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만우절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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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먹고 나면 모든 것이 스톱된 상황처럼 느껴진다.

더 이상 발전할 수도 없고 성장할 수도 없는 완전체로서 인간 발달과정의 마지막 목적지에 다다른 기분이다

나는 아직도 한참 멀었는데 이미 나이를 먹었고 누구나 나에게 어른이라고 말하고 인지하고 있고 나도 더 이상 어디로 도망치거나 모른 척 하거나 실수하고 미숙해서는 안된다는 강박이 빠진다

내가 생각했던 어른들

커보였고 완벽해 보였고 꽤 근사했던 어른은 어디에도 없고

극악스럽고 한심하고 아직도 많이 미숙하면서도 본인은 전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데다가 교활하기까지한 어른들만 보이고 나도 그 속에서 티나지 않게 묻혀서 그렇게 살고 있었다.

어른이라는 건 완성형일까

나는 아직도 많이 모자라고 이뤄야 할 과정들이 있는 것 같은데 이제 다 마쳤으니 졸업하라고 이제 세상에서 어른으로 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말하지 않으면 중간이라도 간다고

모르면서 아는 척 알지만 아닌 척 그런 척 그렇지 않은 척

어른이란 그렇게 나를 꾸미고 아닌척 그런척 하는 잔꾀를 가진 존재구나 라고 배우고 있는 중이다.

 

윤성희의 이번 소설집에는 각각의 어른들이 나온다,

어른이란 세상의 지혜로운 어른의 의미가 아니라 나이먹은 사람이라는 의미다

이제 중년이라고 하기에도 멋쩍지만 초로라고 하기에는 아직은 아니라고 감정을 넣어 손사래치고 싶은 그 나이 그 순간의 어른들이 등장한다.

대단한 사람들도 아니다.

결혼하지도 못하고 혼자 살면서 이제 예전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갖고 싶은 어른

살면서 6번의 깁스를 해야했던 조금은 조심성이 없다고 해야할까 운이 없다고 해야할까 그런 인물이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어버린 친구를 기억하기도 하고

나이들어 암이 전이되었고 살아온 날을 돌아보니 회한 뿐이라 마지막으로 남편의 내연녀와 남편에게 사기친 남자가 함께하는 국수집에 가서 욕을 해주겠다는 결심을 하고 실행하거나

버스정류장에 있다가 사고로 돌진하는 승합차에 치이거나

첫사랑이기를 바라는 여자와 떡볶이를 먹다가 부모몰래 차를 몰고 나온 중학생이 돌진하는 바람에 사고가 나기도 하고

놀이터에 덩그러니 놓인 킥보드를 타고 동네를 돌다가 넘어져 꼼짝할 수 없는 어른도 있다.

이제 나만큼 늙어서 흰머릭 가득한 여동생과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으며 이상한 주문을 외우기도 한다.

담 넘어온 감나무의 감을 밟아 넘어진 이웃 할아버지에게 보상해주고 천불이 나서 감나무를 베어버리려다가 담장이 무너지는 사고로 다친 어른이 있고 그 뒤치다꺼리를 하다가 다시 요양원에 들어간 배우자와 그 자녀들도 있다

나이든 삼촌을 면회갔다가 내리는 눈에 막걸리를 마시고 무단횡단을 하다가 자기차 앞에서 미끄러져 넘어진 어른도 있고

그 모든 일이 다 거짓말이야 하며 깔깔대는 조금은 슬프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한 가족도 있다.

이렇게 한줄로 요약하면 도데체 이 사람들은 철이 콧구멍으로 들었나 싶게 한심하고 어이없다

그러나 윤성희는 그런 작가가 아니다.

그 한명 한명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그럴 수 밖에 없구나.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어쩌면 내가 지금 어정쩡한 어른이 아니라 좀 더 팔팔하고 예민하고 선이 분명한 젊은 나이였다면 몇장 읽지 않고 책을 던져버렸을 수도 있다.

나이가 들면 좋은 점은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여전히 심술나고 마음에 들지 않은 것들 투성이지만

그래도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마음이 늦게라도 들게 된다.

이야기는 그냥 수다처럼 이어진다.

물감이 잔뜩 묻은 붓을 물어 넣어보면 슬슬 풀려나오는 색감처럼

처음엔 진하게 나오다가 점점 옅어지지만 그 꼬리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것

이야기는 그렇다. 첨엔 자기이야기를 하나보다 하고 듣다보면 어머니 이야기로 넘어가고 어느 순간 삼촌으로 이어지는가 하면 또 다른 이웃으로 넘어간다 맥락이 없다.

도데체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것이다.

우리가 늘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듯이 주장과 예시를 들지 않는다

기승전결에 맞게 이야기를 엮어내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이끌어 내지 않는다.

나만 그럴지 모르겠지만 막 이야기를 하다보면 지금, 내가 무엇을,누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몹시 헷갈리기 시작하고 부끄러워지고 입을 다물고 싶다는 욕구가 마구 들지만 그와 똑같은 무게로 어쨌든 이 이야기를 계속 하고 싶다는 욕구가 함께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다.

그래서 맥락없는 이야기를 계속하게 되고 듣는 사람의 따분한 얼굴 도데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하는 표정을 본다

이야기를 한다는 건 그렇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마구 토해내고 꺼집어 내야 내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 그것이 우선이다.

무엇이든 상관없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처음엔 여기였는데 나중에 저기로 혼자 튀거나 뛰거나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건 우리 삶이 그렇기 때문이다.삶이라는 것이 늘 논리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느닷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마구 긴장하게 되는 일들이 맥락없는 결말로 치달아가 가기도 한다.

내 삶을 이야기로 풀어보면 대단한 무엇도 없고 주제도 없지만 그렇다고 내 삶이 시시하다고 말할 수 없다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들을 진지하고 의미있게 만들고 싶지만 대부분의 삶들은 그냥 그렇다 시시하기도 하고 별일 아니기도 하지만 그런 일들이 모이고 차곡차곡 쌓여서 누군가의 삶을 이루는 순간 그 삶은 그대로 대단하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삶

모든 삶은 숙연하고 가치있으며 무시할 수 없다

윤성희는 그런 삶들의 맥락없는 과정을 따라가지만 꼬이고 엉뚱한 골목으로 꺽어지는 그 이야기들을 다 듣고 나면 그냥 막연히 숙연해진다.

뭐라고 말하기 어렵고 더구나 판단하거나 가치를 매길 수 없다.

그냥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개인의 역사가 그대로 얼마나 가치있는가 얼마나 존중받아 마땅한가를 보여준다.

아침에 일어나 뻐근한 허리를 몇 번 돌렸고 그래도 아침을 해야 가족들이 먹을 테니 부엌으로 향한다.

어제 먹고 남은 국에 다시 두부를 썰어 넣고 대파를 다져서 함께 끓여낸다

그리고 씻어둔 쌀을 안치고 밥을 하고 이제 제법 익은 파김치와 깻잎김치를 꺼내놓고 계란을 말아낸다.

밥상에 앉은 딸이 묻는다

어제 먹던 연어 남은 거 없어? 나 그거 먹고 싶은데

기왕 국에도 고기가 있고 계란도 있는데 다시 연어라니...

귀찮기도 하고 그걸 내놓으면 이미 차려놓은 반찬은 또 남아버릴텐데 싶은 마음에 뭐라고 하고 싶지만 그냥 알았어 한다.

고삼이니까 심기를 건드리지 않은게 낫다.

그리고 연어를 내놓는다.

가끔 힐끔거린다. 다른 반찬은 손도 안대면 어쩌나 다시 넣어야 하나 버려야 하나

다시 넣자니 꾸덕꾸덕 한 날씨가 걸리고 그냥 버리자니 저것들이 너무 아까운데

다행히 딸은 다른 반찬도 잘 먹었다.

딸이 밥을 다 먹을 무렵 찌개 건더기만 건져서 옆에 앉아 함께 먹는다.

입맛은 없지만 뭐라도 먹어야지 낼모래 백신을 맞아야 하면 뭐라고 먹어서 기력이 떨어지면 안되지

건더기 위주로 딸이 먹고 남긴 파김치를 얹어 먹는다.

나이를 먹어서일까 고기가 영 역하게 느껴진다.

이 나이에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단백질을 섭취하라고 하는데 콩으로는 부족하려나??

아이는 어제와 달리 재잘재잘 말이 많다.

어제밤에 학원을 다녀와서 공부하는게 힘들다 수시로 논술을 쓰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울었다

사실 논술학원은 생각하지 않았다. 지 언니와 달리 논솔이 맞지 않을 거 같아서 그냥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해서 일점이라도 올리는게 나을 거 같은데 뭐라고 하고 싶다는데 반대할 수는 없었다. 지 언니가 논술로 대학을 가고 보니 자기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 같은데

버리는 셈 치고 돈을 썼지만 사실 아까웠다,

지금이라도 그마두겠다고 하면?? 이렇게 울면서 힘들다고 할거면 낮에 다시 재등록하기전에 말이라도 하지.. 아이는 울고 있지만 머릿속으로는 이미 지불한 학원비를 계산했다.

사실 그 돈이면...

100일이 채 남지 않은 시점에 마음이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오르지 않은 성적 가고 싶은 대학과 갈 수 있는 곳의 거리감 그 깊고 넓은 간극앞에서 본인이 먼저 주저앉고 싶을 텐데

그 마음은 다 알지만 내가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조금 더 기운을 내고 한문제라도 더 풀자

어디를 가든 엄마는 괜찮다.

남들과 비교하지 마라 남들의 의견이나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

그런 말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나마나한 본인이 가장 잘 아는 이야기들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했고 딸은 화를 냈다. 그냥 들어줘 판단하고 충고하지 말고

부모는 충고하는 사람이다. 뭐라도 잔소리해야하고 걱정해야 하고 그러면서 외롭고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지만 사실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해야하는 입장

그렇게 나에게 고민만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던 딸이 지금은 헤실헤실 기분이 괜찮다.

다 먹고 설거지를 한다.

오늘이 광복절이라 티비를 돌리다가 광복절 기면식을 본다.

 

 

 

 

 

 

필사하고 싶은 문장은 없다, 그냥 밋밋하고 일상적인 문장이 이어질 뿐이다

그러나 그런 개성없는 밋밋한 문장이 모여서 이야기를 이루는데 그 이야기가 특출하지도 않다

갖고 싶은 문장도 아니고 기묘하거나 매력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하지만 전체를 다 읽고 난 후 마음은 먹먹하다.

이렇게 살아낼 수도 있는 것인데

내 삶도 그렇게 무료하고 무가치한 건 아니라는 위안

작가는 위로라는 말이 너무 싫다고 하지만

위로는 주기위해 만들지 않아도 받아 들일 수 있다.

그냥 무심하고 아무런 의미없는 한마디지만 그것이 와서 박힐때가 있다.

 

한두페이지를 휘리릭 넘겨 눈이 닿는곳을 읽고 넘기는 책이 아니고

자리 잡고 앉아서 한 이야기를 한 숨에 읽어내리면 나도 괜찮은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윤성희 글의 매력이다.

 

아마 일상을 살면서 참 오래 고민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닐가

하나의 떠오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그 모든 생각을 기록하는 사람

가끔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이 근사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지금 이런 생각을 한거야

이렇게 이어가면 어떨까 꽤 멋진걸

이걸 정리해봐야겠어

하지만 빈 종이에 펜을 들고 혹은 빈화면에 커서가 반짝이는 순간 머릿속은 하애진다.

지금까지 내가 한 생각이 어디로 간거지?

작가는 부지런하게 생각과 동시에 기록한다. 그런 생각들

누구나 했던 것들

내용이 비슷하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하나의 사물에 꽂혀서 어떤 기억에 꽂혀서 마구마구 끝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을 기록하는 것

그 기록들이 이어지고 연결되면서 나도 모르게 어떤 감각을 건드리게 되는 것

윤성희의 소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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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각본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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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란 누가 보지 않으면 몰래 버리고 싶은 존재

또는 나의 살아가는 힘

그 두가지 얼굴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

가족은 나의 힘이고 나의 존재이며 내가 가장 소중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나에게 가장 상처주는 대상이고 버리고 떠나고 싶은 곳이다.

 

흔히 가족은 화목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세상에 다시 없는 존재이며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희생해야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게 한다.

그래서 가족 때문에 힘들거나 가족에게 상처받거나 가족에게 배신을 당하는 경우

그 가족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멀리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동시에 그 마음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다. 내가 나쁜 건 아닐까 내가 너무 심한 건 아닐까 내가 참았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정말 그러고 싶어서 한 건 아니었을 텐데 내가 잘못했다는 마음을 갖는다.

내가 그 상황에서 화를 내서는 안되는 거였고

내가 돈을 마련하거나 빌려서라도 줘야 하는 거였고

내가 말을 잘 들었어야 했고 그냥 니가 맞다고 말을 해주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엄마니까 아내이니까 가족을 돌봐야 하는 게 맞는 거였는데

내 일보다는 가족이 우선이었어야 했는데 나는 엄마답지 못하고 아내로서 자격이 없는 행동을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맞아도 내가 맞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밥상을 뒤엎은 그 사람에게 충분한 이유가 있었고 그럴 만했다고 생각한다.

가족은 절대 깨지면 안되는 그 무언가이기도 하다.

아무리 힘들고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가족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

아이들을 위해서 남들의 이목이 두려워서 내 부모님의 실망과 충격을 견딜 수 없어서

가족을 떠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어서 나는 가족을 깰 수 없다.

가족을 깬다는 생각조차 불순하고 불온하다.

 

가족이란... 이라는 질문에 아마 대부분 비슷한 문장을 완성하지 않을까

어디에 존재하는지는 모르지만 화목하고 다정한 사람들 서로 이해하고 돌보고 사랑하는 관계들

 

이 책은 그런 가족에게 질문을 던진다.

불편하고 불온하지만 어쩌면 한 번쯤 혼자 몰래 해봤을 생각이다.

아니 어쩌면 입장에 따라 이 책의 내용이 몹시 불편하고 화가나고 되먹지 않은 내용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도데체 가족을 어떻게 보고 이런 발칙한 질문을 할까 라고 말이다.

 

왜 며느리가 남자면 안될까

역사적으로 남성 중심으로 한 가부장제가 구축되고 가부장제 안에서 여성이 독립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소유물로 여겨졌따는 점에서 한국이나 서구나 다르지 않다. 둘 다 가부장제 안엥서 여성은 예속된 상태에서 순종을 욕받았따. 그러나 한국의 유고 가부장제에서 결혼한 여성은 남성의 지배를 받는 아내로서의 지위에 한정되지 않고 시부모의 지배를 받는 며느리로서의 지위를 가졌다.

며느리의 역할은 중대했으나 그 지위는 낮다는 모순이 있다.

며느리의 지위는 남편을 ᄄᆞ라 정해지지만 남편과 동등한 지위가 아니다.

허나 지위가 종속적이었다고 그 역할이 수동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전통적으로 아내이자 며느리에게는 높은 수준의 대처능력과 판단력이 요구되었고 어려움 속에서도 가족들을 이끌고 어르고 돌보며 이들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관리능역과 경제적 수완이 기대되었다. 주도성을 요구하는 종속 상태라는 모순된 위치다. 이러한 모순은 남성의 역할에서도 나타난다. 남성에게 기대되는 역할은 사회적 출세인데 이를 이루지 못했을 때 가족 내의 권위는 형식만 남는다. 권력을 가지지만 생활에서 무력한 수동적인 상태를 경험한다.

 

가부장제에서 성별 역할은 구분되어 정해졌다.

딸 아내 며느리 라는 역할은 여성의 역할이며 동시에 여성이다.

며느리가 여성이 아닌 남성이 되는 경우 생물학적인 남성이 여성의 역할을 맡게 된다.

종속적이고 희생적이며 주체적이지 않은 하나의 소유된 존재로서의 역할을 하는 남자

그런 남자를 지배하는 다른 남자라는 인식은 가부장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셈이다.

단순히 동성 결혼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에서 전통이라고 믿어 이어온 가족이라는 제도와 통념을 뒤흔드는 일이 된다. 남성과 여성의 경계와 역할이 모호히져버리는 일

그것이 동성결혼보다 더 중요하고 두려운 일이 아닐까

 

2.결혼과 출산의 절대 공식

한국은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해야한다는 공식이 존재한다. 부모가 낳은 자식만을 인정해야 결혼과 가정이라는 공식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 공식이 흔들리는 건 존재의 근간이 흔들린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곧 무너질 거라는 착각

지금 우리 사회는 무엇을 위해 결혼제도를 수호하는가?

결혼 밖에서 사람이 태어나면 정말 안되는 것일까?

출산이 결혼의 테두리에 있어야 정상이라는 관념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사람을 적법과 불법으로 구분하며 생애의 시작부터 불평등을 만들었따. 이런 불평등을 사회가 모르는 게 아니라 부당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결혼은 출산의 기반이라는 이념이 무너지면 사회의 근간이 붕괴되는 것과 같은 불안감에 차별을 정당해 해왔다.

에초에 사람이 태어난다는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출생부터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용인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출생률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결혼이나 자녀 출산에 관한 결정은 헌법적으로 보면 국가나 제 3자가 간섭할 수 없는 사생활의 영역이다. 국가는 개인이 자율적으로 가족을 형성하고 존엄하고 평등하게 가족생활을 영위하도록 보호하고 지원할 의무가 있따. 결혼한 부부가 자녀를 낳을지 여부는 전적으로 두 사람이 결정할 일이다. 그러나 때떄로 한국사회에서 결혼과 자녀 출산은 타인의 의견과 희망이 오가는 공적 의제 같다. 부모의 은근한 압력부터 결혼에 대한 주변의 충고까지 결혼과 출산에 관한 간섭은 꽤 일상적이다.

아이를 낳는다는 건 불확실한 세계를 여는 일이다. 태어나는 아이가 어떤 아이일지 아이가 자라는 동안 양육자의 상황이 어떠할지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현재의 상황을 토대로 미래를 가늠할 수 밖에 없다. 현재의 세상이 불평등하고 양육자는 유리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면, 앞으로 나아질 기미가 없다면 ... 양육자가 제공하는 가족이라는 환경이 자녀의 삶을 결정해버리는 현실에서 누가 자녀를 낳고 싶을까

 

동성가족이나 비혼출산등을 합법화하고 사회에서 받아들인다고 사회가 붕괴되고 질서가 사라질까

비정상적인 가족을 막으려는 사람과 다른 쪽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누가 결정하냐고 되묻는 사람들 시아이서 여전히 아이들은 자라고 있다. ‘비정상 가족에서 사람이 태어났을 때 그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 여전히 우리에게는 중요한 질문으로 남는다.

현재 아이들은 여전히 태어난다.

결혼을 한 정상 가족의 아이만 합법적이 정상이라고 인정하는 사회에서 여전히 비정상 가족의 아이들도 태어나고 자라고 있는데 그저 정상가족과 정상 출산만을 인정하고 다름을 배척하는 지금 누구든 행복할 수 없다.

 

3. 초대받지 않은 탄생 허락받지 않은 출산

대한민국은 평등과 자유를 기본 정신으로 하는 민주주의 헌법을 채댁하였고 정부를 수립하였다.

모든 국민은 법률 앞에 평등하다며 성별에 의한 차별을 금지하고 혼인은 남녀동권을 기본으로 하며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가족 제도는 예외다.

가족에 관해서는 평등보다 전통을 수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유독 가족에 대해서는 한민족의 미풍양속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했다. 평등은 전통적인 가족질서를 해치지 않는 범위내에서 허용된다는 생각은 지금까지 가족제도를 동결시키는 절대적이 원리가 되왔다.

가족제도를 바꾸는 대신 혼혈아동과 그 어머니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장애부부는 임신이나 출산을 하지 않은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해왔다.

어떤 가족에게 어떤 불편함이나 어려움이 있다면 제도적인 뒷받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배제하거나 제외시키는 방식을 택해 기존 정상가족을 유지해왔다. 물론 이유는 그럴 듯하다.

태어나는 자녀가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것

차별받지 않기 위해 혼혈아동은 해외로 입양을 보내가 장애 부부는 강제 불임을 하도록 해 왔었다.

아이의 불행한 삶을 예측하면서도 아이를 갖거나 낳겠다는 것은 부모의 이기심이라고 비난해왔다.

오늘날도 건전하지 못한 자녀를 출산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질타는 계속된다. 누군가 사회가 원치 않은 아이를 출산할 때 이기적인 행동이라며 출산을 결정한 그개인에게 잘못을 돌린다.

그렇게 혼혈아동에게 그랬듯이 아동을 사회적 차별과 불행한 인생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장애인은 출산과 가족생활을 하기 어려운 사회를 만든다. 여전히 우생학에 기반한 차별은 정상적이고 우수한 사람만이 출산하고 출생하도록 자격을 부여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때떄로 가장 강력한 차별은 온정적인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태어날 아이의 불행을 예고하는 염려가 자기실현적인 예언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출산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온정적인 염려와 경고를 보냄으로써 세상의 차별이 앞으로도 변함없이 계속될 것임을 기정사실화 하였다. 그리하여 실제로 닥치는 불행은 오롯이 출산을 선택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결국 그렇게 차별을 보존하고 전승하며 어떤 집단의 미래를 영구적으로 불행하게 만드는 행위에 가담한다. 이런 식으로 어떤 사람들을 이 땅에 오지 못하게 막는 행위는 얼마나 폭력적인가 이는 사회가 변화를 도모하지 않겠다는 변명이다.

부모가 출산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사회는 이미 아동에게도 좋은 사회일 것이다.

태어나는 아이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사회라면 이미 차별이 없는 세상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누군가의 출산을 막을 것이 아니라 출생으로 등장하는 예측 불가능한 구성원을 위해 변화하며 고옹체를 형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임신과 출산은 국가적 수단이 아니라 국가가 보장하는 개인의 권리이다.

 

재생산 권리를 보장한다는 건 임신 출산에 관한 개인의 결정을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여 출생하는 사람을 존엄하고 평등하게 대우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차별을 용인하고 묵인할 때 누군가의 출산을 막는 일이 아동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처럼 보였겠지만 차별과 맞서기로 결정한다면 양육자의 권리가 곧 아동의 권리이고 그 가족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이 모든 사람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옹호하는 일이 된다.

 

 

4, 역할은 성별에 따라 평등하게?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이 가능하려면

(남성이 가장으로서 나가서 돈을 벌고 여성은 전업주부로 집에서 자녀를 돌보는 것)

이는 꽤 비현실적인 가정 위에 올려진 꿈이다.

사회가 성별분업을 지배적인 관념으로 채택하면 연쇄작용이 생긴다. 성별분업이 가능하려면 남성 한 사람의 노동으로 가족구성원 모두가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회는 일자리를 남성에게 우선하여 준다. 이런 사회가 되면 여성은 마땅한 일자리를 갖기 어렵고 어쩔 수 없이 남성에게 의존해야 한다 따라서 성별분업이 일종의 이념으로 자리잡은 사회에서 결혼은 중요한 생존요건이 된다. 그것도 결혼한 상태가 평생 유지되어야 한다. 남성에게 부여된 과업도 만만치 않다. 남성은 가족 전체를 부양할 수 있을 정도로 소득이 넉넉해야 한다. 문제는 이런 기대가 얼마나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지다.

기대수명이 길어진 것

비혼 미혼의 비율 증가

남성이 받는 가족임금이 가족 모두가 생활할 수 잇을 만큼 받는 경우가 절반도 채 되지 않은 현실

능력있는 가장과 전업주부라는 역할은 가족문화의 귀족화를 추구한 결과이지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가족모델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불안정한 노동시장으로 평생 동일한 직어을 유지할 수 있는 퍼센테이지는 높지 않고 주변 노동으로 이동하여 노동이 불안정해질 경우 성별분업은 지속되지 못하고 아내의 취업이 증가한다.

 

일제 강점기 늘어난 여성의 교육은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자기성장이 아니라 자녀를 잘 키워야 하는 현모의 역할 때문이다. 국가에 필요한 적절한 노동력의 생산을 위해 여성이 교육을 받고 자녀를 잘 교육시켜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후 유신체제의 현모양처 교육은 충효의 정신을 강조하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든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라는 내용이다. 모든 사회 관계를 가족적 관계로 전환하여 국가의 권위에 복종하는 개인을 길러내려는 의도였다.

현모양처란 여성의 교육기회를 여는 열쇠였지만 결국 여성의 역할을 집안으로 한정했다.

한국은 전통적인 성역할 이념을 고수하면서 동시에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에 우호적인 국가

여성이 일도 하면서 가사 책임도 받아야 하는 이중부담을 지닌 경우 출생율을 낮을 수 밖에 없다.

 

5. 가족각본을 배우는 성교육

청소년의 성교육은 죄책감과 수치감을 심어줌으로 성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

성이란 가족관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교육한다.

사회는 결혼이란 테두리 안에서만 사람이 태어나야 적법하다고 보는 제도를 통해 가부장제 가족질서를 구축했다. 또 승인된 가족질서에서 벗어난 출산과 출생에 낙인을 찍음으로 가족제도의 불합리함을 수정하는 대신 불행을 개인사로 돌렸다.

성교육은 성역할의 구분을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게 만듦으로 가족각본이 유지되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기도 한다.

 

가족이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추구한다는 명분아래 명예를 이유로 하는 폭력이 촉발된다고 설명한다.

남성 혈통을 따라 계승되는 가족체제가 있다.

한 가족이 다른 가족과 친족 관계를 형성하려면 결혼을 해야한다.

이때 여성은 좋은 조건의 집안과 친족을 형성하기 위한 거래에 사용되는 중요한 자본디다.

이 거래에서 순결은 여성이 결혼 가능하다는 가치를 담보하는 일종의 상징적인 자본으로 중요하게 기능한다. 만일 여성이 순결을 잃거나 처신을 잘하지 않으면 결혼 거래에서 불리해진다. 여성의 성에 따라 가족 전체의 번영과 쇠락이 좌우되는 것이다.

온 가족이 여성의 성을 통제하는 일에 관여하기로 한다.

여성은 조신하고 순결해야한다는 엄숙한 성규범이 가족안에서 만들어진다.

남성은 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통제하는 보호자 역할을 맡는다.

진실이 아니어도 소문이 나게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의 행실을 문제 삼을 수 있고 반대로 진실이어도 소문을 막을 수 있다면 폭력을 행사할 필요가 없어지기도 한다.

 

6, 가족 각본은 불평등하다

근본적으로 사람의 생존을 맡기에 가족이란 단위는 불안정하다.

경제적 단위로서 가족은 규모가 작아서 가족 상황이 조금만 변해도 가족 구성원 전체는 쉽게 휘텅댄다.

성별분업이념으로 설계된 사회라면 남성 갱계부양자의 존재여부나 상황에 따라 여러사람의 생계가 흔들린다. 국가가 이런 취약한 구조를 만들어놓고 가족끼리 서로 부양하라는 의무를 부여해 자력 생존을 유거하는 건 처음부터 위험을 안고 있다.

 

한국은 복지국가를 표방하면서도 가족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생계유지가 어려운 사람에게 기초적인 수준의 생활을 지원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운영하면서도 국가는 가족의 부양의무를 우선해왔다. 가족부양 우선의 원칙으로 하여 우선적으로 부양의무자로 정해진 가족의 보호를 받고 부양의무자의 보호를 받을 수 없을 때 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 사회안에서 국가의 지원을 받는 일은 가족의 실패를 증명해야하는 과제를 떠안은 것과 같다. 가족이 있어도 없음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가족의 실패가 사회보장의 전제조건이 되면서 사회복지제도는 마치 가족이 없는 자들을 위한 낙오된 세계인 것처럼 만들어졌다.

있는 자가 가족제도를 통해 계층을 세습하는 동안 없는 자는 가족생활 자체가 어려운 상태가 된다.

 

결혼으로 가족이 된다는 건 그 당사자들 사이에 권리와 위무가 생긴다는 뜻이다. 동거하며 서로를 부양하고 협조해야 한다 서로를 대신해 공동생활에 관한 일을 처리할 수 있고 이로 인해 생긴 채무에 대한 책임도 공동으로 진다. 결혼 중 협력해 모은 재산은 명의와 상관없이 공동재산이 되어 둘이 헤어질 때 나누어야 하며 이때 가사노동을 분담한 기여도 인정된다. 서로에게 수술동의 연명의료 중단 결정 등 의료적인 결정을 내리는 보호자 역할도 하고 배우자로서 사회보장급여를 받고 상대방이 사망하면 유족으로서 장례를 치른다.

동성결혼 또는 동거가족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경제적 정서적 돌돔의 공동체를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들도 공동생활을 보호받아야 한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형성한 돌봄의 공동체를 국가와 사회가 존중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일까

혈족 안에서 사람의 순서를 매기고 부양의 의무를 부가해 생존을 담보해온 지금까지의 가족은 사람을 타고난 운명에 순응케하며 권위적인 통제에 의지해 체제를 유지한 경직된 질서였다.

 

7 각본없는 가족.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은 성별에 따라 세밀하게 구조화된 체계이다.

모든 사람을 남과 여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수 있고 성별에 따라 달리 기대되는 역할이 있음을 대전제로 한다. 남녀가 각각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법적으로 결혼하고 자녀를 출산해야 하는 일련의 가족 각본을 충실히 따르기를 기대하고 때때로 압박한다.

 

가족관계로서 신분을 증명한다는 말은 나라는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가족 구성원의 정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다른 가족 구성원도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면서 내 정보를 공유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개인이 자기자신으로 존재하지 않고 가족안에서 존재하는 가족관계등록제로 되어 있다. ) 상세증명서를 통해 과거 정보가 불필요하게 드러나기도 하고 정보를 가린다 해도 서류에 가족관계가 드러나는 이상 비정상이라고 불리는 상황들이 포착된다면 차별을 피할 수 없다.

(가족의 여러 가지 개인적인 상황을 모두 기록하고 노출시킨다.)

 

 

환자 또한 전체 법질서 안에서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으로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엽다아야 하고 국가는 성전환자의 이러한 권리를 보호하여야 한다.

미성년 자녀를 둔 성전환자의 성별정정을 허가하는 것은 그의 가족관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이는 부 또는 모의 성전환이라는 사실의 발생에 따라 부모의 권리왕 mlan가 실현되는 모습이 그에 맞게 변화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따름이다. 이렇게 형성되는 부모자녀 관계와 가족질서 또한 법질서 내에서 똑같이 존중받고 보호되어야 한다.

성전환자가 이혼하여 혼인 중에 있지 않다거나 가족관계등록부상 성별 정정이 이루어진다 하고 이러한 점이 달라지지 않는다. 미성년 자녀를 둔 성전환자도 여전히 그의 부 또는 모로서 그에 따른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수행하여야 하며 이를 할 수 있다

 

건강가족의 의미

혼인 혈연 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단위

가족 구성원의 욕구가 충족되고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가족

 

가족각본은 이분법적 성열할 관념에 기초한 가족 질서를 유지하면서 성평등에 실현할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현모양처 만들기를 목적으로한 여성교육)

가족과 사회가 별개의 질서가 가능한 분리된 세계가 아니다. 성별 구분을 바탕으로 설계된 가족제도는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적 현실과 충돌할 수 밖에 없다.

가족각본은 가족제도가 만드는 계층적 불평등을 은폐한다. 지금의 가족제도는 있는 자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다. 없는 자는 가족생활을 유지하기도 새로운 가족을 꿈꾸기도 힘들다.

가족각본은 아동에게 가장 불평등하고 가혹한 사회를 만든다.

수많은 아동들이 가족 배경을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차별을 겪는다. 아동이 겪는 온갖 놀림과 괴롭힘을 들여다 보면 가족형태 가족 소득 가족 구성원의 특징 등 가족에 관한 이유인 경우가 많다. 가족의 상황이 아동들 사이에 권력관계를 만든다. 흔히 그렇게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면 운명으로 받아들이지만 이는 가장 부정의한 불평등이다.

어느 가족에게 태어났는지에 따라 누구는 존중을 받는 반면 누구는 무시를 당하고 누구는 풍족한 기화를 얻는 반면 누구는 생존도 어렵다면 아기때부터 우리의 몸에 계급이 새겨져 있다는 뜻이다.

 

아직도 가족각본은 여전히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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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이야기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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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이탈리아는 어떤 나라였을까

아니면 그녀의 삶은 어떠했을까

<로마 이야기>가 첫 소설이었다면 좀 더 이해하기 쉬웠을까

자신의 경험은 주로 첫작품에 많이 투영되는 법이니까

낯선 땅에 뿌리내리는 일

옮겨심겨지는 일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늘 그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지 못하고 겉돈다는 느낌 충분히 시간을 보냈음에도

늘 나를 설명해야하고 인정받기 위해 배는 더 노력해야하는 일들

그냥 없는 것처럼 여겨지거나 안타깝게 바라보거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시선들을 견디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드러내놓고 무시하고 조롱하고 차별하는 것도 힘들겠지만 우아하고 고상하게 아닌 척 하지만 하나도 감춰지지 않은 상황들을 접하면 사람은 점점 작아지고 오그라 든다.

이번 소설들은 모두 너무 드러나게 이방인이며 타인들이다.

함께 섞여 들어가지 못한다.

흰죽에 잘못 들어간 통후추처럼 냄비뚜껑을 여는 순간 딱 눈에 띄더니

한입 깨무는 순간 알싸하게 퍼지는 그 맛에 아차 싶은 마음들 뿐이다.

멀리 떨어진 시골 변두리 바닷가의 소녀나 많이 배운 중년의 교수이거나

나이든 주인을 시중드는 소녀이거나 누구였든 늘 혼자 겉돌고 있다.

화를 낼 수도 없고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그냥 그게 자연스럽게 몸에 밴 그냥 자연스러움이 되어 버렸다는 게 더 슬프다? 기보다 두렵다.

누구나 어디서든 타인이며 낯선 사람이다.

내 땅에서도 때떄로 낯선 이방인일 때가 있다.

같은 동창이 아니어서 같은 지역출신이 아니어서 같은 수준이 아니어서 같은 종교가 아니어서

나도 너랑 함께 엮이기 싫어 라고 배짱좋게 큰소리치지만

마음 한구석이 싸해지면서 아릿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가능한 어디서든 튀어나오고 싶지 않다. 잘나서이든 못나서이든 그냥 쉽게 섞여서 스며들어서 그냥 그렇게 묻어지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한알의 후추처럼 도드라지고 끼어들 틈이 없다.

 

반대로 나는 우리 무리에 끼워주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는 우리가 아니다.

두렵기도 하고 함께 하면서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번거롭기도 하고 굳이 그가 아니어도 나는 외롭지 않고 슬프지도 않다.

 

이탈리에 가기 전부터였을까?

혼자 상상을 한다.

어쩌면 미국에서도 이방인이었으므로 어딜 가든 이방인이라면 차라리 아주 낯선 곳으로 가자는 마음이었을까

이미 젖어버렸다면 비를 맞든 바닷속을 뛰어들든 무슨 상관이랴는 마음처럼?
누군가가 다치거나 상처받는 이야기들

상처받지만 이미 무뎌져서 모르고 넘어가거나 모른척 하는 이야기들

함께 어울리면서 웃고 친절하고 상냥하지만 헤어질 때 비로소 안도하는 관계들

다시 오고싶다고 너무 좋았다고 말을 하지만 떠나는 순가나 잊을테고 두 번 다시 발걸음을 하지 않을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너무 피곤하고 마모되는 일들이다.

 

조금 더 읽어도 계속 힘들기만 할까

적어도 저지대에서는 다른 소설집에서는 외롭고 낯설고 두렵지만 뭔가 강단이 있었다면

이번 소설집에서는 그냥 지치고 초라하고 노골적으로 무시를 받는다.

 

이제 그렇게 직설적으로 표현해도 될만큼 강해졌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안도해도 되는 걸까

가슴속에 쌓아두였던 앙금을 이제는 거침없이 드러내겠다는 마음이라고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여전히 나는 이방인이라는 마음이 깊어진 걸까

이야기속 인물들은 말이 없다.

말을 하지 않고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인식한다.

누구도 그들이 말을 하지 않음을 지금 어떤 마음인지 관심이 없다.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 않다.

아니 지금 내 앞의 그 사람이 마음이 있고 감정이 있고 나와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불편하고 함꼐 하고 싶지 않고 두렵고 내 영역을 넘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타인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

세상은 함꼐 살아야 한다는 것이 글로는 무척이나 쉽지만 쉽지 않다.

함께에는 늘 나와 같은 존재만 포함된다,

그래서 내 세상을 벗어나기 두렵고 싫다.

그냥 이렇게 생긴대로 살다 갈란다... 라는 마음은 포기가 아니고 두려움이다.

 

외딴 바닷가 휴가철이면 휴가를 즐기기 위해 가족들이 찾아오는 외딴 집이 있다.

그 집을 관리하는 아버지의 딸은 엄마대신 손님을 맞이하고 집안을 치우고 사람들을 돕는다

손님은 그 소녀에게 친절하지만 기억하지 않는다.

뭔가가 필요할 때만 보이는 소녀다.

자기들끼리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은 그 소녀가 가까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도시에서 폭력 피해를 당하고 변두리로 내려와 사람을 만날 필요가 없는 일자리를 찾은 아버지를 도우면서 소녀는 일상에 적응하고 있다.

돌아가면 다시 오지 않을 그리고 여기를 기억하지도 않을 가족들을 맞이하고 배웅하면서

그들이 대상처럼 바라보고 기록한 글들을 발견하지만 아무렇지 않다

그런 일들이 너무 익숙하고 빈번해보인다.

 

두 여인이 오랜만에 만났다. 오랜 친구였다.

한 친구는 그 도시에 오래 살았고 얼마 전 부친상을 당했다. 다른 친구는 교수이고 이 도시를 사랑하고 이 도시에서 가르친다. 두 친구는 관광객들이 모르는 그 지역 사람들만 아는 멋진 식당에서 식사를 하기로 한다.

식당 사람들은 묘하게 두 사람을 다르게 대한다.

흑갈색 머리를 가진 숙녀라든가 아름다운 분이라는 호칭

차별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묘하다. 굳이 그렇게 묘사를 하며 부르는 이유는 뭘ᄁᆞ

거기까지는 모른 척 할 수 있다.

화장실을 가는데 어린 아이가 길을 막고 비켜주지 않는다

계산을 하러 갔더니 아이가 노골적으로 말한다. 이 아줌마는 예쁜데 이 아줌마는 예쁘지 않다. 못생겼다. 모두 아이의 말이니 모른 척 하라고 하지만 누구도 아이를 야단치거나 사과하게 하지 않는다. 화를 내면 더 이상해진다.

별 거 아닌데 예민하게 군다고 하거나 아이 말에 뭘 그렇게 발끈하냐고 하거나 ...

뭐 틀린 말도 아니라고 한다면 설령 그 말들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상처를 받고 불쾌하고 두렵기까지 한 상황

그러나 그 지역을 너무 잘 아는 친구는 아무렇지 않다. 들어도 듣지 않는다;

사랑했던 좋아했던 도시가 두려워진다.

이건 아예 도시괴담처럼 느껴진다.

 

친한 지인의 파티에서 낯설고 매력적인 여자를 만난다. 외국인이라 말이 서툴러서 표현이 직설적이다. 우연히 아내의 솔을 가지러 간 남자는 그 여자와 짧게 이야기를 나눈다.

별 다른 의미가 없는 그냥 낮에 여자가 겪었던 놀라움과 두려움을 직설적으로 솔직하게 낯선 자기에게 말을 하는 것에 놀라고 인상이 깊다.

그 순간을 남자는 착각을 한다. 우리 둘만의 은밀한 시간.....

다시 그 지인이 파티를 열고 남자는 그 여자를 찾지만 그 여자는 남편과 있고 이제 제법 말이 능숙하다.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닌 더 어정쩡한 관계

그리고 계속되는 우연한 만남에서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여자에게 키스를 한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다.

모든 관계들이 뚝뚝 단절되어버린다.

어디서든 남자들의 착각은 상대를 당혹하게 하고 동의 없는 신체접촉까지 이어진다.

자신의 생각을 확신하기 전에 적어도 세 번은 의심해보는 것이 안전할텐데..

남자들은 그걸 모른다.

 

낯선 도시에 이주해온 가족이 시 정책에 따라 밝은 집으로 이사한다.

작지만 아이를 키우고 화분을 키우고 좀 더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집

그러나 이웃들이 그들을 경계한다.

나가기를 원하고 나가라고 하고 시위를 한다.

그들은 머지 않아 마을이 전부 그 가족같은 사람들로 가득 찰거라고 두려워한다.

가족들은 이웃의 시위가 눈빛이 두렵다.

아이들을 안전하게 키우고 교육할 수 없다.

타인은 늘 두렵다.

어쩌면 누구든 아이를 키우고 가족을 부양하고 좀 더 행복해지고 싶고 안전하고 싶고 이웃과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일텐데.. 그 안전과 행복과 교류들이 다르게 해석된다.

내가 생각하는 그 의미들이 완전하려면 타인과 나 사이에 경계가 필요한 모양이다.

 

동네에 있는 계단을 두고 그 계단을 이용하는 여러 사람의 짧은 생각들 행동들이다.

운치있고 오래된 계단 저녁이면 원형극장처럼 사람들이 모여들기도 하고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곳 때로 젊은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조금 음침하고 다가가기 두렵게 느껴지기도 하는 곳

외국에 아이를 두고 이 나라로 와서 다른 아이들을 돌보는 어머니는 계단에서 늘 두고온 아이들을 생각한다. 계단참에 앉은 젊은이들이 자기 아들또래라 더 그렇다. 그 어머니는 낯선 외국인의 친절과 무심하게 자기 물건을 전해주는 젊은이들에게 친근함과 동시에 낯선 느낌을 받는다.

동네에 오래 살고 있는 미망인은 저녁마다 시끄러운 계단이 싫다. 예전에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유리병이 뒹굴고 깨지고.. 이러다 문제가 생기지 싶다.

낯선 사람들 이방인들이 자꾸 눈에 띄는게 싫고 두렵다.

그 마음에 경찰을 가장한 낯선이들을 믿어버리고 문을 열어주게 된다.

이제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외국인은 큰 수술을 앞두고 계단을 뛰어간다. 수술 후 다시 계단을 걷거나 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이게 마지막을지 모른다는 생각들

낯선 곳에서 정확한 의사전달이 되지 않아 그냥 막연하게 긍정해야하는 상황에서 전신마취수술이라...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게다가 정신이 들면 신체의 일부는 떼어져 있는 수술이다.

우연히 만난 친구는 말한다. 전신마취는 별게 아니다 순간 잠들고 다시 깨어나면 모든 것이 끝나있는 것 그냥 좋은 걸 생각해.. 뭐가 좋은 걸까

지금 이순간 햇살 바람 공기... 그것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나이든 작가는 글을 쓰고 방산책을 하다가 젊은 이들에게 시계와 돈을 강도당한다.

익숙한 계단에서 좀 더 오르려고 하다가...

 

집주인의 택배를 받으러 우체국에 간 소녀는 택배수취 기간이 지나 반송되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가다가 동네 소년들이 쏜 총에 기절한다. 그리고 그렇게 장난을 친 소년들은 해수욕을 가고 소녀는 총 맞은 것처럼 가슴 한 쪽이 아프다.

장난이라는 건 상대적인 건데...

 

아마 아이를 잃은 부부인 듯하다.

아내가 살던 도시로 휴양을 와서 행렬을 구경하려고 하지만 아내의 마음은 이내 변한다.

어쩌면 가족끼리 자매끼리 아이를 데리고 나온 무심한 구경꾼들을 계속 보고 행렬을 기다릴 수 없는 마음이 이해가 간다. 집에 돌아와서 잠겨진 방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는 아내 그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이 안타깝다.

 

아이를 다 키우고 우연히 학교에서 아이돌봄 일을 얻게 된 여자는

연필로 아이 글씨체로 씌여진 악랄한 쪽지를 받는다.

보기 싫다. 가라 너희 나라로 가라...

결국 그 쪽지를 잘게 찢어서 먹어버린다.

그렇게 상처는 몸에 오래 남게 된다.

 

친구의 남자친구에게 고백을 받고 마음이 설렜던 기억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은 마음

부모가 원하는 공부가 아닌 내가 끌리는 공부를 하고 세상을 향해 로마로 떠난 여자

거기서 나이 많은 의사를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엄마처럼 외국의 주부로 살고 있지만

갈망이 결정이 된다

그 여자는 무엇을 갈망하고 어떤 결정을 했을까

무엇보다

실수 한 번 하지 않고 죽는 것이 두려웠다그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실수라는 것들

순간의 선택들이 남겨 놓은 흔적들 이후 받아들여야 하는 경험들

선택과 경험은 옳고 그른 것이 없다.

누군가를 해하는 것이 아닌 이상은...

그냥 그 경험과 선택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가가 늘 중요하다.

문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바라보고 풀어나가는가

그것이 삶의 질을 결정하고

지금 나의 행복을 결정한다.

순간의 갈망에 충실했고 그때의 결정에 순순히 따랐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그녀의 삶을 응원하게 된다.

 

낯선 땅

이방인으로 옮겨심기 된 삶의 이야기를 주로 쓰는 작가가

이번에는 작정을 하고 이방인으로 사른 삶의 두려움 불안을 이야기 한다.

결국 차별과 폭력과 혐오가 따라오지 않을 수 없다.

점점 이방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누구나 낯선 땅에서는 이방인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땅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다면 누구나 어디서든 이방인 일 수 밖에 없다.

모른 사람에게 따라붇는 소문들과 경계들이 늘 구분을 만든다.

미국에서 교육받은 뱅골게 인도인인 작가는 미국에서든 로마에서든 눈에 띌 수 밖에 없겠다

그리고 그 눈에 띄는 외모에는 늘 소문과 억측들이 붙는다.

그리고 모른 언어라는 것이 또 두렵다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나에 대해 무슨 말들이 오고가는 것은 아닌지 늘 경계하고 바짝 긴장해야 한다.

긴장이 연속인 삶이 이방인의 삶이다.

노마드 인간이란... 멋있게 보이지만 결국 내 쭈리를 내가 잘 정리해서 가지고 다니는 이방인 일 뿐이다.

 

이제 줌파 라히리를 그만 읽어야 하나 고민한다.

타인과 불안에 대해 그리고 이전 세대가 원하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고집스럽고 은밀한 결심들은 충분히 보았다 싶은데

그럼에도 마지막 작품 때문에 다시 마음이 노골노골해진다.

흐르는대로 사는 것처럼 보여도 내 삶을 내가 방향을 바꿔가며 살고 있고

그 길을 내가 결정하는 이야기

그래서 후회도 미련도 없지만 자부심이나 뿌듯함도 없이 그냥 슴슴한 것...

엿같지만 너무 아름답다는 로마로 이제 곧 나도 간다.

 

아이도 이런 이방인 낯섬에 대해 충분히 경험하고 있을까

안타까우면서도 멋진 경험이 되길 바라며...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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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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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의 이야기들을 읽고 나면 나는 내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은지 명확하지도 않으면서 뭔가 내 이야기를 나도 남겨야 하지않나 하는 조급증이 든다.

 

짧은 연필을 손에 꼭 쥐고 중지에 굳은 살이 박힐만큼 손가락에 단단히 붙이고 심 끝에 침을 발라가며 꾹꾹 눌러쓴 글자들을 읽는 기분이다.

한글자도 놓쳐서는 안될 것 같은 강박이 들고 하나라도 놓쳤다가는 전체를 놓칠 수도 있겠다는 긴장감이 든다.

그리고 한편이 끝날 때 마다 몹시 힘들다.

이미 고백한 말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언젠가 어느 순간 느꼈지만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언어를 찾지 못했던 그 마음이 그때 그 막막하고 화가 나기도 했을 거고 또 부끄럽고 어딘가 도망가고 싶으면서도 절대 가면 안된다는 마음으로 내가 내 다리를 붙잡고 있는 그런 막막한 마음들을 작가는 기가 막히게 표현하고 있다.

다른 경험들이 같은 감정과 같은 고통으로 모아질 때가 있다.

당신의 경험과 나의 경험은 너무 다르고 그 상황조차 관계없지만 서로가 같은 기분을 느끼는 순간을 경험한다.

작중 인물의 경험은 나와 겹치는 부분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그 찰라의 감정은 묘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렇게 꾹꾹 눌러 쓴 6편의 이야기를 읽고 짧게 몸살을 앓는다.

긴 숨을 이제야 제대로 인식하고 내뱉는다.

읽는 동안 내가 숨을 쉬지 않았다는 것 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와 일년은 비슷한 결을 가진다.

세상에서 닮고 싶은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불가능에 가깝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지금의 선택이 맞는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지 나도 모를 때

누군가 내 앞에서 길을 만든 이가 있다는 건 큰 행운이다.

그런 누군가를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또 그만큼 실망하고 미워할 수 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에게 실망하고 나를 안쓰럽게 보는 그에게 기대고 싶다.

나를 따르는 누군가가 나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적어도 어른인 척 굴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기도 하고 애쓰 모른 척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 함께 길을 걸어간다는 건 감사하다.

누군가 내 앞에서 빛을 밝히고 있고 누군가 내 뒤에서 내 발밑을 비추면서 함께 온다는 경험은 사실 연대나 공동체... 라는 단어와 다른 뭔가 조금 더 사적이지만 좀 더 끈끈하고 좀 더 안심이 되는 상황이다.

 

서운하다 하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으니까 넌 내 뜻대로 반응해 라는 마음

서운함은 원망보다 옅고 미움보다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다.”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아프냐고 물어보지 않아서였을까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도 아프냐고 묻지 못한 것이었을까

 

저는 다희씨를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도 좋아하게 됐어요. 그건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예요

 

누군가에게 기대한다는 건 늘 스스로 경계하는 일이면서도 그래도 계속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상대에게 많이 말하고 많이 기대하면 많이 바라게 될 걸 알면서도 더 가고 싶다.

혼자만의 빛을 새어나가게 하고 서로의 눈이 부시게 하고 때로 상처를 입고 입히겠지만 서로 모습과 마음을 나누는 일을 멈추고 싶지 않음.... 그런 마음이 나에게도 있었다.

 

2,

글쓰는 일이 쉬웠다면 타고난 재주가 있어 공들이지 않고도 잘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당신은 쉽게 활기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떄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일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 또한 글쓰기라는 사실에 당신은 마음을 빼앗겼다.

글쓰기로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 행복 당신은 그걸 알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뭐든 힘든 건 사람 때문이다. 일이 힘든 건 없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시간이 해결해준다.

능숙하지 못하더라도 흉내는 낼 수 있다.

ㅁ정적 교류에 무감한 사람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맞지만 견딜 수 없는 부분은 아니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일이 적성에 맞지는 않아도 불편하거나 불쾌감은 없었다.

일에서 보람이나 어떤 숭고한 의미를 찾는데는 소질이 없다. 그것 때문에 일을 계속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것 때문에 현재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일이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는 해야지 모두는 아니어도 누군가 단 한사람 혹은 두사람에게는 닿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바램으로 하루하루 이어진다.

결국은 늘 내가 문제였다.

내가 정직하게 타인을 아니 나를 속이지 않고 하고 있는지 그냥 일상이니까 습관처럼 무심하게 반복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들이 힘이 빠지게 한다.

좋아하는데 지치게 되는 내 마음에 스스로 실망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이렇게 지치고 피하고 싶은 이 마음이 정말 좋아하는 마음이 맞았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못해서 힘든 게 아닌다. 그냥 관성처럼 되어간다는 기분

뭔가 무모하게 부질없이 힘만 든다는 생각이 지치게 만든다.

스스로 의미가 없을까봐 매너리즘에 빠질까봐 매일매일이 두려웠다.

계속 나를 의심하고 나를 다그치는 일에 지친다.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내가 그 의미에 눌리거나 도망치고 싶어지는 기분 동시에 그런 고민을 하는 나를 비웃고 싶은 마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고 기억해야하는 일이 싫은 건 아니지만

지금 내가 잘 하고 있는지 자만하고 있는 건 아닌지..

조급해져버렸지만... 결국 나는 긴장하고 준비하는 그 마음을 놓쳐버린걸까

그런 생각을 읽으며 했었드랬다.

 

3. 언니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보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샌경 썼던 것 같네 내가 뭘 좋앟는지도 잘 모르면서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썼지.

어린 시절부터 오랫도록 나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느끼며 자라서인지 나에게는 내가 결코 타인에게 호감을 살 수 없는 사람 멸시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이상한 믿음이 있었거든

그럴수록 나는 남들에게 더 많이 맞춰줬고 남들이 나를 좋아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매번 고민했어.

그렇게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남들이 하자는대로 끌려다니고 남들의 욕구를 총족시키느라 나의 욕구를 무시했지 그때 내개 느꼈던 가장 큰 두려움은 다른 사람이 내게 실망하는 거였어. 나는 절대로 절대로 누군가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어

 

있는 일을 없는 일로 두는 것 모른 척하는 것

그게 우리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오래된 습관이었어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결정적으로 힘이 되어 줄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방식이기도 하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야 다 괜찮다고 별 일 아니라고 들쑤셔 봤자 문제만 더 커질 뿐이라고

 

나의 보호자로 자처하는 일

그건 책임감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강하고 독립적인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는 방법이기도 했을거야. 그게 언니 자신이 믿는 스스ㅗ의 모습이었고 언니를 언니로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을 거야

 

누가 타인의 삶을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을까

누가 타인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의 평가나 판단이 맞을 수도 있지만 내가 아는 건 그 사람의 삶 전체가 아니라 내가 바라보고 내게 보이고 내가 보려하는 그의 부분일 뿐이다.

우리는 누구나 타인의 부분을 보고 안다고 믿는다.

동시에 울는 우리의 부분을 보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면서 그게 나라고 말한다.

그 사람이 지옥으로 걸어가고 있음을 알아도 말릴 수 없다.

바짓가랑이를 잡고 당기고 소리지르지만 그 다음 그 걸음을 멈춘 그 사람을 내가 책임 질 수 없다. 역시 걸음을 멈춘 그도 그의 삶을 다시 살아 가야 한다.

그래서 비겁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각자 가지가 결정하고 선택하는 거라고 우아하게 회패한 적이 많았다.

나는 힘이 없어서 세상이 부조리해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냥 남을 판단하고 평가하거나 나 자신을 변명하고 이유를 대는 것 그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냥 내가 하면 되는 거였다.

인정해버리고 솔직하게 시인하고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이 또 있지 않을까 궁리해보고 때로는 우기기도 하고 읍소하면서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내가 한 일을 책임지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

누군가를 탓하는 나도 참 구질구질했고 그 사람의 선택이예요 라며 단정하는 나도 참 혐오스러웠는데 꼭 그게 전부는 아니더라.

 

4. 이모 파종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은

 

돌봄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은 결국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아야 하고 누군가 역시 나에게 기대어 살아간다.

내가 누군가에게 기대었던 그 시간들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누군게 기꺼이 내게 어깨를 내어 주었음에 감사해야할 뿐이다.

그렇게 기대어 살았던 시간들이 계속되면 호의가 호구를 만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마음으로 내가 이만큼 여유를 되찾았구나 생각하는 쪽이 더 많을 것이다.

오빠의 무조건인 사랑이 나를 만들었고 나 역시 내 딸에게 무조건 적인 사랑을 주면 된다.

그냥 받을 생각없는 사랑과 관심들 .그리고 적당한 거리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게 하고 울고 싶으면 울게 하고 지치면 쉬게하거 끝없이 자게 하고 욕하고 싶으면 그 욕을 내가 대신 들어주면서 그 마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살펴주는 일

그런 것들이 돌봄이지 않을까

그렇게 돌보다가 꽃이 피고 열매맺고 씨앗을 품고 멀리멀리 떠나가게 하는 일

그리고 내가 힘빠지고 지칠 때 또다시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있는 일들

 

누군가에게 폐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

그 마음들이 본인도 힘들지만 상대를 몹시 외롭게 하기도 한다.

오빠를 외롭게 했을지도 모를 화자는 다시 딸을 외롭게 할 뻔 했고

이모는 사랑하는 조카를 가장 외롭게 하기도 했다.

사랑하니까 나랑 가까이 있으면 내 액운을 다 닮아버릴까봐 억지로 정을 떼기도 하고

나는 괜찮다고 너만 걱정하라는 대책없는 qpvaeh 있따.

 

받지 않은 사랑에 목말라하고 받은 사랑은 아무렇ㅈ 않게 팽개치기도 하는 건 상대의 마음을 당연한거라고 ,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고귀하고 완전하게 타인에게 마음이 닿는 것만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세상에 사랑이 존재하기는 할까

일상의 종종거림가 안달과 안타까움이 그냥 밥 한주걱 더 올려주는 무심함이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다르지 않을 내일을 위해 늘 종종거리는 그 마음이

더 나아지지 않아도 괜찮지만 더 나빠지지만 않으려고 그들의 그 애처러운 악착스러움이 그 마음에 그 삶에 나를 위한 마음이 섞여있음이 그게 사랑이었다.

모든 일상의 지리멸렬한 풍경 역시 사랑이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 사랑의 대상이다.

나는 지금 내 방식으로 누군가를 생각하고 사랑하고 당신 역시 그럴 것이다.

설령 그 사랑이 상대에게 닿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는 여기서 일상처럼 그 사랑을 쏘아보내고 있다. 가장 가까운 그 사람에게

(가족이 가족을 가장 모른다. 사실)

쎄상은 온통 뿌옇게 보였다.

누구도 그녀에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처음으로 막연함을 느꼈다.

막연한 두려움 막연한 슬픔 막연한 외로움 무엇 하나 손에 잡히지 않았고 그 사간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연락이 되지 않은 채 이십분을 늦은 친구에게, 내가 조금 있다 연락할게 하고 다시 전화하는 것을 잊은 애인에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깊이 상처받았다. 기약없이 기다리는 일은 꼭 버려지는 일 같아서였다. 눈물이 났지만 그 마음을 누구에게도 이해할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해서 그저 참았다.

 

네가 웃고 싶지 않을 때 웃지 않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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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장강명 지음 / 유유히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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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는 삶을 살고 싶었다.

읽고 싶을 때 마음껏 읽을 수 있고  언제든 쓸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부끄럽지만 그 속에는 그 삶이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부유한 백수 정도가 되면 이룰 수 있었을까

나는 부유한 백수가 되지 못해서 

백수지만 부유하지 않거나

여전히 부유하지 못했는데 백수조차 되지 못한 상태에서 살아왔고 살고 있다.

그럼에도 열심히 시간을 쪼개어 읽었다.

읽지 않으면 내 존재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해서 늘 조급했다.

나의 의미를 내가 스스로 재단하면서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늘 머리속으로 생각만 하고 몸은 여전히 여기 깊이 침잠해 있었다.

퇴근했으니 너무 피곤해서

집에 와서도 일이 끝나지 않고 무슨 마법의 두루마리처럼 둘둘 일이 쏟아져서

신경써야 한 대상들이 많아서

오늘은 술이 당겨서

오늘을 핸드폰을 보다보디 벌써 하루가 다 가서..

밀린 넷플릭스를 봐야 해서

인간을 담구하기 위해 나는 쏠로는 꼭 봐야 하니까

등등

핑계는 차고 넘쳤고 나는 책을 들고 하루종일 동동거리면서, 한장도 넘기지 않은 날들이 수두룩했다

물론 한자도 쓰지 않은 날들은 더 많았다.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서 쓰고 싶은 건 아니었다.

내가 쓴 이야기가 만천하에 공개된다는 건 알몸으로 사거리 횡단보도앞에 서있는 것 보다 더 수치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소소하게 쓰기는 하지만 그냥 소소 로 끝났다.


늘 장바구니에 글쓰기 책이 빠진 적이 없다.

글쓰기에 대해 몰라서 안 ㅆ는 건 아니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뭐든 첫 걸음을 떼야 시작되는 거지 준비운동만 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늘 준비운동만은 철처하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얖은 물에서 발차기만 할건데도 혹시  잠수병에 걸리는 불운이 올지 몰라서 나는 준비만 늘 준비만 철저히.. 그것도 머리속으로만.. 

점점 머리만 비대해지는 사람이 되었다.

얼핏 비치는 내 모습은 무슨 화이바를 쓴 것 마냥 머리만 둥그렇게 떠 있었다.


글쓰기 책을 읽으며 알게 된 건

작가라고 미리 준비를 많이 하고 쓰지는 않는다는 것

일단 쓰기 시작하면 쓰게 되어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어떤 의미로 이런 이야기를 선택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니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일단 쓴다는 것

어제도 썼고 오늘도 쓰고 내일도 쓸거 라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게 이야기가 연결되고 인물들이 명확해지면서 어떤 의미가 부여되는 게 아니었을까

그게 이야기이든 이야기가 아니든 일딴 써 보는 것이 먼저였다.


가끔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좋은 작가들이 있다.(미안하지만...)

내가 얻고 싶은 답들이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에 있어서일 수도 있다.

답이라기 보다 내가 듣고 싶은 말

누구나 그렇지만 나 역시 내가 듣고 싶은 말들을 듣기 원한다.

지금 나의 처지에 변명이 될 수 있는 말들  잘 하고 있다고 격려해주는 말들

그 문장이 꼭 나를 향하지는 않더라도 나도 더불어서 틈에 끼어서 그렇구나 하고 함께 얻어 ㄱㄹ릴 수 있는 말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열심히 읽으면서 나에게 위안이 되는 문구들을 모았던 것같다.

그리고 지금 그런 문구들은 차고 넘친다.


그냥 좋은 독자 아니 좋지 않아도 읽는 사람도 나쁘지는 않다.

적어도 내가 조금 덜 편협하고 세상사에 모서리가 깍여 가는 건 읽은 것들 덕분이다.

소심하고  관계가 서툴러서 많고 다양한 사람과 세상을 만나지 못했더라도

이야기 속의 인물들과 상황을 통해 세상을 알게 되고 이해한다.

그럴 수도 있구나

그럴 수도 있지

힘들었겠네

그 입장이라면 그래야만 했겠구나 ...

그렇게 세상을 넓혔다

그나마 괜찮은 사회구성원으로 행세하는 것

관계를 이어가는 것들 역시  읽은 데서 나왔다.


누가 책처럼 타인의 상황을 나에게 자세하기 이야기 해주고  조언해줄까

나는 사실 누군가와 길게 이야기를 나누면 쉽게 지쳐버려서 이야기를 나눈 시간의 두배만큼 쉬어야 하는 극 i 인간이니 말이다

그냥 힘들지 않고 지치지 않고 다양하게 사람을 만나고 공감할 능력을 키우는 것 읽는 것 이상 없다. 

물론 모두가 다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래도 조금  만두피늘이는 만큼 늘어났다고 믿는다.


이 책은 소설가가 소설가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한 구성원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소설가 역시 먹고 사는 사람이고 세금을 내고  일상을 걱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수입이 적다고 이슬과 꿈만 먹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계속 쓰고 있다


긴 휴가동안 많이 읽어야지 하고 결심해놓고 달랑 이 책 한권 읽었다.

달랑이라지만 .... 한권이라도 읽은 것에 만족하자.


동시에 조지오웰을 읽어봐야겠다는 가지가 생겼고

독서모임 그므에 대한 관심도 생겼고

일기라도 일심히 쓰자는 마음도 생겼고 

나도 북한에 대해 정말 관심이 없었구나  그냥 피상적인 생각이외에는 전혀 생각이라는 걸 해 본적이 없구나도 알았다.


알고 행하는 건 내가 할 일이고

결국 읽는 다는 건 뭔가를 알게 해주고 호기심을 갖게하는 일이다.

호기심의 결국 사람에 대한 관심이고 공감으로 뻗어간다.

궁금하다는 마음 모든 관계는 거기서 시작된다.


읽는 다는 건 몰랐던 것들에 대한 긍금증을  하나 던지는 것

그렇게 나는 한 권으로 많은 궁금한 것들이 생겼고

그걸 찾아보는 건 읽는 내가 아니라 움직이는 내가 해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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