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억중에 하나다. 이것이 진실인지 혼자만의 상상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사실에 상상이 더해진 것일 수도 있다.

등에 동생을 엎은 엄마 손을 잡 고 시장엘 갔다.

장을 보긴 했는지 무얼 샀는지는 기억나질 않는다.

그냥 그 시장 어느 모퉁이에서 무언가를 모여서 구경했던 기억이 있다.

떠돌이 약장사였는지 어떤 시장 공연인지도 모르겠다.

구경을 했었고 혹시나 사람 틈에서 엄마를 잃어버릴까봐 동생을 둘러 엎은 포대기 끈을 잡고 있었다. 엄마 손을 잡지 않은 건 어쩌면 손에 물건들이 있었기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한 참을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다가 고개를 돌리니 그 곳에 엄마가 없었다.

내가 붙들고 있었던 것은 포대기 끈의 끝자락이 아니라 어떤 할머니가 입은 저고리 고름이었다.

내게 고름이 잡힌 그 할머니는 빙긋 웃으며 이제 다 봤냐 집에 가자.. 그러면서 나를 집에 데려다 주었다. 분명히 데려다 주었을 것이다. 혼자 간 기억은 없으니까

그 할머니가 누구인지 지금은 모르겠지만 아마 나를 알거나 우리 가족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갔고 엄마에게 왜 먼저 돌아갔냐고 떼를 쓰거나 따지지 않았다.

그때 내가 어떤 반응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때 감정은 떠오른다.

그때 내가 가진 감정은 체념이었던거 같다.

뭐 그렇지 뭐...... 그런 마음

가족이 많아서 언제나 바빠서 마음 편히 시장 구경도 못할 엄마를 이해한 건지

등에 엎은 아이는 처지고 장바구니는 무거워서 더 이상 서있을 수 없었던 그 상황을 이해한건지

그건 모르겠지만 그냥 내가 이해해야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을 뿐이다..

내 기억은 그것뿐이다

그 초기 기억이 어떤 작용을 했했는지 하긴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아주 어릴 적 기억이라는 게 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무심하게 떠올랐을 뿐이다.

억울했다거나 화가 났다거나 하는 마음은 아니었다.

이미 어른이 되어버렸기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뭐 그런 때도 있었구나 하는 마음 뿐이었다.

그 때 이후 나는 무언가 달라졌을까?

나는 그 기억을 그날 집단 상담때 이외 누구에게- 가족에게 도 한 적이 없다.

 

 

 

 

 

 

 

 

 

 

 

 

 

 

 

 

 

 

 

 

 

 

 

 

 

 

헤어진 여자친구가  전에 선물했던 시계를 돌려달라고 연락이 왔다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시계를 돌려주는 일이 주된 스토리는 아니었다.

유학을 떠난 여자친구를 위해 연락도 하지 않고 미국으로 간 남자의 이야기도 그들의 극적인 러브스토리가  주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한때 엄마 아빠가 동물원에서 버리려고 했다고 믿는 삼남매의 이야기도 그 비정한 부모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암투병으로 세브란스 지하에서 보낸  어두운 시간의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그런 투병기도 아니었고 다른 이야기들도 마찬가지였다.

간혹 첫 문장이 이야기 전체를 보여줄 때도 있지만 그 이야기도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다.

이야기는 맥락없이 시작했다가 느닷없이 마무리괸다.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이었고 소소하고 무심했다.

때로는 나의 사소한 이야기가 전개되고 때로는 그저 누군가에게 들었던 이야기들 이젠 기억이라고 하기엔 주관이 너무 들어가버린 희미한 그림자같은 것도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이어서 후회조차 소용이 없는 이야기들도 있다.

남에게 털어놓기에는 소소하고 시시한 이야기들이지만 그래도 내겐 어느 순간 느닷없이 떠오르는 기억이고 상처일 수도 있고  변화였던 이야기들이다.

이미 시간은 흘렀고 이젠 그저 되새김질 하는 것 이외엔 어떨 도리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히지 않는 것... 무심하게 들었거나 보았지만 내게 순간 의미로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살아가다보면 대단한 사건들이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온나라가 온 세상이 들썩이는 일들은 분명 역사를 바꾸기도 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어떤 무늬를 만들어 내는 게 분명하지만 때로는 사소하고 나만 알고 넘어갈 수 밖에 없는 누구에게 말하기 쑥스럽고 애매한 것들이 삶의 각도를 바꿀 때도 있다. 아주 미세하게 누구도 타인은 알아차릴 수 없지만 그럼에도 내 삶이 바뀌어버린 그런 변화를 가진다.

단편속의 인물들은 대단한 사람은 없다.

물론 그들이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 중엔 대단하고 위대한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

그 주인공들이나 대부분의 인물들은 그저 우리곁을 스치는 사람들이고 지나가다 보아도 눈에 띄지 않는 그냥 그런 희미하고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겪는 소소한 일들이 어느 순간 삶의 각도를 미묘하게 벌어놓는다.

그리고 그 이전의 나와 달라진다. 뭐가 달라졌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을 할 수는 없다.

그건 나만 느끼고 나만 알아차리는 변화이니까...

 

사실 처음 이 단편을 읽었을 때는 그냥 그랬다.

좀 소녀취향인가 싶었고 뜬금없고 느닷없다는 기분도 들었고  심하게 말해서 한편한편이 너무 널뛰는 거 아닌가 싶었다.

 

몇해를 보내고 다시 읽는 지금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무언가가 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그런게 없는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생각도 했다.

이어 쓴게 아니라 시기를 달리해서 다른 매체에 그때 그떄 써서 기고했던 작품들이라면 저마다 다른게 당연하다.

그동안 단편집에서 찾아내던 전체를 흐르는 무언가는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평론가의  발견이거나 나 개인의 착각일것이다.

그저 내가 경험했던 무언가와 내가 기억하는 어떤 정서들과 책을 읽는 지금 내가 가진 주위 환경과 나의 마음의 상태가 더해져 그 책에서 무언가를 찾아낼 뿐이다.

바람같은 사랑이나 이미 소멸해버린 무언가를 향한 손짓같은 건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무언가 일 것이다.

내가 가진 내 기억의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그건 나의 기억이고 나의 시간이다.

내가 기억한 모든 조각과 내가 느낀 정서의 조각들을 끌어모으면 내가 될까

그렇게 완성된 나는 어떤모습일까

지금 이순간 나이 먹은 나와 같은 모양일 수도 아닐 수도.....

그냥 의미없을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 그리고 그 작은 조각조각마다 의미가 있을거라고 믿는 것 그것만 남을 뿐이다

단편을 읽는다는 건 그렇다

별 거 아니지만 별난... 그런 묘한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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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한 번 넘어진 모퉁이에서 다시 넘어지는 일이 빈번하다.

한 번 경험했다면 같은 실수를 다시 하지 않은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의 행동이겠지만

한 번 이상 모퉁이에서 넘어졌다면 이제 모퉁이만 보면 넘어질지 모른다고 긴장하고

그 긴장감이 다시 넘어지는 일로 이어질 수 있다.

아이가 매번 같은 모퉁이에서 넘어지고 있다.

다만 이젠 그 모퉁이를 주의해야 한다는 걸 안다는 것이 다행이랄까

다만 살아가면서 그 모퉁이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니까....

왜 그 모퉁이를 지나가냐고 다른 길은 생각하지 않냐고 아이를 탓하기도 했고

뭔가 다른 길을 모색하지 않거나 그 모퉁이를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다른이들과 비교하며 윽박질렀지만 그건 정말 소용없는 짓이다.

그저 그 모퉁이를 돌때 마다 긴장하지 말라고 하고

넘어져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미리 무릎 보호대라도 준비해주는 것밖에...

살면서 몇번의 모퉁이를 돌아야 할테고 늘 혼자 그 곳을 돌아야 할테고

그 모퉁이를 없앨 수도 없다.

아이가 크면 부모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지켜보는 것 뿐이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며 예쁜 표정을 유지하면서...

괜찮다고 하면 괜찮다고 같이 말해주고

괜찮지 않다고.. 괜찮고 싶지 않다고 하면 그래도 된다고 하고

모퉁이를 미워 어쩔 줄 몰라하면  함께 미워하고 욕하지만.. 그래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해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책을 읽을 뿐이다...

 

 

 

 

 

 

 

 

 

 

 

 

 

 

 

저자가 제각각 관심분야를 독립영화로 찍는 다른 동료들을 인터뷰해서 책을 엮었다

여성 장애인 성 소수자 이주노동자 군대문제 동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영화를 제작했던 나름 분야에 대해 전문가이고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나는 그들 개개인의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었는데

책의 구성은 저자가 자기 생각을 풀어나가면서 인터뷰한 사람들의 말을 인용처럼 들어간다.

저자의 생각도 건강하고 좋지만  인터뷰를  했다면 그들의 생각들을 조금 더 깊이 듣고 싶었다.

                                                                                 

우리가 혐오를 반대하는 잉는 자명하다. 혐오는 인간의 존엄성을 사산조각내고 그 사람을 하찮게 여기도록 한다. 차별과 혐오는 바늘과 실이다. 누군가를 차별하면 그 대상을 혐오하는 것이 당연해진다. 차별당하는 사람을 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긴다. 혐오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차별과 혐오는 악순환이다.

우리가 혐오에 짐식되지 않고 혐오와 싸워 이길 유일한 방법은 타자에 대한 공감뿐이다. 고감이란 내 주변에 항상 있지만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내가 혐오하는 사람들이 낯선 타자나 이방인이 아니라 실은 나의 다른 얼굴이라는 사실을 단지 아는 것이 아니라 개우치는 것이다. 공감할 수 있다면 소통할 수 있다. 소통하면 이해하게 된다. 이해하면 더는 혐오할 수 없다. 그런데 고감 없는 이해는 오만한 해석이 되기 쉽고 이해없는 공감은 극단으로 치우치기 쉽다. 그러므로 공감하려면 알려는 의지가 즉 상대방을 이해햐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머릿말에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과 누군가를 혐오하는 일은 다르다.

사람이 세상 모두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없는 것을 뒤집어 말하면 모두를 사랑하고 이해할 수 없다. 내 감정에서 내 정서에서 내 상식에서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건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기도 하지만 절대 변하지 않기도 한다.

그건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다,

 다만 내가 싫어하는 대상에 대해 공공연하게 떠들면서 누구든 그 대상을 미워하도록 만든다면 그건 혐오가 된다.

사실 나는 아직 불법 이주노동자가 두렵고 개인적 양심때무에 병역을 거부한다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들다.

모두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안다

여자가 다 성녀이거나 창녀가 아니듯이 이 땅의 모든 남자들이 한남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사람이 아니듯 외노자라고 다 흉악범죄자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인식하는 것과 내가 느끼는 것은 다르다

요즘 많이 언급되는 "청년경찰"에서의 차별과 혐오의 문제를 문제라고 머리는 생각하지만 나는 내가 대림동을 가거나 외노자와 어울리고 싶지는 않다. 그럴 기회도 많지 않겠지만 나는 마음 한 구석에서 그들이 무섭다

책에는 중국인들이 많아지면서 시끄러워지고  다툼이 일어나고 그 다툼이 그냥 주먹다짐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칼부림으로 이어진다면서 그렇게 사건이 일어나도 순식간에 피해자도 가해자고 그리고 뿌려진 핏자국도 사라진다고 했다. 그만큼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불법 체류자이기때문에 집혀가는 것이다. 그만큼 그들이 차별받아서 내면에 두려움이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왜 하필 소소하다는 다툼조차 칼부림이 나야하는가에 방점을 찍는다

외노자에게 쉽게 "니네 나라로 가라"고 하거나 외국인 신부들의 주민증 발급을 거부하는 남편들의 이기심등을 들으면 참 인간으로 할짓이 아니다 라고 분노한다. 외국인이라고 피가 붉지 않은게 아니라는 말처럼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반응은 오원춘 사건이나 떠도는 장기밀매 이야기들이 더 가깝다. 그들로 인해 거리가 더러워지고 다니기 두려워지는 일이 우선이다. 이것조차 혐오라고 생각을 하면서 쉽게 그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군대문화는 이미 군대만의 문화가 아니다. 그건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모두 통용된다.

군대 다녀온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군대 경험 혹은 군대에서 축구하는 이야기가 가장 지루하고 거부감드는 주제라는 것에 동의하고 세상의 질서가 군대처럼 억압적이고 상명하달이라는 것에도 거부감을 느낀다. 군대가 인간성을 말살할 수 있고 폭력적인 문화가 어쩔 수 없이 강하다것도 안다.그럼에도 나는 개인적 혹은 종교적인 이유로 병역의 의무를 거부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누구도 자진해서 가고 싶지 않은 곳이 군대다. 연예인 누구누구가 해병대를 가고 어린 나이에 군대를 자원했다는 이야기가 미담처럼 나올 수 있는 것도 그만큼 가고 싶어하지 않은 것이 더 크다는 반증이 아닐까 . 할 수 있다면 누구나 거부하고 싶지만 병역의 의무라는 것때문에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가야하는 거라는 것때문에 누구나 참고 기왕이면 좋게 가고자 할 뿐이다.

누군가의 종교상의 이유가 그리고 폭력과 군대문화를 받아들일 수 없는 양심이 존중받아야 한다면 가고 싶지 않아도 갈 수 밖에 없는 어쩔 수 없음도 존중받아야 한다. 나도 가서 2년을 뺑이 돌았으니 너도 가야한다. 너만 빠지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은가 하는 마음이 아니어도 누군가는 폭력에 무감해서 그 문화애 대한 예민함이 없어서 갈 수 밖에 없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양심이 나의 의무와 충돌할 때 결국 병역대신 처벌을 받아 감옥에 가는 것을 택하는 것이 차라리 나은지 ,,, 사실 여자라서인지 잘 모르겠다. 이제 군인아저씨가 아니라 군대간 아들이라는 표현이 더 가까운 나이가 되면서 누군가는 가장 빝나는 시기에 혹은 내가 가장이 되어야 하는 그 사간에 그냥 오롷히 흘렬 버리도록 감내하는데 누군가는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게 조금 이해가 가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든다.

 

나는 혐오가 어떤 것인지 잘 안다.

나보다 약한 대상에게 흘러갈 수 밖에 없는 것이 혐오다.

나를 힘들게 하는 대상이나 제도는 다른 것인데 그 적확한 대상에게는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가장 만만하고 쉬운 상대에게 그 화풀이를 한다. 죽어라 한놈만 패는 것처럼 그렇게 나보다 약하고 만만한 대상을 미워하고 증오한다.

내가 취업을 못하거나 모든 욕망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건 잘못된 경제의 흐름이거나 제도의 부재때문일텐데 그건 너무 어렵다. 다만 내 옆에 그저 남자 말이나 듣고 고분고분해야할 여자들이 직업을 가지고 나와 경쟁하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희 나라에서 살지 왜 이 한국까지 기어와서 일하려는 외노자들이 나의 경쟁상대가 된다.  내가 가진건 신체 건강한 군필자라는 것  사내라는 것인데 이제 세상은 부드럽고 자상한 남자들을 원한다. 남자라는 존재가 더 이상 한가지로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와 다른 사람이 역겹고 성소수자의 취향은 변탵스럽고 병적인 것이 된다. 장애인은 그저 돌봐주어야 하고 복지예산을 가져가는 짐스러운 존재다.

그들이 내 앞길을 막는다.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나를 화나게 한다. 그래서 밉다

그래서 싫고 사라졌으면 내 앞에 납작 엎드렸으면 한다. 그런 마음이 나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좀 더 과격하게 드러내고 공격한다.

그 모든 약한 존재가 사라지면 나는 편할까?

외노자가 사라지고 모든 아들들이 군대를 가고 나면 내 마음은 조금 더 편해질까?

모르겠다.

 

혐오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조금의 교양과 상식만 있다면 세상에 많은 혐오를 알 수 있거 거부감을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교양있는 사람이니 남들의 시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조금 더 진보적이고 조금 더 꺠어있는 주장을 할 수 있지만 내 마음은 조금 불안하다. 그들이 공격할지 모른다는 불안과 함께 나누고 싶지 않다는 욕심과 알고 이해하지만 그건 나와 그들이 다른 바운더리에 있을때 이야기이지 나와 함께 같은 공간에서 무언가를 나누어야 하는 순간이랴면  비겁하게도 나도 자신은 없다.

그래서 자꾸 이런 책을 읽는다.

모두 안다고 생각하지만 이제는 진부해져버렸지만./ 그래도 읽어서 자꾸 내 마음을 다시 다독일 필요가 있다.

내 속의 미움이라는 감정이 언제 불쑥 혐오가 되어 튀어나올지 나도 불안하기 때문이다.

 

공동체 사회를 인간 이상으로 확장해서 동물권에 대해 이야기해 준 6장은 새로운 세상을 내게 보여주었다. 

 

 

 

 

 

 

 

 

 

 

 

 

 

 

 

 

 

누구나 다 아는 유괴사건이 있었다.

아이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집을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의 비명소리 아이의 겁에 질린 표정이 찍힌 사진이 집으로 오지만 아이의 행방은 오리무중이고 범인도 알 수 없었다. 친구 아버지가 용의자로 몰렸지만 정황이 충분하지 않다.

49일 후 아이는 돌아왔다.

아이는 49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모두가 아이에게 그때의 일을 묻지만 아이는 그저 집을 나가기 전 토요일에 본 주말의 명화가 기억의 끝이고 중간의 49일은 통째로 사라졌다.

아이는 자기가 기억못하는 그 49일을 자기보다 더 잘 아는 주위사람들 아니 모든 사람이 더 두렵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해야할지 이미 답을 정해놓고 다그치는 사람들이 무섭다. 아이네는 이민을 갔고 성인이 되어  모두가 이제는 기억하지 못하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아이가 유괴된 49일간 사라진 또 한명의 아이가 있었다.

 

이야기는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누구나 아는 사건안에 아무도 모르는 기억이 있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내가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기억을 지워버린다. 단지 살기 위해서 나를 위해서 기억을 지운다. 없던 일처럼 만들어버린다.

어른이 된 두 소녀는 가장 아픈 그때의 기억이 없다.

그러나 그 기억은 예고도 없이 돌아온다.

그것도 완전한 형태가 아닌 퍼즐조각처럼 복잡하게 얽히고 조각난채로 내게 두서 없이 돌아온다.

소녀들은 용기를 내어 기억을 직면한다.

아파서 잊었던 기억을 아프지 않게 위해 다시 꺼집낸다.

살기 위해 잊었던 것을 이제 살려고 기억해내려고 한다.

직면하는 일은 언제나 두렵다.

그 깊은 망각속에 어떤 괴물이 어떤 모습으로 숨어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 망각이 내 것이지만 내 속에 숨은 깊은 우물이지만 나는 나의 우물을 들여다 보는것이 제일 무섭다. 그러나 봐야 한다. 내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걸어가고  빛을 향해가기 위해서 봐야 하는 것이 그 우물이다.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우물속에는 괴물도 있지만 그 괴물은 생각만큼 흉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젠 작은 개구리가 되어 내가 충분히 마주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기억하지 않은 나는 내가 아니다

군데군데 지워져 버린 모습은 나의 완전한 모습이 아니다.

나를 구성하는 건 뼈와 살과 피와 함께 나의 기억들이다.

누구도 이젠 나를 알아보지 못해도 나만은 나를 알고 있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나만 모른다면 나는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너무 힘든 고통은 잊고 싶다.

사라져서 아무도 아니 적어도 나만 몰랐으면 좋겠다.

너무 힘들다면 깊이 쑤셔 놓아도 괜찮다

다만 너무 늦지 않게 그렇게 방치하고 감춰둔 것을 다시 꺼내야 한다.

그건 괴롭고 무서운 것만 있는게 아니라 가장 여리고 보드라운 내가 함께 견디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나를 찾는 일이 기억하는 일이다.

단순하지만 몰입감있게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청춘시대2>의 등장인물 중, 데이트 폭력 피해자 예은이 있다.

전편에서 폭력을 경험하고 생존했고 심리치료를 받고 있고 학교를 휴학했다가 다시 복학했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밤길 남자. 혼자 다니는 것 누군가 나를 바라보는 것 모든게 두렵지만 무엇보다 그런 피해를 당한 내가 무언가를 잘못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나빴기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다.그건 타인이 쉽게 내뱉는 말일 때도 있고 나 스스로 끊임없이 되묻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피해자인데 내가 가장 상처입고 폭력을 당했고 살아남았는데 그는 멀쩡하게 죄값을 치르고 캐나다로 가버렸고 나는 여기서  두려움을 눌러가며 타인을 두려워하며 살아가야한다. 게다가 험한 뒷담화도 내몫이고 남들의 편견이나 의심도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한다

폭력자체도 두려운데 그 폭력에 젠더가 개입하고 남녀 관계가 얽히면서 문제는 이상하게 꼬여간다. 때린놈은 나쁜 놈 맞은 놈은 당한 놈이라는 칼로 딱 잘라버릴 정리가 되지 않는다.

도데체 어떻게 행실을 했길래..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는 의심부터 이제 남사스러워 어떻게 살래? 이제 걸레잖아. 하는 혐오까지 모조리 피해자의 몫이다.

폭력을 당해서 살아남아도 또다시 잔펀치들이 훅훅 들어온다. 그땐  배려라거나 관심이라거나 충고라는 이름을 달고 들어오지만 그것도 폭력이다.

드라마 흐름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은이 언제나 겁에 질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메들과 웃고 똑 소리나고 얄미운 조언을 하기도 하고 괜찮아 보일 때도 많다. 이제 시간도 제법 흘렀고 잊을 만하지 않은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다시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참 많이 애쓰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닌척 괜찮은 척...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남들에게 폐끼치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힘들었겠구나 싶었다.

 

강화길의 소설들을 읽으면 모든 인물들이 괜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한다.

모두가 아프다. 과거 폭력의 경험이 있고 버림받은 기억이 있고 남들에게 뒤쳐졌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더이상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고 내 자식에게 그런 낭패감을 물려주고 싶지 않고 관계에서  소외받고 싶지 않다. 모두가 힘들고 아픈데 관찮은 척 한다.

아무렇지 않은 말간 얼굴고 남의 일인것처럼 그림자를 못 몬척 하고 애를 쓴다.

모두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아프다고 악! 하고 소리지르며 주저앉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괜찮지 않고 남들보다 뒤떨어지고 문제가 있는 사람이 되어버릴테니까 절박하게 괜찮은 사람인양 미소짓는다.

그 미소가 슬프다.

사실 단편들을 모두 읽지 못했다.

처음 나온 <호수 - 다른 사람> 을 읽고 너무 힘들어서 그만 읽고 싶었다.

이후 몇편을 더 읽었지만 모두가 너무 힘든 인물들이었다.

괜찮다고 위로하기엔 그 위로가 어줍잖아질 것같이 모두가 제 고통속에서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웃고 있었다. 위로를 거부하는 얼굴들이다.

<호수- 다른 사람>의 주인공이 마지막에 해야할 일을 했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순응이 아니라 차라리 폭력일지언정 세상을 향한 저항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픈 사람들이 아프다고 말하고 나를 치료하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세상이 정말 좋은 세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이건 강화길보다 더 강하다.

첫 단편부터 읽기가 너무 힘들었다.

이럴거야.... 이럴지도 몰라.... 이러지 말았으면..... 그것만 아니었으면..

하는 사건들이 쉴 틈도 주지 않고 훅훅 치고 들어왔다.

여자가 당할 수 있는 모든 폭력이 종합셋트처럼 펼쳐진다.

감금 강간 폭력  비하. 혐오. .....

그러나 록산 게이의 여자들은 그 모든 상처를 직면하고  다시 일어선다.

더 이상 일어날 수 없고 그대로 주저 앉아도 그만일 상황에서 모두가 다시 일어서고 현실을 마주한다. 모두가 약한 여자들이었지만 동시에 강한 여자들이다.

어려운 여자란... 어려운 일을 경험한 여자들이지만 어떤 폭력에도 쓰러뜨리기 어려운 여자들 강한 여자들이란 의미였을까?

마지막 단편은 저자의 경험이 아니었을까? <나쁜 페미니스트>에서도 봤던 에피였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 멋진 책을 써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약하고 쉽게 부서질수 있는 존재지만... 무언가 부서줬다고 그대로 주저 앉아 버리는 존재는 아니다.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괜찮은 사람이다.

내가 경험한 기억이 아름답든 추하든  그 모든 것이 나라는 것을 직면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누구를 미워할 수는 있지만 누군가를 따돌리는 혐오는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나도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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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고 글씨도 커서 쉽게 읽힌다,

슬픈 건 이렇게 큰 폰트의 글자도 이젠 읽기가 힘들만큼 노안이 심해졌다는 것

내내 안경을 올리고 읽었다, 슬프게도

이다혜 기자는  씨네 21보다는 팟빵 빨간책방을 통해 더 잘 알게 된 작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인지 말이 빠르고 간혹 이동진의 말을 끊고 들어올 때도 있어서

가끔은 불편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틀린 말은 하지 않는구나 싶을 때도 있었다.

긴장하면 말이 빨라지는 건 나도  마찬가지라... 불편하지만 불편하다고 하기도 불편한 것이었고

많이 읽고 많이 노력하고 많이 애쓰며 살고 있다는 느낌...

잘 알지 못하지만 참 열심히 사는 모습이 말투속에서 쓰는 언어들 속에서 느껴져서 그냥 모르지만 좋아하지도 않지만 응원하게 되는 편이다,

 

이 책은 너무 얇다, 글씨도 커서.. 그에 비해 가격이 비싸다,

전반적으로 책값이 너무 비싸긴 하지만,,,가끔 무식하게 글자 수에 따라 혹은 페이지에 따라 가격이 책정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쓸데없이 말이 많아지는 책들이 더 많아지려나?

그냥 알고 있는 이야기도 있고

스스로를 많이 오픈해서 저자에 대해 알게 되는 이야기도 있고

그냥 끄덕거리면서 읽다가  가운데 부분  <소녀들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부분이 너무 좋아서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른 책에 대한 부분은 빨간 책방에서 말하는 논지와 조금 겹치기도 하고  별다르지 않지만

고등학교에 가서 했었던 강연을 정리했다는 저 부분은   여학생시절보다 조금이라도 더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거고 누구나 후회할 수도 있는 부분 그리고 누구도 말해주지 않지만 결국은 눈치로 체득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을 드러내고 이야기해준 것만으로도 고맙고 시원하다,

그 부분을 모두 옮길 수도 없고...

그 또래의 여학생이라면 딸이있다면 읽어볼 만하다,

엄마나 선생님 말은 죽어도 안들어도 누군가 언니같고 선배같은 이의 말은 또 찰떡같이 들을 나이인지라... 괜찮았다.

 

세상에는 나도 모르게 형성되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많은 차별이 있다,

남자와 여자

대학생인가 대학생이 아닌가

중산층인가  기초수급자에에 가까운가

가끔 나는 어떤 부분에서는 차별을 당하는 존재 이며 동시에 어떤 부분에서는 누군가 선망하는 존제가 되며 나도 모르게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게 폭력이 될 수 있는 사람이다,

 

가난하다는 것이 단순히 돈이 없다는 문제여서 개인의 노력으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가난을 경험하지 않았다... 라는 문장이나

선택이라는 단어자체가 대상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벽이 될 수 있는 사람도 있다는 말,, 누구나 쉽게 자유롭게 선택하며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라고 말하지만  그 선택조차 다시 태어나는 것부터 바꾸지 않으면 아무런 선택지가 없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그 글 말미에 가해자의 선택이 아니라 늘 피해자 특히 여성의 선택에 더 많은 의미와 존중이 들어간다는 말도 공감한다. 남성들에게는 왜? 라고 어째서? 라고 묻지 않은 것을 여성에게는 따른다는 말도 그렇다,

얼마전에 읽고 다시 감동했던 <제인에어>와 <광막한 사르가소의 바다>의 이야기가 나와서 좋았고   "당신을 당신 딸이라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 스스로에게 사주고 싶은 것 어떻게 달라지나요?스스로에게 자학하며 던지는 말을 딸에게라면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라는 대목에선 나도 뭉클하고 눈물이 났다.

더위를 피해 냉방이 잘 된 카페에서 시간 죽이기 용으로 읽기도 딱 좋았지만 그 이상으로도 괜찮다.

 

 

 

 

 

 

 

 

 

 

 

 

지난 번 읽었던 이 책과 함께 내 딸에게 읽게 하고 싶은 책목록에 넣는다,

먼저 쉽게 이다혜의 책을 보다가 이 책을 보면 괜찮겠다고 혼자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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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사람 저사람 나와서 인터뷰하는 거랑 여러사람이 갑자기 등장하는 부분만 넘기면 정말 책장이 저절로 넘어간다, 시간이 금방 간다,

엄마들이란  호주나 한국이나 다를게 없구나

엄마들사이에서도 여왕벌이 있고 돼지 엄마가 있고 소문을 몰고 다니는 여자들이 있고 이유도 모르고 왕따를 당하는 엄마도 있고 목소리가 크고 정의롭기만 한 엄마도 있고 아름다워서 질투를 받거나 무조건 추앙을 받는 엄마도 있다,

아이들 사이의 왕따나 따돌림이 아이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그런 엄마가 되고 또 그런 아이들을 만든다,

한편 폭력을 보고 자란 아이는 폭력을 쓰는 사람이 되고 자기도 모르게 또다시 폭력을 쓰는 아이를 기른다, 거울도 안보는 남자마냥 스스로의 얼굴을 알지도 못하면서

 

여기서 말하는 사소한 거짓말은 무엇이었을까 페리가 섹스 뱅크스라고 속인 거짓말?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셀레스트는 자기가 가정 폭력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타인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숨긴다,

제인은 귀여운 아들 지기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그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를 쉽게 말할 수 없다,

매들린은 전 남편 네이선의 가족이 한동네 한 학부형이라는 사실을 공개하지만 그 속내까지는 꺼낼 수 없다.

저 여자들의 공통점은 뭔가 문제로 아파하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내 잘못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셀레스트는 끊임없이 페리를 쪼개며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분리해내고 자꾸 좋은 면을 생각하려고 하기만 하고 제인은 그날 밤의 사건이 자기가 처신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며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고 매들린은 화끈한 만큼 걱정도 많다.

셀레스트가 가진 문제가 가정폭력이라면 제인의 문제는 일종의 데이트 폭력이다.

폭력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생각하지만  내 잘못도 있다는 데서 오는 죄책감과 그 나쁜 남자가 한편으로는 좋은 아빠이고 좋은 남편일 때도 있다는 생각이 혼란을 가중시킨다.

나도 함께 때렸으니까 내가 먼저 저 사람을 도발했으니까 라고 자꾸 자기의 문제를  생각하고 그가 다시 다정하고 친절하고 나를 부유하게 만드는 일에 더 중심을 둔다. 내가 맞고 있고 그가 때리고 있다는 사실은 자꾸 뒤로 미뤄진다. 그렇게 멍해지고 몽롱하게 길들여간다,

그날 그 바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과 이야기하지 않았더라면 함께 엘리베이트를 타고 룸에 가지 않았더라면... 거기에 내가 알고 있는 내 단점 나는 뚱뚱하고 예쁘지 않다는  점을 노골적으로 비웃었던 사실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가 못생겨서 냄새가 나서 역겨워서.. 그런 일을 당한걸까? 그 생각이 내내 떠나질 않고 누굴 만나도 그날 그 말이 나의 삶의 판단 근거가 된다.

매들린도 어쩌면 남편이 생후 한달되 딸과 자신을 버리고 떠났을 때 분노를 이겨내고 함께 삶을 헤처나왔던 그래서 딸이며 동시에 동지이고 전우이기도 한  에비게일이 아빠의 집으로 떠나는 순간 느낀 감정은 배신감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엄마라서 그 감정을 드러내면 안되고 쿨하고 멋진 엄마가 되고 싶었던 거다. 딸이 주는 배신감앞에서 전남편과 지금의 남편을 비교하게 되고 자꾸 지금의 자식들이  문제가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하고 내가 남편의 새아내보다 못한게 있는 거 같고 자꾸 더 뒤쳐지는 것 같은 열등감이 커지게 한다.

내가 나를 존중하지 못하면 누구도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남에게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나조차 속여버린 사소한 거짓말들을 이 책을 말하고 싶었을까?

다들 속물이고 한편 한심하기도 하지만 그럴수 밖에 없었겠다.라는 마음이 더 드는 건 나 역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참 많이 다른 세여자가 서로 친해진다는 것 의심없이 믿어주고 서로를 위해 싸워주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 악녀인줄 알았던 레니타의 반성도 참 동화적이다,

 

지구 저쪽 호주에서 겪는 여자들의 불편함과 불안이 이곳에서와 다르지 않다는게 참 서글프다,

많이 배웠든 지위가 어떻든 여자들은 여자라는 이유로 지워지는 무게가 있다,

남자들도 다르지 않겠지만

여자들의 그 무게는  무게를 느끼고 토로하면 여자답지 않거나 모성이 부족하거나 모든게 내 잘못으로 인한것이 아닐까 하는 죄책감까지 덧씌워진다. 세 여자는 누구도 악녀는 아니다,

남편에게 맞는일이 당연하지 않고 남성에게 성적인 모욕을 당하는 일은 내가 명백한 피해자이고 혼자 키워온 내 아이가 내 마음을 이해해주길 바라는 건 인간적으로 당연할 수 있는데 그 당연한 감정에 자꾸 죄책감이 덧칠되고 무게가 늘어간다. 그래서 서로의 상처를 견주고 무게를 재며 내가 좀 낫다고 여기거나 내가 더 억울하다고 하거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눈물위에 웃음을 걸어놓는다. 모두가 통속적이고 속물이긴 해도 미워할 수 없는게  그들이 원죄이진 않다는 것

 

이렇게 여름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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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류는 읽지 않으려고 했다. 그냥 누구든 타인의 개인적인 기록을 알고 싶지 않았다.

세상은 알아야 할 것들 몰라서는 안되는 것들로도 충분히 넘쳐나는데

그냥 남의 일상사에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그냥 더워지고 짜증이 나고 누군가의 행복이나 여유에 질투가 날거 같았다.

그냥 모른 채 넘어가면 없는 일이 되고 그러면 내 마음이 순간이나마 편하지 않을까 싶었다.

도서관에서 아무 생각없이 꺼내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는 순간..

이건 빌려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단단하고 무심한 문장들이 모여서 하나의 그림을 그려낸다

나에게는 낯선 도시 파리에서 내가 절대 알지 못하는 그리고 알 필요도 없는 사람들의 일상과 말과 행동들이  그림처렴 펼쳐졌다,

무심한 일상이고 그저 저자가 아는 세상의 이야기들이지만 묘하게 매력있었다,

간단하고 단순한 문장들이 아름답다,

여름엔 그저 모든 장식을 뺀 단순한 옷이 가장 아름답고

최소한의 양념으로 원재료의 맛이 살아있는 음식이 더 끌리는 법이다,

천체 망원경을 구입한 노인이나 누구에게나 부탁을 잘 하는 앨리스나  저자의 아랫층에 사는 의사까지 나는 알지도 못했던 그들의 사소하고 은밀한 일상이 궁금하고  고개가 끄덕여진다

여름에 읽기 좋은 글들이다.

 

 

 

 

 

 

 

 

 

 

 

 

 

 

저절로 튀어나온다,

어이구 어쩌면 좋아....

혹시 이렇게 전개되는 건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한치의 어긋남 없이 그대로 펼쳐진다,

뻔하다는 생각보다 사람사는 일이 다 거기서 거기구나...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이를 키운다는 일이 아름답고 행복한 일만은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일임에도 아무도 그 희생은 보지 않고 그저 아름답고 고귀하다고 칭송할 뿐이다. 몸이 따르지 않은 입에 발린 찬사들은 개똥보다도 쓸모없다.

아이를 집에 두고온 젊은 엄마의 날카로운 불안

젊은 부부의 미묘한 갈등

뭐라고 말 할 수 없지만 밉고  성가진 이웃 부부

자녀의 가족사에 끼어드는 장민과 장모

어쩌면 이런일이.... 어쩌면 이렇게.... 라는 예상에 딱딱 맞게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결국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느냐는 허무함이 남는다,

어떤 상처나 어떤 흉도 덮어서 해결되지 않는다,

아무리 두꺼운 덮개를 씌우고 깊이 파묻어도 그 고약한 악취나 밑에서부터 썩어가는 걸 막을 순 없다. 묻어서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일이 아니다,

손톱밑 작은 가시를 방치하면 손끝은 나도 모르게 곪아가고 썩어서 끝내 잘라내지 않으면 안되는 순간이 반드시 닥친다,

더구나  인간사의 소소한 일들은 반드시 그렇게 되어버린다, 빌어먹게도...

앤과 마르코  부부가 곁에 있다면 등짝이라도 후려치고 싶다 . 이제라도 정신차리라고..

제 무덤을 파버린 부부에게 해 줄게 그거 밖에 없다.

습습하고 끈적거리는 소설이다, 여름처럼

 

 

 

 

 

 

 

 

 

 

 

 

 

 

 

 

100시간의 가정폭력 상담 교육이 끝나고 함께 스터디 하기로 한 도서

개인적 정체성과 사회적 정체성은 상호의존적이다, 

개인적인 일이 정치적인 일이다,

상담가와 내담자는 평등하다

역량을 강화한다.

여성의 시각은 가치있다,

 

위의 원리에 따라 상담이 진행된다,

단순히 상처받고 불안한 개인을 일상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눈으로 가부장적 사회에 모순과 거기서 소외당하고 평가절하된 여성의 눈으로 새롭게 바라보는 가치관의 전환의 문제이다, 여성에 대한 이중적인 가치판단과 거기에 따르는 비난이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기울어진 사회가치의 문제라고 본다,

여성주의 상담은 여성 개인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맥락에서 파악하고 나아가 사회의 변혁운동으로까지 이어진다,

여성주의 이론과  상담의 방법과 실제들이 차레로 나오며 여성주의 상담가의 길을 가고 있는 저자들의 자기성찰적 고백이 있다.

꼭 여성주의 상담뿐 아니라 상담을 하는 사람들

나아가 일상에서 사람과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이 우선 알아야 하는 것은

나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를 아는 것이다,

내가 세상을 보는 기준은 무엇인가?

내가 판단하는 선악의 기준은 무엇일까

내가 가지게 되는 가치관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내가 가진 생각이나 판단이 정말 옳은 것일까

아니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정의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일은 없을까?

결국 살아가는 일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말하고 표현하고 그리고 다시 쓰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하긴 쉽지만 행하긴 어려운 것이다,

여름 이 한권의 스터디가 끝나면 나는 어떻게 달라질까?

 

 

 

 

 

 

 

 

 

 

 

 

 

 

 

 

한달에 한번 갖는 독서 모임에서 이달에 함께 읽을 책

지난 달 다시 읽은 제인에어가 다들  제각각의 이유로 좋았다고 했다.

다만 예전에 읽었던 기억과  영화등의 영향으로 제인에어와 폭풍의 언덕의 기억이 뒤섞여 있다는 의견이 많ㅇ서 내쳐 이 책까지 읽기로 했다.

광막한 사르가소의 바다와 함꼐 읽은 제인에어만큼 좋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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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세상에서는 어떤 질문도 나올 수 없다,

모든 것은 의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고 모든 질서들은 당연하다.

조금 이상하다 싶은 생각이 불쑥 들때가 있겠지만 그건 단지 내가 별나서거나 내가 모나서일 뿐이지 세상은 익숙하고 당연하다,

그런 세상에서 아니지 않은가? 라거나 이상하지 않니? 라는 목소리는 내는 것은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나대거나 튄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이젠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느냐고 하고 많이 달라졌음을 피부로 느끼는 시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어디에서는 누군가 아프고 불편하고 힘들다,

그건 언제나 타인이지 않다,

 

 

 

전업주부로 살면서 아이을 키우게 되면 다양한 지영씨들을 만난다,

나처럼 서른 넘어 첫 아이를 낳은   지영씨부터 갓 스물 넷에 첫아이를 낳은 아직도 소녀같은 지영씨까지... 나이도 다르고 살던 곳도 다르고 학력도 다르고  좋아하는 것 원하는 것도 다르지만 아이를 키운다는 단하나의 공통점만으로 모여도 이야기는 잘 통한다,

비단 아이를 키우는 문제만이 아니었다,

시집식구들과 격는 갈등

우리도 밤에 모임을 하고 싶은데 자꾸 남편 눈치가 보인다는 말에서 시작해서

나도 한때 한 술 했는데 이젠 그런 모임은 고사하고 동네 엄마끼리 맥주한잔하는 것조차 힘들다는 푸념

내가 한때는 전세계를 돌아다녔지만 지금은 집 앞에서 커피를 마시는 일조차 사치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

아이가 있으니 어디 근사한 식당은 고사하고 동네 분식집이나 중국집에서도 구석자리를 잡아야 하고 얼른 아이 챙겨먹이고 일찍 일어나야하는 조급함도 같았다,

나이가 다른데 어쩜 이렇게 잘 맞을까?

그저 한때는 그게 우리가 잘 맞는 동네친구라서... 라고만 생각하고 뿌듯했드랬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변하지 않은 것이었을까?

우리 엄마가 나를 키울때  나처럼은 살지 마라 살지마라 했었고 나 역시 그래도 엄마처럼 살고 싶진 않아.. 라고 되뇌이면서 나는 다를 거라고 믿었다,

대학시절 겨우 한두학번 아래 후배를 보면서 꼭 나이든 사람 마냥  학번차이가 장난이 아니야 하면서  우리와 다른 세대를 바라보는 기분으로 후배들을 보곤 했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보면 엄마의 삶이나 나의 삶이 그렇게 멀지 않고

60년대 끄트머리에 태어난 지영씨와 70년대 중반에  태어난 지영씨가 다르지 않게 서로 통하고

결국은 소설속 82년 지영씨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다,

여자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공부하고 약간씩의 차별을 받았지만 그래도 표면적으로는 존중받고 귀하게 큰 딸들이었다, 악착같이 공부해서 대학에 가고 싶어했고 대학은 못가더라도 괜찮은 여상에 가서 괜찮은 직장을 잡고 싶어했었다,

남자못지 않게 학점도 따고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 적도 있었고

직장 생활에서도 간혹 보이는 덜떨어진 남자들을 보조하느라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나름 보람있고 즐거운 시절도 있었다,

나는 엄마랑 다르구나.. 이젠 시대가 다르구나 하고 느끼던 찰라의 순간이 분명 있었다,

그런데 지금 열살이상 차이나는  고만고만한 아이를 키우고 또 아이가 자라서 학부형이 되고 진학을 걱정하는 나이까지 오면서 우리는 점점 닮아갈 뿐이었다,

 

아들을 낳을 때 딸을 낳을 때 역시 대접이 다르더라

티내진 않지만 은근히 손녀는 차별하더라

지금 시대가 다르긴 하지만 자꾸 눈치를 주니 지금이라도 아들을 낳아야 하는지 고민중이다,

아무래도 딸은 이쁘게 키우는게 젤 중요하지 않나?

아들이면 그냥 알아서 오겠거니 하겠지만 딸이니.. 힘들어도 어쩔 수 있나? 독서실에서 올때 데리러 가야지..

아무래도 딸이라 보니 선생님과 일대일로 하는 과외는 좀 꺼리게 되네

아이가 주번이라고 해도 딸아이라 보니 학교에 일찍 보내는 것도 좀 겁이 나

뭐 아들은 안그런가? 그래도 딸이 더 신경 쓰이긴 하겠지?

주위에서 스토커같은 엣애인때문에 고민하고 고생하는 남자들이 분명히 없진 않겠지만

드라마에서도 뉴스에서도  출처를 알 수 없는 톡에서의 소문들도 그 주인공은 늘 여자였다,

연애를 하고 싶고 멋진 사랑을 하고 싶지만  그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알 수 없어 두려워 하는 것

사귀다 보면 헤어질 수 있고 서로 마음이 멀어질 수도 있는 일인데 행여 그 때문에 험한 일 당하지 않을까 아예 연애를 포기해버릴까 하는 마음

남자에게는 당연히 묻지 않은 질문들

결혼하면 직장은 어떡할거예요?

애 낳고도 계속 다닐 건가요?

이렇게 밤늦게 일하면 남편이 뭐라고 하지 않나요?

남편도 이렇게 술 잘 마시는 거 알아?

 

뭐 한편으로는 걱정하는 마음 베려하는 마음 챙겨주려는 마음일거라는 것도 안다,

세상이 험악하니까 ....

결국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분노나 개인적인 우울감 등으로 드러나느 폭력이나 사건에서 남자가 피해자라는 뉴스는 들은 기억이 없다, 언제나 피해자의 역할은 여자들이었다,

드라마를 봐도 연쇄 살인범은 남자였고 늘 그 피해대상은 힘없는 여자들이었다,

예전에 엄마가 말했었다,

딸들이  어리면 어린대로 걱정이고 다 크면 다 커서 걱정이다,

딸들이 다 귀가하면 비로소 하루가 무탈하게 지나갔다는 셍각이 든다...

가끔 친구와 술을 마시거나  수다가 길어져서 늦어지는 날마다 들었던 엄마의 전소리였다,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 집에 있으면 결혼이나 할려나 하고 걱정

약속을 하고 밖으로 나가면  언제 오나 왜저리 밖으로만 도나 하는 걱정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

결국 나도 어쩔 수 없이 그 엄마처럼 전전긍긍한다,

한참 이쁠 때고 이쁘고 싶을 때라는 걸 머리로 이해햐면서도

짧은 옷은 입지 않았으면 좋겠고 아직은 학생이니까 화장은 안하면 좋겠고

어디 친구끼리 다닐때는 그냥 긴 청바지를 입고 나가면 좋겠고

아무리 기막힌 학원이라도 멀리 떨어진 곳은 일단 망설여지고..

학원 선생님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신경써야 하고 그 학원에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도 신경써야 하고  혹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가 으슥한 곳에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고 ...

어쩌면 그렇게 한치도 틀리지 않고

예전 엄마가 했던 걱정을 내가 그대로 하고 있고

나는 이렇게 엄마랑 다르니까.. 또 다르겠지 하고 믿으며 조금은 시샘하고  경계했던 나 이후의

후배들 역시 나와 다르지 않았다,

 

여자들이 자기 의견을 말하기 시작하는 거?

이제 사회로 진출하기 시작해서 남자들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거?

각종 고시나 학교 교사들이 이제 남자보다 여자가 조금씩 더 많아지는거?

집안에서 엄마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더 커지기 시작한것?

단지 그것들 만으로 여자가 살만해졌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젠 역전되어 매맞는 남자도 생겼고  여학생들의 진학률이 남학생을 능가했고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지지 않았느냐고.. 남성부는 없는데 여성부는 있고 남성들은 여전히 군복무의 의무가 있지만 여성들은 그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있지 않냐고...

여대는 있지만 남대는 없으니 대학진학에서 여자들이 갖는 이익도 얼마나 크냐고...

웃기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에서는 학력 나이 등등 의 스펙중에 가장 큰 스펙이 남성이라는 거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그냥 우리끼리 이야기일 뿐이다,

세상의 절반은 이해하지도 않고 이해하지 못하며 또 여자들 중에도 자기 삶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있다, (몰른 그 속 마음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말하고 주장하는 여자들에게

나대고 시끄럽다고 말했던 개그맨의 언행은 그만의 것이 아닐것이다,

여자들은 수다스럽고 사소하고 속된 이야기를 좋아하고 큰 일은 함께 할 수가 없는 족속이며 언제나 한 발 뒤에서 도와주고 보조하고 보살피는 존재이길 바란다,

원하는 순간, 드러나는 사람이길 바란다, 평소에는 그림자처럼 조용하고 고요하고 아름다우면 그뿐이다,

모든 일에 보조하는 사람인  지영씨들이 오로지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일에서는 주체적이길 바란다, 그 부분에서 지영씨가 아닌 이들은 그저 도와주고 조력하고 감사하면 된다, 왜냐하면 그건 사적이고 소소하며 개인적인 일이니까

결국 58년 지영씨도 69년 지영씨도 75년 지영씨도 82년 지영씨도 그리고 93년 지영씨도 아마 우리는 다를것이라고 굳게 믿겠지만 결국 우리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 억울하고 또 동시에 힘이 되리라 믿는다, 세대를 지나도 우리는 변하지 않지만 그래서 우리는 더 잘 소통하고 이해하고 그리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두 발을 다시 디딜것이라 믿는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지영씨를 응원하고 또 응원한다. 

 

 

 

 

 

 

 

 

 

 

 

 

 

 

 

 

 

 

 

 

 

 

 

연홍과 종찬의 딸 민진이 실종되었다,

하필 그날은  국회의뭔이 되려는 종찬의 선거 첫째날이었고

하필이면 그들의 딸은 문제아였고

이미 시작된 선거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고 지켜보는 시선들이 많다

전에도 있던 일이라고 하며 종찬은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 한다,

행여 아이가 돌아왔을 때 더 곤란해질 수 있고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실종신고는 미뤄지고 연홍 혼자 초초하게 민진의 흔적을 쫒는다,

연홍이 알고 있는 민진의 정보는 모두 가짜가

연홍이 알고 있는 친구는 존재하지 않으며 연홍의 친구들은 여전히 날라리고 민진을 알지도 못하고 학교에서는 왕따였다,

연홍은 혼란스럽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하나?

연홍은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생각하려고 애쓴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미친년처럼 중얼거리고 감정이 앞서고 흥분하고 날뛰면서 연홍을 뛰어다닌다,

엄마니까 무서울게 없고 부끄러울 게 없고 거리낄게 없이 학교로 거리로 경찰서로 쫓아다닌다

종찬은 무서울만치 냉정하다,

이미 문제를 일으켰던 딸이고 가출을 경험했던 딸이다, 앞에는 일생을 걸어야할 선거가 시작되었고 경쟁자는 시시틈틈을 노리며 약점을 찾고 있고 세상이 초짜 정치인을 지켜본다, 내편이라고 안심할수도 없는 상황이다, 종찬을 둘러싼 남성들의 세계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질서있게 움직인다, 어떤 시기에 경찰에 가야할지 어떤 타이밍에 어떤 표정을 보여야 할지 계산이 철저하다,

결국 시신으로 돌아온 민진앞에서 연홍은 미친년이 되고 종찬은 차본하게 연홍을 다독이고 협박한다, 이렇게 나가서 좋을게  이득 볼 게 하나도 없다고....

가족의 일은 사적인 일이고 사소한 일이며 지금 문제를 크게 일으킬 수는 없다,

오히려 딸의 죽음으로 동정표를 얻고 상대편 후보에게 의심이 가면서 선거판은 유리하게 돌아간다. 계산이 앞서고 머리회전이 먼저 될 수 밖에 없다,

연홍은 무엇이 대의이고 무엇이 사소한 일인지 구분할 수 없다, 아니 구분할 필요가 없다,

딸이 죽었고  이유를 알 수 없고 누가  죽였는지도 알 수 없으며  나아가 내 딸이 어떤 아이인지 조차 알 수 없다, 나쁜 아이? 영악한 아이? 내가 모르는 아이의 모습에 당혹할 뿐이다,

종찬은 계산을 하고 어떤 방향이 내게 이익인지 끊임없이 찾아내고 이성적으로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움직인다,

연홍은 흐트러졌다가 단정했다가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가 전라도 사투리를 썼다가 표준말을 썼다가 정신이 없다, 타인에게 덤비고 자해를 하고 폭력앞에 노출된다,

그러나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건 미친년처럼 돌아다니던 연홍이다,

뭐든 사소하지 않고 허투루 보지 않고 다가가도 마주하면서 연홍은 진실앞에 다가간다,

이성적이고 반듯하고 흐트러짐없다고 믿었던 대상에게 인간적인  실망.. 아니 존재론적인 배신감을 느끼며 연홍은 혼자 문제를 해결한다,

이성적이고 빈틈없는 종찬은 아무것도 모르고 손선생은 자기 죄를 덮으려고 이성을 잃고 날뛰었고 연홍은 또다시 문제를 파해치려고 정신을 잃고 날뛰었다,

그렇게 사건이 발생하고 그렇게 사건이 해결되었다(?)
감성적이고 작은 일에 집착하고 큰 그림을 보지 않고 바로 앞의 문제에만 골똘하던 연홍이 결국은  사건을 풀어낸다,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 사건에 어떻게 연루가 되는지 도데체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조차 모르면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큰 그림을 볻다고 믿는  종찬대신 연홍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죄를 단죄하고 상처받은 아이를 안아준다,

연홍을 미친여자취급하고 전라도 여자라고 무시하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믿어버리고 그저 예쁘게 꾸며서 예쁘게 웃으면서 선거 송에 맞춰 율동을 하고 미소지으며 투표하는 사진만을 원할 뿐이다, 나에게 필요할때는 이용하고 필요없으면 무시하고 잊어버리는 것 그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하는 그 들의 세계에서 문제를 파악하지도 무엇이 잘못인지도 알지 못한다, 당연히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문제는 사소하게 시작된다, 어떤 큰 대의나 정의? 정치적 암투따위는 끼어들지도 않았고 그 따위는 애초 있지도 않았다, 모든 문제가 그렇다, 별 일 아닌것 사소하고 사적인 일..그렇게 시작된다,

소문처럼 실체없이 번져나가지만 무시하기엔 어딘가 꺼림칙한 분위기

별거 아니라고 개인적인 일이고 집안일이라고 덮고 쉬쉬하고 뒤에서 쑥덕거리던 일들이 덮고 모른척하고  없던 일처럼 치부되면서 그 냄새는 점점 심해지고 썩어가고 악취를 풍기며 자란다

큰 그림에서 보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쪽에는 실체가 없다,

사소하게 시작된 불륜  남겨진 친구에 대한 연민  사생활이 노출될까하는 두려움  비밀 수치감 모욕과 분노가 뒤섞여서 사건이 자란다, 크게 보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상관하라 수 없는 부분 모른 척하는게 예의인 부분에서 사건은 자란다, 모른다고 모른 척 한다고 없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 사소하다면 사소하게 사적인 부분 가정사인 부분에서 일은 시작되었고 사람이 죽었고 죽였고 복수가 시작되고 문제가 해결된다,

일이 커지고 곪아서 냄새가 진동하기 전까지 누구도 알지 못하고 알고 싶어하지 않는 일

그런 일은 아직도 우리 주변에 많다,

 

 

 

 

 

 

 

 

 

 

 

 

 

 

 

 

 

 

가정폭력이라는 문제에서 해결책이라는 것이 "피해자와 가족구성원의 인권보호"라기 보다는 "가정폭력범죄로 파괴된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가꾸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가정 폭력특레법이 제정되고 가정폭력에 대한 인식이 가족간의 사적인 문제나 가정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폭력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지만 결국 주된 목적은 사회의 기본단위이나 누구에게나 안정감을 주고 필요한 가정을 깨지 않고 잘 유지해야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가정"이라는 것에 대한 환상과 믿음  세상에서 절대 없어서도 안되며 보호하고 지켜줘야 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동시에 그런 가정은 결국 개인의 영역이고 사적인 문제라서 공권력이나 공공의 개입은 자제하고 그저 모른 척 존중(?)해주고 철저하게 사생활로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의지가 함께 포함된다, 가정이전의 개개인의 안전이나 지지 보호는 그저 가정안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누구든 가정을 꺠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행복과 사랑을 꿈꾸며 결혼을 선택하고 아이를 출산하고 가정을 이루며 바깥에서는 어떤 비바람이 몰아치고 거친 파도가 닥치더라도 우리 가정만은 안전하고 안정적이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누구나 가정은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하고 누구나 가정에 소속되어 있어야 하고 그래서 가정이란 어째 되었든 유지되고 지속되어야 한다, 다만 그 지속과 유지의 책임은 가족에게만 있을뿐 타인이 간여할 수 없다, 이런 근거없는 믿음속에서 가정을 꺤다는 일은 부도덕하고 패륜적이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은 가정이 사회의 기본이라고 하고   보금자리라고 하고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고 가정이 없다는 것 조금 다르다는 것만으로 열등하고 부족하고 문제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데  가정을 깨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죽을만큼 맞고 살아도 가정을 깨려고 한다면  그동안 죽을만큼 맞았던 시간과 고통은 싹 다 잊히고 가정을 깬 여자 혹은 자기 자식을 버린 여자가 되어버린다, 별일도 아닌것을 부부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법으로 보호한다고 하지만 결국 폭력으로 얼룩진 가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나에게 폭력을 가했던 그 가해자를 다시 가족으로 받아들일것인가 말것인가의 결정은 오롯이 피해자에게 돌아간다,

나하나 참고 말것인가 ..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야 할것인가

가정폭력이 다른 어떤 폭력보다도 다루기가 힘든 건 결국 피해자와 가해자가 고소와 처벌로 끝이 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피해자가 죄책감을 가지고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잇고 최악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절대 분리될 수 없고 그 악순환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가정에서 가장 먼저 차별을 경험한다,  설령 에전같은 노골적인 차별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위험하고 험한 세상에 대한 공포감이 가정으로 스며들어 좀 더 세심하게 신경쓴다는 행동들이 하나의 차별이 될 수도 있다, 82년 지영씨가 할머니에게 받았던 차별이 지금은 없어졌을지라도 여전히 지금의 지영씨들도 밤길은 위험하고  짧은 옷들은 나의 의도과 상관없이 해석되고 보호와 배려라는 이름으로 소외된다, 여전히 말해서도 나서서도 주장해서도 안된다, 누구도 용감하게 나서서 안된다고 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눈쌀이 찌푸려지고 거부되고 조용히 무시될 수 있다

연홍처럼 여전히 진실을 다가가기 위해 혹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미친년처럼 뛰어야 할테고 여전히 가정내의 폭력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일이된다,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라고 믿는게 가장 안전하다, 때로는 그 것만 알고 있다는 것이 권력이 될 수 있다, 모두가 동의하는 삶에 나도 속해있다고는 것이 하나의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이해하고 잇는 것 이상의 더 큰 세상이 존재한다,

내가 알고 믿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남의 일이고 남의 사생활이며 도덕적이고 정의롭고 이성적이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외면했던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처절하고 간절한 일일 수도 있다,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이기에 누구도 깨서는 안되고 보호되어야 하는 그 곳에서

누군가는 신음하고 아파하고 치를 떤다,

당연한 거 아니야? 라고 믿었던 것들이 조금씩 흔들리고 균열되기도 한다,

모두가 행복할거라고 안전할거라고 믿고 있는 공간에서 느끼는 배신감 소외감 그리고 말로 꺼내기 애매하고  속에 쌓아두기엔 억울한 많은 일들이 지금도 여전히 여기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세상은 내가 아는 것 이상이며

여전히 설명하고 해명하고 이해시켜야만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많이 존재한다,

 

지영이들이 연홍이들이 그리고 살아남은 생존자들 그리고 죽어버린 피해자들이 여전히 여기 이곳에 있다,

나 가족이고 내 이웃이고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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