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칼이 될 때 -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홍성수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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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표현이란  소수자에  대한 편견 또는 차별을 확산시키거나 조장하는 행위 또는 어떤 개인 집단에 대해 그들이 소수자로서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멸시 모욕 위협하거나 그들에 대한 차별 적의 폭력을 선동하는 표현 정도로 그 개념을 정의해 볼 수 있다.

 

혐오표현의 유형

차별적 괴롭힘 ....>> 편견 조장.....>>  모욕 ...>> 증오 선동

 

 

말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지만 말 한마디에 칼날이 번득이기도 한다.

무심코 던진 말일 수도 있고 심사숙고해서 어렵게 꺼낸 말일 수도 있는 입에서 나오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말들은 그저 말이 아니다

내가 가진 생각과 입장과 시각을 모두 아우르는 결과물이다

생각없이 말한다고 하지만 그 생각없음이 아예 존재하지 않은 생각이 아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속에 젖어 있는 선입관과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인 세상의 상식과 당위들이 뒤엉켜서 나의 가치관이 형성되고 그것이 알게 모르게 내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그것이 말로 글로 나올 수 밖에 없다.

아니 어쩌면 한 번 더 생각하고 의심하고 질문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저 당연하게만 받아들여 내 뱉은 말이니 생각없이 나온 말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그런 말들이 누군가에게 꽂혀 칼이 되고 독이 독이 된다.

칼에 맞은 상처나 독에 찔린 상처는 깊은 통증과 흔적을 남기고 한 번 아팠던 사람은

다음에 비슷한 말에 다시 경기를 일으키고 몸을 움츠리며 불안에 떤다.

칼이 아픈지 독이 얼마나 지독한지는 경험해 본 사람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니까

 

모든 이들은 평등한 인간이고 인간성의 존엄을 가지며 모든 이들은 정의에 관한 기초적인 권한을 가지며 모든 이들은 폭력, 배제, 모욕, 종속의 가장 지독한 형태로부터 보호받을 자격이 있음에 확신하는 것이 정의의 가장 중요한 기초인데 혐오표현은 이 기초를 붕괴시키는 것이다.

혐오표현이 공존의 조건을 파괴한다면 이것은 헌법적 가치인 인간존엄 평등 차별로 부터 자유로울 권리 연대성 등을 훼손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표현이 이러한 가치들을 파괴한다면 표현의자유가 우선시될 수 없다.

 

누군가를 어떤 가치관을 싫어할 수 있다.

그리고 싫다고 당당하게 내 의견을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모이게 되고 많아지면 내가 가진 생각은 당연한 상식이 되고  힘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말로 인해 상처입을 타인이 있다는 건 잊게 된다

아니 타인을 인식하지만 그가 그런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음 역시 당연하게 생각해버린다.

그리고 말들이 모이면서 행동이 되고 규칙이 되고 울타리가 되거나 분노가 되기도 한다.

하나의 생각이 말로 형태를 갖게 되고  모이게 되면서  움직임을 만들고 흐름을 만들어내면서 그 이면에 누군가  아파할 수 있다는 것은 잊어버린다. 아니 그게 당연하게 된다.

 

혐오표현이 잠재적 가해자들 사이에서 확산성이 있다는 점도 혐오표현의 해악을 가중시킨다. 명예 훼손이나 모욕은 특별히 전염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혐오표현은 다르다.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 혐오감정과 차별적 편견이 권력욕이나 경제적 궁핍 사회불만등과 결합되어 문제의 원인을 소수자에게 전가하고 희생양을 만들기도 하고 혐오 이데올로기가 후대에 전승되어 사회에 뿌리박히고 혐오조직의 결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저자는 혐오표현이 가지는 제한성과 배타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그것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그런 혐오표현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제도적으로 법을 만들고 강제성을 띄어서 제한하는 방법이 있지만 그럴 경우 개인의 표현의 자유와 부딪칠 수 있다. 누구나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자유말이다.

누군가가 어떤 상황이 싫다고 말하는 건 나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재갈을 물리는 것이 제도화 되어버리면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사회가 평등하지 않고 누군가 어떤 집단은 정서적으로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경험했다면 그들에게 던져지는 어떤 부정적인 말 한마디는 그저 한마디의 말이 아니다.

그건 공포일 수 있고 불안 나아가 생명까지 위태로운 무시무시한 상황일 수 있다.

사회에서 배제되고 있다고 느끼고 스스로 투명인간처럼  취급당했던 어떤 소수자에게 나는 너희들에게 동의하지 않아. 라는 말은 그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의견일뿐 아니라 하나의 폭력으로 다가올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무심한 말들이 어느 순간 하나하나 개별적인 언어라 아니라 뭉쳐진 덩어리가 되어 어디서 나를 후려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공포로 다가오고 있다.

내가 아직 혐오표현을 경험하지 않았고 왠만한 말에 상처받은 경험이 없다면

사회가 살만한 곳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그만큼 운이 좋고 소수자가 아닌 편에 있는 경우라고 생각을 해야한다. 사회는 여기저기 기울기가 다른 곳이다.

저자는 제도적인 장치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우선 사회적인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회에서 혐오표현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자꾸자꾸 말하고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혐오표현이 자리잡지 못하는 방향으로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걷잡을 수 없이 혐오표현들이 다양해지고 여기저기서 에상치 못하게 부 딪치고 충격을 주는 혐오표현들이 그렇게 정화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처럼 서로서로에게 겨눠지는 수많은 혐오들이 어떻게 다양하게 생겨났는지를 다시 돌아보게 되고 과연 개개인의 생각과 표현의 자유와 약자를 향한 (본인은 정당하다고 당당하게 믿는)혐오발언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무작정 금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고 결국은 사람 사이에서 생긴 갈등을 사랆들이 스스로 풀어야 하지 않나 하는 조금은 말랑말랑한 제안을 하지만.. 역시 생각해 볼 일이다

누군가를 향해 비난을 하고 혐오를 드러내는 일이 세상에 어떤 도움이 될까

아니 나아가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혐오하고 없어지기를 바라고 그래서 물리적인 행동을 옮기는 일이

나에게도 과연 득이 되는 일일까

그래서 사라진 누군가 약자 혹은 혐오대상이 언젠가는 내가 되지는 않을까

해결책 보다는 생각이 더 복잡해지는 책읽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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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등 뒤에서는 좋은 향기가 난다
오사 게렌발 지음, 강희진 옮김 / 우리나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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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에서 늦게 오는 아이를 마중갔다가 걸어오는 밤길

이런 저런 이야기끝에는 꼭 서운했던 일들이 튀어나온다.

동생이랑 말다툼하면 동생편만 드는 것

별 거 아닌걸로 화를 냈던 일

단 한번 먹기 싫어서 안먹겠다는데 그걸로 짜증을 내서 서운했다는 것

소소하고 시시하지만 혼자 쌓아놓기엔 억울하고 속상한 것들

아이 말을 듣다 보면 별 것도 아닌 걸가지고 그러냐고 퉁박을 주게 되고

나도 그러고 컸다는 찌질한 꼰대같은 변명만 하게 된다

그러던 중 아이가 불쑥 말했다

"엄마도 서운한게 있으면 지금 할머니한테 말해. 돌아가시고나면 말도 못할텐데.."

그럴까?

한때  상담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너무너무 우울할때 나를 들여다 보니 지금 내문제가 다 자랄때 양육문제고 그때의 애착관계의 문제라고 생각되서 억울하고 화가 나서 뭐라고 퍼붓고 싶다는 욕구를 마구마구 느낀 적이 있었다.

지금이라도 이걸 표현하지 않으면 억울할거 같고

왜 나만 내버려두고 왜 혼자 잘 할거라고 제멋대로 믿었냐고 따지고 싶었고

종가집이라는 거 다 이해해도 어떻게 그렇게 남동생이랑 알게 모르게 차별 했냐고 하고 싶었으나..

나도 아이를 키우고 동동거리고 이런저런 서운한 말을 듣고 보니

그때 우리 부모는 정말 젊었구나. 지금 이렇게 나이먹어 늙은 부모하는 나도 지혜가 없고 아량이 없어서 어린 것들과 기싸움 하고 하나라도 더 이겨먹으려고 하는데

그 파릇파릇 젊었던 우리 부모도 당연히 그랬겠구나

뭐 따지고 보면 내가 내 자식에게 잘하려고 하는 것이 아이들에겐 부담이고  불안이고 서운함인데 어쩌면 그때 당신들에게 그런 말과 행동과 선택이 최선이었던건 아닐까..

가난한 집 장남과 철없이 종부이 되어버려 다른 무게가 많았던 그 분들에게 자녀 양육이라는 거에 모든 걸 쏟아 부을 여력이 남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리고 지금 너무 늙어버린 부모에게 그렇게 조목조목 따지고 들어봤자....

기억할리 없고 기억한다고 한들 아름답게 편집된 그 기억속에 나만 결국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가며 키워놨더니  뒤통수만 친다고 더 억울해하며 방방 뛰시다 안그래도 혈압도 높으신데 쓰러지기라도 하면..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매사 생각만 많고 행동으로 옮기기엔 게으른 성정도 한몫했고

뭐 나도 무던하기만 한 사람은 아닌지라 한번씩 성질나면 팍팍 쏘아주기도 했으니 그것역시 지금 엄마가 된 입장에서 자녀가 그러는게 나름 상처라면 상천데... 서로 쎔쎔이구나 싶기도 했다.

 

 

 

만화속 주인공 제니는 나중에 제대로 된 상담사에게 "정서적 방치'로 인한 트라우마라는 진단을 받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이름붙일 수 있는 병명을 가짐으로서 제니는 조금 치유받았을 것이다.

내내 스스로 느꼈던 불안과 죄책감 수치감에 모든게 내 잘못이라고만 생각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못했고 누군가에게 수용되지도 못했던 제니는 비로소 자기 상황과 상처에 이름을 갖게 되면서 치유가 시작되었다.

 

어쩌면 아이들에게 (어른도 마찬가지지만) 감정을 억제하라고 통제하는 것은 가장 큰 폭력이고 겁박이 된다.

슬플 때 울 수 없고  즐거워서 재잘재잘 떠들어댈 수 없고 누군가에게 위로받지 못하고 공감받지 못하는 것은 큰 고통이다.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감정을 조정하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억누르는 걸 먼저 익혀야 하는 건 슬프다.

제니 부모 역시 어쩌면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된다고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누구에게 드러내지 못하고 그렇게 되는 걸 부끄럽게 여겨야 하는 상황에서 정서적 문제를 가지게 되고 결국 내가 가지지  못하고 수용받지 못한 정서는 누군가에게 나눠줄 수도 없다.

억누르는 것 감추는 것이 최선이라고 배운 부모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양육이었을 것이다.

물리적 폭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경제적 결핍도 없었고 어쩌면 남들 보기엔 조용하고 평화로운 수준있는 가족이라고 보였을 제니 가족이 속으로 그렇게 조용하게 무너지고 균열되는 지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모든 가정이 자신의 가정과 같을 거라고 믿었던 제니는 우는 친구를 안아주고 달래주고 이야기를들어주는 친구 엄마에게 이질감을 느끼고 두려워진다 울면 안되는데 울면 모두가 피해버리거나 싫어하는 짓인데 그걸 태연하게하는 친구의 행동도 이해할 수 없는데 그 친구의 엄마는그런 어리광을 피우는 친구를 안아주고 달래주고이해하다니...

혼란스러운 제니는 세상이 두려워졌을 것이다

문제를 드러내면 등을 돌리는 가족들

칭찬과 관심에 인색한부모

표현하기도 전에 누르는 것을 배우고  어쩌지 못하는 감정에 드러내고 폭발시키고 나면 남는건 개운함이아니라 수치심과 죄책감이다 내가 엄마를 울게 했고 내가 아빠를 등돌리게만들었다는 마음만 남는다타인이라면 쉽게 등돌리고 다른 사람을 찾았을  수 있지만 가족이니까 계속 함께 보고 연결되고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었기에 그렇게 조용히 무너지고 망가지는게 안타깝다.    누구에게도 사랑을 배우지 못한 제니는 조금만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게 매달리고 사랑을 구걸한다 스스로 소중하고 가치있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다

엄마가 되고 아이를  사랑하지만 내 아이를 사랑하는 것조차 죄책감이 든다.

내 속에는 사랑받지 못한 작은 아이가 아직도 관심과 사랑에 목말라하는데 내가 이렇게 내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괜찮을까?

불안과 갈등속에서 제니는 스스로 일어서기로 하고 자신 속의 자라지 못한 어린 제니를 마주한다 괜찮다고. 니가 잘못한게 아니라고 . 너는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어린 제니를 인지하고 마주하며 안아주면서 제니는 다시 성장한다.

결국 나를 돌아봐야 하는 건 나 자신뿐이라는게 슬프기도 하다.

이미 늙었고 변하지 않은 부모에게 소리쳐도 닿지 않는다. 상처는 아직도 여기 가득한데 그때 그곳에서 나를 돌봐주고 사랑해주어야 했을 대상이 나를 봐주지 않는다면 나라도 나를 마주하고 안아줄 수 밖에 없다.슬프지만 해야할 일...

 

 

가끔 아이들이 내가 어쩌지 못하는 고민들을 말하거나 나는 관심이 없는 일로 흥분해서 방방거리며 이야기할때  게다가 그런 순간이 내가 지쳤거나 뭔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상황까지 겹쳐진다면 나도  사실 ... 나 좀 내버려두고.. 입을 좀 다물었으면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아닌 척 해도 기가 막히게 티가 나는지 상대는 금방 알아차린다.

지금 내말 듣기 싫어? 내가 귀찮아?

그제사 아니라고 손사래치지만 이미 정서에 작은 기스가 나고 ...한편으론 미안하지만 한편으로는 알면 조금 봐주면안될까싶기도 하고. 아 나도 정서적 방임을 하고 있었구나.... 아차 싶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사랑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을 베풀수 있다는 말은 반박하고 싶지만 할 수없는 진리다.

내 안의 그릇이 가득 차야 누군가에게 댓가없이 나눠줄 수 있다.

상대가 아이라면  나 혼자 이만큼 주었으니 되었다. 하는 만족감은 경계할 일이다.

 

우리애는 참 순해요 참 착해요. 혼자 알아서 잘 해요

이 말이 단지 칭찬일 수는 없다는 인식

혼자 알아서 잘 하는 아이가 얼마나 외로운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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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희와 나 - 2017 제17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이기호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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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과 공감이라는 말은  어쩌면... 가장 많이 오해받는 말인지 모르겠다.

누군가 타인을 타인의 입장에서 들여다보고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사람은 쉽게 자기의 위치를 바꾸지 못한다.

내가 내 위치에서 조금 움직여 타인의 위치로 다가가려고 하지만 완벽하게 타인과 포개어질 수 없다.

이기호가 말한 것처럼 누군가를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의 상처를 바라보는 입장만 취하면서 그저 그것이 공감일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타인의 상처를 공감한다는 건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나머지 단편들 속에서도 우리는 타인의 입장을 절대 공감하지 못한다.

그저 내 자리에 그대로 서서 상대를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하지만 내가 가진 가치관과 편견을 바탕에 두고 이해할 뿐이다.

부부 형제등 가장 가까웠다고 믿는 가족사이에서도 마찬가지고

친구사이에서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일이고

사회 역시 개인을 전혀 자기 위치를 바꾸지 않고 바라볼 뿐이며 개인은 사회에 어떤 기대감도 없다

그렇게 바라보며  안타깝고 부끄럽고 두렵지만 자기 위치는 늘 그대로 고정적이다.

이해와 공감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

 결국 8편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것을 알아낼 뿐이다.

그래서 슬펐고 눈물이 났다.

무언가 굉장히 부끄럽고 초라하고 안타깝지만.. 나 역시 누군가에게 닿지 못했고 누군가 나에게 닿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이기호의 단편은 툭툭 가볍게 잽을 날린다고만 여기다가 그 가벼운 잽들이 모여서 골병들게 되는 이야기이고

권여선의 단편은 너무 아프고 두려워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을 기어이 눈앞에 들이대고 있으며

김애란의 단편에 나오는 주인공의 정서는 어쩌면 살면서 문득 등골이 서늘해지는 그 순간을 포착하고 있었으며

편해영의 단편은 피식거리다가 결국 얼굴이 벌개지는 부끄러움을 드러낸다

취향탓인지 이야기들은 들쑥날쑥하고 의외로 호감이 가는 작가가 생겼고 의외로 앞으로 작품이 실망될거같은 작가도 있다. 아주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야기는 직접 읽어볼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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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것과 내 입을 통해 내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내가 알고 말할 수 있는 것을 행하는 것 즉 삶으로 연결시키는 것 역시 다른 일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많이 듣고 많이 읽어서 아는 건 제법 모였다.

 

성인식에 대한 두차례 강연을 들으면서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성폭력이란 적극적인 동의 표시가 있지 않은 한 관계는 모두 폭력적이 된다는 것도 안다.

자발적 동의에 의한 합의가 있어야 하고 동의에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가능하며 그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 동의가 협박이나 공포 혹은 속임수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온전한 판단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거부하지않았다는 것 머뭇거렸다는 것 그리고 제발로 모텔을 따라가고 방으로 들어갔다는 것이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셨다는 것과 스킨쉽을 허용했다는 것이 섹스를 해도 된다는 동의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왜 따라갔대? 왜 그렇게 마셨대? 왜 나오지 않았대?

제발로 들어갔고 제 카드로 지불했으면 이미 동의된 관계가 아니야?

리고 말하는 것 그것 역시 폭력적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그렇게 알고 있는 일을 누군가에게 주장하고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무조건 우기는 사람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세상의 질서를 무기로 당위성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이건 미투고 저건 미투가 아니라고 침을 튀어가며 열변을 토하고 선을 긋고 꼬리표를 붙이는 사람들이 우습고 한심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지워버릴 수 없다. 그들이 맞다고 주장하고 그들 편에 서는 건 쉬운 일이니까

그래서 늘 배워야 하고 생각해야하고 의심해야 한다,

그게 쉽게 지치고 남의 옷을 걸친 것처럼 불편하지만 그럼에도 자꾸 생각하고 공부하는 게 필요한 모양이다.

 

두권의 책 내용이 사실 새로운 건 아니다.

<페미니스트 모먼트>는 페미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되었나 어떤 과정을 거치며 변화하고 의심하고 회의하면서 단단해지고 있는지를 각각의 저자 입장에서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자꾸 의심하고 질문하고 대답을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했고

가족사에서 여성의 문제가 민족적 문제와 부딪치는 갈등을 겪기도 하고

레즈비언으로서의 정체성과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거나

고딕체 페미니즘의 단단하고 견고함을 거쳐 이제 말랑해지고 수용하는 페미니즘으로 가기도 하면서 모두 고민하고 질문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제 완성된 페미니스트라고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이전 보다 덜 흔들리고 편안해졌을 뿐이라고... 그리고 지금도 역시과정이라고 말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 묻는다면 당당하게 대답을 하지 못할것이다.

다만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지혜는 한채윤이  것처럼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당당하게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아니라고는 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내 딸들은 나와 다른 환경에서 살게 하고 싶고

지금은 고민하고 생각하고 저항해야 전달되는 상식들이 그저 당연하게 통용되고 모두가 젠더의식에 예민하고 고민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는 것..

 

<처음부터 그런 건 없습니다>는 우리가 쉽게 접하는, 당위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하고 있다.

여자로 태어난다면 누구나 접하는 보통의 경험 성적인 불쾌감(폭력 추행 희롱을 포함한)

그건 하나의 폭력으로 여겨져야 함에도 누구나 겪고 있어서 예민하고 까칠하게 굴지말아야 하고 무던하게 삭혀야 하는 일들 부터   퍽하면 들리는 "여자들도 군대를 가라"는 퉁박이나 가정사니까 연인관계니까 개인적인 문제라고 치부되는 친밀한 관계의 폭력문제 그리고 나아가 젠더문제들을 어쩌면 시시콜콜하지만 그래서 더 절실하게 와 닿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멍들고 부서지고 피흘리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고 누군가의 말과 존재에 주눅들고 불안하게 서성이며 그 모든 불안의 책임을 지려고 드는 강박조차 폭력의 증거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순수하고 완벽한 피해자만을 구제하려는 지독한 이중성에 대한 말들은 예전 내가 처음 여성학을 알았던 20년도 훨씬 전과 다를게 없다는게  허망하기도 했다.

 

두번의 강의의 마지막에 강사가 질문을 했다

"혹시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있나요?"

천만에... 너무 이해되고 공감되고 수긍한다.

다만.. 내가 이렇게 이해하고 알고 있는 것을 누구에게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될 뿐이다. 내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페미니스트 엄마가 되고 페미니스트 아줌마가 되고 페미니스트 할머니가 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지금 그렇게 살고 있나.. 자꾸 돌아본다

페미니스트가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긴 쉽지 않다.저마다 가지고 있는 정의가 조금씩은 다를 수 있고 그게 당연하다

누구나 답을 가지고 있지만 누구의 답만이 정답은 아니다.

책의 말미에 쓰인 말처럼 누구나 자기의 속도로 그렇게 페미니즘으로 향하면 되는 일이다.

 

책을 통해 폭력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폭력은 직접 모욕을 주고  물리력을 행사하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장단을 맞춰주고

그저 바라보며 키득거리고

그리고 혀를 차면서 불쾌하다는 듯이 나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침묵하는 사람까지

모두가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 폭력이다. 폭력을 시작하는 사람은 하나겠지만

그 폭력을 완성하는 것은 모두이다.

침묵이 폭력을 완성하기도 한다.

생각하고 의심하고 그리고 용기내어 말하고 한걸음 나아가는 것

그건 어디서나 필요하다.

 

누군가 니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뭐냐고 한다면

 내가 너보다 더 대우받아야 겟다.

내가 너만큼은 대우받아야겠다. 가 아니라

너와 내가 함께 하고 서로 존중하자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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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3-21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 본 1년>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사람이라고 보는 급진적인 관점이다.” (323쪽)

저는 이 책을 쓴 저자가 말하는 페미니즘의 의미에 공감했습니다. 사람은 존중받을 수 있는 존재이니까요.
 
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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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프롤로그

 

지금까지 우리 사히는 공공의 역할까지 가족에게 떠넘기고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은 것은 ‘가족 총력전’이 되다시피했다. 가족 안에서 가장 약한 존재인 아이들의 자율성은 간단히 무시됐으며 가족주의의 극단이라 할 마음가짐 즉 아이를 소유물로 바라보고 토에하는 행동은 여전하다. 가족 바깥의 사람들에 대한 배척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화됐다. 그러는 동안 국가는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저만치 물러나 각 가족의 ‘각자도생’만 부추겼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 채택 10주년 기념 엘레노어 루즈벨트의 연설중에

“보편적 인권은 어디에서 시작할까요? 작은 곳 그리고 아주 rkRKdns 곳에서부터입니다. 아주 가깝고 아주 작아서 그 곳은 어떤 세계지도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곳은 각각의 사람들의 세계입니다. ...(중략) ... 작은 곳에서부터 인권을 지키려는 모두의 노력이 없다면 보다 큰 세계에서의 발전도 헛될 것입니다.

 

가족안에서 가장 약한 사람의 아주 작은 권리조차 보장되지 않는다면 더 큰 세계에서 발전하려는 노력도 헛된 일이 될 것이다. 아동 인권의 관점에서 가족과 공공성을 생각해보려는 이 책의 시도가 우리 주변의 작은 곳에서부터 변화를 만들려는 흐름에 함께 할 수 있다면 더 바랄것이 없겠다

 

1. 가족은 정말 울타리인가

내것인 너를 위한 친밀한 폭력. 체벌

 

인류학자 김현경은 <사람. 장소.환대>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체벌은 갖가지 이유로 행해질 수 있고 거기에 따라 붙는 훈계도 그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표면상의 다양성을 넘어서 체벌은 언제나 단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한다. 바로 체벌이 언제라도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너의 몸은 온전한 너의 것이 아니며 나는 언제든 너에게 손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체벌에 동의한다는 것은 이 가르침을 t n용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러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 모욕당하는 자가 모요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가 된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나는 언제든 너의 몸에 손댈수 있다는 가르침, 과거 여성에 대한 폭력도 같은 메시지를 깔고 있었다. 체벌을 비롯한 친밀한 관계에 있는 타인에 대한 반복적 폭력은 모두 같은 메시지를 보낸다. 나느 sdjs제든 당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권위주의적 메시지 당신의 존재할 권리를 결정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때리는 사람인 나라는 주장.그렇게 힘으로 상대를 침묵시키고 상대의 목소리를 부정하고 때리는 사람의 목소리르 상대안에 심으려는 시도다.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폭력과 사랑을 연관짓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사랑하면 신체적으로 우월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힘으로 억눌러도 괜찮다고 가르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랑하고 돌보는 관계에서도 더 힘이 세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은 문제해결방법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체벌은 아이들에게 ‘네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사람을 때려도 괜찮다’ '공격적이어도 괜찮다‘고 가르친다.

데이트 폭력 체벌 등 친밀한 관계에서 사랑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은 맞는 사람에게 알게 모르게 ‘내가 맞을 짓을 했다’고 믿도록 강요한다. 맞는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맞았다고 스스로를 낮추고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그 사회를 말해준다.

 

성인간의 관계에서 상대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는 행위는 이유가 무엇이든 형사적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보호와 교양 목적의 징계’라는 말로 상대에게 이도적인 해를 끼쳐도 돈다고 법이 허용하는 유일한 대상이 아이들이다. 아이도 한 개인으로서 자율적인 존재이고 어른처럼 생명과 신체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이를 법의 언어로 반영하지 모할 이유가 없다.

 

 

과보호 방임.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할 때 생기는 일

 

‘일가족 동반자살’이라는 불가능성에 대하여

동반자살이라는 용어를 쓰지 말아야 할 이유

#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은 명백한 살인과 아동 인권침해를 온정의 대상으로 만들고 부모가 자기 뜻대로 자녀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퍼뜨립니다

# 동반자삭이라는 표현은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라는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비극으로 잘못 인식하도록 만듭니다 부모에 의한 자녀 살해가 지속되는 이유는 부모가 자녀를 소유물로 생각 할 뿐 아니라 이웃과 사회에 대한 불신이 뿌리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사회가 고민해야할 일은 안전망이 제대로 갖춰지고 작동하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일입니다.

 

우리 사회엔 가족을 운명공동체로 보고 부모는 자녀에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는 강박이 지나치게 뿌리 깊다. 부모는 항상 모든 것을 바쳐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뒷바라지 해야하고 만약 그렇지 못하면 부모 자격도 없다는 식의 강박관념 말이다. 자신과 자녀의자아를 분리하지 못하고 내 아이들의인생이 따로 있다고 바라보는 인식이 희박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을 끝낼 때 자식의 생명을 거두는 것이 끝까지 책임을 지는 부모의 태도라고 생각해버리기 십상이다. 이를 ‘가족동반자살’이라는 온정적 표현으로 부르고 ‘오주하면...’이라고 관용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한국의 가족은 압축적 근대화가 낳은 온갖 부작용의 해결사 역할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오랜기간동안 복지를 가족이 해결해왔다. 정부가 압축적 근대화 과정 내내 유지한 기본 기조는‘ 선 성장 후 분배’ 정책이었고 그 결과 복지와 교육 의료 부양등 거의 모든 사회문제를 가족에게 떠념겼다.

사회는 급격히 변화하는데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가족이 똘똘 뭉쳐야 한다. 집단주의의 약화를 불러오기 마련인 근대화 과정에서 거꾸로 직곅족 중심의 배타적인 가족주의는 더 강력해졌다.

 

친권은 권리가 아니다.

<유엔아동권리협약>에는 더 이상 집이 안전한 곳에 되지 못할 경우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이는 원래 태어난 가정에서 친부모와 함RP 자랄 수 있는 권리를 치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친부모가 되레 아이에게 해로울 때 붐와 아이를 분리하는 것이 아이의 안전과 삶의 질을 위해 더 낫다고 판단한할 경우 국가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제도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국가의 아동보호제도이다. 하지만 한국의 아동보호 제도는 지나치게 강력한 친권에 부딪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컨대 부모에게 학대를 당해 긴급보호조치로 집을 떠나 시설에서 살게 된 아이의 경우 구각에서 수급자로 지정 받아 의복비 식비등 필요한 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다. 문제는 수급비를 받기 위한 통장을 개설해야 하는데 미성년자인 아이의 명의로 통장을 만들려면 친권자인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아이를 학대해 결국 격리를 당하기까지 이른 부모가 통장 개설에 순순히 동의할 리가 없다. 동의하지 않거나 동의를 전제로 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계좌를 만든뒤 아이명의 계좌에서 마음대로 돈을 인출해가기도 하는데 친권자이므로 그를 막을 방법이 없다

친권은 자녀를 보호하고 교양할 권리이자 의무이다.

 

2. 한국에서 ‘비정상’가족으로 산다는 것

왜 미혼모만 있고 미혼부는 없을까

 

임신단계에서 미혼 임산부에게 미혼모가 받을 수 있는 지원 관련 정책등으ㅢ 정보를 제공하고 비밀을 보장해주며 상담하는 콜센타같은 지원이 절실한데 아직까지는 그런 제도가 없다.

일자리를 얻지 못한 저소득 미혼모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어떨까? 정부는 아이(만 13세 미만)를 홀로 키우는 저소득 미혼모에게 월 12만원(엄마가 청소년일 경우 17만원)의 양육비를 준다. 만약 미혼보가 직접 키우기를 포기하고 아이를 다른 양육시스템으로 보낸다고 해보자 입양을 보낼 경우 입양가정은 입양 수수로 270만원을 지원받고 매달 15만원(14세 미만 )의 양육수당과 20만원의 심리치료비 100%의료지원을 받는다. 또는 위탁가정이나 시설에 보낸다고 해보자. 2015년 보건복지부의 <대한 양육제도 양육비실태조사연구>에 따르면 위탁 가정은 월 66만7000원 공동 생활가정은 128만원 양육 시설은 166만원의 지원금을 정부로부터 받는다.

시설의 경우 종사자 인건비 일부가 포함되므로 단순 동등비교는 할 수 없지만 어떤 경우든 미혼모가 아이를 버리는 것 보다 직접 키울 때 정부의 지원이 가장 적은 것은 사실이다. 만약 미혼모가 기초수급자가 된다면 이 혜택도 사라진다. 생계 급여와 아동양육비는 중복해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혼모를 위한 제도적 지원을 강조하는 이유는 핏줄때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친엄마의 양육이 더 좋고 입양이 더 좋고를 떠나서 여성이 출산과 양육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회구성원들처럼 미혼모에게도 자신과 아이에게 가장 좋은 방법을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마룬인 다양한 가족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차별없이 다양한 가족이 공존할 수 있도록 결혼을 둘러싼 법재도 개선 여성의 양육권과 이의 인권등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

 

입양.. 정상가족으로 수출되는 아가들

 

국내입양을 활성화하고 해외 입양을 그만두겠다고 했다가 뒤집는 상황이 거듭되던 무한루프이면의 일관된 흐름은 미혼모가 아이의 양육을 포기하게끔 만드는 상황이 고착되어버렸다는 것이다 1070년대에 미혼모의 자녀가 입양의 주류를 차지하기 시작하고 1980년대 입양이 산업화하면서 미혼모가 아이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구조가 정착되었다. 미혼모는 부도덕한 여성으로 이미지화 되면서 평범한 어머니일 수 있는 기회에서 배제되었다

이 바탕에는 ‘결혼한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결합만이 가족이며 이 틀을 벗어나면 해외든 국내든 입양을 통해서 아이에게‘제대로 된 가족을 찾아주는 게 더 좋다느 sdlstlr 즉 강력한 정상가족이데올로기가 깔려있다. 사회규범을 일탈한 미혼모의 아이를 입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녀의 부재를 채우고 보내는 입장에서는 부모의 부재를 채움으로써 정상가족의 원칙을 완성하려는 의도에서 한치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 피부색이 다른 가족이 산다는 것의 의미 ... 이주가정의 아이들의 차별문제

 

3. 누가 정상가족과 비정상가족을 규정하나

 

한국에서 가족은 왜 이렇게 중요해졌을까

사실 핵가족은 근대의발명품이 아니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달리 한국의 전근대 사회에서도 확대가족 대가족은 드문 현상이었고 부부 중심의 핵가족이 보편적이었다고 한다. 수명이 짧아 3대 이상이 공존하는게 드문일이었고 확대가족 유지에 필요한 경제력을 갖추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줄곧 핵가족 제제였는데도 핵가족을 이상화했다가 10년도 지나지 않아 비판하는 담론이 출몰했던 이유는 뭘까

이는 구각의 통치 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다.

경제발전 과정에서 노동력 특히 값싼 저임금 노동력이 필요했던 국가는 핵가족을 찬양하면서 농촌 자녀의 도시 이주를 장려하고 여성의 노동시장 유입 산아제한등을 골라로 한 가족계획을 장려했다. 그러다가 산업화의 진전으로 농촌의 공동화 및 노령화가 문제가 되고 노인 부양의 필요가 제기되자 이번에는 핵가족을 비판하고 전통적 가족 부양의 윤리를 찬양했던 것이다. 상반된 두 사례의 공통점은 국가가 아무런 사회적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노인 부양의 문제를 비롯한 사회무네 원일을 핵가족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바람직한 가족상을 내세우며 국가가 가족을 이용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사회정책이 가족단위로 설계되는 방식이 지속되면 가족을 형성치 못한 개인, 가족에게 충실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개인에게는 사회가 또다시 불이익을 가하는 셈이 된다.

또한 소득보장 교육 돌봄의 양과 질등이 가족에게 의존적일 경우 계층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서비스의 질이 달라지므로 양극화가 심화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양질의 교육과 돌봄 서비스가 충분치 않은 상황ㅇ서 가족에게 주어진 자유선택이란 곧 개별 경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양극화된 가족 삶의 최대 피해자는 아이들이다. 사교육 과잉 현상이 보여주듯 중산층은 계층의 하락을 하지않으려는 몸부림으로 나서고 저소득층은 방임상태로 인한 돌봄 공백상태에 빠지고 이 스트레스 해소 대상은 아이들이 된다.

 

개인 아닌 가족단위로 사다리에 오르는 사회

 

왜 가족주의는 회사 학교 사회로까지 퍼졌나

가게등에서의 호칭 어머님 이모님

가족같은 분위기 가족같은 회사

우리는 00 가족입니다.

가족을 강조하는 것과 동시에 내 가족 내 부류와 다른 타인은 배척하고 금을 그어버린다.

임대주택단지의 울타리 혐오시설의 거부

 

4. 가족이 그렇게 문제라면

부모체벌 금지법은 사회를 어떻게 바꿀까

 

한국은 왜 가족안에서의 개별성 가족 밖에서의 다양성이 존중받지 못하는가?

-가족의 생활을 지원하는 공공의 역할부재 때문이다

사회적 안전망 없이 사적인 안전망이 가족에게 모든 보호를 떠넘기고 당장의 생존이 목표인 가족이 구성원의 개별성을 고려할 여유가 없다.

-치열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가족단위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자기 집단만 중요시 하는 가족주의가 사회로 확대되면서 배타적인 태도가 굳어졌고 타인과 사회에 대한 신뢰가 사라졌다.

 

스웨덴의 부모체벌 금지법이 있다

 

가족내에서 양육을 할 때 폭력을 사용하는 행위를 국가가 금지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가족의 탈 사생활화를 요구하는 조치라고 할 수 있다. 가족내에서 이러지느 sgoddnl들이 전부 사행활은 아니게 된 것이다,

가족이 사생활영역으로 닫힌 공간 관계가 되어버리면 가족은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공간과 관계인 동시에 가장 위험한 공간과 관계가 될 수도 있다. 폭력은 일상안아세 가정안에서 이루어진다.

부모 체벌금지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체벌을 금지하는 법의 목적은 단순하다. 병백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선명한 메시지를 내보내는 것 폭력과 비폭력 사이에서 아주 단순하고 선명한 줄을 긋는 것이다. 어른의 책무는 아이에게 폭력이나 협박 위협에 기대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며 정부의 책무는 비폭력적으로 아이를 키우는 게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려면 체벌을 금지하는 법과 함께 부모가 필요로 하는 지원을 저우가 제공하고 정부와 사회가 합심하여 부모가 아이들에게 좋은 역할 모델이 될만한 시간과 에너지를 갖기 위해 필요한 환경을 체게적으로 조성해야한다.

 

삶은 개인적으로 해결은 집단적으로

스웨덴식 사랑 이론

이 이론은 진정한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놓이지 않은 개인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자율적익 평등한 개개인 사이에서만 사랑과 우정같은 인간적 교류가 이루어진다. 심지어 부모와 자녀관계에서도 서로 의존적이고 귤욕을 강요하는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한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바라본다. 국가는 이런 굴욕감에서 개인을 해방시킬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함께 살기 가족의 짐을 사회로

아이의 권리인정과 부모의 보호가 평화롭게 공존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아이의 권리와 부모의 권리가 상충하고 부모가 아이의 안녕을 심각하게 침해할 때 선을 긋는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다. <유엔 아동권리협약>은 이 책임이 국가 공적 권력에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적 권력이 개입할 때의 기준은 아동 최선의 이익의 원칙이다. 즉 지금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고려하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아이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지닌 사람이 아이에게 필요한 보호와 배려의 의무를 지킬 숭 lT도록 국가는 모든 입법적 행정적 조치를 취하라고 주문한다.

즉 아이 개인과 부몬 국가의 관계에서 국가는 가족의 외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는 아이의 인권이 심각하게 침해받는 상항이 되었을 때는 그 관계에 아주 사적인 부모 자녀 관게에 개입할 당사자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해서는 안될 짓을 정하는 게 먼저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상상해보는 공감의 감수성을 높이려는 노력은 물론 필요하지만 이를 개인의 도덕적 과제 감성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폭을 넓히려는 교육이 공교육에 제도적으로 포함되어야 하고 ,<차별금지법> <이주아동 권리보장 기본법>등 이 제정되어야 한다. 그게 우리를 같이 살아가게 해주는 공감의 제도화이다. 역지사지하고 공감하는 능력보다 사적 관계에서는 예의 공적관계에선 정책과 제도가 우리의 공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더 인간적인 장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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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슬퍼지는 게 싫어서 보지 않으려다 중간부터 보게된 드라마가 <마더> 였다.

아픈 아이를 보듬는 건 결국 모성이라고 진부하고 일방적인 타령을 보게 될까봐 기겁했었다 그러나 중간부터 본 드라마는 드라마의 완성도 때문인지 개인적이지만 보편적인 관심때문인지 계속 보게 만든다.

결국 가정폭력은 모두에게 상처를 남기고 또다른 폭력으로 대물림 된다.

기억에서 봉인해버린 폭력과 버림받았다근 상처 그래서 어떤 사랑앞에서도 외롭고 불안했을 수진은 자기와 비슷한 혜나에게 감정 이입이 되는 건 당연하다.

혜나는 또다른 존재이면서 동시에 수진의 내면아이였으니까

폭력의 피해자이고 버림받은 아이를 이젠 수진이 손을 잡아준다.

그건 혜나에 대한 공감이며 동시에 아직도 8살에 머물러 자라지 못한 수진에 대한 돌봄이다. 스스로 직면하지 않으면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동안 피하기만 하고 상처에 허우적거리기만 했던 수진은 이제 혜나를 통해 혜나를 윤복으로 키우면서 스스로와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아직 어려서 스스로를 바라볼 용기가 남은 윤복은 그 용기를 수진에게 나눠준다.

수진의 마음을 공감하고 자기 때문에 수진이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는 걸 보지 못해 스스로 물러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둘은 서로의 내면 아이가 되고 미래의 어른이 되어준다.

그리고 또다른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는 설악이 있다.

아마 보여지지 않았지만 가족 불화가 있었고 불안한 엄마가 있었고 아직 생존을 위해 어른에게 기대야 하는 어린 설악은 착한 아이가 되어야 했다.

울지 않고 떠들지 않고 깨끗한 아이가 되는 것

그래야 엄마가 떠나지 않고 나에게 착한 엄마로 남아줄거라는 막연하고 가느다란 희망을 붙들려고 하지만 그건 처참하게 깨져버렸다. 자살 중에 가장 지독한 모습을 보인다는 목 매다는 방법으로 죽은 엄마를 설악이 가장 먼저 발견한다.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아이들은 작은 다툼과 불화에서 스스로 책망하고 자기에게서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내가 착한 아이였다면 내가 조금만 똑똑했다면 내가 없었더라면...

모든 폭력의 피해자가 폭력을 쓰는괴물이 되는 건 아니다.

설악의 상황은 공감가능하고 이해가능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린건 설악의 책임이 크다.

세상의 모든 엄마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다 죽일 수는 없으니까

어쩌면 죽은 설악의 엄마도 순간순간 설악 때문에 웃고 설악 때문에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찰라도 있었을 텐데... 설악은 그 찰라의 순간을 경험하지 못했다. 아니 더 큰 고통으로 지워버렸을 것이다.

여기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은 두 여자가 있다.

너무 어려서 아이를 낳아 예뻐하지만 키울수 없던 엄마는 잘대해주는 남자를 만나지만 결국 폭력앞에 굴복하고 아이를 버리고 살인자가 되고

또 다른 어린 엄마는 아이가 이쁘지 않아서 울기만 해서 남자가 떠났다고 믿으며 모든 원망을 아이에게 투사한다. 예쁠때도 물론 있고 의지도 되지만 어린 엄마의 삶은 쉽지 않다

누구든 손을 내밀고 웃어만 준다면 그대로 기대버리고 싶을만큼 아슬아슬하고 아프다.

그래서 엉뚱한 선택을 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품는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결국 사회적 문제의 근원은 가족이다.

어떤 가족을 경험하는가는 살아가는 나머지를 모두 좌우한다.

경험과 기억은 누가 가져갈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오롯한 내것이다.

그것이 나를 만들고 나를 살게 하고 내가 선택하게 한다.

그렇다면 가족은 무조건 절대 선이어야 하고 모든 윤리의 기준이되어야 하나?

오로지 가족만...

그건 가족에게 너무 가혹하다.

l그런 안전망 하나 없이 사회에 던져지면 결국 자영이 되고 수진의 엄마가 되고 설악이 된다.

모든 게 가족 탓이고 가족 때문일 수는 없다

엄마의 양육이 아이를 결정하고 아이의 삶을 바꾸지 못한다.

엄마는 때로 강한 용기를 내기도 하지만 그 역시 어딘가 기대고 싶은 아이이가도 하다.

엄마에게 아빠에게 그리고 아이에게 힘을 줄 안전망이 필요하다

감성적인 공감 이해 이입이 아니라 예의있게 신중하고 정중하게 그 순간 순간 필요한 것을 내밀 수 있는 제도와 관심이 필요하다.

가족은 깨질 수 있다. 깨져도 된다.

가정폭력 특례법이 결국은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특수목적이라는게 참 유감이다.

누군가 모르는 낯선이에게 가한 폭행은 형사처벌이 가능하지만

친밀한 가족관계의 폭행은 상담과 조언과 충고로 다시 억지로 봉합된다.

가족끼리 그러면 안된다. 가정을 지켜야지..

이미 깨지고 상처만 남은 가정을 지키라니 그런 개뼈다귀같은 소리가 있나

가해자가 다리뻣고 익숙한 공간에서 쳐 자는 동안

피해자는 혼자 모든 악조건을 감수하고 몸을 뉘일 안전처를 찾아 해맨다.

늘 친밀한 관계에서는 그리고 대부분의 관계에서 가장 약한 존재가 가장 고통 받는다.

     

결혼제도에 속하지 않고 아이를 낳읗 수도 있다

그것이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을 일일 수도 있겠지만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면 그럴 수 있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일이 힘들 수 있다. 아이를 키우는 일에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고 독박육아라는 말도 과장이 아니다.

엄마의 모성의 위대함이 스스로 아이를 양육할 수는 없다.

돈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고 제도적 뒷바침이 필요하다.

가정내 갈등이 생길 수 있다.

사람이 악해서일 수도 있고 상황에 몰리다 보면 살기위해서 일 수도 있고 잘못된 양육으로 잘못된 도식이 성립되어 생길 수도 있다

가족일은 사적인 일이니 알아새 처리하라는 말은 너무 무책임하다.

누군가 죽거나 만신창이가 되어야 관심을 가진다는 건 너무 잔인하다.

남편이 아내를 때릴 수도 있지 부모가 자식을 때릴 수도 있지

가족끼리 그럴 수도 있지

다른 사람은 다 안그런데 참 유별나게 굴기는...

그런 말이 주는 2차 피해는 지금 말하지 않기로 한다.'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우고  혹은 아이에게 최선이 내가 키우는 것보다 입양이나 시설에 보내는 것이 옳다고 선택할 수도 있고 가족간에 갈등이나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받쳐줄 시스템은 너무나 없다.

자연스럽게 태어나면 위대한 모성이 키우고 아비가 되면 처자식 책임지고 먹여살리는 건 당연한거고 도덕적으로 일탈까지 사회가 다 받아줄 수는 없고 가족의 문제에 간섭하는 건 아니라고 접잖은 척 뒤로 빠져야 하고... 이건 그저 사회 안전망을 가지지못한 변명에 지나지 않더라

어떤 체게적인 뒷받침이 있었다면

자영은 조금더 긍정적으로 혜나를 돌봤을 수 있고

잘못된 선택으로 매를 맏던 수진의 생모는 사회의 도움으로 전과대신 다른 자립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어린 설악도 괴물이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이진이 자기 가족만 아은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사회 안전망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결국 가장 기초적인 교육과 양육은 가정에서 책임질 수 밖에 없고 가족이 그만큼 중요한 사회적 단위이지만 세상이 달라지고 다양해지는 만큼 문제도 제각각 벌어지는 현대 사회에서 가족의 뒤를 버텨주는 울타리가 될 사회적 제도는 무엇보다 절실하다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일은 필요하다. 아니 중요하다. 그러나 그게 그저 그렇게 끝맺음이 된다면 그렇게 반복될뿐이다

그건 결국 문제를 개개인에게 맡겨버리는 무책임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바뀌지않는다

그래서 이 책 말미에 저자가 말한 개개인이 가져야할 예의와 사회적인 정책과 제도가 더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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