먹기도 한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잠 대신 이걸 먹기도 한다. 언젠가 물 대신 먹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행복 대신 먹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요리왕'  ' 농구왕' 처럼 어떤 분야에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칭찬할 때 뒤에 붙여 쓴다. '왕재수' '왕싸가지'처럼 앞에 붙여 쓸 때는 비아냥을 뜻한다. 단 '왕만두' '왕돈가스'처럼 크기가 큰 것을 나타낼 때는 제외하고

 

 

얼마나 덩치가 크든 얼마나 무겁든 얼마나 대단하든 얼마나 소중하든 그 무엇이든 다 타고 나면 한 줌 토

 

 

 

적을 만들지 말라고 하지만 적은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적을 이해하면 이길 수 있다고 하지만 이해할 수 있으면 적이 아니다. 적을 용서하라고 했지만 용서는 이해 이후에나 겨우 가능하다.

 

 

남의 말에 토를 달면 건방져 보이고 자기가 한 말에 토를 달면 비겁해 보인다. 

 

 

이것에 딱 맞으면 재미가 없고 이것에 갇히면 부자유스럽고 이것에 맞추면 성의가 없고 이것에 박히면  구태의연해진다. 이것을 지키고 싶어하는 것은 기득권의 욕망이고 이것을 깨고 싶어하는 것은 피기득권의 소망이다.

 

 

폼을 잡는 사람한테서는 폼이 안 나고 폼이 나는 사람은 폼을 안 잡는다. 

 

 

 

뜻을 같이하는 게 아니라 배격을 가티하기 위하여 무리를 지을 때 가장 팀워크가 좋다. 같이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배격도기 싫어서 무리에 가담할 수 밖에 없다.

 

 

 

(중략)

'어떤 집에 사나요?' 하고 묻는 일은 '어떤 창문을 갖고 있나요?'라는 질문일 것이다. 또한 '당신에게 보이고 들리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라는 질문일 것이다. 결국 '당신은 어떤 생각을 갖고 사나요?'라는 질문인 셈이다. 적어도 내 경우는 그랬다.

 

영화 '기생충'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두 집의 창이었다.

영화 첫장면에서 길게 잡혔던 기우 기정네 집의 창은 가로로 길고 좁다. 그 너머에 보이는 풍경은 지저분하고 지리멸렬하고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풍경들이다.

박사장네 넓고 멋진 정원을 보여주는 창은 그 자체가 하나의 그림이고 풍광이고 여유였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자연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제공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건 틀렸다.

자연도 이제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고 돈이 많으면 더 멋지고 여유로운 풍경을 얻고 자연을 가질 수 있다. 나무도 꽃도 하늘도 저너머 내것이 아닌 풍경들도 돈으로 살 수 있다.

내가 어느 계급에 속했느냐에 따라 내가 바라보는 풍경이 달라진다

내가 선 그 위치에서 내게 보여지는 것만 나는 볼 수 밖에 없다.

내가 늘 바라보는 그 풍경이 나의 환경이 되고 나의 어떤 성격을 형성하고 내 습관을 만들고 내가 꾸는 꿈을 규정짓는다. 내가 본 것 이상 알 수 없다.

상상할 수 있는 게 인간이라지만 인간은 결국 내가 아는 범위내에서 무언가를 덧붙여 상상할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환경이 중요하다고 하는 모양이다.

어떤 환경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알고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내 가치가 달라지고 내가 다르게 규정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두에게 공정하게 배분되는 건 하나도 없을지 모른다. 슬프지만...

내가 알 수 없는 세상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기우에게 박사장네 정원이 웅장하고 근사할 수 밖에 없을테고

박사장네 가족은 죽었다 깨어나도 기우네의 창밖 풍경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건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내가 아는 그 한뼘보다 더 크고 넓고 다양하다.

먼 우주에서 바라보는 지구처럼 내가 아는 것은 그저 점 하나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이고 내가 전부를 안다고 믿고 살고 죽는다.

창을 가진다는 것

그것이 사람을 정의내리는 게 아닐까.

내 집 뿌연 창밖에서 보이는 풍경

내가 가진 어떤 프레임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별거 아니지만 동시에 대단한 것이다.

 

 

 

언어가 생각을 만들고  어떤 정의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규정된 사고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가끔 내가 아는 것이 타인이 아는 것과 같은 것인지 아리송할 때가 있다.

내가 뜻하는 그것이 그에게도 같은 뜻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답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언제나 변하지 않고 상하지 않고 늘 그대로일까?

모르겠다.

읽는내내 유쾌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사전이란 어쩌면 저마다 다르게 쓰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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