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이 서린 말 욜로욜로 시리즈
마이테 카란사 지음, 권미선 옮김 / 사계절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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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이 어떻게 이뤄지고 받아들여지는지 잘 알 수 있다. 제삼자는 말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왜 말하지 않았는지 신고하지 않았는지. 왜 보고만있었는지.. 독이 서린 말은 가해자만의 말은 아니다. 무심하게 혹은 걱정해서 내뱉는 우리의 말이다. 설마설마 했던 범인의 정체에 또 분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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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올게 : 바닷마을 다이어리 9 - 완결 바닷마을 다이어리 9
요시다 아키미 지음, 이정원 옮김 / 애니북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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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언

제 다음권이 나오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일이 이제 마침표를 찍는다.

하도 나오지 않아서 이렇게 끝이 난게 아닐까? 혹시 작가가 무슨 일이 생겼나?

별별 걱정을 다하고 짜증내고 기다리고 기다리다 첫권부터 다시 읽기를 몇번

이제 그런 애닮음은 끝!이 되었다.

마침내 모든 이야기는 마무리되고 그리고 그들인 여전히 그렇게 맘졸이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작은 읽에 다시 기분 좋아지며 하루하루 일상을 쌓아나갈 것이다.

어딘가 오래되어 익숙하고 편안한 곳에서

아는 얼굴들과 마주하며 혹은 모른 척 해가며...

 

처음 만화를 읽을 때 우리 아이들은 다 스즈 언니라고 했다.

그땐 중학생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이제 스즈보다 더 나이를 먹어서 스스가 여동생이 되어버렸다.

중학생 스즈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시기까지

가마쿠라라는 새로운 곳에서 처음 보는 게다가 서로 서먹하고 껄끄러울 수도 있는 이복언니들과의 생활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꾹꾹 눌러 참았던 감정을 터뜨리고 욺음이 터지던 순간이 있었고

무심하고 까다로운 언니들의 태도가 그저 친 동생을 대하는 따뜻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이라는 걸 알아가면서 스즈는 점점 이곳 식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기다리며 아이들은 자라서 중학교를 가고 고등학교를 가고 나도 나이를 먹고  아주 일상적이고 소소한 그들의 애페소드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바보도 무시하지 않고 함께 발걸음을 맞추고

어쩌면 불륜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사랑에 대해서도 덤덤하게 인정하고 지켜보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과 나를 향하지 않은 엇갈림을 호들갑스럽지 않게 어루만지는 위로

주위 사람 하나하나가 각자 작은 에피에서는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들

아직 해야할 이야기가 많이 남았음에도 어쩌면 지금이 마무리 하기 딱 좋은 시기라는 생각도 한다.

마지막 제목이 " 다녀올게" 라는 것도 많은 걸 시사한다.

이제 더나 이별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든 다시 오고 싶을 때 올 수 있다는 안정감과 소속감

어딜 가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따뜻함

이제  모두가 "우리"가 되었다는 마무리다.

 

 

이제 다음권을 기다리며 안달할 일이 없어 편안하다.

다시 매미소리 그칠 무렵부터 차근차근 읽어봐야겠다.

사치와 요시노와 치카와 스즈가 성장하는동안 나는 얼마나  많이 변했을까

 

마무리를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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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러브
시마모토 리오 지음, 김난주 옮김 / 해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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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미모의 아나운서 지망생 칸나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는 충격적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고, 1인칭 화자이자 임상 심리 전문가인 유키가 출판사로부터 사건의 논픽션 집필을 의뢰받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주인공은 피의자의 국선 변호인으로 시동생이자 오래전 친구 사이였던 가쇼가 선임됐음을 알게 되고,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기 위해 그와 함께 칸나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피의자 칸나는 시종일관 모호한 진술을 하며 사건의 전모를 미궁으로 빠뜨린다.

 

 

제목이 왜 퍼스트 러브였을까?

첫사랑이라는 말 그 말이 주는 낭만적인 정서는 내용에서 전혀 찾을 수 없다.

물론 칸나가 첫사랑이라고 믿었던 아니 믿고 싶고 믿어야 했던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상호 다른 것을 보고 다르게 기억하고다르게 그 때를 판단하고 있다.

첫 사랑은 어쩌면 내가 태어가 가장 먼저 사랑해주는 존재를 의미하는 거 같다.

태어나서 내가 아무것도 혼자 할 수 없고 누군가의 선한 의도로 주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도움 그래서 나 역시 전적으로 나를 맡기고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존재

그것이 퍼스트 러브. 첫사랑이다.

그건 부모일 경우가 가장 많지만 꼭 부모만은 아니다.

첫 양육자일 것이고 나를 무조건 지지하고 믿어주고 내 불편함을 덜어주는 사람 그렇게 시작된 신뢰로운 관계는 좋은 애착을 형성하고 이후 다른 타인과의 관계에서 기본이 된다.

누군가를 믿어보고 나를 빋어준 경험은 다른 이들에게 확장이 된다.

그 신뢰는 낯선 타인을 만날 때 든든한 자원이 되고 나를 존중하는 힘이 된다.

무엇 보다 중요한 건 내가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지지하는 자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지식하고 편협한 사람은 아이의 모든 문제는 부모에서 시작된다고 하고 특히 주 양육자인 엄마가 아이의 행동에 성겨기나 인성에 모든 책임이 있다고 믿고 몰아 붙이기도 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주인공 칸나는 어릴 적 가정에서 정서적 성적인 학대를 받았다.

원하지 않은 모델을 서는 일부터 그로 인해 느껴지는 불쾌감을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고 부모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그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하고 거부하지 않아야 한다는 도식을 갖는다.

그렇게 형성된 정서와 감정은 이후 타인을 만날 때 기준이 된다.

사랑받기 위해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면 안된다. 거부해서는 안된다 좋은 척 해야한다. 그러나 그렇게 다 맞춰주면  쉽다고 하고 해프다고 하고 질린다고 하고 모두가 떠난다.

몸에 남긴 자해의 흔적만 자기를 지키는 힘이 되어주고 위험하고 불쾌한 일을 막아준다.

동시에 그 자해의 흔적이 인정받는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길들여지고 타인과의 관계를 배워온 칸나는 어디에도 기댈 데가 없다.

자기 마음을 자기 기분을 들여다 본 적이 없고 자기 기분을 자기 말로 표현한 적이 없다.

그래서 어딘가 불안하고 알 수 없고 신뢰할 수 없는 인물처럼 보인다.

 

어쩌면 정말 헤프고 쉽고 불안정한 여자가 아니었을까?

그냥 그런 저런 이유로 아버지를 죽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가 속고 있는 건 아닐까?

 

가정폭력은 물론 성폭력의 경우 가해자가 근친인 경우는 일이 참 복잡하다.

이건 사소한 가정내 문제라고 해야하는지 아니면 범죄라고 해야하는 것인지

집안일이라고 사소하게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피해자가 어리고 약할 수록 가해자에게 더 많이 감정이입하고 동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빈번하고  아이가 이상하다거나

그런 일이 있었는데 가해자를 (아버지 혹은 어른)을 따른다거나 아버지에게 하는 행동을 그대로 하는 분열된 상황을 의심한다.

도움을 청하기도 어렵고 도움을 주기도 난감하다. 모른 척 하는게 가장 좋은데 차라리 몰랐던 게 더 나았을 텐데....

그리고 가족이 얽힌 문제는  가해자와 피해자만 있을 수 없다. 옆에서 지켜보았거나 모른 척 했을 다른 가족도 있다.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이거나 방관자인 사람들

그들을 미워해야할지 동정해야할지도 몹시 헷갈린다.

이편에서 보면 당연한 방관자이고 공범자지만 저 편에서는 그 역시 피해자이기도 한 경우가 허다하다. 칸나의 경우처럼 그녀의 엄마는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였다. 딸의 자해 흔적을 철저하게 모른 척하고 징그럽다며 부정하지만 그 역시 그 흔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더라는 마지막 장면이 참 서글프다.

 

마지막 법정장면에서 칸나는 평소와 다르게 자기의 언어로 자기의 감정을 표현한다.

또박또박.. 그동안 아나운서 준비를 하던 훈련때문일까 아니면 자기를 믿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던 사람들이 있어서 용기를 냈기 때문일지.. 법정 구형을 받긴 했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일 줄도 알게 되었다.

그냥 무심하게 일본추리물이겠거니 하고 편안하게 읽었던 소설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다만 개인적으로 좀더 칸나의 문제에 집중하면 좋았을 텐데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 유키나 안노의 일도 함께 버무렸던 것이 조금 산만하기도 하고 오히려 칸나의 문제가 흐릿해지는 기분이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나머지 단추들도 제자리를 찾기 힘들다.

단추쯤은 다시 다 풀어서 제대로 꿰면 되지만

인간의 삶에서 잘못 꿰어진 단추는 어떻게 해야할까

심지어 잘 못 꿰어진 것을 모르게 계속 다음 단추들의 자리를 찾느라 헛된 애를 쓰거나 단추탓을 하거나 옷에 문제가 있다고 엉뚱한 데서 원인을 찾고 탓을 할 수도 있다.

인간의 시간을 되돌릴 수 없고 그때 그때 받아야 할 애정과 성장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다음 단계에서 더 많은 노력이 더 많은 관심과 집중이 필요하다.

되돌릴 수 없어 점점 다음 단게에서 과중될 뿐이라 점점 삶이 무거워질 뿐이다.

첫 사랑... 처음 받은 신뢰와 믿음

그것은 사람의 삶에 참 큰 힘이다. 나를 사랑하고 인정하는 바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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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박스 -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
토니 포터 지음, 김영진 옮김 / 한빛비즈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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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중략) 신고 전화가 걸려 온곳은 트레몬트가의 어느 2층 건물이었습니다. 건물 계단에 들어서자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남자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작은 욕설과 협박을 내뱉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상대는 그의 아내였죠 곧 사람인지 물체인징 ㅏㄹ 수 없는 무언가가 벽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끔찍했죠. 경찰관이 문을 드드리며 "경찰입니다. 문을 여십시오!"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집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어찌나 조용했던지 숨 쉬는 소리까지 들릴 것만 같았습니다. 이윽고 남성이 문을 열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경관님 어쩐 일이신지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있던 남성은 경찰관을 맞이한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화를 다스리는 데 문제가 없어보였습니다. 그의 문제는 감정 기복이나 통제력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집안의 독재자로서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주도권이 중요했던 것이죠. 자신의 행위에 대가가 따를 때 만큼은 남성들도 화를 다스릴 수 있는 듯 했습니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취한 와중에 아내를 때리다가도 경찰관이 출동하면 때리는 행동을 멈춥니다 누구는 때려도 괜찮고 누구는 때리면 안되는지 취한 와중에도 구분하는 거죠. 이런 상황 판단 능력은 술의 영향보다 훨씬 강력하게 작용합니다. 아니  이런 판단 능력은 사실 태어날 때부터 갖는 본능에 가깝습니다. 남녀를 구분해서 화를 표출해야한다는 판단 기준을 배우며 자라나는 남자아이들은 자연스레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믿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p188

 

 

모든 폭력의 원인은 어디에서 나올까?

그건 "해도 괜찮다"라는  인식에서 시작된다.

"친구를 때려도 괜찮아. 뭐 장난인데 누구나 하는 짓이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잖아."

"여자를 때리는게 어때서? 여자는 사흘에 한번씩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는 말이 왜 있겠어"

"내 마누라 내가 교육시키겠다는데"

"그러지 말라고 몇번을 얘기해도 듣질 안으니 매가 답이지"

"내가 지 남자친군데 내 말을 안들어? 때려서라도 가르쳐야지"

"내가 사랑하니까  나가서 욕 듣지 말라고 하는 거라고  사랑이 없으면 이러지도 않아요"

"여자들이 설쳐대기 시작하니까 문제지  뭔지도 모르고 지껄이고 설치고 까분다니까"

".그런 여자들 몇몇 어찌 된다고 뭐가 문제겠어? 저러고 다니니 당해도 싸지"

 

자기 아내를 때려서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이 없고

심지어 때려 죽여도 제발 사형시켜달라는 탄원은 있어도 막상 사형이 구형되지도 않는다.

애인을 때려도 그저 사랑싸움이겠거니 하고 말고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덤터기를 쓰거나 귀찮은 일에 휘말릴 수 있다.

동료를 성추행 해도 그저 집행유예가 전부이거나 학교에서 퇴교 조치를 당해도 다른 학교에서 다시 삶을 시작 할 수 있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도 결국은 불륜의 문제가 되고 꼬리치고 나선 여자가 돌을 맞을 뿐이다

그러니 세상에 만연하게 펴진 생각은 그러하다.

해도 괜찮네!!!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남자라면 그럴 수도 있지....

결국 술도 아니고 정신병도 아니고 순간의 욱을 참지 못하는 분노조절 장애도 아니다.

술을 개처럶 마셔도 정신이 혼미해도 욱이 머리끝까지 치밀어도 그들은 자기가 터뜨려야 할 순간과 하지 말아야 할 순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가정폭력 신고가 들어가도 그 순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있으면 괜찮다는 것도 알고

티나지 않게 구타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심지어 먼저 자기가 피해자라고 신고하는 치밀함까지 가지고 있다.

 

남자에들은 그렇게 크는거지

다 싸우면서 의리도 생기는 거고

그 나이엔 친구가 얼마나 중요한데 그 무리에서 빠지는 건 세상에서 버림받는 일이야

여자애들이 자꾸 약올리고 꼭지 돌게 만들잖아

영악한 여자애들이 문제라니까 애를 아주 미치게 만들어 버리니 어리숙한 사내애들이 결국 욱해서 손이 올라가는 거구 결국은 봐봐  폭력을 썼다고 뒤집어 쓰는 건 다 남자애들이라니까

요샌 남자애들 교육 잘 시켜야해 여자 조심해야 한다고...

 

가부장제가 말하는 타고난 남녀의 차이

본능을 참을 수 없는  그리고 수컷들 사이의 위계가 중요한 집단 특성으로 결국 남자란 그럴 수 밖에 없고 그런 남자가 남자다운 남자다. 라고 정의된다.

학교 가면 사람 될까 군대가면 사람될까?

아니 사회화를 통해서 그 남성다움은 더욱 공고화되고 그 무리의 특성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약자가 되고  또 다른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그 피해자가 권력을 갖는 순간 그는 또다른 가해자가 된다. 여성적이라는 것은 남성 사회에서 모욕적인 언어이다.

니가 여자냐? 여자같이 생겨가지고...

그건 수치이고 모욕이라는 것인데 그 의미는 결국 여자란 수치흐럽고 하등하다는 의미의 다른 뜻이다.

남자다움을 규정하는 맨박스는 그 틀이 공고할 수록 남자들은 세상살이는 편하다.

그 규정에 벗어나는 남성들 그래서 자기 욕망과 타고난 성정을 눌러야 하는 남성들을  불편하고 심지어 폭력적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선한 남성들은 그게 당연한 사회적 가치이며 질서라고 생각한다. 여성을 때리지 않고 욕하지 않고 죽이지 않은 자신들은 선량하고 착한 남성일 뿐이다

해도 괜찮은 범위가 너무 넓어서...

 

이런 접근 방식은 여성들이 공격당할 확률을 낮추고 그들이 조금 더 안전하게 느끼도록 도울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한 부분이 있다. 이 방법은 남성이 저지른 폭력에 대처할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한다는 점이다. 대처할 책임을 여성들이 져야 할 뿐만 아니라 안전을 도모한다는 미명하에 여성들의 행동을 제약하고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대응책이다. 남성들의 삶에는 아무런 지장도 주지 않은 채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성 폭력 문제의 대처 패턴이다. 우리는 해결 방법을 고민했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성폭행 가해자가 여성입니까? 남성입니까?" 정답은 당연히 남성이었다. "만약 여학생들을 구내식당에서 기숙사로 기숙사에서 도서관으로 실어나르는 대신 남학생들을 차량으로 이동시키면 어떨까요? 남성이 범죄의 장본인인데 왜 남성이 저지른 폭력 때문에 여성들이 피해를 봐야 하죠?"  (중략)

우리의 의도는 이번 강간 사건을 비롯한 각종 교내 성폭력 문제를 남성들의 문제로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초점은 여성들이 아니라 남성들에게 맞춰졌다. 셔틀 차량으로 이동하게 된 남성들은 더는 피해여성이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왜 그녀가 그 시간에 거기 있었는지 그녀가 강간당했응ㄹ 때 어떻게 행동했는지 꼬치꼬치 묻지 않았다. 대신 남학생들은 물었다. "어떤 놈이 저지른 짓이야?" 그리고 말했다. "나머지 학기 내내 셔틀에 실려 다니기 싫으니 얼른 뭔가 대책을 세워야 겠어"

가정 폭력 혹은 성범죄를 접할 때 우리는 남성에게 유리한 해석응ㄹ 내리곤 한다 기본적으로 남성의 편에 서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솔직해지자 성차별적이고 가부장적인 우리 사회가 남성이 여성에게 가한 행위에 대해서 되려 여성에게 책임을 묻거나 불편함을 감수하도록 강요한 것은 아니었을까?

                                        p135~137

 

 

<playing the game>영상에서  한 여학생이 오랫 동안 짝사랑하던 남학생과 가까워졌다.

또래 파티에서 그 남학생을 만났고 그 남학생도 자기에게 호감을 보이며 이른바 썸을 타기 시작했다 파티에 당연히 술이 있고 음악이 있고 떠뜰썩한 웃음이 있다.

술이 들어가고 여학생은 대범하게 남자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고 함께 술을 마시고 함께 웃고 몸을 터치하고 춤을 추고 키스를 한다. 그 사이사이 계속 술을 마신다.

그리고 남학생을 조용히 속삭인다. "우리 이층으로 올라가자"

여학생은 거부하지 않고 따라가고 빈방에 둘만의 시간을 갖는다

키스를 하고 서로 애무가 짙어지면서 남학생을 섹스를 요구한다.

너도 원하면서 왜그래? 재미없게 굴지마

여학생은 이건 아니다. 아직 섹스까지 원한건 아니다.

함꼐 있고 싶고 둘만 있고 싶지만 그리고 만지고 키스하고 싶지만 섹스는 아직 내키지 않는다.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보지만 남자는 그 몸짓을 no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여학생은 그 방을 뛰처나온다.

이건 명백한 강간이고 폭력이다.

교육욕 영상답게 주인공 여학생의 친구둘이 등장하고 한 명이 어건 명백한 폭력이며 너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위호한다. 다른 한 명은 내가 파티에서 너희들을 봤는데 둘이 너무 찐하게 붙어있더라 그랬다면 너도 원한게 아니었니? 라며 내가 그 남학생을 잘 아는데 그렇게 폭력적으로 할 애가 아니다 좋은 애라고 한다.

남학생도 두명의 친구가 등장한다. 어젯밤의 일을 물어보며 그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며 우와 우와 하는 친구가 있고 그 여학생이 동의했느냐고 먼저 물어보며 동의하지 않은 애위는 폭력이라고 말하는 친구가 나온다.

두 남 녀 학생의 진술을 화면으로 보여주는데 누가 진술하느냐에 따라 그 상황은 미묘하게 다르다. 한 상황에서 누군가는 불편하고 불쾌하지만 제대로 자기 의사를 밝히지 못하고 있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무지하게 즐기는 얼굴이 나온다.

누구나 이건 명백한 강간이라고 생각한다  '

다만 누군가는 기존의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피해자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선한 마음으로 그리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덧붙인다.

이건 명백한 성폭력사건이어서 신고를 하고 가해자가 처벌을 받아야 하는 건 맞지만 피해자도 교육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적어도 그렇게 정신이 없도록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하고 빈 방에 남녀가 둘만 들어가지 말아야 하고 그런 순간에 누군가 친구와 함께 해야하고  적어도 남자를 그렇게 믿어서는 안된다는 교육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나의 십대를 돌아봐도 그렇다.

엄마가 선생님이 여학생은 몸 조심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등등 잔소리를 겸한 교육을 하기도 하지만 미디어에서 책에서 그리고 친구들과의 수다에서 우리는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늘 알고 있다. 술을 많이 마셔도 안되고 밤늦게 다녀도 안되고 짧은 옷을 입고 다녀도 안되고 화장실을 갈때는 꼭 친구와 함꼐 가야 하고 낯선 사람을 조심해야 하고 남자들은 다 늑대니까 아빠 말고는 믿어서는 안되고.... 그걸 모르는 여성이 있을까?

그런데 일이 생기고 안그래도 이미 수없이 자책을 하고 있을 그 여학생에게 다시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선한 의도로 그런 소리를 되풀이 해야할까?

그건 결국 그 모든 문제의 발단은 너! 라는 이차 가해일 뿐인데

가끔 우리는 이차 가해를 피식거리며 심문하는 경찰의 모습이나  노트북 뒤에서 댓글을 다는 일부 악플러들이나 뒤에서 노골적으로 수군거리는 알지 못하는 타인들이라고 생각한다.

너를 너무 걱정해서 조심스러워서 선한 의도로 전하는 말들 역시 하나의 가해라는 걸 알지 못한다.

이미 그들은 알고 있다.

모든 답은 피해자에게 있고 내담자에게 있고 누구보다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배우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옳은 말을 해주고 싶고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고 무언가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다.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 적어도 충고 조언 교육에 있어서는...

 

그냥 가해자에게 <동의> 동영상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동의되지 않은 관계  차마 자기 의사를 말할 수 없는 관계  중간에 바뀔 수 있는 욕망과 의사 모두가 no! 라고

 

 

남성들이 자신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사회적 맥락에서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나는 선한의도를 가진 사람중 하나이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 남성들이 집단적으로 여성들을 부적절하게 대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 "고 고백하는 남성들은 찾기 힘들다 아니 대부분의 남성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 나는 착한 남자고 몇몇 나쁜 남자들이 여자를 때리기도 하는데 전 그런 건 용납하지 않아요."

하지만 자신과 몇몇 나쁜 남성을 구분 지어 생각하다 보면 중요한 사실을 놓치게 된다 우리 사회 남성 대부분이 상대적으로 지배적 위치에 속하며 알게 모르게 남성 중심적 사고와 사회적 분위기를 지속시키는데 기여한다는 점이다 마치 백인이 "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예요 다른 백인들 중에는 흑인을 차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전 아니예요"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사고방식에 안주하기 때문에 정작 사회 구조적 차별에 대한 비판적인 대화를 나눌 기회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와 자신은 별개라는 생각으로 자아 성찰을 거부할 때 주변 백인들이 유색인종을 대하는 방식에 직접적으로 의사표시를 하지 않을 때 지배적 위치를 선점한 백인들은 사회 구조적 인조차별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조차 외면하게 된다. 어떤 기득권층이나 지배적 집단을 보아도 현실의 문제를 남의 문제로만 치부하며 대응을 회피하는 사고방식을 관찰할 수 있다.

 

가끔 남편도 그렇게 남자들이 말한다.

"내가 바람을 피기를 해 도박을 하기를 해 사람을 (여자를) 패기를 해 나만큼 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그럴 때 차마 말을 못하고 속으로 조용히 날린다.

'그런 행동들은 다 범죄거든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다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아니잖아'

남자들은 참 쉽다 범죄만 저지르지 않으면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남자라면 그럴 수 있다는 허용의 범위도 무한정 넓다.

범죄는 당연히 안되는 일이며 법의 테투리에서 다루어질 문제가 아니더라도 사람 사이의 예의라든가 존중의 의미에서 서로 조심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은 잊는다.

여자는 그러면 안되는 일이 손가락 발가락을 동원해도 다 셀 수 없는데 남자는 그래도 괜찮아 뭘... 하는 일이 손가락 발가락을 넘는다.

 

폭력에 대해 이야기 할때 가해자와 피해자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꼭 말을 한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방관자들이 있고 어쩌면 그 방관자들이 그 폭력 해결의 키를 쥐고 있다고 볼수도 있다.

그러자마. 그건 안되는 일이야

라는 말 한마디가 폭력을 줄일 수 있고 누군가 불편하고 불안한 마음을 가라 앉힐 수도 있다.

그냥 내 일이 아니어서 침묵하고 내가 나서서 괜히 일 만들기 싫고 나까지 불똥이 튈까 싫어서 모른 척 하는 그 순간 누군가는 그 행동에 정당성을 인정받고 누군가는 계속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자기탓을 하며 쪼그라들고 있다.

남자들도 그냥 나만 착한 남자가 되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이 상식이라고 믿는 맨박스의 규칙들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일 수 있고 그들에게도 폭력을 수 있다는 걸 한 번은 생각해보면 좋겠다.

 

여성폭력은 명백한 인권침해다. 만약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공격한다면 그 행위는 당연히 인권침해로 다뤄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성 폭력 문제에 관해서만은 남성들에게 책임을 면제해준다. 이때부터 여성폭력은 사회적 문제도 아니고 남성들의 문제도 아닌 '여성문제'가 되고 만다. 가정 폭력 성폭력 및 여성을 표적으로 하는 모든 폭력과 학대 행위가 '여성만의 문제'로 치부되는 순간 문제의 심각성이 훼손된다. 평범하고 선한 남성들은 이 문제에 관심이 없다.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는 억압에 저항하는 여성들에게 특권 단체라든가 소수 단체 , 페미니스트 조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단체들은 과소평가 되기 일쑤다. 사회적 위상이나 영향력 동원 가능한 자원이 한정적이고 중요하지 않은 역할을 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성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으려고 테이트 폭력이나 가정폭력 같은 포괄적이고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사실대로 정확히 명칭을 정하자면 행위의 가해자인 남성을 지목하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남성에 의한 여성 폭력'처럼 말이다.

문제의 핵심은 여성과 그들의 희생이 아니라 남성과 그들의 범죄 행위여야 한다. 여성이 학대 당할 때 남성이 침묵하는 것은 폭력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는다. 평범한 남성의 침묵은 허락을 뜻한다. 침묵은 남성들 간의 이해관계를 둘러싼 공모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의 침묵은 여성을 해치는 폭력적인 행동이  마치 정상적으로 용납되는 행위처럼 비춰지게 만든다.

대다수 남성들의 본심은 폭력적인 남성에게 면죄부를 주고자 함이 아니란 걸 안다. 하지만 우리의 침묵이 결과적으로는 동의의 표현이나 마찬가지임을 깨달아야 한다. 폭력적인 남성들은 착한 남성들이 침묵을 지킬 거라 믿고 있으며 우리가 구시대적인 남성상에 충실하게 행동할 것이라는 전제 하에 행동한다. 폭력적인 남성들은 선한 남성들이 계속해서 여서은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믿음을 공유해주기 바란다. 그래서 그들이 여성에게 무슨 짓을 하든 간섭하지 않게 말이다. 폭력적인 남성들은 선한 남성들이 계속해서 성폭려게 노출된 여성 피해자들을 괴롭히길  원한다. 피해 여성이 왜 거기에 있었으며 알아서 조심하지 않고 왜 그런 치마를 입었는지 캐물으며 여성을 취조하길 원한다.

 

 

 

여성들은 보호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남성이 폭력을 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남성들은해법의 일부분으로 문제 해결에 참여하면 된다.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존중한다면 여성의 안전은 자연히 뒤따라 올 것이고 여성 폭력도 감소할 것이다. 먼 훗날 아예 사라질지도 모른다. 맨 박스가 언제까지 선한 남성들의 핑계가 되어 줄 수는 없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내 아이에게 생기는 일이라면... 하고 감정을 이입해보면 쉽게 답이 보일 때가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드는 양가 감정은 내 아이만은 그렇게 되질 않았으면 하는 뻔한 속샘도 함께 있다.

성적 소수자에 대해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하면서 혹시 내 아이가 그럴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다가도 절대 내 아이만은 그렇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하고

학교 폭력 가정 폭력 성 폭력을 생각하며 내 아이가 당했다면 이렇게 법이 허술하고 사회제도가 부실한게 문제라고 생각하고 울분을 터뜨리라다고 그런 험한 꼴을 내 아이만은 당하지 말았으면 하는 비겁한 마음도 함께 든다.

부모가 되고 보니 세상에 두려울게 없으면서 동시에 세상 모두가 두려워진다.

내 아이가  사는 세상을 위해 일회용품도 쓰지 말아야 하고 폭력이 근절되어야 하고 밤길이 안전해야하기 때문에 내가 나서서 행동해야 하지만

내 아이가 세상을 사는 동안 아무일이 없기를 그냥 눈을 감고 넘어가는 일도 괜찮다고 바주고 싶다는 생각도 함께 한다.

세상을 알 수록 내 속의 모순도 자꾸 더 확장되는 기분이다.

 

성폭력 에방교육을 하시는 분에게 들은 이야기다.

가장 강의가 겉돈다고 느끼는 대상이 40대 이상의 남성  공무원이라고 했다.

뭘 그럴 수도 있지. 여자가 조심해야지  세상이 말세야 라는 곳에서 딸같으니까 그랬지 하는 말을 뒤집어 그 행동을 당신 딸에게도 할 수 있냐고 물으면 금방 침묵한다고 했다.

차마 내 딸에게는 할 수 없는 짓. 내 딸이 당한다는 상상만으로도 치욕스러운 일을

타인에게는 딸같아서 딸처럼 예뻐서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그러나  몇몇의 반응은 불쾌감으로 드러난다. 왜 그런 같잖은 짓에 우리 가족까지 끌어들이느냐고... 결국 그들은 가족과 타인이 구분된다. 해도 되는 대상이 있고 안되는 대상을 자기가 결정하며 불쾌감을 드러낸단다.

그럼에도 그렇게 강의 서두를 시작하면 대부분은 알아듣는다고 하는 말이 생각이 났다.

책의 저자도 남성들에게 그렇게 접근한다.

당신 딸이 그런 일을 당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역지사지의 경우이기도 하지만 한편 꼭 그렇게 생각해야 알 수 있을까 하는 마음도 들고

그렇다면 결국 내 가족을 위해서 라는 이기적인 마음에서밖에 시작할 수 없을까 싶기도 하고

남자란 내 가족을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영웅이 될 수 있다는 말인지.. 퍽이나 헷갈리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남자가 남자의 입장에서 여성 폭력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점에서 읽어볼 만하고 권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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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 김서령이 남긴 조선 엄마의 레시피
김서령 지음 / 푸른역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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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적이 무슨 맛이 있니? 그냥 구색맞춰 부쳐놓는거지

 경상도식이라는데 하라면 해야지

 하라고 해놓고 막상 차려놓으면 먹을 사람도 없는데 왜 하나 몰라"

 

제사를 지낸 친구의 푸념에 모두들 한마디씩 거든다

"그래 배추적이  무슨 맛인가 몰라. 이맛도 저맛도 아니고.."

'다 형식이지 자기들 손으로 하는 것도 아니니까 이것 해라 저것해라 하는 거지"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은데 할말이 없다.

아무도 안먹고 형식적이라는 말도  아무 맛도 없는 그냥 형식일 뿐이라는 말도 동의할 수 없었다.

경상도가 고향이고 달마다 기제사가 있던 종가집이었다는게 치떨리게 싷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우리 제사에서 배추적은 그렇게 홀대받을 존재는 아니었다.

가을배추는 가을 배추대로 달고 부드러웠고 여름 배추도 한번 데쳐서 부쳐놓으면  잎 부분은 부으러운 맛에 야금야금 집어 먹고 줄기 부분은 간장맛에 먹어대다 보면 배추 한 통은 금방이었다.

어른들 상에 특히 남자 어른들 상에 올릴 때는 배추나 부추같은 야채적보다  소고기 전 동태전 산적이 주로 올라가도 별로 서운하지 않았다. 적어도 배추적 맛은 몸이 기억하는 맛이었다.

몇개 되지 않은 고기나 생선보다 넉넉한 야채적이라 부치면서 애들엑에 한입 두입 먹이기 야박하지 않았다. 그래서 금방 부쳐낸 뜨거운 배추적을  그냥 간장과 식초만 넣은 양념에 찍어 먹는 그맛은 기가 막혔다. 하긴 금방 부쳐낸 전은 밀가루만 부쳐도 고소하고 맛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옆에 앉아 도와준다고 하면서 한장 두장 얻어먹던 배추적에 익힌 그 맛은

달큰하고 따뜻하고  소소하고 정겨웠다.

맛이 아니라 맛과 함께 떠오르는 분위기 사람들 그리고 그때의 내 마음이었을 것이다.

배추전이 아니고 배추적이라는 명칭도 함께 익숙하다.

 

그러나 깊은 맛은 반대다 먹고 나서 전혀 죄스럽지 않다. 빈접시가 부끄러울 리도 없다. 양념장이 없으면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밍밍한 맛이다.

"얕은 맛"이 혀가 느끼는 맛이라면 "깊은 맛"은 위가 느끼는 맛이다. 어쩌면 깊은과 얕은 이란 수식은 그것을 느끼는 신체부위의 심천 때문에 붙여진 것일 수도 있겠다. 돌연 든 생각에 무릎을 치다 말고 나는 얼른 손을 내린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얕은 맛은 어린아이들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면 깊은 맛은 나이 들어야 제대로 아는 맛이다. 마치 여자들이 아이를 낳고 난 후예야 미역국 맛을 제대로 아는 것처럼! 그렇다면 맛의 심천이란 신체 부위의 심천이 아니라 연륜의 심천일지도 모른다.    16p 

 

 

아침저녁 빈소에 상식상을 지어바치는 시어른 삼년상이 끝나고 여든이 됐을 때 고모는 내게 말하셨다. "야야 살아보니 인생이 참 허쁘다" 살아보니 인생이 참 허쁘다. 라고 토로하신 후 고모는 다시 십 년쯤을 더 사셨다. 그 나머지 십 년은 오롯이 나를 위한 세월이었다. 시어른 밥상을 차리는 대신 철따라 끊임없이 생겨나는 나물을 , 곡식을 양념을 장아찌를 김치를 젓갈을 부각을 정과를 다식을 모조리 내게로 보내고 또 보내셨다. 돌아가신 다음깍지도 냉동실에 굴러다니는 묵나물 덩이가 서른 개도 넘을 만큼. 나는 이걸 녹여 입안에 넣을 수 있을까 입에 넣어 먹지 않으면 그럼 이걸 어쩌나.

냉동실 문 앞에 하염없이 서 있다. 허쁘다는 말은 기쁘다와 슬프다와 고프다와 아프다를 다 녹여 비벼놓은 말이다.. 삶이 "삶은 나물"볻 봇할 리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다 사라져버렸을 리야.

엄마도 할머니 빈소에 상석상을 3년을 지어바쳤다. 효자로 소문난 아버지는 장례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왔고 내 어머니에게 잘하는지 못하는지 쌍심지를 켜고 보던 고모들도 3년 상석상은 잊었을 것이다. 결국 그 몫은 살아 사이가 좋지도 않았고 무시했던 며느리 몫이었다. 그 상석에 무엇을 올리건 그건 엄마 맘이었다. 끼니끼니 뜨신 밥을 올리건 라면 한 그릇 후루룩 끊여 올리던 그건 엄마의 선택이고 몫이었고 그 차려놓은 빈소앞에서 어떤 하소연을 하든 어떤 푸념을 늘어놓고  생전 언행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을 하고 따지고 들거나 그 잘난 아들 욕을 하거나 그건 상석을 올리던 엄마 마음이었을 것이다. 귀한 아들도 엄마를 끔찍히 위하던 딸들 몫이 아니었으니까

아주 오래 시간이 지나 아버지도 돌아가신 후 엄마는 은밀히 말씀 하셨다.

그때 때떄로 라면도 올렸고 그냥 찬밥도 데워서 올렸다고.

그리고 생전엔 둘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 기억도 없는데 그땐 대꾸 없는 시어머니 앞에서 이런 저런 말을 많이 하셨단다. 어짜피 듣기 싶다고 퉁박을 할것도 샐쭉 돌아앉으며 민망하게 만들것도 아닌 존재에게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 뭐든 할 수 있었노라고 말했던 걸 기억한다.

그 3년이 지나고도 여전히 달달히 기제사는 남아있었고  그때마다 챙겨 줘야할 식구들도 줄줄인 건 변함 없어서 엄마집 냉장고는 늘 검은 봉다리에 꽁꽁 쌓인 식재료들이 정체를 밝히지도 않고 꾸역꾸역 쌓여있었다.

 

에티켓이란 엄밀히 말하면 위선이다. 남들과 변별되고자 하는 허위의식일 수 있다. 그러나 안동 양반들의 에티켓은 눈물겨운 수신의 방채기었다고 말해도 가당하리라. 벼슬로 나갈 길은 수백년 동안 원천 봉쇄된 상태였고 아득하고 아슬한 봉우리 가은 퇴계는 바로 이웃에 있는데다 글 읽지 않은 집을 우습게 여기는 풍조는 태중에서부터 절로 내면화 됐다. 삶의 "파이널 고울"은 벼슬도 부도 아니고 군자가 되는 것이었다. 군자란 완성된 인격을 말하고 인격이 완성되는 방법은 쉼 없이 글을 읽는 것뿐이었다. 수신해야 제가하고 제가해야 치국할 수 있었으니 구 수신법이 바로 글 읽기 였다.

"글을 읽는 자가 어찌 음식을 탐해?" 란 이데올로기가 안동엔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이밥을 수북히 펴놓고 아귀아귀 퍼먹어서는 선비일 수 없었다. 그건 거꾸로 밥을 수북이 퍼담을 만한 재력이 없었기에 궁여지책으로 만들어낸 합리화일 수도 있다. 삶의 남루함을 군자라는 추상으로 외면하거나 미봉하려 했다는 심증이 가기도 한다. 111p 

 

고지식하고 뭔가 짠한 이 문단이 낯설지가 않다.

달마다 기제사를 지낸다고 종손집에 와글 와글 모여서 낮동안 일하느라 구겨진  자켓 주름을 펼 새도 없이 나달나달하고 겨뭇거뭇해진 양말 발바닥을 한방향으로 보여주며 절을 하고 또 하는 그 모습은 한편 근엄하면서 웃기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그랬다.

여자들이 종종거리며 차려놓은 제사상앞에서  이렇게 일찍 제사를 지내서야 되겠나? 이게 법도에 맞나 아니냐  소소하게 논쟁하다가 여름엔 역시 수박을 올려야 하는 건지 저렇게 커다란 놈을 상에 떡하니 올리는게 예법에 맞느니 아니니 따지는 것들을 보고 있자면 자기 손으로 차리지 못한 상에 멋적어서 말들만 늘어 놓는거 같기도 하고   뭣도 없이 허세는 여전한거 같기도 하고.. 참 어린 맘에도 뭔가 기묘하게 느꼈던거 같다.

늦어서 입맛도 없다면서도  제사후에 벼벼놓은 밥은 고봉으로 담아도 다 먹었고  제사 음식에서 귀하고 비싼건 기가 막히게 빈접시로 남았고 김치종지 부추전 배추전  생선대가리만 남았다.

채 식사도 못하고 동동거리며 깍아온 과일과 식혜도 마다하지 않고 급하게 다 챙겨 먹고 썰물처럼 다들 빠져 나간 기억이 매달 있었다.

 

겉겉과 속을 일치시키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면 수박에게까지 그렇게 예민하게 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기가 겉과 속이 다르니까 푸른 껍질에 붉은 속을 가진 수박만 봐도 괜히 가슴이 덜컥 하지 않았을까 소설가 김형경에 따르면 컴플렉스란 자신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는데 선비의 수박 기피도 그런 까닭이 아닐까 싶은 의심을 지울 수 없다.

  167p 

 

 

그 성깔 '패랍던(까다롭던)' 아이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쉰 중반을 넘겨버린 지금 아무에게도 그따위 패라움을 내보일 수 없는 지금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아이는 아직 내 안에 자그맣게 웅크리고 살아있다. 울음이 터진 이유는 실은 연변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늘상 헛헛했다. 무언가 그리웠다. 뭔지 모르지만 꼭 이써야 할 것이 내게만 결락된 듯했다. 그게 아버지였을까 연변을 거절하는 엄마를 함께 흉보고 내 편을 들어"까진 연변 하나 먹으면 뭐가 어떻다고 저카노 그제?" 하면서 덜렁 안고 밖으로 나가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건 아마도 남자어른의실팍한 품이었을 것이다.

그럿지만 엄마는 그걸 모르고 있다. 내 울음의 이유가 오직 연변 때문인 줄로만 안다. 그래서 금지된 연변을 들고 와서 저렇게 쩔쩔 맨다. 혼자 타엽점을 찾아내 신주 속에 들어가 있는 할배들한테 먼저 절만 하면 상관없다고 한다. 엄마로선 엄청난 일탈이건만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아버지는 언제 오실까 제삿날이니까 오시긴 꼭 오시겠지! 처음엔 잔울음이다가 거기 놓인 엄마의 버선발을 보자 울음 덩어리는 갑자기 아이의 몸뚱이만하게 커진다. 급기야 덩이진 울음이 아이의 숨을 막아버린다.

그 날 엄마는 연변을 굽다 말고 사당앞에 움푹한 구덩이로 들어와 나를 껴안았다.

"그래 울어라 울어 참지 말고 울어라 울어"

무릅위에 안아 올리고 가슴께를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ㅓㅁ마는 자장가처럼 변명을 한숨처럼 이야기를 들려줬다..... p204 

 

어쩌면 엄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연변이 아니라 아이 마음이 헛헛한 것이 어떤 부재때문이라는 걸. 알지만 안다고 하면 그 허전함을 당신조차 어쩔 수 없을 것 같아 애꿏은 연변탓을 하며 믿지도 않을 이인 이야기를 하며 아이를 달랬을 것이다. 따뜻한 사랑이나 관심이 아니라 요샛말로 츤데레라고 할만한 툭 와서 한마디 해주며 내 편 들어주고 무심하게 한 번 쓱 내 어깨 짐을 함께 나눠 들어줄 그 누군가가 엄마가 더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았을까

더 크게 참지 말고 울어버리고 싶은 건 당신 마음이 아니었을까?

이런 나이에도 가끔  간절할 때가 있다.

그래 괜찮다 괜챃다. 하면서 실컷 울게 등을 쓸어 줄 누군가가 간절해질 때가.

 

 

 

 

 

 

 

 

쑥을 뜯으며 엄마를 생각하다.

 

제비꽃과 민들레 사이에 앉아 쑥을 뜯으면서 엄마 생각을 합니다. 어깨와 머리통에 봄볕이 따끈따끈 내려 앉아요. 엄마뿐 아니라 고모생각 예령이 생각 할머니 생각 한달막씨 생각도 합니다. 봄볕에 나앚아 쑥을 캐던 우리 집안 여자들이요. 다들 나보다 먼저 여길 떠나버렸지만 어디선가 쑥 캐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듯한 여자들이요. 예령이 빼고는 다들 허리 한 번 못 펴고 힘겨운 인생을 살았지만 엄마도 고모도 할머니도 한달막씨도 그리 고통스럽지는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비로소 합니다.

 

이런 봅볓 속에 쑥을 캐는 한나절을 해마다 몇 차례씩 누려왔다는 것만으로 인생은 옹분의 위엄을 휙득하는 것 아닐까요 공기 가득 미만한 볕이 되고 내 머리통을 간질이는 엄마 엄마보다 진화된 삶을 살겠다는 결의가 내겐 이혼이었고 이혼 후 과연 내 일상은 격상했어요. 비로소 아무 곳에도 끄달리지 않을 수 있게 됐어요. 쑥을 캐다 말고 낮잠이 들어도 쑥 속에 잡티가 들어도 개똥이 묻어도................ 온전히 내 책임 내자유.............

 

한 세대 전 우리 집안 여자들의 책임과 자유를 전부 합한 것보다 나는 더 자유롭고 더 강력해졌어요. 난 걷고 싶을 때 걷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춥니다. 하루 한 편의 시 혹은 에세이를 쓰고 이틀에 한 장 그림을 그리면 나는 최소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요, 시장이 확보돤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의 느슨한 생산력으로도 내 한 입에 거미줄 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뜻이지요.

 

난 엄마처럼 자취하는 시동새을 위해 안동읍까지 신작로 30리 길을 장작을 머리에 이고 걸어가지 않아요 고모처럼 조카를 위해 전신거울을 등에 지고 대명동에서 산격동까지 골목길을 질주하지 않아요. 한달막씨처럼 취나물과 고사리를 뜯기 위해(장에 팔아 돈을 벌기 위해서였고 실제로 한달막씨는 꽤 많은 돈을 통장에 모았다고 소문이 났지만 결국 그 돈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갔지요) 하루 열두시간씩 산길을 헤매지 않아요.

 

나도 긴 시간 걷고 질주하고 해매 돌지만 시동생을 위해서도 조카를 위해서도 더군다나 돈을 위해서는 전만 아닙니다. 두 발로 걷는 행위가 나를 우주와 밀착하게 만들고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철학적 경험이 되어 흡족한 들숨날숨의 리듬을 만들어내기 때문이지요. 이건 내가 이제 별로 욕구가 없는 인간. 물질이든 정신이든 바라는 게 많지 않은 인간이 되었다는 증명일지도 모르겠어요 이 상태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는알 수 없지만 어쨌든 봅볕 아래  쑥을 캐려고 엎드린 오늘 내게는 세상이 돈짝 만합니다. 우리 집안 여자들 다 불러 내 잔치라도 벌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남 라고는 남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군요. 아 엄마가 반대하면 안달막 씨는 부르지 않을게요. 근데 아이 낳고 살았던 아버지의 '작은년'을 저쪽 세상의 엄마가 간단히 내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이건 대체 뭐지요? 

 

 

좋은 문장들로 잘 버무려진 싱싱하고 슴슴하면서도 자꾸 끌리는 글을 읽는 맛이 좋다.

유년의 음식이야기와 그 음식들을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그의 어머니 이야기 그리고 그 시절 여자들 이야기를 읽으며  오로지 같은 건 경상도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밖에 없음에도 어딘가 익숙하고 많이 본 풍경들을 떠올린다.

 

촌 집 마루에서 제사 지내는 어른들 등을 바라보던 기억은 늘 코가 시리게 추운 날씨와 함께 더오르고

모두가 음식을 하느라 바쁘고 여기저기 기름 냄새에  적이며 고기가 수북하지만 나는 배가 고프고 어딘가 허기진데 가만 앉아 쉴만한 구석을 찾지 못해 서성이던 마음이 떠오르고

누구나 귀여워하던 종손 동생이 겨우 장닭에 놀라서 앙앙거릴 때 동생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다고 이사람 저사람한테 별로 모나지 않은 지청구를 들으며 혼자 억울하고 분했던 마음

내 집이 아니라 낯설던 시골집

앞동에서 바라보면 양복입은 남자들이십오명  밤에 모여 일제히 거뭇거뭇한 양말을 신은 발을 모으로 절하던 기가 막힌 광경이 베란다로 다 보였다는 말에 알 수 없이 부끄럽고 작아지던 기억

준비하는 사람 , 늦게 와서 차리기만 하는 사람 따로, 절하고 먹기만 하는 사람 따로 치우는 사람 또 따로인  서열문화에 익숙하면서도 반발을 느끼던 순간들

그리고 정말 진저리 치게 지겹고 싫었지만 막상 소박한 명절상 제사상을 봤던 결혼 후 첫 명절이 참 가소로웠던  유치한 기억까지...

음식이야기는

그것이 누구의 이야기건 결국 내 이야기로 이어진다.

 

아는 맛이 무섭다.

아니까 그립고 너무 잘 알아서 속속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고 함께 분하고 함께 아련하다.

이런 문장 이런 글을 왜 이제 알았을까.

더 이상 새로운 글은 못 읽더라도 내가 몰랐던 책들이라도 부지런히 찾아 읽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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