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교실에 들어오다 - 학교 안 혐오 현상의 실태와 대책
이혜정 외 지음 / 살림터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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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지금 어떤 시민을 길러내는가?

학교는 모든 구성원에게 안전한 학습의 공간인가?

학교는 한 사람의 학생도 차별없이 안전하게 교육받을 수 있도록 누구도 포기하지 않는가?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권리와 창구가 존재하는가?

 

학교의 지배적 패러다임은 여전히 학업성취 대학입시 교육의 성과와 능력주의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소수자의 문제는 여전히 소주의 문제이며 주요 핵심이 아닌 논외거리일 뿐이다.

 

 

학급에서는 학업성취나 온라인 게임에서의 능력 좋은 성취를 얻지 못하는 것 모두가 혐오의 대상이 된다, 무엇인가를 잘 못하는 것이 혐오의 잉가 되는 학급 문화는 일의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 여기는 문화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무능력이 곧 혐오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기가 많은 남학생은 성적과 상관없이 학급내 상호작용에서 우위를 점한다. 학교의 공식적인 질서와 학생들간의 비공식적인 질서가 서로 복잡하게 얽히면서 누군가는 어떤 특성 때문에 혐오의 대상이 되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되지 않기도 한다. 따라서 혐오의 대상이 누구인가 보는 것은 그 집단의 특성이 아니라 학교와 학급의 질서에 주목하는 논의로 연결되어야 한다.

 

학생들사이의 엄마혐오의 의미를 담은 다양한 욕설이 만들어지고 유포되는 것은 그것이 인신공격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혐오의 표현을 담은 욕설이 얼마나 나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몰라서 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나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학교내의 혐오가 친한 사이에서 장난이라는 명분 하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보니 학생들은 강도가 세고 공격적인 혐오표현을 듣고도 문제제기를 하기 쉽지 않다. 장난스러운 분위기로 모두가 웃고 넘기는 상황에서 정색하는 것은 쉽지 않다. 더욱 심각한 것은 혐오표현이 친구들과의 대화에 끼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엄연히 혐오 표현의 한 방식임이도 불구하고 '장난'이라며 가볍게 치부되고 혐오 현상에 대한 문제제기가 또 다른 놀림거리가 되는 문화는 학생들 자신이 혐오 현상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스스로 살필 수 있는 기회를 구조적으로 차단하고 이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학생들은 자신이 들은 혐오 표현을 그냥 마음에 담아두거나 자신이 못 생긴 것을 인정하기도 한다. 심지어 자신이 혐오를 당하는 상황에서도 같이 도오하여 웃기도 한다. 이러한 문화는 학생들이 혐오를 당하거나 혐오상황을 목격하고도 이를 회피 무시 동조하는 것과 무관하지않으며 학교안 혐오 현상이 계속해서 유지 재생산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혐오상황에 정식으로 문제제기를 한다면 오히려 더 힘든 일이 생길까봐 두려워 하는 마음이 혐오 상황을 무시 또는 회피하게 만든다.

 

학업성취 중심의 학교문화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쉽지 않고 능력이 부족하고 노력하지 않는 존재에 대해 혐오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학생들이 이런 혐오현상을 반복하여 경험하게 되면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지양하고 다수의 학생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행동과 말을 선택하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상이라는 것은 원래 그러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인정하고 유포하는 임의적인 것이다.

 

학생들은 의도적으로 차별적 사고를 한 뒤 혐오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약자를 마음껏 혐오하는 사고를 가지게 된다.

 

 

학교안이 혐오는 약자를 향한다는 것은 맞지만 그 약자라는 존재가 다양하다. 그것이 성별일 수도 있고 학업능력의 차이일 수도 있고 다문화, 다양한 형태의 가족, 신체적조건 경제적인 조건등등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고 교묘해지는 혐오가 있고 폭력이 존재한다. 같은 성별 내에서의 미묘한 심리적인 갈등과 왕따도 혐오라고 할 수 있을까

넓게 본다면 학교내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폭력들이 혐오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 다만 그 폭력들의 형태를  규정하는 것이 쉽지 않고 혐오라는 것이 또래 문화처럼 놀이처럼 이어진다는데 참 어렵다.

 

한 학교를 정해서 학생들을 관찰하고 면담해서 연구결과를 내놓았지만 사실 여기 등장하는 '너른중학교'정도면 참 양호한 환경이다. 그리고 남녀사이의 혐오상황을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모든 학생들 환경이 비슷하고 학업성취가 높은 지역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이 세상의 모든 학교가 너른 중학교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연구 대상이 된 학생들을 선생님들에 의해 선발되었다면 그리고 외향적으로 스스로를 잘 드러내는 아이들 위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면 학교 전체에 분포된 혐오나 폭력이 모두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많은 한계가 있지만 학교내 혐오에 대해 한번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있는 계기는 된다

 

결국 서로가 연대하고 지지하며 견뎌내고 혐오를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혐오 감수성이 높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

무엇보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가르치는 교육이 아니라 어쩌면 학교의 한 축을 이루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 감수성 향상이 더 우선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든 환경에서 성장한다.

어른들의 훈육을 듣고 어른들이 만든 사회통념을 익히고 만들어 놓은 창을 통해 세상을 본다.

다른 창을 만들고 다양한 상황을 공감하고 존중하는 사회. 어쩌면 학생들을 향한 교육이나 처벌보다는 어른들이 변해야 하는 것이 더 우선이다.

 

많이 부족하지만 생각할 거리는 많은 책이다.

왠지 어떤 결론을 내려놓고 과정을 몰아간듯한 느낌도 들지만 한번 생각해볼 거리도 많다.

이렇게 학교내의 혐오에 대해 연구할 수 있게 학교를 공개했다는 것도 참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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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 일상 속, 화내는 것도 지친 당신을 위한 분노 감정을 관리하는 연습
공진수 지음 / 대림북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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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조절에 대해 쉽게 이해하고 적요할 수 있는 도서. 다만 가정폭력이나 데이트 폭력 학교 폭력등의 문제를 분노라는 감정만으로 풀어나가다 보니 도식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관계에서의 폭력은 감정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문장이 좀더 깔끔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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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n의 세계 - 30대 한국 여성이 몸으로 겪는 언스펙터클 분투기
박문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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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득거리면 보다가 정색하고 보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하다.

간혹 문장이 꼬여서 내가 이해를 못하나 싶기도 하지만 상관없다.

나의 몸에서 시작한 이야기들은 우리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세상에 까지 확장된다.

나를 사랑하고 인정하게 되면 나와 다르지 않을 타인을 인정한다. 사랑할 수는 없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나와 너는 우리가 되고 우리들이 세상을 이루는 거다.

웃고 심각해지며 그런 이야기들을 생각한다.

 

내가 3n시절에 이렇게 생각이 깨어있었다면 지금 삶은 달라졌을까?

꼭 반삭을 하거나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고 인생을 치열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지금 나의 삶은 조금 달라졌을까?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그땐 이런 삶을 몰랐고 설령 알았다 하더라도 매력적이라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냥 나랑은 다른.. 전혀 상관없는 뭐 그런거?

머리는 찰랑찰랑 길어야 하고 옷은 남들이 보기에 불편하지 않고 불쾌하지 않게 조금은 있어보이게 입어야 하고  입에서 욕이 튀어나올 상황이 닥치더라도 조신하고 현명하게 대처할 줄 알아야 했고 무엇보다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르게 조금 더 높은 곳에 자리잡고 싶었다. 그래서 뭐 그쪽 방향으로 치열하게 한눈을 감고 살았다면 어쩌면 지금  당당한 속물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다만 그렇게 높고 화려한 곳을 동경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속물적인 내가 싫고 뭔가 정의롭고 옳은 일에 대한 환상도 함께 품고 있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와 모션을 취하고 있었다.

3n의 나이에 나는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었고 아이가 있다는 것은 세상에 지켜야 할 무언가가 생겨버린 일이고 이젠 나만을 위해 마이웨이를 달리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남들이 알려주기도 전에 지레 내가 먼저 단언하고 모든 가능성을 차단했다. 신중하고 실수를 줄여야 한다는 명목으로 오래 고믾고 가능하면 아닌 쪽으로 생각을 돌려가며 어떤 도전도  단 1퍼센트의 위험만 보일라 치면 아예 귀를 막고 발을 돌렸다. 안전제일 가능한 안전하고 편안한 쪽으로...

준비없는 도전은 무모하고

이론없는 반박은 치기어린 저항이라고 생각했고

일단 저질러 보고 생각한다는 건  다시 태어나도 내 사전엔 없는 말이다.

사실 돌이켜보면 2n의 시절에 나는 그렇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왜 그렇게 되었을까

세상의 박자에 맞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집을 마련해야하고 집 평수를 늘여야 하고 아이에게 맞는 사교육을 고르고 시키고 조금은 내 아이로 인해 내 어깨가 펴질 수 있는 상상

내 남편의 지위나 나의 집 크기로 내 어께가 더 비대해지는 상상 그렇게 나는 없이 속물적인 마인드가 더 컸으면서 동시에 이런 저런 것들이 정의롭지 않다고 말로만 비판할 줄 알았고 세상은 내가 아는 것이상 크다고 번번히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 커다란 세상의 일부만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그렇게 3n 4n을 보내고 지금 5n이 되면서 조금씩 인간이 변하고 있다.

아주 굽벵이 기어가는 속도만큼...

 

그리고 내가 지금 알게 되고 생각한 것들을 책에서 발견한다.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생각들....

 

 

성폭력에 대해 내 말을 들어주는 동행 반응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말을 편하게 되풀이 할 수 있게 된 거라 생각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이 있다. 가장 가깝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말이 있다. 발설하지 못하는 갑갑함보다 발설하고 난 후 휘몰아치는 몰이해가 훨씬 더 두려웠다.

 

내가 겪은 폭력이 흔한 불행이면 안되듯 아이들이 이 범죄를 피한 게 행운이면 안된다. 어린이는 (아니 모든 이는) 보호받는 동시에 개별 주체로서 존엄을 지켜가는 일이 사회의 의무여야 한다.

 

성이 여성이 아동을 따라하고 아동이 성인 여성 흉내를 내는 이곳에서 민감해지기를 단념하면 비참한 사고가 발생한다.

 

폭력에 대한 말은 더 이상 보태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어릴적 당했던 성추행이나 성희롱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이것이 나만의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는 게 안도감을 준다는 사실이 조금 늦게 슬펐던 기억이 난다. 꼭 이런 거지같은 걸 함께 나누고 공감해야하다니...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할 수 없다는 게 내 탓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쨍쨍한 날도 우산을 들고 다녀야 한다는 설교는 늘 따라다닌다. 부끄러운 건 그렇게 누군가에게 상처주면서도 그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단세포같은 것들이지  예상도 못한 채 벼락맞는 내가 아니니까. 알지만 당당해지기 아직은 어려운 일,,, 적어도 아이들은 그런 경험을 함께 공유하며 안도하는 말도 안되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늘 바란다.

 

울음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는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국을 몇 술 떴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울고 나면 개운했던 기억들 멋적었던 기억들  그리고 에라 모르겠다 싶은 감정들이 있다.

운다고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해결되는 것도 없지만 그래도 꺼이꺼이 울어야 할 순간이 있었다

 

한참을 서성이다 늘 먹던 김밥으로 손을 뻗은 아이는 젤리만 포기한 것이 아니다. 호기심 성공일지 실패일지 걸어보는 작은 내기 또래문화 알아갈 수 있던 자신의 취향과 기호 안전이란 귀중하지만 작은 유희와 상실까지 지우는 안전의 기반은 부실한 것 아닐까

김밥을 택한 아이앞으로 너무 늦지 않게 쓸데없는 아름다운 것들이 찾아들면 좋겠다.

생활과 유리딘 다만 밫나고 덧없는 것들이 그에게 우연하게 필연하게 가닿는 날이 있길 바란다.

 

가성비라는 말이. 현명한 소비를 뜻하기도 하지만  적은 금액으로 가장 최선을 얻기 위해 내가 포기해야 하는 많은 것들을 뜻하기도 한다. 단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결국 아는 맛, 무난한 색 어디든 어울려서 어디든 이상한 취향을 고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취향도 단순하고 개성도 없고 경험도 적은 그런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실패해도 그만인 작은 내기들. 후히밖에 안 남을 선택들이 주는 풍성함이 있는데

그건 실패만도 아니다. 잘못만도 아니데.. 자꾸 선택의 범위는 줄어든다. 그리고 슬프지만 점점 익숙해진다.

 

종이 속 친구를 만나면서부터 내가 이로운 날에도 완전히 혼자는 아닐 수 있었다 사람대신 책을 친구 삼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어 괴괴한 학창 시절을 보낼 확율이 높아지긴 하지만 고독이 어쩌면 충만과 비슷한 뜻이란 걸 체감하는 건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다. 새로운 슬픔과 새로운 기쁨을 마무리하는 순간은 사실 멋지기도 하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건 친구를 못사귀어서라는 걸 나이먹고 알았다. 친구가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면 나는 외톨이였을 겍 분명하다.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건 늘 어렵고 두렵다. 예상밖의 인복을 만나 여태 사회관계망에서 함께 살고 있다 내가 그렇게 책으로 빠진 건 엄마의 견해처럼 잘난 척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이 두렵고 겁나고 사람들이 너무 잘나 보여 숨을 곳을 찾았던 것이다.

지금 아이가 핸드폰속으로 아이돌 속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는 것도 너무 두렵기때문이다.

왕따를 당했을 때 그래서 학교가 두렵고 무서워서 그만두고 싶었을때

그래도 엄마는 내 마음도 모르고 학교는 가야하지 않냐고.. 그깐 년들때문에 니가 니 삶을 포기할거냐고 속도 모를 옳지만 재수없는 말만 할때  아이를 위로해준건 그 아이의 오빠들이고 그 오빠들의 노래였고 퍼포먼스였고 오빠들의 팬들과 의 소통이었고 작은 핸드폰 화면으로 들여다 보는 그들의 불특성 대중을 향한 위안과 위로였다. 그것만으로 아이는 살아갈 힘을 얻었고 그리고 아직도 내 곁에 있다.

나만 몰랐다. 그게 꼭 책이 아니어도 괜찮았고  빠순이가 되는 거든 핸드폰에 빠져 너튜브를 보고 댓글을 다는 행위들이라도 좋았다. 그래서 아이는 아직 내 곁에 있다.

가끔 나는 잘 잊어먹고 속물이고 부모가 아닌 학부모여서 아이의 학습태도를 나무라고 화를 내지만  그래도 아이는 저만의 위안이 있어 세상이 살만하다고 믿고 있는 중이다.

 

글이나 말이 그 사람의 삶의 태도를 전부 보여주지 않는다.

말만 잘 하고 선동만 잘 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더라도 .. 말만으로 글만으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겨질 때가 있다.

비록 프로필 사진을 보고 심한 배신감에 무릎이 꺽였지만....

그의 글과 그림은 참 위안이 된다. 그리고 내가 조금 더 젊었을 적에 알았더라면...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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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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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작품은 작가의 쓰기에 독자의 읽기가 더해져 비로소 완성된다. 고 나는 믿는다.

특히나 에세이라면 작가의 경험과  그 경험에 덧대고 각색되고 빠지고 선택된 기억들과 그때의 감정들에 읽는 독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사유가 더해져 비로소 하나의 완성된 독서가 된다.

그렇다면 이 책은 내게 참 좋은 독서경험을 가져다 주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작품이라는 건 다른 기준이겠지만

내게로 와서 내 기억과 경험을 꺼집어내주고 그때의 감정들이 다시 살아나게 해서 부끄럽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하고 그냥 덮어버리거나 되새길 시간을 준다는 것

그래서 비로소 나는 한권의 읽기를 마쳤다.

 

 

#1.  이외로 별거 아니라고 여겨지는 무언가가 위안이 될 때가 있다.

      갑자기 내리는 눈발이거나 우연히 버스에서 마주친 아이의 순진한 눈동자거나

     유치하고 허무한 몸개그의 한 부분에서

     그렇게 방심한 순간 터지는 감탄이나 웃음같은것이 그래도 괜찮지 않나 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래도 살아보는게 낫겠다는 마음

     아직은 버틸하지 않나하는 근거없는 자신감

    그렇게 사소한 무언가에서 위안은 느닷없이 온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2.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이 나를 다시 움직이게 만든다.

      부모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자책하고 후회하는 그 지점에서 아직은 내가 책임져야할

     어린 생 명에 대한 감당할 수 없는 무게에 주저앉고 싶을 때 결국 아이도 내몸에서

     나왔지만     나와 다른 낯선 타인이라는 걸 느끼는 순간.. 그 무력감과 도망치고 싶은

    책임감의 무게가 다시 나를 살게 했다. 좋은 어른은 아니지만 적어도 무책임하게 도망치는

    어른이 되지 않게 하는 건 그만큼 감당하고 버텨가는 무게때문이었다.

 

#3. 놓친 성공대신 패배가 이룰 성취를 기약하라.

     와닿지도 않고 웃기지도 않는 문장이지만 때론 그런걸 바랄 때가 있다.

     철저하게 실패해도 괜찮다고 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는 갖게 해달라고

     성공하진 못해도 적어도 그 실패는 온전한 내것이므로 사랑하고 보듬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아이에게 말하곤 했다. 똥폼잡으면서.

 

#4. 사람은 저마다 개별적인 존재다. 모든 환경과 경험도 개별적일 수 밖에 없다.

     비슷한 경험은 있지만 똑같은 경험은 없다. 경험이 누군가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고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해준다면 그건 바로 자기자신의 삶이지 타인의 삶은 아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누군가를 위해 고민하고 있다면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나는 너를 모른다"

     내가 너를 모른다고 하는 말이 참 야속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말하는 입장에서는 내가 너를 잘 안다고 오만하게 불쑥 침범하는 것보다 모른다는

    마음으로 몸을 낮추고 그의 말을 경청하고 그를 존중하는 쪽이 낫다.

    어떤 마음이든 맥락과 관계속에서는 다 이유가 있고 그럴 만하고 그럴 수 밖에 없다.

    다만 그 마음이 어떻게 드러나느냐에 따라  비판할 수도 있고 제재할 수도 있고 받아들이고

    감당할 수도 있는 거다.

    우리는 그 마음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걸 내가 아닌 타인이라면 가족이든 친구든 오래된   

    동료이든 안다고 설칠게 아니라 모른다는 자세로  대해야 한다.

    내가 해봐서 아는 건  딱 한 명 내 경우에만 해당되는 일이다.

    함부로 나서지 말고 아는 척하지 말자

    하지만 상대가 외롭고 소외되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을만큼만 곁에 있자.

 

#5  염려하고 망설이고 현실과 타협하면서는 아무것도 이뤄지는 일은 없다.

     무모하게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일  그것이 앞으로 한 발 내딛고 나가게 한다.

    다만 그 무모한 도전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폭력이 되어서는 안되는 일

    일단은 저질러 보고 한 발 들어가보면 적어도 아~ 이거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이라도 갖게 된

    다.

     그리고 나는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보기전엔 누구말도 믿지 못하는 인간유형이기도 하다.

 

#6. 밭에 들인 노고는 내것이지만 아이에게 들인 노고는 얼마든 내것이 아니다.

     밭에서 내가 싦은 열매가 나지만  아이는 저홀로 심은 꿈으로 열매를 맺는다.

    그런 마음으로 보면 안자라 열매도 없고 잘못 자란 열매도 없다. 우리가 들여야 할 정성은

    밭을 향한 것이지 열매를 향해서는 안될 것이다. 밭만 가꾸고 열매는 간섭하지 말자.

    그런데 말입니다.

    자꾸 본전 생각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나의 속물성인거 같더군요,

    그동안 들어간 학원비와 사교육비를 계산하지 않을 수 없고  꼭 엄마에게까지 아이의 성적과

    학원에서의 자세를 시시콜콜하게 적어보내는 그  정성이 그냥 나의 인내심을 시험할 뿐입니다

    나는 바담풍 하지만 너는 바람풍 하라고 하는 모순적인 지적질이 여전하고

    손대고 코풀고 싶은 속물적 욕심에 나는 우아하게 있어도 아이는 영특해서 내  자랑거리가 되

    었으면 하는 간절한 개꿈도 포기가 안됩니다.

    그래서 이런 문장이 필요합니다.

    속물적인 욕심이 목젖까지 차올랐을 때  상투적일지라도 이런 문장들이 필요합니다.

 

#7.  집은 세상의 끝.

     여기서 다시 다른 세상이 시작된다.

     어디든 언제든 다시 떠나고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품을 숨겨진 안식

    처로 집이 기억되길  그래서 나는 여기서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게 되길

     이제 집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는 아이가  날개를 달고 훨 훨  날아가길 희망합니다.

    설령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원망하지 말기를

    필요할 때만 돌아와 저 좋은 것만 취하고 다시 가버리더라도 언제든 무심해지기를

   지금 나의 기도 제목이기도 한 것.

 

#8.  가족은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만들어져야 하고 노력해야 유지된다.

     선천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후천적 노력과 시간과 추억이 공유될 때 비로소 굴러가고 유지되

     지만 지극히 불완전하고 불안전하다. 누구나 가족이 되지만 아무나 가족이 되지 않는다.

     가끔 제대로 유지되고 화목하다싶은 가족을 들여다 보면 누군가 한사람이 동동거리며 희생하

     고 참아내고 견뎌내는 것 위에서 우아하게 떠있는게 보인다.

     그 한사람이 지쳐 쓰러지는 순간 그 가족은 그대로 무너질탠데 안에서는 그게 보이지 않는다.

    가족은 사회의 작은 단위라고 그래고 동시에 개인적인  영역이라며 함부로 간섭하지 않으면서

    또 일방적으로 들이댈수있는 평균값도 가진다. 참 폭력적이다.

     가족의 문제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영역이라며 모른 척하면서 가족이 유지되는 건 사회적인

     부분이라며 원하는 것을 취한다.

     가족은 개인의 마지막 보루이기도 하고 안식처이기도 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파괴되어도 할 수 없는 순간도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같은 모양새의 가족을 가져야 할 필요도 없고 조금 외롭게 홀로 있어도 괜찮아

     야 한다. 가족이 가장 단단하고 중요한게 아니라 어쩌면 사회보장이 더 단단해질 필요가

    있다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9. 행복은 되풀이 되지 않는데 불행은 반복하는 습성이 있다.

     꼭 안좋은 일은 손잡고 함께 오더라

     암만 생각해도 불행은 무슨 조직을 갖춘 모양이다.

 

그냥 감상적인 글일거야.

제목을 딱 보면 감이 오잖아.... 라고 오만했다.

뭐 그런 면이 없지는 않앗지만 그럼에도 작가가 가진 진심이 페이지 마다 가득해서 그냥 감상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었다. 어떤 대목에서는 뜬금없이 마음이 울컥해서 오랫동안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내것과 닮아 있어서 괜히 버럭했다가 무안해졌다.

같은 유년을 보내지 않았고 기억이 다 다르지만 어쩌면 그 순간 순간의 불쑥거리는 감정들이 다 알거 같아서  괜히 끄덕이다가 이것도 오지랍이고 오만이지 싶어 혼자 얼굴이 붉어지다가

내가 나이를 먹었나 에세이를 읽고 센티해지네.. 하며 센 척하다가  마지막 장을 덮는다.

 

이 책의 완성은 작가의 문장과 나의 기억과 감정이 버무려진 그것이다.

참 괜찮은 눈이 내리지 않는 지금 이겨울

난 눈을 참 싫어하지만 한 번 쯤은 푸짐하게 내려도 괜찮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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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쏜살 문고
아니 에르노 지음, 윤석헌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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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을 알고 중절을 하기까지 과정이 사실적이다.
너무 현실적이라 오히려 어색할 수도. 중절을 결심하고서 필요한 건 돈과 주소뿐. 태아에 대한 감정 죄책감은 사치다. 가능하다면 스스로 사라져주길바라는 마음과 홀로 진행시켜야하는 과정이 바스라질듯 담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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