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들 - 장강명 연작소설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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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말해야 할까

정말 우리가 싸워야할 대상은 어디에도 없다.

뚱하고 하는 일 없는 아르바이트생 혜미를 잘라야 하는 건 중간간부의 몫이다.

위에 눈치를 보고 불쌍하고 가난한 알바생의 눈치도 봐야 한다.

누구 하나 똑 부러지게 그녀에게 지시하지 않는다. 그냥 슬쩍 뉘앙스만 뿌릴 뿐이다.

가운데서 전전긍긍하는 그녀는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다.

그냥 그가 선 위치에서 보이는대로 그리고 자기하나 방어하려는 작은 의도하나로 선하게 생각하려는 마음을 자꾸 모질게 먹을 뿐이다.

혜미는 그냥 법대로 자기 권리를 물어보고 요구했을 뿐인데 그걸 지키지 않거나 모르쇠로 일관하는 건 분명 거대한 조직이고 책임자들인데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그냥 중간간부인 그녀만 혼자 죄책감을 느꼈다가 배신감을 느꼈다가 점점 마모되어간다.

 

모두가 좋은 사람이고 제대로 일하고 싶을 뿐이다.

정해진 매뉴얼대로 정해진 규칙대로

당일 배송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당일 배송이 되어야 하고 고장나지 않은 기기는 고장난게 아니라고 꼭 말을 해야 하고 고객을 납득 시켜야 한다. 고객조차 민망하고 부담스러운 배웅은 그대로 행해져야 한다. 그걸 규칙이랍시고 만든 사람들은 데체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을까? 현장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 현장을 관리하고 좌지우지 하는 사람들은 매뉴얼을 만들고 인건비 절감을 위해 만능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하는 현장 사람들은 일도 하고 고객도 맞고 매뉴얼도 따라야 한다. 다들 선하다. 화가 나고 억울하지만 내가 화를 내며 감정을 터뜨려야 할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그래서 쉽게 화를 낼 수도 없다.

어디선가 입장이 바뀌면 내가 무의미한 매뉴얼을 읋어가며 누군가의 분통을 터뜨릴 것이고 그리고 그 사람이 터져버린다면 그 감정 찌꺼기를 고스란히 내가 뒤집어써야 한다. 우리는 어디서든 그 상대의 입장이 될 수 있다. 매뉴얼이란 규칙이란 그걸 지키는 사람은 전혀 참여할 수 없다. 다만 부리는 사람 마음이다.

 

 

같은 동네에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빵집들은 제살깍아먹기에 여념없다. 뻔히 아는 사실이지만 누구도 먼저 멈출 수 없다. 먼저 멈추는 쪽이 지는 것이고 지는 건 죽는 것이다.

함께 공생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작은 내 이익과 손실계산이 늘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아니 떠나 보낼 수 없다. 여차하면 작은 손실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우리 동네에는 빵집이 몇 개가 있을까 세어봤다. 다들 장사는 잘 되는지.... 그래도 그들은 지금도 웃으며 고객을 맞이 하고 있다. 어두운 바다 오징어잡이 배처럼 불을 밝히고

 

 

경력직은 경력을 가진 사람들을 뽑으려고 하는데 아무도 뽑아주지 않으면 경력을 가질 수도 없다. 그래서 뭐든 해보려고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시도하고 경험하면 닳고 닳아서 신선한 맛이 없다고 또다시 탈락시킨다.

어떤 일이든 쉽게 되는 건 하나도 없다. 그런데 누군가는 너무 쉽게 가지기도 한다.

공감없는 이해는 잔인하고 이해없는 공감은 공허하다.

 

마음을 주고 공감하다보면 아무것도 내 손에 남는게 없는 허탈감이 들고 하나하나 따지고 들자면 내가 왜 이렇게 삭막해지나 싶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등을 두드리며 괜찮아 괜찮아 하는 말은 공염불과 다르지 않고 뭐든 잘잘못을 따지고 하나하나 짚어 나가는 그 똑똑함에 섬뜩하게 살의를 느낀다.

뭐든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쉽게 판단할 수 없고 쉽게 마음을 나눌 수도 없다. 그리고 삶은 점점 사람을 소외시킨다.

산업이 이제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부분보다 사람을 배제하고 기계화되고 조직화되어 사람도 작은 부품이고 하나의 과정으로 대상화되어버린다.

나는 사람인데 너도 사람인데

서로 잘 살아보려고 하는 일인데

아니 그냥 평범하게 행복해지고 싶을 뿐인데

너무 사는게 힘들고 두렵다.

 

기사의 글은 그저 머리를 스치고 지워지지만 이렇게 이야기로 만들어진 글을 마음에 박힌다.

내가 이해를 했든 경험을 했든 이건 타인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힘을 가진다.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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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가능하다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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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예전과 같지 않다라는 말을 쉽게 한다.

예전과 같지 않을 경험들은 쉽게 오지 않는다.

그건 삶이 흔들리는 커다란 충격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사소한 어떤 만남이거나 깨달음이거나 스치듯 지나갔던 경험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간이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

이 책의 인물들은 그런 순간을 겪는다.

대단한 사건은 아니다.

그냥 스쳐지날 순간들에서 문득 든 생각들이 그렇게 통찰을 준다.

어쩌면 그들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냥 그렇게 순간 느끼고 말아도 그만인 일일테니까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들의 연속이기도 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나를 끌어당길지는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니까

 

삶의 진정한 비극은 우리 자신의 상처 때문에 타인의 상처를 들여다볼 눈을 가리고 자신의 상처에 매몰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이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우리의 고통을 이해해주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타인의 고통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가까운 가족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가까운 사이에서 주고받은 상처들은 더욱 사람을 단단하게 닫게 만든다. 믿었던 만큼 내 편이라고 내가 다 안다고 생각했던 만큼 나의 기대와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받은 충격은 대단하다.

어머니가 어느 순간 가족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택하고 떠나버렸던 순간의 공포 그건 나이를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그 나이가 되고 내가 그런 삶을 살아가면서 어쩌면 그건 그럴 수도 있다고 인정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런 인정을 해버리는 자신을 말리고도 싶다. 내가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건 그 가까운 타인- 엄마가 준 상실과 빈 자리때문이라는 것이 너무 선명하기 때문이다. (미시시피 메리)

오랫동안 믿어왔고 의심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또 다른 실체를 알게 된 순간의 충격은 그 존재를 부정하고 싶어지며 내가 봤던 것 믿었던 것들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눈의 빛에 눈멀다)

서로 다른 길을 갔던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여 과거를 기억하는 때 서로의 기억이 다르고 서로의 기억이 모여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느끼는 전율같은 것. 그것은 기쁨일 수도 있고 슬픔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제는 이해가 되는 타인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는 자기 스스로의 말랑말랑해진 감정선에 감동할지도 모른다. (동생)

전쟁의 경험으로 순수에 대한 회의를 느끼며 동시에 그것을 갈망하는 남자는 낯설지만 따뜻하고 안전하다고 믿는 민박집에서 예상치 못한 위로를 받기도 한다, (엄지치기 이론)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성장한 남매는 이제 안정되었다. 오빠는 부유한 사업가로 일에서 가정에서 성공했고 동생은 안정된 민박집을 운영하며 타인에게 위로를 주고 있다. 지금은 안정된 그 남매가 가난한 시절 쓰레기통을 뒤지며 음식을 구걸하는 기억을 간직하고 지금의 부유함이 주는 죄책감과 미안함을 지니고 있는 한 그들은 타인에 대한 마음을 가진 따뜻한 사람일 수 있다. (도티의 민박집/ 선물)

내가 평생 믿어왔던 것 그것이 하늘의 계시였다고 믿었던 어떤 신념. 그 창을 통해 세상을 보았던 어떤 믿음이 어느 순간 깨질 때가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살아온 나의 삶은 어떻게 될까? 부정해야만 할까? 하지만 현명한 아내는 그걸 굳이 깨어야 할까라고 반문한다.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일은 순간이지만 그걸 다시 되돌리는 것은 어쩌면 나의 마음일지 모르겠다. (계시)

아무도 내색하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나 깊은 곳에 상처를 숨기고 살고 있을지 모른다. 나만 그런것도 아닌데 다들 입을 닫고 있으니 알 수 없고 내 상처에 침잠할 수밖에. 나의 이웃들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면 그들에게도 고통과 상처가 깊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것만으로 살아갈 일이 괜찮아질 수도 있겠다. 그건 누군가보다 비교우위를 갖는 속물적 마음일 수도 있지만 모두가 다르지 않다는 엉뚱한 연대감일 수도 있겠다 (풍차)

    

당신은 누구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나요? 왜 그랬을까요?

당신 속의 상처는 어떤 건가요? 

하나를 고르기는 참 쉽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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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상처는 남의 상처일 뿐이다.

타인의 아픔을 통해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지만 그냥 비슷한 모양새일뿐 같은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다 비슷하고 같아서 그게 그거 같아보일 수도 있지만 자기에겐 자기의 아픔이 유일하고 강하고 독해서 다른 것은 비교할 수 없다. 상처의 크기를 비교할 수 없다. 우열을 따질 수도 없다. 그럴 필요도 없고.

내가 이런 책을 읽는 이유는 다른 누군가의 상처에서 나와 비슷한 무언가를 찾는 것이 아니다.

그냥 타인의 아픔에 대해 내가 알아갈 뿐이다.

힘들었겠구나. 그럴 수도 있겠구나. 도무지 상상할 수 없지만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는 어쩌면 공감을 훈련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세상의 다양한 사람을 간접 경험하기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모르고 넘어가는 것보다 낫지 않는 위안한다.

내가 몰라서 없는 일이라고 치부해서 이해할 수 없어 무시하거나 이상한 사람이라고 선을 긋는 일은 없도록 ... 가능한한 요만큼이라도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다.

 

 

어릴 적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가 손타지 않은 아이.. 라는 말이었다.

능력이 뛰어나서 도드라져서 남의 눈에 쉽게 띄는 스타일도 아니고 말썽을 부리거나 너무 손이 많이가는 처리곤한한 문제아도 아닌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묻혀가는 아이

조금 무심해도 알아서 자기 일을 잘 하고 도드라지지 않고 조금은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아 보이는 그런 아이 나는 그런 아이였다.

공부를 잘하지도 않았지만  못하지도 않았고 얼굴이 뛰어나게 아름답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순간 아~ 할만큼 못나지도 않았고 예민하게 신경써야할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둔하지도 않은 그런 아이. 그냥 중간은 하는 그래서 좀 편하고 만만하고 쉽게 칭찬하고 잘 해주면 순종적인 채로 나이 드는 아이 뭐 그런 아이

사실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세상에 불만이 많았고 샘도 많았고 내가 가진 것과 타인이 가진 걸 비교하느라 혼자 속을 복달거렸고 실망하고 세상 막막하게 우울했지만 겉으로는 전혀 티나지 않았다. 내향적이라 말이 없고 뚱한 표정을 가지고 있어서 고집있어 보이는 면이 없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똥고집을 부리고 몽니를 부리는  아이는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형제중에서도 중간에 위치해서   언니 챙겨야 하니까 잠깐 저 집에 동생이 아직 어려서 잠깐 이쪽으로 여기저기 옮겨 놓아도 그냥 있는 둥 마는 둥 혼자 잘 놀고 말도 잘 듣고 밥도 찬투정 없이 잘 먹고 잘 자서 맡아주는 사람도 점차 무심해지는 그런 아이였다.

혼자 오래 외가집에 맡겨진 기억도 있고 명절에 이동할때 한차에 타기에 넘쳐서 혼자 다른 가족과 타고 간 기억도 있다. (언니는 커서 안되고 동생은 어려서 안된다는 적확한 이유가 있었고 나는 나이는 어리지 않았고 그렇다고 성숙하지도 않아서 적당해야했다.)

그렇게 손이 가지 않은 아이는 그렇게 컸다.

물론 매년 매 순간 온순한 아이이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냥  내가 하고 말거나 참고 말거나 하는게 편했다.

힘들어 보이는 엄마에게 나까지 무게를 얹고 싶지 않았고 언니나 동생에게 샘내는 걸 들키는 일이 자존심이 상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고 대낮 빈집에서 혼자 낮잠에서 깼을 때 햇살이 길게 들어오던 마루에 앉아서 혼자 쓸쓸했었지만 누구에게도 그 감정을 말한 적이 없었다.

책가방도 내가 싸고 내 옷도 내 물건도 내가 챙겼고 누군가가 주는 내 몫에 대해서 주저하지도 않았다. 챙길건 챙기고 포기할 건 포기하고... 그러니까 손이 안가는 아이이면서 동시에 어쩌면 정도 가지 않은 아이였을 수도 있다. 대단히 잘나지도 않으면서 남에게 페끼치는 것도 싫고 뭔가 나누기보다 그냥 다 주고 마는게 더 편하다보니 깍쟁이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아이일지라도 누군가 관심을 주면 참 좋았던 거같다.

다만 좋은 티를 이상하게 냈다는게 문제지만 틱틱거리는 거.. 뭐 그런걸로

 

부모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고 상식적이었고 책임은 강했다.

다만 자식을 사랑하는 법을 잘 몰랐던 거 같다. 상대가 원하는 걸 주기보다 내가 줘야 한다고 믿었던 것을 주었다. 그들이 주었다는 걸 잘 알았기에 원망할 수 없었다.

나중에 나이를 먹어 보니 누군가를 공감하는 게 많이 서툴고 타인의 아픔에 마음이 저릴 만큼 이해가 가지만 어떻게 위로하고 곁에 있어줘야할지는 너무 어렵고 서툴렀다.

원만하게 잘 자랐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고 어떤 부분은 넘치게 가졌으나 어떤 부분은 지독하게 매말라서 언제든 바싹 바스라져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걸 모르고 나이를 먹었다.

사랑과 공감을 글로 배워서 머리로 익혔다.

감정이나 정서라는게 타고난 것보다 배우고  흉내내고 그렇게 계속 반복하고 연습해서 익히는 거란걸 몰랐다.

나는 내가 사람들을 열외시켰다고 생각했다.

조용히 냉정하게 그냥 내가 원하지 않아서 상대를 누락시켰다고 믿었다.

그냥 티나지 않게 조용히 예의있게

그런데 사실 나는 나를 누락시켰다.

나를 제외함으로서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상처받을까봐 미움받을까봐 버림받을까봐 조용히 티안나게 한 구석에 자리 잡아서 나도 모르게 상대에게 맞춰주면서 이건 정말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고 내가 잘 하고 있는 거라고 믿었고 그래도 힘든 관계에서는 내가 조용히 정리하고 제외시켰다 믿으면서 내가 조금씩 조금씩 투명해져갔다.

 

사실 나도 손이 많이 가는 아이고 싶었다.

저 녀석때문에 내가 못살아 하면서 엉덩이를 맞아가면서도 뭔가 관심을 받고 토닥임을 받고 싶었던 거다.

뛰어나서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긴 했지만 그건 너무 먼 길이라 그냥 손이 많이 가고 조금 어딘가 어설프고 어리석어서  자꾸 지켜봐야하고 걱정해야하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던 거같다.

그렇게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었던 거 같다.

깔끔하게 정리되고 매사에 주고받는 게 딱 떨어지는 그런 거 말고

그래서 돌아서면 잊히는 거 말고

 

이제 나를 사랑해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냥 내가 나를 많이 사랑하기로 괜찮다고 등을 쓰다듬어주기로 하고 적어도 내가 누군가에게 갈증나게 하지는 말자고  생각한다.

 

책이란 어쩌면 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도 한 모양이다.

심리치유서를 참 많이 읽으면서도 늘 머리로 받아들였다.

이런 케이스 저런 케이스를 정리하면서 딱딱 맞게 서랍을 정해 넣어두었는데

지금 이순간 어쩌면 이렇게 무언가를 흔드는 일이 생기기도 하는 모양이다.

지금 이순간 내가 조금 말랑말랑해져서 어떤 위로를 원하는 딱 그런 순간이었고

그 때 이 책이 내게 온 모양이다.

때로는 이렇게 기막힌 핀트가 존재하기도 한다. 사람사는 일이 꽤 따뜻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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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 진화하는 페미니즘
권김현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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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다롭고 예민하게 구는 일이 거추장스럽거나 시비를 거는 일이 아니다. 누구든 소외되고 상처받을 수도 있다. 내가 아는 것 경험한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래서 늘 깨어있고 생각하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나 역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고 싶지 않다. 페미니즘은 모두가 잘 살려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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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기 위해 매일 하는 일

그러나 누구도 쉽게 그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 일

매일 먹거리를 기르고 만들고 먹고 치우고 고민하는 일등등

그 사소한 일상도 사실 정치적인 일이다.

밥상을 차리는 사람, 밥상에 주인처럼 느리게 나와 앉아도 괜찮은 사람

밥상을 타박하는 사람 밥상을 걱정하는 사람

차리는 사람 뒤집어 엎는 사람 치우는 사람  모두가 가진 위치가 다르고 힘이 다르다.

밥상에서 말을 해도 괜찮은 사람이 있고 수저가 들어갈 때만 입을 열어야마나 하는 사람도 있다.

오죽하면 입닫고 밥이나 먹어... 라는 모순된 말도 있을까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있고 들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

성별에 따라 계급에 따라 다른 입장이다,

내가 땀을 흘리고 몸을 써서 그 상을 차리는  사람은 정작 그 상 앞에서 아무런 권리가 없다.

그저 냉큼 와서 앉아 한마디 하고 나무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권리뿐 아니라 힘도 있다.

누군가는 보이지 않은 것처럼 후다다가 밥을 우겨넣어야 하는 게 마땅하고

누군가는 혼밥자체가 애처럽고  안타까워 그의 등을 두드려주고 싶다는 캠페인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런 먹는 이야기에서 펼쳐지는 관계의 이야기 관계에 응당 따르는 권력의 문제 차별과 혐오의 문제, 아무렇지 않게 구별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을 다시 돌아본다. 모두 정치적인 문제다.

정치는 저 높은 곳에서 제  할일을 하지 않고 힘겨루기만 하면서도 따박따박  고액의 월급을 쳐잡수시는 분들의 전용물이 아니다

둘 이상 모인 사람 사이에 오가는 관계들 힘의 줄다리기 힐끔거리는 견제와 함꼐 손을 잡는 행위 모두가 정치가 된다.

함께 상을 차리고 먹고 치우는 일  역시 정치의 일부다.

 

 

 

페미니즘은 관계의 학문이다. 살아가면서 점점 다짐하게 되는 삶의 태도는 "남의 입에 밥 넣기를 주저하지 말고 내 입으로 죄 짓지 말자"이다. 관계를 위한 기본이다. 우리는 음식을 나눠 먹으며 말을 섞으며 연결된다.

 

 

여성이라는 집단이 본질적으로 공유하는 자연스러운 취향은 없다. 치향은 온전히 자연발생적인 성질이라기 보다는 습관의 축적, 환경, 교육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 여성에게 주로 맡겨진 노동과 역할을 수행하면서 여성 일반의 취향이 남성 일반의 취향과 차이를 보일 수는 있다. 이는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본질적인 차이라기보다. 사회화의 결과다. 또한 여성 일반의 취향이 열등한 성질로 평가받을 이유가 없다. 나아가 여성 집단 내부는 각각 취향의 종류가 다양하고 차이가 있다.

 

취향의 젠더화는 여성화된 취향을 업신여기도록 이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이라는 말이 붙으면 일단 한 수 아래의 뭔가로 취급된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책, 여자들이 좋아하는 드라마 여자들이 좋아하는 분위기, 여자들이 좋아하는 영화 등 입맛도 여자들이 좋아하는 맛이라고 할 때는 진짜 맛이 아닌 가벼운 맛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취향이란 진정한 예술도 진정한 맛도 진정한 지식도 아닌 세계다. 여성 문제는 진정한 사회 문제가 아니듯이.  

 

 

가부장제란 어머니이 밥으로 아버지의 법을 굴러가게 하는 제도다.

 

성적 대상화, 대상화란 무엇일까 느낄 줄 알며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며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다. 다른 주체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대상으로만 여기는 태도를 대상화라고 한다. 성적 대상화란 이 대상을 성적인 목적/도구로만 여긴다는 뜻이다. 대상화란 다른 말로 하면 '사물화'다. 생각하고 느끼는 인격체로 보지 않는다. 화(化)는 되다라는 의미다. 여성을 사물이 되게 해 의식이 없도록 만드는 상태가 바로 성적대상화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 여기기에 여성을 식재료나 음식으로 보고 먹는다. 강간을 위해 강간 약물을 사용하는 이유도 여성을 의식이 없는 사물로 만들기 위해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서 홀로 성 관계라는 강간을 한다. 여성을 사물화하는 방식 중 하나가 상납이다. 성 상납에서 성을 남성이라고 생각할 리는 없다, 여성을 남성에게 상납한다.

 

 

매일 똑같은 식단을 구성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렇게 먹어도 되는 사람'인 건 아니다,

 

가난하고 배가 고픈 사람이라고 해서 욕망마저 가난해질 의무는 없다. 오직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서만 입을 벌리는 1차원적인 입은 언제나 지배권력이 원하는 입이다. 취향 따위는 아예 형성할 수 없는 그런 입, 욕망 할 줄 모르는 입 배고픔에 길들여진 입

그러나 가난한 입도 욕망할 줄 알고 기분이라는 게 있다.

 

 

인간은 기억 때문에 버티고 때로는 그 기억이 고통을 유발한다 해방의 세게인 동시에 영원한 감옥인 기억 기억의 정치화는 바로 기록과 재현이다. 고통스러운 배고픔과 죽음의 행진마저 인간이 기록하고 재현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어떤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향과 맛이 있다.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그 음식을 먹었을 때의 기억, 함께 한 사람들 그 순간의 온도와 빛과 분위기 냄새가 함께 뭉실 떠오른다.

음식은 이성적으로 딱 딱 구격 맞게 정리된 기억이 아니다

그 맛이 주는 감정이 서글픔일 때도 있었고 들떠서 한 없이 몽실거리던 기분이거나 배꼽 아래가 간질간질한 설레임일 수도 있다. 그냥 꾸역구역 참고 밀어넣는 국에 만 밥같은 기억도 있다.

오래 되어 낡은 후라이 팬에서 기름이 보글거리고 그 안에서 조잡하게  모양을 낸 도나츠가 둥실 떠오르는 순간 고소한 기름냄새 끈적거리던 설탕 느낌 그리고 내가 눈독을 들여놓은 가장 동그랗고 에쁜 도나츠를 향햔 욕망까지 그렇게 맛은 몸에 새겨지고 남겨진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할머니를 맛과 냄새로 기억하고 추억한다.

그리고 그 추억이 한없이 따뜻하고 행복한 거라고만 믿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 따듯하고 정감어린 할머니와 어머가지 좋아하는 음식이 무어냐고 물어온다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 얼굴과 함께 떠오르는 많은 음식이 있다

배추전과 연근전이 있고  타래과와 수제 도넛이 있고 겨울날 웃풍으로 코끝은 시려도 지글지글 끓는 구들장덕분에 뜨끈해진 엉덩이를 느끼며 넘기는 팥죽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그 음식을 좋아했을까?

김치 꽁지를 먹고 콩나물 대가리만 남은 찬거릇을 긁어 먹거나 밥알과 고축가루가 둥둥 떠오르는 밥그릇에 그냥 커피랑 프림이랑 설탕을 적당히 섞어 지금으로치면 믹스커피를 타서 마시던 모습이 떠오를 뿐이다. 이쁜 그릇에 정성껏 담은 음식은 당신 차례가 아니었고 남아서 버리면 죄받을지도 모를 죄책감에 남김없이 먹어치우던 음식들 그리고 설겆이 거리를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그냥 먹던 그릇에 타서 사치스럽게 마셔보던 커피까지... 그걸 정말 좋아했을 리 없다.

세상 어떤 정의도 용기도  정치도 먹지 않고 이루어 질 수 없다.

먹어야 삶이 이어지고 살아야 정의도 용기도 민주도 투쟁도 가능했다.

그렇다면 누군가 그러게 드러내기 좋아하는 추상명사를 추구하는 동안 또 누군가는그들의 입에 들어갈 구체적인 명사들을 다듬고 삶고 끓이며 음식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곳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그리고 동시에 그게 당연하고 그게 살아가는 이치라고 힘을 가진 자들은 정의를 내리고 그렇게 규칙을 만든다.

먹는 일 먹이는 일 만들어 내는 일... 모든 일이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

다만 누군가 편리하게 만들어 놓은 당연함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앗을 뿐이다.

거기 그들이 있고 우리가 있고 내가 있었다.

 

평범한 일상에 스며드는 가장 익숙한 권력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에서 당연하다며 만들어 낸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본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의 눈에 띄기를 바란다.

내 가족이 나를 맛과 냄새로 기억하는 것도 괜찮다.

그렇게 익숙하고 좋아하는 맛을 만들엇던 내가 누구인지도 관심을 함께 가지길 바란다.

그 뿐이다.

그건 단순하지만 어렵다. 늘 노력하고 애쓰지 않으면 쉽게 잊히고 쉽게 없는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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