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환대 장희원

 

우리는 누구나 환대할 수 있다. 우리는 차별주의자가 아니다.

누구든 품어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경계가 있다.

어떤 도덕적인 선을 넘는 것.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용납할 수 없는 어떤 선이 아닌 것들은 환대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선한 사람이므로 악이 아니라면 품어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법을 어기지 않았고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아들을 생각하면 단 하나 걸리는 부분이 있다. 한창 호기심이 많을 청소년 무렵 그 또래가 봐선 안되는 영상물을 보는 아들을 훈계한 적이 있다. 분명 훈계다. 나는 아들에게 놀랐고 실망했고 그리고 아들이 절대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마음으로 아들을 때렸다.

그리고 다행히 아들은 한 번도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내게 들키지 않았던 것만이 아니라 아예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믿는다. 아들이니까.

그리고 그 아들을 만나러 지금 나는 호주로 간다.

낯선 땅 낯선 언어가 있는 곳. 그 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 다르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남편이 아들을 심하게 때렸다는 걸 안다. 이유는 제대로 모른다. 아니 아는 게 두렵다.

그냥 그 나이 청소년들이 흔히 가지는 호기심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누구나 하는 걸 아들도 했고 조금 선을 넘는 영상을 봤고 그걸 남편이 또 봤고 남편이 놀라서 아이를 다그치고 때린 것.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 이후 아이는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조금 철이 들었고 말이 줄었고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을 뿐이다. 그건 남자 아이들이 누구나 하는 행동들일뿐 아들의 별난 모습은 아니다.

아들이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간다고 했을 때 사실 말리고 싶었다.

굳이 그렇게 고생해서 외국에서 경험을 쌓아야 하나 싶은 엄마의 오지랖이었다.

그래도 요즘 젊은이들은 다들 그렇게 경험하고 온다기에 말리지 않았다. 형편이 안되는 것도 아니고 아들이 뭔가 하다못해 영어라도 늘어서 오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아들은 그 과정이 끝나고 다시 그곳에서 대학을 다니겠다고 한다. 대단한 대학도 아닌 지역대학에서 공부하겠다는 아들을 말릴 수 없었다. 이제 나이도 먹었고 자기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때가 아닌가

서운했지만 조금 일찍 독립시킨걸로 생각하기로 한다.

가끔 연락도 오고 화면으로나마 얼굴을 보여주니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어쩌면 함께 지지고 볶고 살다가 서로 갈등이 생기고 다투는 것보다 멀리서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 아들을 보러간다.

아들의 옷가지. 아들이 좋아했던 것들 어쩌면 그리워할지 모르는 먹거리들 등등을 챙겼다.

남편은 뭘 그렇게 가지고 가냐고 했지만 그는 모른다.

당신은 몰라. 아무것도 몰라

남자들은 모른다. 내가 아는 아들이 전부는 아닌데 내가 아는 것만 전부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는 것 내가 들은 것 그리고 내가 상상하는 것 그 범위를 넘어가면 남자들은 당황한다. 그리고 자기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하고 분노하거나 좌절하거나 어깨를 늘어뜨린다.

단순한 사람들

남편은 정말 아들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아들을 알까?

짐으로 부치라는 남편의 말을 기어이 어기고 꾸역꾸역 들고 기내에 올라 수화물칸에 넣었다.

그래도 아들 물건인데 아무 짐짝처럼 취급되는 건 싫었다. 이건 아들이 아니지만 아들 물건이니까 아들처럼... 우습긴 하지만 그러고 싶었다.

그 짐을 경유지 싱가포르에서 잊어버렸다. 그리고 잃어버렸다.

부랴부랴 말도 통하지 않은 곳에서 손짓발짓으로 물건을 찾으러 갔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일까 우리 행색이 꾀죄죄해서였을까

지들끼리 웃고 뭐라고 하는 말들이 영 고깝게 들린다. . 그래봤자 일개 작은 아시아국가주제에

물건을 찾았다. 어딘가 모르게 낡았고 조금 초라해져보였지만 내 물건이 맞다.

조금 달라보여도 내 아들을 몰라보진 않은 것처럼 내가 그렇게 정성껏 챙겼던 내 상자가 맞다.

이제 놓치지 않을거다.

호주는 햇살이 강하다. 두 눈을 제대로 뜨고 있을 수 없을 만큼 쨍하다.

아들이 나왔다. 조금 말랐나? 조금 거칠어졌나? 환하게 웃으며 우릴 맞이한다.

그리고 택시를 불렀는지 뚱뚱하고 늙은 흑인이 모는 차로 우리를 안내한다.

아들과 운전사는 뭐라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기다리면서 알게 되었나? 내 아들이 저리 붙임성이 좋았던가?

아들 표정이 밝아보인다. 여기서 잘 지내는 모양이다. 다행이다 한편으로 섭섭하다.

 

한참을 들어가 아들이 사는 곳에 도착한다. 그곳은 내가 상상했던 곳과 다르다.

낡았고 잡초가 무성하고 그리고 외따로 떨어져 있다. 저쪽엔 분명 동네를 이루고 상가가 있을 것이 분명한 내가 상상한 호주의 주택가가 보이는데 이곳은...

남편을 보니 나와 다르지 않을 모양이다. 당황했지만 티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흑인 운전사는 짐만 내리는 게 아니다. 열쇠로 문을 연다. ? 이게 뭐지?

이 사람이 아들의 룸메이트라고 했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아들은 했다고 한다. 공항에서 만나 정신이 없어서 잊어버렸나? 아니다. 내가 아들 말을 잊을 리 없다. 우리를 보고 환하게 웃던 얼굴 긴 비행은 괜찮았느냐는 말. 다행이 날씨가 좋다는 말 다 기억하는데 차에 가서 짐은 내가 실을게요 했던 거. 조금 더우시죠 했던 거 다 기억하는데 이분이 함께 사는 사람이라는 그 중요한 말을 내가 잊을 리가 없다. 아들이 낯설다.

흑인은 다정하다. 말이 통하지 않아 어색하지만 우리에게 친절하려고 그게 가식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게 느껴진다.

나는 아들이 또래 친구들과 사는 줄 알았다. 젊은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는 곳이라 우리가 가면 어색해질테니 다른 숙소를 잡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 많이 다르다.

그리고 이곳에는 둘 이외에 한국인 젊은 여자아이가 함께 있다.

이건 무슨 조화일까?

굉장히 낯설고 불편하다. 어찌된 건지 물어보고 싶은데 애써 괜찮은 척 한다.

나는 예의 있고 상식 있고 다름을 받아들일 줄 아는 괜찮은 엄마이고 싶다.

남편도 그러리라. 쿨하고 편견 없는 사람의 역할을 처음 하는 것마냥 어색하다. 그런데 웃고 있다. 묻지 않고 있다. 궁금한 게 목까지 차올랐는데 우리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니 당연히 아들은 아무것도 대답할 이유가 없다.

말이 짧아 흑인 룸메이트에게 물을 수도 없다. 그냥 마주치면 웃을 뿐이다. 최대한 근육을 당겨서.

나는 여자아이가 걸린다.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 이렇게 남녀가 함께 살아도 되나?

짧은 바지아래 드러난 문신이 있는 다리 자꾸 걸린다.

아들에게 친밀하게 스킨쉽을 하는 것도 걸린다. 아들은 냉정하게 대한다.

내가 있어서? 아니면 여자 아이의 일방적인? 모르겠다. 이유가 뭐든 걸린다.

그래도 여자아이가 툭툭 말을 내뱉아서 상황을 짐작한다.

오빠가 여기 처음 왔을 때 많이 힘들어 했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저 정도 된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런 일?

우리는 지금 잘 지낸다.

무슨 말일까

이들은 무슨 관계이며 이런 무리를 뭐라고 해야하나.

식사를 하면서 남편은 이제 허세를 떤다. 직업에 대해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고 얼마나 화목한 가족이었는지 아들과 얼마나 친밀했는지를 떠든다. 그만하면 좋겠다.

다들 분위기를 맞춰주는데 불편하다.

그들의 환대가 불편하다.

이건 아니다. 우리가 이들에게 지금 이해받고 있는 중이다.

그들이 우리를 이해하고 괜찮다고 하고 계속 하라고 하고 모든 걸 들어주겠다고 한다.

이건 아닌데...

길 건너 불빛을 본다. 남편도 본다. 저쪽에 가고 싶다.

여기가 아닌 저기. 저기에 가야 편안할 거 같다.

음식이 물컹한 식감이 그리고 어떤 상상이 나를 괴성을 지르게 했다.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다.

택시를 부르고 기다리고 우리는 숙소로 간다.

택시가 출발하는 순간 우리는 안도한다. 말하지 않았지만 서로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한국에서 가져온 기어이 내 손으로 끌고 온 그 박스를 뜯지도 않고 아들에게 주지도 못하고 내 손에 가지고 택시를 탔다.

그들은 저쪽에서 우리를 바라본다.

배웅한다. 걱정하며 환하게 웃으며 다정하게 친밀하게 우리에게 언제든 오라는 배려와함께

지금 내가 남편이 저쪽이 아닌 이쪽이라는 것이 가장 불편하다.

 

환대는. 배려는 내가 할 때 가장 편하다.

그걸 받는 입장이라는 건 불편하다. 그건 엿 같은 감정이다.

니들이 뭔데 나를 환대하고 배려하지?

뒤틀린 생각들 불편한 감정들 그리고 나는 환멸을 느낀다. 나에게 그리고 남편에게도

 

마땅히 내 것이어야 하는 우월한 입장을 타인에게 인터셉터 당했다는 느낌

감히 나를.... 이라는 마음

누구나 환대할 수 있다.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그건 누구의 소유도 아니니까.

나는 내가 보이는 것을 본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본다.

그리고 기억은 이기적이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 내가 받아들이고 싶은 방식으로 박제된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건 그럴 수 있다고

내 아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그렇게 기억된다.

 

어쩌면 내가 괜찮은 사람일 수 있는 건 내가 쳐놓은 울타리안에서만이다.

내가 용납할 수 있는 그 범위 내가 상처받지 않을 그 범위에서 나는 좋은 사람이 된다.

당연하다. 상처받은 적 없고 누구에게나 괜찮은 사람일 수 있는 그곳에서 내가 나쁜 사람이 된다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그 울타리 안의 세상이 전부라고 믿고 있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울타리밖에 있는 존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멸시와 경멸 무시를 모른 척했다.

그런 감정을 가지는 건 나쁜 거니까 그 감정을 숨기기 위해 울타리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굴었다. 보이지 않았다. 있지 않았다. 누구도. 아무도

그 밖에 내 아들이 있다는 건 용납할 수 없어서 머리채를 집고서라도 멱살을 끌어서라도 울타리 안으로 집어넣어야 했다. 그리고 넣었다고 믿었다.

마땅히 내 것이어야할 배려와 환대가 저쪽으로 넘어가고 마땅히 무시와 멸시와 경멸의 대상이어야 할 그 울타리바깥이 누군가에게는 울타리 안이었고 나는 경계선 밖에 서서 그들의 환대와 배려를 받고 있는 이 상황은 낯선 경험이다. 불쾌하고 불편하고 불안하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척 한다. 내가 내색하는 순간 이 관계는 그대로 굳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상황을 정해버리면 안되므로

내가 모른 척 하고 있는 한 상황은 절대 뒤집히지 않는다. 나는 굳게 믿는다.

나는 늘 환대하는 주체이지 대상이 아니다.

내가 베풀어야한다고 이 개돼지들아...

 

 

 

 

 

 

 

 

 

 

 

 

 

 

 

 

다른 세계에서도 이현석

 

둘째를 가졌을 때 나의 첫 감정은 실망이었다. 이게 아닌데.

환영하지 않았음은 물론 미....

나는 엄마가 될 사람이 아니었음을 한명의 아이를 키우면서 알았다.

아이는 너무 이쁘고 사랑스럽고 손이 많이 가지 않은 순한 아이였지만 나는 아이에게 집중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 마음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나는 아닌 척 괜찮은 척을 무척 잘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남들이 다 하는 결혼을 했고 남들이 다 하는 출산을 해서 아이 엄마가 되는 경험을 했고 부모와 아이로 이루어진 정상적인? 가족을 만들었으니 이제 다 된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둘째가 생겼다. 이건 아닌데

혼자 오래 고민했다. 그냥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지워야 할까

그때도 지금처럼 중절은 불법이었지만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내가 산전검사를 갔을 때 누군가는 감기약 때문에 아이를 유산하고 누워있었다.모르고 감기약을 오래 먹어서요. 어쩔 수 없었어요. 내 기억에 그 말을 한 여자는 말간 얼굴로 편안해보였다. 안심하는 얼굴처럼 보였다. 아니 그렇게 기억되었다.

둘을 키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 제법 아이가 자라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이 늘었고 어딘가 교육기관에 보낼 수 있을 것 같고 나도 뭔가를 할 수 있을 것같은 이 순간 덜컥 둘째라니...

혼자 오만 고민을 했지만 용기없고 실천력이 없는 이유로 그냥 남들에게 알려졌고 축하를 받으며 임신기간을 보내고 출산을 했다. 그리고 정신없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랑 너무 닮아서 너무 힘든, 아이를 보면서 어쩌면 이 아이가 그때 내 마음을 모두 꽤뚫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할 때가 있다. 그때 나를 미워했지? 나를 없애고 싶었지? 어디 한번 너도 당해봐. 나는 너를 괴롭히기 위해 마음껏 삐뚤어질테니까... 아이가 힘들게 했던 건 사실이지만 삐뚤어진 건 아니다. 그럼 기억을 못하는...

중절을 고민하는 여성중에는 미혼이나 미성년보다는 오히려 기혼의 아이가 있는 여성의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더 많이 한다.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에만 중절을 허락한다는 개뼈다귀같은 사고가 아니라 아이를 가져본 경험이 있고 키워보았고 그리고 그럴 환경이 됨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고 싶어하지 않은 여성들이 더 많다. 여전히 아들과 딸의 문제일 수도 있고 계획되지 않은 임신일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 직장문제로 더 이상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은 수도 있다.

성폭행을 당했거나 미성년부모가 되거나 미혼모가 되는 일보다 오히려 사람들이 정상 가정이라는 곳에서도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충분히 망설여지는 일이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사실 쉽지 않다.

돌아보면 다 어려운 일이며 동시에 별거 아닌 일이 되기도 하겠지만 일단 그 과정에서는 너무 힘들다. 아이는 어느 지점 성장까지 타인의 도움을 요구한다.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을 요구한다. 아이가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포유동물은 혼자 자립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점점 사람에게 요구하는 조건들이 까다롭고 목록이 늘어간다.

 

아이를 지워야 할 피치못할 상황들이 있다. 그 기준은 누가 정할까?

태아도 생명이라 차마 없앨 수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신파만 용납하는 세상. 그래서 중절을 선택하는 과정이 얼마나 괴롭고 죄책감이 느껴지고 힘든 일인지 알고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노라고 이렇게 절절하게 타인에게 이해를 시켜야 나라에서 허락하는 상황이 조금은 코메디다.

내 몸에 대한 나의 결정권이라는 것을 떠나서 어떤 이유든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중요하다. 내 몸이고 내가 져야하는 그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국가가 개입을 한다?

그래서 이 글이 많이 와 닿았다.

꼭 이유가 있어야 할까

낳아야 한다는데 이유가 없다면 중절을 한다는 것도 큰 이유가 없다.

아니 저마다 이유가 있다. 다만 그 개인적이고 은밀할 수 있고 사적인 부분에 일일이 검열을?

소설은 그 지점을 이야기한다.

선택할 수 있는 출산이라면 선택할 수 있는 중절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고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 아이를 만드는 과정의 쾌락은 다 즐겨놓고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이기심이 아닐까 하는 스스로 하는 자아비판같은 거 이제 없으면 좋겠다.

누구나 쉽게 중절을 결정하지 않는다. (어떤 집단이든 완벽한 이기심을 가진 극 소수는 늘 있다.)

아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부분 쉽지 않은 결정을 한다. 오래 고민한다.

이래도 되나 싶게 자기를 돌아보고 두려워하고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결정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개인적이지만 절절한 이유로

소설에서 주인공과 주인공의 엄마는 동생의 결혼과 출산이 못마땅하다. 아직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 성공할 수 있는 기회 앞에서 출산이라는 것이 얼마나 걸림돌이 될 수 있는지 경험을 통해 알고 있고 주변사람들을 봐서 안다. 그래서 말린다. 이유가 충분하다 그들에게도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도 이유가 충분하다.

두 충돌에서 결국 자신이 결정할 뿐이다.

어떤 신념을 주장하기 위해 그 신념이 꼭 순수하고 완전무결해야할까

약간의 개인적인 마음 이기적인 생각같은 것이 들어가서는 안되는 걸까

무균질의 신념만 통과가 가능한 걸까?

나는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아이가 없었더라면... 아이가 하나였더라면

그 상상속에서 나는 지금 보다 덜 비루하고 더 자유롭지만 그것도 장담할 수 없다.

내가 아이를 대신해서 간절하게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자유였을까? 능력이었을까? 돈이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엄마라는 옷이 맞지 않구나 하는 마음이 들 때면 동시에 나는 내가 무능하다고 말하면서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하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올라온다. 솔직하게 돌직구처럼.

자격없는 엄마. 이기적인 엄마. 그럼에도 인정받고 싶은 엄마는 이 이야기 앞에서 많이 서성이면서 응원한다.

한번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런생활 김봉곤

 

그의 단편집 여름 스피드를 읽다가 덮었다. 아직 나에게는 많이 버거운 주제인걸로 하고 포기했다. 그냥 내가 깜냥이 되지 않는다는 속편한 이유를 대면서 나는 편견을 한겹 그대로 두었다.

그래도 많이 읽고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나 하나쯤 모른 척 해도... 하는 마음과 함께

그리고 소설집 속의 이 이야기를 읽는다.

어쩌자고 이 작가는 이렇게 대책 없이 솔직한 걸까? 이렇게 모든 걸 모두가 다 알도록 써도 되나? 이게 소설이 되나? 이런 개인적인 일을 꼭 읽어야 하나?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개인사가 훅하고 들어오면 어쩌란 말인가?

꼭 이런 tmi까지 알아야 할까?

그럼에도 책을 놓지 않는다. 이왕 시작한 거 끝이나 봐야겠다. 얼마나 찌질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솔직할 수 있는지 어디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뭐 혼자 비장하게 읽기를 계속한다.

읽다보니 자꾸 빠져든다. 매력있다는 건 아니지만 끝이 궁금해진다. 그래서 어쩌자는 걸까?

별 이야기도 없이 제멋대로 왔다갔다하는 마음들. 팔랑거리는 감정들 미워해야하는데 자꾸 놓기 싫은 이율배반들이 너무 적나라하다.

누군들 그런 경험이 없을까

내가 왜 이럴까 싶으면서도 계속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들

이제 끝이다. 하고 단칼에 베어내야 함에도 흐지부지 미적미적 이러다 다시 저절로 봉합되기만을 바라는 마음 그리고 은근슬쩍 눈 감아버리는 것들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걸 뻔히 알면서도 내 상처를 더 키우고 싶지 않아서 그냥 그의 상처는 눈감아버리는 일들 주로 가족에게 향하는 그 마음들

타인의 상처는 그가 비록 가족이거나 부모이거나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나를 아프게 하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견딜 수 있게 되는 이기적이면서 애처러운 그 마음이 자꾸 불쑥 올라온다.

그냥 그런 생활이다.

뭐 대단한 제목이나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닌

혼자 정리했다가 찌질했다가 욱 했다가 그리고 잠잠하게 정리하면서 뭐 별거 있겠어 그러니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나는 아직도 같은 성을 사랑한다는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럴 수도 있지. 세상은 다양하니까. 잘 모르지만 모르면 물어보면 되고 물어보는 방식이 예의바른게 맞는 거고.. 모르는 건 죄가 아니니까. 다만 상대에게 상처주는 방식은 하지 말아야지. 하는 정도.. 그 이상 알지 못하지만 그냥 이렇게 다르지만 열심히 나랑 다르지 않게 살고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보면서 조금 나의 울타리를 넓히고 있다. 그 울타리가 아직은 견고할지라도 조금 넓어지고 낮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다시 여름 스피드를 들어볼까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은 다른 것들이 더 끌려서 조금만 더 보류.

 

 

 

 

음복 강화길

 

이제는 좀 발랄하고 앙큼해져도 괜찮지 않나?

모른다는 것. 그게 가장 센 공격이 되고 방어가 되는 것. 뭐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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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치일까? (리커버 개정판) - 그 누구도 아닌 나로 살기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양지하 옮김 / 현실문화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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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동등해지길 원하며 동시에 자기 자신이길 원하는 두 갈래의 길

사랑은 애정관계라는 원천에서 샘솟는 것이 아니라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사랑을 구하지만 자유를 찾았다.

자아실현을 추구한다는 것은 내 운명을 결정짓는 필수적인 것이며 나를 건설하는 삶을 창조해가는 단단한 토대에 사랑이 깃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사랑에 대한 추구와 자유에 대한 탐색을 연결하는 것은 중요한 과정이다.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 곧 사랑을 배우는 첫 단계이다.

 

남성들은 단순히 자유의지로 여성들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속하게 된 제도 속의 개체로서 행동하고 있었다. 다만 우리는 가부장제가 남성을 다루는 폭력적인 방식보다 사회적 평등을 쟁취하고자 하는 여성의 자율성에 훨씬 강렬하게 동조했을 뿐이다,

 

우리는 사랑을 선택했고 그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선택이란 우리가 의지와 권력 그리고 주체성을 행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빠진다는 말에는 권력을 잃고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결국 바깥에서의 혁명보다 집 안에서의 혁명이 더 어려웠던 것이다. 가정에서 여성이 남편과 자신에게 뿌리 깊은 버릇을 바꾸라고 설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직장에서 성취할 수 있었던 성공을 가정에서는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은 여성들에게 다른 종류의 분노를 샀고 배신감은 페미니즘을 향했다.

사실 소득이 높은 여성들만이 실질적으로 일을 통해 자율성을 획득한다. 요리와 가사 육아 등을 도와줄 인력을 고용할 수 있는 그들은 가정으로 돌아와 ‘2교대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저소득 여성들은 자신들의 변화로 인해 가장 큰 이익을 보는 것이 상대 배우자임을 알았다. 여성에게 생긴 경제력이 남성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제적인 자유와 힘으로 변환될 가능성은 사라졌고 평등은 깨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터가 자유를 향한 길인것처럼 주장했던 페미니즘에 배신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들의 비판은 타당했다.

 

나는 사랑이 여성의 삶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엄연히 m 중심에 있기에 위험 부담이 크다고 생각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라면 많은 에너지를 할애해 그것에 관해 독창적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에 관한 지속적인 갈망은 그것이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강력한 페미니즘의 여성 이미지를 악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온전히 발화되지 못했다. 어떤 페미니스트 여성도 자신이 사랑을 찾고 있다고 크게 외치지 못했다.

우리 모두는 직장과 경력 돈이 사랑보다 중요한 것처럼 행동해야 했다. 그에 따른 실망감을 이야기할 공간은 없었다. 여자들이 일을 통해 온전한 성취감을 느끼지 못한다거나 친밀한 사적 관계에서 충족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낼 수 없었고 사랑 없는 삶에 대해 말하기를 두려워했다. 공식적으로 대부분의 여성들은 사랑보다 권력이 더 중요한 것처럼 행동했다. 사랑을 다시 어젠다로 옮겨오려면 일과 사랑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려면 여성은 스스로 거짓을 벗어야만 한다.

 

어쩌면 저자가 이 글을 쓴 이 시대와 지금은 다르면서 비슷하다.

여성 남성을 떠나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바란다. 심리학적 명제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관계속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무언가를 성취해내는 것만큼이나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다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어쩌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면서 동시에 모든 안전장치가 이루어졌을 때 가질 수 있는 본능일 수도 있다.

먹고 사는 문제 내 일상의 루틴이 안전한 이후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할 여유가 생긴다. 일단 내가 먹고 살수 있고 쉬고 잠들 수 있는 공간이 생기지 않으면 어떤 다른 욕구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총체적인 상황속에서 지금 우리는 어떤 안전망도 가지지 못했다.

모두는 모두를 대항해서 투쟁하고 경쟁해야 한다. 남보다 조금 더 가지는 것은 이미 포기했고 남들만큼 가질 수 있다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욕심이고 허황된 상황이 되었고 그냥 살 수 있는 만큼이 절실해졌다. 일에 만족해서 성공과 성취에 만족해서 사랑따위는 필요없어. 가 아니라 먹고 살기 바빠서 내 몸하나 건사하기 바빠서 사랑 따위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지금도 어디서 누군가는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상처받고 행복해한다.

그 때 페미니스트들을 주장하듯이 사회적인 성취가 더 중요하고 사랑 특히나 남자에게 사랑받는 일에 매달리고 싶지 않다는 우아한 주장은 지금은 (통용되기도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성취가 사랑보다 더 좋은 건 당연하다. 그러나 성취하지 못하니 사랑이라도... 라는 건 이제 없다.

모두가 약아서 아니면 모두가 두려워서 내가 희생하며 사랑하고 사랑하니까 모든 걸 해주고 사랑하니까 다 이해한다는 고리타분한 말들은 사라졌다. 내가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랑은 그냥 민페일 뿐이다. 나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고 누구든 내게 폐를 입히는 것도 싫을 뿐이다.

사랑이라는 건 없어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다.

몸의 욕구중 하나인 섹스나 누군가의 위안은 그냥 혼자 해결이 가능한 시대가 되어버렸다. 혼자 살기 좋은 세상은 혼자 모든 걸 해결할 수도 있다. 질의 문제는 있겠지만 최소한의 것으로 가능하기는 하다.

사랑의 문제

사랑의 주체가 되는 것. 나의 욕망에 충실한 것 등등

이제 그것이 관계속에서가 아니라 그냥 혼자 충실하고 주체가 되어 각각 개인으로 살아가는 세상이 되는 중이다.

누군가와의 관계는 불편하다.

양보해야하고 싫어도 좋은 척해야 하고 나눠야 하는 것 대신

그냥 쿨하게 안전하고 편안하게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손바닥만한 액정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혼자 잠드는 것, 그리고 그 일상을 sns에 조금은 더 행복하게 조금은 더 만족스럽게 채색해서 올리는 것 그것이면 족하다.

슬프지만 슬퍼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사랑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게 아니라는 것. 종족을 번식시켜야 하는 일을 나하나쯤은 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것. 나아가 꼭 인간이 멸종하지 않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않냐는 도발적인 생각까지....

점점 외로워지는 세상이다.

벨 훅스는 그걸 알았을까? 그때와 지금이 많이 다르다는 걸...

 

 

공적 사적 영역에서 공정한 관계를 원한다. 일자리. 임금. 가정에서의 관심정도는 나눌 수 있지만 성적인 습관을 바꾸고 싶어하지 않는 남자들. 그 관계에서는 우위를 점하고 싶어한다.

남자들은 보살핌 감정노동에 에너지를 쓰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그 영역은 여전히 여성의 몫으로 남아있다.

성적인 자기결정권 자유등은 남성들이 환영할 만한 일이 된다. 성적인 방종으로 보이는 그 자유로움이 자신들에게 불리하지는 않다. 당닿하고 권력을 가진 여성들이 성적인 관계에서도 허용적이라는 것은 매력있는 일이다.

가끔 여성들은 고민한다. 권력과 성공을 얻고 남성 파트너를 잃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진실로 남녀 모두 사랑보다 권력을 갈망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권력을 향한 갈망은 말할 수 있지만 사랑을 향한 갈망은 비밀에 부쳐야 한다. 그런 갈망은 약하고 권력 없는 쪽에 서는 것이다.

사랑도 일종의 권력관계가 아닐까

사랑이나 섹스의 관계가 동등하다는 것이 가능할까

더 많이 끌리고 더 빠져드는 쪽이 약자라는 사실은 부정하고 싶지만 사실이다.

맞춰주고 싶고 받아주고 싶은 욕망과 권력과 동등함을 유지하겠다는 마음은 다른 것일까. 일과 일상에서 당당하고 동등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사랑앞에서는 유독 모든 것을 양보하고 받아들이는 것. 사랑이 가진 어떤 속성일까 아니면 오랜 묵은 관습일 뿐일까?

사랑이 권력의 문제라면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나약함의 표현 권력을 빼앗긴 혹은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일까?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 누군가의 사랑마저 받지 못하면 보호받지 못하고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불안함에서 누구든 자기를 사랑하고 보호해주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사랑받는 것이라는 걸까 사랑을 위해 비굴해질 수 있고 구걸할 수 있고 당당하지 못한 상황. 그럼에도 그것이 배려고 인내고 참아내는 사랑의 다른 모습이라는 믿음은 그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스스로 너무 비참해지고 의미가 없어서일까

사랑이 당당할 수 있다면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과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투명하게 드러나도 괜찮은 상황. 그런 평평한 운동장은 없을까

 

결혼의 주목적이 재산분배와 잠재적 노동력이 생산을 위한 결속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 19세기가 되어야 사랑은 여자들에게 중요하게 여겨졌다. 유럽의 제국주의는 다른 문화를 식민화하면서 여성의 종속을 이상화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식민지는 여성화함으로써 자신들의 종속 지배를 정당화한다.)

자본주의의 성장은 가정과 일터를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으로 분리했다. 여자들의 일은 사적 영역에서 조화로운 가정을 만드는 것이 되었다. 공정 영역에서 남자들은 경쟁적이고 무정했다. 가정은 이런 열정이 길들여지는 장소였다. 그곳에서 남성들은 기대고 앉아 휴식을 취하고 평화로운 양육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여자들의 일이었다. 가정에 대한 이런 이미지는 모성을 이상화했다.

여성은 어머니로서 삶을 유지하고 남을 보살피는데 일찍부터 관심을 가져야 했다. 남성은 보호자이자 제공자로서 생활을 책임지고 직장에서 무정해져야했다.

정서적으로 여성에게 의존하여 얻는 기쁨과 별개로 남성들은 정서적 영역을 평가절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론 사랑의 가치절하를 의미했다. 가부장적 남성의 상상력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는 약자들의 영역으로 강등되었고 그 자리는 권력과 지배의 내러티브로 대체되었다. 남자들에게 성적 만족은 사랑의 기수로다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사랑= 정서적 영역이며 보살핌)섹스는 일과 마찬가지로 권력이 연루되는 영역으로 여겨졌기에 사랑보다 우선시되었다.

상호적인 관심과 헌신을 영혼의 짝을 강조하는 사랑의 관념은 희생적 돌봄과 양육에 중점을 두는 것으로 바뀌었고 사랑은 여성만의 일이 되었다.

어머니로 이상화된 여성들은 보살피는 일에 특화된 것처럼 여겨졌다.

 

성별에 따른 생물학적 차이가 내재한다는 주장은 가부장적 사고의 핵심이다.

반가부장적인 사고는 생물학적 성차가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문화적 상황이 신체적 차이보다 영향력이 크다는 점. 그리고 생물학적 차이가 운명은 아니라는 점을 인지했다.

실제로 다른 이가 더 잘 지내도록 돕는 양육 능력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능력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배우는 것이다. 가부장적 문화는 남성이 타인을 양육하고 돌봐주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상황을 강화시켰다. 건강한 방식으로 양육된 성은은 자신이 양육되는 과정에서 양육하는 법을 배운다. 남자든 여자든. 양육과정에 참여하면 아이들과 유대감을 느끼게 된다.

여자들의 돌봄 능력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많은 이로 하여금 양육과 사랑을 동의어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실 양육 능력 돌봄 능력은 사랑의 한 양상에 불과하다. 에릭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관심 존경 지식 그리고 책임감으로 정의한다.

어릴 적부터 배웠기 때문에 여자들은 일반적으로 남자보다 보살피는 방법을 더 잘 알지만 그게 본능이거나 천성은 아니다. 보살피는 것은 사랑의 한 모습이지만 그 자체가 사랑은 아니다.

친밀감을 제공하는 데 관심이 없는 남자와 지내는 것은 내가 그와 정말로 가까워질 필요가 없음을 뜻했다.

상호간 성장과 발전을 중심에 두지 않는 결혼관계속에 편입되었다.”

우리중 많은 이가 강압적이고 종속적이며 미성숙한 여성, 때때로 폭력적이고 모욕적인 언어로 학대하는 여성에게 길러졌으면서도 여전히 친절한 존재라는 여성의이미지에 매달렸다.

보살피는 존재로서 여성이라는 이상형은 사회에서 너무나도 강력하게 작용한다. 그건 가부장제가 승인해준 여성에 관한 몇 안 되는 긍정적 자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들이 이런 자질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하거나 싫어한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이제 여성들이 사랑의 사회적 재평가를 요구할 때가 되었다. 그것은 사랑을 저평가하게 된 구체적인 역사를 알고자 하는 의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한 그것은 여성이 남성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라는 성차별적 전형에 대한 철저한 거부와 아무리 어렵고 많은 희생이 따르더라도 사랑의 작업을 수행하겠다는 확실한 의지에 근거해야한다.

결코 나를 떠나거나 배신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여성인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서 사랑의 탐색은 시작되어야 한다. 이 여정은 친밀감과 진정한 사랑의 본질에 대한 기존의 사고와 믿음을 재검토하는데서 출발한다. 여성이 선천적으로 사랑에 적합한 존재라는 편견을 버리고 사랑을 하겠다고 선택하는 것이다.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주체성과 개이적 성장 정서적으로 여린 마음을 얻게 될 것이다.

 

 

혼자가 편해진 건 관계에 대해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경계일 수도 있다.

누구와도 관계맺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는다.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으려면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되고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면 미친 듯이 비타민을 섭취하고 쉬면 된다.

그렇게 미친 듯이 조심한다고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없다.

누구와도 친밀해지지 않겠다고 해도 상처는 생길 것이다.

관계를 하지 않겠다는 말은 절대로 관계따위를 맺지않겠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상처를 받지 않을 관계가 있다면 내가 주도하고 시작하고 끝낼 수 있는 관계가 가능하다면 나는 관계를 할 것이다. 외로운 것은 두렵다. 괜찮다고 하지만 오래 지속되면 사람이 망가질 수도 있다.

내가 상처를 받지 않는다면 괜찮은 관계가 된다. 관계 내내 전전긍긍하고 긴장하지만 그 관계는 괜찮다. 그래도 관계니까

내 울타리를 견고하게 치고 관찰한다. 이러면 어떻게 반응할지 저러면 어떻게 나올지를 실험하고 지켜본다. 그리고 이만하면 괜찮다는 계산을 한다. 냉정하고 이기적이지만 어쩔 수 없다. 내 상처가 가장 아픈 법이다. 내가 받은 만큼 주고 니가 준 만큼 나도 한다. 일일이 계산하기 머리 아파서 한번쯤 아무 생각없이 줄때도 있지만 오래가진 않는다. 다시 머리를 굴린다. 나만 상처받고 싶지 않다. 그래도 외로워서 혹시 저 사람도 나와 같지 않을까 둘이 동시에 괜찮다고 상처주지 않는다고 선언하면 안전하지 않을까 고민하지만 서로 결코 속내를 이야기하지 않으니 서로 알 수 없다. 슬프게도...

 

스스로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여성의 신체를 향한 부정적 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작업을 포함한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건강한 몸을 찬양하고 미와 찬사를 적절한 관점으로 되돌릴 수 있다. 여성이 사랑에 대한 탐험의 방향을 자기 자신의 몸으로 돌린다면 몸에 대한 사랑과 자기애의 관계를 명료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여성은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좋아해줄 파트너를 만나고 싶어한다. 우리는 상대가 나에게 무조건적인 포용과 확신을 주기를 바란다. 특히 어린 시절 가족에게 말고는 절대 인정받지 못했다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자신이 신체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기를, 있는 그대로 사랑받기를 원한다. 심지어 스스로도 인정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건 최악의 자기 파괴 방식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기대하듯 잇는 그대로 자신을 인정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의 살을 사랑할수록 다른 사람 역시 그 너그러움을 축복할 것이다. 여성의 몸을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토대로 자신을 향한 더 깊은 관계를 마음과 몸과 정신을 잇는 사랑의 관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너를 사랑하지만 너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가족사이의 은밀한 질투와 시기. 똑똑한 딸이 자랑스러우면서 동시에 두려운 마음.

 

관건은 균형잡기다. 균형이 잘 잡힌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떤 여성도 사랑의 중요성을 강제로 부정당해서는 안 된다. 영향력이 있고 성공한 여성 중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삶에 진실된 사랑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안다.

 

쌍년이라는 말. 성공하고 강하고 독한 여자와 사랑스럽고 인내하고 남을 보살피는 여자는 늘 다른 사람이어야만 할까

내가 나로 살려면 쌍년을 택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도 결국은 가부장에서 타인이 가지는 시선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공을 위해서는 순하게 말하면 안되고 사랑을 갈구해서도 안된다.

사랑이냐 성공이냐? 왜 이 두가지는 함께 있지 못하는 걸까

성공하기 위해 사랑을 포기하거나 사랑을 위해 성공따위는 필요하지 않거나 하나를 가지면 하나를 가질 수 없다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깰 필요가 있다.

 

 

소녀들은 가부장제 안에서 남성에 대해 배우고 그들에 대한 생각을 형성할 때 우리는 권위적인 남성이 가르치는 남성상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 삶의 중요한 남성 인물이 잔인하고 비정하며 때로는 난폭한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이 우리가 남성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 된다. 만약 우리 삶의 남자들, 어떤 연장자 여성에게든 학대받는 우리를 방치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존경할 수 없다. 우리를 보호하는데 실패한 그들을 우리는 용서하지 않는다,

 

 

 

사랑이 밥 먹여주나? 한 때 이말이 신념이었다.

사랑이라는 것이 남녀의 에로틱한 것 설레는 것 뭐 그런것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에도 그랬고 그 사랑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을 때도 그랬고 의기충만해서 누구든 다 매력에 빠뜨릴거라는 자만심이 가득했을때도 그랬다.

사랑은 설레면서도 두려웠고 굉장히 유혹적이면서 동시에 절대 다가오지 않아야 할 것 다가서기 두려운 것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은 내 반쪽을 내줘야 하는 일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았다. 내가 싫어하는 것 좋아하지 않는 것 지금 내키지 않는 것을 기꺼이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게 두려웠다,

난 싫은 건 죽어도 싫었고 하기 싫은 건 무지하게 게으르게 대응했고 그리고 이기적이었으므로

나는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게 끔찍하면서도 동시에 자동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어 애교를 부리고 그 사람에게 맞추고 눈치를 보고 죄책감도 느꼈다.

그래도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사랑한다면 이렇게 양보하고 서로 배려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이기적인 나는 그 모든 것들이 불편하고 불안했다.

차라리 자웅동체여서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만족하며 살고 싶었다.

오죽하면 다음생에는 지렁이가 더 낫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했을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일딴 내가 성숙해져야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하며 있는 그대로 나를 인정하고 좋아해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내가 너무 싫어서 미운 면이 너무 많아서 내가 좋아하는 이상적으로 여기는 그 사람처럼 굴고 그 사람처럼 되고 싶은 게 아니었다. 물론 이상형을 닮아가는 건 좋다. 닮아서 더 나아지고 더 편안해졌다면 그건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이상형이 너무 불편하고 두렵다면 차라리 모자라고 한심한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 더 가치있었다.

나는 조금은 변해야 하고 이기적이지 않아야 하는 건 안다.

그러나 나를 자기에게 맞추기 위해 구부리고 잘라내고 억압하는 것은 견디기 힘들다. 그냥 모나고 이상한 모양으로 살고 싶었다.

그리고 그에게 나에게 맞추라는 요구도 하지 않으려 한다.

나에게 맞추기를 은근슬쩍 감추면서 세상이 이게 옳다고 하는데 왜 너는 저게 옳다고 하느냐며 너는 무조건 그르다고 하는 것을 그만두고 싶다.

내가 맞춰지지 않듯이 그도 맞춰지지 않을테니까

그러나 그래서 그가 밉다. 사랑했다는 사실조차 다 지워버리고 싶을만큼 밉다.

내가 사랑을 두려워했던 건 상처받기 싫기도 했고 내가 없어지는 것이 싫기도 했고 이상하게 날 좋아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좌절감이기도 했다.

세상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나도 세상을 미워할테야 삐뚤어질테다 하는 마음이 사랑을 거두었다.

사랑은 이성간의 에로스만 있는 건 아니다.

믿음 배려 공감 성장 등등 여러 가지 다른 얼굴을 가진다.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내가 만족스럽고 뿌듯하고 뭔가 마구마구 뿜어져나와 여기저기 베풀고 싶은 그 마음 그래서 내가 한뼘은 자란 것 같은 기분등 그게 모두 사랑이었다. 세상에 대해 환하고 좋은 시선을 가지는 것 누군가에게 댓가없이 배풀어주는 마음 그리고 기다려주고 그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마음 모든 건 사랑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나를 좋아하는 것 미워하지 않는 것 후회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었다.

 

나는 사랑을 이해했지만 실천은 여전히 어렵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과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늘 쫙 쪼개진 사과처럼 나눠져 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될까

가장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누구를 사랑할까

이대로 나의 사랑은 유효기간이 지났을까. 나는 나로서 다른 남성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는 영영 없는 걸까 이렇게 늙어가는 걸까

이게 무슨 방정맞고 주책맞은 생각일까

상처받아도 끄떡없는 나이에 사랑을 많이 할 것을

그런데 내게 그런 나이가 있긴 했던가?

늘 상처는 내게 두려움이었다. 누가 나를 싫어할까 몹시도 움크리고 날을 세웠던 시간들이었는데.. 그래서 내가 이쁜지도 모르고 살았다.

난 이뻐지기도 전에 나이를 먹고 있었다.

언제 피려나 기다리다가 그냥 그렇게 녹음이 짙어졌다. 내 꽃은 어떤 모양이었나 기억나질 않는다.

 

사랑이란 나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만큼이나 나를 충만하게 움직이게 하리라

그걸 누가 딱 30년전에만 알려줬더라도... 이렇게 살지 않았을까

 

책은 신선하지 않다.

사랑은 신선하지 않다. 개나 소나 다 말하는 사랑 따위가 뭐가 새롭고 뭐가 신선할까

다만 사랑은 늘 아쉽고 두렵고 그리고 저 멀리 있다.

내 안에 사랑이 있음을 알지만 늘 저 먼 곳에 별처럼 사랑이 있다.

알아도 그렇고 몰라도 그렇다.

그냥 다음생에는 지렁이로 태어나는게 낫겠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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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사적 영역의 개인과 공젹 영역의 개인을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인지하면서 실제 개인의 삶에서 그 영역은 완전히 분리되지 않음을 고려할 때 여성 서사 및 그 서사와 관게 맺는 개개인의 삶에 대한 이해의 영역이 넓어진다.

감정도 생각도 느낌도 자기만의 언어도 없는 인형이라는 희원의 자기 표현은 개인적인 것이 소거당한 여성 화자의 자기 인식으로 읽힐 수도 있고 그것은 아주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 구성적인 문제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한 학생이 자신 및 자신과 관계되는 삶에 대한 에세이를 발표한다. 발표자는 영성의 삶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말한다. 육아의 문제와 고용 불안정이 여성에게 부과되는 사회적인 역할과 결합됨으로써 발생한다는 것을 안다면 이 학생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적 현실은 개인적인 문제로 국한할 수 없다. 우리는 무엇이 어떤 문제들은 사적/공적인 것이라고 말하면서 가치판단하고 있는지 생각해야한다.

 

개인적인 일이야. 그리고 공과 사는 구분하는게 좋겠어. 일의 능률을 위해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내가 긴장하고 보여지는 나에 치중해야 하는 공간과 모든 끈을 놓아버리고 마음대로 풀어져도 되는 공간을 나누게 된다. 자아는 그렇게 조금씩 분열한다. 누구에게 책잡히지 않고 나는 개인의 나가 아닌 어떤 역할의 나가 된다. 사무실의 주임 학교의 비정규직 교사. 남편가족들 사이의 며느리. 올케 형수 그리고 사회 시민으로 규칙과 상식을 지키는 나까지.. 그 속엔 개인인 나는 과연 없을까?

그리고 내가 마음껏 흐트러져도 괜찮은 내 집에서도 나는 온전한 나일 수는 없다. 엄마가 되고 아내가 되고 옆집 같은 반 아이 엄마가 되어야 한다. 내가 나를 죽이고 아닌 척 하고 남들이 원하는 모습이 내가 원하는 모습이라고 믿으면서 나는 점점 내 속에서 소멸한다.

만약 내가 권력이 있다면 이렇게 분열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되는 걸까?

힘이 있는 존재라면 (그것이 남성이든 아니든) 사회에서 보여지는 나 속에 내가 가진 욕망과 본능을 그대로 드러내도 상관이 없다. 오히려 인간적일 수 있고 매력적일 수도 있다. 그런 면이 있네요. 하는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낸다. 설령 돌아서서 저런 꼰대같으니... 라는 뒷담화를 들을지라도 그 앞에서 누구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공적인 나와 사적인 나를 구분하지 않아도 되는 것 그건 힘이다.

그러나 아무리 힘을 가지지 못해도 공적인 나와 사적인 나를 딱딱 구분해서 살 수 없다.

나는 나도 모르게 스며들고 물들면서 둘은 어느 순간 만난다.

감정없이 사람 수만큼 커피를 주문하고 새로운 정책을 기안하는 내 속에 뭔가 부조리하다고 느끼고 부당하다고 느끼는 내가 전혀 없을 수 있을까. 아침에 조금만 더 눈을 붙이고 싶지만 타인을 위해 화장을 해야하고 가족을 위해 뭔가 먹을 걸 준비해야 해서 결국 채 다섯시간을 못채운 수면에서 억지로 눈을 떠야 하는 순간. 그때 온전한 나였을까

그런건 원래 그런 거예요. 늘 해오던 방식이고 아무도 뭐라고 한 적 없는데 꽤 까탈스러우시네요. 라는 타인의 말이 울컥하는 내 속에는 공적인 내가 있는 걸까 사적인 내가 있는 걸까 내 감정과 정서가 들어있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느낀 부당함에 대한 표현도 함께 들어있다. 그건 나의 모든 부분이 함께 스며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알지 못한다. 늘 하나를 택해야 하고 하나를 디폴트값으로 삼으면서 하나를 죽인다. 꼰대도 될 수 없고 진상도 될 수 없어서 그냥 나를 죽인다.

이문제는 개인적인거잖아요. 저마다 입장이 다른 거예요. 라는 말. 그것을 정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사적인 문제/ 공적인 문제라는 것이 딱딱 아귀가 맞게 떨어지게끔 하는 이는 누구인가. 그는 무슨 기준으로 그것을 정할까. 문제는 그걸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이야기는 평범한 이야기가 될 수 없는가? 평범한 이야기라면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게 되는가?

 

중요한 이야기는 내용의 경중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방식/시선과 관련된다. 중요한 이야기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중요한 이야기는 어떻게 중요한 이야기가 되는가? 로 대체된다.

 

어떤 사실을 지나 그것을 어떤 관점에서 어던 방식으로 말하고자 했는가?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가보다 스스로 그 사실에 대해 방어적으로 굴고 타인의 평가를 우려하는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 그 부분에서 수치심을 느낀다.

모든 글에는 글쓴이의 감정이나 생각이 묻어날 수밖에 없다. 애써서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어쩌면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독자가 자기 입장에서 보이는 것 보고 싶은 것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스스로 방어적이고 누구나 들어도 괜찮은 다시 말하면 없어도 그만인 글도 분명 존재한다. 그 글들은 아무런 주장이나 의미가 없는게 아니다. 기득권에 대한 다수의 생각에 능동적을 순응하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사실을 말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어떤 형태로 발화되든지 어떤 추가적인 의미를 얻든지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사실이라면 그대로 말해도 괜찮은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가며 여성-강사가 당면한 부당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을 해결할 수 있는가? 남성이 되거나 정교수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여성이자 비정규직인 선생님이 어떤 불공정한 일을 겪어내야 극복해야 할지 우리는 예상할 수 있다.

 

어떤 사실들은 종종 슬프다. 나를 억압하는 인식들이 어던 구조속에서 사실로 굳어졌을까?

그것이 삶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 얼마만큼 부정하고 또 인정해야할까 그러나 삶이 늘 슬픈 것은 아니다. 어떤 사실이 관계에 균열을 낼 것임을 염려하는 순간에도 누군가는 사실에 의문을 던져왔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의 언어가 나와 언어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겠지만 비슷한 방향으로 향해 서로를 지탱해줄 것임을 빛을 보고자 하는 자는 안다.

 

나는 최은영 작가가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좋은 글을 자주 쓰지 않아도 오래 썼으면 좋겠다.

많이 고민하고 이게 옳은 걸까 과연 나에게 옳은 것이 타인에게도 옳은 걸까 계속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아파하는 작가가 그럼에도 지치지 않기를 바란다.

어떤 글을 써야 할 때 나의 입장에 대해서

타인에 대해 예의를 차리는 일이 사실 어려운 일도 아니지만 쉬운 일도 아니라는 걸 말할 때도

관계 속에서 내가 소멸할 것같이 힘든 순간 그냥 타인의 눈에 띄지 않고 그렇게 멈춰버리는 걸 해도 괜찮다고 말할 때

그래도 기다려주는 내가 있다고 말해줄 때

아주 시간이 지나버렸지만 그때 정말 미안했다고 그렇게 말할 용기가 없었다고 그렇게 말할 자신도 없었다고 혼자 나지막히 말할 때도

촌스럽고 21세기 작가답지 않은 서사임에도 나는 여전히 그의 글을 기다린다.

그는 글을 잘 쓰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글을 읽고 나면 오래오래 멈추게 된다.

나는 잘 살고 있을까.

나는 관계속에서 어떤 사람일까

나도 괜찮은데... 라는 생각을 계속하게 된다.

그가 지치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계속 글을 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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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무라가 돌아왔다.

전작 <희망장>에서 이미 탐정이 되었고 몇몇의 사건을 해결했지만 이번엔 제법 탐정티가 난다.

백업해주는 오피스와의 관계에서도 제법 대등하고 원할하게 잘 넘어가고 있고 이젠 의뢰인을 제법 밀고 당길 줄도 알게 되었다

성장과정도 무난했고 운이 좋아 신데렐라 남편이 되는 바람에 행복한 탐정이라는 별칭까지 있었지만 그때의 스기무라는 늘 불안하기도 했었다.

지금 내가 누리는 이 행복이 완전한 내것 같지 않고 남의 옷 남의 집에 있는 것같은 붕 뜬 느낌

내 가족이지만 함부로 할 수 없고 꺠어질라 부러질라 조심 또 조심하면 대해야 한다는 건 다정한 스기무라에게도 많이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사건을 겪고 주체적이랄 수 없지만 어쨌뜬 탐정역할을 하며 실패도 하고 성공도 했고 또 우여곡절끝에 이혼하고 이제 진짜 세상에 홀로 맞섰다.

전작에서는 좌충우돌하며 아직은 샐러리맨의 티가 많이 남아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제법 탐정같다.

그래서일까 이전의 말끔하고 어딘가 어리숙하게 진지하고 고지식하게 보이는 면이 많이 옅어지고 이젠 밀땅도 할 줄 알고 사건의 전체를 보는 눈도 가졌다.

이걸 축해해줘야 하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아마추어냄새가 나는 스기무라가 그립기도 하다.

하긴 이제 독립한 자영업자인데 월급쟁이 모드를 계속 가지고 있을 순 없겠다.

 

스기무라의 특기가 소소하지만 사회성을 가진 사건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번 사건들은 소소하다고 하기엔 좀 쎄다.

가장 추잡스럽고 가장 악랄한 인간이라기보다 악마라고 하는게 차라리 나을 거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자기들의 이기심과 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해 상대를 인간으로 보지 않고 그저 욕망의 대상 쓰고 버려도 하등 미안할 것 없는 존재로 보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쩌면 살인이나 무엇보다 더 마주하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고....

이제 자영업자로 살아남기 위해 스기무라가 독해졌구나. 이제 이런 정도는 쉽게 마주할 만큼 배짱이 두둑해졌나보다   싶다가도 소심하고 눈치보며 풀어가는 작은 사건이 그립다.

 

다행일까 두번째 사건은 일상적이다

누군가 죽지도 않았고 다치거나 크게 손해를 본 것은 아니다.

다만 어쩌면 너무 사소해서 드러내기가 민망하거나 옹졸해보일까 두렵지만 그렇다고 품어두기엔 내가 너무 미칠것같고 억울한 관계와 사건이 전개된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을 질투하고  내가 어떤 인과응보를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는 그런 존재다. 그렇게 작고 하찮아서 오히려 더 살만한 세상을 이루기도 한다.

 

세번째 사건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는.... 정말 집안의 검은양처럼 모두를 파괴하는 인물이 혼자의 이기심에 어리저리 날뛰다가 결국 주변사람을 다치게 하고 삶을 망가뜨리는 이야기다.

사실 그런 인물이 얼마나 주변사람들을 힘들게 하는지 잘 알지만 너무 표피적으로 원래 저런 사람 이라고 단정짓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은 불만이다. 미키가 그렇게 된 이유가 있을텐데 그냥 이상하고 악의적인 존재는 없을텐데 그냥 그런 사람으로만 묘사하고 그런 사람이 저지르는 악행이라고만 드러나는게 아쉽다.

 

이제 스기무라도 나이를 먹나보다.

딸아이 또래 아이들만 보면 괜히 마음이 뭉클해지고

조금은 꼰대처럼 끼어들고 싶어도 하고 아이들앞에서 어른으로서 뭔가를 지적하고 가르치고 싶어하는 모습도 보인다.

다만 그럼에도 아직도 사건앞에서 다양한 의문을 품으며 예의있게 왜? 라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 그건 여전하다. 그래서 아마 다음  스기무라의 이야기도 기다리고 있을 거고...

이제 더 이상 처가에 눈치보며 몸을 작게 움츠리고 있는 스기무라가 아니다.

자영업자 탐정으로 스스로를 책임지고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본업에도 충실한 생활인의 모습이 강한 스기무라의 다음 이야기도 기대한다.

다음 사건은 조금 더 작고 소소하지만 꼭 필요한 사건(뭐래니?)이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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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05-13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어제부터 일단 읽기 시작하긴 했는데.. 평이 엇갈려서 좀 불안하네요 ^^;;
곧 다음 소설도 나온다는 소문이 있긴 합니다 (속닥속닥)

푸른희망 2020-05-13 13:31   좋아요 0 | URL
스기무라씨도 성장해야죠~^^ 점점 독립된 탐정다워지고 그에 걸맞은 사건을 맡는거지요 전 다음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예민한 작가구나 싶었다.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감정들 생각의 가닥 가닥들을 섬세하게 놓치지 않고 들여다 보고 묘사해낸다. 그 감정과 생각에 경중이 있지 않고 앞뒤가 있지 않음을 세심하게 살핀다. 그 마음도 그 맞은 편의 다른 마음도 다 그럴 수 있는 거라고 작가는 말하면서 은근하고 강단있게 그럼에도 옳은 방향은 이렇지 않으냐고 반문한다. 그 마음이 참 따뜻하다.

 

내가 누군가와 연대한다고 믿는 순간에도 내 속에 수만가지가 혼란스럽게 고개를 내민다. 우월한 위치에서 시혜적인 마음

한켠 이것이 전부 진실일 리 없다는 의심

그 의심을 감싸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 믿는 신념들

나의 지적 능력에 대한 관신

이건 내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죄책감

내가 뭘 안다고 나서는 걸까 하는 소심한 두려움

그렇기에 도망가도 괜찮다 누군가 대신하지 않을까 하는 비겁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한다는 무모한 정의감까지

한가지 행동에 존재하는 수만 갈래의 마음들 그렇게 나는 나를 한 방향으로 몰아가지 못해, 단단한 믿음이 없어서 갈등한다.

어떤 한 갈래의 내 마음이 타인의 다른 갈래의 마음가 만나서 갈등을 만들고 마음은 서러움과 부딪친다. 상처입고 웅크린다.

내 마음을 내가 정확히 이름 지을 수 없다 선한 사람이길 바라며 동시에 무엇도 손해보고 싶지 않고 가난한 내것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한 비겁이 부딪치면서 타인의 속물스러움을 부러워하며 동시에 혐오한다. 그 상대의 속물스러움은 내것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불행을 절박한 상황을 들으며 나는 판단하거나 충고를 해주지 않으려 한다.

나는 그 상황을 잘 모른다. 어쩌면 그는 자기가 유리한 상황만을 내게 말하고 편을 들어달라고 하고 도와달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중립을 지켜야 하지만 세상에 완벽하게 순수한 중립이란 없다. 누군가는 상처를 입게 되고 아무도 만족할 수 없는 상황이 그 놈의 중립이니까. 나는 완벽하게 그 사람의 편을 들고 싶다. 그가 틀렸더라도 내가 속았더라도 이용당하고 있을지라도 지금 이순간 그의 편이 되고 그의 말을 듣고 그의 등을 쓸어주며 니 잘못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는 그렇듯 그도 그렇다고 믿는다. 우리는 사실 자기가 잘못이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크든 얼마나 작든 내게도 티끌이 있음을 안다. 다만 모른 척 할 뿐이고 아니라고 우기고 싶을 뿐이고 속이고 싶을 뿐이다. 내가 아는데 적어도 나는 속일 수 없다. 정말 완벽한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그냥 나는 그 판단에 눈을 감고 편을 들고 만져주고 위안을 주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타인에게 인정받고 공감받고 나면 내 잘못을 들여다 볼 용기를 낼 수 있고 내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 한 발 내디딜 힘을 얻을 거라 믿는다. 모두가 찾아와 도움을 청하고 무언가를 해보려고 하는 마음을 먹고 실행하는 순간 그는 자기를 제대로 보려고 하는 것이라 믿고 싶었다.

짧은 경력의 상담사는 그렇게 기도하며 상담실로 들어간다.

 

갈등이 나쁜 것은 아니다. 갈등이 없는 매끈한 현실은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끔찍하다. 하나하나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어떻게 갈등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을까?

알수록 어려운 타인이고 모를수록 관대할 수 있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아무렇지 않고 편안하기만 할까? 제대로 갈등을 겪고 제대로 부딪쳐서 너와 내가 뭐가 다른 건지 이건 과연 만날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없는지 다투고 고민하고 끝을 각오하고 덤비는 상황을 맞지 않고 그냥 일방이 참고 견디는 그런 매끈한 화목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엄마를 50년 알았는데 이제 와서 나는 엄마를 모른다는 걸 알았다.

엄마도 나를 모른다.

엄마가 판단하고 불렀던 말이 없어 속을 알 수 없고 삐딱하기만 아이를 그동안 나라고 여겼다.

내가 문제라고, 다른 모두는 닮아서 이해하고 공통점이 있는데 나만 불편하고 어색하고 쉽게 입을 열기 힘들었던 관계가 모두 내탓이라고 생각했다.

고칠 생각을 하고 노력한 건 아니었지만 나도 그들과 정말 절실하게 닮고 싶었다. 차라리 그들을 닮아서 편안하고 싶었다. 그렇게 마음에 안들고 그건 아니라고 자꾸 부정되면서 한편으로는 저렇게 살고 싶고 저렇게 서로 공감하고 편했으면 했다.

늘 내 선택은 틀렸다. 끝에 가면 뭔가 이상하게 뒤틀리고 어렵고 아니었다. 그때 그렇게 말릴 때 말을 들었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내 속에 가득하면서도 나는 허세가 가득했다. 나는 지쳐갔고 이제 두 손을 들고 나 좀 살려달라고 이제라도 어떻게 하면 당신들과 같아질 수 있느냐고 매달리고 싶으면서도 더 등을 돌리고 괜찮은 척 강한 척 못된 척 했다. 내가 한 선택이 틀렸다는 건 결국 그 결과를 오롯이 내가 안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틀린 문제는 내가 고쳐야지 두 손들고 남에게 치워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속으로만 안고 쌓아갔고 엄마는 내가 당신을 무시한다고 잘난 척한다고 단정하면서 너는 강하니까 괜찮으니까 하는 마음에 무심하게 돌을 던졌다. 물론 던지는 이는 그게 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나는 쉽게 다쳤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진짜 괜찮고 강하고 못됐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봐도 정떨어지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으니까.

자기가 낳고 기른 자식도 모를 수 있다.

가장 친밀한 관계 엄마와 자식도 서로 모른다.

서로 잘 안다고 내가 아는 만큼 상대도 나를 안다고 믿으면 앞뒤 자르고 툭 뱉는 말들 행동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심함, 그런 것들이 서로에게 비수가 되어 오해가 깊어졌고 상처는 깊어갔다. 내 속의 여러 갈래의 마음들

내가 못되서 그들이 베푸는 선한 마음을 속물적인 시혜라고 받아들였다.

그들은 선한 마음을 베풀었음에도 그 마음은 어디다 갖다 버릭 그들이 주지도 않은 모멸감을 받아들고 부르르 떨었다. 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그 모멸을 나혼자 받아들고 어쩔 줄 몰랐다.

내가 삐뚤어졌을까? 내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50년이 지나 나만 잘못 생각하는게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도는 없겠지만 선한 마음이라 믿었겠지만 받는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그 짧은 생각이 모멸감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아무 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도착해 있는 자리가 있다. 아니 아닌가 내가 무엇인가 잘못했을까 나도 모르게 둔감해졌고 안전만 추구하는 의존적인 사람이 되었고 그래서 누군가를 배재했을까?

이런 것이었나? 이런 것이었구나. 사실은 별 것도 아닌데 그래서 별 거였구나.

 

우리는 바이링궐이다. 우리 말은 반쯤은 자신의 것이지만 반쯤은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우리는 종종 싸우려다 싸울 대상을 변호하여 주저앉는다.

그리고 나서 성내고 괴로운 마음이 되어 자신을 때려 기어이 피를 내곤 한다. afl 싫어도 우리 입에선 자꾸만 아줌마라는 말이 흘러나온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하하는 그런 말이.

<작은 마음 동호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건 이상한 말이었다. 더 이상 정직할 수 없는 말이지만 몹시 편리하게 책임을 방기해버리는 말이었다. 너무도 불공평한 말이었다. 그러나 승혜에게는 한 사람과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 이전에 조금 더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 마지막으로 꼭 해야하는 칼질같은 말이기도 했다.

 

미오가 선어너럼 내뱉었던 너는 몰라라는 말에 담긴 무서움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 것인지 승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 말은 심연의 말이었고 그것을 똑바로 감당하기엔 승혜는 너무 젊었다. 나는 무엇을 모르는 것일까 얼마나 모르는 것일까 미오 또한 나를 얼마만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승혜는 무서웠다. 그래서 무서움의 크기만큼 유치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승혜만큼 미오 역시 무서워하고 있었다. 승혜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그 하나하나의 작은 행동들이 아무런 상처도 남기지 않는 것은 또 아니어서 그렇게 젊은 두 연인은 서로를 물고 뜯고 눈이 빨개질 때까지 울음을 터뜨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모르는 건 그냥 모른다고 하면 되는 거야. 아마 그건 우리가 좋다거나 나쁘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닐거야.

 

그렇게 궁금하면 네가 누나에게 나중에 다시 물어볼 수도 있지.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그렇지만 네가 나중에 다시 물었는데 누나가 대답을 할 준비가 안 되있거나 대답을 전혀 하고싶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러면 억지로 물어보면 안되는 거야.

 

이런 맛 궁금했는데 생각과는 달랐다. 심심하고 슴슴하고 대단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맛이었다. 그 아무렇지도 않음 때문에 실망스러우면서도 안심이 되는 그 별 것 아님 때문에 자꾸 눈물이 날 거 같았다.

<승혜와 미오>

 

 

나는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오직 자신에게만 들리는 아우성을 속에 품은 채 진짜와는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보고 듣고 짐작하고 취급하는 세상 속을 계속 걸어가야 하는 괴리감과 말하고 싶은데 입을 다물어야 하는 수두룩한 순간들과 그런 고립 상태와 엄마와 재윤은 내내 싸워왔던 것이다. 나는 어떤 것과도 그런 식으로 싸워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거대하고 절박한 질문들은 아니어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어떤 막막한 심정은 내게도 있었다. 나는 매일 아치부터 밤까지 그것의 조각들이 내 몸속을 작은 반딧불처럼 날아다니다 새벽이 되어서야 꺼지는 광경을 느리게 느리게 지켜보곤 했다.

<마흔셋>

 

 

누가 옳고 그런지 판단과 결정을 하고 싶지 않아요. 할 능력도 자격도 없어요.

내게 온 그 사람은 말을 듣고 공감하고 편들면서 온전히 그가 나를 믿고 말하는 그 순간 그 동안은 그 사람 편이 되어 주고 싶어요. 어쩌면 본인이 가장 잘 알거예요. 이건 전적으로 그 사람 잘못만은 아니다. 내가 빌미를 주었을 수도 있고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달라져서 내 마음이 달라져서 미움 때문에 이럴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 모든 마음을 뭉뚱거려서 나는 그 사람편이 되고 그 마음을 이해하고 싶어요.

누군가가 오롯이 존중해준 내 마음 그 경험이 본인이 앞으로 발을 내디딜 용기가 될 수도 있고 자신을 돌아보며 욕심이라면 내려놓을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그냥 그 순간 내가 이용당하고 있더라도 그 사람 편을 들고 싶어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가 딱 이정도밖에 안되니까요. 더 이상은 나도 무섭습니다.

 

알고 있는 사람의 성폭력 피해사실 앞에서 나는 왜 도리어 망설이게 될까

그 안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누군가 편을 들어준다는 것 설령 그가 아주 가깝고 친밀하고 믿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전부를 걸어야 하는 일 일수도 있다. <피클>

 

 

믿어야겠죠. 선한 마음에는 아무 힘이 없다고 그건 아주 작고 연약한 거라서 어떤 무서운 일도 일어나게 할 힘이 없다구요. 그래서 우리가 지켜줘야 하는 거라고요.

 

위기에 처한 타인을 보면 사람은 미래같은 것과 상관없이 구하려고 몸을 던지게 마련이고 그는 그 본능에 충실한 뒤 자신 안에서 어떤 일관성을 만들어내는데 실패했을 뿐이다.

지금 이 세상은 너무도 병들어서 우리는 타인의 선의 뿐 아니라 자신의 선의까지 의심하고 그것을 망상의 위치까지 격하시킨다. 그런 지경까지 온 것이다. 정말이지 그래서는 안되는 지경까지.

<이웃의 선한 사람>

 

약속해 어떤 가정법도 사용하지 않기로

그때 무언가를 했더라면 혹은 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말로 우리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기로 해

가정법은 감옥이야. 그걸로는 어디에도 닿을 수 없어.

나는 현재를 살거야. 과거의 형벌을, 잘못 내린 선택의 총합을 살지 않을거야. 기억이라는 보석속에 갖혀 빛나는 과거의 잔여물을 되새김질만 하지도 않을거야. 오직 한 번뿐인 현재를 살거야 지금을.

 

 

세상에 수 많은 준이 존재하고 그 많은 준을 사랑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지경까지 간 상황은 내가 기억하고 또 기억해서 그를 존재하게 해야만 하는 것.

그것이 분열증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모든 존재가 준이 되어야만 내가 견딜 수 있는 상황이다. 준을 기억하고 존재하게 해야만 하는 것.

기억하는 한 나는 존재하는 거야... 그런거다.

<님프들>

 

 

이것이 우리의 사랑이란다. 연약한 존재여

 

이게 내 사랑이야. 이게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랑이 방식이라고

 

내가 인식하는 사랑의 방식을 아무런 주저없이 주장하고 요구하고 실행할 수 있는 건 힘이다.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건 이다.

그 힘은 대상에게 닿지 않는다. 사랑은 사라지고 치욕만 남는다.

 

<이것이 우리의 사랑이란다>

 

 

노동력을 제공하는 로봇들

그들은 왜 여자의 형상을 가졌을까 상반신은 여자이면서 하반신은 확실한 기계의 형상이다.

인간을 완벽하게 닮은 순간 느끼게 될 불쾌감은 줄이고 인간이 만족할만큼 본인의 의사는 전혀 상괂없이 너를 위해 너를 존중한다는 수아에 대한 나의 생각과 판단과 행위들이 과연 수아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평등한 입장에서의 존중이 아니라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흘려보낸 시혜였다.

내 입장에서 시혜가 그에게는 모멸이라는 것

몰랐고 이해할 이유도 없었다.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보기까지는...

<수아>

 

 

 

같은 입장, 같은 부류로 나뉘어 한 무리로 묶여있어도 개인은 각각 다르다.

사람은 개인적인 존재이고 저마다 특별하고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라는 것이 우선이다.

성별은 같아도 입장이 다르고 위치가 다르고 생각도 다르다.

상황이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로 묶일 수 있고 다시 나뉠 수 있다.

함께 묶여서 함께 소리내고 목적을 향해가더라도 다음 날 다른 길을 갈 수도 있다. 오늘은 어제와 다를 수 있다. 사람은 변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때 우리가 같은 생각 같은 방향이었다는 것이 위선이 되거나 그냥 아무것도 아닌 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대로 가치가 있고 지금은 지금 이대로 의미있다.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물론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고 그때 그렇게 믿고 친밀했던만큼 멀어지면 배신감과 미움이 커지겠지만 뭔가 사정이 있겠지. 그렇게 딱 그만큼 거리를 용납할 수는 없을까.

우리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작은마음동호회에서 그걸 본다.

 

이성애 커플이든 동성애 커플이든 인간이 가지는 갈등과 고민은 다르지 않다.

어쩌면 그래서 편안하고 그래서 이상하고 이물감이 든다.

나랑 분명 다른 취향을 가진 이들이 나랑 다르지 않은 고민을 한다는 건 위안이 될까 두려움이나 분노가 일게 될까. 승혜와 미오는 그냥 연인이었다. 사랑했고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함께 했지만 이제는 또 그 사랑이 걸림돌이 되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한다. 유치하게 삐지고 미워하지만 알고 싶어하는 마음도 그만큼이다. 나는 아직 그들을 모르지만 그가 가진 마음은 내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걸.. 그리고 모르는 만큼 알 수도 있을거같은 마음

그들은 그냥 보통의 커플일 뿐이다.

 

가족이지만 가장 깊은 마음은 서로 말하지 못한다. 타고난 내가 나로 살지 못한 삶을 그만두고 성별을 바꾸고 싶어하는 둘째,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지만 외롭고 강하지 않은 마음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첫째와 아이들을 사랑하고 이해하지만 내 이해범위 밖에 있는 아이들을 어쩌지 못해 병을 가진 엄마는 서로의 가장 깊은 상처는 결국 드러내지 못한다. 더 깊은 상처가 있다는 걸 짐작하지만 애써 모른 척 한다. 내가 할 수 있는게 없으니까. 그리고 나도 아파서 남의 상처를 관여하고 싶지 않고 제발 상대는 저절로 나아서 무탈하길 바라는 이기심도 있고 그렇다.

가족이어서 멀어지고 싶어도 가까이 갈 수 있는 것.. 가깝지만 언제 멀어져도 괜찮을 수 있는 조금 외롭지만 견뎌야 하는 마음이 마흔 셋에 담겨있다.

 

선한 의지는 누구나 원하는 것인데 그 선한 의지는 의외로 아니 당연하게 강하지 않다.

이런 선한 이웃을 만난다면 나도 겁을 먹을 거고 방어할 것이고 불편할 거 같다. 그래서 선한 이웃을 만나는 건 너무 어렵다.

 

작고 상처받기 쉬운 마음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며 그 입장을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섬세하고 예민한 그 촉수 때문에 상처를 많이 입지는 않을까

그의 책을 더 이상 보고 싶은데 더 볼 수 없다는 게..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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