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이미지라는 것은 재창조되거나 재생산된 시각이다.

모든 이미지는 하나의 보는 방식을 구현하고 있다.

한 이미지는 X라는 사람이 Y라는 대상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된다.

 

이것은 존 버가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한 말 입니다

 

이미지는 생산자의 의도가 담긴 기록물입니다. 시민 사회 '미술'이라는 것이 발명되기 전에는 교회나 귀족이 그 '의도'를 통제했습니다. 근데 사회에 이르러 '개인'이자 '주체'가 된 예술가도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특히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 기독권을 가지고 있다며 더욱 의심없이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재현하여 보여주었겠지요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이 사실이고 전부라고 믿었으나 그 보이는 것은 그 이상의 사고회로를 통해서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이미지가 된다.

내 머리속의 사고회로는 전적으로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내 눈으로 본건 온전히 내 자유의지로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교육과 사회의 통념과 상식 그리고 주입된 여러가지 사상과 체계들을 받아들이고 암기하고 정리하며 나는 내 생각을 가진다 그리고 내 눈으로 바라본 어떤 상황이나 대상에 대해 그 모든 사회화 된  혹은 정형화된 사고를 거쳐 판단하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누드를 그저 명작이고 아름다움이라고만 받아들였다.

여성의 몸의 아름다운 곡선에 대해 주절대는 말들을 상식이고 예술에 대한 심미안을 갖는 거라 믿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굳이 부끄러워하라 이유가 없다. 그건 예술이고 예술은 누구나 감상할 수 있는 것이고 거리낌없이 직면해서 봐도 무방한 대상일 뿐이었으므로

 

그러나 이 책에서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벗겨지고 눞혀지고 눈이 감겨 남성들의 눈요기감이 된 비너서와 여러 모델들

예술로 포장되었던 시각문화속에 여성들에게 얼마나 큰 폭력이 가해지고 혐오의 시선들이 오고갔는지는 잘 보여준다.

 

예술이나 미술도 사회적 제도나 관습과 다르게 이루어질 수는 없다. 긴 인간의 역사속에서 한 부분일 수 밖에 없다. 씌여진 역사들이 승자들의 역사이고 그들의 시선과 판단에 따른 것처럼 예술이라고 여겨온 그림들 역시 단지 백인이고 시스젠더 남성이면서 이성애자이고 비장애인 비 청소년으로서 사교에도 능해서 권력자들을 가까이 둘 수 있었던 일부 기득권층의 욕망과 시선의 재현물이다. 그들의 입맛에 맞게 그들이 원하는 욕망과 근거에 맞게 창작되었다.

예술에 대한 정의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를 만든 이들이 누구인가

누구의 시선으로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며 어떤 것을 미라고 인정하며 동시에 '아름다움'이 돌 수 없는 것들을 배제하고 뒤틀리게 하고 왜곡시켰는가를 '누드'라는 장르에서 설명한다.

 

 

오랜 세월 동안 나성은 시선의 주체이자 이미지를 재현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창작'의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그러는 동안 여성은 남성의 피조물로서 성적 대상으로서만 재현되고 제한되었으며 이것을 우리 사회는 '예술' 또는 '문화'라고 불러왔습니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시민으로서 참정권과 고육권을 보장받기 위해 투쟁한 것은 백 년이 남었지만 여전히 우리를 둘러싼 시각 문화는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규정하고 제한하려 합니다

 

문자 텍스트보다 시각 이미지가 더 큰 영향을 미치는 현대사회에서도이런 불평등한 관계는 깊이 각인되어서 많은 여성들의 의식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남성들이 여성에게 요구하는 것을 여성 스스로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지요. 여성 스스로 남성들이 여성을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여성성을 살펴봅니다. 그래서 누드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처럼 겨드랑이 털을 제거하고 생명과 역사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얼굴과 몸에 당연히 존재하는 모공 땀구멍 주름 점 흉터등을 가리기 위한 여러가지 노동을 수행합니다.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연예인처럼 눈이 크고 이마가 볼록하고 코와 턱이 작고 뾰족한 초식동물처럼 보이도록 자신을 연출하며 셀카를 찍습니다.

 

 

여성의 몸은 '보기에 좋아야'합니다. 이 때 시선의 주체는 가부장제에서 여성을 소유할 권리를 가진 남성입니다. 그래서 여성의 몸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거나 여성을 주체로서 재현하거나 생명체이기 때문에 당연히 일어나는 생리현상을 재현하면 남성중심의 시선은 불쾌해 합니다.

 

남성 시선에서 보아 아름다운 것들이라는 기준으로 여성을 시각적 대상으로 만들고 그 여성의 신체마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남성들의 시선에 맞게 왜곡되고 뒤틀린채 묘사되어 아름다움의 기준을 만들었다. 정상적으로는 될 수 없는 자세들 나이나 세월의 흔적은 완벽하게 지워낸 여리고 약한  존재 그리고 보는 이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외면하는 시선들이 그림속에서 보여진다. 그리고 그 모든 아름다움은 지금 이순간  언론에서 추하게 드러나는 약물강간의 형태와 다르지 않다.

 

 

유럽 미술의 누드 전통이 만들어낸 시각 문화는 여성을 남성을 위해 존재하는 성적 대상으로만 규정합니다. 이 시각 전통은 사진이나 영상의 발달에 따라 대중매체에 고스란히 계승되었습니다. 자신의 지정 성별이 무엇인지와 관계없이 우리 모두에게 여성은 수동적인 이미지로 존재합니다. 여성이 주체로서 잣ㄴ의 의사에 반하는 상황에 대해 분노 항의 거절등을 표현하면 사람들은 불편해합니다. 여성이 성적 주체로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의 드로잉처럼 남성 중심 사회에서 금기시하는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긍정하는 표헌도 너무 낯선 풍경이기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거부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누드는 권력을 가진 소유자 정복자의 시선으로 소유물  노예 상태의 여성을 재현한 것입니다. 그 시선에 익숙해진 남성으느 여성을 자신과 동등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못합니다. 남성에게

자신의 기준과 의사가 있듯이 여성에게도 자신의 기준과 취향과 감정이 있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따라서 상하 수직 관계의 일방적인 의사 표현이 아닌 동등한 관계에서 의사소통을 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게 막습니다.정복하거나 정복당하는 이분법적인 관게가 아닌 유동적이고 다양한 관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여성에게는 스스로를 계속 남성의 시선으로 검열하게 만들고 남성에게는 다양한 인간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를 막는 것입니다.

 

우리가 명화라고 생각했던  누드화듣

여성이 대상이 되고  보여지는 것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

그 이미지는 현대까지 이어지고 현재의 우리 생활과 사고에도 많은 영향을 준다.

바라보는 대상이고 소극적이고 순수하고  수동적이라고 믿는 존재에 대한  편견들이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는 것에도 많은 영향을 줄 수 밖에 없다

 

책의 말미에 있는 충열테스트는 꽤 신선하다.아름다움이나 추함 혹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을 인격적은 존재로 바라보는지 아니면 그저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인지를 의미를 통해 물어본다.맥락상 필연적인가 의도가 충분히 있는가 그리고 모델을 충분히 알 수 있는가의 세가지 질문으로 이루어진다. 

 

 

 

자신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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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들은 왜 비너스를 눕혔을까? - 우리가 ‘여신’ 칭송을 멈춰야 하는 이유
이충열 지음 / 한뼘책방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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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속 아름다움이 예술이라 배우고 믿었다. 비너스는 의례 헐벗거나 드러누워야했고 피에타조차 거룩한 모성과 유혹적인 외모인걸 그냥 명작이어서 그랬나 보다했다. 누가 무엇때문에 왜 그렸는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인 무의식속의 관념과 시각을 의심하고 다시 생각한다.교양과 예술을 다시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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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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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툴러서 진심이 느껴지는 좋은 책.
우리는 누구든 선하고싶고 좋은 사람이 되고싶다. 저절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무던하게 상식을 지키고 두루두루 좋은,그래서 누구나 편하게 생각하는 그 사람의 보통의 상식이 차별이 된다. 늘생각하고 의심하고 돌아보는 일 그 피곤한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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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12-24 18: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푸른희망님, 2019년 서재의 달인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누구나 살기 위해 매일 하는 일

그러나 누구도 쉽게 그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 일

매일 먹거리를 기르고 만들고 먹고 치우고 고민하는 일등등

그 사소한 일상도 사실 정치적인 일이다.

밥상을 차리는 사람, 밥상에 주인처럼 느리게 나와 앉아도 괜찮은 사람

밥상을 타박하는 사람 밥상을 걱정하는 사람

차리는 사람 뒤집어 엎는 사람 치우는 사람  모두가 가진 위치가 다르고 힘이 다르다.

밥상에서 말을 해도 괜찮은 사람이 있고 수저가 들어갈 때만 입을 열어야마나 하는 사람도 있다.

오죽하면 입닫고 밥이나 먹어... 라는 모순된 말도 있을까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있고 들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

성별에 따라 계급에 따라 다른 입장이다,

내가 땀을 흘리고 몸을 써서 그 상을 차리는  사람은 정작 그 상 앞에서 아무런 권리가 없다.

그저 냉큼 와서 앉아 한마디 하고 나무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권리뿐 아니라 힘도 있다.

누군가는 보이지 않은 것처럼 후다다가 밥을 우겨넣어야 하는 게 마땅하고

누군가는 혼밥자체가 애처럽고  안타까워 그의 등을 두드려주고 싶다는 캠페인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런 먹는 이야기에서 펼쳐지는 관계의 이야기 관계에 응당 따르는 권력의 문제 차별과 혐오의 문제, 아무렇지 않게 구별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을 다시 돌아본다. 모두 정치적인 문제다.

정치는 저 높은 곳에서 제  할일을 하지 않고 힘겨루기만 하면서도 따박따박  고액의 월급을 쳐잡수시는 분들의 전용물이 아니다

둘 이상 모인 사람 사이에 오가는 관계들 힘의 줄다리기 힐끔거리는 견제와 함꼐 손을 잡는 행위 모두가 정치가 된다.

함께 상을 차리고 먹고 치우는 일  역시 정치의 일부다.

 

 

 

페미니즘은 관계의 학문이다. 살아가면서 점점 다짐하게 되는 삶의 태도는 "남의 입에 밥 넣기를 주저하지 말고 내 입으로 죄 짓지 말자"이다. 관계를 위한 기본이다. 우리는 음식을 나눠 먹으며 말을 섞으며 연결된다.

 

 

여성이라는 집단이 본질적으로 공유하는 자연스러운 취향은 없다. 치향은 온전히 자연발생적인 성질이라기 보다는 습관의 축적, 환경, 교육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 여성에게 주로 맡겨진 노동과 역할을 수행하면서 여성 일반의 취향이 남성 일반의 취향과 차이를 보일 수는 있다. 이는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본질적인 차이라기보다. 사회화의 결과다. 또한 여성 일반의 취향이 열등한 성질로 평가받을 이유가 없다. 나아가 여성 집단 내부는 각각 취향의 종류가 다양하고 차이가 있다.

 

취향의 젠더화는 여성화된 취향을 업신여기도록 이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이라는 말이 붙으면 일단 한 수 아래의 뭔가로 취급된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책, 여자들이 좋아하는 드라마 여자들이 좋아하는 분위기, 여자들이 좋아하는 영화 등 입맛도 여자들이 좋아하는 맛이라고 할 때는 진짜 맛이 아닌 가벼운 맛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취향이란 진정한 예술도 진정한 맛도 진정한 지식도 아닌 세계다. 여성 문제는 진정한 사회 문제가 아니듯이.  

 

 

가부장제란 어머니이 밥으로 아버지의 법을 굴러가게 하는 제도다.

 

성적 대상화, 대상화란 무엇일까 느낄 줄 알며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며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다. 다른 주체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대상으로만 여기는 태도를 대상화라고 한다. 성적 대상화란 이 대상을 성적인 목적/도구로만 여긴다는 뜻이다. 대상화란 다른 말로 하면 '사물화'다. 생각하고 느끼는 인격체로 보지 않는다. 화(化)는 되다라는 의미다. 여성을 사물이 되게 해 의식이 없도록 만드는 상태가 바로 성적대상화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 여기기에 여성을 식재료나 음식으로 보고 먹는다. 강간을 위해 강간 약물을 사용하는 이유도 여성을 의식이 없는 사물로 만들기 위해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서 홀로 성 관계라는 강간을 한다. 여성을 사물화하는 방식 중 하나가 상납이다. 성 상납에서 성을 남성이라고 생각할 리는 없다, 여성을 남성에게 상납한다.

 

 

매일 똑같은 식단을 구성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렇게 먹어도 되는 사람'인 건 아니다,

 

가난하고 배가 고픈 사람이라고 해서 욕망마저 가난해질 의무는 없다. 오직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서만 입을 벌리는 1차원적인 입은 언제나 지배권력이 원하는 입이다. 취향 따위는 아예 형성할 수 없는 그런 입, 욕망 할 줄 모르는 입 배고픔에 길들여진 입

그러나 가난한 입도 욕망할 줄 알고 기분이라는 게 있다.

 

 

인간은 기억 때문에 버티고 때로는 그 기억이 고통을 유발한다 해방의 세게인 동시에 영원한 감옥인 기억 기억의 정치화는 바로 기록과 재현이다. 고통스러운 배고픔과 죽음의 행진마저 인간이 기록하고 재현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어떤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향과 맛이 있다.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그 음식을 먹었을 때의 기억, 함께 한 사람들 그 순간의 온도와 빛과 분위기 냄새가 함께 뭉실 떠오른다.

음식은 이성적으로 딱 딱 구격 맞게 정리된 기억이 아니다

그 맛이 주는 감정이 서글픔일 때도 있었고 들떠서 한 없이 몽실거리던 기분이거나 배꼽 아래가 간질간질한 설레임일 수도 있다. 그냥 꾸역구역 참고 밀어넣는 국에 만 밥같은 기억도 있다.

오래 되어 낡은 후라이 팬에서 기름이 보글거리고 그 안에서 조잡하게  모양을 낸 도나츠가 둥실 떠오르는 순간 고소한 기름냄새 끈적거리던 설탕 느낌 그리고 내가 눈독을 들여놓은 가장 동그랗고 에쁜 도나츠를 향햔 욕망까지 그렇게 맛은 몸에 새겨지고 남겨진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할머니를 맛과 냄새로 기억하고 추억한다.

그리고 그 추억이 한없이 따뜻하고 행복한 거라고만 믿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 따듯하고 정감어린 할머니와 어머가지 좋아하는 음식이 무어냐고 물어온다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 얼굴과 함께 떠오르는 많은 음식이 있다

배추전과 연근전이 있고  타래과와 수제 도넛이 있고 겨울날 웃풍으로 코끝은 시려도 지글지글 끓는 구들장덕분에 뜨끈해진 엉덩이를 느끼며 넘기는 팥죽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그 음식을 좋아했을까?

김치 꽁지를 먹고 콩나물 대가리만 남은 찬거릇을 긁어 먹거나 밥알과 고축가루가 둥둥 떠오르는 밥그릇에 그냥 커피랑 프림이랑 설탕을 적당히 섞어 지금으로치면 믹스커피를 타서 마시던 모습이 떠오를 뿐이다. 이쁜 그릇에 정성껏 담은 음식은 당신 차례가 아니었고 남아서 버리면 죄받을지도 모를 죄책감에 남김없이 먹어치우던 음식들 그리고 설겆이 거리를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그냥 먹던 그릇에 타서 사치스럽게 마셔보던 커피까지... 그걸 정말 좋아했을 리 없다.

세상 어떤 정의도 용기도  정치도 먹지 않고 이루어 질 수 없다.

먹어야 삶이 이어지고 살아야 정의도 용기도 민주도 투쟁도 가능했다.

그렇다면 누군가 그러게 드러내기 좋아하는 추상명사를 추구하는 동안 또 누군가는그들의 입에 들어갈 구체적인 명사들을 다듬고 삶고 끓이며 음식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곳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그리고 동시에 그게 당연하고 그게 살아가는 이치라고 힘을 가진 자들은 정의를 내리고 그렇게 규칙을 만든다.

먹는 일 먹이는 일 만들어 내는 일... 모든 일이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

다만 누군가 편리하게 만들어 놓은 당연함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앗을 뿐이다.

거기 그들이 있고 우리가 있고 내가 있었다.

 

평범한 일상에 스며드는 가장 익숙한 권력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에서 당연하다며 만들어 낸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본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의 눈에 띄기를 바란다.

내 가족이 나를 맛과 냄새로 기억하는 것도 괜찮다.

그렇게 익숙하고 좋아하는 맛을 만들엇던 내가 누구인지도 관심을 함께 가지길 바란다.

그 뿐이다.

그건 단순하지만 어렵다. 늘 노력하고 애쓰지 않으면 쉽게 잊히고 쉽게 없는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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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관속으로 - 언니에게 부치는 편지
원도 지음 / 이후진프레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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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의 인생을 망치는 건 한 사람으로 족하지만  그 망가진 인생을 구원하는 건 수많은 사람의 힘이 필요한 일이야.

 

 

드라마 <러아부>를 보면 경찰도 그냥 사람이고 직장인이었다.

취업이 힘든 세상에서 그래도 공무원이라 안정적이라는 메리트가 있고

작지만 안정적인 수입과 정년이 보장되는 직업으로 청춘이 경찰에 몸담는다.

뭐 대단한 사명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제복을 입어서 폼이 나고 그래도 뭔가 사회에 기여하는 직업이라는 것 나름 보람있으리라는 기대가 일단 경찰학교의 빡빡한 시간표앞에서 좌절되고 그리도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다시 취준생이 될 수 없다는 악으로 깡으로 버텨서 지구대에 발령이 나면 그냥 정신이 없다.

그나마 드라마에서도 책에서도 같은 동료끼리의 갈굼이나 갈등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사람 모여있는 곳이 다 그렇듯이 빤질거리는 놈도 있고 꼰대같은 놈도 있고 의리가 있고 사명감이 있지만 부담스러운 사람도 있다.

뉴스에서 보거나 사람의 입을 타고 전해지는 말 속의 경찰은 아니었다.

대단한 사명감으로 존경의 대상도 아니고 작은 권력하나로 마구 휘젓는 견찰도 아니고 그냥 직장인이고 생활인이었고  이웃이었고 가족이고 그냥 보통 사람이었다.

나쁜 놈을 보면 화가 나지만 이성적으로 대해야 하고 피해자가 안쓰러워도 해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 휘두를 권력은 쥐꼬리 만하고 그것 조차 누군가를 다치게 하면 , 설령 그게 가해자거나 범죄자라 할지라도 그 책임은 오롯이 경찰이 지고 배상하고 경위서를 써야 한다.

경찰도 폭력이 두렵고 미친듯이 덤비는 범죄자가  무섭고   아무 잘못도 없이 재수없이 당하는 피해자가 안쓰럽고 안타까워도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사실 드라마를 보거나 영화를 보면 죄지은 놈은 반드시 벌을 받고 작은 피해도 법으로 충분히 처벌이 가능하리라 믿었는데 세상은 참 허술하다.

관련법이 없어서 처벌이 어려운 경우가 허다가호

문자빙을 넘지 못하는 법은 가정폭력 데이트 폭력을  그냥 보고 있을 수 밖에 없고

내 잘못이 아닌 성폭력앞에는 무지막지한  이차가해가 기다린다.

일이 터져서 누군가가 죽어나지 않으면 손 쓸 수 없는 상황이 너무나 허다하다.

가정폭력에서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가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데

내 집에 내가 가겠다는 걸 막을 수가 없고 쉽게 구속시킬 사유도 없거니와 그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당장 가장이 없으면 먹고 사는 일 아이들 키우는 일이 막막할텐데 하는 마음에 아무런 변화없이 고대로 도돌이표가 된다.

폭력에 방치된 아이들

찾지 못한채 잊힌 실종 아이들

어디에도 호소할 수 없어 그냥 스스로를 죽여버리는 사람들

법을 너무 잘 알아서 마음껏 휘두르는 사람들

그들 앞에서 사실 경찰이 해줄 수 있는 건 순간적인 제복의 권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그 권위도 반복되는 쉬워지고 우스워진다.

 

 

누군가를 탓하고 책임을 지우는 일은 쉽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고 해결책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 자녀교육을 들으러갔을 때 딱 와닿은 문장이 있었다.

아이를 잘못되게 망치는 일은 아주 쉽지만 그렇게 망가진 아이를 되돌리는데든 아이 나이의 곱절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자식을 위한답시고 했던 행동들이 아이를 망치는 건 순간이지만 그 아이를 다시 제대로 돌보고 보살펴서 되돌리는데는 아이가 나이 먹은 시간의 곱절이 필요하다고 .. 그러니 아이가 더 나이 먹기 전에 내 양육을 돌아보라는 뜻일텐데

이 책에도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한 사람을 망가뜨리는 건 순간이고 단 한사람이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을 회복시키는 건 많은 사람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고

그러니 처음부터 누구도 망가지지 않아야 하는 것 그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것

순간의 실수나 사고로 나락으로 떨어지더라도 단단한 안정망을 가지는 일

그것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서 소소한 시시비비를 전부 법으로 해결하고 경찰을 동원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게다가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은 그 말단의 공권력에게

결국 대다수는 그 말단의 공권력이라도 의지하고 믿고 싶은데 그들도 힘이 없다.

 

읽고 나면 괜히 서럽고 기운이 빠져 그만 읽고 싶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다 읽는다.

알고 기억하는 일

어디선가 누군가는 비리를 저지르고 그 작은 권력을 휘두르며 상처를 입힐테지만 그가 전체는 아니라는 것 여전히 묵묵히 자기 자기를 지키는 보통의 경찰이 더 많을 거라는 믿음

그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 그게 참 분하고 분하다.

 

좋은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든 읽어볼 가치가 있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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