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사적 영역의 개인과 공젹 영역의 개인을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인지하면서 실제 개인의 삶에서 그 영역은 완전히 분리되지 않음을 고려할 때 여성 서사 및 그 서사와 관게 맺는 개개인의 삶에 대한 이해의 영역이 넓어진다.

감정도 생각도 느낌도 자기만의 언어도 없는 인형이라는 희원의 자기 표현은 개인적인 것이 소거당한 여성 화자의 자기 인식으로 읽힐 수도 있고 그것은 아주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 구성적인 문제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한 학생이 자신 및 자신과 관계되는 삶에 대한 에세이를 발표한다. 발표자는 영성의 삶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말한다. 육아의 문제와 고용 불안정이 여성에게 부과되는 사회적인 역할과 결합됨으로써 발생한다는 것을 안다면 이 학생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적 현실은 개인적인 문제로 국한할 수 없다. 우리는 무엇이 어떤 문제들은 사적/공적인 것이라고 말하면서 가치판단하고 있는지 생각해야한다.

 

개인적인 일이야. 그리고 공과 사는 구분하는게 좋겠어. 일의 능률을 위해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내가 긴장하고 보여지는 나에 치중해야 하는 공간과 모든 끈을 놓아버리고 마음대로 풀어져도 되는 공간을 나누게 된다. 자아는 그렇게 조금씩 분열한다. 누구에게 책잡히지 않고 나는 개인의 나가 아닌 어떤 역할의 나가 된다. 사무실의 주임 학교의 비정규직 교사. 남편가족들 사이의 며느리. 올케 형수 그리고 사회 시민으로 규칙과 상식을 지키는 나까지.. 그 속엔 개인인 나는 과연 없을까?

그리고 내가 마음껏 흐트러져도 괜찮은 내 집에서도 나는 온전한 나일 수는 없다. 엄마가 되고 아내가 되고 옆집 같은 반 아이 엄마가 되어야 한다. 내가 나를 죽이고 아닌 척 하고 남들이 원하는 모습이 내가 원하는 모습이라고 믿으면서 나는 점점 내 속에서 소멸한다.

만약 내가 권력이 있다면 이렇게 분열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되는 걸까?

힘이 있는 존재라면 (그것이 남성이든 아니든) 사회에서 보여지는 나 속에 내가 가진 욕망과 본능을 그대로 드러내도 상관이 없다. 오히려 인간적일 수 있고 매력적일 수도 있다. 그런 면이 있네요. 하는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낸다. 설령 돌아서서 저런 꼰대같으니... 라는 뒷담화를 들을지라도 그 앞에서 누구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공적인 나와 사적인 나를 구분하지 않아도 되는 것 그건 힘이다.

그러나 아무리 힘을 가지지 못해도 공적인 나와 사적인 나를 딱딱 구분해서 살 수 없다.

나는 나도 모르게 스며들고 물들면서 둘은 어느 순간 만난다.

감정없이 사람 수만큼 커피를 주문하고 새로운 정책을 기안하는 내 속에 뭔가 부조리하다고 느끼고 부당하다고 느끼는 내가 전혀 없을 수 있을까. 아침에 조금만 더 눈을 붙이고 싶지만 타인을 위해 화장을 해야하고 가족을 위해 뭔가 먹을 걸 준비해야 해서 결국 채 다섯시간을 못채운 수면에서 억지로 눈을 떠야 하는 순간. 그때 온전한 나였을까

그런건 원래 그런 거예요. 늘 해오던 방식이고 아무도 뭐라고 한 적 없는데 꽤 까탈스러우시네요. 라는 타인의 말이 울컥하는 내 속에는 공적인 내가 있는 걸까 사적인 내가 있는 걸까 내 감정과 정서가 들어있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느낀 부당함에 대한 표현도 함께 들어있다. 그건 나의 모든 부분이 함께 스며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알지 못한다. 늘 하나를 택해야 하고 하나를 디폴트값으로 삼으면서 하나를 죽인다. 꼰대도 될 수 없고 진상도 될 수 없어서 그냥 나를 죽인다.

이문제는 개인적인거잖아요. 저마다 입장이 다른 거예요. 라는 말. 그것을 정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사적인 문제/ 공적인 문제라는 것이 딱딱 아귀가 맞게 떨어지게끔 하는 이는 누구인가. 그는 무슨 기준으로 그것을 정할까. 문제는 그걸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이야기는 평범한 이야기가 될 수 없는가? 평범한 이야기라면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게 되는가?

 

중요한 이야기는 내용의 경중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방식/시선과 관련된다. 중요한 이야기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중요한 이야기는 어떻게 중요한 이야기가 되는가? 로 대체된다.

 

어떤 사실을 지나 그것을 어떤 관점에서 어던 방식으로 말하고자 했는가?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가보다 스스로 그 사실에 대해 방어적으로 굴고 타인의 평가를 우려하는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 그 부분에서 수치심을 느낀다.

모든 글에는 글쓴이의 감정이나 생각이 묻어날 수밖에 없다. 애써서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어쩌면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독자가 자기 입장에서 보이는 것 보고 싶은 것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스스로 방어적이고 누구나 들어도 괜찮은 다시 말하면 없어도 그만인 글도 분명 존재한다. 그 글들은 아무런 주장이나 의미가 없는게 아니다. 기득권에 대한 다수의 생각에 능동적을 순응하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사실을 말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어떤 형태로 발화되든지 어떤 추가적인 의미를 얻든지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사실이라면 그대로 말해도 괜찮은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가며 여성-강사가 당면한 부당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을 해결할 수 있는가? 남성이 되거나 정교수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여성이자 비정규직인 선생님이 어떤 불공정한 일을 겪어내야 극복해야 할지 우리는 예상할 수 있다.

 

어떤 사실들은 종종 슬프다. 나를 억압하는 인식들이 어던 구조속에서 사실로 굳어졌을까?

그것이 삶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 얼마만큼 부정하고 또 인정해야할까 그러나 삶이 늘 슬픈 것은 아니다. 어떤 사실이 관계에 균열을 낼 것임을 염려하는 순간에도 누군가는 사실에 의문을 던져왔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의 언어가 나와 언어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겠지만 비슷한 방향으로 향해 서로를 지탱해줄 것임을 빛을 보고자 하는 자는 안다.

 

나는 최은영 작가가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좋은 글을 자주 쓰지 않아도 오래 썼으면 좋겠다.

많이 고민하고 이게 옳은 걸까 과연 나에게 옳은 것이 타인에게도 옳은 걸까 계속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아파하는 작가가 그럼에도 지치지 않기를 바란다.

어떤 글을 써야 할 때 나의 입장에 대해서

타인에 대해 예의를 차리는 일이 사실 어려운 일도 아니지만 쉬운 일도 아니라는 걸 말할 때도

관계 속에서 내가 소멸할 것같이 힘든 순간 그냥 타인의 눈에 띄지 않고 그렇게 멈춰버리는 걸 해도 괜찮다고 말할 때

그래도 기다려주는 내가 있다고 말해줄 때

아주 시간이 지나버렸지만 그때 정말 미안했다고 그렇게 말할 용기가 없었다고 그렇게 말할 자신도 없었다고 혼자 나지막히 말할 때도

촌스럽고 21세기 작가답지 않은 서사임에도 나는 여전히 그의 글을 기다린다.

그는 글을 잘 쓰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글을 읽고 나면 오래오래 멈추게 된다.

나는 잘 살고 있을까.

나는 관계속에서 어떤 사람일까

나도 괜찮은데... 라는 생각을 계속하게 된다.

그가 지치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계속 글을 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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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열쇠의 계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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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이고 싶은 마음. 아닌 척 하는 마음. 내 속에 숨은 무서운 내 얼굴이 불쑥 나오지 않게 누르면서도 그게 필요할 때면 용기내어? 꺼내보여야하는 상황들이 있다. 소년들도 다르지 않다. 다른 성향의 콤비가 풀어가는 추리. 인간을 보는 시선. 그리고 내모습까지 여전히 슴슴하니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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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미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조용하고 말이 없지만 느닷없이 내편을 들어주는 사람.

무조건 내편이어서 마구 상대에게 쎈소리를 해가며 역성드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틀렸음을 옳지 않음을 조곤조곰 말햐면서 내가 당신 편을 들려고 하는게 아니라 틀린 걸 틀리다고 말하려는 것 뿐이라는 태도로 내 편을 들어 줄 사람.

그럼에도 그의 편이 되기는 쉽지 않은 사람

아픔을 드러내지 않고 늘 괜찮은 얼굴로 괜찮은 이야기만 하고 정말 괜찮아 보여서 참 잘 살고 있구나 편안한 삶이구나 싶어 어느 정도 이상 관심을 끌지 않는 사람

사실 아무렇지 않은게 아니라 자기 상처를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

이걸 드러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드러낸다는 걸 배우지도 못했고 그래도 된다는 걸 알지 못하는 사람. 다들 힘들테니까 굳이 나까지 무게를 얹지 않겠다고 늘 괜찮은 얼굴로 말갛게 있는 사람 어쩌면 자기 상황이 폭력속에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면서 타인의 폭력에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편을 들어주는 사람.

그래서 쉽게 잊히기도 하고 아무렇지도 않아보여 팔자편해보이기도 하고 무심해 보이기도 하고 그런 사람. 그래서 그가 무언가를 말하는 순간 목청을 높이는 순간이 참 많이 어색하고 낯설기도 한 사람

그런 사람이 떠올랐다.

시미는 자기 아픔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화인의 아픔을 쉽게 알아차린다. 무심학 다가가지 않음을 예의로 삼은 시미는 병실에서 자기 옷자락을 잡은 화인의 아픔을 알아차린다.

그리워했던 아이를 대면하는 순간 아이가 내뱉는 차가운 한마디에 그리고 남긴 커피잔에서 아이의 기호릉 알아내고 아이가 그동안 혼자 얼마나 외로움과 버려짐을 견뎌냈는지를 알아차린다.

너무 잘 알아차려서 자기 통각을 잊었다.

 

폭력에 오래 노출된 사람들은 폭력에 대한 민감성이 높기도 하지만 굉장히 둔감하다.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모든 잘못을 자기에게 묻는다.

아니 상대의 잘못일거라고 생각해도 그 생각을 언어로 꺼집어 내거나 행동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분명 상대의 문제지만 드러내는 순간 말하는 순간 그건 내가 감당해야하는 일이라는 걸 너무 선명하게 안다.

그리고 눈앞의 폭력이 사라지는 순간 자기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순간 순간 불쑥 올라오는 불안과 공포를 내가 감당해야할 것이라고 여길 뿐이다.

 

그러고 보면 그런 사람은 시미만 아니고 화인도 그렇다.그리고 나도 그렇다.

내 심장에 새겨진 폭력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다시 심장에 수를 놓는다.

절대 잊힐 수 없는 고통을 잊기 위해 다른 고통을  내 몸에 새긴다. 그리고 나를 지켜줄 무언가를 내 몸에 새긴다.

내 고통은 무엇이 지켜줄까

시미를 닮은 화인을 닮은 그들은 무엇이 지켜줄까

 

책을 읽으며 속에 뭔가 얹혀서 내려가지도 올라오지도 않는  그것이 생겨버렸다.

심장에 수 놓는 일이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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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구병모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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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아픔에 무뎌졌다 믿을때도 자꾸 따끔거린다. 심장이 피부가.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손을 내밀고 말을 걸어주는 젊지도 늙지도 않은 시미. 그가 묻는다. 당신의 심장에 어떤 이야기가 새겨져 있나요? 내 고통을 지켜줄 작은 악어 한마리를 어깨에 키우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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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 감기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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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으로 올바른 페미니즘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어떤 관점에서 순응주의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다른 관점에서는 전복적인 가능성을 지닌 존재가 될 수도 있다. 페미니즘에는 모범답안이 없다.

겉으로 보기에 강한 페미니스트지만 자기 확신보다 초조함과 위기의식 불안으로 흔들리는 불완전한 존재일 수 있고 보기에 삶에 대해 소박하고 평균적인 의식수준을 지닌 그렇고 그런 아줌마지만 바보가 아니고 타인의 단호함과 편협함마저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인물들은 대부분 자기혐오와 불안의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어떤 점에서는 여전히 성숙하지 못한 의식상태에 머물러 있다.

연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 상처받기를 두려워해서 관계맺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

내 불안과 의심을 인정하고 바라보는 것. 타인 역시 그러할 것이므로

확신에 찬 무엇이 아니어도 괜찮다. 자꾸 흔들리고 불안해도 괜찮다.

상처받아도 괜찮다..

그럼에도 기대를 버리지 않고 누군가 곁에 있을 거라는 믿음 곁에 있어줄거라는 의지만 있다면 조금씩 달라고 변해도 미워도 함께 할 수 있다,

그렇게 믿는다.

 

진경과 세연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들이 아는 주변 다른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과 연결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옴니버스식으로 이어진다.

진경의 아이 율아의 유치원 친구 엄마 은정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진경과 세연을 거치고 그리고  주변인물들을 거쳐 다시 진경과 세연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모두가 여자들이다.

모두가 다른 환경에 있고 다른 상황에 있고 다른 생각을 가진다.

그들 중 누구를 옳다고 할 수도 없고 그러다고 할 수 없다.

들여다보면 알 수 있고 알게 되면 이해하게 된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와 다른 입장을 나는 모른다.

그래서 갈등하고 흔들리면서 서로를 미워하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선을 긋고 나와 다르다고 단정짓는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만날 수도 있다.

사실 진경과 세연의 이야기보다 주변의 이야기가 더 끌리고 궁금하고 더 듣고 싶었다

경혜와 채이의 관계 그들이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친구가 될 수는 없더라도 다시 신뢰하는 그래서 경계를 허물고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편안한 사이가 될 수 있을까 궁금하다. (아마 그렇게 되지는 못할 거 같다. 그리고 어쩌면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채이와 후배의 이야기도 그렇다

은정의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헤어디자이너 지현은 여전히 경계에서 서성이며 생각이 많을까

모두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오해하고 미워하면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

함께 연대한다고 모두가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달라서 싸우고 미워하고 미움받을 각오를 하고 그럼에도 다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고 싸울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이야기는 투박하고 밋밋하지만 인물들은 모두가 궁금하고 개성적이다.

작가가 다시 글을 써서 다른 인물의 이야기도 더 구체적으로 들려준다면 좋겠다

그게 안되면 내가 뒷 이야기를 생각해봐야 하나?

 

 

걷고 있으면 숨이 쉬어졌고 땀이 흘렀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흘리 수 없던 눈물도 편하게 흘러나왔다. 아무에게도 할 수 없던 말들이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나요

하나님 하나님아 나는 너한테 안진다 안져

다시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하나님 저를 대신 아프게 해주세요. 서균이를 살려주세요

혜성엄마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어떻게 지내세요 미안해요

왜 나만 쉬어야 해? 왜 나만 병원에 있어야해? 야 네 애가 저렇게 누워있는데 너는 병원에 오는 게 그렇게 귀찮니?”

하루종일 억누르고 있던 말들이었다.

원색 크레파스로 아무렇게나 북북 그어놓은 듯한 날것의 감정들 지하철에서 흔히 보이든 광인들의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초점 없는 혼잣말과 욕설이 은정의 입에서 방언처럼 줄줄 새어나왔다.

 

-너무 윳긴 일들 때문에 사람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그래. 말을 못 해서 그런거야. 말이라도 하면 좀 나아.

-그래서 부끄러웠니? 소속되지 못해서?

-어딘가 속하기 위해 일부러 악의를 품으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어.

-착한 사람이어서 아무것도 못했거든요. 제 친구가 그렇게 힘들어하는데 저는 그냥 손 놓고 있었다구요. 제가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짖 빌어먹게 얌전하고 착한 인간이기만 해서요. 유포한 새끼를 찾아서 대신 지랄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지현은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다물었다.

-아니야 그건 니 잘못이 아니야. 너랑 아무 관계가 없어. 뻔하고 착한 말들이었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말들 그러나 그 말들에 효용이 없다면 그런 말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면 나는 지금 왜 울고 있을까

-도덕적이어서 부끄러운거니 더 도덕적이지 못해서 부끄러운거니?

 

갑작스레 건네는 다정한 인사같은 것으로 괜찮아지지 않은 일들이 세상에 아주 많다는 것을 아이는 아직 모른다.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 일이 점점 더 겁나는 모험처럼 느껴진다. 결과가 안 좋을 때가 더 많기 때문에 그러나 나는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고 그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굳이 물어보았다. 나 역시 누군가가 그렇게 물어주기를 종종 장미가 비를 기다리듯이 기다리게 되므로.

내가 삶으로 꽉 차서 폭발해버리지 않게 하려면 나는 나의 어떤 부분을 헐어서 공간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러게 얻어낸 공간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부정적 감정을 채울 수는 없다는 것.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전혀 모르고 내 삶을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닌 사람들으 ㄹ존중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한 미움을 집어 넣을 수는 도저히 없다는 것. 그게 내가 해낼 수 있는 최선의 생각이야.

사랑하는 딸 너는 네가 되렴. 너눈 분명히 아주 강하고 당당하고 용감한 사람이 될거고 엄만ㄴ 온 힘을 다해 그 걸 응원해줄 거란다. 하지만 엄마는 네가 약한 여자를 , 너만큼 당당하지 못한 여자를, 외로움을 자주 느끼는 여자를, 겁이 많고 감정이 풍부해서 자기 우는 여자를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결점이 많고 가끔씩 잘못된 선택을 하는 여자를 그저 평범한 여자를 그런 이유들로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네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나도 나는 너를 변함없이 사랑할 거란다.

 

세연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을 좋아했다. 하지만 친구관계를 유지하는데는 서툴렀다. 먼저 연락을 해서 안부를 묻거나 약속을 잡거나 친구에게 힘든 일이 있을 때 분위기를 보고 타이밍을 맞춰 긴 통화를 하거나 시시콜콜 속사정을 묻고 위로하는 일은 잘 하질 못했다. 뭔가 위기감이 든다 싶으면 선물을 주문해 보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런 세연을 성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꼭 직접 만나서 시간을 함께 보내야만 의미가 있나?

(꼭 그가 나에게 내가 그에게 일순위일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순위를 정한다는게 의미가 있을까 일순위면 어떻고 이순위 삼순위 저 뒤의 n순위면 어떤가. 그 거리에 따라 대하는게 달라지고 마음이 달라지는 거라면.. 그냥 불쑥 만나 뭔가를 물어보고 다시 연락이 끊어져도 그 순간 예의가 있고 진심이라면 괜찮을텐데.. 그런데 그 예의와 진심이 내게 닿을까? 보일까?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미워하고 관계를 정리하게 되지 않을까. 관계는 뭐든 참 어렵다.

내 구질구질한 속내를 보이기 싫은 마음이 거리를 둔다거나 냉정하게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그건 정말 가까운 사이. 나랑 가까워지는 누군가의 진심을 모른 척 하는 일이 되어버려서 차라리 그가 생각하는 그대로 내가 되어버리는게 편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사실 아까부터 윤슬이 하고 싶었던 말은 자기는 그 친구를 왜 그렇게 좋아해? 였다. 그 친구는 자기한테 관심도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게 일방적인 관계는 친구가 아니야

하지만 그건 윤슬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왜 나는 진경을 이렇게 좋아할까? 진경은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아기 엄마였지만 뼛속까지 도시사람이었고 개와 개 냄새를 싫어했다.

누구를 좋아해서 그 사람에게 맞춰주고 싶은 마음

사실 나랑 안맞는 게 더 많고 은근 불편하지만 좋아한다는 마음이 강해서 혹은 이렇게 좋아하지 않으면 내가 혼자가 될까봐 계속 맞춰가는 일 왜 그럴까?

난 왜 그렇게 누군가를 계속 질기게 좋아하고 있는 걸까

좋아하는 마음이 클수록 그 사람과 연결되고 싶다는 마음이 클수록 나는 점점 더 외롭지만 멈출 수 없다. 이렇게라도 관계를 열어놓고 사회속에 한발을 걸치고 있어야 하는 것

일단 이유를 알아야겠다는 마음. 내가 왜 좋아하고 이렇게 집착하고 있는지 끊어내면 이유조차 모르고 넘어갈까봐 일단은 끈을 놓을 수 없다.

 

경혜가 친구였다면 채이는 가지 말라고 함께 있어달라고 내일도 와달라고 무섭다고 견디기 힘들다고 말을 했을 것같다. 커피를 사다 달라고 하나도 괜찮지 않다고 빨리 나가고 싶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애써 웃어 보이고 거리 두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혜는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다가 무언가를 하니까 또다시 당신은 자격이 없다고 비난하는 건 연대가 아니야. 그건 그냥 미움이야. 가진 것이 다르고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고 해서 계속 밀어내고 비난하기만 하면 어떻게 다른 사람과 이어질 수 있어? 그리고 사람은 신이 아니야. 누구도 일주일에 724시간 내내 타인의 고통만 생각할 수 없어. 너는 그렇게 할 수 잇니? 너도 그럴 수 없는 걸 왜 남한테 요구해?

 

어른들은 어디에서 울까?

언제나 자신과 똑같은 사람들만 만나고 살면 어떻게 발전하지?

 

우리가 반드시 같아질 필요는 없지 억지로 그러려고 했다간 계속 싸우게 될거야.

같아지려고 애쓰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받을 준비를 하는거지

나와 다른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지 나 역시 나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테고

서로 먀냥 좋기만 한 관계는 없어. 내 자신이 미워죽겠다 싶은 적도 있으니까

단단해져서 상처를 받더라도 받아들이고 쉽게 잘 아물기를 연습하는게 더 중요한거야

같은 생각 같은 방향이 중요한게 아니라..

 

 

이 아이는 왜 이렇게 서투를까? 오버를 하든지 아예 안하든지 둘 중 하나인 이아이 무언가를 하기로 마음먹으면 한 번에 너무 완벽하게 해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무리를 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둘이부어버리는 아이. 그러다 헐떡거리고 숨을 몰아쉬고 패닉에 빠져버리는 아이. 그게 세연이었다.

 

차이가 적대감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로 갈등하면서 공존하는 힘은 무엇인지 서로의 차이를 견디며 여성들간의 우정은 어떻게 가능할까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가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잇는 것. 각각 개별적인 존재로서 상황과 맥락속에서 구성된 주체적인 개인으로 호명되고 인식되는 것.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고 바라보는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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