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에 이해못할게 없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 

요즘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는 한 아이돌 소녀의 동영상.... 그걸 보면서 참 맘이 짠하다. 

그아이가 뭘 잘못했느냐 아니냐.. 다 아는 나이에 한 행동이 이해받을 수 있느냐 아니냐를 떠나 

서 그냥 그 아이를 만난다면, 아니 내가 아는 아이라면 그냥 꼭 안아주고싶다. 

그저 꼭 안아주고 말없이 등을 토닥거려주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혹자는 14살이면 아직 어린애가 그냥 호기심에 남들이 다 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한번 한일로 

너무나 마녀사냥처럼 몰아간다고 하고  또 한쪽에서는 그 나이면 알거 다 알고 옳은거 그런거  

아는 나이에 그런 짓을 한다는건 싹수가 노랗다고도 한다. 

양쪽 다 틀린 일은 아니다. 만일 내 딸이 그런 짓을 해서 그 동영상이 인터넷을 떠돌고 남들입에  

오르내린다면 난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수치스러워 일단 내 딸을 무지몽매하게 잡을 거같다. 

먼지나게 두드려 패고 너죽고 나죽자고 무식하게 난리칠게 분명하다. 

그리고 나서는 부둥켜 안고 괜찮다 괜찮다고 해줄거같다. 

남들은 손가락질 하고 비웃고 남의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까발리듯 들여다보고 여기저기 돌려보고 쉽게 욕하고  비난해도  괜찮다고.. 

니가 좋은 일을 한 건 아니지만... 그들이 너의 그런 생활을 엿볼 권리는 없다.  

한번의 실수로 (의도했든 모르고 했든) 그렇게 누군가를 매장할 수는 없다고.. 

용기를 내라고 말해줄것이다. 

내딸이든 남의 딸이든  그 아이가 어떤 짓을 했건.. 잘못은 벌을 받고  교정해야겠지만... 

뉘우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야 하는 거 아닐까? 

도저히 티비에서  볼 수가 없고  내 아이가 따라할까 없애고 싶은 마음을 이해못할 것도 아니지만 그 이상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의 사생활 대단한 사건이냥 돌려보고 어머머 어머머하며 호들감떨고 엿보고  이렇게 저렇게 비난하고 비판하고 하는 것이 더 부끄러운 짓이 아닐까? 

놀라고 충격적인 일이긴 하나 당사자만금일까? 

상처받고 화나고 부끄러운 마음이 당사자 만큼이나 할까  

수치스러움 부끄러움  그걸 느꼈다면 그걸로 그 아이는 충분히 벌을 받는게 아닐까 하는 지극히 사적인 생각이 든다. 

걱정하듯 놀란듯 관심을 가지고 더 뭐가 없나 하고 수군대고 기웃거리지  말았음 좋겠다. 

길가다가 바람에 누군가의 치마가 뒤집어 질때 그냥 모른 척 안 본척 하는 게 젤 좋은 매너가 아닐까 한다. 

섯불리 다가가 위로하고 걱정해주는 행동이 어쩌면 더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조금은 모른 척 무심한 척 해주자. 

그러면서 앞으로 청소년의 인터넷 사용범위가 어디까지 갈건지.. 그 부작용을 어떻게 막을지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게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그 소녀가 이 시기를 잘 견디길 바라고.. 

언젠가 다시 브라운관에서 보면 그런가 보다 하고 봐주기만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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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쿠니 어린이 마을 - 세계의 대안학교 1
호리 신이치로 지음, 김은산 옮김 / 민들레 / 200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에 이런 새로운 초등학교가 있다는 걸 몰랐다. 예전에 티비에서 본 홋가이도 시골학교 아이들의 주도적인 학습이야기를 본 적은 있는데 이렇게 영국의 서머힐을 본뜬 새로운 대안적 학교 이아기는 첨이었다.  

우리 못지않게 입시가 치열하고 학력위주인 일본에서도 새로운 시도는 이었구나.. 

이 책에서 인상적인 부분  (어쩌면 모두가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것들) 

감성적으로 자유로운 아이들, 자기 스스로 새각하는 태도와 능력을 키우는 것 그리고 함께 사는 걸 익히는 것 이게 중요하다. 일반학교의 교사중심 획일주의 교과서 중심을 벗어나서  자기 결정을 중요시하고 개성을 존중하고 체험을 토ㅇ해 배운다는 것 

아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면서 그 실패도 인정해주고 책임은 어른ㅑ 한다는 것이 들이 함께 져준다는 것이다. 혼자 결정했으니 책임도 져야한다는 말이 결정할 수 있는 폭을 규정해버리는 것과 같다는 거다. 아이들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한 부모의 조작이라는것이다.  

아이에게 자율을 준답시고 스스로 하라고 하고는 그 실패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고 하고 책임도 니가 지라는 건 참 무책임한 부모고 어른의 모습이다. 귀찮아서 아이를 좀더 지능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것이란걸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고백하자면  

그리고 아이들의 자유를 인정할때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잇는 여러가지를 미리 어른들이 준비해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흥미를 가지고 몰두할 수 있는 거리를 주고 거기서 선택할 자유를 주는 것이지 아무것도 없이 자유롭게 하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부자유스럽다는 것이다. 

셋째로 아이들을 개성있게 키우는 것은 그 결과 까지 아이의 개성을 중시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나중에 아이가 트럭운전수가 되든 빈둥거리며 삶에 대한 관찰을 하든 일류학교에 진학하든 그 자체가 결과들이 개성적으로 나오는 것까지 인정해야한다. 다양성이란 그러한 것이다. 

기초학습이 학습을 위한 학습 암기와 공식을 위한 학습이 아니라 실생활과 체험을 통해 필요를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통합적 학습이 중요하다. 공식을 몰라도 원리를 깨칠 수 있는 학습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가장 와 닿는 것은 교육에 대한 평가부분이다. 평가는 필요하다. 무엇이든 어떤 행동을 하고 실험을 하고 학습을 했다면 평가를 해야한다. 다만 그 평가가 학생들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교사들에 대한 평가여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반 평균이 65점이라면 이것은 아이의 능력이 아니라 아이들을 가르친 교사의 능력이 65점이라는 점이다. 

모든 교육서에서 아이교육에 대해 말하는 지향점은 같다.     아이를 존중하고                                                     개성을 살려주고 기다려주라는 것이다. 

그게 옳다는 걸 내 머리는 아는데 가슴이 손이 목소리는 모르고 있다. 늘 다그치고 내 기준에서 벗어나는 꼴을 못보겠고 아이의 점수가 그 아이의 모든 것이 되어버리고... 

굳이 대안학교나 이런 학교들을 찾지 않더라도 그런 이념을 정신을 일반 교육에 넣을 수는 없을까설령 학교나 사회는 더디게 바뀌더라도 엄마 먼저 그렇게 바뀌는 것도 필요하지 하지 않을까 

세상속에서 학교라는 사회에서 상처받고 순서가 정해져서 꼬리표처럼 점수와 등수를 달고 다니는 아이들에게 가정과 부모만큼은 키노쿠니가 되어줄수는 없을까 그건 너무 현실과 떨어져 아이를 더 혼란하가 할려나? 

내가 다니는 학교와 지금 내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많이 달라지고 볂했다  비단 잔디 운동장이나 좋은 시설뿐 아니라 교육내적으로도 달라졌지만 점점 더 삭막하고 힘들고 공부시간은 길어지고 많아지지만 더 해야할일은 많고... 모르겠다. 어떤게 정답인지.. 

내가 해야할 실천이라는게 단순히 보듬어주고 이애해주는 거 그것뿐일까?  이런 책들을 읽으면 끄덕이고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 가슴은 더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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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장 밉고 싫은 것들은 직접적인 가해자들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무난한 추임새를 넣으며 구경한 자들.. 용인한 사람들. 작은 노력으로 막을 수 있는 고통과 비탄을 못 본 체한 ㅜㅇ분히 ㅊ자들, 요컨데 츙분히 친절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피해자에게 있어 잉여가 아니라 결정적인 존재들이다. ..... 남은 해치지 않으나  아마도 귀찮아서 오판의 가능성을 방치하는 행동.악행을 한 것도 아니지만 선하게 행동하려 들지도 않은 것들이다. .....<시네21 771 김헤리> ㅇ 

우아한 거짓말에서도 그렇고 영화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에서도 그렇고.. 여타 다른 작품들에서도 그렇듯이 소위 말하는 피해자가 고통을 받는 것은 직접적으로 해악을 가하는 가해자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악하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미워하고 증오할 만하다는 공감대라도 얻을 수 있지만 그 옆에서 말없이 동조하거나 무시하거나 섣부르고 오만한 충고나 위로를 건네는 이들..그들이 어쩌면 피해자들에게 더 아픔이 되고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 된다. 

임계점까지 다다르면서도 참았고 참을 수 있을거 같았던 고통위에 단지 한방울을 더한 것 뿐인데그 무심한 한방울이 사람을 폭발하게 하고 굴욕감을 느끼게 하고 수치감을 자극하면서 극한으로 치닫게 한다. 선한 의도이든 무심하고 위선적인 행동이든... ㄴ"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그렇게 이름없고 얼굴없는 대중의 시선이고 눈빛이다. 

인터넷공간에서 별명이라는 무명의 댓글로 한두마디 휙 던지는 말들이나 글들 

당사자앞을 혹은 옆을 지나치며 무심히 내뱉은 한마디가  

어쩌면 독사의 독처럼 온몸으로 펴져 낭뜨러지 끝으로 사람을 몰 수도 있다. 

적극적인 표현과 관심... 조금은 주책맞고 까탈스러운 행동들이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는 걸 

요즘  깨닫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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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딸아이에게는 읽으라고 권하고는 난 아직 읽지 않았다. 마루밑 바로우어즈.. 

마루밑에 살면서 사람들의 물건을 빌려쓰는 작은 사람들이야기.. 

그 이야기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 의해 에니매이션으로 만들어졌다. 

마루밑에서 사람들의 물건을 빌리며 사는 종족들이 많이 없어지고 이제 그 집에 단 하나 남은 가족이 아리에티가족이다. 아빠를 따라 첨으로 물건을 빌리러 나서서 그만 집에 사는 소년에게 들키고 호기심으로 그 소년에게 다가가보지만 결국 그로 인해 이사를 가야하는 상황이 되고만다. 

한창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한 열네살 소녀에게  소인으로 산다는 것은 제약이 참 많은 일이다. 사람들에게 들켜서도  안되고 이야기를 해서도 안되고.. 선물을 받아서도 안되는 것. 

그래도 열네살이란 나이가 주는 무모한 용기와 호기심은 소녀를 성장시킨다. 사람 아이와 교감을 나누고 엄마를 구해내고.. 세상이 어떤 곳이라는 것 을 배우는 것.. 그렇게 세상을 알면서 호기심과 용기는 조금씩 무뎌지면서 어른이 되는 것일까?  

나중에 무뎌지고 기억으로만 남을 호기심과 용기일지라도 한번쯤은  무모해보는 보는것도 나쁘지는 않을것이다. 그렇게 실패하고 상처받는 과정이 성장일테니까? 

하야오의 에니메이션에는 유달리 소녀의 성장이 많은 듯하다. 

사실 토토로도 토토로를 만난 어린 자매의 성장이야기라고 볼 수 있을테고  귀를 기울이면은 진정한 자신을 찾는 소녀의 성장담이었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 돼지로 변한 부모를 구하기 위한 소녀의 모험과 성장 이야기이다..  

 모험과 용기가 성장에 필요한 원동력이라면..지금 현재하고 의 아이들은 그걸 잘 이용하고 있을까? 가족을 위험에 빠뜨릴만한 모험도  고양이도 죽인다는 호기심도 가지고 있을까? 아니 어쩌면 어른인 내가 아이들이 행여 그런 호기심과 모험심을 드러낼까 두려워하며 꾹꾹 막고 있는 건 아닐까 아리에티 부모처럼... 그리고 소년의 가정부처럼 그런 상상력을 현실적인 욕심으로 바꾸는 건 아닐지.... 

아이가 용감하길 바라는 지 아니면 유순하고 제도에 맞게 자라길 바라는 지 내가 먼저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영화다. 

적어도 아리에티 부모처럼 아이가 저지른 실수 아닌 실수에 그렇게 너그럽고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으면 좋겠다. 

 

사족) 3D에 익숙해있다가 아날로그적인 만화영화를 보니 시시하게도 느껴졌다. 

        그래도 역시 그런 손그림이 주는 편안함 익숙함이 좋으니 나도 이제 구세대가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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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영화에은 예외없이 찌질한 남자들이 나온다. 그리고 당돌한 듯 하면서도 속물적이고 허당인 여자들도 나온다. 그런데 그들이 밉지가 않고 측은하기도 하고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옥희의 영화에도 두명의 찌질한 남자들이 나온다. 자신들이 얼마나 찌질하고 웃기고 한심한지모르는 남들들은, 아주 솔직하게 속물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를 드러낸다. 혹시 저 사람 원래 저런 사람 아니야? 할만큼 사실처럼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면 조금 헷갈리기도 한다.   

문성근이나 이선균이 텔레비젼에서는 참 그럴듯하고 멋지가 보이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렇게 찌질하고 치줄한 구석을 보이고 있다.  

여자를 잘못좋아새서 내내   인생이 꼬이는 진구  여자때문에 질투에 눈이 멀어서 잘못된 판단인 줄 알면서도 치졸하게 구는 송교수. 의도하지 않았지만 두 남자사이에 끼어서 두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옥희  

사실 알지못는 운명으로 조금씩 꼬이기는 했어도 자신의 의지만 분명하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인데 본인들은 남 탓을 하면서 운명탓을 하면서 끌려간다. 

자질있는 제자가 자기여자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물먹이고 미워하는 노교수와 여자를 얻었다고 세상을 다 가진듯 자만하면서도 정작 그 여자때문에 자신이 내내 밀려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젊은 남자.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고민하면서도 나름 즐기는 옥희 

참.. 끌끌대며 보기엔 조금 찜찜한 것이 그게 우리네 모습이랑 다를 바 없는 것때문이다. 

밀려났다고 욕하고 다니는 교수나 일단 소문을 믿고 보는 친구들이나 충고하는 친구들 소소한 인물들도 우리와 아니 나와 닮은 구석이 하나씩 있다.  

그래도 옥희는 홍상수의 다른 작품의 여자들보다는 조금은 주체적으로 보인다. 안되요안되요되요되요하는 내숭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이 조금은 엷어졌고.. 나중에 영화로 자신의 사랑(?)을 되돌아보는 이성적인 시선도 가졌다. 

나도 이제 나이를 먹어서일까> 

홍상수 영화를 보며 문득 드는 생각... 내딸에게 이 영화들을 보여주면서   이영화에 나오는 남자들은 "절대 만나서는 안되는 ...꼭 피해야하는 유형의 남자들"임을 알려주고 싶다 적어도 이런 사람들만 피하면 소위 말하는 똥밟을 일은 없을 것이라는 거.. 공지영의 충고처럼 헤어질때 깔끔하고 뒤가 좋은 남자까진 아니어도 이런 사람들은 피해야한다는 거 

이전에 강원도의 힘에 나온 남자를 보면서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지적인척 매너좋은 척 하면서 뒤로 할 거 다하는 남자도 참 싫었고 생활의 발견의 김상경처럼 대놓고 찌질거리는 남자도 참 그랬지만 이 영화속의 송교수와 진구도 못지않게 찌질하고 우습고 한심하다. 

다만 이런 남자를 피하라고 한다면 대한민국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싶다는 거다. 

 

시네큐브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일종의 ~광들이 자주가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상영하는 영화의 종류가 예술영화거나 조금은 독립영화류라 그랬을까? 그런데 의외로 아줌마부대가 참 많았다. 아침부터 우아하게 차려입고 삼삼오오 모여서 커피타임을 가지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 참 낯설고도  편안한 광경이다. 

몇편되지 않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낄낄거리고 보고 나오면서도 왠지 뒤가 편하지만은 않은 누워서 침뱉고 나온듯한 찜찜함을 주더니... 여전하다. 그래도 그 특유의 낄낄거릴 거리가 아직도 남아있음이 참 좋다.  

 몇일 후 영화를 생각하면 마지막 옥희를 멀리서 바라다가 쓸쓸히 돌아서던 송교수의 뒷모습이랑  송교수와 두 학생이 앉아 상투적이면서도 일상적이지 않은 문답을 나누던 모습  그리고 마지막편의 옥희의담담한 나레이션이 자꾸 생각난다.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련하고 먹먹한.. 그러면서도 쉽게 잡히지 않은 그런 감정이 있어서가 아닐까 

별것아닌 경험과 감정들 그때 스쳐갔던 생각 느낌 그때의 냄새 말들.. 그런게 구체적으로 기억나진 않지만 그랬었었지..... 하는 먹먹함 .. 그런게 느껴진다. 치기어린 대화들 뒷모습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그냥 흘러가게 두는 상황들 남에게 들려주기에 의미없는 일상들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쌓이면서 그렇게 지나가는 것을 홍상수는 엮어서 결국엔 보석을 만들어 내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나도 그런 기억 느낌 감정이 있는데.... 내것은 어디서 보석이 되길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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