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차별주의자 - 보통 사람들의 욕망에 숨어든 차별적 시선
라우라 비스뵈크 지음, 장혜경 옮김 / 심플라이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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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차별이라는 프레임을 가지게 되는 과정들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사회가 주입하는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것이 내 생각이며 내 근거라고 믿는다.

사실 나는 내 생각을 내 것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

세상에는 열정이 없는 사람이 없고 그 숫자도 적지 않다.

누구에게나 자기 삶을 선택하고 자기가 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정해진 규칙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충동을 따라 움직여야 한다. 이것이 현대적인 생활방식이다.

스스로 원하고 스스로 책임지면서 사회적인 명성까지 얻어야 한다? 이건 개인에게 실로 대단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열정을 가지고 좋아하는 일을 하라. 그러면 성공한다는 공식이 만연하고 그 성공의 증거들이 여기저기서 자기 주장을 펼치는 시대다

뭔가 제대로 하지 모하면 내가 좋아하는 일이 없다는 것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누가 제재하는 것도 아닌데 너는 왜 못하니?

실패는 오롯이 개인의 몫이 된다.

시스템이나 사회적인 책임은 빠지고 모든 결과를 개인이 책임져야 할 때 개인은 쉽게 시도하지 못한다. 좋다고 덜컥 덤벼들 수 없고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도전도 줄어든다. 안전한 것과 할 수 있는 것 지금 가장 손에 쉽게 쥘 수 있는 것만 볼 수 밖에 없다.

우울증은 규율과 죄가 아닌 책임과 자발성에 기초한 질병이라고 에랭베르는 말했다

규율이 지배했던 사회에서는 복종이 사람을 지치게 했다면 현재 모두가 열정을 가져라고 말하는 사회에서는 개인이 내는 성과가 사람을 지치게 한다. 뭔든 할 수 있다. 무한 긍정과 지지의 사회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과 실패했다는 것은 개인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나 잘못했다는 결과만 도출된다.

빽빽하게 다이어리를 채우고 sns로 세상과 소통하며 자기를 드러내고 광고해야 하고 또 그 모든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시대다. 나를 스스로 광고하고 스스로 채찍질하며 몰아붙여 할 일들을 하나씩 클리어해 나가는 과정이 계속된다. 잠자리에 들 때면 뭔가 했다는 뿌듯함이 남지만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 뿌듯함은 혼자한 헛짓일 뿐이고 또 그런 사람들을 보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가 루저이고 한심하다고 자책하며 나는 뭔가 하며 잠을 들지 못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몇몇 성공한 소수자들이 거봐라 좋아하는 것 열정을 가지고 하면 이렇게 될 수 있지 않으냐? 너도 조금만 더 해봐라. 잘 하고 있다. 그렇게 조금만 더.. 이러게 부질없는 희망을 뿌리고 있다. 비눗방울처럼 아름답게 둥둥 떠다니지만 결국 내 손에 잡히면 터지고 말 것들을

느려서도 안된다. 머뭇거려서도 안된다. 주저하지 마라. 일단 질러라

그리고 책임은 오롯이 너가 져라

누구와 상의할 수 없고 누구에게 내 문제를 보여줄 수도 없다. 모두가 친구이며 동시에 경쟁자다.

좋아하는 일을 하라가 아니라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일을)좋아하라이렇게 될 수 밖에 없다.

지금 하고 있는 일 그 일이 내일이다.

 

*젠더

폭력은 특정 목적을 이루기 위한 남성 특유의 길이다. 폭력의 한 종류는 내적 고통의 외적 표현이다. 가령 소속되고 싶은 갈망이 채워지지 못해 절망하고 분노하다가 폭력을 휘두른다. 우리 사회의 기대와 규범은 남성들에게 특정한 감정만 허용한다. 분노와 화는 공동체남성 구성원들에게 용인되고 기대되는 정서적 표현이다. 하지만 우리사회의 지배적인 여성성 이미지에 따르면 여성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폭력을 수단으로 사용하면 안된다.

폭력은 복수의 한 형태다. 남성들을 빼앗겼다고 생각되는 것을 되찾기 위해서도 폭력을 사용한다. 권력을 과시하고 타인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 사회게 남성에게 거는 기대이며 남성은 그것을 충족하고자 하는 것 뿐이다.

 

연약함과 공감은 여성의 특성이 아니라 인간의 특성이다. 그런데 남자들은 그 인간의 특성을 외면하라고 배운다. 자신의 고통을 인정하지 않고 약해지지 않아야 하는 것이 남성다움이라고 말한다.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는 건 어린 아이 때뿐이다. 자라면서 여자보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된다고 배우고 학습 당한다. 자기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것은 자연스럽지 않고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슬픔과 절망을 억누르다보면 나중에 아예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자기 아픔을 느끼지 못하면 남의 아픔을 공감할 수도 없다. 아픔을 인정하고 표현하는 일은 약한존재가 하는 짓이락 생각하고 손가락질 하다보면 결국 타인을 이해할 수도 없고 남의 마음도 아파할 수 없게 된다.

 

남성적인 것이 사회의 기본값이라고 배운 여자들도 감정적인 것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인색하다. 여자 짓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면 안되는 것 적어도 사회생활을 할 때 공적인 자리에서는 드러내면 안되는 것이다. 그렇게 배웠고 스스로 억제하게 된다. 남성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것이 우선되면서 내 안의여성적인 것 아니 사실은 인간적인 것들을 누르게 된다. 참아내고 견디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남의 감정을 무시하고 모른 척 하는 것 그렇게 남자들과 같아지는 것 그것이 이성적인 인간의 태도라고 배우면 결국 타인의 공감이라는 것은 남성뿐 아니라 여성에게도 퇴화될 수 밖에 없다.

사회는 그걸 원한다.

각자 느낌은 각자의 것이므로 흘러넘치게 해서 타인이 알아차리게 만드는 것이 문제다 자기 문제는 자기가 깔끔하게 정리하기를 바라는 것

사회는 점점 각자도생이다.

 

*이주

우리의 공감은 반드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숫자와 관련 있지 않다. 우리의 공감은 오히려 개인에게서 솟구친다. 자기를 그 사건이나 사람에 대입하면서 공감을 한다. 내가 그 사람이라면 그 아이가 내 아이라면 숫자는 냉정하고 감정이 없다.

이해관계가 발생할 때 관계가 있을 때 우리는 상황을 개선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고 공감한다. 내가 알던 아이가 주거문제로 고통을 받거나 내 아이의 친구 혹은 어제까지 내 이웃이거나 내가 잘 알던 사람의 고통은 쉽게 공감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가 알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다. 알고 있으면 타인이 아니고 타인이 아니면 공감이 훨씬 더 쉽다(반대로 어떤 갈등이 생길 때 의심할 여지 없이 알던 사람 알고 있는 사람을 선한 쪽에 세우기도 한다. 그가 그럴 리 없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내가 잘 안다, 이때 안다는 것은 어디까지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내 반경 안에서 내가 인지하고 있으면 그만일 때도 있다.)

 

취약함을 가질수록 공감은 쉽다. 함께 해도 방해가 되거나 해롭지 않다고 판단 될 때 우리는 타인을 받아들인다.

나를 위해 싸워줄 몇 사람이 있고 슬픈 얼굴의 아이 사진을 올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유리하다. 정서적 충돌이 일어나는 건 받아들임에 매우 편리하고 이롭다. 혹은 정반대로 영웅적인 행동도 이롭다.

 

이주 자체는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문제는 이주를 불러온 상황이다.그것이 누구에게 득이 되고 누구에게 실이 되는가를 따지는 것 그리고 이주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시선의 문제다.

새로 건너온 사람들의 가치는 경제시스템 내부의 생산성으로 평가된다. 국가는 성과가 뛰어난 이주민에게는 문을 활짝 연다. 반대로 인도주의차원의 이주나 가족동반이주 등에는 빗장을 건다.

사회주류계층의 불안이 이주민 타인을 배척한다. ‘가난뱅이 백인의 사고방식이다. 내 몫을 빼앗아 가는 존재로 본다.

여성의 사회참여가 늘면서 남성들은 시스템의 문제보다 여성이 자기 몫을 빼앗는다고 여기는 것처럼 이주민들이 노동영역을의 결혼기회를 빼앗고 주인인 나보다 돈을 더 많이 번다고 여기고 차별하고 제재한다. 나보다 당연히 계급이 낮아야 할 존재들이 나를 위협할 때는 공포와 함께 불쾌감과 폭력까지 동반된다. 그들은 없어져야할 존재이고 위험한 존재가 된다. 문명이거나 상류층이 아닌 타인은 야만이며 하류층이며 노예일 뿐이다.

 

*빈부격차

자발적 실업자와 비자발적 실업자

많은 실업자들은 자신은 다른 실업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상황 탓에 일자리를 잃었지만 남들은 자기 잘못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믿는다. 동일시하지 않음으로서 자기의 정체성을 지킨다. 조직이 될 수 없다. 개인의 문제가 되고 개인 대 개인의 경쟁이 되어버린다. 연대와 품위 그리고 공감의 자리에는 경제적 이해타산이 차지한다. 사회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집단에게 권리를 빼앗는 것은 당연하게 여긴다.

 

상징적 폭력: 일상에서 일어나며 건강한 인간이성에게는 당연히 보이는 권력과 지배의 현상을 말함. 조용하고 잠재의식적이기 때문에 당하는 사람이 폭력적이라고 느끼지 못한다. 멸시의 연출방식을 통해 상징적인 차원에서 빈곤이 고착화된다.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는 여러 가지 장치들 언론 방송 소문이나 잘못된 가치관들 가난하면 게으르다. 뚱뚱한 사람은 자기관리를 못한다. 실업급여생활자는 사회 기생충이다. 등등

루저와 위너 성과를 내는 자와 성과를 거부하는 자. 두 가지 계급뿐이다. 낙인찍히는 계급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은 연대적 행동을 방해한다. 남과 선을 긋는다면 나는 그 남이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차별과 구분은 민주주의 사회의 안정과 결속을 해친다. 구분과 멸시가 우선시되면 사회 불이익은 정치적 참여가 아닌 도덕적 분노를 낳을 뿐이다.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는 중산층의 두려움, 자기 특권을 버리고 싶지 않은 욕심, 정치 언론 경제의 편 가르기식 언어는 유용한 자와 유용하지 않은 자 돈을 버는 사람과 실업급여를 받는 자 사이의 사회적 위계질서를 강화한다. 그리고 그 선을 넘어갈까 두려워함과 동시에 그 선을 넘어올 누군가를 경계하고 미워한다.

일과 사생활의 경계가 모호해지면 더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자유롭게 시간을 결정하고 시간을 낼 수 있다. 더 효율적이며 내가 자유와 책임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경계가 모호해지면 일의 연속선상에서 삶이 반복될 수 있다. 편리한 기기들의 도움은 우리로 하여금 어디에서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그만큼 상사에게 어디서든 연결될 수 있어 자유를 속박당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이면을 가진다.탈경계화는 소통의 자유로움과 무한한 가능과 함께 어디서 언제든 공사를 함께 할 수 밖에 없다.

 

 

*범죄

비슷한 범죄를 저질러도 범인이 어느 사회 계층에 속하느냐에 ᄄᆞ라서 도덕적 평 확장하고 내 일자리를 빼앗고 나가와 형량은 달라진다.

정의감을 불러내려면 인격화된 피해자의 이미지가 필요하다. 범죄 희생자라고 개인적으로 특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피해를 호소하는 개인이 있으면 그것은 명백한 범죄다. 대중은 그런 사건에 더 분노하고 관심을 쏟고 자신의 주관적 안전에 더 신경을 쓴다.

상류사회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손해를 보는 사람은 대부분 개별적으로 확인이 불간으하다. 전국으로 파고들고 어마어마한 손실을 입히는 범죄지만 개별적으로 확인이 불가능하므로 범죄라는 인식이 없다. 그저 대단하다고 생각하면 그뿐이다.

공정한 세상 가설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정의롭기 때문에 뿌린대로 거둔다. 세상은 정의롭고 안전하다. 나만 제대로 행동하면 공정한 결과가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다. 내가 부당한 일을 당한다는 것은 끔찍하고 두렵다. 그래서 우리는 부당한 일을 당한 피해자에게 그 책임을 전가한다. 그래야 내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다.

세상은 정의로운 규칙이 있다.

나쁜 일은 불운의 탓이거나 사회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잘못된 행동탓이다. 피해를 당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공정한 세상에 대한 믿음이 사회적 특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위가 높은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이 지위가 낮고 소수인 사람들보다 더 공평한 세상 가설을 믿는다. 가진 지위와 힘을 통해 긍정적인 경험을 더 많이 하기 때문에 공정한 세상 가설을 더 믿는다.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는 게 더 안심이 된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미래에 대한 확신도 가질 수 있다. 개인의 문제로 불행이 생기므로 불행은 개인의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굳이 세상을 더 공정하고 정의롭게 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다만 조심할 뿐이다.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이며 탓이다. 그들의 상황을 우리가 개선할 필요는 없다. 이 세계관은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더욱 견고하다. 그리고 약자에 대한 공감을 떨어뜨린다.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은 그럴만한 사람이고 그런 일을 당해도 싼 사람일 수 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 성범죄의 경우 특히 그러하다.

여서은 범죄 피해자로 이름붙여지고 그 모든 원인을 피해자에게 묻는다 그리고 피해자의 행실을 따지고 운없는 한 남성인간의 미래를 걱정한다.

젠더 의식에 맞는 건물설계와 도시계획

어두운 곳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 곳을 나쁜 곳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언어의 사용방식은 사고를 구성한다.

마틴이 리사를 성폭행했다. 행위를 한 주체가 드러난다.

리사가 마틴에게 성폭행 당했다. 당한 행위가 더 크게 도드라진다.

리사가 성폭행 당했다. 누가 했는가는 사라졌고 리사만 남는다.

리사는 성폭행 피해자이다. 마틴의 행동이 리사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리사가 왜 성폭행을 당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왜라는 질문이 가해자 마틴이 아닌 피해자 리사에게로 향하게 만든다. 우리는 질문을 마틴에게로 돌려야 한다

범죄를 가장 확실히 막을 수 있는 사람은 그 범죄를 저지를 우려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소비

소비결정은 사회적 지위의 표식이다.

소비는 사회 불평등 메커니즘을 드러낸다.

구매행위와 소비 습관과 소비자의 사회적 위치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소비와 여가를 통해 경제적 차이가 상징적으로 번역디어 라이프 스타일을 만든다

과시의 목적으로 소비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가겨기 비싸서 대중이 구입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잘 팔리는 물품이 있다. 사람들은 특정상품을 비사다는 이유로 소비한다.

소비는 소속감을 드러낸다. 신분의 한측면이며 내가 그 신분에 소속되었음을 보여준다. 한정판, 래플 제도 등 같은 제품을 소비하는 것은 같은 무리가 되고 동질성을 갖게 한다. 제품은 신분의 또다른 측면을 보여주며 그것을 가졌다는 것은 남부럽지 않은 인맥을 가졌다는 것이고 그들과 같은 집단에 소속되었음을 의미한다.

개인의 결정은 없다. 그 뒤에는 그 결정을 부추기는 상업의 힘과 문화의 압력이 있다.

유기농 등 환경을 생각하는 좋은 소비라는 것 모유 수유라는 아이를 위한 모성같은 것들은 도덕적인 정언명령이며 시민 가치의 상징이 되었다. 동시에 계급의 우월함을 표현하고 사회 불평등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그것은 모두가 소비할 수 있는 물품이 아니다. 가격도 비싸고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노동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은 계급에서만 누릴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엄마에게 주부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며 우월감을 느끼는 소비다.

직접 기른 야채를 먹고 직접 빵을 굽고 페스트푸드를 멀리하는 것

가난한 사람은 그럴 시간도 돈도 없다.

지속가능성 우리의 일상적인 구매 실천이 윤리적 소비 결정의기회로 상품화 된다. 양심적이고 착한 소비라는 것도 하나의 마케팅의 결과다. 계속 새로운 자극을 주어 이미 없는 게 없는 사람드에게 이번에는 친환경 제품 착은 기업의 제품을 구매하라고 부추긴다.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은 지구를 구한다는 개인의 목적과 기업매출이라는 두가지를 다 달성시킨다.

관건은 포장과 라벨이다.

유기농 비건 채식음식 공정무역상품 등등 그것은 도덕심을 부추기는 새로운 포장이고 라벨이다.

지속가능한 라이프 스타일은 먼저 그럴 능력이 되어야 누릴 수 있다. 남들보다 도덕적인 인성을 갖추자면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내가 버린 쓰레기와 내가다. 그건 도시 빈민들에게 간다. 그리고 그들은 지속가능한 소비를 누릴 여력이 없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고 무지하다?

안전지대 안에서 얼마든지 선해질 수 있다.

정직한 공동체는 윤리적으로 바람직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런 공동체는 물질적 차이나 교육 수준의 차이가 도덕적 불평등으로 이어지지 않고 서로 다른 시각을 관용으로 대할 수 있을 때 생겨난다.

 

*관심

우리 사회의 가치 시스템은 외향성의 이상에 젖어있다. 행복하려면 사람들과 잘 어울려야 하고 자의식이 넘쳐야 하며 매사에 개방적이어야 한다고 그래야 삶을 열정적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믿고 최대한 자신을 잘 홍보할 수 있는 능력은 노동시장에서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이다.

이런 상항 탓에 내향적인 사람들이 겪는 불안 심리는 심리적 문제로 포장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마음이 불편하고 낯선 사람과 말 섞기가 불안하면 그건 대인공포즈이다. 스스로 무가치하고 작아지는 느낌이 들면 그건 자신감 결여이고 스스로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면 그건 열등감이다.

네트워크만큼 타인의 시선이 중요하고 타인의시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많은 곳도 없다. 사람들은 가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더 밝히기 위해 돈을 투자하고 생명의 위험까지 무릅쓰며 제일 강력한 브랜드는 너 자신이다 따위의 조언을 남발한다. 디지털 인기로 다시 투자금을 회수할 수도 있다.

설사 상업적인 이익이 없다고 해도 자기 연출만으로도 상당히 달콤하다.

그러나 디지털 관심이라는 이 새로운 화폐를 얻기 위한 경쟁은 고단하고 힘들다. 정보의 도구 만남의 플랫폼 소통과 인정의 수단으로 탄생한 디지털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실제의자아를 넘어서고 심지어 그것을 위협할 수도 있다. 우리는 침몰하고 낙오되어 아무도 모르는 인간이 될 수도 있으며 멸시와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빅브라더가 없어서 슬프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좋아요를 눌러주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속박당하고 싶은 위험한 충동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것만큼 비참하고 외로운 일은 없다 네트워크 속에서는.

 

*정치

복잡한 세상에서 단순함과 명확한 방향을 바라는 우리의 욕망이 있다. 고정관념이 그러하듯이 적개심도 방향을 제시한다.

 

 

 

나는 남들과 같아지고 싶다. 이 무리에서 소외되고 싶지 않다. 동시에 나는 남들과 다르고 싶다. 그들과 같이 엮이고 싶지 않다.

사람은 그렇다.

내가 원하는 무리에 끼고 싶은 동시에 나보다 약하고 열등한 무리에는 절대 끼고 싶지 않다. 그렇게 타인이 되어 배재되고 싶지 않다.

차별은 그렇다. 두려움에서 시작된다.

내가 차별당하고 싶지 않아서 기를 쓰고 차별한다.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떨어지면 세상 모두를 잃는다는 절망감에 차별한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내가 떨어지지 않기 위해 다른 누군가 내 자리를 차지하는걸 결사적으로 막기위해 다른 이를 차별하고 배제하고 따돌린다.

불안에서 내 자리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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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 1
이수정 외 지음 / 민음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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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인 사랑이야기

속이 시원해지는 반전 드라마들

그냥 편안하게 이야기가 들려주는대로 따라가 보면 고개가 끄덕끄덕 그래 그런거야

남자가 더 좋아해야 편한거야

저렇게 돌아다니면 얼마나 위험할까

저런 사람들이 없는 곳이 안전할텐데 요샌 왜 저런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지

우리 주위에 위험한 건 뭐가 없나?

내가 저기 살지 않아 다행이야

저렇게 날 확 당기는 놈이 있었으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텐데???

뭐 그런 혼자 모래집을 지었다 허물었다 하면서 이야기만 따라가면서 그냥 그렇게 산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다른 위치에 섰다.

내가 원해서이기도 할 때도 있고 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서 내가 선 위치가 바뀐다.

그러면 내가 아무 생각없이 팝콘을 씹으며 낄낄거리며 나름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정의감을 느끼고 낭만적인 사랑과 공감을 느꼈던 그 장면들이 불쑥 불편하다.

내가 변한걸까? 내가 뾰족뾰족한 가시를 곤두세운걸까

아.. 위치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몰리니까 사람이 이렇게 피폐해지는구나.

역시 사람이란 ... 하며 나를 탓해야 할까

 

낭만적인 사랑은 누구의 시선에서 낭만적일까

자기가 주는 우산을 받지 않는다고 공중전화를 마구 후려치는 행동이 터프하고 강한 사랑일까

내가 오로지 내가 너를 나의 옛연인의 환생이라고 믿는다는 이유로 멋대로 애정표현을 해대고

히어로를 돋보이기 위한 여러가지 난관들을 위해 여자를 잔인하게 강간하고 살해한다.

그걸 아무렇지 않게 보여주고

그리고 누군가 해결하면 끝이다.

과정은 필요없고 그 과정에서 상처입은 사람 누군가 힘들었을 타인들 소외받고 보이지 않은 취급을 받은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나의 히어로만 보이면 되고 만들어진 상황에 얼마나 몰입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영화를 문학을 사회단면들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건 중요하다.

세상에는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만큼 많은 시선들이 있고 보여지는 풍경이 있다.

나는 몰라도 상관없고 불편하지 않는 무언가 그래서 내게는 없는 것이 되는 무언가가

타인에게는 너무나 절실한 문제이고 삶의 걸림돌이다.

누군가 참으면 되는 평화 따위는  누군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자기 자리에서 노동을 하고 견뎌내기때문에 지속되는 사회는  불편해야 한다.

공주가 단 한톨의 콩 때문에 백겹 매트위에서 불편을 느낀 것처럼

어쩌면 나랑 상관없고 이번생에 나와 절대 스치지 않을 상황들과 사람들이 여전히 나와 같은 하늘아래 숨쉬고 있음을 예민하게 느껴야 한다.

 

어떤 남자가 말했다.

"뉴스에 나오는 끔찍한 사건들은 너무 끔찍하고 이상하니까 나오는거야. 그건 일상이 아니야 어쩌다 생기는 일이지. 세상은 뉴스보다 안전하다니까."

누군가에게 세상은 안전한 곳이다.

내가 다니는 길에 cc티비가 있고 안전하게 관리되고 청결하고 아무나 쉽게 들어올 수 없다. 나는 서울을 동쪽끝에서 서쪽끝까지 관통하는데 아무하고도 마주치지 않고 만나지 않고도 가능하다.

내 공간 내 자동차 내 집에서 나는 마스크 없이 안전하게 이동하고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세상은 뉴스보다 안전하다.

뉴스는 그냥 기이한 일이라 놀라서 떠들어대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그건 일상이고 매번 코너를 돌때마다 긴장하는 일이기도 하다.

 

폭력에 대해 범죄에 대해 누군가는 그냥 소비하는 유흥거리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삶을 내놓고 살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있다.

 

내가 본 영화들

그냥 팝콘을 씹으며 웃다가 감동하고 놀라서 눈을 가리던 그 이야기들

그것 역시 우리 이야기다.

그리고 다르게 보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한다.

 

이수정교수의 말들이 참 직선적이고 담백하다. 에두르지 않는 그 화법과 그럼에도 빈틈을 늘 놓치지 않고 골려대는 이다혜 기자의 유머도 좋다.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지점을 보는 언니들이 이렇게 많이 동참해서 함께 연대하는 것. 그건 참 든든한 일이다.

 

시즌 2가 시작했다는데 ... 비밀보장말고도 늘 듣고 싶은 게 늘어난다는 건 좋은 징조다.

 

ps.

책 말미에 나온 강간 의제연령문제나 궁박한 처지에 놓인 청소년들 가출팸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단순하게 무서운 십대가 아니라 그 아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몰렸는지 그리고 그 아이들이 그렇게 성매매를 하고 성인을 협박하고 폭력을 쓰는 그 상황을 어른의 시선으로 보고 어른이 고민하고 반성해야할 지점이라는 말들...참 좋았다.  이런 말을 하는 어른들이 많아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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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인권으로 한 걸음 - 가해자를 만들지 않는 성교육을 향하여
엄주하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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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교육 혹은 성폭력예방교육을 위한 강의를 위해 참고하기 좋다. 알고있으나 불명확한 인식을 아이들이 이해하기좋은 예시와 언어로 되어있다. 다 안다고 하더라도 대상에 맞게 전달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무엇보다 ‘가해자 되지않기‘라는 시각이 가장 맘에 든다 좋은 방향이다. 물론 다들 알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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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0-07-0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다 알고 있어”라는 생각은 무서워요. 평생 해야 할 공부를 하지 않게 돼요. 또 그런 생각 때문에 잘못된 언행을 저지를 수 있어요. 이런 자만심을 경계해야겠어요.
 
모두를 위한 성평등 공부 - 성평등 교육에 관한 여덟 가지 질문
이나영 외 지음 / 프로젝트P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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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예방교육 참고 도서로 구입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전달하는 건 정말 다른 일이다.

머리로 알고 있는 걸 내 언어로 풀어서 전달하는 건 쉽지 않다. 내 머리속도 정리안한지 한 참이라 어디에 뭐가 들어있고 어떻게 이어지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단 쉽게 정리된 책이 필요하다.

이제 이런 수준의 책은 제법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읽어도 읽어도 늘 새로운 건

내가 어쩌면 단기 기억상실증이 있는게 아닐까 싶다.

늘 새로우니 좋은 점도 있지만... 이렇게 계속 같은 자리만 맴돌면 어지러워서 어쩌나...

 

성평등에 대해 혹은 여성폭력에 대해 알고 싶다면 입문용으로도 좋고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자신을 믿을 수 없을 때도 좋다.

혹은 내가 아는 걸 쉽게 전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면 더욱 좋다.

아이랑 함께 읽어야지 라고 핑계대며 구입하면 더 실속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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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가 급한 탓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뭐든 결정해야한다는 꼰대기질이 있어서일 수도 있다.

아이에게 늘 이렇게 묻는다.

"이거라 저거 중에 뭐할거야?"

"이렇게 할거야? 아니면 저렇게 할거야?"

그래놓고 아이가 내켜하지 않으며 몸을 배배 꼬면 또 한 번 더 질문이 들어간다/

"엄마는 물어봤다. 니가 선택해야지."

아이는 마저못해 선택한다. " 이거 (혹은 저거)"

"니가 결정한거야.'

분명 아이에게 결정권을 줬고 최후의 선택은 아이가 한 거지만  아이는 뭔가 마뜩치 않고 속은 기분이고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든다. 이건 아닌거 같은데

그리고 나중에 이런 질문에 부딪친다

"니가 선택한거잖아. 내가 분명히 물어봤지? 니가 정하라고"

그리고 모든 책임은 아이에게... 어른인 나는 아이에게 결정권을 줬고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느낄 수 있도록 교육하고 이끈 참된 어른이 될까?

 

동의를 했느냐 아니냐는 문제는 간단치 않다.

세상에 모든 질문에서 세상의 모든 결정앞에서 백프로 나의 의견과 나의 입장과 나의 감정과 나의 이성으로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은 얼마나 될까?

반백인 나도 나의 지난 인생을 돌이켜보면 나의 결정이 정말 나의 결정이었을까 싶은 순간들 투성인것을....

사회적인 인식에 밀려서 이런게 정상이라는 사회적인 잣대에 밀려서

그래도 지식인인데 싶어서 내 본능과 상관없는 선택도 있고

남의 눈을 의식해서 어쩔 수 없이 골랐던 적도 있고

좋은 게 좋은 거지.. 다들 괜찮다는게 괜찮은 거 아니겠어? 라는 마음으로 한 결정도 있고

눈을 부라라진 않아도 무언의 압박과 내일 점심 도시락 반찬 걱정으로 내 용돈 삭감의 공포로 한 결정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데 이 정도는 괜찮은 거 아닐까? 내가 너무 까탈스럽고 이기적인 건 아닐까 하는 갈팡질팡하는 마음에  이런게 사랑이라는 압박에 내린 결정들 등등등

전날은 호쾌하게 내린 결정에 대해 다음날 마음을 바꾸는 것이 옳지 않다는 알 수 없는 자기 검열에 걸린 적도 있고 ....

동의는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삶의 순간순간 내가 결정해야하고 상대와 의견을 맞춰야 하는 일에서 모든 것이 나의 졀정권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점심 메뉴마저 그냥 남들 먹는대로 하는 마음으로 결정하는 게 많은데

여러가지 권력문제가 걸리고 사회적 입장 문제나 통념들이 뒤섞이면 내가 내 결정을 믿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동의는 중요한 문제다.

성적동의 역시 그렇다.

강간신화가 아직도 존재하고 그래서 강간문화라는 것이 그냥 장난처럼 암묵적인 풍조처럼 아직도 존재하는 지금  이다. 내가 강간을 당했음을 내가 입증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내가 전혀 동의하지 않았음을 보이는 증거로 들이밀지 않으면 쉽지 않은게 아직도 현실이다.

 

성적 동의는 나와 상대방의 신체적 자율권을 존중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마땅히 보여야 하는 신중함과 배려를 바탕으로 상대방을 대하고 내가 그런 것처럼 성 관계를 맺을 의사가 상대방에게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나의 신체 자율권을 행사하고 싶다면 당연히 타인의 신체적 자율권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모든 관계가 그렇지만 성관계 역시 상호 교류이기 때문이다.

 

섹스는 온몸으로 겪는 일이다. 동의 협상이란 이 가능성의 공간을 탐색하는 것이다. 나의 상대방이 각각 성적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것들 중에서 공통괸 부분을 찾아야 한다. 때로는 공통된 부분이 없을 수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고 서로의 성적관심사를 공유할 수 없을 수도 있다. 나를 좋아하지만 지금 당장 내가 하려는 것을 상대는 하기 싫을 수도 있다. 동의는 그렇다. 내가 상대와 함께 즐길 수 있는가?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을 맞춰가는 과정이다. 섹스든 다른 관계든 타인과 맺는 사이에서 한 쪽 일방만 즐거우면 그건 즐거움이 아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혹은 서로 호감을 가진 사람이 함꼐 즐겁고 함께 좋은 경험을 나눠야 한다. 그렇다면 동의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나의 즐거움만큼 상대의 즐거움도 존중하는 마음 그것이 동의의 시작이다.

 

경계는 내가 괜찮은 것과 괜찮지 않은 것들 사이에 놓인 선이다. 성적 상황 뿐 아니라 여타 사회적인 상황, 타인과의 일상적인 관계에도 관련이 있다. 실명을 공개하고 싶지 않은 마음. 소규모 그룹은 편하지만 불특정 다수의 모임은 불편한 마음 어떤 음식을 싫어하는 것 포옹보다는 악수가 더 좋은 것 개인이 자기 삶에 설정해놓은 사적인 경계들이다.

사실 내 경계를 아는 일은 무척 까다롭고 어렵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사실 그건 어려운 일이다. 남들이 좋아하는 것이라 나도 좋아하는 줄 알았고 마땅히 해온 것들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고 불쾌하지만 그걸 내색하면 예민하고 이상하게 보일까 말하지 못하는 것 그런 부분이 누구나 있지 않을까? 남이 어떻게 볼까 내가 이상한가? 문제가 있나 하는 마음에 내 경계를 타인에게 관습에 맞추는 일들....

경계를 알아간다는 건 시간이 걸리는 묹이지만 그건 알아야 한다. 혼자 정할 때도 있지만 자신의 경계에 대해 타인과 이야기해야만 개인의 자율권 행사와 사회적 규약 존중 사이의 갈등을 조정할 수 있고 서로의 경계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공간이 생긴다.

무례해 보일까봐 밀어붙이고 경계로 들어오는 것들을 허용한다면 ... 나의 불편함이 너의 무례함이 아니라 나의 까탈스러움이라고 하는 것들도 있다. 결과가 두려워서 그냥 용납하는 경우

그건 나의 신체적 자율권을 포기하는 일이고 상대의 신체적 자율권을 무시하는 일이다.

 

우리가 아는 섹스는 섹슈얼리티는 참 단순하다.

서로 좋아하고 손을 잡고 안고 스킨쉽을 나누고 키스하고 그리고 성기결합으로 이어지는 직선적인 과정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 사이에 다른 무엇이 끼어들 틈이 없고 단지 모든 단계는 성기결합을 (이성애자 남녀사이의)위한 전제조건일 뿐이다. 그렇게 이해되는 섹스에서 동의가 끼어들 곳은 단 하나 성기를 결합하느냐 마느냐 그것 뿐이다. 이런 이성애적인 담론과 함께 남자는 동물이고 흥분을 하면 참을 수가 없는 존재라는 남성성욕담론은 남성의 강간을 이해하고 어쩔 수 없다고 관대해질 핑계가 된다. 그렇다면 여성은? 남성보다 성관계에 소극적이고 안정적인 애정관계에서만 끌리는 요조숙녀라는 틀은 모든 섹스의 결정은 여자가 가진 것처럼 보여진다. 흥분앞에 제정신이 아닌 남성을 잘 구슬러서 안정적인 애정으로 관계를 해야하는 의무와 책임은 여성에게 있다고 본다. 그러니 그런 관계 이외의 모든 섹스는 음탕한 여자라는 낙인으로 이어진다.

흔히 비유되는 성녀와 탕녀의  두가지 뿐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자유연애가 등장하고 남성과 다르지 않은 성적 결정권을 가지는 적극적이고 현대적인 여성이라는 담론에서 모든 관계에서의 책임은 신여성인 그녀들에게 돌린다. 소극적이면 구태의연한 것이고  적극적이라면 신여성이라고 치켜세우면서도 뒤돌아서서는 성녀와 탕녀의 담론을 들이댄다

 

성적 결정권이라는 것 이것이 자율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관계에는 권력이 존재하고 권력은 다각적이고 다차원적이다. 명백히 자율적인 개인의 선택이란 쉽게 가려지지 않는다.

 

이 책은 성적 동의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결국 동의란 성적인 문제 이외의 부분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하는 문제다. 우리의 일상 전반에 침실 바깥의 상호관계에 진정한 동의 문화는 필요하다. 동의는 친구, 가족 동료 모르는 사람과의 소통에서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동의를 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어리고 도움이 필요하고 아직 세상의 결정을 내리기엔 미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먼저 살고 많이 알고 많이 경험한 나읙 결정이 절대적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게 옳다고 얄량한 나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리곤 주관대로 쥐어준 선택을 들먹이며 책임으로 옭가묶었다.

동의를 경험하지 못했고 동의를 배우지 못했다면 아이는 자라서 또다시 누군가에게 동의를 앗아갈 것이다. 그렇게 자랐으므로..

내가 편안한 경계에 대해서도 알지 못할 것이고 누군가 내 영역을 침입해도 예의라거나 사회 문화라는 이름으로 용납하고 참고 견딜 것이고 폭력으로 이어지더라도 그런 상황까지 몰고간 나의 탓으로 모든것을 돌릴 수도 있다. 그리고는 어디선가 폭발하고 누군가에게 그렇게 폭력을 가할 지도...

 

가장 기본이지만  늘 잊고 사는 것

편하고 쉽고 당연한 것이라고 믿고 그냥 밀어붙이는 관계는 위험하다.

간혹 느끼지만 당연한것이 가장 위험한 것이다.

동의에 대해 오래 생각해본다.

 

책은 처음에 많은 기대를 갖게 했다. 쉬운 말로 동의를 설명하고 쉽게 풀어가서 좋았는데

사실 그게 전부라 아쉽기도 하다.

다만 동의란 무엇보다 중요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걸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음은 확실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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