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기무라가 돌아왔다.

전작 <희망장>에서 이미 탐정이 되었고 몇몇의 사건을 해결했지만 이번엔 제법 탐정티가 난다.

백업해주는 오피스와의 관계에서도 제법 대등하고 원할하게 잘 넘어가고 있고 이젠 의뢰인을 제법 밀고 당길 줄도 알게 되었다

성장과정도 무난했고 운이 좋아 신데렐라 남편이 되는 바람에 행복한 탐정이라는 별칭까지 있었지만 그때의 스기무라는 늘 불안하기도 했었다.

지금 내가 누리는 이 행복이 완전한 내것 같지 않고 남의 옷 남의 집에 있는 것같은 붕 뜬 느낌

내 가족이지만 함부로 할 수 없고 꺠어질라 부러질라 조심 또 조심하면 대해야 한다는 건 다정한 스기무라에게도 많이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사건을 겪고 주체적이랄 수 없지만 어쨌뜬 탐정역할을 하며 실패도 하고 성공도 했고 또 우여곡절끝에 이혼하고 이제 진짜 세상에 홀로 맞섰다.

전작에서는 좌충우돌하며 아직은 샐러리맨의 티가 많이 남아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제법 탐정같다.

그래서일까 이전의 말끔하고 어딘가 어리숙하게 진지하고 고지식하게 보이는 면이 많이 옅어지고 이젠 밀땅도 할 줄 알고 사건의 전체를 보는 눈도 가졌다.

이걸 축해해줘야 하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아마추어냄새가 나는 스기무라가 그립기도 하다.

하긴 이제 독립한 자영업자인데 월급쟁이 모드를 계속 가지고 있을 순 없겠다.

 

스기무라의 특기가 소소하지만 사회성을 가진 사건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번 사건들은 소소하다고 하기엔 좀 쎄다.

가장 추잡스럽고 가장 악랄한 인간이라기보다 악마라고 하는게 차라리 나을 거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자기들의 이기심과 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해 상대를 인간으로 보지 않고 그저 욕망의 대상 쓰고 버려도 하등 미안할 것 없는 존재로 보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쩌면 살인이나 무엇보다 더 마주하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고....

이제 자영업자로 살아남기 위해 스기무라가 독해졌구나. 이제 이런 정도는 쉽게 마주할 만큼 배짱이 두둑해졌나보다   싶다가도 소심하고 눈치보며 풀어가는 작은 사건이 그립다.

 

다행일까 두번째 사건은 일상적이다

누군가 죽지도 않았고 다치거나 크게 손해를 본 것은 아니다.

다만 어쩌면 너무 사소해서 드러내기가 민망하거나 옹졸해보일까 두렵지만 그렇다고 품어두기엔 내가 너무 미칠것같고 억울한 관계와 사건이 전개된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을 질투하고  내가 어떤 인과응보를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는 그런 존재다. 그렇게 작고 하찮아서 오히려 더 살만한 세상을 이루기도 한다.

 

세번째 사건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는.... 정말 집안의 검은양처럼 모두를 파괴하는 인물이 혼자의 이기심에 어리저리 날뛰다가 결국 주변사람을 다치게 하고 삶을 망가뜨리는 이야기다.

사실 그런 인물이 얼마나 주변사람들을 힘들게 하는지 잘 알지만 너무 표피적으로 원래 저런 사람 이라고 단정짓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은 불만이다. 미키가 그렇게 된 이유가 있을텐데 그냥 이상하고 악의적인 존재는 없을텐데 그냥 그런 사람으로만 묘사하고 그런 사람이 저지르는 악행이라고만 드러나는게 아쉽다.

 

이제 스기무라도 나이를 먹나보다.

딸아이 또래 아이들만 보면 괜히 마음이 뭉클해지고

조금은 꼰대처럼 끼어들고 싶어도 하고 아이들앞에서 어른으로서 뭔가를 지적하고 가르치고 싶어하는 모습도 보인다.

다만 그럼에도 아직도 사건앞에서 다양한 의문을 품으며 예의있게 왜? 라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 그건 여전하다. 그래서 아마 다음  스기무라의 이야기도 기다리고 있을 거고...

이제 더 이상 처가에 눈치보며 몸을 작게 움츠리고 있는 스기무라가 아니다.

자영업자 탐정으로 스스로를 책임지고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본업에도 충실한 생활인의 모습이 강한 스기무라의 다음 이야기도 기대한다.

다음 사건은 조금 더 작고 소소하지만 꼭 필요한 사건(뭐래니?)이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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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05-13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어제부터 일단 읽기 시작하긴 했는데.. 평이 엇갈려서 좀 불안하네요 ^^;;
곧 다음 소설도 나온다는 소문이 있긴 합니다 (속닥속닥)

푸른희망 2020-05-13 13:31   좋아요 0 | URL
스기무라씨도 성장해야죠~^^ 점점 독립된 탐정다워지고 그에 걸맞은 사건을 맡는거지요 전 다음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쓴다는 건 내 속에 무언가가 넘쳐나고 있다는 뜻이다.

넘쳐나지만 그걸 드러내선 안된다는 걸 너무 잘 안다.

한때 흔들리는 시간을 지나왔다. 그 시간을 건너는 동안 나는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닐까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내가 죽어야 이 모든 것들이 끝나는 것이 아닐까 내내 생각했다.

그 생각들의 끝은 언제나 나였다. 문제도 나였고 불행도 나였고 고통도 나였다. 나만 없다면 모든 것이 평화롭고 아무렇지도 않을 거 같았다.

그래서 나는 침묵하기로 했다 드러나지 않기로 했고 남들과 닮아보이기로 했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삶의 과정들을 밟아갔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았고 안 아픈 것도 아니었고 자꾸 겉돌고 외롭고 거추장스러웠다.

나는 타인의 삶과 닮아보이기 위해 누군가를 이용했고 나를 속였고 가족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살았지만 내 속에서 나는 나를 죽이고 가까운 이들을 저주하면서 조용히 나이 먹어가고 있었다.

이제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한 사랑은 이미 시간 속으로 사라졌고 그건 어쩌면 사랑이 아니었을 것이고 한때의 호르몬 작용이었거나 미친 감정이었거나 되바라진 욕정이었을거라고 꾹꾹 눌러 담았다.

윤희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었다.

죽은 듯이 아무 말도 없이 누구와의 관계도 힘겨워서 그냥 고요하고 외롭게 나이먹는 것만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딸 새봄은 책임져야 하는 관계였고 이혼한 남편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관계라고 믿었다.

그리고 윤희에게 편지가 왔다.

 

잘 지내니? 오랫동안 이렇게 묻고 싶었어. 너는 나를 잊을 수도 있겠지. 벌써 이십 년이 지났으니까. 갑자기 너한테 내 소식을 전하고 싶었나봐.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니 뭐든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질 때가...............

망설이다 보니 시간이 흘렀네, 나는 비겁했어. 너한테 도망쳤고 여전히 도망치고 있는 거야. 머지않아 나는 또 처음 인것처럼 이 편지를 다시 쓰겠지 바보같은 걸까? 나는 아직도 미숙한 사람인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래도 좋아. 나는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내가 부끄럽지 않아

 

윤희는 참을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미 한계치를 넘긴 모양이었다. 자꾸 옆에서 옆구리를 찌르는 딸 새봄에게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모녀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어쩌면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모든 것이 내 탓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쥰이 사는 집 앞을 서성이고 그가 집에서 나올 때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피하고 혼자 운다.

혼자 담배를 피우고 혼자 서성이던 날들을 생각하고 혼자 운다.

윤희는 한 번도 누군가의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딸의 집요한 질문에도 그냥 무덤하고 냉담하게 대꾸했고 더 이상 일자리를 맡아줄 수 없다는 영양사에게도 남의 말하듯 그럼 그러지 말라고 하며 공장을 나왔다. 어린애처럼 감정을 치덕치덕 드러내는 전 남편 앞에서 유일하게 목청이 높아지지만 그건 감정을 드러냈다기 보다 그 순간 너무 지쳐 잠시 목청이 커진 것 뿐이었다. 그렇게 윤희는 고요하고 잠잠하고 서늘했다.

그건 쥰도 마찬가지다 일년의 절반이 눈이 내리는 조용하고 서늘한 오타루가 너무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어쩌면 쥰은 사람과 말하고 사람과 관계하는 것이 더 이상 힘들어서 수의사를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조용히 자기를 지켜보는 고모와 함께 눈이 쌓여서 불편하지만 그래서 고립되어도 하등 이상할 거 없는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둘은 다시 만났다. 새봄의 발칙하고 귀여운 계획으로

영화는 내내 두 사람의 감정을 한톨도 흘리지 않으면서 그냥 내쉬는 한숨 서성이는 발걸음 아무도 몰래 피워올리는 담배연기를 통해 그들을 보여준다.

참 많이 견디고 있구나

참 많이 감싸고 있구나.

누구든 다가오지 말라는 접근금지뒤에서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그렇게 살고 있었구나 ..

그들은 마침내 만났지만 그 순간에도 서로 고요하다.

쌓였던 감정이 모두 다 터지기만 하는 건 아니다. 그냥 그렇게 서로에게 조용히 스며들었다.

소리없이 내리는 눈이 어느새 마당에 쌓이고 지붕에 쌓여서 길이 끊어지고 기울어지듯이 그렇게 쌓이고 쌓였던 마음이 조용히 스며든다.

 

어쩌면 윤희도 쥰도 편견 혹은 정상이라는 프레임에서 폭력에 휘둘려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윤희의 편지 갈피에서 느껴지는 가장 가까운 가족들의 폭력과 억압, 차별이 있고 쥰도 절반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어디에도 내 고향같지 않은 이방인으로서의 서성임이 있었다. 이혼한 뒤 아빠를 따라 일본으로 왔지만 그곳도 고향은 아니다. 엄마와의 연락은 이미 끊어졌고 내가 누구인지 증명할 것들은 없다. 윤희도 가족의 폭력앞에서 자기를 부정하고 살아왔다.

영화는 그런 폭력을 직접 보여주진 않는다. 폭력을 드러냄으로 충격과 흥미를 돋우기보다 짐작하게 하고 그런 시간이 지난 뒤 그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폭력으로 흔들렸던 시간이 지나고 아직 여진이 남은 상황에서 오롯하게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자기에 집중하지만 아직도 자기를 다 마주할 수 없는 시간들을 보면서 한 사람을 흔든다는 건 참 쉬운 일이지만 그 사람이 그 진동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자기가 되는 일은 오래 오래 걸린다는 걸 보여준다.

자기를 감싸고 자기를 견디는 시간들이 필요했다.

 

영화는 참 다양한 생각을 하게 한다.

지나간 연인과 사랑에 대한 말랑한 이야기를 보여주기도 하고 새봄과 윤희의 관계 쥰과 미사코의 관계에서 새롭게 발견하는 연대를 보여주기도 한다. 오랜 폭력 뒤에 그것이 폭력이었음을 깨닫고 스스로를 더 강하게 단련시켜 세상을 한 발을 내딛는 출발도 보여주고 사람은 언제든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내가 어디서 어떻게 이 영화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른 여러 결을 만날 수 있다.

 

이 편지에 불행했던 과거를 핑계대고 싶진 않아. 모두 그땐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해. 나도 너처럼 도망쳐던거야. 그 사람과 내가 결혼식을 올리던 날 우습게도 가장 먼저 떠올렸던 사람이 너였어. 모르는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이곳을 떠난 네가 행복할 수 잇기를 간절히 빌었어.

나는 나에게 주어진 여분의 삶이 벌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동안 스스로에게 벌을 주면서 살았던거 같아. 너는 네가 부끄럽지 않다고 했지. 나도 더 이상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우리는 잘못한 게 없었으니까....

나도 네 꿈을 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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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병 공장 야유회 ff 시리즈 5
베릴 베인브리지 지음, 채세진 옮김 / 꿈꾼문고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런던의 한 아파트에서 한 침대를 나눠 쓰는 프리다와 브렌다는 이탈리아인 사장이 경영하는 포도주병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시골의 주정뱅이 남편과 학대하는 시어머니를 떠나 도시로 온 브렌다는 수줍은 성격의 여성으로,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못해, 공장 매니저 로시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룸메이트인 프리다에게 기가 눌리는 등 다른 사람들에게 치이며 살아간다. 솔직한 성격의 몽상가로 언제나 거침없이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는 프리다는 브렌다는 물론이고 공장의 다른 직원들과 매니저까지 쥐고 흔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 프리다가 공장 노동자 모두가 함께하는 야유회를 계획한다. 돌아오는 일요일의 야유회는 적극적인 성격의 프리다에게는 사랑을 쟁취할 수 있는 기회를, 내성적인 성격의 브렌다에게는 끔찍한 경험을 안겨줄 것으로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떠나게 된 야유회는 시작부터 좋지 못했다. 야유회를 위한 밴의 예약이 취소되어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직원들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프리다와 브렌다, 비토리오, 로시, 브렌다에게 관심을 보이는 아일랜드인 패트릭 등이 두 대의 차를 나눠 타고 야유회를 떠나게 된다. 알고 보니 비토리오는 로시의 처조카와 약혼한 사이였고, 그는 프리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묘한 태도를 취한다. 브렌다는 추근대는 로시를 피해 혼자 있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이 야유회에 끌려간다.

이 하루는 윈저 성에서의 싸움, 축구와 피크닉, 여왕의 장례식 말 타기, 기묘한 사파리 공원 여행 등 사소하지만 기이한 사건에 사건이 겹치며 결코 정상적으로 흘러가지 못하고, 야유회 날 이후의 삶 역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된다.

 

이야기가 시작하면서 많이 불편했다. 뭐가 불편한지 몰랐다. 그냥 프리다의 일방적인 태도도 힘들었고 브렌다의 어정쩡한 태도도 불쾌했다. 분명 약자이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걸 알겠는데 아닌 걸 아니라고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즐기면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닌 애매한 태도가 폭력을 불러오는 거라고 나는 혼자 피해자의자격을 따지고 있었고 사실 다시 읽어보면 프리다가 틀린 말을 한 건 하나도 없는데 그녀의 말하는 태도나 방식이 너무 거슬려서 뭘 저렇게 잘난척할까 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냥 낄낄거리기에도 목에 까끌거리는 것들이 가득하고 무기력한 이탈리아 이주민인 노동자들이 자본가에게는 어떤 말도 못하고 굽신거리면서 같은 노동자입장인 영국 여자들에게는 뭔가 해볼려는 기회를 노리거나 일단 건드려보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는 것들을 그저 농담이나 유희라고 보기가 어려웠다

영국의 끈끈하고 칼칼해서 기분이 불쾌해지는 늦가을 야유희는 정말이지 취소되면 좋겠다는 브렌다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여러 우여곡적 끝에 야유회는 떠났고 모든 계획은 뒤틀리고 관계도 묘하게 엉클어지지만 그래서 짠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따뜻해보이기도 하는 소동들을 보고나면 그 사건이 일어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꿈일거라고 현실일 수 없다고 믿고 싶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모두는 더 이상 그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 서로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 동시에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고 모른다는 것이 가장 안전할 수 있다는 현실도피가 뒤섞인다.

소설의 마지막 줄까지 다 읽고 나면 내가 소설 전반내내 느꼈던 불쾌함이 부끄러워진다.정말 불쾌하고 폭력적인 건 그런게 아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내 손은 더럽힐 필요없이 다른 누군가가가 나 대신 모든 뒷정리를 하고 먼지를 털고 부스러기를 치우고 없애야 할 것들을 없애버리는 일 그리고 그런 일에 아무런 죄책감도 감정도 가질 필요가 없는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 그런 것들이 있다. 내 위치에서 이런 일은 어떤 의문을 가질 필요없이 당연한 것이 되는 것. 이 정도 일을 하면서 내 위치를 유지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게 잘못이 아니라고 믿는 것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가 누릴 수 있는 것 탐할 수 있는 걸 취하는게 뭐가 잘못이냐는 생각. 그냥 시키는대로 어떤 질문도 어떤 의문도 가지지 않고 무탈하게 노동하고 돌아가는 게 전부인 사람들. 그 피라미드는 여전하다.

알고 있고 그걸 말로 꺼내는 순간 우리는 모두 프리다가 될 수 있고 그냥 돌아갈 곳으로 돌아가면 그뿐인 브렌다가 될 수도 있다. 여전히 공장에서 모든 자잘한 일들을 해야하는 마리아일 수도 있고....

 

다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불편하고 와닿지 않은 프리다와 브렌다의 대화들 그리고 화장실에서 패트릭과 브렌다의 대화 방에서의 프리다와 프리시오의 대화들 그것은 그냥 시시하고 유치한 대사들이 아니었다. 알고나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참 서글프다

 

다시 시간이 흐르고 야유회 시간이 다가오면 노동자들은 여전히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음식을 준비하고 내야 할 돈을 불평없이 내면서 재미없고 불편하기만 한 그 나들이를 떠날 것이다. 이것이 나를 위해 준비된 시간이라고 믿고 감사하고 좋았다고 기억하려하면서.

웃기엔 불편하고 분노하기엔 너무 비겁했다.

 

그녀는 야유회에 대해 생각만 해도 당황스러웠다. 벌써 10월이므로 비가 올 게 틀림없었고, 그녀는 그저 그들이 일렬로 쓸쓸히 잔디 위를 걸으며 이룰 음울한 행렬을, 남자들은 포도주통의 무게 때문에 미끄러지고 발을 헛디디고, 날씨 때문에 화가 나서 얼굴이 일그러진 프리다는 진흙탕 바닥에 주저앉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나뭇가지 아래서 은박지 포장을 벗기고 차가운 치킨을 꺼내 사지를 비틀어 뜯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었다. 물론 프리다는 이를 다르게 상상했다. 그녀는 파가노티 씨 조카인 수습 매니저 비토리오에게 몹시 반해 있었는데, 병입 설비와 지하 저장실 업무로부터 그를 빼내 멀리 야외로 데려갈 수 있다면 그를 유혹할 더 좋은 기회가 생길 거라 생각했다. _9-10

 

난 아무것도 잊지 않았어.” 로시가 비토리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고, 그 일에 관해 그만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로시는 그렇게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파가노티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상관없어, 그녀는 생각했다. 더 이상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 _263

 

거기 앉아 있는 여자를 향해 말했네.

의자 밑에 있는 생쥐를 봐요

아주 커다란 모자의 지그마한 여자는 그 생각을 견딜 수 없었네.

그녀는 일어나 극장을 떠났고

남자는 행복해졌네, 생쥐는 안 보였고.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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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한 작가구나 싶었다.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감정들 생각의 가닥 가닥들을 섬세하게 놓치지 않고 들여다 보고 묘사해낸다. 그 감정과 생각에 경중이 있지 않고 앞뒤가 있지 않음을 세심하게 살핀다. 그 마음도 그 맞은 편의 다른 마음도 다 그럴 수 있는 거라고 작가는 말하면서 은근하고 강단있게 그럼에도 옳은 방향은 이렇지 않으냐고 반문한다. 그 마음이 참 따뜻하다.

 

내가 누군가와 연대한다고 믿는 순간에도 내 속에 수만가지가 혼란스럽게 고개를 내민다. 우월한 위치에서 시혜적인 마음

한켠 이것이 전부 진실일 리 없다는 의심

그 의심을 감싸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 믿는 신념들

나의 지적 능력에 대한 관신

이건 내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죄책감

내가 뭘 안다고 나서는 걸까 하는 소심한 두려움

그렇기에 도망가도 괜찮다 누군가 대신하지 않을까 하는 비겁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한다는 무모한 정의감까지

한가지 행동에 존재하는 수만 갈래의 마음들 그렇게 나는 나를 한 방향으로 몰아가지 못해, 단단한 믿음이 없어서 갈등한다.

어떤 한 갈래의 내 마음이 타인의 다른 갈래의 마음가 만나서 갈등을 만들고 마음은 서러움과 부딪친다. 상처입고 웅크린다.

내 마음을 내가 정확히 이름 지을 수 없다 선한 사람이길 바라며 동시에 무엇도 손해보고 싶지 않고 가난한 내것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한 비겁이 부딪치면서 타인의 속물스러움을 부러워하며 동시에 혐오한다. 그 상대의 속물스러움은 내것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불행을 절박한 상황을 들으며 나는 판단하거나 충고를 해주지 않으려 한다.

나는 그 상황을 잘 모른다. 어쩌면 그는 자기가 유리한 상황만을 내게 말하고 편을 들어달라고 하고 도와달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중립을 지켜야 하지만 세상에 완벽하게 순수한 중립이란 없다. 누군가는 상처를 입게 되고 아무도 만족할 수 없는 상황이 그 놈의 중립이니까. 나는 완벽하게 그 사람의 편을 들고 싶다. 그가 틀렸더라도 내가 속았더라도 이용당하고 있을지라도 지금 이순간 그의 편이 되고 그의 말을 듣고 그의 등을 쓸어주며 니 잘못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는 그렇듯 그도 그렇다고 믿는다. 우리는 사실 자기가 잘못이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크든 얼마나 작든 내게도 티끌이 있음을 안다. 다만 모른 척 할 뿐이고 아니라고 우기고 싶을 뿐이고 속이고 싶을 뿐이다. 내가 아는데 적어도 나는 속일 수 없다. 정말 완벽한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그냥 나는 그 판단에 눈을 감고 편을 들고 만져주고 위안을 주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타인에게 인정받고 공감받고 나면 내 잘못을 들여다 볼 용기를 낼 수 있고 내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 한 발 내디딜 힘을 얻을 거라 믿는다. 모두가 찾아와 도움을 청하고 무언가를 해보려고 하는 마음을 먹고 실행하는 순간 그는 자기를 제대로 보려고 하는 것이라 믿고 싶었다.

짧은 경력의 상담사는 그렇게 기도하며 상담실로 들어간다.

 

갈등이 나쁜 것은 아니다. 갈등이 없는 매끈한 현실은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끔찍하다. 하나하나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어떻게 갈등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을까?

알수록 어려운 타인이고 모를수록 관대할 수 있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아무렇지 않고 편안하기만 할까? 제대로 갈등을 겪고 제대로 부딪쳐서 너와 내가 뭐가 다른 건지 이건 과연 만날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없는지 다투고 고민하고 끝을 각오하고 덤비는 상황을 맞지 않고 그냥 일방이 참고 견디는 그런 매끈한 화목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엄마를 50년 알았는데 이제 와서 나는 엄마를 모른다는 걸 알았다.

엄마도 나를 모른다.

엄마가 판단하고 불렀던 말이 없어 속을 알 수 없고 삐딱하기만 아이를 그동안 나라고 여겼다.

내가 문제라고, 다른 모두는 닮아서 이해하고 공통점이 있는데 나만 불편하고 어색하고 쉽게 입을 열기 힘들었던 관계가 모두 내탓이라고 생각했다.

고칠 생각을 하고 노력한 건 아니었지만 나도 그들과 정말 절실하게 닮고 싶었다. 차라리 그들을 닮아서 편안하고 싶었다. 그렇게 마음에 안들고 그건 아니라고 자꾸 부정되면서 한편으로는 저렇게 살고 싶고 저렇게 서로 공감하고 편했으면 했다.

늘 내 선택은 틀렸다. 끝에 가면 뭔가 이상하게 뒤틀리고 어렵고 아니었다. 그때 그렇게 말릴 때 말을 들었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내 속에 가득하면서도 나는 허세가 가득했다. 나는 지쳐갔고 이제 두 손을 들고 나 좀 살려달라고 이제라도 어떻게 하면 당신들과 같아질 수 있느냐고 매달리고 싶으면서도 더 등을 돌리고 괜찮은 척 강한 척 못된 척 했다. 내가 한 선택이 틀렸다는 건 결국 그 결과를 오롯이 내가 안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틀린 문제는 내가 고쳐야지 두 손들고 남에게 치워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속으로만 안고 쌓아갔고 엄마는 내가 당신을 무시한다고 잘난 척한다고 단정하면서 너는 강하니까 괜찮으니까 하는 마음에 무심하게 돌을 던졌다. 물론 던지는 이는 그게 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나는 쉽게 다쳤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진짜 괜찮고 강하고 못됐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봐도 정떨어지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으니까.

자기가 낳고 기른 자식도 모를 수 있다.

가장 친밀한 관계 엄마와 자식도 서로 모른다.

서로 잘 안다고 내가 아는 만큼 상대도 나를 안다고 믿으면 앞뒤 자르고 툭 뱉는 말들 행동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심함, 그런 것들이 서로에게 비수가 되어 오해가 깊어졌고 상처는 깊어갔다. 내 속의 여러 갈래의 마음들

내가 못되서 그들이 베푸는 선한 마음을 속물적인 시혜라고 받아들였다.

그들은 선한 마음을 베풀었음에도 그 마음은 어디다 갖다 버릭 그들이 주지도 않은 모멸감을 받아들고 부르르 떨었다. 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그 모멸을 나혼자 받아들고 어쩔 줄 몰랐다.

내가 삐뚤어졌을까? 내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50년이 지나 나만 잘못 생각하는게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도는 없겠지만 선한 마음이라 믿었겠지만 받는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그 짧은 생각이 모멸감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아무 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도착해 있는 자리가 있다. 아니 아닌가 내가 무엇인가 잘못했을까 나도 모르게 둔감해졌고 안전만 추구하는 의존적인 사람이 되었고 그래서 누군가를 배재했을까?

이런 것이었나? 이런 것이었구나. 사실은 별 것도 아닌데 그래서 별 거였구나.

 

우리는 바이링궐이다. 우리 말은 반쯤은 자신의 것이지만 반쯤은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우리는 종종 싸우려다 싸울 대상을 변호하여 주저앉는다.

그리고 나서 성내고 괴로운 마음이 되어 자신을 때려 기어이 피를 내곤 한다. afl 싫어도 우리 입에선 자꾸만 아줌마라는 말이 흘러나온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하하는 그런 말이.

<작은 마음 동호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건 이상한 말이었다. 더 이상 정직할 수 없는 말이지만 몹시 편리하게 책임을 방기해버리는 말이었다. 너무도 불공평한 말이었다. 그러나 승혜에게는 한 사람과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 이전에 조금 더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 마지막으로 꼭 해야하는 칼질같은 말이기도 했다.

 

미오가 선어너럼 내뱉었던 너는 몰라라는 말에 담긴 무서움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 것인지 승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 말은 심연의 말이었고 그것을 똑바로 감당하기엔 승혜는 너무 젊었다. 나는 무엇을 모르는 것일까 얼마나 모르는 것일까 미오 또한 나를 얼마만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승혜는 무서웠다. 그래서 무서움의 크기만큼 유치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승혜만큼 미오 역시 무서워하고 있었다. 승혜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그 하나하나의 작은 행동들이 아무런 상처도 남기지 않는 것은 또 아니어서 그렇게 젊은 두 연인은 서로를 물고 뜯고 눈이 빨개질 때까지 울음을 터뜨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모르는 건 그냥 모른다고 하면 되는 거야. 아마 그건 우리가 좋다거나 나쁘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닐거야.

 

그렇게 궁금하면 네가 누나에게 나중에 다시 물어볼 수도 있지.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그렇지만 네가 나중에 다시 물었는데 누나가 대답을 할 준비가 안 되있거나 대답을 전혀 하고싶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러면 억지로 물어보면 안되는 거야.

 

이런 맛 궁금했는데 생각과는 달랐다. 심심하고 슴슴하고 대단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맛이었다. 그 아무렇지도 않음 때문에 실망스러우면서도 안심이 되는 그 별 것 아님 때문에 자꾸 눈물이 날 거 같았다.

<승혜와 미오>

 

 

나는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오직 자신에게만 들리는 아우성을 속에 품은 채 진짜와는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보고 듣고 짐작하고 취급하는 세상 속을 계속 걸어가야 하는 괴리감과 말하고 싶은데 입을 다물어야 하는 수두룩한 순간들과 그런 고립 상태와 엄마와 재윤은 내내 싸워왔던 것이다. 나는 어떤 것과도 그런 식으로 싸워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거대하고 절박한 질문들은 아니어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어떤 막막한 심정은 내게도 있었다. 나는 매일 아치부터 밤까지 그것의 조각들이 내 몸속을 작은 반딧불처럼 날아다니다 새벽이 되어서야 꺼지는 광경을 느리게 느리게 지켜보곤 했다.

<마흔셋>

 

 

누가 옳고 그런지 판단과 결정을 하고 싶지 않아요. 할 능력도 자격도 없어요.

내게 온 그 사람은 말을 듣고 공감하고 편들면서 온전히 그가 나를 믿고 말하는 그 순간 그 동안은 그 사람 편이 되어 주고 싶어요. 어쩌면 본인이 가장 잘 알거예요. 이건 전적으로 그 사람 잘못만은 아니다. 내가 빌미를 주었을 수도 있고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달라져서 내 마음이 달라져서 미움 때문에 이럴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 모든 마음을 뭉뚱거려서 나는 그 사람편이 되고 그 마음을 이해하고 싶어요.

누군가가 오롯이 존중해준 내 마음 그 경험이 본인이 앞으로 발을 내디딜 용기가 될 수도 있고 자신을 돌아보며 욕심이라면 내려놓을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그냥 그 순간 내가 이용당하고 있더라도 그 사람 편을 들고 싶어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가 딱 이정도밖에 안되니까요. 더 이상은 나도 무섭습니다.

 

알고 있는 사람의 성폭력 피해사실 앞에서 나는 왜 도리어 망설이게 될까

그 안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누군가 편을 들어준다는 것 설령 그가 아주 가깝고 친밀하고 믿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전부를 걸어야 하는 일 일수도 있다. <피클>

 

 

믿어야겠죠. 선한 마음에는 아무 힘이 없다고 그건 아주 작고 연약한 거라서 어떤 무서운 일도 일어나게 할 힘이 없다구요. 그래서 우리가 지켜줘야 하는 거라고요.

 

위기에 처한 타인을 보면 사람은 미래같은 것과 상관없이 구하려고 몸을 던지게 마련이고 그는 그 본능에 충실한 뒤 자신 안에서 어떤 일관성을 만들어내는데 실패했을 뿐이다.

지금 이 세상은 너무도 병들어서 우리는 타인의 선의 뿐 아니라 자신의 선의까지 의심하고 그것을 망상의 위치까지 격하시킨다. 그런 지경까지 온 것이다. 정말이지 그래서는 안되는 지경까지.

<이웃의 선한 사람>

 

약속해 어떤 가정법도 사용하지 않기로

그때 무언가를 했더라면 혹은 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말로 우리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기로 해

가정법은 감옥이야. 그걸로는 어디에도 닿을 수 없어.

나는 현재를 살거야. 과거의 형벌을, 잘못 내린 선택의 총합을 살지 않을거야. 기억이라는 보석속에 갖혀 빛나는 과거의 잔여물을 되새김질만 하지도 않을거야. 오직 한 번뿐인 현재를 살거야 지금을.

 

 

세상에 수 많은 준이 존재하고 그 많은 준을 사랑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지경까지 간 상황은 내가 기억하고 또 기억해서 그를 존재하게 해야만 하는 것.

그것이 분열증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모든 존재가 준이 되어야만 내가 견딜 수 있는 상황이다. 준을 기억하고 존재하게 해야만 하는 것.

기억하는 한 나는 존재하는 거야... 그런거다.

<님프들>

 

 

이것이 우리의 사랑이란다. 연약한 존재여

 

이게 내 사랑이야. 이게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랑이 방식이라고

 

내가 인식하는 사랑의 방식을 아무런 주저없이 주장하고 요구하고 실행할 수 있는 건 힘이다.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건 이다.

그 힘은 대상에게 닿지 않는다. 사랑은 사라지고 치욕만 남는다.

 

<이것이 우리의 사랑이란다>

 

 

노동력을 제공하는 로봇들

그들은 왜 여자의 형상을 가졌을까 상반신은 여자이면서 하반신은 확실한 기계의 형상이다.

인간을 완벽하게 닮은 순간 느끼게 될 불쾌감은 줄이고 인간이 만족할만큼 본인의 의사는 전혀 상괂없이 너를 위해 너를 존중한다는 수아에 대한 나의 생각과 판단과 행위들이 과연 수아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평등한 입장에서의 존중이 아니라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흘려보낸 시혜였다.

내 입장에서 시혜가 그에게는 모멸이라는 것

몰랐고 이해할 이유도 없었다.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보기까지는...

<수아>

 

 

 

같은 입장, 같은 부류로 나뉘어 한 무리로 묶여있어도 개인은 각각 다르다.

사람은 개인적인 존재이고 저마다 특별하고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라는 것이 우선이다.

성별은 같아도 입장이 다르고 위치가 다르고 생각도 다르다.

상황이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로 묶일 수 있고 다시 나뉠 수 있다.

함께 묶여서 함께 소리내고 목적을 향해가더라도 다음 날 다른 길을 갈 수도 있다. 오늘은 어제와 다를 수 있다. 사람은 변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때 우리가 같은 생각 같은 방향이었다는 것이 위선이 되거나 그냥 아무것도 아닌 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대로 가치가 있고 지금은 지금 이대로 의미있다.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물론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고 그때 그렇게 믿고 친밀했던만큼 멀어지면 배신감과 미움이 커지겠지만 뭔가 사정이 있겠지. 그렇게 딱 그만큼 거리를 용납할 수는 없을까.

우리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작은마음동호회에서 그걸 본다.

 

이성애 커플이든 동성애 커플이든 인간이 가지는 갈등과 고민은 다르지 않다.

어쩌면 그래서 편안하고 그래서 이상하고 이물감이 든다.

나랑 분명 다른 취향을 가진 이들이 나랑 다르지 않은 고민을 한다는 건 위안이 될까 두려움이나 분노가 일게 될까. 승혜와 미오는 그냥 연인이었다. 사랑했고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함께 했지만 이제는 또 그 사랑이 걸림돌이 되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한다. 유치하게 삐지고 미워하지만 알고 싶어하는 마음도 그만큼이다. 나는 아직 그들을 모르지만 그가 가진 마음은 내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걸.. 그리고 모르는 만큼 알 수도 있을거같은 마음

그들은 그냥 보통의 커플일 뿐이다.

 

가족이지만 가장 깊은 마음은 서로 말하지 못한다. 타고난 내가 나로 살지 못한 삶을 그만두고 성별을 바꾸고 싶어하는 둘째,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지만 외롭고 강하지 않은 마음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첫째와 아이들을 사랑하고 이해하지만 내 이해범위 밖에 있는 아이들을 어쩌지 못해 병을 가진 엄마는 서로의 가장 깊은 상처는 결국 드러내지 못한다. 더 깊은 상처가 있다는 걸 짐작하지만 애써 모른 척 한다. 내가 할 수 있는게 없으니까. 그리고 나도 아파서 남의 상처를 관여하고 싶지 않고 제발 상대는 저절로 나아서 무탈하길 바라는 이기심도 있고 그렇다.

가족이어서 멀어지고 싶어도 가까이 갈 수 있는 것.. 가깝지만 언제 멀어져도 괜찮을 수 있는 조금 외롭지만 견뎌야 하는 마음이 마흔 셋에 담겨있다.

 

선한 의지는 누구나 원하는 것인데 그 선한 의지는 의외로 아니 당연하게 강하지 않다.

이런 선한 이웃을 만난다면 나도 겁을 먹을 거고 방어할 것이고 불편할 거 같다. 그래서 선한 이웃을 만나는 건 너무 어렵다.

 

작고 상처받기 쉬운 마음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며 그 입장을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섬세하고 예민한 그 촉수 때문에 상처를 많이 입지는 않을까

그의 책을 더 이상 보고 싶은데 더 볼 수 없다는 게..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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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아내
A.S.A. 해리슨 지음, 박현주 옮김 / 엘릭시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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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조용조용한 이야기

이십년은 무탈하게 잘 맞는 퍼즐조각처럼 살아온 남편이 어느 날 다른 여자를 임신하게 하고 나를 떠나 그 여자에게 가려고 한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결혼생활 내내 남편은 조금씩 바람을 피웠고 아내는 그냥 모른 척 하고 살았다. 어머니와 애착이 심한 남편은 늘 여러 여자에게 욕망을 숨기지 않았고 늘 쉽게 빠지고 쉽게 돌아왔으니까. 그러나 이번엔 이야기가 다르다. 오랜 친구의 딸이자 이제 갓 스무 살은 넘긴 여자아이는 당돌하게 임신을 했고 결혼을 요구했고 남자의 모든 것을 요구한다. 남자는 이번에 아빠가 될 수 있다는 희망과 젊고 육감적이고 적극적인 여자에게 끌린다. 그러나 오랫동안 함께 했고 이젠 모든 것이 잘 맞는 편안하고 다정하고 우아하기까지 한 아내를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

아내는 남편이 자기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갈 거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살인을 계획한다.

그냥 죽여버리는 게 나을 때가 있다. 그냥 내 삶에서 그 남자만 도려내는 걸로.. 그리고 나는 조용히 우아하게 삶을 지속시키는 걸로,,,,

어쩌면 뻔한 클리세에 그렇고 그런 내용이지만 대부분의 스릴러나 미스테리한 이야기에 대사가 많이 나오면서 떠들썩하게 사건이 전개되는데 반해 이 소설은 정말 제목처럼 조용하고 고요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번갈아 기록되면서 그 속내가 조금씩 윤곽을 드러낸다.

남자는 아내를 잘 속이고 있다고 믿고 자기의 모든 행동을 합리화하며 이 정도는 남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탈이라고 여긴다. 여전히 우아하고 조용한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주는 편안함과 안온함을 버리고 싶은 생각이 없다.

심리학을 공부하고 상담사로 일하는 아내는 어쩌면 첫눈에 반한 남편의 매력이 거칠고 대담하고 행동이 앞서는 모습만은 아니었던 거 같다. 남편은 참 흥미로운 내담자이며 좋은 분석대상이다. 연구할 가치가 있다.

한눈에 파악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파악되고 관찰당하고 섬세하게 분석되고 있다는 걸 모른다. 이십년을 평온하게 살아온 부부의 내면은 정말 다른 곳을 향한다. 서로는 상대방의 보이는 모습을 믿고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자신하며 다른 모습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남자의 시선에 남자의 장담이 다음 여자의 시선에서 하나하나 헤집어지고 쪼개지고 분석된다. 그리고 여자가 예측하고 판단한 남자의 심리는 다음 남자의 시선에서 전혀 엉뚱한 곳으로 튄다.

그래서 부부일까?

진실을 알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평화롭고 잔잔하다.

보이는 것만 믿고 조금도 더 깊이 따지지 않고 서로의 감정을 드러내지도 갈등하지도 않고 이렇게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살 수도 있겠구나.

 

그 여자 조디는 어떻게 지낼까. 이제 남편은 없고 안온한 삶은 유지되고 있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주위의 동정과 배려속에 잘 살고 있을까. 자기의 트라우마를 깊이 묻어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원치않은 것은 그대로 침묵으로 가라앉히고 그렇게 평안하고 고요하게 지금 이순간의 과업을 하나하나 이루며 그렇게 조금 매끈하게 뜨뜨미지근하게 살고 있을까?

그녀의 삶이 부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조금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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